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2권 17장 순수한 인식
17장 개괄
17장은 시인들, 강단 교육을 벗어나 자연이나 삶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 자들에 대해서 비판하는 장이다.
앞서 니체는 자신이 강단 교육과 맞지 않음을 이야기하면서 스스로 깨우쳐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이번에는 스스로 깨우쳐 가는 자들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이다.
분명 강단 교육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교조주의보다는 시도 자체는 좋을지 모르나, 스스로 깨우치는 과정은 지적 허영심에서 비롯되기 쉽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지적 허영심은 궤변을 낳게 되는데, 이에 따라서 스스로 깨우치는 활동은 강단 교육보다 취급이 좋지 못하게 된다.
니체는 이런 지적 허영심을 벗어나서, 진정한 통찰을 원할 때, 비로소 더 성장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추가적으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에게 질문하는 제자에게 자신은 ‘왜’라는 질문을 받지 않는 존재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차라투스트라가 이제까지 보인 태도와는 다르다고 보인다.
이 부분에서 감정적 반응을 보인 이유는 명확히 이해되지 않는다.
본문
차라투스트라는 제자들 중 하나에게 말했다.
“저는 <나>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된 이후*로, 정신이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저는 정신적인 것들, 추상적인 것들의 세계가 있다고 믿지 않게 되었죠.
그러면서 영원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서도 그저 비유일 뿐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차라투스트라 1권 4장의 내용을 말한다.
제자가 말했다.
“저는 당신이 전에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걸 들었습니다.
그때 이런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시인들은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한다’ 라고요.
왜 당신은 시인들이 거짓말을 많이 한다고 하신 것인가요?”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제가 그렇게 말한 이유를 묻는 것인가요?
저는 이유를 묻는 질문을 받고 답하기에 적합한 사람은 아닙니다.
저는 매순간 파악한 내용을 말하기 때문에,
시일이 지난 발언의 근거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기억력이 좋지 못합니다.
어떤 사유 끝에 내린 입장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고,
종종 제가 어떤 사안과 관련하여 어떤 입장을 지녔는지도 기억 못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가진 생각들 중에는 다시 살펴보면 낯설게 여겨지는 생각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접하면, 혹여나 오류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며 긴장하곤 합니다.
차라투스트라와 제자
차라투스트라는 제자의 질문에 당혹한 듯 그에게 성심껏 대답하지 않는다.
그의 평소 모습과 다르다고 보여지는 부분이다.
제가 예전에 당신에게 무슨 말을 했다고 하셨죠?
시인들이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한다고 말했다구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저 또한 시인 같은 존재입니다.
제가 진실을 말했다고 믿으시나요?
믿는다면, 왜 그렇게 믿으시는 것입니까?”
제자가 말했다.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당신의 저에 대한 믿음은 좋은 이야기지만, 제가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 제대로 답할 수는 없지만,
누군가 시인들이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한다고 했다면, 그것은 옳습니다.
참으로 시인들은 객관적이지 못한 말, 주관적인 말을 많이 하니까요.
우리 시인들은 강단 교육에 있어서 서툽니다.
체험하며 배우려고 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주관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됩니다.
그래서 검증하기가 쉽지 않죠.
이러한 무지 속에서 그릇된 것을 올바른 것인 양 이야기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러한 문화 속에서 우리는 부조리를 겪게 될 테구요.
시인들의 이야기는 그릇된 것을 담고 있기도 해서, 사색을 즐기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색을 많이 해보지 못한 사람들, 사색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마음에 들어 하죠.
그런 면에서 젊은 여성에 흥미를 둡니다*.
그녀들의 순수함은 선입견없이 시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흥미로워할 테니까요.
*1권 14장에서 여성이 지식에 대해 포용적이라고 했는데, 이로 인해 시인들이 여성에게 더 흥미를 둔다고 말하는 것이다.
시인들은 진리/지혜에 대해서 갈망합니다.
그들은 통찰력 있는 존재가 되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강단 교육에서는 지혜를 얻을 수 없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론이 아닌 곳에서 느껴지는 지혜가 별도로 있다고 여기며, 대중 사이에 퍼져있는 지혜를 믿죠.
시인들은 이와 다른 생각을 가집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벗어나 홀로 외로이 있을 때 지혜를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통찰을 얻으면서, 흐뭇한 감정이 생기면, 자연이 자신들을 사랑하여 통찰을 자신에게 준 것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고선 이를 사람들에게 자랑하곤 하죠.
