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3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3권 3장 의역 (완) (원치 않는 행복,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6. 27. 01:26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3권 3장 원치 않는 행복


           
3장 개괄

 

3장은 차라투스트라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 상세히 이야기하는 장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실망하면서, 자신의 운명이 가혹하다고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미 이런 운명을 살고 있으므로, 차라투스트라가 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긍정할지 그 방법을 마련하는 것이다.

 

초기에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주목하지 않았다.

왜냐면 이 문제에 집중하게 되면, 사람들에게 앎을 나눠주는 일에 소홀하게 되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운명을 이해하는 것과 사람들에게 앎을 나눠주는 것 중에 선택을 해야 했는데, 후자를 선택한다.

 

그러면서 어떻게든 의지를 다잡으며 사람들에게 앎을 나눠준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 2권 12장」 이후부터는 의지를 다잡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나온다.

하지만 끝내 의지를 다잡지 못하게 되고, 「차라투스트라, 2권 22장」에서 자신의 운명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바꾸게 된다.

 

이때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에게 노력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고독이 싫은 것과 더불어 사람들과 지내면서 좋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과의 유대에서 느낀 기쁨과 행복은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차라투스트라가 그리워한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혼란에 빠져 있다는 것을 통해 아직 자신이 사람들과 유대를 할 상태가 아니란 것을 자각하고, 사람들과 함께 있으며 느꼈던 행복을 거부한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이해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지만, 쉽게 성공하지 못한다.


 

 

본문

 

 

차라투스트라는 어떻게 하면 절망을 극복할 수 있을지 생각하면서도, 답답해하며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그렇게 친구들을 떠난지 4일이 흘렀을 때, 그는 절망감에서 벗어나 이성적으로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절망감을 극복한 그는 확고한 모습으로 자신의 운명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이야기했다.

 

    “나는 홀로 자유롭게 사색하고 있고, 그러고 싶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멀리 내다볼 수 있게 되었다.

 

     멀리 내다볼 수 있었을 때,

     처음으로 나의 친구들을 만났다.

     그리고 다시 멀리 내다볼 수 있었을 때,

     떠났던 친구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멀리 내다보던 시기에 친구들을 만났던 것은,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삶에 대한 긍정*’을 다른 이가 이어가길 바랐었기 때문이다.

     즉, 삶에 대한 긍정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나는 멀리 내다보았던 것이다.

*부조리가 근절된 이상적인 미래를 말한다.

 

항해하는 범선의 오후

차라투스트라는 절망감을 걷어내고 다시금 거시적인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보게 된다.


 

     열심히 탐구하고 사색하던 나도 점차 나이가 들어 이제는 죽음을 염두하게 될 시기가 되었다.

     그러면서 삶을 긍정하게 하던 사유들,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을 나만 간직하는 것은 아쉽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를 사람들에게 퍼뜨리고 남기는 것이 더 이로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을 이어갈 사람을 찾아 내야 겠다고 마음먹었고, 그렇게 사람들에게로 나아간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마음을 열고 반기는 사람들, 나의 친구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아, 나의 사상을,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을 이어가게 할 수만 있다면, 내가 무엇인들 알려주지 못할까?

 

     나는 동료가 될 사람들, 나를 이어갈 존재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존재는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얻은 결론은 “내가 동료를 만들고, 이어갈 존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나를 반기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다가서기도 하고, 실망하여 그들에게 돌아서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열의를 잃었다.

     이 상태라면 누구에게도 열과 성을 다해서 나의 동료를 만들고 나를 이어갈 후계자를 만들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들로 인한 좌절을 이겨내고, 사람들에게 절망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정신력을 갖추어야 하리라.

 

     모든 사람은 자신의 후계자, 자신의 목적만을 사랑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를 위해선 자기 자신에 대한 두터운 사랑, 꺾이지 않는 신념이 필요하다.

     이것이 있다면, 분명 목적을 이루기 위한 시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찾은 사람들은 나의 가르침 속에서 자라나고 있다.

     그렇게 저들이 성숙하여 서로 어울려 지내는 곳, 그곳에 바로 행복의 공동체가 있으리라.

 

     행복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나는 그들을 고독 속에 둘 것이다.

     그들이 고독 속에서 더 정신적으로 단련하고, 더 성숙해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나의 후계자들은 이상 사회를 비추는 등대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어떤 곤경이 다가와도 꿋꿋이 버텨내며 서있을 수 있어야 한다.

 

     부조리가 가득한 곳, 그래서 개선하려는 시도가 필요한 곳.

     그곳에서 나의 후계자들은 이상 사회를 위한 시도를 하며 이 삶에서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이 꺼지지 않도록 주야 경계를 해야 할 것이다.

 

     나의 후계자들은 정말 이상 사회를 계승할 재목이 맞는지 평가되어야 한다.

     정말 성숙한 존재가 되려는 의지를 지녔는지, 그릇된 말을 쉽게 하지 않는지, 상대를 가리지 않고 이상 사회에 관심을 지니면 앎을 나눠주고 포용하는지 말이다.

 

     또 언젠가 나와 같이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할 수 있는 동료가 될 수 있는지,

     사회가 제공하는 걸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올바른 이해를 갖기 위해서 탐구하고 사색하며 받아들이는 자인지 말이다.

 

     이런 자들을 만들기 위해서 나는 사람들에게 실망하지 않고 꿋꿋이 나아갈 수 있는 정신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 곁에서 머물며 함께 지내는 행복을 피하고, 고독 속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상 사회를 위한 마지막 자질을 갖추기 위해서 말이다.

 

해풍을 견디는 소나무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제자들이 부조리에 맞서 꿋꿋한 나무와 같길 바란다.


