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3권 2장 환영
2장 개괄
2장은 절망에 빠진 차라투스트라의 문제를 좀 더 자세히 정리하고, 그 해법이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장이라고 할 수 있다.
2장의 1절에서는 차라투스트라의 내면적 고민을 드러낸다.
즉 이상 사회를 구현하려는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게 하는 본성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난쟁이로 표현되는 본성은 좌절과 절망에 따라 포기하고 살려는 차라투스트라의 심리를 나타낸다.
2장의 2절에서는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절망을 극복하기 위한 기초 작업을 한다.
우선 차라투스트라가 절망에 빠진 이유 중에 하나는 자신의 노력으로는 이상 사회가 구현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노력을 지속한다 해도 덧없음을, 실패 밖에 없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 덧없음은 시간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시간은 영원하고, 그 영원한 시간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이 나타날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시간은 미래로 나아가고 있는 직선적 형태로 인식되지만, 그 시간에 담긴 내용은 영원히 반복되고 있는 상태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차라투스트라의 이상 사회를 위한 시도는 새로운 시도가 아니라고 할 수 있고, 차라투스트라가 느낀 좌절과 절망 역시 차라투스트라만 겪은 문제가 아닐 수 있게 된다.
이전에도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존재가 나타나 같은 일을 겪고 같은 절망 속에서 살다 죽었을 것이란 이야기다.
이는 굉장히 절망적인데, 결국 차라투스트라는 고통 속에서 허덕이다 죽을 운명이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말끝을 흐린다.
문제는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차라투스트라는 절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움 속에서만 살게 된다는 것이다.
니체는 이와 관련해서 해법이 있음을 제시한다.
그렇기에 목자 수수께끼를 내놓은 것이다.
후에 언급되기는 하겠지만, 니체는 자신에게 주어진 절망, 차라투스트라에게 주어진 절망을 이겨내는 논리를 갖게 된다.
본문
-1-
차라투스트라는 섬의 정박지에 도착하여, 배에 올랐다.
배에 오를 때 차라투스트라와 같이 오른 이가 있었는데, 그는 차라투스트라를 알아봤다.
그렇게 배에 차라투스트라가 올랐다는 사실이 배 안의 사람들 사이로 퍼졌다.
사람들은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호기심과 그가 어떤 이야기를 할지 내심 기대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틀 동안 누군가 말을 걸어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우울하고 침통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면서 차라투스트라는 기분이 점차 나아졌고, 그러면서 주변에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흥미를 두게 되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성장하려고 노력하는 자들이 겪는 경험담이었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처럼 성장하려고 노력하는 자들의 친구이니, 그들에게 흥미를 두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이내 흥미로움이 우울함을 걷어내더니, 차라투스트라도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의문을 가지고 파헤치는 자들이여,
의문의 답을 찾아 헤메는 과정을 즐기는 자들이여,
그렇게 방황하는 자들이여,
여러분이 그러한 것은 그릇된 이해를 가지고 살고자 하지 않기 때문이며,
뭔가 이상해 보이는 연역과 궤변을 따르길 원치 않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에게만, 고독한 탐구자가 나아가야 하는 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성장을 위해 나아가는 자들의 배
차라투스트라는 배 안의 사람들에게 흥미를 느껴 자신이 본 환영을 이야기하게 된다.
최근에 저는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하던 중 부질없음을 느껴 절망하였습니다.
그 절망은 너무도 커서 모든 의욕을 잃어버렸었지요.
그러면서도 저는 나름대로 성장하기 위해서 노력하며 묵묵히 나아갔습니다.
고단함을 벗어나게 하려는, 다시 사회로 나아가려는 편함을 추구하는 제 본성을 물리쳐
가면서 말이죠.
사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제 본성은 제게 이렇게 속삭인 후 침묵했습니다.
“차라투스트라여,
너는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했지만,
결국 너는 노력한 만큼 좌절할 것이다.
너의 노력은 너를 괴롭히는 것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저는 그 생각을 쉽게 벗어날 수 없었고, 이 생각 속에서 씁쓸함을 느꼈습니다.
노력의 덧없음.
이를 느낀 이상, 성장하기 위한 모든 노력이 덧없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좌절하여 지쳐 있으면서도, 그 여파에 계속해서 괴로워하는 병자와 같았
습니다.
모든 것이 덧없게 느껴지며 삶의 방향에 대해서 고민하던 저는
결국 내가 나아갈 방향은 성숙한 존재로 나아가는 것, 올바른 이해를 구하기 위해서 노
력하는 것이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내가 갈 방향이 정해지고, 용기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알량한 제 본성에 두고 말했습니다.
“이 알량한 나의 본성이여,
나는 너로서 살거나, 계속해서 노력하며 살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삶의 방향을 정했고, 이로써 나는 용기를 얻었다.
성숙한 존재로서 나아가려는 나의 의지는 내게 용기를 주는 것이다.
이 의지는 나를 절망에서 구원한다.
그래서 내가 다시금 노력할 수 있게 해주는 진군의 나팔소리와 같다.
인간다운 인간이란, 성숙한 존재가 되려는 의지를 지닌 짐승을 말한다.
