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2권 16장 순수한 인식
16장 개괄
16장은 니체가 교조주의자들을 비평하는 장이다.
니체는 교조주의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이 교리를 강제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교조주의자들도 니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니체는 교리에 의문을 가지고 비판하려 들기 때문이다.
교리를 중시하는 교조주의자들에게는 금기인 것을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싫어하는 모습을 16장에 담고 있다.
니체는 교조주의자들의 지적 빈곤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탐구할 의지보다는 자신을 지적으로 보이게 할 수단으로서 교리를 따른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적 빈곤은 그릇된 것을 참되게 여기는 등의 추태로 이어진다.
그래서 니체 입장에서는 이런 교조주의자들이 내키지 않는다.
니체는 자신의 탐구욕과 올바름에 대한 열의에 대해서 말하면서, 교조적 학자들과 자신이 바라는 것이 같을 수 없다는 점을 이야기하며 마친다.
본문
교조주의자들은 의기양양하게 다가와, 강한 어조로 제게 말합니다.
“너는 더 이상 학자가 아니다.”
이러한 말은 제가 바라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저는 완전한 교리/학설에서 오류를 찾고 지적하는 교리의 파괴자로 여겨질 테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정말 학자가 아닌 건 아닙니다.
교리가 아니라 사색과 탐구를 중시하는 자들에게서는 여전히 저는 학자이니까요.
사색과 탐구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교리를 중시하지 않고 올바름을 중시하니까요.
저는 교조주의자들에게 학자로 인정받고 싶지 않습니다.
애초에 저는 교조주의자들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으니까요.
교조주의자들과 함께하고 있을 때, 제 영혼은 굶주렸습니다.
저들은 자신의 영혼에 드는 의문을 억압하며, 강제로 앎을 습득했으니까요.
저는 강제로 앎을 습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앎을 습득하더라도 자유롭게 접근하며 나아가길 바라고, 경험을 중시합니다.
그런 면에서 권위에 강제로 따를 바엔, 직접 의문을 풀고 나아가는 길을 나아갈 것입니다.
화관을 뜯어먹는 양
교조주의자는 차라투스트라를 학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저는 탐구심이 강합니다.
이 강한 탐구심은 의문을 말끔히 해결하기를 바랍니다.
“왜 저렇게 본 거지? 이렇게 볼 수도 있는데?” 식으로 드는 의문들을 다 해결하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교조주의자들과 있는 곳에서는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들은 의문을 갖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하니까요.
따라서 저는 교조적인 곳은 모두 뛰쳐나와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교조주의자들의 경우, 탐구심이 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탐구하기 보다는 관망하려고 합니다.
“아 이런 생각도 하는구나” 라고 말이죠.
그러곤 그렇게 의문도 갖지 않은 채 지나갑니다.
그저 멍하니 앎들을 사상들을 바라볼 뿐이죠.
관람하듯이.
저들과 같이 공부한 주제를 두고 토론을 하게 된다면, 그들은 그릇된 이해를 쏟아 냅니다.
저들의 그릇된 이해가 뛰어난 학자의 통찰에서 비롯되었다는 넌센스를 과연 누가 알아차릴 수 있을까요?
학설을 가르치는 선생
일방향적 교육에 대해서 차라투스트라는 만족하지 못한다.
저 교조주의자들은 지혜로운 존재인 양 행동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저들의 지혜는 그릇된 것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자신들의 지혜가 참되고 올바르다고 여기며 온갖 이야기를 해댑니다.
저들은 굉장히 수완이 좋습니다.
왜냐면, 저들은 자신들이 내놓는 그릇된 이해들/궤변들을 어떻게든 말이 되게끔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에게 이성은 궤변을 그럴싸하게 만드는 기능을 하는 것인 겁니다.
교조주의자들은 배운 것을 한치도 틀리지 않고 외우는 데 달인들입니다.
이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이 배운 것을 읊어낼 수 있습니다.
또, 앞서 말한 것처럼 저들은 탁월한 통찰을 알려주어도 왜곡하여 그릇된 이해를 하는데 재능이 있습니다.
교조주의자들은 자신들끼리서만 경쟁합니다.
그들만의 리그가 있는 것이죠.
그렇게 자기들 사이에서 도태된 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립니다.
