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3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3권 4장 의역 (완) (해 뜨기 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6. 27. 20:23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3권 4장 해 뜨기 전


          
4장 개괄

 

 

4장은 차라투스트라가 올바른 이해를 얻으려면 어떤 방법을 거쳐야 하는지 설명하는 장이다.

3장과의 개연성이 크게 있다고 보여지지는 않아, 올바른 이해를 얻는 방법을 제시하는 단편적인 장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차라투스트라는 하늘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이 하늘은 태양이 떠오를 수 있는 바탕이 되어주는 것이다.

즉 하늘이 있기에 태양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태양은 차라투스트라와 같이 빛을 선사하는 자, 올바른 이해를 나누는 자이므로, 차라투스트라가 올바른 이해를 나눌 수 있게 만들어준 것이 하늘이 된다.

이렇게 따지게 되면, 「차라투스트라, 서문 1장」에서의 태양이 여기서는 하늘로 표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이해가 누군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해당 문제에 대한 맥락에 맞추어 사색하고 탐구하여 나온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사회에서 제공하는 것들, 맥락을 무시하는 고정된 가치와 규율은 그릇된 이해인데, 올바른 이해인양 작용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맥락에 따라 파악하는 탐구법에 대한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전해지면, 오용될 여지가 있다고 보며, 말을 마치게 된다.

즉, 맥락에 맞춰서 해석하면 올바른 이해로 여겨져서 그릇된 이해가 맥락에만 맞춰 올바른 이해가 되는 현상이 생길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본문

 

 

아, 제 위에 존재하는 하늘*, 즉 이데아여,

이것은 무엇보다도 순수합니다.

그래서 순수하게 인식하려고 하지 않으면 인식할 수도 없고,

깊게 보려고 하지 않으면 알 수도 없죠.

섬세한 감각을 지니지 않는다면, 잘 파악되지 않는 것입니다.

*본래 차라투스트라는 서문 1장에서 이데아를 태양으로 지칭했는데, 여기서는 하늘로 지칭한다.

 

저는 이 이데아를 보면서, 올바른 이해를 갖게 되고,

이러한 올바른 이해를 세상에 전파하고, 그렇게 이상 사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고양되어 전율하게 되는 것이죠.

 

이데아를 향해 나아가려고 하는 것,

그렇게 나아간 것이 저의 지적인 수준을 나타낼 것입니다.

 

이데아 속에서 내 존재가 동화되는 것,

이것은 나의 순수함을 드러내 줍니다.

 

신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숨기듯이, 이데아 당신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이데아를 추구하지도 파악하지도 않는 것이죠.

 

당신은 올바른 이해에 대해서 직접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저 섬세한 누군가가 보고 알아차리기를 바라죠.

저도 그렇게 알았으니까요*.

*서문 1장에서 차라투스트라는 태양을 통해서 성장하게 된다.

이때 태양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기에, 차라투스트라가 성장한 것이다.

 

오늘도 당신은 말없이 나타나 제게 계시를 전하는 듯합니다.

침묵으로 제게 모습을 드러내, 제가 생각하고 고민하여 알아차리라고 말입니다.

 

올바른 이해를 갖기 위해선 이러한 계시와 그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해석을 위해서 노력하는 자들만이 올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하늘

차라투스트라가 동굴에 있을 때, 그 동굴을 비추던 태양이 여기서는 하늘로 언급된다.


 

이데아, 올바른 이해의 원천이여

저는 처음부터 올바른 이해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이해가 거부되는 것을 보며 같이 슬퍼했고, 두려워했습니다.

 

저는 올바른 이해를 원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올바른 이해를 위해 노력하려고, 많은 말이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저 당신을 찾고 탐구하며 당신을 향해 웃을 뿐입니다.

 

당신은 제가 가진 지식들의 원천이 아닙니까?

저는 그러한 당신을 따르며, 당신이 주는 것과 같은 지식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을 통해서 저는 배웠고, 그래서 같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저는 성장했고, 올바른 이해/순수한 이해를 얻는 법을 배웠습니다.

 

세상에 부조리가 가득할 때에도, 저는 당신에게 배운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이상 사회를 그리며 웃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정도 성장하면서, 저는 홀로 떠돌기 시작했습니다.

더 많은 문제 속에서 올바른 이해를 얻어 성장하려고 말입니다.

여러 문제들 속에서 제가 찾았던 것은 올바른 이해, 당신 말고 누구겠습니까?

 

그렇게 성장하려 하고, 여러 문제들을 풀어나갔던 것.

이런 행동은 그저 올바른 이해를 늘 곁에 두려고 하는 제 의지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방랑하는 차라투스트라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이해를 구하고자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 떠돌게 된다.


 

올바른 이해를 방해하고, 그릇된 것이 올바른 것인양 말하는 것들.

저는 이것들을 가장 혐오했습니다.

