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3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3권 5장 의역 (완) (왜소한 덕,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7. 2. 02:22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3권 5장 왜소한 덕


         
5장 개괄

 
 
5장은 부조리에 순응하는 사회에 대해서 비판하는 장이다.
먼저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사람들 사이에서 비판받는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사실 이러한 비판은 사람들의 가치관을 지적하기에 얻게 되는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배척당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배척당하면서 차라투스트라의 의견은 사람들에게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고,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불만만이 중요하게 다뤄지게 된다.
이는 차라투스트라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실망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것들로 인해서 차라투스트라가 좌절한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처럼 자신들의 규율에 반대하는 차라투스트라를 사회에 순응하게 하려고 노력도 하지만, 차라투스트라 역시 이를 거부한다.
그러면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은 사회적 규율에 순응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질적으로 사회적 규율에 순응하는 사람이 적다는 비판도 한다.
그러면서 사회는 평화/안락함만을 바랄 뿐이며, 그렇기에 올바름을 위해서 사회가 나아가지 않고 있으며, 그렇기에 사회는 그저 부조리 속에서 존재할 뿐이라고 평가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길 바라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러므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사람들이 아직 없는 세계에 먼저 도착한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면 차라투스트라에게 있어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회는 올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의지를 다잡게 된다.

 


 
 

본문

 

-1-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산과 동굴이 있는 뭍에 도착했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곧장 자신의 동굴로 나아가지 않고, 사람들의 모습을 살피면서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동굴로 곧장 향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이 굽이 쳐 흐르는 강의 모습과 같다고 여겼다.
사실 차라투스트라가 이렇게 사람들의 모습을 살피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즉 사람들이 더 나은 존재가 되었는지 아닌지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서 전에 볼 수 없던 기이한 문화/유행이 퍼져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는 놀라며 말했다.
    “이러한 문화/유행은 대체 왜 나타난 걸까?
     내가 보기에 이러한 것들은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자가 고안한 것은 아닌 듯하다.
     미숙한 자가 고안한 걸로 보이는데, 어서 이것이 사라지기를.
 
     그리고 이런 문화를 올바른 이해를 가진 사람이 과연 적응할 수 있을까?
     이러한 유행은 사회적 규율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과 같은 존재나 사회 속에서 적당히 맞춰 살아가는 존재들이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곧 멈춰 서서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슬퍼하며 말했다.
    “사회는 더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악화되었구나.
 
     나는 이 기이한 문화를 바라본다.
     나 같은 사람은 이 문화 속에서 있을 수 있지만, 이러한 기이한 문화가 주는 스트레스를 참고 견뎌야만 한다.
 
     아, 나는 언제쯤 내가 원하는 사회 속에서 있을 수 있을까?
     기이한 문화에 대해서 불만을 표할 수 있고 문화로 인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않아도 되는 사회 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한 숨을 쉬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을 미숙한 존재/그릇된 존재로 만드는 덕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기이한 형태의 건물들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사람들에게로 와서는 새로운 문화들이 사회에 등장한 것을 파악하게 된다.
이 새로운 문화를 새 집으로 표현한다.


 

-2-

    “저는 사람들 사이에서 여러 이유로 비판받습니다.
     먼저 사람들의 문화와 미덕을 보고도 대단하다고 여기거나 부러워하지 않는다고 비판받습니다.
 
     다음으로 부조리를 허용하는 저들의 모습을 견디기 어려워서 이런 말을 하면 비판받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미덕을 원하고 갖추게 된다.
          그래서 올바른 사람은 올바름과 관련된 미덕을 그릇된 사람은 부조리를 허용하는미덕을 원하고 가진다.
          지금의 미덕은 부조리를 허용하는 미덕이니, 사회의 사람들 역시 그릇된 사람이다’
 
     여기에 더해서 저는 왜 사람들이 굳이 그릇된 이해를 가지고 살아가는지, 그리고 살아가면서 그릇된 이해를 가진 채로 살 필요가 있는지 공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들에게 악의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저 더 나아지기를 바라면서, 개선되기를 바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사람들의 무의식 중에 나타나는 사소한 부조리들을 지적하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쌓여서 부조리를 긍정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제 의도와는 달리, 저는 그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온 낯선 존재, 미꾸라지처럼 물을 흐리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저는 화두에 오르곤 합니다.
     이때 주된 주제들은 저에 대한 불만과 처분에 대한 것이지, 제가 말한 의견에 대한 고찰이 아닙니다.
     이것이 제가 새로이 배운 적막입니다.
     저에 대한 불만이 사람들의 입엔 오르지만, 제 생각은 전혀 입에 오르지 않는, 제 생각에 대해선 아무 말도 없는, 그러한 적막 말입니다.
     그렇게 제 생각과 의견은 저들에게 잊혀집니다.
 
     저들은 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차라투스트라가 우리에게 원하는 게 무엇인가?
          차라투스트라가 우리의 규율과 질서를 두고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는지 잘 지켜보자’
 
     아이를 가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차라투스트라가 아이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이상한 것을 알려줘서 착한 아이들을 망치니까요.’
 
     제가 저들에게 제 의견을 들려주면, 저들은 반박이랍시고 하지만, 사실 논리가 없습니다.
     그저 불만을 표출하는 것일 뿐이죠.
     저들은 제 의견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널 위한 시간이 없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데, 제가 보기에 시간이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칭찬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그들의 칭찬을 받고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목적을 가지고 저를 칭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칭찬에 따르다 보면, 되려 상처만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칭찬을 하는 이유를 살피면 기가 막힙니다.
     사람들이 칭찬을 하는 건 누군가를 단순히 칭찬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칭찬을 하면서 사이가 가까워지면 자신의 요구를 쉽게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즉 바라는 것이 있으니 칭찬을 한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저들의 칭찬이 달갑지 않습니다.
     되려 거북하죠.
 
     이들이 제게 칭찬을 하는 이유도 그렇습니다.
     이들은 제가 부조리한 사회의 일원이 되기를, 그래서 부조리 속에서 순응하며 사는 행복에 따르기를 바라고 칭찬을 하는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에게 불만을 가진 사람들
사람들은 차라투스트라를 입에 올리지만, 그의 가르침이 아닌 그에 대한 불만을 말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실망한다.


 
     사람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점차 더 미숙한 존재, 그릇된 이해를 가진 존재들이 되고 있습니다.
     점차 미숙해지는 것은 그들이 따르는 행복과 미덕에 대한 가르침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올바른 덕을 두고서도 겸손하려고 하는데*, 이는 사람들이 안락함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락함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겸손한 미덕들, 자신을 버리는 미덕들입니다.

