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2권 22장 고요한 시간
22장 개괄
22장은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하다 좌절한 차라투스트라의 내적 고민을 보여준다.
「차라투스트라, 2권 9~11장」에서 부질없음을 느낀 차라투스트라는 어떻게든 의지를 이어가려고 하다가, 결국 이상 사회로 나아가기를 포기하려는 상태로 나아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스스로 정말 포기해야 하는 것인지 생각하는데, 이를 의인화해서 보여준 것이 22장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소명, 이상 사회의 구현을 위해 보다 성숙해지려고 사람들 곁을 떠난다.
차라투스트라가 이상 사회를 위한 노력을 포기하는 이유는 자신의 앎이 잘 전파되지 않고 성과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곧 자신의 종파를 만들어서 유지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종파의 수립이 어려워 보여지므로, 차라투스트라는 의욕을 잃는다.
즉 자신의 죽음 이후에 확실히 자신을 계승할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차라투스트라는 이제 3권에서부터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게 된다.
본문
"벗들이여,
혼란 속에서 방황하던 저는 원치 않게 여러분을 떠나 고독으로 나아갈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저 스스로 원해서 나아갔다면, 이번엔 어쩔 수 없이 나아갑니다.
어떤 이유로 이러는 것인지 궁금하시겠죠.
왜 이렇게 충동적으로 그러는지 말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갑자기 떠나는 것은 충동적인 게 아닙니다.
어제 한참을 고민하다 내린 결정입니다.
어떻게 이런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하겠습니다.
이상을 추구하다가 의욕을 잃어 사회적 규율에 순응하게 될 때의 공포를 아십니까?
이 상황에 있는 사람은 앞으로 자신에게 벌어질 일을 압니다.
이상을 추구하는 자아가 사회적 규율에 순응하는 자신을 비판할 거란 걸 말이죠.
못나진 자기 모습을 직면해야 하는 괴로움과 공포가 주어질 것이란 걸 말입니다.
떠날 채비를 하는 차라투스트라
차라투스트라는 긴 고민 끝에 사람들과 도시를 떠나 고독 속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어제 제가 그랬습니다.
나 자신을 직면하는 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제 자신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이상을 추구하는 자아가 말했습니다.
“차라투스트라, 너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지 않나?”
저는 이상을 추구하는 자아의 말에 놀라 비명을 질렀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답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한번 이상을 추구하는 자아가 말했습니다.
“너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해야 할 일을 떠올리고 싶어하지 않는구나.”
제가 말했습니다.
“그렇다. 내가 무얼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좌절했고, 그래서 그것을 하고 싶지도, 그것을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이상을 추구하는 자아가 말했습니다.
“이제 너는 이상 사회를 바라지 않는 것인가?
차라투스트라여,
괜한 마음으로 퉁명스럽게 말하지 마라.”
그 말에 저는 몸이 떨리더니 눈물이 나왔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아, 나는 이상 사회를 원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니 나에게 이상을 바라라고 하지 말아 달라.
이상을 바라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내 능력을 벗어난 일 같다.”
이상을 추구하는 자아가 말했습니다.
“그것은 문젯거리도 아니다.
너는 너의 앎을 사람들에게 나눠라.
이상 사회를 위한 앎을 나누란 이야기다.
그렇게 너는 이상 사회를 위해서 네 몸을 던져라.”
제가 말했습니다.
“아, 이상 사회에 대한 앎,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말인가?
나는 실패자고, 나보다 더 고상한 자가 나타나서, 나보다 더 잘 수행할 것이라 생각이 든다.
내가 이상 사회를 위해서 몸을 던지는 것은 자격 없는 자가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것과 같다.
나는 그럴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러자 이상을 추구하는 자아가 말했습니다.
“그게 무슨 문제인가?
너는 너에게 주어진 과업, 너의 소명에 순순히 따르려 하지 않는구나.
너는 이제 너의 소명에 저항하는 구나.”
제가 말했습니다.
“나는 이미 소명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나?
그렇게 행동한 결과, 나는 이상 사회로 제대로 나아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상 사회로 나아가려면 얼마나 더 많은 길이 남았는가?
이에 대해서 누구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하는지, 앞으로 얼마나 더 견뎌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은 이상 사회로 나아감에 따라 내가 좌절하고 절망하여 의지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이상을 추구하는 자아가 말했습니다.