 

제가 좌절하여 올바른 이해를 쫓는 제 운명을 증오한 적이 있었는데, 이런 제 자신도 혐오했습니다.

제 운명을 증오함으로써 올바른 이해의 가치를 더럽혔으니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올바른 이해를 방해하는 존재들에 대해서도 화가 납니다.

사람들이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릇된 이해를 떠받들게 하니 말입니다.

 

그릇된 이해를 올바른 것처럼 제시하는 자들,

애매모호하게 자신을 숨겨 참견하고 아는 체 할 뿐인 자들,

이런 자들에게 화가 나는 겁니다.

 

그릇된 이해가 올바른 이해인 양 취급당하는 것을 보느니,

그저 저는 홀로 올바른 이해를 구하는 게 낫겠다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릇된 이해를 올바른 이해인 양 말하는 자들을 제압하고 싶었습니다.

그들을 비판하고 내쫓고 싶었죠.

왜냐면 그들로 인해 사람들이 올바른 이해를 경시하고 그릇된 이해를 찬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렇게 애매모호하게 참견하고 아는 체하는 존재들보다 자신을 드러내고 토론하는 자들을 더 좋아합니다.

 

이들을 보면서 저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사람들이 올바른 이해를 갖게끔 할 수 없는 자라면, 차라리 사라지길 바라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이 깨달음은 늘 제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올바른 이해를 갖기를 바라고, 올바른 이해가 이 세상을 지배하기를 바라는 자입니다.

그런 세상을 긍정하는 자이죠.

 

저는 올바른 이해가 세상에 자리하기를 바라며 오랫동안 부조리와 싸웠습니다.

그러면서 올바른 이해가 부조리를 걷어내고 이 세상에 충만하기를 축복하고 바랍니다.

혹시라도 이렇게 축복하는 다른 누군가가 있다면, 그에게 행복이 있기를!

 

어두운 구름이 낀 하늘

구름은 맑은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이런 점에서 올바른 이해를 막는 그릇된 이해를 상징한다.


 

모든 것은 본래 선악의 잣대에 벗어나 있습니다.

선악은 그저 모든 것의 본래 성질에 덧붙여진 것들이죠.

 

    “모든 것은 맥락과 상관없는 어떤 고정된 가치와 질서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순간순간의 맥락 속에서 가치를 배정받고 질서를 이룬다”

제가 가르치는 이것은 올바른 이해가 세상에 자리하기를 바라면서 이야기하는 것이지,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연, 즉 맥락 속에서 지혜가 나타난다는 것.

이것은 세계를 관통하는 가장 오래된 진실입니다.

나는 이것을 세상에 알려주려고 했고, 이로써,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 고정된 가치와 질서에서 세상을 해방시켰습니다.

‘맥락을 무시하는 고정 불변의 가치는 없다’는 것,

맥락 속에서의 가치를 중시해야 한다'는 것.

이것을 사람들에게 전한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혜와 통찰, 올바른 이해는 고정 불변의 가치와 규율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이해는 맥락에 대한 통찰에서 나오며,

이를 위해서는 이성이 필요하긴 하지만, 어떤 정형화된 가치를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불어서 상황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사회에서 말하는 가치와 규율을 따르지 않아도 지혜가 가능하다는 것,

지혜라는 건 맥락을 이해할 때 드러난다는 것,

저는 일체의 것들에서 이것을 확인했고, 이것이 옳다고 확신합니다.

 

오, 저를 성장시켰던 올바른 이해의 원천이여,

맥락을 무시하는 지혜, 고정 불변의 지혜는 없다는 것.

맥락 속에서 '지혜, 즉 올바른 이해'가 제공된다는 것.

이것이야 말로 당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것이 언급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올바른 이해에 대한 특징을 알게 되면, 그것을 악용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사람들은 정형화된 틀을 만들고, 이 틀을 통해서 세상을 파악하고 평가하려고 하는데,

세상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온갖 말을 하고 있으니, 모두가 올바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 올바른 이해의 원천이여,

이제 사람들이 오고 있으니, 이 비밀을 간직한 채로 헤어지도록 합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아침

해가 떠오르며 차라투스트라는 하늘과 대화하기를 멈춘다.


생각해볼 거리들

 

왜 하늘은 무엇을 말하나?

ㅡ여기서 언급되는 하늘의 경우, 후술되겠지만, 차라투스트라에게 지혜를 알려주는 것이며, 차라투스트라가 얻고자 갈구하는 것이다.

ㅡ이러한 특징으로 볼 때, 「차라투스트라, 서문 1장」에서 나온 태양과 비슷하다.

ㅡ이 태양 역시 사람들에게 온통 빛을 비추지만, 그 중에서도 빛을 이해할 능력이 있는 차라투스트라만이 그 빛의 혜택을 보게 되는데, 여기서도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그대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내게 그대의 지혜를 알려준다.

     (중략)

     그대의 아름다움으로 몸을 가린 채 아름답게 내게 다가왔고, 그대의 지혜를 드러내며

     침묵으로 내게 말을 한다.