* 올바른 덕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사양한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사회적 미덕에 기반하여 나름대로 삶을 살아가고 미덕적인 존재가 되려고 하지만,
     저는 그것이 올바른 모습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올바른 길로 나아간다고 하는데,

     그들의 행동은 올바른 길을 나아가려는 자들에게 방해만 될 뿐입니다.
 
     이들 중 일부는 사회적 미덕에 따라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회의감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런 자들이 제 눈에 띈다면, 저는 그들에게 올바름을 추구하는 삶에 대해서 기꺼이 토론하여 알려주려 합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 그릇된 것을 올바르다고 여기며 나아가면 안 될 겁니다.
     물론 그릇된 것을 올바른 것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는데,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벌어질 수 있으므로, 벌할 필요까지는 없죠.
     이제라도 잘 나아가면 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릇된 이해를 가진 자들에게는 그릇된 이해를 올바른 것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람들 중 일부는 정말 사회적 미덕을 원해서 그에 따라 행동하지만,

     대부분은 실제로 사회적 미덕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미덕적이라고 여겨질 때 얻는 혜택을 보기 위해서 사회적 미덕을 원하는 것처럼 행동하죠.
 
     사람들 중에는 올바른 것이 뭔지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사회적 미덕에 따르는 경우가 있고,
     올바른 것이 뭔지 모르고 사회적 미덕에 따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올바른 것이 뭔지 알면서 사회적 미덕을 반기고 따르는 경우는 거의 없죠.
     결국 누구든 간에 사회적 미덕에 진심인 경우는 드문 것입니다.

 
     사회적 규율에 따르는 곳에서는 통찰력을 갖춘 남자가 없습니다.
     여자들은 통찰력 있는 남자를 원하는데, 남자들은 그러지 않으므로, 여자들은 남성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여성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오로지 통찰력을 갖춘 남자만이 여자들 안의 여성성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죠.
 

주인과 노예
사회적 규율은 사람들을 순응하게 하여, 부조리한 사회를 유지한다.


 
     저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좋지 못한 위선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을 이끄는 지도자들이 이끌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양치기여야 할 존재가 그저 양 떼 중 하나였던 겁니다.
 
         ‘나도 규율을 따르고, 너도 규율을 따르고, 우리 모두 규율을 따른다’
     지도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 중에서 가치를 제시하고 이끌어야 할 존재가 기존 가치만 따르는 존재라니,
     지도자로서 부적합한 자가 지도자인 상황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것말고도 사람들의 위선이 더 있나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미숙한 자들/그릇된 자들이 누리는 행복과 입장에서 위선을 알아차렸습니다.
 
     저들은 선과 정의와 동정을 말하는데,
     저들이 외치는 선과 정의와 동정 속에서 정신적 유약함을 보았습니다.
 
     저들은 서로 부딪히지 않고 둥글게 잘 지내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부조리한 것을 견디고 위로해주는 것.
     이를 부조리한 삶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부조리 속에서 순응하며 사는 행복, 안락함을 바라보는 것이죠.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단순합니다.
     그 누구도 자신들을 괴롭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타인에게 다가가서 잘 대해주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미덕이라고 부르지만,
     이것은 비겁한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는다면, 타인의 부조리/자신의 부조리를 방치하는 것이 되고,

     이로써 온전한 사회를 위한 노력, 부조리로 인한 피해를 줄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한 번씩 자신의 입장을 강경한 태도로 말하곤 합니다.
     이러한 그들의 이야기는 제가 보기에, 어떤 의미/내용도 담고 있지 않은 채, 감정 토로하려고 소리만 지르는 모양새로 보입니다.
 
     그들은 분명 영리한 사람들이지만, 사회에 순응함으로써 부조리에 맞설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는 사람들의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순응해야 한다는 미덕 때문이겠죠.
     이 미덕으로 인해서, 인간은 부조리에 순응하며 사는 가축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죠.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습에 대해서 미소를 띄며 이렇게 평하곤 합니다.
         ‘우리는 무모한 이상주의자도 아니고, 향락적인 존재도 아니다.
          우리는 현실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들이 이도 저도 아닌 존재라는 걸 말할 뿐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하겠지만요.
 

둥근 모래알들
사람들은 최대한 서로 부딪치지 않으면서, 불편함 없이 평화롭게 지내길 바란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조리에 순응하려고 하는 것이다.


 

-3-

 

     저는 사람들 사이에서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제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죠.
 
     사람들은 제가 문란함이나 반사회적인 것들을 비난하지 않는 것에 놀라워하는데,
     제가 그렇게 사소한 것들을 조심하라고 하려고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죠.
 
     사람들은 제가 그들의 지혜를 더 풍부하게 해주려고 온 게 아니란 점에서 놀라워합니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 주변의 대중적인 식자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죠.
 
     사람들에게 제가 ‘여러분 내면에서 종교적 교리를 따르라고 하는 생각을 벗어 던지십시오!’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차라투스트라는 신을 부정한다'고 외칩니다.
     특히 교리에 순응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더더욱 그렇게 외치죠.
 
     사람들이 그렇게 제게 말하면,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신을 부정하는 차라투스트라입니다!’
 
     사람들이 교리에 순응하게끔 가르치는 자들은 사람들 내면의 취약한 곳을 쏘다니는 벌레처럼 살아갑니다.
     저는 이러한 사람들을 상대하길 꺼리는데, 저들과 논쟁하면 역겨움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설교합니다.
         ‘저는 신을 부정하는 차라투스트라입니다.
          저보다 더 신을 부정하여, 제가 기쁘게 가르침을 청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저와 같이 신을 부정하는 사람은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저와 같은 자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행동하며, 어떤 교리나 규율에 대한 순응을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현상들 속에서 진실을 파악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올바른 진실을 파악하게 되면, 저는 그것을 저의 진리로 삼죠.
 
     실로 많은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현상들이 제 앞에서 펼쳐집니다.
     저는 이 현상들 속에서 질서를 찾고, 올바른 이해를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무질서한 현상들은 제게 와서 애원합니다.
     자신들을 왜곡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를, 자신들을 통해 올바른 이해를 가져주기를 애원합니다.
     이 현상들은 자신들을 올바르게 이해해주길 바랐던 것입니다.
 
     현상들이 이를 바라고 제게 애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현상은 자신들을 올바로 봐주기를 바라고, 그렇게 볼 대상으로 저를 찾은 것이니까요.
     현상들에게 저는 그들을 올바르게 바라봐 주는, 소통할 수 있는 친구와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를 찾은 우연
무질서한 현상(우연)은 그릇된 이해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오해되는 상황에 놓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우연을 오해받는 존재로서 의인화하여 자신을 찾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제가 만났던 그 누구도 제 이야기에 귀를 제대로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어딘가에서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사람이 있을지 말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이야기가 널리 퍼질 수 있게, 그래서 제가 만나지 못한 이들에게도 닿을 수 있게 하는 것 말곤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외칩니다.
      
