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3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3권 1장 의역 (완) (방랑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6. 24. 18:29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3권 1장 방랑자


           
1장 개괄
 

 
1장은 차라투스트라가 어떤 과제를 수행하러 나아가게 되는지 언급하는 장이다.

차라투스트라는 1권과 2권을 통해서 세상에 가르침을 설파하였지만, 결국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에 따라서 절망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설파는 지속하였지만, 이 가르침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선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 만족감 속에서 가르침을 이어 나가지 못하게 되고,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공허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벌어진 현 상황을 이해하고, 자신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나갈지 고민해야 한다.

1장은 이에 대해서 다루며, 자신의 운명을 이해하고 나아가기 위한 의지를 표명하고 다잡는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

 
 
어두운 밤, 사람들 곁을 떠난 차라투스트라는 섬의 산을 넘어 반대편에 있는 해안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거기서 배를 타고 섬을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해안에는 좋은 정박지가 있어, 배들이 많았고, 사람들을 벗어나려는 이들이 많았다.
 
산을 오르던 차라투스트라는 어릴적 했던 많은 고독한 방랑을 떠올렸다.
그렇게 얼마나 많은 것들을 접하고 생각했었는지 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속으로 말했다.
    “나는 성장하기 위해서 노력하며,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미숙한 채로 멈춰 있을 수 없다.
     내게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나는 성숙을 위해서 나아갈 것이다.
     결국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신에 따른 삶만을 경험할 테니 말이다.
 
     내 의지에 따라 살아오면서 일련의 사건들이 내게 펼쳐졌다.
     당시에는 그것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명확히 알 수 없는 <우연>의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우연>들을 통해서 나는 나를 이해하게 된다.
 
     살면서 이것저것을 바라보고 쫓지만, 결국 나는 나 자신에 맞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결국 일련의 경험들은 나를 알게 하는 것이다.
 

해안가의 정박지
고독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정박지로 나아간다.


 

     이제 나는 하나를 더 안다.
     나는 가장 오랫동안 나에게 남겨진 것, <운명>이라는 문제 앞에 서 있다.
 
     이제 나는 가장 험난한 길에 오른다.
     내게 가장 외로운 방랑이 시작한 것이다.
 
     나와 같은 사람은 그 순간*을 피할 수 없다.
     왜냐면 그 순간은 바로 성숙함의 극단, 위대한 존재로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을 겪음으로써 이해와 행위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절망을 주는 자신의 운명을 마주하고 이해하게 되는 순간을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운명에 따라 노력하였지만, 그 노력에 따라 이룬 것이 없다.
이에 따라서, 자신의 운명을 벗어나려 했지만, 벗어날 수 없어 운명을 이해하려고 하는 중이다.
그렇게 자신의 운명을 이해하고 긍정하게 된다면, 성숙의 극단에 이르게 된다.
이제 자신의 삶을 어떤 식으로든 긍정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기피하던 것*이 이제는 나의 유일한 안식처가 될 것이다.
     이제 더는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이 나의 용기가 된다.
     이제 아무도 나를 따라올 수 없다.
     이 길은 누가 알려준다고 해서 올 수 있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운명을 말한다.
자신의 운명을 이해하게 되면, 운명은 자신에게 안식을 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성장시켜주는 것이 없을 때, 나는 나 스스로 성장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 어떻게 성장할 수 있겠는가?

     나 스스로 노력하면서 내 사적인 열망과 감정을 넘어서야 한다.
     그렇게 쉽게 감정적으로 변하지 않은 존재가 되어야 성장하지 않겠는가?
     부드러운 존재가 아닌 단단한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을 너무 소중히 다루는 존재는 결국 그로 인하여 병들게 된다.
     그러니 나를 단단하게 하는 것을 찬양하라.
     나는 버터와 꿀이 흐르는 땅, 너무 풍요롭기만 하는 곳을 찬양하지 않는다.
      나를 유약하게 할 테니 말이다.
 
     많은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는 개인의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성숙하려는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만 파악하려고 한다면, 겉을 핥는 것 말고 무얼 더 파악할 수
     있을까?
 
     차라투스트라여,
     모든 것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했다면, 이처럼 자기 자신을 넘어서 전체를 조망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조망하는 것 중에 자신의 운명도 있어야 한다.
 
     그래, 나 자신의 운명을 내려다보고 이해하는 것,
     이것이 내가 고독으로 나아가는 이유이자, 내게 남은 마지막 의문의 산이다.”
 