이 의지를 바탕으로 짐승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 의지를 다 잡으면서, 그는 부조리에서 오는 모든 고통을 극복했다.
인간이 사회 속에서 겪는 고통은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고통들이 아니다.
이 의지는 세상을 경험하며 겪는 방황과 혼란*을 이겨내게 해준다.
방황과 혼란을 야기하는 세상 속에서 뚝심을 가지게 해주는 것이다.
*염세주의나 허무주의를 말한다.
성숙을 향한 의지는 동정도 이겨내게 해준다.
동정은 세상을 경험하면서 갖는 혼란 중 하나이다.
그들이 부조리한 삶을 면밀히 살필수록 부조리힌 삶의 고통을 보고 타인을 동정하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동정은 삶을 개선시키지 않으므로, 우리는 동정을 피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성숙을 향한 의지는 우리를 동정의 늪에 빠지지 않게 해준다.
성숙을 향한 의지는 죽음마저도 이겨낸다.
성숙을 향하는 자들은 성숙한 사회/이상적인 사회를 바라는데,
이를 위해 노력하다 죽는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여기기 떄문이다.
이런 생각과 말 속에서, 성숙을 향한 의지가 강하게 솟아난다.
이런 생각과 말을 이해할 수 있다면, 듣고 행동하길 바란다”
난쟁이와 차라투스트라
난쟁이는 차라투스트라의 운명을 거부하고자 하는 마음을 나타낸다.
-2-
제가 말했습니다.
“알량한 본성이여,
내게 있어 편하고 안락한 삶보다 성숙함을 위해서,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는 삶이 더 가치 있다.
사회적 규율에 따라 편하고 안락하게 사는 삶은 깊은 사고를 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깊은 사고의 결과물들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사고 앞에서 그러한 삶은 하찮은 모습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제 알량한 본성이 의식 속에서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저는 시간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알량한 본성이여,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시간에는 두 방향으로 길이 나 있다.
한쪽은 과거로 나아가고, 다른 한쪽은 미래로 나아간다.
이 두 길은 여기 <지금>이라는 순간에서 만난다.
과거와 미래, 이 두 길의 끝으로 나아간 자는 아직까지 없다.
이 길들은 모두 각자가 뻗어가는 방향으로 영원히 나아가기 때문이다.
과거와 미래는 서로 모순된다.
서로 상충되는 성질을 지닌 것이다.
이 두 길은 여기 <지금>이라는 순간에서 만난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누군가가 과거로든 미래로든 쭉 나아간다면, 어떨 것 같나?
과거와 미래는 서로 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러자 알량한 본성이 중얼거렸습니다.
“곧은 것은 거짓이다.
모든 진실은 굽어 있으니.
시간 자체도 하나의 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저는 화가 났습니다.
“알량한 본성이여,
시간에 대해서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진지하게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나는 앞으로 너와 사색하는 시간을 갖지 않을 것이다.
다시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보라.
<지금>이라는 이 관문을 많은 시간들이 지나쳐 뒤로 이어지며 끝이 보이지 않는 영원한 과거를 만들고 있다.
이러한 영원한 과거 중에, 새로운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어쩌면 한 번 일어난 것들이 다시 일어나고 행해지고 지나간 것은 아닐까?
너와 내가 있는 이 <지금>도 이미 존재 했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모든 것은 서로 얽히고 설키며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어쩌면 정해진 기계적인/연쇄되는 사건 속에서 현재가 나타나고,
이 현재는 또 기계적인 흐름 속에서 다음의 미래를 이끌어오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다시 너와 내가 있는 이 <지금>이 다시 되돌아오게 되는 것*은 아닌가?
왜냐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존재하는 이 순간도 누군가 겪었던 것들이었을 것이다.
나만이 이 순간에 이른 것은 아닐 것이다.
*영원히 반복되어짐을 말한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금 지금과 똑같은 순간을 겪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 괴로운 순간*을 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즈음부터 영원회귀의 단초를 얻은 것으로 보이는데, 영원회귀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저는 말끝을 흐렸습니다.
무심코 내던진 말이 제가 마주할 현실이라고 느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현재'라는 관문
미래는 현재의 문을 지나면서 과거로 뻗어 나간다.
이 모습에 우리는 시간을 직선형으로 떠올리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시간이 직선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던 중, 저는 이상한 환영을 보았습니다.
한 목동이 무언가로 인하여 고통스러워하며 도와달라고 울부짖고 있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아주 어릴 적, 사회적/종교적 규율을 잘 따르던 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규율을 따르면서 사는 자신이 정말 올바르게 살고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러면서 그와 동시에 사회와 종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혼란스러워하며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다가 사회와 종교의 규율을 벗어나려는 의지가 꿈틀대기라도 하면, 그는 몹시 불안해 했었죠.
그는 그렇게 괴로움 속에 있었고, 그런 그를 보며 저는 측은하게 여기곤 했었습니다.
이 경험으로 인해, 제 앞에서 고통스러워하며 울부짖는 목동의 모습이 몹시 측은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를 도와주러 다가갔습니다.