아, 시인들만이 볼 수 있는 것이 많이 있다니!
특히 천상의 것에 대해서 시인들만이 알 수 있다고 하다니!
하지만 이런 것들은 모두 시인들이 만든 허구이자 비유일 뿐입니다.
시인들은 이상적인 것들을 바라봅니다.
그러면서 이상적 존재를 두고 신들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초인적 존재라고 부르기도 하죠.
이러한 존재들은 이상적이다보니 허구적이기도 합니다.
아, 저는 저 허구적인 것들을 두고 말하는 것에 지쳤습니다.
허구적인 것을 믿으라 말하고 찬양하는 저들에 대해서 지친 것입니다."
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시인
강단 교육을 접하지 않은 시인들은 사람들을 고양시키는 통찰을 제공하려고 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통찰에 신적인 것을 접목시키는 기법을 활용하게 된다.
(그렇다고 시인이 강단 교육을 접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아니다)
차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하자, 그의 제자는 화가 났지만* 침묵했다.
차라투스트라 역시 침묵했고, 그는 내면을 살피는 듯하더니 한숨을 쉬고 다시 말했다.
*제자가 화가 난 이유는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질문에 대해서 제대로 답해주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후의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이 시인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지니는지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한다.
“저 자신은 현재를 살아가지만, 그와 동시에 과거의 사람이기도 하죠.
그러나 제 안에는 미래에 대한 것이 담겨 있기도 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상적 미래를 위해서 과거의 오류를 개선하고, 더 나은 것을 만들어 미래를 위해 제공하려고 한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차라투스트라는 과거의 존재이자 현재의 존재이며 미래의 존재라 칭해지게 된다.
저는 과거 시인들과 지금의 시인들에게 지쳤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피상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인간이 느낄 모든 것을 경험하지 않은 존재들입니다.
그만큼 인간에 대한 통찰이 얕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약간의 쾌락과 약간의 권태를 경험한 존재일 뿐이니까요.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는 세상을 올바르게 보지 못한 부적절한 자들의 이야기로 들립니다.
이런 그들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열정을 가졌고, 무엇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 그들은 순수한 존재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을 파악하기 힘들게 함으로써, 깊은 통찰을 가진 존재처럼 보이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중재자로 여깁니다.
신과 자연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존재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들은 올바른 이해를 전할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그릇된 이해를 전하는 불순한 존재들로 보입니다.
제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과연 그들에게서 통찰을 얻으려고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렇게 하여 얻었던 것은 이제는 구식이 된 종교적인 통찰이었습니다.
그들의 통찰은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 것이었던 겁니다.
어쩌면 이들은 허세를 부리는 자들을 답습한 존재들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시인들 속에서 통찰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사색하는 존재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연히 그러한 통찰을 얻은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들은 자신을 뽐내기 좋아하는 존재들로부터 허영심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라도 있다면, 자신을 뽐내려고 하죠.
그것이 사람들이 교양 없다고 말하는 사람*일지라도 말입니다.
*사람들이 교양이 없다고 말하므로, 사회적이지 않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즉 사회적 규율이나 가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란 건데, 이는 곧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올바름 추구자를 말한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은 뽐내기 좋아하는 자들의 모습을 바라보지만,
뽐내는 자의 이야기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합니다.
저는 제가 느낀 것을 시인들에게 말합니다.
‘시인들의 정신은 그야말로 허영덩어리다’ 라고 말이죠.
시인들은 자신을 뽐내기 위해서, 어떤 존재든 원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이런 자들에게 지쳤습니다.
저는 이런 존재들도 곧 제풀에 지칠 것이라 생각합니다.
시인들 중에서 이렇게 허영심에 빠져 있는 자신을 벗어나, 진정한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성숙한 자로 거듭나려는 자들이 오는 것을 본 것입니다.
이자들은 분명 성장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바다 속에 잠긴 석상
차라투스트라는 통찰력 있어 보이는 시인들의 내면이 전통적인 관습과 앎에 따르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생각해볼 거리들
왜 신체를 잘 알게 되면서, 정신은 그저 정신처럼 보이게 되나? 왜 불멸하는 것도 비유에 지나지 않게 되나?
ㅡ신체를 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본성,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춘다는 것을 말한다.