ㅡ이처럼 지혜를 드러내 보이긴 하지만, 알려주지는 않으므로, 탐구자 스스로가 현상을 보고 사색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ㅡ이는 서문의 태양과 같은 특징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ㅡ서문에서 태양을 통해 차라투스트라가 올바른 이해를 갖추고 사람들에게 앎을 나누려고 했듯이, 여기서도 차라투스트라는 이 하늘을 통해서 지혜를 얻는다.

ㅡ그런 점에서 하늘은 올바른 이해를 갖게 도와주는 것, 올바른 이해의 원천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차라투스트라, 서문 1장」의 태양에 맞춰 보면, 이데아로 이해도 가능하다.

 

ㅡ또한 하늘을 천상의 것으로 볼 수도 있는데, 맥락상 여기서의 하늘은 대중들이 바라는 하늘이 아니다.

 

왜 하늘은 깊은 자인가?

ㅡ하늘이 올바른 이해를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가볍게 사색한다고 해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깊이가 있다고 표현하는 것 같다.

 

왜 하늘은 빛의 심연인가?

ㅡ하늘이 올바른 이해를 제공해주는 것/이데아라고 본다면, 이것은 우리가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ㅡ그러므로 우리가 쉽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이야기고, 결국 사색을 통해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될텐데, 이는 곧 추론을 통해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ㅡ즉 우리가 마주 볼 수 없는 상태, 바라볼 수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ㅡ이는 곧 어둠 속에서 찾아내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따라서 이 하늘은 어두운 곳으로 생각할 수 있다.

ㅡ하늘의 이러한 면을 빛이 빨려들어가 어두운 곳이라는 의미에서 빛의 심연이라 할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하늘을 바라보며 신적인 욕망에 몸을 떠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이해를 얻으면서 올바른 이해를 세상에 구현하고자 하는 욕망에 빠지게 된다.

ㅡ그것이 이상 사회의 구현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하늘의 높이로 자신을 던져 올리나? 왜 그것이 차라투스트라의 깊이인가?

ㅡ하늘이 올바른 이해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차라투스트라가 그것을 향해 던져지는 것은 올바른 이해를 얻으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ㅡ그리고 차라투스트라가 도달한 위치가 차라투스트라의 지적 수준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ㅡ그런 면에서 하늘의 높이로 던져진 수준이 차라투스트라의 깊이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하늘의 맑음 속에 차라투스트라르 숨기는 것은 왜 차라투스트라의 무죄인가?

ㅡ우선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무죄라는 표현은 순수함이라고 표현해야 맞다.

ㅡ이는 번역상의 용어 선택에서 비롯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ㅡ어쨌든 하늘의 맑음 속에 차라투스트라가 숨겨진다는 것은 차라투스트라가 하늘의 맑음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는 곧 하늘의 일부분으로서 작용한다는 것일 수 있다.

ㅡ즉 차라투스트라라는 존재가 올바른 이해에 부합되는 것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차라투스트라가 올바른 이해를 하는 통찰력을 지녔다는 것을 의미한다

ㅡ그만큼 참된 탐구자라는 것인데, 이것이 차라투스트라의 순수함으로 표현된 것이다.

 

신의 아름다움이 신의 모습을 가리듯, 그대는 그대의 별을 숨긴다고 하는데, 이게 무슨 말인가?

ㅡ이 부분은 오역으로 보인다.

ㅡ해당 구절은 “Den Gott verhüllt seine Schönheit: so verbirgst du deine Sterne.”의 번역인데, 이는 “신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감추듯, 자신의 별을 감춘다”로 해석될 수 있다.

ㅡ이에 따라서 보면, “신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데, 이처럼 하늘도 자신의 별을 드러내지 않는다”라는 이야기가 된다.

ㅡ이는 이후 말하지 않음으로써 지혜를 알려준다는 의미와 연결될 수 있기에, 이러한 해석이 더 적절해 보인다.

ㅡ즉 올바른 이해의 원천은 탐구자가 사색해서 도달하게 하지, 탐구자를 지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ㅡ다르게 말하면, “신이 숨긴 아름다움, 하늘이 숨긴 별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만 찾아 볼 수 있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ㅡ이는 올바른 이해에 대한 니체의 기존 입장과도 일맥상통한다

.

말하지 않음으로써 지혜를 알려준다는 것은 가능한가?

ㅡ생각을 해보면, 답을 알고 있는 자가 답을 알려주지 않는데, 탐구자가 이 답을 알아낼 방법이 있을까?

 

ㅡ이를 알려면 탐구의 과정을 좀 면밀히 볼 필요가 있다.

ㅡ하늘은 올바른 이해의 원천이다.

ㅡ이 원천에 따라서 올바른 이해가 세상 속에서 현상으로 드러나게 된다.