가장 높은 산을 마주한 사내
삶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자신의 운명을 이해하는 것만큼 어려운 삶의 문제도 없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런 생각을 되뇌이며 산을 올랐다.
왜냐면 그는 이미 좌절을 경험했고,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 바다가 눈 앞에 펼쳐졌다.
그는 가만히 서서 오랫동안 침묵했다.
밤하늘은 차가웠지만 맑았고, 별들이 빛났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나는 내 운명을 안다.
     그래, 이제는 준비되었다.
 
     이제 내 운명을 이해하기 위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운명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시금 사색의 방황, 그 답답함 속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는 내 운명을 이해하기 위해서 서있다.
     운명이라는 것, 이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이것은 곧 이 문제를 다루며 더 깊게 오래 방황하게 될 것이란 이야기다.
     하지만 나는 내 운명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시금 방황할 수밖에 없다.
 
     나의 운명이 내가 이러길 바란다.
     나는 준비되었다.
 
     성숙한 자들은 깊은 통찰을 지닌다.
     통찰이 없다면, 우리는 그들을 성숙하다고 보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통찰해야 한다.”
 
찬 공기로 가득한 산 정상에서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정상에 오른 차라투스트라
운명을 거부할지 운명에 순응할지 고민하던 차라투스트라.
그는 운명에 순응하기로 결정하며 산의 정상에 오른다.


 
그는 계속해서 나아가, 바다 근처의 절벽 밑에 도착하였다.
지친 그는 홀로 서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전보다도 더 우울해졌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모든 것이 아직도 잠들어 있다*.
     이 세상은 아직 잠들어 있는 것이다.
     세상은 잠에 취해서 올바름을 전하는 나를 낯설게 바라본다.

*잠듦은 사회적 규율에 자신을 맡긴다는 의미도 갖는다.

 
     부조리함 속에서 세상은 그래도 아직 이상 사회를 바라고 있다.
     들어보자, 과연 세상이 무엇들로 신음하고 있는지
     부조리한 경험들로 신음하고 있는지, 부조리한 기대들로 신음하고 있는지*.
 *부조리한 경험은 부조리를 당한 것을 말하도, 부조리한 기대는 부조리를 행하려는 것을 말한다.
즉 사회가 세상이 부조리를 당해서 신음하는지, 부조리를 하려는 자들 때문에 신음하는지를 보자는 것이다.

     아 신음하는 세상을 보니 나도 슬퍼지는 구나.
     신음하는 세상으로 인해 나 자신에게 화가 난다.
 
     세상의 부조리를 끊어내기엔 나는 역부족이구나.
     나는 정말 이 세상의 부조리를 끊어내고 싶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면서,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아, 나는 어떻게 아직도 세상을 위로하려고 하는가?
     이 바보 같은 차라투스트라여, 너는 세상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구나.
 
     너는 늘 그래왔다.
     넌 부조리한 것들에 맞서서 계몽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나?
     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려고 했다.
     그렇게 부조리한 것들로부터 사람들을 유혹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고독한 자에게 사랑은 위험하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그들의 박애정신 말이다.
     사랑함에 있어 미련하고 순종적인 이들의 모습은 참으로 우습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웃었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의 생각이 성급했다고 느꼈다.
왜냐면, 그는 자신이 바보같이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위해 친구들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착잡해 하던 차라투스트라는 곧 비통하게 울었다.

 

고요한 바다

차라투스트라에게 바다는 세상을 말한다.


생각해볼 거리들

 
차라투스트라는 지복의 섬에서 왜 벗어나나?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지복의 섬은 무엇을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고 세력을 형성하려고 했다.
ㅡ이는 곧 이상 사회를 위한 영역을 고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비유한 것이 지복의 섬이라고 할 수 있다.
ㅡ그런데 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하다가 좌절했다.
ㅡ그러면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되는데, 이를 극복하려고 하다 보니 이상 사회를 위한 노력을 하지 못하게 된다.
ㅡ어떻게 보면, 이상 사회를 위한 노력과 자기 자신의 행복에서 자신의 행복을 선택한 셈이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방랑자이자 산을 오르는 자인가? 왜 평지를 싫어하며 한 자리에 가만히 있지 못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성장하려고 노력하는 자이고, 안주하지 않는 자이다.
ㅡ따라서 방랑자는 안주하지 않음을 말하고, 산을 오르는 자는 성장하려 함을 말한다.
ㅡ이에 따라, 평지는 성장하지 않음을 말하고, 한 자리에 가만히 있음은 안주함을 말하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에게 운명으로/체험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에는 방랑과 산 오르기가 있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성숙해지려고 하는 존재이기에, 안주하지 않고 성장하려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이게 된다.
ㅡ그래서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본다.
ㅡ즉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운명이 성장과 안주하지 않음과 함께 할 것이라는 것을 인지한 것이다.
 