ㅡ이에 따라서 보게 되면, 나라는 존재의 기본이 정신이 아니라 신체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왜 이렇게 이해되는지는 「차라투스트라, 1권 4장」을 참고하자.
ㅡ그러면 정신은 그야말로 신체의 부속물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ㅡ이로 인하여 정신적인 뭔가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워진다; 왜냐면 정신은 결국 신체적인 것의 일부로서 기능하기에, 신체적인 것/물질적인 것을 초월하는 어떤 것에 대해서 떠올리는 것이 부적절하게 되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정신은 그저 신체를 위해 존재하는 부속 도구일 뿐, 정신이 고유의 영역을 지닌다는 것과 같은 생각은 무의미하게 여겨지게 된다.
ㅡ그런 면에서 정신적 창조물인 불면하는 존재는 당연히 성립이 되지 않게 된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시인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했나?
ㅡ후술되기도 하겠지만, 시인들은 그릇된 것을 올바르다고 하거나, 올바른 것을 그릇된다고 하는 영향을 미친다.
ㅡ이는 거짓된 진술을 하는 것이므로 지적 받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자신은 감히 ‘왜?’라고 물어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나?
ㅡ후술되기는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매순간마다 느낀 통찰을 이야기를 하는데, 그 통찰의 근거를 매번 기억하지 않기 때문이다.
ㅡ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의문을 품는 것 자체, 확인받으려는 것 자체를 차라투스트라가 부정적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ㅡ이러한 태도는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성숙한 존재가 보일 만한 태도는 아닌데, 나타났다는 점에서 의문이 드는 구절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견해를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고 하나? 왜 날아가 버리는 새가 언급되나?
ㅡ어떤 깨달음이나 통찰을 얻어도, 까먹는 경우가 있다.
ㅡ이에 대한 표현으로 보인다.
자신의 비둘기 집에 다른 곳에서 온 낯선 새도 보인다는데 무엇을 말하나?
ㅡ자신의 집에 다른 새가 있는 것을 본다는 것인데, 이는 자신이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낯설게 느끼는 생각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즉 일기에 적어두었던, 어디에 써두었던 것이 다시 보니 낯설게 느껴지는 현상을 말한다.
ㅡ이런 것을 보게 되면, 사람인 이상 “올바르게 잘 적어둔 게 맞나?”이러면서 긴장하게 되는데, 이를 ‘내가 손을 대면 파르르 떤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자신을 한 명의 시인이라고 언급하면서 자신을 믿냐고 묻는가?
ㅡ이에 대해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시인에 대해 했던 이유나 근거를 명확히 기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ㅡ그러면서 곤란에 처하니 제자에게 반문을 한 것인데, 미숙한 태도로 볼 수 있다.
ㅡ그냥 그때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차라투스트라는 왜 믿음이 자신을 지복의 상태로 만들어주지 않는다고 했나?
ㅡ자신이 바라는 것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가 아니라, 자신과 같은 길을 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 서문 9장」을 참고하자.
시인들 중에서 자신의 포도주에 불순물을 섞지 않는 자가 없다고 하는데, 무슨 말일까?
ㅡ시인들은 강단 교육을 받은 자들을 말하지 않는다.
ㅡ이들은 스스로 관찰하고 느끼고 깨우친 걸 말하는 자들이다.
ㅡ그런 면에서 이들은 그릇된 것을 깨달음으로서 전달할 수 있다.
ㅡ그릇된 걸 전파한다는 측면에서, 불순물을 넣고 전달한다고 이야기되는 듯하다.
왜 시인은 정신이 가난한 자들을 마음에 들어 하나? 왜 젊은 여자를 언급하나?
ㅡ정신이 가난한 자들은 그럴 듯한 말에 대한 저항이 약하기에, 쉽게 설득되기 때문으로 보인다.
ㅡ젊은 여자가 언급되는 이유는, 젊은 여자들의 경우 사색할 시간이 충분하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ㅡ자신의 여성성을 가꾸고 즐기는 것도 시간이 빠듯하기에 사색할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색을 좋아하므로, 그럴 듯한 이야기에 현혹되기 쉽다는 의미를 담는다.
왜 시인들은 늙은 여자들이 해주는 이야기를 바라나?
ㅡ여기서 늙은 여자는 지혜/진리를 말한다; 관련해서는 「차라투스트라, 1권 18장」의 늙은 여자에 대한 해석을 참고하도록 하자.