“차라투스트라여,
이상 사회를 위해서 사람들에게 앎을 나누는 과정에는 좌절과 절망이 따른다.”
제가 말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앎을 전하려고 했지만, 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내 앎은 그들의 정신에 뿌리를 내리지도 못한 것이다.”
이상을 추구하는 자아가 말했습니다.
“너가 그에 대해서 무엇을 안다는 것인가?
이슬이 고요한 밤에 풀잎에 맺히듯이,
너의 앎도 너가 전달한 그 순간 바로 그들의 정신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혼자 조용히 생각하다 우연히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두꺼운 가죽
차라투스트라는 자아와의 대화에서 자신의 소명을 거부하려 하는데,
자아는 이를 두고 순응하지 않는다며 두꺼운 가죽이 덧대어졌다고 말한다.
제가 말했습니다.
“내가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을 때, 사람들은 나를 조롱했다.
그때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그들을 대했지만, 사실 나는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의문이 들었었다.”
이상을 추구하는 자아가 말했다.
“이상 사회를 구현하려고 노력하다가 방황하더니,
이제는 나아갈 의지마저도 잃은 모양이구나.
그들의 조롱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너는 사회적 규율에 복종하지 않는 자이다.
너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이해를 나눠주고, 사람들에게 부조리에 맞서게끔, 그릇된 행동을 하지 않게끔 명령해야 한다.
현시대에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상 사회를 위해서 사람들에게 지시하고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존재가 필요한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상 사회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상 사회를 위해서 무언가 노력하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보다 어려운 것은 이상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이들에게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너는 사람들에게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통찰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노력하고 있지 않다.
이는 너의 소명을 다하지 않는 것, 즉 태만이고, 이는 용서받지 못할 점이다.”
제가 말했습니다.
“나는 좌절했고 절망에 빠져, 이제 더는 이상 사회를 위해 외치고 다툴 힘이 없다.
부조리와 그릇됨을 맹렬히 비판할 힘이 없는 것이다.”
이상을 추구하는 자아가 말했습니다.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열정적인 말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반감을 사고 거부하게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사회의 부조리와 그릇됨에 의문을 갖게끔 넌지시 의견을 던지는 것이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니 말이다.
차라투스트라여,
너는 이상 사회를 위해서, 위버멘쉬를 위해서 나아가야 한다.
이 의지를 가진다면, 너는 이상 사회를 위한 방향을 사람들에게 제시하면서 나아갈 수 있다.”
제가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의 내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다.
좌절하고 절망하여 이상 사회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잃었으니 말이다.”
이상을 추구하는 자아가 말했습니다.
“너는 아이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실수, 과오, 추함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너에게는 올바름/이상 사회를 추구하려는 의지가 있다.
너의 성향과 필요에 의해서 이 의지를 갖춘 것으로 이것은 너에게 강박적이다.
지금의 너는 어떤가?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하다가 절망하여 포기하려고 하고 있는 모습이니, 이상 사회를 추구하는 자로서의 이상적 모습/올바른 모습에서 벗어나 있다.
너의 올바름/이상 사회에 대한 의지는 이런 너의 모습을 견디기 어렵게 한다.
상황이 어떻든 너는 이상 사회를 위해서 나아가야 하고, 그러므로 너는 너 자신의 이러한 모습도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
저는 부들대며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의지는 생기지 않았고, 처음에 했던 말을 다시 했습니다.
“나는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고 싶지 않다.”
그러자 이상을 추구하는 자아는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그 웃음은 저를 자괴감*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이상을 추구하는 자아가 말했습니다.
“차라투스트라여,
너는 분명 올바른 이해를 갖추었으나, 너 자신은 그 이해에 따라 행동할 수 없는 존재구나.
성숙한 정신을 지녔지만, 성숙한 의지를 갖진 한 것이다.
*자기의 능력에 대해 의심하고 있던 차라투스트라에게 이상을 추구하는 자아의 웃음은 차라투스트라의 무능력함을 비웃는 듯이 여겨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는 다시 고독 속으로 나아가야 한다.
고독 속에서 너는 더 성숙해져야 한다.”
이상을 추구하는 자아는 웃으며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제 주변은 더 심하게 고요해졌습니다.
그렇게 저는 널브러졌습니다.
등대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이상 사회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운명을 가진다.
나의 벗들이여,
제가 왜 고독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여러분에게 숨기지 않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제게서 이상 사회를 위해서 묵묵히 나아가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도 들었습니다.