인간은 왜 자기 자신만을 체험하나?
ㅡ인간은 결국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게 된다.
ㅡ이걸 해보니 이게 싫고, 저걸 해보니 저게 좋고 하는 것이다.
ㅡ이러한 체험에서 자신을 경험하게 되는 것인데, 이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왜 우연한 일들을 맞닥뜨릴 만한 시간은 지나갔다고 하나? 왜 내 자신의 것이 아닌 일이 내게 일어날 수 없다고 하나?
ㅡ우리가 살면서 어떤 일을 하고 좋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복되거나 하면서 실제로 좋아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ㅡ이런 것을 우연히 좋아했다고 말할 수 있다.
ㅡ그리고 세상에서 해볼 수 있는 경험을 많이 해본다면, 이제 우연히 좋아한다고 여길 기회도 없을 것이다.
ㅡ그런 면에서 차라투스트라가 많은 경험 속에서 자신의 취향을 알아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또 차라투스트라에게서 자신의 것이 아닌 일이 나타날 수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인간은 자신의 경험 속에서 타인의 취향을 파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ㅡ즉 개인은 자신의 경험 속에서 자신의 취향만을 파악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ㅡ관련해서 아래 구절을 참고해볼 수 있을 듯하다; 「유고 (1882년 7월~1883/84 겨울), 22=Z II 3a, 1883년 말」
          22[1]
               (중략)
          그대들이 사건과 우연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오류다!
          그대들 자신 외에 어떤 다른 것도 그대들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이 우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대들 자신이며, 그대들에게 우연히 일어나고
          그대들 위에 떨어지는 것은 그대들 자신인 것이다!
 
왜 그저 되돌아오나?
ㅡ개인이 활동하고 그에 따라 경험하면서,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오기 때문이다.
ㅡ즉 외부로 표출한 활동이 나 자신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서술한 것이다.
 
나 자신을 떠나 낯선 곳에서 온갖 것과 우연 사이에 흩어져 있던 것들이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ㅡ앞선 해석과 같은데, 인간이 행위를 하면, 그 행위는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
ㅡ이를 나 자신을 떠났다고 표현할 수 있다.
ㅡ즉 행위가 나라는 존재의 집 밖을 나가, 온갖 상호작용 속에서 있다가, 다시 내게 그 행위의 결과가 인식되는 것이다.
ㅡ이로써 개인은 자신의 취향에 대해서 파악하게 된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마지막 정상은 무엇인가? 자신에게 가장 오랫동안 유보되었던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후에 기술되겠지만, 자기 운명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
ㅡ즉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차라투스트라가 놓여져 있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정상과 심연이 하나로 연결되었다고 말하나?
ㅡ여기서 말하는 정상은 산의 정상을 말한다.
ㅡ산의 정상에 오른다는 것은 올바른 이해를 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ㅡ심연의 경우, 차라투스트라의 내면을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의지를 논하는 부분으로 보인다.
 
ㅡ즉, 정상과 심연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이해와 의지가 일치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는 것이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 2권 22장」에서도 언급이 되었다.
         "오, 차라투스트라여,
          그대의 열매들은 익었지만,
          그대 자신은 열매들에 어울릴 만큼 성숙하지 못했구나!
          그러니 그대는 다시 고독으로 돌아가야 한다.
          더 무르익어야 하기 때문이다."
ㅡ여기서 열매는 올바른 이해를 말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이해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의지를 갖지 못했다.
ㅡ올바른 이해에 따라서 행동하면, 포기할 것이 생기거나 피하고 싶은 일을 맞닥뜨려야 하기 때문에 쉽게 의지를 갖지 못한 것이다.
ㅡ즉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올바름을 포기하는 상황으로 볼 수 있고, 그래서 미숙한 상태로 취급된다.
ㅡ이를 위해서 차라투스트라는 나아가고 있다.
 
네 마지막 위험이라고 불리던 것이 이제는 너의 마지막 피난처라고 한 이유는?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고 싶어한다.
ㅡ그 이유는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자신의 모습은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고 고행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ㅡ하지만 결국 성장하려는 의지, 성숙하려는 의지는 차라투스트라를 자신의 운명으로 나아가게 한다.
 
ㅡ즉 차라투스트라에게 운명은 위험한 것이자 기피하던 것이었는데, 결국 차라투스트라의 의지에 부합하려면, 운명으로 나아가야 하게 되는 것이다.
ㅡ의지에 부합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차라투스트라를 건강하게 해주는 것이자, 안식을 취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ㅡ그런 면에서 차라투스트라에게 운명에 순응하는 것은 피난처가 된다.
 