 

     내가 사람들을 떠났던 것은 정말 필요한 것이었다.

     나는 오랜 시간 사람들 사이에서 머물며 나 자신에 대해서 안주하고 있었다.

     그러다 나는 사람들에게 큰 실망을 하게 되었고, 그 실망은 절망으로 이어져 열의를 모두 잃었으니 말이다.

     이 상태에서 내가 사람들에게 삶을 긍정하게 할 수 있을까?

     내 열의를 모두 앗아간 이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사람들을 떠나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은 내가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게 만들었지만, 그 노력의 결과 나는 부족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래서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은 내게 다시 수련하고 오라며 내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주는 안정감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절망하면서 사람들 곁에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에게 앎을 선사하려는 욕망, 이것이 수련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거부하게 만든 것이다.

     이 욕망에 빠져서 나는 내가 해야 할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주변인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난 그들 곁을 떠날 수 없었다.

     하지만 진정한 소유는 곁에 있으려는 욕망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곁에 없더라도 나의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타나지 않는가?

 

     사람들 곁을 떠나려고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나는 그들 곁에서 앎을 나누면서 있으려는 욕망에 휩싸여 있었다.

     이 욕망에 휩싸인 순간마다 성숙을 추구하는 나의 자아는 사람들 곁에 머무르려는 것에 대해서 내게 의문과 의심도 주지 않았다.

 

     그때 이미 나는 고독으로 나아가길 바랐던 것 같다.

     두 욕망 사이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여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다 점차 더 성장하기 위해 사람들 곁을 떠나려고 마음먹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내가 미처 풀 이유도 느끼지 못했고, 해결하지 못한 문제,

     ‘나의 운명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의 문제가 내 앞에 나타났다.

     이 문제는 나를 불편하게 했지만, 나는 이 문제에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이 불편감을 마주해야 될 순간까지 말이다.

 

묶여있는 차라투스트라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던 차라투스트라는 교류의 욕망에 빠져 고독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아 신체여,

     너는 나의 생각 자체다.

     언제쯤이면 나는 내게 느껴지는 신체적 반응들을 모두 이해하고 꿋꿋이 버틸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언제쯤 나는 나를 잘 이해하고 굳은 의지를 가진 채 살아갈 수 있을까?

 

     아직도 나는 무의식적인 불안감이 느껴지면, 아직도 방황하고 긴장한다.

     신체적인 불안감/불편감만 느껴질 뿐 그 이유도 알지 못하기에,

     나는 어쩔 줄 모르는 상태에 놓이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내 운명에 대해서 제대로 마주하지 않았었다.

     그저 운명에 대한 의문을 품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직 운명을 마주하고 탐구하기에, 그리고 내 운명을 마주하고 견디기에 나는 아직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운명을 마주하는 것.

     그것은 내게 충분히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언젠가 나의 운명을 마주할 것이다.

 

     그렇게 운명과 마주하고, 운명을 이겨내어, 나는 더 큰 것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상 사회를 위한 노력을 하는 것 말이다.

     그러므로 운명에 대한 이해, 운명에 대한 승리는 나의 과업의 완성을 확증해주는 도장이 되어 주리라.

 

     나의 운명을 이해하기 전까지, 나는 방황할 것이다.

     우연히 운명을 이해할 단초를 마련할지 몰라도, 내 운명을 긍정할 수 없고,

     이상 사회를 위한 노력을 긍정할 수 없다면, 그것은 내가 찾는 것이 아니다.

 

     이상 사회를 위한 마지막 자질을 얻고 싶지만, 아직 그럴 기회가 내게 오지 않았다.

     아니면 지금 오고 있을까?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행복을 느꼈다.

     하지만 이는 내 삶에 있어서도, 내 삶의 목표에 있어서도 좋지 못하다.

 

     세상과 운명은 과연 내가 운명을 긍정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으며 바라본다.

 

     나는 세상과 운명이 지금 당장 내게 주는 행복을 불신한다.

     왜냐면 행복은 지금 당장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 나는 내 운명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느꼈던 행복을 밀어낸다.

 

     가라, 지금 나를 유혹하는 행복이여!

     내 의지에 반하는 행복이 내게 왔구나.

     나는 지금 더 성장하고 단단해지기 위해서 여기 와있다.

     아직 나는 이 행복을 누리기에 이르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행복이여,

     나에게 있지 말고 나의 벗들 곁에서 머물러라.

     그래서 그들이 삶에 대한 긍정을 포기하지 않도록, 내가 누렸던 삶을 긍정하며 사는 행복을 느끼게끔 해주라.

 

     마침 저녁, 사색의 시간이 다가온다.

     가라, 사람들과 어울리는 행복이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밤새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행복을 떠올렸다.

날이 밝자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하는 자신의 마음을 조롱하듯 말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행복이 아직도 내 곁에 있구나.

     내가 이 행복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니, 나를 끊임없이 유혹하는구나.

     이런 모습을 보면, 여자와 같다.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으니 유혹하는 여자 말이다.”

 

최후 결전을 준비하는 차라투스트라
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를 위한 노력과 더불어 성숙한 존재로서 자리하기 위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마지막 문제를 마주한다.

 


생각해볼 거리들

 

차라투스트라가 모든 고통을 극복하게 되었다는데, 이건 무슨 말인가? 차라투스트라가 숙명을 딛고 일어섰다는 건 뭘 말하나? 차라투스트라는 왜 기뻐하나?

ㅡ앞서 차라투스트라는 절망하면서, 침통해하는 상태였다.

ㅡ하지만 사람들로 벗어나면서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그래서 절망감을 벗어나게 된다.

ㅡ이로써 자신이 처한 상황을 좀더 이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ㅡ이런 상황에서, 차라투스트라가 극복한 고통은 사람들에 의한 실망과 그에 따른 절망이라고 할 수 있다.