올바름에 대한 강박을 이겨낸 아이 같은 자.
이런 자가 어떤 순간이 와도 자신의 할 일을 불평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자인 것이죠.
나의 벗들이여,
여러분에게 해줄 많은 이야기가 제게 있음에도,
왜 저는 여러분에게 나눠주기를 꺼리고 있는 것일까요?
제가 인색해서 그런 것일까요?
제가 여러분에게 더 많은 걸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절망 때문입니다.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부질없다고 느껴지기 때문인 겁니다.”
차라투스트라가 이 말을 했을 때, 자신의 운명의 가혹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이 친구들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도.
차라투스트라는 크게 소리 내어 울었고, 누구도 그를 위로할 수 없었다.
그렇게 밤이 되자,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친구들과 헤어지며 홀로 길을 떠났다.
떠나는 차라투스트라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더 성숙해지기 위해 고독으로 나아간다.
생각해볼 거리들
차라투스트라는 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가?
ㅡ후술되겠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다가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노력이 원하는 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하자, 열의를 잃게 된다.
ㅡ이에 따라서 이상 사회를 위한 노력을 그만두려고 하게 된다.
ㅡ하지만 이상 사회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졌던 차라투스트라는 사색의 끝에 이상 사회를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못하게 된다.
ㅡ하지만 다시 부질없는 노력을 할 수는 없기에, 이미 전처럼 노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정신을 추스리고 좀 더 성장하기 위해서 사람들 사이를 떠나게 된다.
차라투스트라의 노한 여주인은 누구를 말하나?
ㅡ여주인이라고 불릴 이유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상을 추구하는 자기 자신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이상을 추구하는 자기 자신이 이상 사회에 대한 노력을 포기하려는 자신을 설득하고 비판하기 때문이다.
고요한 시간은 무엇을 말하나?
ㅡ사색의 시간을 말한다.
ㅡ이것을 여주인이라고 차라투스트라는 말하는데, 사색의 시간에 이상을 추구하는 자아가 나타나기에, 비유의 편리를 위해서 사색하는 시간 자체를 의인화한 게 아닐까 싶다.
잠에 빠져드는 자의 경악은 무엇을 말하나? 왜 땅이 꺼지고 꿈이 시작되면 놀라나?
ㅡ여기서 말하는 잠은 「차라투스트라, 1권 2장」의 잠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 1권 2장」에서 잠은 사회적 규율을 말한다.
ㅡ일반적으로 사회적 규율에 처음부터 순응하는 사람은 사회적 규율을 따르면서도 별 문제없이 지낸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의 경우,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다가 실패했고, 그에 따라서 이상 사회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잃는다.
ㅡ그와 동시에 ‘그냥 되는 대로 살자’라는 마인드가 나타나고, 그에 따라서 다시금 사회적 규율을 어느 정도 수용하며 살아가려는 태도를 보이게 된다.
ㅡ문제는 이상 사회를 추구하다가 사회적 규율로 다시금 나아간 것이기에, 자기 비판이 심해진다는 것이다.
ㅡ그러면서 자기 경멸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를 잠(사회적 규율)에 빠져드는 자의 경악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ㅡ잠이 든다는 것은 사회적 규율을 따른다는 것을 말한다.
ㅡ이에 따라서 꿈은 사회적 규율을 따르다가 나타나는 어떤 생각이나 의식 작용을 말한다.
ㅡ즉, 사회적 규율을 따르다가 자의식을 갖춘다는 것인데, 이는 사회적 규율을 따르는 자신에 대한 자기 비판이 나타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그러므로 “꿈이 시작되면 놀란다는 것”은 “이상을 추구하다가 사회적 규율을 따르는 자는 사회적 규율을 따르는 동안 자기 비판에 놓여 질색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곗바늘이 움직였고, 내 삶의 시계는 숨을 죽였다는데 그게 무슨 말인가?
ㅡ여기서 움직인 시곗바늘은 사색의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ㅡ내 삶의 시계가 숨을 죽였다는 것은, 활동을 멈추고 과거를 두고 사색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ㅡ즉 사색에 집중한 시간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다.
ㅡ그리고 사색에 집중했으니 고요함 속에 있게 된다.
차라투스트라에게 말한 무언가는 무얼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꿈 속에서 대화를 나눈다.