         ‘그릇된 이해를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이여,
          여러분은 점점 더 자신을 잃을 것입니다.
 
          안락을 추구하던 자들이여,
          너희가 따르는 미덕, 자기 자신을 버리고 규율에 순응하는 것으로 인해서 여러분은 자신을 잃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조리에 지나치게 관대하고, 부조리에 고통받는 자들을 지나치게 보살피려 합니다.
          그렇게 부조리를 저질러도 간섭하지 않고, 그저 부조리에 고통받는 자가 회복할 수 있게 동정하고만 있으니,
          이 세상이 부조리로 가득한 것 아니겠습니까?
          개인이 내적인 성장을 이루려면 동정해선 안 되고*, 부조리는 개선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겁니다.

*동정하지 않아야 사회적 부조리에 맞서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 어떤 노력도 하고 있지 않죠.
          현재의 여러분이 어떤 노력도 하지 않기 때문에,

          미래의 인류는 여전히 부조리에 시달리게 될 겁니다.
 
          사회적 규율에 따르지 않고 허무함만을 느끼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허무함/무의미함 역시 미래 인류가 부조리에 시달리는 것을 방치하게 되니까요.
 
          사람들은 현명한 자들로부터 통찰을 나눠 받더라도, 그것을 본래 자신의 통찰이었던 것처럼 말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평판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뻔뻔함에도 나름의 규칙이 있습니다.
          ‘업적에 따른 평판을 내가 가질 수 없을 때만 훔칠 수 있다’는 것이죠.
 
          ‘부조리에 순응한 채로 있으면, 저절로 너에게 미덕이 주어진다’
          이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부조리에 순응하게 하려고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는 거짓입니다.
          그렇게 여러분이 순응한다면, 여러분은 점차 자신을 빼앗기고, 피폐해지게 될 것입니다.
 
          아, 상황이 이러한 데도, 여러분은 규율에 순응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여러분들이 규율에 순응하지 말든 규율에 적극 맞서든 결단을 내리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에게 제 바람이 잘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되, 먼저 자기 의지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자가 되기를.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되, 먼저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되기를.
          이상적 존재로 거듭나려 노력할 존재로서 자신을 사랑하고, 부조리에 순응하였던 미숙했던 자신을 경멸하기를'
 

바람에 날아가는 연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이야기에 귀기울일 사람을 찾기 위해, 바람에 연을 날리듯 자신의 앎을 외친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제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 곳에서 저는 무얼 하고 있는 걸까요?
     사람들 사이에서 제가 이런 말들을 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습니다.
 
     이상 사회를 바라는 자들이 아직 많이 없기 때문이죠.
     그런 면에서 저는 동이 트는 것을 알리고 있는 수탉과 같습니다.
 
     아, 극적인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낍니다.
     사람들이 점차 더 그릇된 이해에 빠져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순간이,
     저와 같이 이상 사회를 바라는 자들이 세상을 지배할 순간이.
 
     이 순간이 되면, 사람들은 피폐해진 상태로, 제 앞에 있을 것입니다.
     사회적 규율에 따른다며 자신을 억압한 자기 자신을 혐오하면서 말이죠.
 
     세상의 부조리가 모두 사라지는 순간이여!
     올바른 이해가 세상을 지배하는 그 비밀스러운 순간이여!
 
     저는 사람들을 이상 사회를 긍정하고, 이상 사회를 예고하는 자들로 만들 것입니다.
     언젠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상 사회가 오고 있다.
          이상 사회가 이제 가까이 와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새벽을 알리는 수탉
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가 반드시 올 것인데,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없다는 점을 통해
자신이 세상에 너무 빨리 왔고 그래서 이상 사회를 알리는 수탉 같은 존재라고 느끼게 된다.


생각해볼 거리들

 
굽이굽이 돌고 돌아 자기의 원천으로 되돌아가는 이 강을 보라!”라는 말은 왜 나오는 것일까?
ㅡ차라투스트라가 바로 동굴로 가지 않고, 사람들의 모습을 살피러 이리저리 다니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새 집들이 열을 이루어 서 있다는 것은 무얼 말하나?
ㅡ집은 건축물을 말하는데, 건축한다는 것은 쌓아 올린 것을 말한다.
ㅡ앞서 도덕이나 규율들이 쌓아 올려진 것이나 건축물로 표현되는데, 그런 측면에서 새로운 건축물은 새로운 도덕이나 규율, 관습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ㅡ도덕이나 규율을 쌓아 올린 것으로 보는 구절 중에는 「차라투스트라, 2권 7장」에서 사원을 언급하며 나타난다.
 
집은 왜 위대한 자가 세운 게 아니라고 하나? 왜 멍청한 아이가 세웠다고 하나?
ㅡ이러한 말로 볼 때, 새로 세워진 규율이 기존 관습에서 확장되거나 파생된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ㅡ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규율이 어서 사라지면 좋겠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모든 것이 더 작아지고 말았다고 말하나?
ㅡ작아졌다는 것은 왜소해졌다는 것을 말하고, 이는 인간이 좀스러워졌다는 것을 말한다.
ㅡ이에 따라서 작아짐은 미성숙해짐, 그릇된 이해를 믿고 있는 상태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낮아진 문들은 무얼 말하고, 왜 허리를 굽혀서 들어가나?
ㅡ낮아진 문은 왜소한 사람들이 다니는 것을 말하고, 그들의 규율과 관습을 상징한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앎을 전달하면서, 자신과 함께할 존재들을 찾기에, 사람들 사이에서 버텨야 하고, 그렇기에 원치 않지만 사람들의 규율과 관습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
ㅡ이를 허리를 굽혀서 들어간다고 표현한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고향은 무엇인가?
ㅡ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고향은 이상 사회이다.
ㅡ이는 미성숙한 자들의 관습에 맞추지 않고, 미성숙한 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서 살 수 있는 장소를 말하기 때문이다.
 
왜 대중들은 차라투스트라가 자신들의 덕을 부러워하지 않음을 용서하지 않나?
ㅡ자신들의 덕을 따르지 않는 존재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ㅡ이로써 정의 구현이란 명목으로 차라투스트라를 괴롭히거나, 차라투스트라의 비판에 대해서 앙심을 품고 괴롭히게 된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왜소한 자에게는 왜소한 덕이 필요하다’고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사람들이 가지는 덕은 그릇된 이해에 기반한 덕이다.
ㅡ그릇된 이해에 기반한 덕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ㅡ그렇다면 그릇된 이해에 기반한 덕은 어떤 이가 가질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생긴다.
ㅡ그에 따라 본다면, 애초에 그릇된 이해를 추구하는 자들이 가지게 된다.
 