길바닥에 누워 발을 동동거리며 뒹굴거리는 목동의 입 안에는 검은 뱀과 같은 형체*의 것이 박혀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빼내려고 잡아당겼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누워있는 목동에게 외쳤습니다.
“물어 뜯어! 그것을 물어 뜯어서 끊어버려!”
저의 운명에 대한 공포, 증오, 혐오, 연민, 선악의 외침이었습니다.
수수께끼를 즐기는 자들이여,
의문을 파헤치고 답을 찾는 자들이여,
제가 본 것을 저는 예언*이라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3권 13장에서 이야기한다.
제가 본 환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때 저는 무엇을 본 것일까요?
그 목자는 누구일까요?
누구의 입에 그 검은 뱀 같은 것이 들어가는 것일까요?
목자는 제 충고대로 그 검은 것을 물어뜯었습니다.
그리고 입 안에 있는 것을 뱉어 내며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는 더는 목자도 아녔으며, 인간도 아니었고, 변화한 자, 빛나는 자, 웃는 자였습니다.
이 세상에 그처럼 웃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 나의 형제들이여,
나는 인간의 웃음이 아닌 신성한 웃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웃음에 대한 갈망이 저를 갉아먹으며, 저를 집어 삼키려고 합니다.
아, 나는 이를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요?
지금처럼 절망한 상태의 나는 어떻게 죽음을 마주해야 할까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절망을 극복한 목자
절망을 극복해냈다는 점에서,
차라투스트라에게 환영 속의 존재는 동경의 대상이 된다.
생각해볼 거리들
담대한 탐색자는 무얼 말하나?
ㅡ탐색한다는 것은 드러나지 않은 것을 밝히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ㅡ그런데 담대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남들이 주저하는 것을 탐구하고 밝히려고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ㅡ여기서는 사회의 규율의 올바름과 그릇됨을 탐구하고 밝힌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꾀 많은 돛을 달고 무시무시한 바다를 항해했던 자들은 누구를 말하나?
ㅡ여기서 바다는 1장에서 말했듯이 세상을 말한다.
ㅡ즉 무시무시한 세상을 항해하고 탐험했다는 것인데, 이는 곧 사회적 규율에 대해서 맞서 탐구하고 사색했음을 나타낸다.
피리 소리에 홀려 미궁의 입구로 끌려가는 영혼을 지녔다는 건 뭘 말하나?
ㅡ의문이나 의심에 이끌려서 답을 찾으려고 골똘하는 존재들을 말한다.
ㅡ마찬가지로 탐구심이 강한 존재, 올바른 이해를 가지려고 하는 존재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어스름을 즐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어스름은 답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상태를 말한다.
ㅡ즉 방황하는 상태인데, 이를 “더듬거린다”로도 표현할 수 있다.
ㅡ즉 탐구자들은 올바른 것을 찾아 나서면서 더듬거리게 되는데, 이는 답이 명확히 보이지 않기 때문이고, 비유적으로 표현한다면 어둠 속에 있기 때문이다.
겁먹은 손으로 실 하나를 더듬으며 따라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얼 말하나?
ㅡ겁먹은 손의 경우, 겁쟁이/비겁자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ㅡ이는 앞서 담대한 탐색자와 반대되는 서술로 볼 수 있다.
ㅡ앞서 담대한 탐색자는 사회적 규율을 따르지 않고 탐구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와 반대되는 특징을 지니는 자라면, 사회적 규율을 잘 따르는 존재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ㅡ즉 사회적 규율을 잘 따르면서 실 하나를 더듬거리며 따라간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ㅡ그러면 실 하나는 무엇을 말할까?
ㅡ여기서 말하는 실은 운명의 실로 보인다.
ㅡ즉 사회적 규율에 따르며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추측할 수 있는 곳에서 추론하기를 싫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ㅡ해당 구절은 좀 더 명확히 알기 위해서는 해석을 다시 해볼 필요가 있다.
ㅡ이 구절은 “und, wo ihr errathen könnt, da hasst ihr es, zu erschliessen:”에 대한 구절인데, 여기서 “errathen”이 ‘추측하다’ 라는 의미로 번역되고, “erschliessen”가 ‘추론하다’는 의미로 번역되었다.
ㅡ하지만 좀 더 의미를 잘 살펴보면, “errathen”의 의미는 “추측하다”도 맞지만 “맞히다/문제를 풀다”의 의미도 갖는다; 물론 직감에 따른 맞힘과 풂을 나타내지만 말이다.
ㅡ”erschliessen”의 경우, 추론하다는 의미와 더불어 연역하다는 의미도 갖는다.
ㅡ이러한 점들에 따라서 종합해보면, “맞힐 수 있는 곳/풀 수 있는 곳에서 연역하는 것은 싫어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ㅡ연역적 사고는 가정에 따라 사고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ㅡ그런데 만약 가정하지 않아도 되는 조건이 주어진다면, 연역적 사고는 무용해지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ㅡ즉 뭔가 명확히 주어지는 것이 있다면, 연역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ㅡ앞서 말한 담대한 탐색자나 바다를 항해하는 자들은 명확한 이해를 원하지 연역적 이해를 원하지 않는 존재들이다.