ㅡ이 꿈 속에서 잠이 든 차라투스트라와 차라투스트라의 의식이 대화를 나누는 것인데, 잠든 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로 나아가길 포기한 차라투스트라를 말한다.
ㅡ차라투스트라의 의식에 해당되는 ‘무언가’는 차라투스트라가 이상 사회로 나아가려고 노력하길 바라므로, 이상을 추구하는 차라투스트라/이상을 추구하는 차라투스트라의 자아라고 볼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속삭임에 놀라 비명을 지르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상을 추구하기를 포기했는데, 스믈스믈 이상을 추구하는 자아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ㅡ이상을 추구하길 포기한 것은 나약한 모습으로 비춰지는데, 이에 따라 속삭임이 나타난 것은 이상을 포기한 자신의 못남에 대한 비판이 이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ㅡ그렇기에 놀라고 긴장하는 것이다.
속삭임은 차라투스트라가 무엇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아는 것을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가?
ㅡ속삭임은 차라투스트라의 이상을 추구하는 자아다.
ㅡ차라투스트라는 현재 좌절하여 이상을 추구하기를 거부한다.
ㅡ문제는 차라투스트라는 이상을 추구하던 자였기에, 이상 추구에 대한 과업을 의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ㅡ그에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추구에 대한 과업을 수행해야 함을 알면서도 하지 않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ㅡ즉 이상을 추구하는 자아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이상 추구의 과업을 수행하는 것이 너의 과업임을 알고 있냐고 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과업이 그것임을 말하면, 과업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하지 않는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외면하고자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반항 속에 자신을 숨기지 말라는 말은 무엇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과업을 말하기를 거부한다.
ㅡ차라투스트라의 자아는 차라투스트라의 이러한 거부가 본심인 건지 아니면 좌절함에 따라 퉁명스럽게 대답한 것인지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무엇을 자신의 힘을 넘어서는 일이라며, 자신이 면하게 해달라고 하는가?
ㅡ여기서 말하는 것은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으로, 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를 노력하다가 좌절했기에 벗어나고 싶어한다.
속삭임은 왜 차라투스트라에게 말을 하라고 하며 부서져 버리라고 하는가?
ㅡ차라투스트라에게 “그대의 말을 하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앎을 사람들에게 선사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ㅡ이는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ㅡ또 부서지라는 것은 위버멘쉬/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ㅡ즉 “이 과업을 위해서 몸을 바쳐라” 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그것이 나의 말이라고 하는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올바른 이해에 대한 말을 하는데, 자신이 그런 말을 하기에는 부적격하다고 보게 되었다.
ㅡ따라서 이상 사회/올바른 이해에 대한 말은 자신이 할 만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존귀한 자를 기다리나? 왜 이 존귀한 자에 의해 부서질 가치도 없다고 하는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이상 사회를 구현하는데 역부족이라고 느낀다.
ㅡ왜냐면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얻은 성과가 없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본다.
ㅡ그렇기에 이 일을 할 수 있는 적임자가 오길 기다린다고 할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 적임자가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맞고, 자신이 한다면 분수를 모르고 행동하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자신이 부서질 이유가 없다고 보는 듯하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겸손하지 않다고 평가받는가? 왜 겸손이 견고한 가죽을 두르고 있다고 하는가?
ㅡ여기서 겸손하지 않다와 겸손은 demüthig와 Demuth의 번역어다.
ㅡ이것들은 겸손의 의미도 담지만, 순순히 응하다/고분고분하다 등의 순종적 의미를 담는다.
ㅡ따라서 이 구절은 겸손하지 않다가 아니라, 순응하지 않다,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좋다.
ㅡ이에 따라 본다면, 차라투스트라가 순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인데, 차라투스트라는 현재 이상 사회를 위한 과업에 따르지 않으므로, 운명에 순응하고 있지 않다는 뉘앙스로 해석할 수 있다.
ㅡ그리고 차라투스트라의 순종성이 쉽게 순종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갔기에 견고한 가죽을 두르고 있다고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내 겸손의 가죽이 견뎌내지 못한 것이 있던가”는 무엇을 말하나?
ㅡ이 구절은 “Was trug nicht schon das Fell meiner Demuth!”의 해석으로, 이것은 “이미 나는 겸손했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ㅡ따라서 약간의 의미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ㅡ나의 해석에 따라 보게 되면, “나는 이미 자신의 운명에 순응해서 시도했었다”는 문장으로 볼 수 있다.