ㅡ그런데 사람들은 누구나 그릇된 이해를 가지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차라투스트라의 저 말은 “너가 지금 따르는 것들은 그릇된 이해를 가진 사람들이 갖는 것인데, 너는 그릇된 이해를 가지려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동반하고 있다고 볼 여지도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왜소한 자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하는가?
ㅡ이 문장은 차라투스트라는 왜소한 자들, 그릇된 이해를 따르는 자들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ㅡ물론 사람들이 따르는 그릇된 이해가 부조리한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기에, 필요를 인정받을 수 있긴 하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의 논리가 좀 더 이상적이다.
ㅡ왜냐면 이상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회라면, 그릇된 이해를 가진 자가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소한 것에 대해 가시 돋쳐 있는 것은 고슴도치의 지혜라고 하는데, 이는 뭘 말하나?
ㅡ사소한 것에도 비판적인 것이 지혜라는 이야기다.
ㅡ이는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가 모여서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기에 나타난 표현으로 보인다.
ㅡ즉 누군가 음주 운전을 했는데, 음주 운전을 한 번씩 봐주면, “전에 봐줬으니 이번에 그런거다”라는 식의 논리도 전개하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새로운 적막은 무엇인가? 나에 대해 말하지만, 나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뭘 말하나? 왜 차라투스트라의 사상은 외투로 덮이는가?
ㅡ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지만,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불만만이 오를 뿐,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오르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ㅡ이는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있지만, 전혀 자신의 의도대로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ㅡ즉 말을 해도 아무 반응이 없는 고요한 상태/적막 상태인 것이다.
ㅡ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그렇게 불만에 덮여 버리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말을 하면 왜 사람들은 기침을 하는가? 기침은 무엇을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말을 하면 사람들은 차라투스트라의 의견에 반발하게 된다.
ㅡ이때, 자신의 가르침의 오류를 지적하지 않고, 그저 이상한 꼬투리를 잡아서 지적하는 모습을 본 것으로 보인다.
ㅡ그렇기에 사람들이 반발하여 말을 하지만, 그 말이 아무 의미도 없고, 감정만 뿜어내는 것으로 보이고, 이는 곧 말이 아니라 숨만 내뿜는 상태로 비유될 수 있다.
ㅡ이를 기침으로 표현한 것이다.
ㅡ즉, 사람들의 말은 공허하고 아무 의미도 영양가도 없는 소리를 하니, 기침과 다를 바가 뭐가 있냐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차라투스트라에게 ‘차라투스트라를 위해서 낼 시간이 없다”고 말하나? 왜 차라투스트라는 그런 시간 따위가 대체 뭐냐고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하는데, 이를 거절할 때 하는 이야기로 보인다.
ㅡ이는 사실 실질적으로 시간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듣고 싶지 않아서 대는 핑계로 차라투스트라가 본 듯하다.
ㅡ즉 “시간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고, 들으려고 하지 않는 마음이 문제 아니냐” 라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사람들이 칭찬하고 치켜세워줘도 편히 잠들지 못하나? 왜 사람들의 칭찬은 차라투스트라에게 가시 박힌 허리띠인가?
ㅡ후술되기는 하지만, 사람들의 칭찬은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한 빌드업이기 때문이다.
ㅡ그래서 사람들의 칭찬을 듣는 순간부터 사람들의 칭찬이 비난으로 바뀌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맞춰서 행동해야 하는 문제에 놓일 수 있다; 사람들이 칭찬을 하던 대상이 사람들의 예상과 달라지면 칭찬했던 게 무색하게 비난의 대상이 되곤 한다.
ㅡ그런 점에서 마냥 좋은 것이 아닌 나를 찌르고 괴롭히는 요소로 여겨지는 것이다.
 
칭찬하는 자는 돌려주는 것처럼 꾸며대지만, 사실은 더 많은 것을 받아내기 원한다는 건 뭘 말하나?
ㅡ칭찬하는 자는 상대에게 칭찬을 해줘야 할 것을 그대로 칭찬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상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기에 칭찬한다는 것이다.
ㅡ즉 정말 순수하게 칭찬하는 경우가 잘 없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왜 차라투스트라를 왜소한 덕으로 끌고 가려고 하나? 작은 행복의 똑딱거림으로 향하라는 건 무얼 말하나?
ㅡ사람들은 사회적 규율에 순응하지 않는 차라투스트라를 순응하게 만들려고 한다는 이야기다.
ㅡ작은 행복은 사회적 규율에 순응하면서 부조리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ㅡ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엔 이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 이상한 행복이며, 차라투스트라는 진정한 행복을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면서 성장하는 것이라고 본다.
 
왜 사람들은 점차 왜소해지는가? 왜 사람들이 따르는 행복과 덕에 대한 가르침은 사람들을 왜소하게 만드는가?
ㅡ사람들은 사회적 규율을 따르는 존재들로, 사회적 규율을 따르면서 올바름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가지게 된다.
ㅡ즉 사회적 규율을 통해서 진정한 행복이 개인을 억압하고, 부조리를 견디는 거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ㅡ이를 통해서 그들은 고통을 견디며 사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이는 결국 사람들이 올바른 인식과 점차 멀어지는 상태로 간다.
ㅡ이를 점차 왜소해진다고 그릇된 이해 속에서 함몰되어져 간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왜 사람들은 덕에서도 겸양을 부린다고 하나? 겸손한 덕만이 안일과 어울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선, 겸양/겸손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ㅡ앞서서도 겸손이란 말이 몇 번 언급되기는 했지만, 관련해서 찾아본다면, 「유고 (1882년 7월~1883/84 겨울)」에서 다음의 구절이 있다.
     226.
     자신을 낮추고 훔쳐지고 기만당하고 착취당하고 싶어하는 경향, 요컨대 겸손은
     인간들 사이에 있는 신의 수치일 수 있다.
ㅡ이 구절로 볼 때, 겸손은 단순히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 희생 및 착취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ㅡ따라서 덕에서도 겸양/겸손을 부린다는 건, 자기 희생 및 착취를 허용한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즉 사람들이 따르는 덕은 사람들의 자기희생/착취를 허용하는 덕이란 이야기다.
 
