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2권 13장 고매한 자들
13장 개괄
13장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단순히 올바름만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올바른 세상을 구현하기 위한 고민을 하라고 말하는 장이다.
니체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들의 모습이 굉장히 경도되어진 것을 지적한다.
이러한 올바름에 대한 경도는 그릇된 이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게 되고, 이로써 다투게 되는 상황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런데 올바름을 추구하는 이가 이처럼 올바름 때문에 다투었을 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것일까?
니체도 말하지만, 이러한 것은 올바름을 분명 지키는 노력은 한 것이지만, 세상이 올바름을 수용하게끔 노력한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그릇된 이와 다툰 것 말고는 남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라, 세상이 올바름을 추구하도록 이끄는 것일테니 말이다.
이런 면에서 올바름의 추구는 올바름을 지키기 위한 전략이 아니라 다른 전략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게 된다.
그 다른 전략은 바로 그들 곁에서 다툼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올바름을 추구하게끔 기회를 주며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그는 사람들 곁에 머무르며 그릇된 문제에 대해서 여유롭게/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끔 사람들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처세를 니체는 아이와 같은 모습을 갖추는 것이며,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의 최종적 단계라고 말한다.
이것이 「차라수트트라, 1권 1장」의 아이가 언급되는 이유다.
본문
사람들이 보기에, 저는 고요한 존재로 보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제 자신을 그대로 보이지 않으며, 저를 잘 표현하지 않고 웃으며 대화를 넘기곤 하니까요.
이런 모습이니, 누가 제 안에 감정적/본성적 격동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할까요?
오늘 저는 사람들 사이에서 심오해 보이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는 엄숙한 사람이었고, 참회하는 자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의 어리숙함에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그는 자신을 심오한 사람으로 여겨서인지, 사람들 사이에서 진지하고 날카로운 표정으로 과묵하게 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심오하게 만들어 주던 진리는 그릇된 진리들*이었죠.
*차라투스트라를 통해서 언급되는 심오한 사람은 자신이 고상하다고 여기는 존재로,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뽐내는 모양새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런 태도는 그릇된 생각에서 비롯된다고 보기 때문에, 그릇된 진리를 그가 가지고 있다고 표현한다.
그에게서 분명 방황과 고독 속에서 분투한 흔적이 보였지만, 아직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직 많은 까칠함들을 지니고 있어 날카롭게 느껴질 뿐, 여유로움과 유연함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방황과 고독 속에서 엄격하고 경직된 모습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는 논쟁 속을 걸어왔습니다.
그래서 그가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논쟁하는 듯한/공격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는 아직 자신 안에 존재하는 공격성을 길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모습은 적을 마주하여 으르렁거리며 위협하는 호랑이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처럼 긴장된 존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불안정한 상태는 제 취향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제게 말합니다.
취향과 입맛에 대해서는 논하는 게 아니라구요.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의 문제들은 모두 개인적 취향들이 부딪히면서 나타난 것들이 아닙니까?
취향, 그것은 우리의 선택을 좌우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면서, 자신의 선택을 포기하는 자들에게는 분명 화가 미칠 것입니다.
위협적인 호랑이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릇됨을 마주할 때 상당히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차라투스트라는 이를 호랑이의 모습으로 비유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 심오한 사람이 자신의 심오함에 따른 고독에 지치게 된다면,
그제서야 그의 아름다움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저 역시도 이 사람이 하는 이야기들이 좋은 이야기라고 여길 것이구요.
그렇게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안다면,
즉 자신이 아니라 사람들에게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는 자신을 넘고, 앎을 나누는 존재의 모습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하고만 교제하고 싶어 하다보니,
너무 오랫동안 고독 속에 있었고, 그로 인하여 수척해졌습니다.
그에게는 분명 노력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경멸이 있고, 혐오가 있습니다.
지금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머물고 있지만, 사람들에게 앎을 선사하는 자로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 사람은 밭을 가는 황소처럼 자신의 의식/관점을 뒤엎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자기 생각의 지반을 다지면서, 인류를 중시하는 모습이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인류애를 갖추어 삶을 긍정하며 나아가는 모습이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아직도 엄격하고 경직된 모습입니다.
그의 행동을 보면, 그는 여전히 올바름을 추구한다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을 올바른 이해로 이끄는 일을 말한다.
저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부조리함과 그릇된 사회적 규율과 가치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고싶습니다.
하지만 제가 바라는 것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올바른 것을 바라보려고 하는 모습 역시 보고 싶습니다.
이제껏 그는 옳음을 위해 다른 이들과 다투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다투기만 해선 안 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가 단순히 자신만의 올바름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이끄려고 한다면 말입니다.
그가 성숙한 자가 되려고 한다면 말입니다.