ㅡ즉 해당 구절은 “운명에 순응했지만, 좌절했으니 이러는 것”이라고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
내 높이의 발치 부근에 산다는 말은 무얼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운명에 순응하여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했지만, 그 결과가 자기 수준만큼의 영역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고 표현하는 부분이다.
ㅡ내 높이의 발치가 자기 수준만큼의 결과물을 얻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차라투스트라의 정상은 무얼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정상은 이상 사회의 구현이다.
ㅡ지금 현재 차라투스트라의 노력으로 볼 때, 이상 사회에 과연 얼마나 노력해야 도달할 수 있는지 가능은 한건지 알 수 없기에 정상이 얼마나 높은지 묻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골짜기만큼은 잘 안다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하면서 감정적 골을 갖게 된다.
ㅡ즉 절망과 염세의 골 말이다.
ㅡ그래서 이 구절은 자신이 얼마나 노력하면 이상 사회에 도달할 수 있는지, 도달할 가능성은 있는지에 대한 인식보다는 자신이 이 길로 나아가면 얼마나 고될 지를 더 잘 알고 있다는 표현인 것이다.
속삭임은 왜 산을 옮겨야 하는 자를 말하나? 골짜기와 낮은 지대까지도 옮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산을 옮긴다는 것은 올바른 이해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ㅡ즉 차라투스트라에게 산이 있다면, 그 산을 타인에게 전해주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ㅡ그래서 후술되듯이, 차라투스트라의 앎이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ㅡ골짜기와 낮은 지대는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에서 좌절과 절망도 느끼게 되고, 이것도 타인에게 가르치게 된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산을 옮긴 적이 없다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앎을 전달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듣기만 할 뿐,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지 않았다.
ㅡ즉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으로, 그들 안에 올바른 이해의 산이 생기진 않은 것이다.
ㅡ그렇기에 산을 옮긴 적이 없다고 표현한다.
왜 속삭임은 차라투스트라에게 “그것에 대해 무엇을 아냐”고 하면서 이슬 이야기를 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자신의 앎 공유에 따른 변화를 보여주지 않아서 절망했다.
ㅡ이에 따라 속삭임은 앎을 전해주어도 홀로 사색하는 시간에 그것이 그들에게 자리한다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슬 이야기를 한다.
ㅡ이슬 이야기에서 적막한 밤은 사색하는 시점을 말한다.
ㅡ즉 적막한 밤에 풀잎에 이슬이 맺히듯이, 홀로 사색하는 시점에서 사람들에게 올바른 이해가 뿌리를 내린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길을 잊고 걷는 법도 잊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을 때, 두 발을 떨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이 나아가는 길에서 주춤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즉 조롱받음에 따라서 자신이 나아가는 길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이로써 속삭임/이상을 추구하는 자아는 차라투스트라가 이상 사회를 위한 길을 나아가다 멈추고 방황하더니, 결국에는 이상 사회를 위해 나아갈 의지도 잃었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ㅡ따라서 길을 잊는 것은 이상 사회를 위해 나아가다 방황하는 것을 말하며, 걷는 법을 잊은 것은 의지를 상실한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복종하는 법을 잊어버린 자인가? 왜 차라투스트라는 명령해야 하는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사회적 규율을 벗어났고, 부조리를 인식하는 자이기에, 맹목적으로 사회적 규율에 복종할 수가 없다.
ㅡ또한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통찰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상 사회로 나아가고 싶지만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는 이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ㅡ그렇기에 명령하는 자가 된다.
ㅡ명령하는 자와 관련된 구절은 「차라투스트라, 1권 10장」에서도 언급이 된다.
반항, 이것은 노예들의 고귀함이다.
그대들의 고귀함은 복종이어야 하리라!
그대들의 명령 자체가 복종이어야 하리라!
뛰어난 전사에게는 "너는 해야 한다"가 "나는 원한다"보다 더 편안하게 들린다.
그러니 그대들이 사랑하는 것 모두가 그대들에게 먼저 명령하게 하라.
삶에 대한 그대들의 사랑이 그대들의 최고 희망에 대한 사랑이기를!
그대들의 최고 희망이 삶에 대한 최고의 사상이기를!
하지만 그대들의 최고 사상은 내가 명령하게 하라.