ㅡ물론 완전히 절망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는 자신을 절망케 하던 문제에 대해서 마주하고 해결할 의지를 갖게 되었다.

 

ㅡ차라투스트라가 숙명을 딛고 일어섰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절망을 이제 마주하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앞서 「차라투스트라, 2권 22장」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숙명을 포기하려는 태도를 보였었는데, 이제는 그런 태도가 아니라 맞서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ㅡ차라투스트라가 기뻐하는 이유는 그래도 의욕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ㅡ앞서까지는 운명을 피하고 싶어하고 의기소침한 상태였는데, 이제는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 본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혼자이며, 혼자이기를 원하나? 왜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오후가 되었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주는 안정감과 행복감에 자신의 문제,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외면했다.

ㅡ그러면서 절망감에 휩싸이고 삶에 대한 불만을 지닌 채로 있었는데, 이를 해결하기 이해선 혼자서 사색할 시간이 필요했다.

ㅡ그리고 차라투스트라가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보여지므로,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혼자이기를 바란다고 할 수 있다.

 

ㅡ절망감에 젖어 있던 차라투스트라는 절망감을 벗어나게 된다.

ㅡ여기서 절망감에 젖어있었다는 것이 중요한데, 차라투스트라는 이 상태에서 자신의 절망감에만 주목했기에, 어떤 행동도 의욕하지 않았다.

ㅡ그저 지금 당장 자신에게 주어지는 무기력에 순응했던 것이고, 미래지향적으로 행동하지 않은 것이다.

 

ㅡ하지만 절망감을 벗어나면서 차라투스트라는 무기력에서 벗어났고, 이를 통해 미래지향적인 태도로 삶을 바라보게 된다.

ㅡ차라투스트라가 미래지향적이게 되는 것은 이상 사회를 고려한다는 것을 말한다.

ㅡ이로써 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를 위해서 무얼 해야 하는지, 멀리 내다보는 안목을 다시금 갖추게 된다.

ㅡ이 멀리 내다보는 안목을 바탕으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앎을 선사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ㅡ그렇다면 다시 오후가 되었다는 말은 무얼 말할까?

ㅡ오후는 정오를 지나 해가 지는 시점을 말한다.

ㅡ여기서 해/태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ㅡ태양을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존재로 언급되는데, 이에 따라 보면 해가 지는 것은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존재의 죽음을 의미한다.

ㅡ그리고 아침해가 뜨는 것은 차라투스트라를 계승하는 존재의 등장을 말한다.

ㅡ즉 오후라는 것은 차라투스트라가 이제 저무는 태양처럼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상태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ㅡ태양적 존재가 다시 떠오를 태양을 마련하지 않고 죽는다면, 이 세상은 암흑천지가 되게 된다.

ㅡ즉 부조리한 세상에서 올바름을 외치는 존재가 사라지면, 부조리만 가득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ㅡ이를 위해서 차라투스트라는 후계자를 양성해야 한다.

ㅡ그리고 후계자를 양성하기 위해서 자신의 앎을 나누고 교육하는 활동을 하는 것이다.

ㅡ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차라투스트라, 1권 21~22장」에서 업적을 쌓고 앎을 나누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ㅡ그래야 이상 사회를 바라는 이의 명맥이 끊기지 않고 이상 사회가 다가올 기회를 마련할 수 있으니 말이다.

 

ㅡ어쨌든 오후라는 것은 죽음을 앞둔 시점을 말하고, 이 순간 차라투스트라가 해야 하는 것은 미래를 위해서 후계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ㅡ즉 자신의 안위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멀리 내다보고서 행동해야 하는 시기인 것이다.

ㅡ이런 점에 따라서 오후라는 것은 나 자신만을 생각하며 바라보는 시점이 아니라 미래를 염두하고서 행동할 시점을 말한다.

 

ㅡ그런데 왜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오후가 되었다고 말할까?

ㅡ앞서 살폈던 것처럼, 차라투스트라는 절망에 빠지면서 미래를 전혀 고려치 못한 행동을 한다.

ㅡ즉 절망감에 빠져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지도 않고, 그저 대충대충 지냈던 것이다.

ㅡ이에 대해서는 「차라투스트라, 2권 22장」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스스로 이야기 한다.

          아, 내 벗들이여!

          내겐 아직 그대들에게 해 줄 말이 있고, 내겐 아직 그대들에게 줄 것이 있다!

          그런데 나는 어째서 그것을 주지 않고있는가?

          내가 인색해서 그런 것인가?

ㅡ차라투스트라 자신이 사람들에게 뭔가 제대로 전하고 있지 않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ㅡ어쨌든, 차라투스트라는 미래를 멀리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상태가 되었다가, 절망감을 견디게 되면서 다시금 미래를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ㅡ이때 미래를 멀리 내다보는 시점이 오후이므로, 오후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오후가 된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ㅡ차라투스트라가 태양이 뜨지 않는 상태로 나아갔다는 것도 이미 진술되긴 했다; 「차라투스트라, 3권 2장」

          최근에 나는 시체처럼 빛바랜 어스름 속을 울적하고도 괴로운 심사로 입술을 꾹 깨문 채 걸었다.

          내게 하나의 태양이 진 것만은 아니었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가 어둠 속에 빠졌다는 것을 말하는 부분이다.

 

ㅡ오후의 의미와 관련해서는 다음 구절을 참고할 수 있다; 「바그너의 경우, 서문 2절」

          그 행복의 노란 오후는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한지요!

          이때 우리는 멀리 내다보게 됩니다.

 

차라투스트라가 벗들을 만난 것이 오후라는 것은 무얼 말하나?