ㅡ그러면 왜 이런 덕이 안일함/안락함과 관련될까?
ㅡ이렇게 되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희생하고 착취를 당하면 어떤 문제도 크게 번지지 않기 때문이다.
ㅡ즉 사람들이 조금씩 희생하면 분란이 생기지 않고 평화가 유지되는 것이다.
ㅡ따라서 자기희생과 관련된 규율들은 평화를 위한 것과 관련되는 것이다.
ㅡ이를 통해서 겸손한 덕과 안일이 어울린다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도 나름대로 앞으로 나아가는데, 왜 절름거린다고 하나? 왜 바삐가는 자 모두에게 장애가 되나?
ㅡ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나름대로 성장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인데, 문제는 그들이 그릇된 이해를 바탕으로 성장하므로, 그릇된 성장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ㅡ이에 따라서 그릇된 성장을 했다면, 정상적인 거동이 어려운 상태/장애를 가졌거나 기형적 상태라고 할 수 있으므로, 절름거린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럼 왜 이런 자들이 바삐 가는 자에게 장애가 될까?
ㅡ우선 여기서 바삐 가는 자들은 이상 사회를 향해 가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ㅡ왜냐면 바삐 간다는 것은 올바르게 걷는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는데,
ㅡ그릇된 이해를 가진 사람들이 누군가 올바른 이해의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 그들을 못 가게 막거나 공격하기 떄문이다.
 
왜 사람들 중에서 여럿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뒤를 돌려 보나? 그리고 왜 차라투스트라는 이런 자들의 몸을 향해 가서 부딪치는 것을 즐기나?
ㅡ몸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뒤를 돌아보는 존재는, 지향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다른 존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지향점과 행동하는 것이 다른 경우는 대체로 자신이 나아가는 길에 회의적인 존재로 볼 수 있는데, 이때 사람들은 사회적 규율에 따라 나아가니까, 여기서 언급되는 사람은 사회적 규율에 따라 나아가는 것에 회의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ㅡ그러면 차라투스트라는 왜 이런 존재에게 부딪치는 걸 즐길까?
ㅡ이 존재는 사회적 규율에 따르는 것에 회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므로, 이러한 사람들에게 회의적 관점을 강화시켜주게 되면, 이들은 사회적 규율에 따라 나아가지 않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ㅡ그러므로 이상 사회로 나아갈 존재를 찾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이러한 존재들은 어쩌면 좋은 후보자에 해당되는 것이다.
 
발과 눈은 거짓말을 해선 안 된다는 것은 무얼 말하나?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서로 벌해서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왜소한 자들에게는 거짓 나부랭이가 많나?
ㅡ발과 눈은 몸의 지향과 의식의 지향을 나타낸다.
ㅡ이때 이 지향점이 뭔가 거짓을 나타내면 안 된다는 것인데, 앞서 말한 것으로 보면, 지향점이 그릇된 방향이면 안 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ㅡ즉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존재이므로, 그릇된 것을 올바르다고 인식하며 나아가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런데 누구나 그릇된 것을 올바른 것으로 착각하고서 따라갈 수 있다.
ㅡ즉 한 번에 올바른 방향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ㅡ따라서 만약 그릇된 것을 올바른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었었다면, 그것을 두고 문제시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ㅡ앞으로 잘 해나가면 되는 것이니 말이다.
 
ㅡ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우리가 올바른 것을 추구하고, 올바른 것을 향해 나아가려고 해야 하는데, 그릇된 이해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릇된 것을 올바르다고 하는 존재가 있는 것이다.
ㅡ그래서 사람들은 그릇된 것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ㅡ이를 지적하는 것으로 보인다.
 
저들 중 몇몇은 의욕하지만 대다수는 의욕의 대상이란 건 뭘 말하나? 왜 몇몇은 진짜지만, 대다수는 서툰 배우인가?
ㅡ저들은 일반 대중들을 말하므로, 대중들이 의욕하는 것을 살펴야 하는데, 이들이 의욕하는 것은 사회적 규율에 따라 사는 것이다.
ㅡ하지만 사람들은 사회적 규율을 중시하면서도 사회적 규율을 잘 따르지 않는데, 이러한 현상은 말로는 사회적 규율을 중시하지만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걸 말한다.
ㅡ즉 사회적 규율을 중시하면서 행동까지 하는 경우는 적다는 이야기다.
ㅡ그러므로 사회적 미덕에 대해서 몇몇 사람들만 의욕하지, 실제로는 사회적 미덕을 갖춘 채로 보이려는 사람들만 많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ㅡ이는 사회적 규율에 대한 사실 고발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저들 중에는 자신의 앎에 반하는 배우가 있고,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배우가 있나? 왜 진짜는 드문가? 진짜 배우는 뭘 말하나?
ㅡ여기서 저들은 사회적 규율을 따르는 자들이고, 사회적 미덕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ㅡ그런데 사람들이 사회적 규율을 따르려 하고 미덕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사회적 규율을 따라야 한다고 느끼면서도 따르지 않는 경우가 있다.
ㅡ이럴 때, 이 사람이 사회적 미덕을 갖춘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면, 이는 사회적 규율에 따르지 않으면서 사회적 미덕을 갖춘 채 하는 배우가 된다.
 
ㅡ또 사회적 규율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고 무의식적/정동적으로 느끼지만 사회적 규율을 따르는 사람이 있다.
ㅡ이 사람 역시 자신의 본성은 사회적 규율을 반대하면서 사회적 규율을 잘 따르고 있는 존재처럼 행동하므로, 배우로 여겨진다.
 
ㅡ진짜에 대한 언급은 사회적 미덕을 정말 추구하고, 그것을 옳다고 여기는 경우를 말한다.
ㅡ이런 경우는 정말 없다는 이야기다.
 
ㅡ진짜 배우의 경우는 명확하지 않다.
ㅡ단순히 진짜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또 다른 배우 유형이 있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사내다운 사내가 드물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사내다운 사내는 부조리에 맞서는 사내를 말한다; 「차라투스트라, 1권 18장」과 「차라투스트라, 1권 10장」을 참고하자.
     1권 18장
     사내는 싸움을 위해서, 여자는 전사의 휴식을 위해서 양육되어야 한다.
     그 외의 것은 전부 어리석은 짓이다.
 
     1권 10장
     그대들이 인식의 성자가 될 수 없다면, 적어도 인식의 전사라도 되어라.
     인식의 전사는 인식적 성스러움의 길동무이자 선구자.
 
     많은 병사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나는 많은 전사가 보고 싶다!
     사람들은 병사들이 걸친 옷을 "유니폼"이라고 부르지.
     저들이 그 유니폼으로 감추고 있는 것이 유니폼하지는 않기를!
 
     그대들은 언제나 자신의 눈으로 적을, 그대들의 적을 찾는 자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대들 중 몇몇은 첫눈에 증오를 느끼기도 한다.
 