ㅡ그러면 탐구자들은 현상을 살피게 되는데, 이때 자신의 지적 능력의 한계나 탐욕 등의 여러 요인으로 인해서 현상을 왜곡하고 잘못 받아들이는 일이 생기게 된다.

 

ㅡ어쨌든, 현상 해석을 왜곡하게 되면, 이 해석이 다른 조건의 동일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현상이 생긴다.

ㅡ이러한 해석 불가를 통해서 탐구자들은 자신의 답이 옳은지 그른지를 파악해 나가게 된다.

ㅡ이 역시도 현상 자체가 알려주는 것이 아니기에, 해석이 불가능함을 못보고 놓칠 수 있다.

ㅡ그러므로 결국 탐구자 본인의 엄밀성에 의존하여 나아갈 수밖에 없다.

ㅡ즉 지혜의 원천은 탐구자에게 어떤 것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탐구자 스스로가 파악해 나가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하늘이 포효하는 바다 위로 떠올랐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하늘의 사랑과 수줍음은 차라투스트라에 어떤 계시를 전하나?

ㅡ하늘이 올바른 이해의 원천을 말하고, 바다가 세상을 말한다고 하자.

ㅡ바다가 지금 포효하고 있는 상황, 세상이 무언가 강하게 어필하고 있는 상황에서 하늘이 떠올랐다는 것은 올바른 이해를 차라투스트라에게 주려고 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그러므로 차라투스트라는 하늘이 자신에게 계시를 전한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에게 정확히 어떤 계시를 전하는지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하늘의 아름다움으로 몸을 가린 채 차라투스트라에게 왔고, 지혜를 드러내며 침묵으로 말을 한다는 건 뭘까?

ㅡ이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끔 자신에게 드러난 것이 아니라, 차라투스트라 본인이 사색하고 탐구해서 올바른 이해를 갖춰야 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ㅡ과연 하늘이 무엇을 제시하는 것인지는 알기가 어렵다.

 

하늘은 왜 수줍음을 가지고 있고, 차라투스트라는 왜 헤아릴 수 있다고 말하나?

ㅡ하늘이 올바른 이해의 원천이라고 한다면, 하늘이 차라투스트라에게서 떠오른 것은 올바른 이해를 주려고 차라투스트라를 찾았다고 할 수 있다.

ㅡ이는 올바른 이해를 가지는 조건에 대해서 논하는 걸로 볼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는 고독한 자이고, 이 하늘은 고독한 자에게 나타났다.

ㅡ이는 곧 고독한 자에게 올바른 이해가 주어질 수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이해가 고독한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ㅡ고독한 자에게 올바른 이해가 주어지는 것은 생각해보면 간단한데, 사색할 시간이 많은 자에게 올바른 이해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고독과 사색이 비례하는 건 아니지만.

 

왜 하늘은 해뜨기 전에 차라투스트라르 찾았다고 하나?

ㅡ이는 후술되는 낮이 되어 헤어지는 이유와 관련되는 구절로 보인다.

ㅡ낮은 사람들이 활동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고, 해 뜨기 전은 사람들이 아직 잠들어서 활동하지 않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ㅡ그런 점에서 후에 낮이 되어 헤어지는 이유를 생각할 때 고려할 만하다.

 

차라투스트라와 하늘은 왜 처음부터 벗이었나?

ㅡ차라투스트라가 본래 올바른 이해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와 하늘은 왜 원망과 공포 바탕도 함께 나누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면서, 올바른 이해가 대우받고 무시받음에 따라서 감정적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와 하늘은 왜 서로 많이 아나? 왜 굳이 말을 나누지 않나?

ㅡ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이해를 바라는 존재이다 보니, 올바른 이해의 입장에선 차라투스트라에게 자신을 바라보고 도와달라고 말할 이유도 없고, 그냥 지금 그대로 있어주면 된다는 입장이 생기게 될 수 있다.

ㅡ어떻게 보면 마음이 잘 맞는 관계이기 때문에, 별도의 말이 필요없는 것이다.

 

왜 하늘은 차라투스트라의 타오르는 불에게 빛인가?

ㅡ차라투스트라의 불의 빛이라는 이야기로 볼 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하늘에게서 받은 걸 빛으로 발산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ㅡ즉, 하늘이 올바른 이해의 원천이라면, 차라투스트라는 하늘에게서 올바른 이해를 얻고, 그에 따라서 그것을 발산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ㅡ이런 점에 따른 구절로 보인다.

 

왜 하늘은 차라투스트라의 통찰과 한 자매인 영혼을 지니나?

ㅡ이는 하늘이 차라투스트라에게 올바른 이해를 제공해주었고, 차라투스트라가 그것을 이해하여 자신의 앎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ㅡ그러므로 하늘과 차라투스트라는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는 상태가 된다.

ㅡ이를 한 자매라고 표현한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와 하늘은 함께 배웠나?