ㅡ오후는 앞서 말한 것처럼 미래를 위해 생각하는 시점이다.

ㅡ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사상을 존속시키고 싶어하기에, 자신의 뒤를 이을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ㅡ그렇게 만난 것이 차라투스트라의 벗들인 것이다.

 

모든 빛이 점점 고요해지는 시간은 뭘 말하나?

ㅡ빛이 고요해지는 시간이라고 표현되기는 했지만, 이는 약간 의미를 잘못 전달하는 번역이라고 본다.

ㅡ오후는 저녁으로 나아가는 과정이고, 이는 빛이 점점 사그라 드는 시점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ㅡ빛이 사그라 든다는 것은 해가 진다는 것을 말하고, 이는 곧 죽음에 이르는 시기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ㅡ그러므로 차라투스트라는 죽음을 앞두고 미래를 대비하기 시작하는데, 그런 점에서 모든 빛이 점점 고요해지는 시간은 미래를 염두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ㅡ즉 오후를 나타내는 색다른 방식의 표현인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를 여전히 떠돌던 행복이 자신이 머물 밝은 영혼을 찾고 있다는데, 그건 무얼 말하나?

ㅡ하늘과 땅 사이를 떠돈다는 것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삶이 하늘과 땅 사이에 있으니 말이다.

ㅡ이에 따라서 보면, 삶에서 떠도는 행복을 말하는 게 된다.

 

ㅡ그런데 기본적으로 이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하기 때문에, 행복한 곳이 되지 못한다.

ㅡ따라서 사람들은 세상에서 행복을 바라지 않고, 죽음 이후에 행복을 바라게 된다.

ㅡ만약 세상에서 행복을 바랄 수 있으려면, 부조리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보기에 이것은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부조리와 맞서 싸우고, 이렇게 노력하다 보면 이상 사회가 올 수 있고, 이 싸움이 내 대에서 끝나지 않을 지라도 언젠가 끝날 것이라고 본다.

ㅡ그러면서 이상 사회를 긍정할 수 있다고 보고, 이를 위해 노력하면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ㅡ그러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대지/삶에서 행복을 구하라고 외치는 것이다.

ㅡ따라서 하늘과 땅 사이를 떠도는 행복은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현생에서의 행복을 말한다.

 

ㅡ그런데 차라투스트라는 이 현생에서의 행복을 긍정하고 추구하는 것이 자신의 대에서 끝나지 않길 바라므로, 계승할 존재를 찾게 된다.

ㅡ이것을 표현한 구절인 것이다.

 

왜 그 행복 앞에서 모든 빛이 점점 고요해지나?

ㅡ차라투스트라가 마주한 행복은 현생에서의 행복이며, 이를 위해서 노력하다가 차라투스트라는 죽음을 맞이하려고 한다.

ㅡ즉 현생에서의 행복,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는 행복 앞에서 죽음을 맞이하려는 것이다.

ㅡ그러므로 이 행복 앞에서 빛을 발하는 존재인 차라투스트라는 노력하다 죽게 되는데, 이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내 삶의 오후는 무엇인가?

ㅡ앞서 말한 것처럼, 미래를 위해서 노력하는 시기를 말한다.

ㅡ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을 찾으러 나아가는데, 번역본의 후술되는 내용이 이를 나타낸다.

 

차라투스트라가 자기 사상의 활기찬 뿌리내림과 최고 희망의 아침놀을 얻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ㅡ앞서 이야기했듯이,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사상의 존속을 바라기 때문이다.

ㅡ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사상이 잘 뿌리내리고, 그것이 잘 퍼지길 바란다.

 

ㅡ그리고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차라투스트라가 태양이라고 한다면, 태양이 저무는 것은 죽음을 말한다.

ㅡ그리고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는 것은 차라투스트라를 계승하는 새로운 존재의 등장을 말한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 계승자, 후계자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ㅡ이것이 아침의 태양, 아침놀이라고 한다면, 차라투스트라가 가장 바라고 희망하는 것이 아침놀이라고 표현할 만하다.

 

ㅡ결국 해당 구절은 “자신의 사상이 사람들에게 잘 퍼지고, 그래서 자신의 후계자가 나타난다면 뭐든 못하겠는가?” 라고 말하는 구절인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창조자가 먼저 저들을 창조하지 않고서는 저들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차라투스트라, 서문 9장」에서부터 동료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ㅡ하지만 이 동료를 쉽게 찾을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되는데, 이로써 사람들에게 앎을 전하고, 재목이 될 존재들을 교육하기로 마음먹게 된다.

ㅡ이를 나타내는 구절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아이들에게 다가가기도 하고 돌아서기도 하면서 과업을 수행한다는데 이게 무슨 말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동료, 계승자를 만들기 위해서 사람들을 가르치고자 한다.

ㅡ그런데 그러다 실망하게 되어 사람들에게서 등을 돌리게 된다.

ㅡ이를 설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ㅡ그런데 왜 사람들을 가르쳤다가 돌아서는 게 왜 과업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말할까?

ㅡ사람들에게 교육하는 것은 과업을 수행하는 일종이므로 맞다.

ㅡ그런데 사람들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은 왜 과업을 수행하는 것일까?

 

ㅡ차라투스트라가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무능함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ㅡ즉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의 무능함에 실망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계속 설파해야 차라투스트라의 목적이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ㅡ문제는 가르친 보람이 없으면 계속 설파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절망 속에서 헤멘 것이다.

ㅡ하지만 과업을 위해선 가르치는 보람이 없어도 가르침을 지속해야 하는데, 이를 위한 방법을 고안해야만 한다.

ㅡ그러려면 사람들에게서 등을 돌려야 한다.