ㅡ연역적 이해를 허용했다면, 올바른 것을 알려고 탐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연역적 이해를 원하는 자들은 올바름을 중시하지 않고, 연역하는 데 이상한 점이 없는지만을 따진다.
ㅡ그렇기에 “맞힐 수 있는 문제, 풀 수 있는 문제”라면 풀어보는 것이 담대한 탐색자들의 특징이므로, 이 사람들은 연역하는 것, 가정하고 말만 되면 된다는 태도를 싫어한다.
ㅡ이런 특징을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의 차라투스트라는 왜 시체처럼 울적하고 괴로운 상태로 걸어다녔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면서 좌절했고, 그렇기에 절망한 상태가 된다.
ㅡ이를 말하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에게는 하나의 태양이 진 것만이 아닌가?
ㅡ이는 명확하지 않으나, 태양은 열의/의지를 나타내는데, 차라투스트라가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졌으므로, 어떤 열의도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 표현으로 보인다.
ㅡ즉 차라투스트라는 태양이 아예 뜨지 않는 상태, 어떤 열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발을 심연으로 끌어내리는 정신은 무엇을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좌절하면서 이상 사회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편하게 살고 싶어하게 된다.
ㅡ즉 사회에 순응하면서 살고 싶어하게 되는 상태가 되는데, 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러한 정신을 난쟁이로 표현하고 있다.
왜 난쟁이는 중력의 정신인가?
ㅡ중력은 위로 올라가는 것들을 잡아끄는 것을 나타낸다.
ㅡ위로 올라간다는 것은 성장한다는 것, 성숙해지려고 한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 방해하는 요소다.
ㅡ그래서 중력은 「차라투스트라, 1권 7장」에서 사회적 규율을 의미했다.
ㅡ여기서는 차라투스트라의 성장을 막고, 이상 사회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좌절/절망감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지혜의 돌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한다.
ㅡ이때 세상을 향해서 노력하는 것을 돌을 던진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통찰을 하는 존재이기에, 지혜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왜 던져진 돌은 반드시 떨어진다고 말하나?
ㅡ이는 이상 사회의 구축이 어려운 점을 말하는 모습이다.
ㅡ즉 사회의 부조리를 그렇게 걷어내기 쉽지 않다는 점을 난쟁이가 말하는 중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투석용 돌이자, 별을 부수는 자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의지를 담아서 노력했지만, 결국 자신을 파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ㅡ그런 점에서 자기 자신의 꿈과 자신의 노력은 파괴하는 것을 말하고, 이는 돌을 던져 파괴하는 투석기와 관련지을 수 있다.
ㅡ그래서 차라투스트라의 노력은 투석기에 의해 던져진 돌로 비유되고, 그 노력은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구현되므로, 차라투스트라 자체가 돌이 된다.
ㅡ차라투스트라는 밤 하늘에서 빛을 비추는 별과 같은 존재로 자리하려고 한다.
ㅡ문제는 차라투스트라가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면서 좌절하고 그로 인해 빛을 비추는 기능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의 의지가 파괴되었기 때문인데, 이로써 별인 자신을 부순 자가 된다.
돌은 왜 자신에게 돌아와 차라투스트라를 죽이도록 되어 있나?
ㅡ차라투스트라의 노력이 실패할 경우, 파괴되는 것은 차라투스트라 자신이기 때문이다.
ㅡ돌은 차라투스트라의 이상 사회를 위한 노력이고, 그것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을 때, 차라투스트라는 문제에 휩싸인다.
차라투스트라가 오르고 올랐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 즉 노력 이후의 절망에 대해서
차라투스트라는 왜 극심한 고통에 지쳐 있다가 고약한 꿈에 놀라는 병자와 같은가?
ㅡ차라투스트라의 이상 사회를 위한 노력은 실패했다.
ㅡ그로써 차라투스트라는 상처를 받는다.
ㅡ문제는 그렇게 상처받은 이후로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ㅡ노력의 실패가 희망의 상실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ㅡ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여전히 시달리고 있는 병자, 꿈에서도 시달리는 병자가 되어버렸다.
차라투스트라 안에는 왜 용기가 있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좌절 속에서 절망하다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차라투스트라, 2권 22장」
ㅡ그러다가 결국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본래의 의지, 운명에 따르기로 결심한다.
ㅡ그것이 궁지에 몰린 자신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본 것이다.
ㅡ그리고 그 결과로 사람들을 떠나 홀로 고독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용기는 왜 최고의 살해자가 되나?
ㅡ차라투스트라에 따르면, 용기는 막다른 길에 생기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 3권 1장」.
너의 위대한 길을 가는구나.
네 뒤에 더는 어떤 길도 없다는 것,
이것이 이제는 너의 최고 용기다.
ㅡ이렇게 용기가 생기면 삶의 방향성이 생기면서, 다른 외부의 것에 의해 흔들리는 경향이 적다.