내 명령은 이렇다.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러니 복종하고 싸워대는 삶을 살라!
오래 산다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어떤 전사가 아낌받기를 원한단 말인가!
나는 그대들을 아끼지 않는다.
나는 그대들을 온전히 사랑한다.
싸우고 있는 내 형제들이여!
ㅡ이 구절에서 나타났듯이, 차라투스트라는 명령하는 자, 인식의 성자이고, 명령을 받는 자들은 올바른 인식은 할 수 없으나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는 자들, 인식의 전사이다; 자세한 해설은 해당 장을 참고하자.
왜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자는 위대한 일을 명령하는 자인가?
ㅡ사람들은 올바름을 원하기는 하지만 올바른 인식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위대한 일을 명령하는 자인가?
ㅡ여기서 위대한 일은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는 일을 말한다.
ㅡ앞서 말했다시피, 차라투스트라는 인식의 성자, 올바른 인식을 할 수 있는 존재이므로, 인식의 전사, 올바른 인식은 못하나 올바른 것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방향을 제시해줘야 한다.
왜 위대한 일을 수행하는 것은 어렵지만, 명령하는 것은 더 어렵나?
ㅡ올바름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이야기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따지는 게 더 어렵다는 것이다.
ㅡ즉 성숙한 판단력을 갖추기가 어렵다는 것.
ㅡ또한 위대한 일을 명령하는 자는 자신의 명령에 따른 성과를 바라기에, 기대하는 바가 있어 정신적으로 힘들 수도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배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나? 왜 차라투스트라는 용서받지 못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인식을 할 수 있는 통찰력을 지녔다.
ㅡ그러므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이상 사회를 위해 나아갈 방향을 제시/명령할 수 있다.
ㅡ하지만 지금의 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려 하기에, 사람들에게 방향을 제시/명령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
ㅡ따라서 지배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비판받는 것이다.
ㅡ또한 차라투스트라는 명령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행동하지 않으므로, 배임에 해당된다.
ㅡ즉, 남들보다 뛰어난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활용하지 않기에 용서받지 못하게 된다.
ㅡ누군가는 그런 능력을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명령을 내리기 위한 사자의 목소리가 없다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를 위한 열의를 잃어서, 부조리에 맞서고 그릇됨을 지적할 힘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ㅡ이를 명령을 내릴 사자의 목소리가 없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왜 폭풍을 몰고 오는 것은 조용한 말이라고 하나?
ㅡ서로 뜨겁게 토론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결국 생각을 바꾸게 하는 것은 자신의 입장에 대한 의문이기 때문이다.
ㅡ토론은 입장에 대한 의문보다는 입장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는 편이므로, 조용한 말, 넌지시 던지는 의문이 맹렬한 토론보다 효과가 좋다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러한 넌지시 던져지는 의문을 비둘기 걸음으로 묘사한다.
앞으로 출현해야만 하는 자의 그림자는 무엇인가?
ㅡ위버멘쉬의 그림자이기도 하고 이상 사회의 그림자이기도 하다.
ㅡ이상적 존재와 이상 사회를 위해서 나아가려고 한다면, 사람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자연스레 이뤄지게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부끄럽다고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현재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하다고 포기했는데, 이 포기한 것 자체가 부끄럽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왜냐면 이는 차라투스트라가 의지가 약하다는 것이고, 어쩌면 이상 사회를 위한 적임자로 보이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ㅡ즉 누군가가 차라투스트라가 다시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보고, “저 이가 저번에 노력하고 실패하더니 또 하네?”하고 비웃으면 면이 서지 않는다고 보는 듯하다.
왜 속삭임은 차라투스트라에게 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나?
ㅡ아이들은 실패나 좌절을 겪어도 쉽게 잊고 다시 도전하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젊음의 긍지는 무엇을 말하나? 왜 차라투스트라는 뒤늦게 젊어졌나?
ㅡ젊음이란 사회적 규율에서 순응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관련해서는 「차라투스트라, 1권 21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떤 자는 마음이 먼저 늙고 어떤 자는 정신이 먼저 늙는다.
몇몇은 젊은 나이에도 백발이 된다.
그런데 늦게 젊음을 누리는 자가 그 젊음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법이다.
ㅡ간단히 본다면, 해당 구절에서 젊음은 사회적 규율에 순응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백발 노인이 되는 것은 사회적 규율에 순응하는 것을 말한다.