ㅡ차라투스트라가 하늘을 통해서 배웠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자신에게 상승하는 법과 구름 한 점 없이 웃는 법을 배웠다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이해를 갖추면서, 성장하게 된다.

ㅡ이를 자신에게로 상승한다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ㅡ또한 구름은 하늘의 빛, 올바른 이해를 가리는 것,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ㅡ그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이해를 갖추고 웃는 법을 배웠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볼 수 있다.

ㅡ후술되기는 하지만, 여기서 부정적인 것/구름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부조리로 인한 절망이라 생각되어진다.

 

발 아래서 강제와 목적과 죄라는 것이 김을 내뿜었다고 하는데 뭘 말하나?

ㅡ강제와 목적과 죄는 사회적/종교적 규율의 특징을 나타낸다.

ㅡ즉 모두 강제하고, 특정한 것을 목적하게 하며, 규율에 따르지 않으면 죄가 되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사회적 규율, 부조리가 횡행한 상태를 말한다.

 

밝은 눈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래를 바라보며 구름 없이 웃었다는 건 뭘 말하나?

ㅡ부조리가 횡행하는 순간에도 먼 미래를 바라보며 절망없이 웃었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여기서 멀리 떨어진 곳은 미래를 나타내며 이상 사회를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ㅡ구름없이 웃었다는 것은 부조리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웃었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홀로 방황했나? 이때 차라투스트라는 왜 하늘을 갈구했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이해를 얻기 위해서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서 다녔다.

ㅡ이를 홀로 방랑했다고 표현하는 걸로 보인다.

 

ㅡ하늘은 올바른 이해의 원천이므로, 차라투스트라의 이러한 방랑은 당연히 하늘을 올바른 이해를 갈구하면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의 방랑과 산오르기는 뭘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올바른 이해를 얻기 위해서 사회적 규율을 벗어난 것과 그렇게 맞닥뜨린 문1제들에서 올바른 이해를 얻는 것을 말한다.

ㅡ산에 올랐다는 것은 어떤 문제에서 올바른 이해를 발견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하늘의 품속으로 날아드려고 방랑하고 산에 올랐다고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이해를 얻고자 하므로, 이를 위해서 방랑하고 산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의 의지가 원하는 것은 나는 것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규율을 벗어나서 올바른 이해 속에서 살고자 했다.

ㅡ여기서 규율을 중력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올바른 이해는 중력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므로, 하늘을 나는 것으로 묘사가 가능하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떠도는 구름과 하늘을 더럽히는 것 일체를 혐오하나?

ㅡ구름은 하늘을 가리는 것이자, 하늘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ㅡ하늘이 올바른 이해의 원천이라고 한다면, 하늘을 가리는 것은 올바른 이해의 원천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이는 그릇되면서 올바른 것인양 하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ㅡ즉 구름은 이상한 궤변을 하며 그릇된 것을 올바르다고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ㅡ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차라투스트라로서는 이러한 존재는 혐오의 대상이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자신의 증오마저 혐오했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앞서 사람들 사이에서 좌절하면서, 올바른 이해의 추구를 포기하려고 했었다; 「차라투스트라, 2권 22장」.

ㅡ이러한 자신을 혐오했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왜냐면 이때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 덧없다고 인식하고 행동했기 때문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떠도는 구름, 살금살금 다니는 고양이들에게 화가나나? 제한 없는 긍정과 아멘의 말을 앗아간다는 게 뭘 말하나?

ㅡ떠도는 구름과 고양이는 그릇된 것을 올바르다고 하는 자들이자, 몰래 숨어있다가 나타나서 참견하고 아는 체하는 존재를 말한다; 고양이에 대해서는 「차라투스트라, 2권 15장」을 참고하자.

ㅡ이런 존재들은 사람들이 올바른 이해에 대한 추구하지 못하게, 그릇된 이해를 추구하게 하기 때문이다.

ㅡ그래서 올바른 이해를 긍정하지 못하게 하는데, 이를 긍정과 아멘을 앗아간다고 표현 한 것이다.

 

축복도 저주도 못하는 어중이떠중이는 무얼 말하나?

ㅡ축복과 저주에 대해서는 「차라투스트라, 1권 19장」을 참고하면 좋다.

     그리고 그대들을 저주하는 누군가를 축복하려 하지 마라.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같이 저주하라!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적에게 축복하지 말고 차라리 저주하라고 하는데, 지금 이 어중이떠중이들의 경우, 축복도 저주도 못한다.

ㅡ여기서 말하는 축복과 저주는 상대가 무슨 말을 해도 축복하거나 아니면 그냥 저주해버리는 걸 말하는데, 어중이떠중이들은 올바른 이해를 수용해주는 것도 아니고 비판하는 것도 아닌 이상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ㅡ올바른 이해를 두고 수용도 비판도 안 한다는 것은 옆에 와서 참견하거나 몰래 와서 지적하고 사라지는 태도를 말한다.