ㅡ왜냐면 가르치면서 절망을 극복할 방법까지 고안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이 시점에서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는 것 역시 자산의 과업을 수행하는 것의 일환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완성해야 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계승자를 바라고 사람들을 가르치는데, 사람들에게 실망하여 등을 돌리고 가르치기를 포기한다면, 계승자가 될 수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가르침이 전해지자 않을 수 있다.

ㅡ그렇기에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노력이 부질없더라도 지속할 수 있는 끈기를 지녀야만 한다.

ㅡ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런 끈기, 인내심이 없기에, 이를 길러내야만 하는 것이다.

ㅡ그러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운명,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를 해야만 하는데, 이것은 곧 자기 완성이 되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자기 아이와 과업만을 사랑한다고 말하나? 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잉태의 징조인가?

ㅡ사람은 자신의 후계자와 자기가 바라는 목적을 위해서 노력한다는 이야기다.

ㅡ그러므로 차라투스트라 역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자기 완성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ㅡ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뭘까?

ㅡ자기 완성은 자신의 운명을 긍정할 수 있을 때, 자신이 겪을 일들에 대해서 좌절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가능하다.

ㅡ즉 자신의 운명을 사랑할 때 가능한 것이다.

ㅡ그렇게 자신의 운명을 사랑할 수 있다면, 어떤 시련이 와도 견딜 수 있고, 그렇게 해야 자기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ㅡ이 자기 목적의 달성을 잉태의 징조, 출산의 징조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의 아이들이 어우러져 자라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뭘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었기에, 이를 바탕으로 사람들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의 아이들, 나무들이 어우러져 자라는 곳이 지복의 섬이라는데, 이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를 위하려는 사람들을 모아서 공동체를 만드는데, 이것을 지복의 섬/행복의 섬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ㅡ즉 지복의 섬/행복의 섬은 이상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공동체의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나무들, 아이들을 뽑아 고독을 배우게 하나?

ㅡ후술되기는 하는데, 차라투스트라의 후계자들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이상 사회를 긍정하고, 부조리에 맞서게 되면, 고독한 상황에 이르게 되기 쉽기 때문이다.

ㅡ이런 상황이 왔다고 변절하면 안 되므로, 고독을 배우게 하는 것이다.

ㅡ그리고 변절한다면, 그 자체로 계승자가 아니게 되므로 필요한 분별 작업이다.

 

불굴의 삶의 살아있는 등대가 되어야 한다는 건 뭔 말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를 가리키는 존재, 이상 사회의 등대였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계승자들 역시 그러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ㅡ문제는 부조리한 사회에서 이상 사회를 가리키는 것은 핍박받기가 쉬운데, 이에 굴하지 않아야 하므로, 불굴의 삶의 살아있는 등대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왜 울퉁불퉁한 마디와 굽어 있는 모양새와 휘어진 강건함으로 서있어야 한다고 하나? 왜 바닷가에 있나?

ㅡ이상 사회를 가리키는 존재로서 세상에 있게 되면, 여러 문제를 겪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디고 살아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ㅡ바다는 소금이 가득한 물인데, 소금물은 마시면 인간을 죽게 한다.

ㅡ그런 면에서 부조리와 비슷한데, 이에 따라서 바다는 부조리한 세상을 말한다.

ㅡ그러므로 바닷가란 부조리한 세상의 가장자리를 말한다.

ㅡ즉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부조리한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사람들에게 외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ㅡ그리고 세상과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채로 말이다.

 

폭풍이 바다로 돌진하는 곳은 무얼 말하나? 산맥의 코가 물을 빨아들이는 곳은 뭘 말하나?

ㅡ폭풍은 차라투스트라와 같이 부조리를 비판하기 위해 나아가는 것을 말하는 걸로 보인다.

ㅡ바다가 앞서 말한 것처럼 부조리한 세상이므로, 이렇게 보는 것은 적절해 보인다.

 

ㅡ산맥의 코가 물을 빨아들인다는 것은 정확히 알기가 어렵다.

ㅡ앞서 말한 폭풍과 바다의 경우와 같다고 본다면, 부조리가 있어서 다투는 곳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왜 각각의 나무는 저마다의 시험과 식별을 위해서 낮밤을 뜬눈으로 지켜내야 하나?

ㅡ각각의 나무들은 이상 사회를 가리키는 존재들이자 그러한 공동체를 유지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ㅡ그러므로 부조리한 자들이 와서 공격하더라도 버텨내고 지켜내야 한다.

ㅡ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각각의 나무의 혈통을 살피나?

ㅡ자신의 계승자를 얻고 싶어서 그렇다.

 

장구한 의지의 주인은 뭘 말하나?

ㅡ이상 사회를 추구하는 의지/성숙하려는 의지를 가진 존재를 말한다.

ㅡ이를 지녀야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존재로 나아갈 수 있다.

 

말을 할 때 왜 과묵한지 살피나?

ㅡ허황된 말이나 그릇된 것을 올바른 것처럼 말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ㅡ차라리 아무 말 하지 않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 나무가 관대한지 살피나? 주면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뭘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에 관심을 가진다면, 대체로 포용하려고 했다.

ㅡ이러한 점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앎을 나눠주면서 포용하는 모습을 지녔냐는 것이다.

 

함께 창조하고 축제를 벌일 만한 자인지 식별한다는 건 뭘 말하나?

ㅡ이상 사회를 위해서 같이 노력할 존재인지를 따진다는 것이다.

 

만물의 충만한 완성을 위해 내 의지를 내 서판에 기록하는 자라는 건 뭘 말하나?

ㅡ사회가 제공하는 걸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탐구하고 사색하며 받아들이는 자인지 살핀다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자신의 행복을 거부하고 불행에 자신을 맡기려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누리던 행복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행복이었다.