     그대들의 적을 찾아내어 그대들의 싸움을 수행해야 한다.
     그대들의 사상을 위해!
     그대들의 사상이 패배하더라도 그대들의 정직함만큼은 패배를 넘어 승리를 외쳐야
     한다!
ㅡ이 두 장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내다운 사내는 부조리에 맞서는 존재로서의 사내를 말한다.
ㅡ이를 통해서 보면 사내다운 사내가 없다는 건 부조리에 맞서는 사내가 없다는 이야기고, 다시 말해 부조리에 순응하는 사내가 많다는 이야기가 된다.
ㅡ부조리에 순응한다는 것은 사회적 규율에 따른다는 것이므로, 사고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즉 이성적이지 않다는 이야기다.
 
여자들은 왜 사내처럼 되어간다고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나누는데, 남자는 부조리에 맞서지만, 여자는 부조리에 맞선 자를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ㅡ그러므로 여자들이 사내처럼 된다면, 부조리에 맞서는 존재로 인식해볼 수도 있다.
ㅡ하지만 니체가 보기에 부조리에 맞서는 여성은 적고, 게다가 사랑하는 경우라면 부조리도 감수할 수 있는 맹목성도 지니게 된다.
ㅡ그런 점에서 여자들이 사내화 된다는 것을 두고 부조리에 맞서게 된다는 이야기로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ㅡ그렇다면 여자들이 사내화 된다는 것은 뭘 말하나?
ㅡ앞서 사내다운 사내가 드물다는 것은 스스로 사고하는 자가 드물다는 이야기로 봤었다.
ㅡ그런 점에서 보면, 스스로 사고하는 여자들/이성적인 여자들이 생긴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ㅡ이는 즉 부조리에 맞서는 건 아니지만, 올바른 이해를 원하는 여자들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왜 충분히 사내다운 자만이 여자 속에 있는 여자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하나?
ㅡ기본적으로 차라투스트라의 성관념에 따르면, 남자들이 이성적인 부분에 특화되어 있고, 그래서 이성적인 부분이 특화된 남자라면 여자들이 의존할 수 있다고 여겨서 이 남자를 보조하고 도우며 함께 살아가는 이상적 관계가 된다.
ㅡ그런데 만약에 남자가 이성적인 부분에서 제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여자는 남자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게 될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여자가 남자에게 의존하고 따르면서 옆에서 지지해주는 그 모습을 여성성이라고 보고 있는데, 여자들이 이성적이지 못한 남자에게는 자신의 여성성을 숨긴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남녀에 대한 이러한 종속적 관계가 문제시 될 수 있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여자들도 이러한 관계를 바란다고, 여성성을 드러내며 살기를 바란다고 본다.
ㅡ왜냐면 여자가 자신의 여성성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는 관계를 바란다고 보기 때문이다.
ㅡ이는 여자들이 사랑에 빠졌을 때 보이는 모습에서 관찰해볼 수 있을 듯하다;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경우 말이다.
ㅡ이런 면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여자들의 여성성이 발현되려면 이성적인 남자가 일단 나타나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 틈에서 차라투스트라가 발견한 위선은 무엇인가? 명령을 내리는 자조차 섬기는 자의 덕을 가장하고 있다는 것은 무얼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지도자/리더라고 한다면, 사람들에게 올바른 가치를 밝혀서 알려주는 역할, 즉 가치를 창조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ㅡ하지만 사회적 규율을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보여지는 지도자/리더의 모습을 보면, 그들 역시 사회적 규율에 순응하기만 하는 존재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지도자가 아닌 자로 보인다.
ㅡ그런 면에서 위선/위장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ㅡ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서 지도자인 자가, 결국에는 규율의 종복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파리떼의 행복과 윙윙거림은 무얼 말하나?
ㅡ앞서 차라투스트라는 「차라투스트라, 1권 12장」에서도 사람들을 파리로 언급한다.
ㅡ이는 사회적 규율을 비판하는 차라투스트라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존재들, 그러면서도 차라투스트라를 괴롭히는 존재로서, 사회적 규율에 따르는 존재를 나타낸다.
     내 벗이여, 그대의 고독으로 달아나라.
     내 보기에 그대는 독파리들에게 마구 쏘이고 있구나.
     달아나라, 거세고 강한 공기가 흐르는 그곳으로!
        (중략)
     더는 저들에 맞서 팔을 들지 말라!
     저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파리채 노릇은 그대의 운명이 아니다.
ㅡ이에 따라서 사회적 규율에 따르는 대중들의 행복과 대중들이 하는 이야기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갖는 위선은 무엇인가? 선의와 정의, 동정이 있는 곳에 약함이 있다는 건 뭘 말하나?
ㅡ사회적 규율은 선의/정의/동정에 대해서 중시하는데, 이는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사회의 부조리를 개선하지 않는 것에 해당된다.
ㅡ즉 부조리에 맞서려고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나약함의 징표로 보는 것으로 보인다.
 
소소한 행복을 겸손하게 껴안는 것은 왜 순종이라 불리나?
ㅡ앞서 언급이 되었던 것처럼, 여기서 말하는 소소한 행복은 앞서 말한 작은 행복과 같다; 즉 부조리 속에서 견디면서 평화/안락을 누리는 것 말이다.
ㅡ부조리를 견디면서 평화/안락을 누리려면 사회적 규율에 순종/순응해야 한다.
ㅡ이를 나타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그 누구로부터도 고통받지 않는 것인데, 왜 차라투스트라는 이것을 비겁이라고 부르나?
ㅡ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그 누구로부터도 고통받지 않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간섭받지 않고 자신이 하고픈 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ㅡ즉 부조리한 행동을 누군가 하더라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고 그저 참고 견뎌주는 것을 원한다는 것이다; 만약 참고 견디지 않으면 세상은 분란이 많아질 것으로 보는 듯하다.
 
ㅡ그런 점에서 사회적 미덕들은 앞서 말한 것처럼 참고 자기 희생을 하길 바라는데, 이는 부조리를 극복하려고 하지 않는 비겁한 행동에 해당된다.
ㅡ물론 참고 희생하면, 분란이 없어서 평화는 찾아오겠지만 말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의 거친 말을 보면서 쉰 목소리만 듣는다고 하나?
ㅡ이는 앞서 기침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들의 이야기가 무의미한 내용만 담고 있어서 바람 소리만 나오는 거나 다름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ㅡ하지만 사람들은 열정적으로 말하므로, 목이 쉬긴 하는데, 무의미한 내용만 나오므로, 쉰 목소리만 들린다고 말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저들에게 주먹이 없다고 말하나? 왜 저들은 손가락만 지니고 있나?
ㅡ손가락은 정확히 알 수 없어 해석이 어렵다.
ㅡ따라서 단순히 영리함만을 말한다고 보도록 하자.
 