네 뒤에 어떤 길도 없다는 것이 왜 최고의 용기인가?
ㅡ용기의 특징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이 여러 선택지가 있을 때는 주저한다는 것을 말한다.
 
왜 차라투스트라가 가는 길을 누구도 몰래 따라서는 안 되나?
ㅡ이는 차라투스트라가 가는 길을 누가 따라간다기 보다는 뒤따르는 자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로 보아야 한다.
ㅡ왜냐면 차라투스트라가 나아가는 길은 차라투스트라의 운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ㅡ각자는 각자 개인의 운명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지우고, 불가능이라고 쓰이나?
ㅡ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지운다는 것은, 차라투스트라가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의 발자취를 모두 남기지는 않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ㅡ다 기억할 수도 없고 말이다.
ㅡ그런 면에서 다른 사람은 완전히 차라투스트라와 똑같이 살 수 없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ㅡ같은 운명이 아니라면 말이다.
 
어떤 사다리도 없다면, 자신의 머리를 타고 오를 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ㅡ성장하려고 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없다면,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ㅡ즉 이전에는 타인들의 모습이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면, 지금은 자기 스스로를 검열하고 파악하면서 성장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머리를 딛고 심장을 넘어가라는 건 무얼 말하나? 부드러운 것도 단단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건 무얼 말하나?
ㅡ자신의 머리를 딛는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노력해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며, 심장을 넘어가라는 것은 자신의 감정에 의해서 판단을 그르지 말라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감정에 따라 사태를 파악해선 안 되는데, 이를 염두한 표현이다.
ㅡ그런 면에서 부드러운 것은 감정적인 것/민감한 것을 말하고 단단한 것은 이성적인 것/차분한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을 아껴 돌보면 왜 병이 드나? 왜 단단하게 만드는 것을 칭송하고, 버터와 꿀이 흐르는 땅을 찬미하지 않는가?
ㅡ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노력하지 않고, 비판이나 비평에서 자신을 보호하다 보면,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ㅡ그런 점에서 정신이 병든다고 할 수 있다.
 
ㅡ즉 올바른 정신/성숙한 정신을 가지기 위해선 비판과 비난도 겪어야 한다.
ㅡ그저 만족을 주는 것이 너무 많으면, 이 존재는 나약해지기 때문이다.
 
많은 것을 보기 위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눈길을 돌려야 하는 이유는?
ㅡ이는 사태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막기 때문이다.
ㅡ올바르게 사태를 이해하려면, 자기 중심적 관점이 아니라, 사태 중심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
 
눈만 가지고 들이대는 건 무얼 말하나?
ㅡ감각에 따라 판단되는 것만을 중시하며 사색하는 것을 말한다.
ㅡ즉 유물론자적 입장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의 근거와 배경을 보길 원한다는 건 뭘 말하나?
ㅡ만물의 본질을 알고자 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의 별들을 발아래 둔다는 것은 무얼 말하나? 왜 이것이 마지막 정상인가?
ㅡ자신의 별은 운명을 말한다.
ㅡ따라서 자신의 운명을 이해할 때까지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바라보는 통찰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즉 자기 운명을 이해하는 것이 성숙의 정점인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자기 운명을 이해하러 나가는 중에 왜 비통하게 말하나?
ㅡ사람들과 어울려 지내고 싶어하는 차라투스트라로서는 자기 운명을 이해하겠다며 고독으로 나아가는 것은 원치 않는 일이기도 하다.
ㅡ또한 자기 운명을 이해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ㅡ명확히 답을 제시해주는 것도 아니기에, 답을 모르는 채로 방황하는 시기를 겪게 된다.
ㅡ그런 점에서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운명을 이해함에 있어서 더 깊게 내려가야 한다고 말하나?
ㅡ자기 운명에 대한 이해를 하는 것은 다른 사물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것보다는 답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ㅡ그래서 어둠 속을 헤메는 듯한 모습이 되는데, 이러한 점을 깊게 내려간 심연으로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왜 높은 산은 바다에서 오는가? 왜 그 증거는 산의 바위와 정상의 암벽에 기록이 되나?
ㅡ이는 니체가 고산 지대에서 해양 생물의 화석이 발견되는 것을 보고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ㅡ어쨌든 깊은 통찰이 있어야 남들이 볼 때 성숙한 존재로 보인다.
ㅡ이 점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잠들어 있는 바다는 무엇을 말하나?
ㅡ잠든 바다는 세상을 말한다.
ㅡ즉 아직 부조리가 만연한 세상임을 말하는 것이다.
ㅡ그래서 차라투스트라가 나타났을 때, 세상은 잠에 취한 채로 낯설게 바라보는 것이다.
 