그는 주변의 괴물들, 사회적 규율이나 맹신들을 물리쳤고, 의문스러운 것들에 대한 깨달음 역시 얻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는 자신 안의 공격성과 삶의 방향에 대해서 아직 명확히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공격성을 통제하고, 삶의 방향성을 찾아야 합니다.
그는 아직 사람들 사이에서 마찰하지 않고 웃으면서 그들과 논쟁하는 법을,
그릇된 앎을 두고 혜택을 받는 걸 질투하지 않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올바름에 대한 그의 열정은 여전히 그릇된 것을 보면 불타오르는 겁니다.
수척한 젊은이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는 올바름에 대한 추구를 하면서,
올바르지 못한 자들을 걷어내다 보니, 그의 대인관계는 빈곤해지게 된다.
그가 바라야 하는 것은 자신의 성장에 만족하며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관대하게 수용하고 그들을 이끄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아함>이라는 것은 고귀한 마음을 가진 사람의 관대함을 부르는 것이니까요.
진정 우아한 자라면, 사람들과 함께하며 언제든 싸울 수 있는 태도를 갖추는 것이 아니라, 여유롭게 편안하게 하여 사람들과 민감한 주제에 대해서도 논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머무르는 것에 대해서도 통찰하고, 사람들에 대한 자기의 감정도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올바름을 지키려는 자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아름다움과 우아함’입니다.
이 ‘아름다움과 우아함’은 올바름에 대한 강렬한 열정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니까요.
올바름에 대한 열정에 힘을 빼고, 좀 더 장기적인 안목에 따라 사람들을 대할 때,
아름다움과 우아함이 가장 많이 깃드는 것입니다.
그릇된 것에 대한 전투적 태세를 푸는 것,
지금 당장 올바름을 세우려는 의지를 덜어두는 것.
이것이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의 올바름에 대한 열정이 자비로워져서 사람들에게로 나아갈 때,
나는 이러한 나아감을 아름다움이라고 부릅니다.
괴물과 맞서는 영웅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들은 그릇된 것이 나타난다면, 주저없이 맞서려고 한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여러분,
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여러분들이 이런 아름다움을 지니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올바름의 추구하는 운명의 마지막 과제가 올바름에 대한 열정을 통제하는 것이 되기를.
저는 여러분이 이상 사회를 바라지만, 이상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 되려
이상 사회를 이바지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상 사회를 위한 행동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이를 위한 행동을 하길 바랍니다.
종종 저는 자신을 선하다고 여기는 <약한 자들>을 비웃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자신이 약하기에 선하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행동 속에는 악함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기둥과 같은 미덕을 지녀야 합니다.
이상적 미래의 구현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견디기 위한 미덕 말입니다.
이러한 미덕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서 점차 더 아름다워지고 섬세해지게 됩니다.
그저 올바르기만 해서는 이 목표를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올바름과 동시에 올바름의 구현을 위해서 점점 더 단단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들이여.
여러분은 언젠가 아름다워져야 할 운명을 지녔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신이 아름다운 존재인지를 확인해야 할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은 올바름에 대한 신성한 욕망에 휩싸여 전율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허영심에서도 올바름에 대한 경배심이 깃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상한 자의 영혼이 갖는 비밀입니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들이 자신을 초월하여 삶을 바라볼 때,
비로소 자기애를 넘어선 존재, 미래를 사랑하는 위버멘쉬가 그에게 가능성으로서 인식되는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움을 갖춘 자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올바름 추구자의 최종적인 모습은
그릇된 사람들 속에서 웃으며 빛을 선사하는 모습일 것이다.
살펴볼 거리들
차라투스트라의 고요한 바다와 괴물, 수수께끼와 웃음은 무엇을 말하나?
ㅡ이 구절은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외면과 내면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다.
ㅡ즉 차라투스트라의 외면은 고요해 보이며, 미소가 가득하고,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ㅡ이는 처세의 일종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지 않고 넘어가는 모습,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더라도 수수께끼를 내듯이 던지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ㅡ하지만 이것은 본심을 숨기는 것이며, 좀 더 직접적인 본성은 직설적인 무언가가 숨겨진 상태라 할 수 있다.
ㅡ그렇기 때문에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웃으며 여유롭게 대화하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하는 것이다.
ㅡ해당 구절이 나오는 이유를 살펴보면, 차라투스트라는 단순히 올바름을 추구하지 않는 존재, 사람들 사이에서 이미 좋은 처신을 하는 존재로서 자신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리고 후에 언급되는 고매한 자/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는 자신과 같기보다는 약간 미흡한 상태의 존재를 말하고 있다.
ㅡ따라서 이상적인 경우로 자신을 제시하고, 그러면서 미숙한 자들에게 조언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고매한 자/엄숙을 떠는 자/정신의 참회자는 누구인가?
ㅡ여기서 언급되는 존재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존재로 보기는 어렵다.