ㅡ여기서 주먹은 대립/맞섬을 의미한다.
ㅡ그러므로 사람들은 똑똑하긴 하지만 부조리에 맞설 의지는 없다는 것을 주먹이 없다고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왜 겸손하게 만드는 것과 길들이는 것은 인간을 최고의 가축으로 만들었나?
ㅡ사회적 규율에 따르면서, 사람들은 가축들처럼 정해진 틀 안에서만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검투사와 만족하는 돼지 사이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ㅡ검투사는 맞서는 존재를 나타내는데, 이는 부조리에 맞서는 존재로 생각할 수 있다.
ㅡ사람들이 보기에 부조리는 극복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부조리에 맞서는 것은 이상주의자들의 행동이다.
 
ㅡ만족해하는 돼지의 경우, 짐승과 같이 사는 것, 즉 단순히 향락적으로 사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ㅡ따라서 무분별한 향락주의자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ㅡ이처럼 이상주의자와 향락주의자 사이에 사회적 규율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인 것, 이는 곧 현실주의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왜 검투사와 돼지 중간에 있는 것은 범용이 되나? 이미 중용이라 불린다는 건 뭘 말하나?
ㅡ범용이라는 표현은 주석에 달린 것처럼 Mittelmäßigkeit의 번역어인데, Mittelmäßigkeit는 범용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중간을 나타내기도 한다.
ㅡ즉 Mittelmäßigkeit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 상태를 말한다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ㅡ즉 이상을 쫓는 것도 아니고, 향락적으로 나아가는 것도 아닌 그 둘의 중간 상태, 이도 저도 아닌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리고 사람들은 이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상태를 미덕적인 것으로 취급하여 중용/절제/이상적인 것으로 취급하는데,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음욕이나 악덕에 대해서 비방하지 않는다는 데, 어떤 입장을 지니고 있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음욕에 대해서는 「차라투스트라, 1권 13장」에서 순결에 대해 말하며 언급했다.
ㅡ또한 악덕이라고 한다면, 「차라투스트라, 1권 6장」에서 범죄자를 언급하며 이야기를 한다.
ㅡ이런 점들로 볼 때, 차라투스트라는 음욕이나 악덕에 대해서 그렇게 비판적이지 않고, 음욕의 경우, 오히려 자유롭게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임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왜 자신들의 영리함을 더 재치 있게, 예리하게 해주지 않음을 이상하게 여기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릇된 이해를 비판하려고 나타났다.
ㅡ이는 사람들에게 생소한 것인데, 왜냐면 사람들은 대체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현재 사람들이 가진 지식을 긍정해주면서 좀 더 그들의 입장을 강화해주는 쪽으로 이야기를 해나가기 때문이다.
ㅡ즉 그러지 않는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것이다.
 
순종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왜 왜소하고 병들고 부스럼딱지가 덮인 곳에서 기어다니나?
ㅡ왜소하고 병들고 부스럼딱지가 덮인 곳은 사람들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ㅡ즉 부조리에 의해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정신에서 그들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정신적 고통을 잊게 하는 정도로만 노력하고 있는 것이 순종을 가르치는 자들인 것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들과 맞서지 않는데, 이들이 사람들을 착취하고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모습을 혐오하기 때문에 말도 섞으려 하지 않는다.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그릇 속에서 우연을 요리한다는 것은 무얼 말하나? 우연이 잘 요리되었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음식은 무얼 말하나?
ㅡ우연이라는 것은 무질서하게 나타난 현상들을 말하는데, 왜 그것이 나타났는지 개연성을 전혀 알지 못할 때 우연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ㅡ이러한 우연들은 어떤 질서 속에서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을 그릇되게 이해하면 종교적인 접근이나 그릇된 규율이 형성된다고 본다.
ㅡ그런 면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인간들이 보이는 무질서한 현상들 속에서 질서를 찾고, 그렇게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고, 여러 미덕적인 요소들의 현실을 이해하게 된다.
ㅡ그렇게 얻은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이다.
ㅡ그런 면에서 차라투스트라의 앎/깨달음/가르침은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열매이자 음식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실로 많은 우연이 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왜 우연은 애원하며 차라투스트라의 곁에 머물고 마음을 얻기를 바랐나? 왜 우연은 친구가 친구를 찾아왔다고 했나?
ㅡ여기서 우연들은 무질서한 현상들인데, 이 무질서한 현상들은 사람들에게 그릇되게 이해되면서, 우연들은 의도치 않은 오해를 받는 상황에 놓인다고 할 수 있다.
ㅡ이렇게 의도치 않게 오해된 우연을 사람으로 치면, 오해 받고 있는 사람이 되는데, 오해 받는 사람은 자신을 올바르게 이해해줄 사람을 찾을 것이다.
ㅡ그런 면에서 우연이 찾은 것이 차라투스트라이며, 자신을 올바르게 이해해달라고 요청한다고 차라투스트라가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ㅡ즉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는 벗은 차라투스트라 뿐이란 이야기다.
 
ㅡ이러한 이야기는 곧 차라투스트라만이 올바른 통찰이 가능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바람이 부는 사방에 대고 외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마주한 사람들 중에는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ㅡ그러므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주변에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까지 이야기/가르침을 멀리 퍼뜨리려고 하고 이를 바람에 대고 이야기한다고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왜 왜소한 자들, 안일에 젖은 자들은 점점 더 작아지고 파멸하게 되나?
ㅡ왜소한 자는 안일/안락함을 위해서 부조리에 맞서지 않고 견디는 자들을 말한다.
ㅡ이들은 부조리 속에서 자신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고, 이는 결국 정신의 피폐함 및 개인적 행복과 멀어지는 길로 나아간다.
ㅡ그 결과 개인은 자신의 삶에 대한 불만, 회의, 염세 속에서 파멸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왜소한 덕, 단념, 순종은 왜 저들이 파멸하게 하나?
ㅡ사람들이 따르는 덕은 자기 희생을 요구하는 덕이다.
ㅡ따라서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존재하게 된다.
 
ㅡ단념은 자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걸 포기하는 걸 말한다.
ㅡ이로써 고통을 벗어날 의지를 갖지 못하게 된다.
 
ㅡ순종의 경우, 규율에 따르는 것을 말하므로, 규율에 따르는 순간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자연스러우므로, 이들은 자신을 위해 살지 못하고 파멸하게 되는 것이다.
 