ㅡ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이 행복에 빠져 있기에, 고독으로 나아가고 홀로 탐구한다며 방황하는 것을 불행으로 본다.

ㅡ하지만 자기 긍정을 할 수 있어야 이상 사회를 위한 꾸준한 노력을 할 수 있으므로, 이를 위해 시도한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진정 떠나야 하던 시기는 언제인가?

ㅡ후술되기는 하지만,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좌절했을 때를 말한다.

ㅡ이때 차라투스트라는 이 좌절을 어떻게 극복할지 방법을 찾아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고, 사람들 곁에서 계속 앎을 나눠주려고 했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의 개인적 욕심의 작용이다.

ㅡ즉 다시 고독해지기 싫은 것이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의 성숙하고자 하는 자아는 이때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느꼈던 것이다.

 

바람이 열쇠 구멍으로 오라고 하고, 문이 교묘하게 열리며 가라고 한 것은 뭘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에 대한 가능성을 보고서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한다.

ㅡ이를 문 너머의 바람,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이 차라투스트라에게 오라고 했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ㅡ하지만 실제로 그 희망에 따라 행동을 해보니, 절망을 맛보았다.

ㅡ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아직 이 절망을 극복할 능력이 없었다.

ㅡ그런 점에서 저 문, 이상 사회로 나아가는 문은 차라투스트라에게 아직 능력이 부족하니 돌아가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ㅡ이 구절은 「차라투스트라, 2권 19장」의 문에 대한 이야기와 관련된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아이들에 대한 사랑의 사슬에 묶인 채 누워 있었다고 말하나?

ㅡ현재 차라투스트라가 처한 상황은 모든 것들이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지 말고 가서 수양이나 더 쌓으라는 상황이다.

ㅡ그런데 차라투스트라는 아이들, 자신의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을 놓고 싶지 않아서, 그들에게 묶여서 수양을 쌓으러 가지 않는 것이다.

ㅡ이는 적절하지 못한 차라투스트라의 욕망의 발현이므로, 후술되는 문장에서 ‘욕망이 자신에게 올가미를 씌었다’고 말한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소유에서 욕망이 남아있으면 안 되고, 확고해야 한다고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앎을 준다는 이유로 수양을 쌓으러 나아가지 않는다.

ㅡ이때 차라투스트라는 욕망에 사로잡혀서 그런 것인데, 이 욕망은 외롭기 싫은 욕망이다.

ㅡ즉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고 싶은 욕망이 작용한 것이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가 관계에 집착하고 있는 것으로, 관계에 대한 욕망의 작용이다.

 

ㅡ이렇게 차라투스트라가 관계에 대한 욕망을 가진 것은 홀로 있음/외로움에 대한 반감때문으로 보인다.

ㅡ그래서 어떻게든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 모양새인데, 올바른 관계, 올바른 교제, 올바른 관계 소유는 곁에 무조건 머무르려는 욕망에 따르는 것이 아니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ㅡ즉 떨어져 있더라도 자신과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믿음, 함께 한다는 믿음을 가졌을 때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차라투스트라의 사랑의 태양은 차라투스트라의 머리 위에 알을 품듯 있었나? 차라투스트라가 체액 속에서 끓고 있었다는 것은 뭘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관계에 대한 욕망으로 정신이 지배당한다.

ㅡ이를 차라투스트라는 사랑의 태양이 차라투스트라의 머리에 있었다고 표현한다.

 

ㅡ차라투스트라가 체액 속에 끓고 있었다는 것은 욕망에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체액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은 4체액설에 따른 표현이 아닐까 싶은데, 이에 따르면, 자신을 지배하는 체액에 따라서 행동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림자와 의심이 머리 너머로 날아갔다는 건 뭘 말하나?

ㅡ욕망에 따라 행동하고 있을 때, 이에 대해서 어떤 의심도 갖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그만큼 욕망에 빠져 행동했다는 걸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찬 서리와 겨울을 열망했다는데, 이건 뭘 말하나?

ㅡ서리와 겨울은 추운 것을 나타내고, 고독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ㅡ문제는 이것은 관계 욕망에 따르는 차라투스트라의 모습과는 다른 양상이라는 것이다.

 

ㅡ이에 따라서 보면, 「차라투스트라, 2권 22장」에서처럼 차라투스트라의 또다른 자아의 무의식적 활동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ㅡ이에 따르면, 차라투스트라는 욕망에 따라 행동하고 있었지만, 성숙하려는 자아는 욕망에 따르지 않고, 고독으로 나아가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그리고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차라투스트라가 뭔가 실망하거나 좌절을 느낄 때, 성숙하려는 자아가 불쑥불쑥 나와서 고독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 게 아닐까 싶다.

ㅡ이는 욕망에 빠져 행동하는 차라투스트라에게 명확하게 왜 느끼는지 모르지만, 뭔지 모를 찜찜함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과거가 무덤을 부수자 산 채로 파묻혔던 고통이 깨어났다고 하는데 뭘 말하나? 왜 그것들은 깊은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인가?

ㅡ차라투스트라의 무덤은 차라투스트라가 극복해온 자신의 생각들을 말한다.

ㅡ즉 차라투스트라의 현재는 과거의 생각들을 극복하면서 이어진 것이다; 「차라투스트라, 2권 11장」

 

ㅡ문제는 차라투스트라가 과거의 생각들을 극복하는 가정에서 미처 다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있었던 것이다.

ㅡ그리고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과 지내면서 가르치고 실망할 때마다 미처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뛰쳐나온 게 아닐까 싶다.