ㅡ이는 숨어서 아는 체하고 참견하는 존재의 특징을 말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구름에 의해 하늘이 더럽혀지는 것을 보느니 닫힌 하늘 아래 큰 통 속에 있겠다고 하나?

ㅡ이는 그릇된 이해가 올바른 이해로 취급당하는 걸 보느니 차라리 혼자 고독 속에서 탐구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구름을 번개의 황금줄로 묶어둔다는 것은 무얼 말하나?

ㅡ그릇된 이해를 외치는 자들을 올바른 이해로 제압하고 싶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예리한 번개의 황금줄은 올바른 이해인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천둥이 되어서 구름의 배를 두들기고 싶어하나?

ㅡ앞서 올바른 이해로 제압하고 싶어하는 모습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고양이보다는 소음과 천둥과 폭풍의 저주를 원하나?

ㅡ고양이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살금살금 나아가는 고양이로, 이들은 숨어있다가 지적할 거리가 생기면 나와서 지적하고 사라지는 행동을 보인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러지 말고 나와서 토론을 하든 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ㅡ왜냐면 고양이와 같은 자들은 진지하게 토론하지 않고, 상대가 반박을 하든 못하든 자신이 지적했다는 것에 만족하곤 하기 때문이다.

 

“축복할 줄 모르는 자는 저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은 어떻게 보아야 하나?

ㅡ이 구절은 “축복을 할 줄 모르면 저주하는 법을 배우라”는 이야기로 보이지는 않는다.

ㅡ「차라투스트라, 1권 9장」을 보면,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이 사라지길 바란다고 저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와 관련된 표현으로 보이는 것이다.

 

ㅡ”축복할 줄 모르는 자”는 축복한다는 것은 올바른 이해를 축복한다는 것으로 보이므로, “올바른 이해를 긍정하고 축복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이라는 의미로 해석해볼 수 있을 듯하다.

ㅡ”이러한 자를 저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저주하는 것은 빨리 죽기를 바라거나 망하기를 바라는 것일 테다.

ㅡ즉 “올바른 이해를 긍정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그런 자를 두고 노력하기 보다는 빨리 사라지기를 바라야 한다, 저주하는 게 낫다”는 이야기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하늘이 둘러싸고 있으면 축복하는 자이자 그렇다라고 말하는 자인가?

ㅡ하늘은 올바른 이해를 제공하는 것이므로, 차라투스트라가 이 올바른 이해를 부정하지 않고 있다면, 올바른 이해가 앞으로 세상에 널리 퍼지길 바랄 것이다.

ㅡ그러면서 올바른 이해를 긍정하고 다니게 될 것이다.

ㅡ이러한 자신을 하늘을 축복하고 그렇다라고 긍정하는 자로 표현한 것 같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오랜 시간 고투했던 투사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이해를 추구했던 자로서, 올바른 이해가 좋은 앞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올바른 이해를 위한 사회를 만들려고 부조리에 맞섰다.

ㅡ그런 점에서 투사라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내리는 축복은 무엇인가?

ㅡ차라투스트라가 내리는 축복은 하늘이 모든 것 위에 자리하는 것, 즉 만물이 올바른 이해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ㅡ그래서 이것이 지붕으로서 표현이 되고, 고유한 하늘로서 불린다.

 

ㅡ영원한 보증의 경우 명확하지 않지만, 보증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Sicherheit로, 보증보다는 확실성이 더 맞지 않나 싶다.

ㅡ영원한 확실성으로 보고 본다면, 영원히 확실함/올바른 이해를 담보하는 것이 되어주길 바란다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영원의 샘터에서 선악의 저편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건 뭘 말하나?

ㅡ모든 것의 가치는 맥락과 상관없이 고정된 규범에서 생기는 게 아니란 이야기다.

ㅡ영원의 샘터는 후술되겠지만, 우연/맥락으로, 우연 속에서/맥락 속에서 가치를 부여받는다는 것으로 보여 진다.

 

선악은 왜 중간에 끼어든 그늘인가?

ㅡ애초에 선악의 고정된 평가는 본래 행위나 만물이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ㅡ그래서 선악은 행위나 만물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 여겨진다.

 

“모든 것 위에 우연, 무죄, 뜻밖의, 신나서 들뜬 하늘이 있다”는 건 뭘 말하나?

ㅡ모든 것을 올바르게 평가하고 판단함에 있어서, 우연/무죄(순수)/뜻밖의/신나서 들뜸이 있다는 것이다.

 

ㅡ우연이나 뜻밖의의 경우, 어떤 맥락 속에서 평가가 주어지는 것을 말한다.

ㅡ우연 속에서 가치가 형성되고, 뜻밖의 상황에서 가치가 변동되곤 하기 때문이다.

 

ㅡ무죄라는 것은 순수를 나타내는 것의 오역인데, 모든 것의 가치를 기존의 가치에 따르지 않고 자신이 느낀대로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또 신나서 들떴다는 것은 엄중하지 않음을 나타내는데, 이는 교조주의의 교리에 대한 엄중함과 반대된다.