지나치게 보살피고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이러한 지나침을 놓고 왜 차라투스트라는 토양이 이 모양이라고 하나?
ㅡ사회적 규율에 따르는 사람들이 보살피고 관대한 것을 말하는 부분이다.
ㅡ사회적 규율에 따르면, 사람들은 부조리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지나치게 보살핀다.
ㅡ즉 동정을 남발하는 것이다.
ㅡ동정의 남발은 사람들이 부조리에 맞서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ㅡ그래서 부조리한 사회를 지속시카는 좋지 못한 것이다.
 
ㅡ사람들이 관대한 것은 부조리이다.
ㅡ앞서 동정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봤듯이, 사람들은 부조리를 견디게끔 만들지 부조리를 없애게끔 하지 않는다.
ㅡ즉 부조리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함에도 불구하고, 놔두는 것이다.
ㅡ이를 관대하다고 말한다.
 
ㅡ이처럼 부조리에 고통받는 자를 동정하고, 부조리를 개선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으니, 세상은 부조리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ㅡ이를 차라투스트라는 그대들의 토양이 이 모양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나무 이야기를 하며, 단단한 뿌리로 단단한 바위를 뚫으려고 해야 한다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사람을 비유할 때, 나무로 비유하곤 하는데, 나무는 성장한다는 점에서 그러는 걸로 보인다.
ㅡ아무튼 이에 따라서 보면, 어떤 존재가 성장하고자 한다면, 단단한 바위와 같은 부조리를 부숴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의지를 지녀야 한다.
ㅡ하지만 사회적 규율에 따르는 사람들은 부조리를 부수려고도 하지 않고, 부조리에 대한 반감을 갖지 않게끔 잘 위로해준다.
ㅡ이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답답한 것이다.
 
사람들이 단념해버린 것들이 온 인류의 미래라는 직물을 함께 짠다는 건 뭘 말하나?
ㅡ규율을 따르는 사람들은 부조리를 개선하기를 포기한다.
ㅡ이는 곧 부조리에 대한 문화를 형성하고, 이 문화는 후대로 이어지게 된다.
ㅡ이런 점에서 부조리에 순응하는 것은 미래의 인류가 부조리에 순응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는 이야기다.
 
사람들에게서 무조차 거미줄이며 미래의 피를 빨아먹는 거라 불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ㅡ여기서 언급되는 무는 허무/공허/염세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허무주의/염세주의에 빠진 자들은 사회적 규율을 따르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 역시도 미래가 부조리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을 주지 않는다.
ㅡ그런 점에서 미래의 피로 살아간다고 말하는 것 같다.
 
왜 왜소한 도덕군자들은 받을 때도 훔치듯이 한다고 하나? 무뢰한에게도 명예가 있다는 것은 뭘 말하나?
ㅡ왜소한 도덕군자는 그릇된 이해를 가진 도덕군자를 말하며, 이 존재들은 스스로 사고하지 않고, 현자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것처럼 말하는 자들이다; 「차라투스트라, 1권 11장」과 「차라투스트라, 1권 22장」을 참고하자.
     1권 11장
     여기 잉여인간들을 보라!
     저들은 창조자의 업적과 현자의 보물을 훔쳐내고는, 그런 도둑질을 '교양'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모든 것이 저들에게서는 병이 되고 재앙이 되어버릴 수밖에!
 
     1권 22장
     또 다른 이기성도 있는데,
     늘 훔치려고만 드는 너무나도 가난하여 굶주린, 병든 자들의 이기성, 병든 이기성이다.
 
     이 이기성은 광채를 내는 모든 것을 도둑의 눈으로 응시하며,
     먹거리를 풍부하게 갖고 있는 자를 굶주린 자의 탐욕스러운 눈으로 헤아린다.
     그러면서 선사하는 자들의 식탁 주변을 늘 어슬렁거린다.
ㅡ여기서 언급되는 것처럼 현자의 업적을 훔쳐내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ㅡ이처럼 업적을 훔치는 자들에게도 명예가 있다는 이야긴데, 그것은 곧 빼앗을 수 없을 때에만 훔친다는 것이다.
ㅡ이는 곧 업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다면, 자신도 원래 알았던 것처럼 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현자의 업적인 게 세상에 알려진 상태라면, 자신도 이미 알았던 것처럼 편승하면 된다는 이야기다.
ㅡ이는 곧 사회적 규율에 따르는 자들의 이상한 행태를 지적하는 것이다.
 
저절로 주어진다는 이야기는 왜 나오나? 왜 순종의 가르침인가?
ㅡ사회는 참고 견디면, 미덕을 갖추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런 면에서 사회적 규율에 순응하면 미덕이 저절로 주어진다는 이야기를 하는 구절로 보인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사회적 규율에 순응하면 자기 자신을 잃게 된다고 보기 때문에, 가만이 있으면 저절로 자신을 빼앗긴다고 말한다.
 
위대한 사랑으로 사랑하고, 위대한 경멸로 사랑하라는 건 무얼 말하나?
ㅡ위대한 사랑은 이상 사회와 관련된 사랑인데, 이상 사회를 추구하려는 자를 사랑하는 걸 말한다.
ㅡ위대한 경멸은 자신의 그릇됨, 사회의 부조리를 이해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태도를 지닌다는 점에서 자신을 사랑하라는 이야기다.
ㅡ결국 이상 사회를 추구하고, 자신/사회의 부조리를 이해한 자로서 자신을 사랑하라는 이야기로 보인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나 자신의 선구자요 닭 울음소리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이해하는 자를 경험하지 못했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분명 이상 사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ㅡ따라서 자신을 이해하는 자가 없는 것은 자신이 너무 일찍 와서라고 생각한다.
ㅡ그런 면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를 알리는 수탉과 같은 존재로 자신을 여기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다가오는 시간은 뭘 말하나?
ㅡ여기서 말하는 시간은 이상 사회가 오는 순간을 말한다.
ㅡ그리고 이렇게 이상 사회가 다가오면, 부조리를 따르던 이들은 자신들의 우둔함을 직면하게 되므로, 불모가 된다고 말한다.
ㅡ그리고 그렇게 되면, 자신을 견디기 어려워지게 되는데, 이러한 점을 사회적 규율을 따르는 자들이 자신을 태워버릴 불을 갈망한다고 표현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저들을 내달리는 불로, 불꽃의 혀를 지닌 예고자로 만든다는데 무슨 말인가?
ㅡ이는 곧 사람들을 이상 사회를 위해 나아가는 존재, 이상 사회를 예고하는 자로 교화시키겠다는 이야기다.
 
위대한 정오는 뭘 말하나?
ㅡ해는 올바른 이해를 전하는 것을 말한다고 본다면, 정오는 올바른 이해가 가장 높이 뜬 채로 세상을 비추는 상태를 말한다.
ㅡ이는 곧 이상 사회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