ㅡ그런 점에서 자신의 의지를 위협하는 것들로부터 보호받게 되는데, 이때 개인이 갖는 의지가 강화되고, 이로써 혼란도 쉽게 지나치며, 자신이 나아갈 길 때문에 동정하지도 않는다.
ㅡ혼란할 이유가 없는 게 이미 의지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왜 가장 용기있는 짐승인가?
ㅡ여기서 인간은 일반적인 종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인간다운 인간을 말한다.
ㅡ그리고 용기를 갖췄다는 것은 성숙한 존재로 나아가려는 방향성을 지녔다는 것을 말하므로, 성숙한 존재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지닌 짐승만이 인간답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진군의 나팔 소리를 울리면서 고통을 극복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인간이 갖는 고통의 경우, 부조리를 통해서 갖는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ㅡ즉 성숙하려는 의지를 가지면서, 부조리에 따른 고통을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왜 인간의 고통이야말로 가장 깊은 고통인가?
ㅡ명확하지 않으나, 부조리에 따라서 갖는 고통의 경우, 살면서 지속적으로 겪어야 하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용기는 심연에서 느끼는 현기증을 죽인다는 건 무슨 말인가?
ㅡ여기서 말하는 심연은 후술되다시피 인간이 서있는 곳이고, 결국 부조리한 세상을 말한다.
ㅡ즉 용기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느끼는 현기증, 아찔함, 혼란을 없앤다는 것이다.
ㅡ앞서 진군의 나팔 소리가 고통을 극복하게 한 것과 같다.
왜 용기는 동정을 죽이나?
ㅡ용기를 통해서 동정을 죽인다는 것은 차라투스트라가 갖는 의지의 특징 때문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성숙한 존재가 되려는 의지를 지니는데, 이는 이상 사회에 대한 의지로도 나아간다.
ㅡ그렇게 되면, 이 의지를 지니는 사람은 부조리에 대한 경계하고 제거하려고 노력하게 되는데, 동정하는 것은 부조리를 경계하거나 제거하는데 일절 도움이 되지 않는다.
ㅡ그렇기에 성숙함을 추구하는 자들은 동정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ㅡ이러한 특징을 기술한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난쟁이를 부를 때, 나 아니면 너라고 부르는가?
ㅡ정확하지는 않지만, 난쟁이는 차라투스트라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ㅡ즉 운명을 벗어나서 자유롭게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고 싶은 차라투스트라의 본성이 난쟁이인 것이다.
ㅡ그러므로 난쟁이를 부르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부르는 것이다.
ㅡ그러면 왜 너라고 부르기도 할까?
ㅡ난쟁이의 경우,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는 차라투스트라와 다르기 때문에, 다른 존재로 이분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왜 동정은 가장 깊은 심연인가?
ㅡ동정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서로를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ㅡ그런데 문제는 서로 동정하면서 부조리를 근절하지는 않기 때문에, 부조리가 계속 지속되게 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ㅡ그렇기 때문에, 부조리한 세상에 일조하는 역할을 한다.
ㅡ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정은 좋은 것으로 취급되기에, 가장 깊은 심연으로 취급된다.
ㅡ즉 삶에 대한 통찰에서 동정이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용기는 어떻게 죽음마저 죽이나?
ㅡ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의지로서 나타나는 용기는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하다 죽는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긴다; 이는 「차라투스트라, 1권 21장」을 참고하면 좋다.
ㅡ그리고 그러한 삶을 반복하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ㅡ하지만 현재의 차라투스트라, 좌절하는 차라투스트라의 경우, 그러지 못하는데, 이는 이번 장 말미에서 나타난다.
왜 귀 있는자는 들으라고 말하나?
ㅡ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에 반응하라는 이야기로 보인다.
ㅡ즉, 이상 사회에 대한 용기의 말을 바탕으로 듣고 행동하라는 이야기로 보인다.
왜 난쟁이보다 차라투스트라가 더 강한가? 왜 난쟁이는 심연의 사유를 모르고,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나?
ㅡ난쟁이는 운명을 벗어나 일반적인 존재로 살아가고 싶은 차라투스트라의 본성을 대표한다.
ㅡ차라투스트라의 경우,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려는 의지가 강한 존재다;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운명.
ㅡ그런 면에서 운명을 벗어나는 것보다 운명에 순응하려는 의지가 강하기에 차라투스트라가 난쟁이보다 강하다고 말하는 것일 수 있다.
ㅡ또 다른 해석으로, 난쟁이가 운명을 벗어나는 것이고, 차라투스트라가 운명에 순응하는 것을 나타낸다면, 차라투스트라가 더 통찰력 있는 존재로 볼 수 있다.
ㅡ그런 면에서 난쟁이는 현명함의 측면이나 사색의 측면에서 차라투스트라보다 더 미숙하다.
ㅡ그래서 난쟁이가 차라투스트라가 보이는 사색을 이해하지 못한 미숙한 판단을 종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
ㅡ그렇기에 차라투스트라는 “너는 내 심연의 사유를 모른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ㅡ그리고 이 깊은 통찰을 보여줬을 때, 난쟁이, 즉 본성은 그로 인한 자신의 무지나 무모함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ㅡ이러한 하찮은 모습을 본성 자체가 감당할 수 없다고 보는 것 같다.