ㅡ이런 상태가 맞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공부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모든 것이 징표로서 내게 “때가 되었다”고 소리를 질렀다고 하는데, 어떻게 보아야 하나? 왜 차라투스트라는 듣지 않았나? 끝내 심연이 요동치고 사유가 물어 뜯었다고 하는데, 어떤 상태인가?

ㅡ일련의 상태를 보면, 공부/수양이 필요한 상태를 모든 것들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를 무시하고 있다.

ㅡ왜냐면, 관계 욕망에 대한 집착이 심한 상태기 때문이다.

 

ㅡ그래서 좌절과 절망이 극단에 이르러 모든 열의를 잃을 때까지 차라투스트라는 관계 욕망을 끊어내지 못하고, 고독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심연의 사유는 무얼 말하나?

ㅡ여기서 말하는 심연의 사유는 무의식적 사유를 말하며, 이는 「차라투스트라, 1권 4장」에서 말하는 신체에 해당된다.

 

왜 심연의 사유는 차라투스트라의 사상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신체적 반응을 기반으로 하여 사색하고 탐구한다; 「차라투스트라, 1권 4장」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를 권장한다.

ㅡ그러므로 심연의 사유가 신체적 반응이 맞다면, 차라투스트라의 사상인 것도 맞게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심연의 사유가 무덤을 파헤치는 소리를 들으면 떠는가?

ㅡ심연의 사유가 무덤을 파헤친다는 것은 이미 완결된 사유에서 불편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즉 뭔가 모자라거나 뭔가 부족하거나 뭔가 찜찜함을 늒게 하는 것이다.

ㅡ만약 차라투스트라가 아직 충분한 수행/통찰이 있는 게 아닌 상태라면, 뭔가를 가르치고 주장하면서 찜찜함이 느껴지면 긴장하게 될 것이고 당황하게 될 것이 뻔하다; 이를 심장의 고동이 목까지 차오르며, 목마저 조른다고 표현한다.

ㅡ즉 능력의 부족에서 오는 떨림인 것이고,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아직 성장이 더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ㅡ그러므로 차라투스트라는 완벽한 상태, 더는 찜찜함이 없는 상태를 바라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심연의 사유를 불러 올리려 하지 않았나?

ㅡ여기서 말하는 심연의 사유는 특정되는 것 같다.

ㅡ바로 운명에 대한 이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실망하면서 자신의 처지, 운명에 대해서 답을 갖지 못한 상태가 되는데, 이는 차라투스트라가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에서 전혀 예기치 못하게 나타난다.

ㅡ자신의 운명이 어떤 운명인지에 대한 의문이 분명 있긴 했겠지만, 굳이 문제되지 않으니 덮어둔 채로 살아왔던 것이다.

ㅡ또한 이에 대해서 답을 찾을 능력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ㅡ그러므로 운명과 관련된 찜찜함을 해결하려고 노력해본 적이 없어 보인다.

ㅡ그래서 운명을 이해해야 한다면, 막연하고 어렵게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ㅡ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심연의 사유의 무게 만으로도 무서웠다고 표현하는 듯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심연의 사유를 마주할 힘과 사자의 목소리를 찾고 말것이라고 말하나?

ㅡ여기서 말하는 심연의 사유는 운명에 대한 이해를 말하는데, 아직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긍정할지 방법을 찾지 못한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제 절망감에서 벗어나 운명을 이해하려고 의지를 가졌기 때문에, 운명을 이해할 능력을 갖출 것이라고 의지를 다잡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을 극복하면 더 큰일에서도 자신을 극복하게 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을 극복한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이해를 한다는 것을 말한다.

ㅡ차라투스트라가 자신에게 주어진 절망을 극복해낼 수 있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을 위한 노력을 하면서 부질없이 느끼더라도 가르침을 계속해서 전파할 수 있게 된다.

ㅡ이에 따라서 차라투스트라의 자기 긍정은 이상 사회의 노력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ㅡ이를 하나의 승리가 나의 완성을 확인해주는 인장이 된다고 표현한 것인데, 하나의 승리는 절망의 극복을 말하고, 나의 완성은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존재로서의 완성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그때까지 미지의 바다를 떠도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운명을 긍정해야 한다.

ㅡ그러기 전까지는 이상 사회를 위한 노력도 무의미하게 된다; 어차피 하다가 또 포기하게 될 테니까.

ㅡ그런 점에서 자신의 운명을 긍정할 때까지 떠돌게 된다.

 

우연이 아첨을 떤다는 건 뭘 말하나? 왜 아첨에 따라 앞뒤를 둘러봐도 끝이 보이지 않나?

ㅡ현재 차라투스트라는 운명을 이해하려고 하는데, 우연한 단상들이 나타나서 운명을 이해한 것처럼 차라투스트라를 꼬득인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대충 궤변을 통해서든 뭘 통해서든 운명을 이해한 것처럼 하려는 심리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ㅡ하지만 이는 올바른 답이 아니기에 차라투스트라에게 어떤 답도 제시해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최후 결전의 시간은 뭘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현재 이상 사회를 위한 자질 중 마지막 자질인 ‘가르침이 덧없어도 이어나갈 끈기’의 자질이 없다.

ㅡ이것을 가지면 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를 위해서 아무 보람이 없어도 노력할 수 있게 된다.

ㅡ이를 얻기 위해선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좌절하는 자신의 운명을 긍정해야 하는데, 이것이 최후의 결정이 된다.

 

왜 바다와 삶은 음험한 아름다움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바라본다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행복을 느끼고 있다.

ㅡ이것은 분명 차라투스트라에게 좋은 일이며, 아름다운 상황이 된다.

ㅡ하지만 이것은 차라투스트라의 목적을 수행함에 있어서 좋은 것이 아니다.