ㅡ즉 교리에 따르지 않고 판단할 때 올바른 판단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관련해서는 「 유고 (1882년 7월~1883/84 겨울)」의 다음 구절들을 참고하자.

     해뜨기 전

     20[14]

     나는 만물에서 교만을 발견했다. 나는 그것을 신적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 교만을 내 영

     혼 속에서도 발견했다.

     나는 이 지혜의 교만을 만물에서 발견했고 그것이 모든 사물에게 바보들의 발로 걷도록

     명령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가능한 적은 이성, 그것 이상의 것을 이 지혜는 전답을 돌고 온종일 자신의 밭을 갈 때 자

     신의 배낭에 집어넣지 않는다.

     우연의 발로 만물은 지혜를 향해 달려가고 달려온다.

     ㅡ이 지혜가 만물을 오직 우연을 통해서만 조종하기 때문에 그것은 확신에 차 있고 행복

     하다.

 

     17[62]

     그대를 깊이 뿌리 박아라—새로운 의무로

     그가 자신의 친구를 구할 때, 우연에 대한 찬양

     행복 대신 오래 지속되는 의지에 대한 교설

     낡은 가치들은 파괴되어야 한다.

 

뜻밖에는 왜 세상에서 가장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인가?

ㅡ뜻밖에는 기존과는 다름을 말한다.

ㅡ이는 해당 시점만의 고유성을 말한다.

ㅡ이러한 의미는 우연의 의미와 크게 유사하다.

 

ㅡ어쨌든 우연과 뜻밖이라는 개념은 어떤 고정 불변의 잣대를 무용지물하게 만드는 것이다.

ㅡ이를 통해서 기존 질서/규율의 무의미함을 드러낸다.

 

ㅡ그런데 사회는 이런 무의미한 기존 질서와 규율을 따르라고 하므로,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엔 부적절하다.

ㅡ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기존의 질서와 규율의 문제를 개선하려고 노력하고, 그래서 자신이 모든 것이 목적에 예속된 상태를 구원해주었다고 말한다.

ㅡ여기서 목적이란 기존 질서와 규율에 따르는 것을 말한다.

 

ㅡ뜻밖과 우연은 차라투스트라에게 있어서 부정적인 개념인데, 여기서는 긍정되고 있다.

ㅡ이런 점은 유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어떤 영원한 의지도 만물 위에 군림하거나 만물을 꿰뚫기를 원치 않는다”고 가르치나?

ㅡ이는 맥락을 무시한 절대적 가치/규율은 없다는 것을 말한다.

ㅡ사회는 맹목적으로 가치와 규율을 따르게 하는데, 이를 비판하는 것이다.

 

왜 모든 것에 있어서 가능하지 않은 것을 이성성이라고 하나?

ㅡ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여기서 이성성은 맥락을 무시한 이성적 사고/교조적 사고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현재 맹목적인 규율을 지적하고 있으므로, 이 맹목적인 규율을 형성하는 이성성을 지적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영원한 의지의 자리에 왜 신난 들뜸과 바보스러움을 앉혔나?

ㅡ현재 교조적 사고를 지적하는 것으로 보이며, 신난 들뜸의 경우, 앞서 말한 것처럼 엄중하지 못함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교조적 사고가 무가치하다고 지적하면서, 교조적 사고를 벗어난 자유로운 사고, 교조주의에서 말하는 바보스러움 교리에 따르지 않음을 올바른 판단의 기준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왜 모든 것에는 약간의 이성과 흩어진 지혜의 씨앗이 섞여 있나?

ㅡ모든 것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여기서 이성은 어떤 단편적 지식을 말한다면, 흩어진 지혜의 씨앗은 모아야 지혜를 이루는 특징을 설명한다고 할 수 있으므로, 맥락적 사고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즉 지식과 더불어 맥락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올바른 이해, 지혜를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로 보여 진다.

 

왜 바보스러움을 위해 지혜는 모든 것에 섞여 있다고 하나?

ㅡ여기서 말하는 바보스러움은 교리를 따르지 않은 것을 말한다.

ㅡ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이 바보스러움을 올바른 이해를 위한 것으로 제시했다.

ㅡ즉 이 바보스러움, 교리를 따르지 않는 것이 올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지혜라는 것이 맥락을 이해하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ㅡ이에 따라서 지혜가 모든 것/맥락들에 섞여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지혜가 우연이라는 발로 춤을 춘다고 말하나?

ㅡ여기서 말하는 우연은 일의 우연적 진행을 말하는 걸로 보인다.

ㅡ즉 우연한 일들의 연속을 바라봄으로써 우리가 그 일과 관련된 지혜, 올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ㅡ기존의 경우, 우연한 일들 속에서도 고정된 가치관에 따라서 해당 일을 평가하고 이해하였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힌 이성과 그에 따른 거미줄이 없다는 게 하늘의 맑음이라고 하나?