그렇게 자신들의 뛰어남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이 교조적 학자들은 사회가 추구할 미덕과 악덕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들의 본성을 반영하지 않은 것이기에, 부조리 자체이자 그릇됨 자체이죠.
그렇게 그들은 그릇된 것을 사회에 퍼뜨립니다.
이들은 또 미덕적이지 못한 것에 숭고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이 이상한 것을 숭고하다 여기며 쫓아가게끔 하려고 하죠.
그렇게 사람들은 저들이 숭고하게 만든 이상한 것들을 따르게 되는데,
그럼으로써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부터 멀어지고, 진정한 자신을 마주하면 낯설게 느낍니다.
이러한 점에서 교조주의자들이 말하는 미덕은 저들이 하는 다른 어떤 활동보다도 저를 언짢게 합니다.
바느질하는 교조주의자
교조주의자인 학자는 올바른 이해를 갖추지 못해서, 늘 자신의 궤변을 정당화하느라 바쁘다.
궤변과 궤변을 이어붙이는 일, 이것을 차라투스트라는 천을 짠다고 이야기한다.
제가 그들과 함께 지낼 때, 그때도 저는 그들보다 성숙하고 뛰어났습니다.
더 열정적으로 의문을 갖고 사색하곤 했으니까요.
이러한 제 모습에 열등감을 느낀 이들은 늘 제게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들은 누가 자신들보다 성숙하고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저와 어울리기를 꺼렸고, 제가 잘못된 것으로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저를 외면했는데, 이러한 태도는 사회적으로 가장 학식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서도 나타나는 태도입니다.
이들은 인간의 왜곡하는 능력을 바탕으로 저를 왜곡하고, 그러면서 제가 잘못됨의 표본인 것으로 치부해버립니다.
저들이 저를 그렇게 대하더라도 사실 문제되지는 않습니다.
저의 탐구욕은 저들의 탐구욕보다 더 강하며, 올바름에 대한 의지도 제가 더 강하니까요.
제가 오류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올바름에 대한 의지를 바탕으로 나아갈 것이기에,
당장은 오류일지라도 분명 저들보다는 더 나은 이해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는 인간이 평등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의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그들과 저는 <다릅니다>.
그렇기에 제가 원하는 것을 저들은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위에서 들리는 소음
학자들은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를 소음으로 여긴다.
그도 그럴 것이, 학자들의 목표는 권위의 계승이지, 올바른 탐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해볼 거리들
차라투스트라의 화관을 먹어 치운 양은 누구인가?
ㅡ여기서 양은 목자들을 따르는 존재로서의 양을 말한다.
ㅡ후술되는 내용으로 볼 때, 학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므로, 교리를 따르는 교조주의자들로 생각해볼 수 있다.
양은 왜 화관을 먹는가?
ㅡ여기서 화관은 학자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보인다.
ㅡ이 상징물을 교조주의자들이 차라투스트라에게서 박탈한 것으로, 이는 곧 학자로 인정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ㅡ다르게 보면, 니체가 학계에서 배척됨을 나타낸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와 허물어진 담장, 엉겅퀴, 양귀비는 무엇을 말하나? 왜 차라투스트라는 이곳에 있기를 좋아하나?
ㅡ아이는 순수함을 나타내며, 어떤 형식과 규율에서도 자유로운 상태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ㅡ아직 충분히 교육받지 않았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ㅡ허물어진 담장의 경우, 부숴짐의 의미로 볼 수 있고, 이는 곧 사회적 규율/교리/학설 등의 무너짐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엉겅퀴나 양귀비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엉겅퀴는 억셈을, 양귀비는 희생을 나타낸다고 보여지므로, 올바름을 위해서 노력하고 희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부조리한/그릇된 사회적 규율에 맞서는 것을 좋아한다는 차라투스트라의 성향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의 영혼이 학자들의 식탁에 오래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학계에서 영혼의 배를 채우길 바랐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지적 성장/내면적 성장을 바랐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인다.
ㅡ즉 학계에서 성장하기 위해 오랫동안 있었다는 말이다.
ㅡ하지만 학계에서는 지적 성장/내면적 성장에 도움을 주지 않았기에, 차라투스트라는 학계를 뛰쳐나온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호두 까는 방식으로는 인식에 도달하지 않는다고 하나?
ㅡ호두 까는 방식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알기는 어렵다.