난쟁이는 왜 차라투스트라의 어깨에서 뛰어내렸나?
ㅡ차라투스트라의 운명에 순응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보니,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옅어진 것을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와 난쟁이가 바라보는 성문은 무엇을 말하나? 두 개의 길은 무엇을 말하나?
ㅡ후에 난쟁이가 말하지만, 성문과 두 길은 시간을 말한다.
ㅡ성문은 현재/지금을 나타낸다면, 두 길은 과거와 미래를 나타낸다.
ㅡ뒤쪽으로 난 길은 과거고, 저쪽 바깥으로 난 길은 미래로 보인다.
ㅡ과거와 미래는 현재에서 만난다는 점을 통해서, 두개의 길이 여기서 만난다고 말한다.
ㅡ또한 그 누구도 과거와 미래의 끝까지 가보지 못했다.
두 길이 모순되고, 서로 머리를 부딪친다는 것은 무얼 말하나?
ㅡ두 길이 모순된다는 것은 과거와 미래의 정의가 서로 상충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머리를 부딪힌다는 것도 정의의 대립, 반대됨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두 길 중 하나를 따라 앞으로 나아가면, 영원히 모순될 거냐고 묻나?
ㅡ시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미래와 현재, 과거는 하나의 직선형태의 것으로 본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시간은 직선형태가 아니라 고리형태로 보이는 듯하다.
ㅡ이를 확인하려고 질문한 것으로 보인다; 시간의 형태에 대한 두 관점은 모두 일리가 있다.
ㅡ즉, 과거와 미래는 영원히 이어질 수 없는 서로 멀어져만 가는 관계(직선형 관계)로 보이냐는 질문이다.
난쟁이는 왜 시간 자체가 원이라고 답하나?
ㅡ정확하지 않지만, 관련해서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을 듯하다.
ㅡ난쟁이는 곧은 것, 올바르게 되어 있는 것을 긍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러면서 시간이 곧다고 말하는 순간 시간의 다양한 변수를 고려하지 못할 수 있으므로, 원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다르게 보려고 한다면, 시간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하루의 주기를 가지고 생각할 수 있다.
ㅡ이에 따라서 시간은 주기 운동을 하는 것이라고 보고 시간을 원이라고 말한 것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난쟁이에게 화를 냈는가? 왜 가볍게 만들지 말라고 하는가?
ㅡ난쟁이의 대답은 사실 차라투스트라의 의도와는 다른 대답을 하는 것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과거와 미래가 이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냐고 물었으나, 난쟁이는 시간은 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ㅡ이 답변으로 볼 때, 난쟁이는 잘 모르면서 자기 선에서 답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ㅡ즉 모르겠다고 말할 수는 없으므로, 자기의 아는 선에서 시간의 형태를 생각해본 것이다.
ㅡ그러므로 차라투스트라는 자기 질문의 요점을 확인하지 않고 대답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난쟁이를 이곳에 버려둘 것이라고 하는가? 왜 차라투스트라는 굳이 난쟁이를 데리고 왔는가?
ㅡ차라투스트라는 계속해서 운명에 따르지 않을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ㅡ그렇기에 사람들을 벗어나면서도 비통함을 느낀 것이 아닐까?
ㅡ이렇게 운명에 따를지 말지 고민하고 왔는데, 사색의 순간에 협조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ㅡ물론 비유적인 장면이라서 이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듯하다.
ㅡ그저 차라투스트라가 내면적 갈등/고민은 계속 해왔다고 인식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순간이라는 성문으로부터 긴 골목길이 뒤쪽으로 내달린다는 것은 뭔가?
ㅡ이는 시간의 흐름, 즉 미래가 현재의 관문을 통과하여 과거가 되는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만물 가운데서 달릴 수 있는 것이란 무얼 말하나?
ㅡ여기서 달린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놓여 현재를 살려고 계속 달리는 것을 말한다.
ㅡ시간이라는 런닝머신을 뛰고 있는 존재를 떠올리면 된다; 여기서 멈추면 죽어서 과거의 존재가 된다.
만물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이미 언젠가 일어났다는 건 뭘 말하나?
ㅡ이 세상에 발생하는 일들은 모두 이미 일어난 일이 아니겠냐는 이야기다.
ㅡ즉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이 과연 새로운 일일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다.
ㅡ약간의 외연이 바뀔 수 있을지 몰라도, 본질은 여전히 같은 것들이 반복했을 것이란 이야기다.
ㅡ예를 들면, 배신의 경우가 그러하다.
ㅡ시대적으로 배신은 늘 있어왔지만, 배신하는 존재, 문명 등이 다르긴 했다.
ㅡ하지만 배신 행위는 늘 있어왔다.
ㅡ그러므로 외연, 형식이 조금 다를 뿐 배신은 늘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이처럼 다른 특징의 사건들도 반복적으로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이미 존재했었더라면, 난쟁이 너는 이 순간을 뭐라 여기는가’라고 질문하는 건 뭘 말하나?