ㅡ영원히 여성적인 것을 보더라도 늙은 여자의 이야기는 진리/지혜를 말하는데, 차라투스트라는 진리/지혜를 여성적인 것으로 보았고, 진리와 지혜의 속성은 영원한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ㅡ물론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한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긴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진리를 구하는 자로 표현한 적도 있기에, 여기서는 긍정적 의미에서의 진리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즉 이 구절은 시인들이 지혜/진리를 원한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무언가를 배우는 자에게는 닫힌 앎의 비밀통로는 무엇을 말하나? 왜 시인들은 대중을 믿는가?
ㅡ무언가를 배우는 자는 강단 교육을 받는 자들을 말하는데, 이는 이론적 교육을 말한다.
ㅡ따라서 이론적 교육에서는 도달할 수 없는 앎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ㅡ이는, 흔히들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론이 모든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는 입장, 삶에서 얻는 것이 중요하다, 살면서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으로 나아간다.
ㅡ이에 따라서 대중들이 생각하는 진리/지혜가 도출되게 된다.
ㅡ즉, 이 구절에서는 이론적 진리/대중적 진리를 구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시인이 믿는 것은 무엇인가? 시인이 믿는 것과 대중이 믿는 것은 차이가 있나?
ㅡ시인과 대중이 추구하는 진리는 우선 강단 교육에서 얻는 게 아닌 살면서 얻는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ㅡ하지만 둘은 다른데, 대중적 진리는 대중들이 공감하여 나타나는 진리라면, 시인이 찾는 진리는 홀로 사색하면서 얻는 진리라는 점이다.
ㅡ물론 홀로 사색하면서 얻는 진리가 다 좋은 것은 아니고, 그래서 궤변이나 허세로 이어지곤 한다.
ㅡ이런 면에서 차라투스트라와 시인은 분리가 되는데, 차라투스트라는 궤변이나 허세로 나아가지 않고 올바르려는 의지에 따라서 진리를 찾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지적 허영을 위해서 진리를 찾는다.
ㅡ이 구절까지 종합해서 보면, 진리는 이론적 진리/대중적 진리/사색적 진리가 있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ㅡ이후는 시인들이 어떤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이를 자연과 신이 자신을 사랑해서 그렇다고 말하는 허세를 보여준다.
왜 시인들은 자신들만이 꿈꿀 수 있는 것이 많다고 하나?
ㅡ그들은 사람들과 달리 사색을 하는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으로 보인다.
시인들은 왜 하늘 위에 대해서 자신들만이 꿈꿀 수 있다고 하나?
ㅡ시인들은 이상적인 것을 그리는 과정에서 천상의 것을 그려내게 되기 때문으로 보인다.
ㅡ그리고 그런 이상적 존재를 가리켜서 신이라고 언급한다.
ㅡ이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신이라는 것이 시인의 비유이자 궤변이라고 말한다.
신과 위버멘쉬는 왜 가볍다고 하나?
ㅡ신이나 위버멘쉬는 이상적 존재이기 때문에 ‘높은 곳에 있다/가볍다’고 표현되는 것으로 보인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실현되어야 한다는, 충분치 않은 일에 지쳐 있나? 왜 시인들에게 지쳤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상적 존재, 신과 위버멘쉬를 말하는 시인들에 대해서 지쳤다는 것을 언급한다.
ㅡ문제는 위버멘쉬는 차라투스트라 스스로가 고안한 개념이라는 점이다.
ㅡ여기서 해석을 할 때, 차라투스트라가 자기 자신에게도 지친 것인지, 아니면 신을 말하는 시인들에게만 지친 것인지 구분해야 할 것 같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시인에게 지쳤다고 말하기 때문에, 자신을 분리해서 표현하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나 싶다.
ㅡ그렇게 본다면, 신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함에 지쳤고, 신이라는 허구적인 것을 따르는 것에 지쳤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을 듯하다.
ㅡ만약 시인에 자신도 포함하여 지쳤다고 말한다면, 이상적인 것을 실현하기 힘들어서 지쳤다고 보아도 될 듯하다.
ㅡ하지만 생각해볼 때, 전자의 해석이 맞지 않나 싶다.
차라투스트라의 제자는 왜 화가 났을까?