왜 바다의 숨결은 따듯하고 꿈을 꾼다고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세상은 분명 이상 사회를 바라기 때문이다.
 
바다는 왜 딱딱한 베게 위에서 꿈을 꾸나?
ㅡ바다가 부조리에 의해서 불편해하는 것을 드러내는 구절이다.
ㅡ부조리 속에서 지내면서, 이상 사회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바다는 왜 신음하는가? 고약한 기억과 고약한 기대는 무얼 말하나?
ㅡ세상이 신음한다면, 그것은 부조리와 그릇됨이 만연하기 때문이다.
ㅡ이에 따른 현상이 나타나면 세상은 신음한다.
ㅡ부조리와 그릇됨의 현상을 기억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ㅡ문제는 이와 더불어서 세상의 부조리와 그릇됨을 바라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ㅡ이에 따라서 이상을 바라는 자들은 절망하게 된다.
ㅡ부조리와 그릇됨에 대한 기대를 고약한 기대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그대 어둠의 괴물은 누굴 말하나?
ㅡ여기서 말하는 어둠의 괴물은 세상을 말한다.
ㅡ이미 세상은 부조리에 찌들어서 절망적인 곳이기에, 어둠의 괴물이라 지칭된다.
 
ㅡ또한 차라투스트라는 세상을 부조리에서 구해내고 싶어하는데, 이 괴물 역시 차라투스트라가 고약한 꿈에서 구해내려고 한다는 점에서 같은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이 괴물과 함께 차라투스트라는 슬퍼하며, 왜 이 괴물로 인해 자신을 원망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부조리한 세상을 보며 슬퍼한다.
ㅡ왜냐면 그릇됨과 부조리의 폭력에 힘들어 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부조리한 세상을 계몽하려고 하다 실패했다.
ㅡ이에 대해서 자신이 무능하여 실패했다고 보기에,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원망한다.
ㅡ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손이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마음씨 좋은 바보이며, 신뢰가 지나친 자인가? 왜 온갖 무시무시한 것들에게 다가서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성숙함을 추구하는 자이다 보니, 성숙해질 기회를 찾는 이들에게 조건없이 대해준다.
ㅡ그들이 자신을 비난하던 자일지라도 말이다.
ㅡ그런 면에서 바보같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구절을 참고하자 : 「차라투스트라, 1권 17장」
          저들은 홀로 있는 자에게 불의와 오물을 던져댄다.
          하지만 내 형제여, 그렇다고 저들을 덜 비추어서는 안된다.
          그대가 하나의 별이기를 원한다면!
 
          그대의 사랑의 갑작스러운 습격도 조심하라!
          홀로 있는 자는 마주치는 자에게 지나치게 빨리 손을 내미니.
          그대가 손을 내밀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따듯한 숨이 어린 입김과 앞발에 살짝 나 있는 부드러운 털은 무얼 말하나?
ㅡ따듯한 숨이 어린 입김이라는 것은 절망뿐인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온기를 주는 것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ㅡ즉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을 제시해주는 것을 말한다.
 
ㅡ앞발에 난 털의 경우, 앞발은 발톱이 있는 곳이기에 정확하고 날카로운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ㅡ즉 날카로운 통찰력이라고 해석하면 적절하다.
ㅡ이에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녔으면서도 부드럽다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앎을 선사했으므로, 이러한 해석은 적절해 보인다.
 
고독한 자에게 왜 사랑은 위험한가? 왜 살아 있는 것을 가리지 않는 사랑을 하는가?
ㅡ사랑에 휩싸여서 노력하지만, 그 노력에 비해 미미한 결과로 상처받기 때문으로 보인다.
 
ㅡ차라투스트라는 편애하지 않고 이상 사회를 원하는 자라면 노력한다.
ㅡ이런 분별없는/차별없는 사랑은 그에게 악행을 한 사람에게도 이뤄지므로 바보스럽기도 한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벗들을 떠올리며 비통하게 우는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사람들을 좋아하고 아낀다고 표현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친구들을 떠났다.
ㅡ떠나게 된 계기도 보게 되면,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떠나게 된 것이다.
ㅡ그런 면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진술과 다른 행동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바보스럽지 않게 그들을 떠난 셈이다.
ㅡ그런 면에서 자신의 대인관계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 것이므로, 자신을 질책한 것으로 보인다.
ㅡ또한 차라투스트라는 홀로 지내는 것보다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선호했기에, 지금 떠나는 것에 대해서도 슬퍼한다.
ㅡ그런 면에서 현재의 떠남은 여러가지를 포기하며 선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