ㅡ그나마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도덕의 계보, 제3논문 9절」의 구절을 참고하는 것인 듯하다.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을 폭행하고 있다.
우리는 영혼의 호두를 까는 사람들이며, 마치 인생이란 바로 호두를 까는 것일
뿐이라는 듯 질문하며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다.
ㅡ여기서 호두를 깐다는 것은 영혼을 부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ㅡ즉 영혼을 피폐하게 만든다, 안 좋게 만든다는 의미인 것이다.
ㅡ따라서 학계에서 이뤄지는 호두 까는 방식의 인식법은 강제한다는 의미, 영혼을 억압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ㅡ즉 스스로 사고하거나 의문을 품는 걸 못하게 한다는 뉘앙스인 것이다.
ㅡ그런 면에서 이후 나오는 내용 “나는 자유를 사랑하며 싱그러운 대지 위의 공기를 사랑한다”는 표현도 강제보다는 자유로움, 이론적 이해보다는 경험적 이해를 원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ㅡ또 후술되는 문장 “저들의 지위와 권위에서 잠드느니, 황소 가죽 위에서 잠든다”는 표현도 강제 속에서 자리하기 보다는 강제되지 않는 영역에서 지내겠다는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뜨거우며, 학자들은 차가운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의문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탐구하는 존재라면, 학자들은 그저 지식의 획득을 위해서 관망하는 자들로 탐구의지가 낮다.
ㅡ즉 탐구욕의 강도가 높으면 뜨겁다/열의를 갖는다고 말하고, 강도가 낮으면 차갑다고 표현한 듯하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숨을 쉬지 못하는 일이 자주 있었나?
ㅡ차라투스트라의 경우, 학계 속에서 있을 때, 의문과 탐구심이 들었으나, 이를 억압당했을 것이다.
ㅡ따라서 그는 자신의 성향대로 할 수 없어 답답했을 것이다.
먼지가 쌓여있는 방은 무엇을 말하나?
ㅡ교단을 말한다.
ㅡ즉 어떤 동적 활동없이 정적으로만 소통하는 공간인 것이다.
ㅡ그러므로 먼지가 쌓인다.
왜 학자들은 관망자이기를 바라나?
ㅡ그들은 자신들을 드높여 줄 무언가를 바라고 배우기 때문이다.
ㅡ즉 올바른 이해보다 권위자로서 인식되어야 하므로, 기존 권위를 계승하는 쪽에 무게를 둔다.
ㅡ그렇다보니 기존 권위에 대해서 회의적으로 접근하려 하지 않는다.
왜 학자들에게 손을 대면, 먼지가 일어나나? 곡물/황금빛 환희에서 생겨난 먼지란 무엇을 말하나?
ㅡ우선 서술된 내용으로 볼 때, 학자들에게서 비롯되는 먼지는 앞선 학자들의 통찰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ㅡ이는 다르게 보면, 앞선 학자들은 곡물을 남겼는데, 후대 학자들이 먼지를 지닌다는 것을 말한다.
ㅡ즉 앞선 학자의 통찰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왜 학자들의 지혜는 오싹하게 하고 악취가 나나?
ㅡ학자들의 지혜가 그릇된 것이기 때문에 악취가 난다고 표현한 것이고, 오싹하게 하는 이유는 그들이 잘못된 것을 진리라고 맹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의 영리한 손가락은 무엇을 말하나? 그들의 손가락이 실을 꿰고 매듭짓고 천을 짤 줄 안다는 것은 뭘 말하나? 왜 저들의 정신은 양말을 짜나?
ㅡ지금 언급되는 학자는 올바른 이해를 갖추지 못하는 학자를 말한다.
ㅡ이러한 학자들이 말하는 것은 대체로 일관성 없이 파편화되어 있는 것이다.
ㅡ그러면 사람들은 그의 일관되지 못함을 지적하게 되는데, 이럴 때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말이 되게끔 만드려고 노력하게 된다.
ㅡ이러한 면을 실을 꿰고 매듭짓고 천을 짠다고 말하는 것이다.
학자들은 왜 시계 장치인가?
ㅡ교조주의자들은 자신이 배운 것에서 벗어나서 사유하지 않는 특징을 보이기 때문이다.
왜 학자들은 물레방아/절굿공이처럼 되나? 왜 먼지로 만드는 법을 안다고 하나?