ㅡ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에 따르면, 자신이 시인들을 비판하게 된 자신의 초기 견해를 말하지 않고 있는데, 이 때문으로 보인다.
ㅡ즉 ‘차라투스트라는 왜 시인을 거짓말쟁이로 보고 싫어하는지’가 궁금한데, ‘나를 포함한 시인은 스스로 사고하면서 이상한 개념을 만들고 그것을 따르게 한다’는 식으로 표현하며, 시인이 아닌 사람도 해당될 수 있는 모호한 비판을 하는 것이다.
ㅡ이는 제자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답하며 즉답을 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ㅡ그래서 뒤에 이어 나오는 내용을 보면, 시인에 대한 개인적 생각을 드러낸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은 과거와 현재의 존재이면서도 미래를 담고 있다고 말하나?
ㅡ시인들은 미래에 대한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으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를 통해서 시인과 자신을 구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 시인들에게 차라투스트라는 지쳤나?
ㅡ후술되듯이, 시인들의 통찰이 얕기 때문인데, 시인들은 대체로 깊은 사색을 하지 않고 지적 허영을 위해서만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ㅡ그래서 그들은 인간의 삶의 일부만 보고서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이는 차라투스트라가 보고 들어주기엔 힘겨운 일인 것이다.
왜 시인들의 하프 소리는 유령의 숨결이자 유령이 스치는 소리인가? 왜 시인들이 음의 열정에 대해서 무얼 알았냐고 지적하나?
ㅡ시인들은 삶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노력하는 존재들이 아니다.
ㅡ그렇다보니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탐구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통찰력 있어 보이는 언행을 하려고 한다.
ㅡ이런 그들의 이야기는 열정적을 탐구하고 노력하는 차라투스트라에게는 열정 없는 존재의 욕심을 위한 이야기이며 공허할 뿐이다.
ㅡ이런 점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왜 시인들은 순수하지 않나? 왜 저들은 깊이가 없으면서 자신의 물을 흐려놓는가?
ㅡ시인들은 우선 통찰하려는 이유가 지적 허영심 때문이다.
ㅡ그래서 순수하지 않다.
ㅡ그러면서 자신들이 뛰어난 존재처럼 보여야 하는데, 그러려면 자신들이 뭔가를 깊게 아는 듯이 보여야 한다.
ㅡ그런 점에서 자신들에 대해서 파악하기 어렵게 해야 하는데, 그러는 방법으로 설명을 어렵게 하거나 복잡한 것처럼 말하면 된다.
ㅡ이런 복잡하게 보이는 것을 가리켜서 ‘자신들의 물을 흐려놓는다’고 표현한 것이다.
시인들이 조정자 행세를 한다는 것은 무얼 말하나?
ㅡ시인들은 자신들이 깨달은 자, 통찰하는 자로 여겨지기를 바란다.
ㅡ그러면서 올바른 앎을 자신들이 전해주려고 하는데, 이는 올바른 이해와 사람들 사이에서 중개/조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ㅡ하지만 저들의 깊이는 깊지 못하고, 그릇된 것을 올바르게 말하기도 하기에,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는 이도 저도 아닌 자들이고, 불순한 자들이라 할 수 있다.
저들의 바다는 무엇인가? 차라투스트라는 왜 늙은 신의 두상만 얻었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시인들이 정말 깨달은 자들인지, 깨달은 자들이라면 그들로부터 배워야겟다는 마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ㅡ그에 따라서 그들의 이야기/그들의 정신을 살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시인의 정신과 생각이 바다로 비유된다.
ㅡ바다의 의미는 다음 구절을 통해 명료화되는 듯하다; 「유고 (1882년 7월~1883/84 겨울)」.
5[11]
바다에서 갈증으로 죽는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그렇다면 너희의 지혜가 좋은 물과 같은 맛이 나지 않도록 너희는 그 지혜에 소금을
뿌려야 할 것인가?
ㅡ이 구절을 보면, 올바른 인식을 마시기 좋은 물로 말한다.
ㅡ이에 따라 마시기 좋지 못한 물, 소금물/바다물은 그릇된 인식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늙은 신의 두상이라는 것은 종교적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지만, 관습이나 학설로 볼 수 있을 듯하다.
ㅡ즉 전통적인 무언가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ㅡ결국 시인이라는 존재는 전통적인 것을 좀 더 멋드러지게 표현하는 존재로 차라투스트라는 보고 있는 것이다.