ㅡ여기서 말하는 것은 난쟁이와 차라투스트라가 마주한 지금의 순간을 말한다.
ㅡ이를 통해서 차라투스트라가 묻는 것은, “이미 모든 것이 한번씩은 일어난 일일 건데, 너와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고, 내가 방황하고 있는 것은 나 말고도 언젠가 한번 일어난 일이 아니겠느냐? 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단단하게 연결되었다는 건 뭘 말하나?
ㅡ모든 일들이 서로 연결되어 연쇄적인 반응이 나타난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유기적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ㅡ그래서 다가올 모든 것을 ‘지금/현재’는 이끌어 오고, 또 ‘지금/현재’도 과거로 밀려나는 그런 유기적 구조를 언급하게 된다.
모든 것 중에 달릴 수 있는 것이라면, 저쪽으로 달릴 수 있는 것이라면, 언젠가는 달려가야만 한다는 건 뭘 말하나?
ㅡ여기서 달릴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현재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ㅡ즉 실제 존재가 가능한 것을 말하는데, 실제 존재 가능한 것이라면, 언젠가는 현실에서 드러나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현재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언젠가 현실에서 존재할 것이다”는 뉘앙스로 읽히는 것이다.
ㅡ이는 곧 벌어질 수 있는 일은 벌어지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ㅡ이를 좀 더 확장 시켜보면, “벌어질 수 있는 일은 벌어질 것이고, 영원과 가까운 시간이 이미 흐르고 흘렀는데, 이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 중에 과연 새로이 벌어지는 일이 뭐가 있겠냐”는 이야기가 된다.
ㅡ즉 “이 세상에 새로운 일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미 벌어졌던 게 다시 나타날 뿐이다”라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그래서 “지금의 순간들 모두 이미 존재했었던 것 아니겠느냐”고 차라투스트라가 난쟁이에게 말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되돌아와서, 우리 앞에 놓인 또 다른 골목길을 달려야 하지 않는가?” 라고 말하나? 왜 그 골목길은 길고도 소름돋나? 왜 차라투스트라는 소리를 점점 낮추나?
ㅡ세상이 반복되고 있다면, 차라투스트라는 다시금 자신의 운명에 맞게 이상사회를 위해서 노력하고 좌절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ㅡ현재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삶/운명에 대해서 괴로워하므로, 이 반복은 그에게 꽤나 께름칙한 일이 될 것이다.
ㅡ그리고 말하면서 자신의 상황을 자각한 차라투스트라는 두려움에 휩쌓여 말문이 막힌 것으로 보인다.
왜 갑자기 개 짖는 소리가 들리나?
ㅡ개가 나타나는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ㅡ후술되는 목동을 따라다니는 존재로서 개를 말할 수도 있지만, 당장의 개는 목동과 무관한 하나의 개별적 존재를 의미한다.
ㅡ여기서 개는 짖는다는 것을 유의해볼 필요는 있다; 목동을 곁에 둔 개는 울부짖기 때문이다.
ㅡ후술되는 개에 대한 서술을 보면, 개는 무언가 두려운 것을 보고 짖는다.
ㅡ또한 상술되는 것을 보면,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가혹한 운명에 대해서 다시금 느끼며 두려움을 느낀다.
ㅡ이 두 내용을 보면, 결국 개는 차라투스트라를 나타내고, 무언가 두려운 것을 보았기에 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ㅡ즉 개가 짖는 건 차라투스트라의 두려움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의 과거에서 왜 개가 짖나? 이 개는 어떤 개인가?
ㅡ개에 대한 서술을 보면, 개는 유령을 믿고 있다고 한다.
ㅡ이는 종교를 믿고 있는 존재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ㅡ그런데 이 개가 털을 곤두세우고 머리를 든 채 떨면서 짖는다는 것은 무언가 불안을 느낀다는 걸 말한다.
ㅡ정리하면, 종교를 믿는 존재가 밤에 불안해하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잠들지 못하고 짖는 상태이므로, 사회적/종교적 교리에 의문을 품고 있고, 자신의 삶의 방향성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해봄직 하다.
개가 두려움에 따라 짖고 있을 때, 보름달이 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왜 개는 보름달을 보고 무서워 떨었나?
ㅡ차라투스트라의 과거 속 개가 이처럼 자신의 삶의 방향성에 대해서 고민하던 존재이고, 보름달을 밤에 빛을 주는 존재라고 본다면, 이 개에게 빛이 내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ㅡ그리고 이 빛은 개가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는 생각을 갖게 하는 빛일 확률이 크다.
ㅡ왜냐면 부조리한 사회에 들어가는 것은 어둠 속으로 가는 것이자 심연 속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ㅡ그런데 이 개는 아직 사회와 종교를 벗어날 생각이 없는지, 그러한 의지를 갖게 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표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아직 자신의 삶의 방향에 대해서 확신하지 않은 존재인 듯하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처럼 사회를 벗어날지 말지를 고민하는 존재를 측은하게 여긴다.
ㅡ그런 점에서 이러한 개는 차라투스트라가 과거 사회를 벗어날지 말지 혼란에 빠져 고민하고 있던 시점을 나타내는 게 아닐까 싶다.