ㅡ그럼에도 차라투스트라는 학생들과 교류하는 것을 좋아하므로, 이를 향해 나아가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

ㅡ문제는 앞서 말한 것처럼 목적을 위해서 좋은 것이 아니기에, 차라투스트라는 계속해서 시험받고 있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ㅡ이에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바다와 삶이 내게 아름다움/행복을 주었지만, 그것을 따르면 나는 목적을 수행하지 못하므로, 유혹에 시달리고 있다” 라고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삶의 오후, 저녁을 앞둔 행복, 바다의 포구, 불확실함 속의 평화 이것들은 왜 차라투스트라를 믿지 못하나?

ㅡ각각의 것들은 모두 이상 사회를 위한 노력을 해서 계승자를 만드는 것을 목적하는 것들이다.

ㅡ이를 위해서 차라투스트라는 가르침이 부질없어도 지속할 수 있는 끈기를 지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긍정/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ㅡ그런데 과연 운명에 대한 긍정이 가능할까?

ㅡ이것은 어려워 보인다.

 

ㅡ또한 차라투스트라는 계속해서 사람들 사이에서 교류하고 싶어하는 욕심을 갖는다.

ㅡ이런 점들로 볼 때, 이상 사회를 위한 마지막 자질을 차라투스트라가 획득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 되는데, 대체로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삶의 오후는 미래를 위해서 멀리 내다보는 시기를 말한다.

ㅡ저녁을 앞둔 행복은 미래를 대비하여 행복한 상태에 놓인 것을 말한다.

ㅡ바다의 포구는 정확하지 않지만, 부조리한 세상에 자리한 이상 사회를 위한 터전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불확실함 속의 평화는 이상 사회의 가능성에 대해서 불확실하지만, 계승자가 나타나면 그나마 안도는 할 수 있으므로, 이 안도감을 평화로 나타낸 것 같다.

ㅡ결국 각각의 것들은 계승자를 바라고 있는 상태를 표현하는 것 같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그대들의 음험한 아름다움을 믿지 않나? 왜 차라투스트라는 이 열락의 시간을 밀쳐내나?

ㅡ음험한 아름다움은 교류의 행복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 행복을 따르면 자신의 목적이 실패하기 때문이다.

ㅡ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에게 분명 기쁘고 좋은 것이지만, 이를 배척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행복이 찾아왔다고 하나? 왜 때에 맞지 않게 자신을 찾아왔다고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성숙한 존재로서 나아가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자꾸 교류하고자 하는 욕망이 자신을 유혹한다.

ㅡ이 욕망에 따르면 성숙해질 수 없기에, 자신의 의지에 반한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ㅡ그리고 자신이 성숙해지고 나서 오면 좋은데, 아직 그러지 않으므로, 이르게 왔다고도 말한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지복의 시간이 아이들 곁에 머무르라고 말하나?

ㅡ여기서 말하는 지복의 시간은 행복의 순간으로, 차라투스트라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다.

ㅡ이는 즉 교류하며 얻는 행복을 말한다.

 

ㅡ이에 따라서 본다면, 차라투스트라는 교류의 행복을 자신의 아이들이 느끼게 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인데, 왜 그럴까?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학생들이 이상 사회를 위한 노력을 지속하길 바란다.

ㅡ이러한 노력을 지속하게 하려면, 이러한 노력을 하는 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야 한다.

ㅡ그런데 이런 노력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은, 올바른 이해를 하는 행복과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행복이다.

ㅡ여기서 후자가 차라투스트라의 학생들에게 쉬우므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동기를 주고, 그래서 이상 사회를 위한 관심과 노력을 지속하게 하기 위해서 교류의 행복을 아이들에게 보내려고 하는 걸로 보인다.

 

저녁이 가까이 왔다는 건 뭘 말하나? 왜 행복을 보고 가라고 하나?

ㅡ여기서 저녁과 밤은 오후와 같은 의미를 띈다고 보이지 않는다.

ㅡ왜냐면 차라투스트라가 밤새 불행을 기다리기 때문으로, 밤이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ㅡ그렇다면 무얼 의미할까?

 

ㅡ여기서 저녁과 밤은 사색의 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리고 차라투스트라가 밤새 사색을 했지만, 불행이 찾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ㅡ이는 다르게 말하면, 밤새 사색했지만, 운명을 이해할 단서를 찾지 못했단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ㅡ결국 저녁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운명에 대해서 생각해볼 시간이 되었다는 걸 말하는 걸로 보인다.

 

ㅡ그렇다면 왜 행복을 보내나?
ㅡ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교류의 행복이다.

ㅡ교류의 행복은 현재 차라투스트라에게 필요하지 않으므로 보내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에게 행복이 가까이 오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운명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려고 하지만, 여전히 교류행복에 대한 미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러므로 운명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실패하면서 방황하고 답답하니까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행복을 누리려는 마음이 살짝 드는 것 같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심장을 향해 웃고 조롱하듯 말하나?

ㅡ문제는 차라투스트라가 교류의 행복을 느끼고 싶어하는 건, 현재 차라투스트라의 의지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ㅡ즉 차라투스트라의 정신은 지독하게도 운명을 이해하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ㅡ그러므로 교류의 행복을 바라는 것은 무의식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고, 감정적 작용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는 심장이 교류의 행복을 바란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ㅡ그러므로 차라투스트라의 이성이 교류의 행복을 바라는 감정을 조롱한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행복은 여자라고 말하나?

ㅡ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교류의 행복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교류의 행복을 벗어나려고 하지만, 차라투스트라의 무의식은 쉽게 교류의 행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ㅡ이는 무의식이 교류의 행복에 유혹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를 ‘남자가 더는 관심을 갖지 않겠다고 말하자, 그 상대를 유혹하려고 하는 여자’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보고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