ㅡ먼지는 앞서 다룬 것처럼 그릇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ㅡ이에 따르면, 학자들은 올바른 통찰을 그릇되게 이해하는 능력이 있다.
ㅡ즉 훌륭한 것을 하찮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ㅡ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왜 서로를 믿지 않고 서로를 감시하나?
ㅡ이는 학자들이 자기들만의 리그에서 토론하고 연구를 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학자들은 왜 독을 조제하나?
ㅡ학자들이 사회적 문제에 의견을 내놓으면서, 올바른 것과 그른 것을 선포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때, 그릇된 것을 올바른 것처럼 만들 수 있는데, 이를 독을 조제한다고 표현한 것 같다.
왜 학자들은 유리 장갑을 끼고 있다고 하나?
ㅡ이들은 그릇된 것을 올바른 것처럼 만들 때, 그 의도가 악하진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ㅡ즉 정말 이들이 그릇된 것을 올바른 것으로 인식했기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학자들은 왜 속임수 주사위 놀이를 하나?
ㅡ그릇된 것을 올바르게 만들 때 속임수/착각을 유도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왜 우리는 서로에게 낯설어지나?
ㅡ학자들이 제시하는 미덕과 악덕은 우리의 본성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낯설고 위험한 것으로 느끼게 될 수 있는데, 이점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학자들의 덕은 차라투스트라의 취향에 거슬리나?
ㅡ이들이 말하는 덕은 올바른 것을 말하지 않고, 그릇된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ㅡ그리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장려하는데, 이로써 사회는 부조리한 미덕과 악덕을 가지게 된다.
ㅡ이상 사회를 추구하는 차라투스트라로서는 맘에 들지 않는 일이다.
차라투스트라는 학자들 사이에서 지낼 때 왜 학자들보다 뛰어났나?
ㅡ차라투스트라는 내적 성장을 위한 탐구를 하려고 학계로 나아갔다면, 학자들은 권위를 계승하기 위해서 학계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ㅡ그래서 능력적 측면에서 차라투스트라가 더 뛰어난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왜 학자들은 차라투스트라와 자신들 사이에 목재와 흙 폐기물을 넣었나?
ㅡ학자들은 차라투스트라와의 차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ㅡ그래서 그와 벽을 친 것으로, 차라투스트라의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여긴다는 의미에서 폐기물을 사이에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왜 저들은 차라투스트라의 발소리를 약하게 만들었나?
ㅡ니체의 이야기가 학계에 온 자신들의 방향과 다르기 때문에, 듣고자 하지 않은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오류 위를 걸어도 학자들보다 위에 있나?
ㅡ차라투스트라는 탐구욕과 올바름에 대한 의지가 강한 존재이기에, 오류를 저질르더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ㅡ하자민 학자들의 경우, 탐구욕과 올바름에 대한 의지가 약하므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ㅡ이런 점에서 언급한 내용으로 보인다.
왜 인간은 동등하지 않다고 말하나?
ㅡ탐구하는 것에 있어서, 학자와 차라투스트라는 완전히 다른 입장을 지닌다.
ㅡ그에 따라서 같은 상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가 원하는 것을 저들은 원할 권리가 없다고 하나?
ㅡ이 부분의 경우, “원할 권리가 없다”라기 보다는 “원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보는게 맞아보인다.
ㅡ이 부분은 dürften의 번역인데, dürfen이 원형이며, dürfen은 “허락하다/할 수 있다”는 의미로 쓰인다.
ㅡ그런데 dürften은 dürfen의 가정법이나 가능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한다.
ㅡ따라서 “원할 수 없다”보다는 “원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보는 게 더 낫지 않나 싶다.
ㅡ이에 따라서 보면, “차라투스트라가 원하는 것을 학자들은 원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인데, 이는 당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ㅡ즉 학자와 자신의 추구하는 방향이 완전히 다름을 말하는 것인 셈이다.
ㅡ”원할 수 없다”고 보더라도, 차라투스트라가 바라는 것을 학자들은 원할 자격이 없다는 뉘앙스로 해석할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가 바라는 것은 이상 사회이자 개인의 행복인데, 학자들은 이상 사회를 바랄 수도 개인의 행복을 바랄 수도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니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2권 의역'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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