바다는 왜 배고픈 자에게 돌덩어리를 주었다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통찰을 바라는 자인데, 이러한 특징을 배고픔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따라서 「차라투스트라, 2권 16장」에서도 학자들의 식탁에서 굶주린 채로 있었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ㅡ아무튼 차라투스트라는 시인들을 보면서 통찰을 얻지 못했고, 오히려 무가치한 것을 얻었다는 의미로 돌덩어리를 얻었다고 말하는 듯하다.
왜 시인들은 바다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나?
ㅡ여기서 바다는 전통적인 교리/관습을 따르면서 수사적 기법을 통해 ‘있어 보이는’ 표현을 하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ㅡ왜냐면 이미 시인이 그런 존재로 차라투스트라에게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현재의 시인은 허영심이 가득한 자를 보고 배워서 현재의 지경에 이르렀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ㅡ허영심이 가득한 자를 바다로 본다면, 차라투스트라와 같이 말할 수 있다.
진주는 무엇을 말하고, 왜 시인들은 딱딱한 조개가 되나? 그리고 왜 차라투스트라가 발견한 것은 영혼이 아니라 소금에 절어 있는 점액인가?
ㅡ 앞서 말한 돌덩어리와 비교해보면, 진주는 훌륭한 통찰을 말한다.
ㅡ시인들이 조개의 종류인 것은 사색하는 존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통찰을 가진다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ㅡ즉 우연히 얻어 걸렸다는 뉘앙스이다.
ㅡ이를 좀 더 확실하게 해주는 것이 차라투스트라가 발견한 것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영혼이 아닌 소금에 절어 이는 점액을 발견하는데, 이는 어떤 사색적 존재가 진주를 품은 게 아니라, 단순한 생명체가 진주를 품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ㅡ따라서 통찰을 갖춘 시인들은 사색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 우연히 얻어걸렸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인들은 왜 바다이고, 바다는 왜 허영적인가? 왜 바다는 공작새인가?
ㅡ시인을 바다로 비유하는 것은 바다 속을 인간이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으로 보인다.
ㅡ이는 앞서 자신이라는 물을 흐려놓는다는 것을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ㅡ그리고 이렇게 속이 제대로 안 보이는 것은 자신을 있어 보이게 하기 위한 전략이므로, 여기서 바다는 허영적 존재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쓰인다.
ㅡ바다가 공작새인 이유도 공작새의 화려하게 보이려는 특징과 바다의 속이 보이지 않음을 관련지었기 때문이다.
물소/들소는 어떤 존재를 말하나?
ㅡ물소/들소를 고안한 이유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ㅡ특징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들소의 영혼에 대한 설명이다.
ㅡ물소의 영혼은 모래와 같은데, 이는 바다가 덮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그런 면에서 진실함을 추구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ㅡ또 덤불에 가깝다고 하는데, 이 덤불은 교외지역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ㅡ즉 사람들을 벗어난 지역을 말하는데, 결국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홀로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ㅡ또한 늪의 경우, 사색하는 자의 상태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ㅡ이런 점에서 진실을 추구하고, 사람들로부터 벗어나며, 사색하는 존재를 말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던 자신의 모습이자, 성숙함에 이르기 위해서 노력하는 존재의 모습이다.
ㅡ이런 존재에게 허영심이 깃든 시인의 이야기는 아무 부질없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시인들의 허영심이 지치게 된다고 볼까?
ㅡ이는 허영심에 따라서 이러 저러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비일관성에 따라 자기혐오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ㅡ이와 관련해서는 「차라투스트라, 1권 8장」에서의 젊은이의 모습을 떠올리면 좋아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지적 허영심을 가진 시인이 변하고 있는 것을 확실히 보았을까?
ㅡ이는 자신의 추측이라고 생각되어진다.
ㅡ만약 그것을 보았다면, 차라투스트라는 기쁨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차라투스트라는 기뻐하고 있지는 않은 상태다.
정신의 참회자는 누구를 말하나?
ㅡ정신의 참회자는 자신이 이제껏 사회적 규율/지적 허영심에 따라 그릇되게 살아왔다는 것을 참회하는 자를 말한다.
ㅡ즉 사회적 규율/지적 허영심을 벗어난 자를 말하는 것이다.
ㅡ이를 벗어난 것은 이를 따르고 있는 것보다 확실히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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