ㅡ왜냐면, 이 존재는 사람들에게 친화적이지 않고, 되려 공격적인 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ㅡ이런 면에서 사회적 인물이 아닌 반사회적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ㅡ13장의 전체 흐름을 보면, 차라투스트라가 자신과 비슷한 상태의 존재, 조금만 더 나아가면 자신과 같은 모습이 될 존재로서 취급하기 때문에, 반사회적 존재라는 해석은 적절해 보인다.
ㅡ고매한 자는 고매한 티를 낸다는 것으로, 일반적인 사람과는 다른 존재임을 말한다.
ㅡ차라투스트라에게 고매하다는 것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 의미인데, 부정적 의미로 쓰이는 경우는 대체로 사회적 인물을 말할 때이고, 긍정적 의미로 쓰이는 경우는 반사회적 인물을 말할 때이다.
ㅡ이 고매한 자는 차라투스트라에게 긍정되고 있는 인물이기에, 고매하다는 것은 분명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로서 자질이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ㅡ즉 대중보다 나은 존재로 해석 가능하다.
ㅡ엄숙을 떠는 자라는 것은 올바름에 대한 엄격성과 진지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정확한 원칙주의적 면모를 나타낸 것이다.
ㅡ정신의 참회자라는 것은 정신이 사회적 규율에 의해 억압받았으나, 그것을 참회하고 사회적 규율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로 보인다.
ㅡ즉 자신이 사회적 규율에 따른 것에 대해서 잘못을 깨닫고 뉘우친 상태란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이 존재의 모습을 보고 추하다고 하는가?
ㅡ그는 세상에서 자신만이 가장 진지한 존재로 여기고 있는 상태라서 그렇다.
ㅡ세상 사람들은 철딱서니 없는 한심한 존재로 보이는 것이다.
ㅡ차라투스트라가 이런 상황을 보기에, 이 존재는 세상을 이미 다 알고 문제 있는 것으로만 느끼는 오만함을 보이고 있다고 보일 것이다.
ㅡ왜냐면 이 존재는 올바름에 대한 엄격함을 가지고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데, 이러한 삶의 방식은 올바름을 구현하는 데 무관하기 때문이다; 추후 언급이 되겠지만, 이러한 태도는 어리숙한 태도로 취급된다.
ㅡ이에 따라서, 이 존재의 모습은 추하게 보인다.
고매한 자는 왜 가슴을 부풀린 채 말없이 서있나?
ㅡ올바름에 대한 추구를 한 고매한 자는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올바름에 대해서 더 잘 알 것이고, 사람들의 그릇됨에 대해서도 잘 보일 것이다.
ㅡ이에 따라서 그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만족을 할 것이다.
ㅡ여기에 더해서, 사람들이 참 한심해 보일 것이기에, 사람들을 더 하찮게 대하게 될 수 있다.
ㅡ따라서 이 존재는 자기 도취 상태에 있을 것인데, 이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고매한 자가 사냥에서 잡은 진리는 왜 추한가?
ㅡ올바름에 대한 것이긴 하지만, 아직 더 통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ㅡ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지금 당장은 그들의 진리는 그들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만 한다고 보는 듯하다.
고매한 자는 왜 가시가 많고, 장미는 없는가?
ㅡ여기서 말하는 가시는 찌르는 것을 나타내고, 이는 올바름과 사람들 관계로 봤을 때, 그릇됨에 대해서 굉장히 날카롭게 반응하는 상태, 날이 선 상태로 보면 좋을 듯하다.
ㅡ이에 따르면, 이 존재는 사람들에게 그릇된 것을 비판/비난/지적할 줄 만 알지, 좀 더 부드럽게 접근하는 법을 모르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고매한 자는 왜 웃음과 아름다움을 배우지 못했나?
ㅡ올바름에 대한 추구를 하는 고매한 자는 올바른 것을 찾고 증명하는 데에 발달했다.
ㅡ그렇다 보니 옳으냐 그르냐를 놓고서 맹렬하게 따지기만 할 뿐, 여유롭게 대화해 보질 못한 것이다.
ㅡ즉 웃음과 아름다움은 그릇된 문제에 대해서 여유롭고 편안하게 이끌고 가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고매한 자는 어떤 사나운 짐승들과 싸웠나? 그리고 왜 고매한 자에게는 짐승이 있고, 내다보고 있나? 왜 고매한 자는 이 짐승을 이겨내지 못했나?
ㅡ여기서 짐승은 본성이나 본능이 아니라, 어떤 주제를 두고서 다툰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ㅡ문제는 이 존재가 어떤 주제를 놓고 다툴 때, 앞서 말한 것처럼, 옳고 그름에 대한 맹렬한 논증만 있었다는 것이다.