ㅡ그러니 어렸던 자신의 과거 속에서 이 개의 모습을 찾아낸 것 같다.
차라투스트라는 곁에 있던 난쟁이와 성문은 왜 사라졌는가?
ㅡ운명을 벗어나려는 의지와의 논쟁이 끝나고, 자신 앞에 펼쳐지는 절망이 더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ㅡ즉 운명을 벗어나려는 의지에 저항하여,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러다보니 자신이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하다가 절망하는 운명을 반복할 것임이 드러났다.
ㅡ이에 운명을 벗어나려는 것보다 자신의 운명을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더 크게 작용한 것 같다.
ㅡ즉 중시되는 문제가 달라지면서, 가치가 낮아진 문제들이 사라진 것이다.
길에 누워있는 양치기는 무얼 말하나?
ㅡ양치기는 양을 치는 존재이므로, 어떤 단체의 리더를 말한다.
ㅡ여기서는 차라투스트라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데, 몇가지 점들 때문이다.
ㅡ먼저 차라투스트라도 제자들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리더를 맡았었다.
ㅡ다음으로 차라투스트라는 리더역할을 하던 중에 절망으로 인하여 의욕을 다 잃고 병든 자처럼 있게 되었는데, 양치기의 모습도 뭔가로 기도가 막혀 쓰러진 상태다.
ㅡ이런 점들로 볼 때, 양치기는 차라투스트라로 이해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ㅡ또한 후술되는 내용으로 보면, 차라투스트라 뿐만 아니라,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다가 절망을 맛본 이들을 모두 나타내는 존재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양치기의 입에 매달린 뱀은 무엇을 말하나?
ㅡ양치기를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이로 본다면, 그의 숨을 턱턱 막히게 하고 힘들게 하는 것은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의 상실, 즉 절망이다.
ㅡ이에 따라 양치기의 입을 막은 것은 절망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양치기에게 뱀을 물어뜯으라고 하는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이 절망이라는 뱀을 어떻게든 제거해보려고 하지만 되지 않는다.
ㅡ절망을 어디론가 치울 수 없는 것이다.
ㅡ그러므로 이제 남은 해법은 절망을 파훼하는 것이다.
ㅡ그러기 위해선 자신에게 주어진 절망에 대해서 탐구하고 정말 해법이 없는지 탐구해야 한다.
ㅡ그렇게 했을 때, 절망을 완전히 부숴버릴 수 있는 것이다.
ㅡ그런 점에서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으니, 절망을 부수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전율과 증오, 구역질, 연민, 좋은 것과 고약한 것이 한꺼번에 소리를 지르나?
ㅡ이는 양치기의 상태는 차라투스트라 자신의 상태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ㅡ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다가 갖게 된 절망, 그리고 이를 통한 자신의 운명에 대한 전율, 증오, 혐오, 연민 등이 더 이상 절망을 어떻게 해볼 수 없으니까 “물어 뜯어라”라고 말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ㅡ즉 자신의 삶/운명을 긍정하려면 그 절망을 파훼하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ㅡ그렇지 않으면 고통 속에서만 살게 되니 말이다.
차라투스트라의 환영 속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무얼 본 건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게 된 것이다.
ㅡ즉 앞서 말한 것처럼 자신의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절망을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아직 이에 대한 아이디어가 없다.
언젠가 와야 하는 존재는 누구인가? 뱀이 기어든 양치기는 누구인가? 목구멍에 뱀이 들어갈 존재는 누구인가?
ㅡ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할 존재를 말한다.
ㅡ그리고 이 존재는 자기 운명의 절망을 극복해내는 존재여야 한다.
ㅡ아직 차라투스트라는 자기 운명의 절망을 극복하지 못했다.
양치기는 왜 뱀을 물어뜯고는 변화한 자, 빛에 둘러싸인 자, 웃는 자가 되었나?
ㅡ자신의 절망을 극복해냈기 때문이다.
ㅡ이로써 이상 사회를 위한 모든 걸 긍정할 수 있는 자가 된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동경에 잠식당하나?
ㅡ차라투스트라의 환영에서는 절망에 시달리던 존재가 절망을 극복해낸다.
ㅡ차라투스트라 역시 절망에 시달리는 상태기 때문에, 환영 속 존재처럼 되고 싶다.
ㅡ그런 면에서 환영 속 존재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있어 동경의 대상이 되고, 부러워하며 괴로워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계속 사는 것을 어찌 견디냐고 말하나? 왜 지금 죽는다는 것을 어찌 견디냐고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절망을 극복하지 못했다.
ㅡ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운명을 살아가기가 버거워진다.
ㅡ문제는 현 상태에서 죽으면 「차라투스트라, 서문 6장」의 줄타기 곡예사처럼 허망한 죽음이 된다.
ㅡ이런 죽음은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던 죽음이 아니다; 「차라투스트라, 1권 21장」.
ㅡ그러므로 자신의 현재에 다가올 죽음을 어떻게 견딜지 착잡해지는 것이다.
'니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3권 의역'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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