ㅡ이에 따라서 젊음의 긍지를 본다면, 올바름에 대한 긍지, 성숙함에 대한 긍지라고 할 수 있다.
ㅡ그럼 왜 차라투스트라는 뒤늦게 젊어졌다고 하나?
ㅡ뒤늦게 젊어진다는 것은 사회적 규율에 나이가 들었음에도 의문과 반감을 갖는다는 것을 말한다.
ㅡ즉 젊을 때에는 탈규율적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나이 들어서 나타난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늦게 젊음을 누릴 때 젊음이 오래 유지된다고 하는데, 나이에 따라서 탈규율적 경향의 평가를 달리하는 이유가 있을까?
ㅡ이유는 있는데, 나이가 들어서도 탈규율적 경향이 나타난다면, 혈기에 따른 탈규율이 아니라 논리에 따른 탈규율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고 추측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ㅡ즉 나이가 들수록 사회적 규율의 필요와 효과를 목격하게 될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벗어났다는 것은 뭔가 명확한 이유를 지녔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아이가 되기를 원하는 자는 자신의 젊은 시기조차 극복해내야 하는 이유가 뭘까?
ㅡ젊음은 올바름을 추구하고, 규율을 벗어나는 상태를 말한다.
ㅡ이는 이상 사회를 원하는 자라면 지녀야 하는 상태인데, 왜 극복해야 한다고 말할까?
ㅡ올바름을 추구하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분명 좋은 것이지만, 삶이라는 것이 매번 올바를 수 없고, 올바른 줄 알고 나아갔는데 그릇된 경우도 있게 된다.
ㅡ이렇게 되면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는 자신의 오점들로 인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크게 실망하고, 그에 따라서 올바름의 추구를 포기하려는 경향이 생기게 된다.
ㅡ이는 올바름에 대한 강박이 심해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ㅡ왜냐면 그릇된 것을 행동했다고 해도, 이를 반면교사 삼아서 더 올바르기 위해 노력하면 되기 때문이다.
ㅡ하지만 대체로 이처럼 견디는 능력이 떨어지게 된다.
ㅡ따라서 오랫동안 올바름을 추구하고 나아가려면, 이 올바름에 대한 강박을 극복해야 한다.
ㅡ그래야 올바르려고 노력했다가 실패해도 계속해서 올바름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ㅡ차라투스트라의 경우,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다가 실패했다.
ㅡ그렇기 때문에 좌절하여 이상 사회에 대한 노력을 포기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곧 이상 사회에 대한 강박에서 비롯된 포기라고 할 수 있다.
ㅡ그러므로 차라투스트라는 이 강박, 이상 사회에 대한 강박을 극복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ㅡ이 강박은 젊음, 즉 올바름과 이상에 대한 강박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즉 틀리거나 실패해선 안 된다는 강박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차라투스트라는 젊은 시기조차 극복해야 한다고 표현한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열매는 익었지만, 열매에 어울릴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지만, 그 이해와 행동을 일치시킬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ㅡ즉 그래서 미숙하다고 평가된다.
속삭임은 차라투스트라를 고독으로 나아가라고 하는데, 과연 고독으로 나아가면 문제가 해결이 될까?
ㅡ차라투스트라는 현재 이해에 준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ㅡ즉 자신이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지만, 그러기 위한 의지를 갖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ㅡ이에 따라서 본다면,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해야 할 의지를 준비해야 한다.
ㅡ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자신에게 좌절을 준 문제, 가르쳐도 변화가 없는 사람과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서 이상 사회를 위한 노력을 할지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ㅡ그런 점에서 이를 위한 고독이 필요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모든 인간 중에서 누가 변함없이 가장 말이 없으며,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지”라는 말을 하나? 둘의 대화 중에 이런 말을 하긴 했나? 누가 대체 그런 존재인가?
ㅡ차라투스트라와 자아와의 대화를 보면,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는 존재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로 아이이다.
ㅡ이 아이는 이상 사회를 위해서 조롱과 절망을 잘 견디는 존재로 묘사되며, 그래서 이상을 추구하는 자아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아이가 되라고 언급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친구들에게 해줄 말이 있으면서도 주지 않고 가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를 위한 노력이 부질없다고 생각하면서 사람들에게 앎을 공유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ㅡ즉 알려주기 싫어서/인색해서가 아니라 절망에 빠지고 무의미하다고 느껴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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