ㅡ하늘은 올바른 이해를 주는 것으로, 해당 구절은 올바른 이해는 어떤 교조적 사고가 불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ㅡ즉 이것이 올바른 이해에 대한 올바른 통찰이란 것이다.

ㅡ여기서 맑음은 순수함으로 대체될 수 있는데, 하늘의 순수, 하늘에 대한 순수한 이해로 해석 가능하다.

ㅡ하늘을 올바른 이해라고 본다면, 올바른 이해에 대한 순수한 이해/정확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에게 하늘은 신적인 우연을 위한 춤판인가?

ㅡ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살펴보면 이렇다.

 

ㅡ우연을 살피면서 인간은 각 순간에 따른 올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다.

ㅡ그런데 순서를 따지면, 이러한 우연은 어떤 원천되는 것에 의해서 나타나고, 이 우연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올바른 이해를 가지게 된다.

ㅡ따라서 이 우연이 생겨나려면, 어떤 원천되는 것이 작용해야 한다는 이야긴데, 앞서 말한 것처럼 올바른 이해의 원천이 하늘이므로, 하늘로 인해서 우연들/현상들이 생긴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ㅡ즉 이 논리에 따르면, 하늘은 이데아를 지칭하는 것이 된다.

 

ㅡ정리하면, 이데아가 있어서 현상들이 생기고, 이 현상들을 보면서 인간은 올바른 이해를 갖게 된다는 이야기다.

ㅡ현상이 있으려면, 우연이 선행되어야 하고, 춤을 추기 위해선 춤판/무대가 있어야 하므로, 이러한 표현이 나타나는 게 아닐까 싶다.

 

왜 하늘은 신적인 주사위와 주사위놀이를 하는 자를 위한 신의 탁자인가?

ㅡ이 구절은 하늘이라는 것이 주사위 놀이가 아니라는 점을 알려준다.

ㅡ즉 주사위이기도 하고, 주사위 놀이를 하는 탁자이기도 한 것이다.

 

ㅡ신이 주사위 놀이를 하면서 운명이 나타난다고 한다면, 주사위와 이를 위한 탁자는 운명을 구현하는데 필요한 도구들이라고 할 수 있다.

ㅡ즉 앞서 살핀 것처럼 어떤 현상을 유발하는 기초 구성이고, 이는 역시 이데아로 해석해봄직하다.

 

갑자기 왜 차라투스트라는 하늘이 낯을 붉힌다고 말하나? 왜 낮이 다가오니 침묵하고 떠나라고 명한다고 하나?

ㅡ이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차라투스트라가 올바른 이해의 방식에 대해서 말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ㅡ니체는 이러한 것을 사람들이 알아선 안 된다고 보는 듯한데, 관련해서는 다음 구절을 참고하자; 「유고 (1882년 7월~1883/84 겨울)」

     지혜의 이러한 오만을 나는 모든 사물에서 발견했다.

     즉 지혜는 모든 사물에게 바보들의 발로 걸을 것을 명령한다.

     가능한 한 적은 이성, 그 이상의 것을 이 교만한 지혜는 자신의 밭을 갈고 전답 위를

     걸을 때 배낭에 가져가지 않는다.

     가능한 한 <적은> <이성>—그것은 더 우아하게 말하자면 우연이다.

     우연의 발로 모든 사물은 떠나고 되돌아온다

 

     행복과 순수는 지상에서 가장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사람들이 자신을 찾기를 바라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것을 소유해야만 한다—더 나아가 사람들은 자신이 그것을 소유하고 있

     다는 사실을 절대로 알아서는 안 된다.

ㅡ이처럼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올바른 인식과 관련해서 너무 지나치게 아는 것이 좋지 않다고 보는 듯하다.

ㅡ이에 따라서 이를 숨겨야 하는데, 하늘이 이를 논하기 부끄러워한다고 하면서 말을 급히 마무리 짓는 듯하다.

 

낮은 무엇을 말하나?

ㅡ앞서 이야기했지만, 동트기 전에 하늘과 마주한 차라투스트라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다.

ㅡ이때 차라투스트라는 홀로 있는 고독한 자다.

ㅡ동트기 전이므로 사람들은 활동을 하지 않을 것이고, 낮이 다가오면 사람들이 점차 나타날 것이다.

ㅡ이런 점에서 낮은 사람들이 나타나는 시간으로 보여 지며, 일반적인 사람들 사회에 잘 적응한 사람들을 나타내지 않나 싶다.

 

ㅡ그리고 “낮이 생각하는 것보다 세상이 더 깊다”고 표현하는데, 이 생각하는 낮이 누구인지 생각해 본다면, 세상을 깊지 않게 판단하는 자여야 하고, 그러한 자는 대중이라는 생각에 이를 수 있다.

ㅡ이러한 점에 따라 낮은 대중들, 일반적인 사람들이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