ㅡ그렇기에 “그의 진지함으로부터 한 마리의 사나운 짐승이 내려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ㅡ즉 그는 아직 맹렬하게 논증하고 다투는 방법만을 안다는 이야기다.
ㅡ다르게 말하면, 그는 자신의 올바름과 관련된 공격성을 다루지 못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그가 이겨내지 못한 사나운 짐승”이라고 표현되는 것이다.
뛰어들려는 호랑이처럼 서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이 호랑이는 공격하기 위한 준비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이것은 올바름에 대해서 경도된 상태기에 나타나는 모습인 것이다.
ㅡ치환해서 본다면, 고매한 자는 언제든 다툴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경도된 상태를 좋아하지 않으며, 여유를 갖는 상태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고매한 자가 자기 자신의 고매함에서 싫증을 느낄 때는 언제이길래 아름다움이 드러나나?
ㅡ고매한 자는 현재 상태로 보면 굉장히 날카로운 상태다.
ㅡ이렇게 지내게 된다면, 주변에 사람이 남아나기가 어렵다.
ㅡ즉 고통한 상태에 놓인다는 것인데,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이 고독함에 싫증이 난다면, 이제 아름다움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ㅡ왜 고독한 이후에 아름다움이 나타나냐면, 고독함을 견디기 힘들어야 사람들과 함께 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ㅡ즉 고매한 자가 얻는 아름다움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에 대한 통찰이 있으면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아름다움을 얻은 고매한 자가 맛있다고 여기나?
ㅡ이는 아름다움을 얻은 고매한 자가 내놓는 앎이나 깨달임이 좋은 것이란 점을 말하기 위한 표현이다.
고매한 자가 자기 자신에게 등을 돌린다는 것은? 그림자는 무엇을 말하나?
ㅡ현재의 자신에게 등을 돌린다는 것으로, 올바름을 맹목적으로 엄격하게 추구하는 자신에게 등을 돌린다는 것을 말한다.
ㅡ그러면 사람들로 향하게 되면서, 자신의 부정적인 측면을 개선하게 된다는 것이다.
ㅡ즉 그림자라는 것은 올바름에 대한 원칙주의로 인하여 나타나는 부정적 측면인 것이다.
왜 고매한 자는 자신의 태양에 뛰어드나?
ㅡ여기서 번역이 조금 갈릴 수 있는데, “태양에 뛰어든다”기 보다는 “태양 속으로 들어간다”라고 번역하는 책도 있기 때문이다.
ㅡ당장 보기에는 후자가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ㅡ여기서 태양은 빛을 나누는 존재이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가 언급했던 것처럼, 선사하는 자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즉, 고매한 자가 자기 자신에게 등을 돌리면, 선사하는 자가 된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는 것이다.
ㅡ그런데 앞서 자기 자신에게 등을 돌리는 것을 올바름에 대한 원칙주의로 벗어나는 것, 사람들에게 향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ㅡ이렇게 되면, 사람들을 발달시키려고 하면서 앎을 나누게 될 것이다.
ㅡ그렇기에 등을 돌리면 태양 속으로/선사하는 자로 들어가는 것이 된다.
왜 정신의 참회자는 그늘 속에서 핏기가 가셨나?
ㅡ이 고매한 자가 그늘 속에 있다는 것은, 원칙주의를 고수하다가, 앞서 말한 그림자, 즉 원칙주의를 고수하면서 생기는 부정적 환경에 노출되어져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원칙을 고수하면, 고독으로 나아가게 되고, 이는 점차 생기를 잃게 되는 것이므로, 핏기를 잃는 상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정신의 참회자는 무엇을 기다리다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나?
ㅡ정신의 참회자는 자신처럼 원칙을 제대로 지킬 사람을 찾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ㅡ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을 곁에 두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ㅡ하지만 그렇게 원칙을 잘 지키는 사람이 많지 않으므로, 그는 사람관계에 있어서 빈곤한 상태가 된 것을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왜 그의 눈에는 경멸이 있고, 왜 입에는 역겨움이 있나?
ㅡ이는 대중들에 대한 고매한 자의 모습으로, 그들을 경멸하고 역겨워한다는 것을 말한다.
왜 고매한 자는 쉬고 있어도 햇볕 속에서의 휴식이 아닌가?
ㅡ여기도 번역에 문제가 있어 보이는데, 백승영 직역본의 경우, ruht(ruhen) 등을 쉬다/휴식으로 번역했다.
ㅡ하지만 흐름상, 이 고매한 자는 아직 깨달음을 제대로 얻지도 못한 채로 홀로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상태를 쉬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ㅡ따라서 ‘쉰다/휴식하다’라고 보기보다는 ruhen의 다른 의미인 멈추다/머무르다의 의미로 보는 게 맞아 보인다.
ㅡ이에 따라서 본다면, “고매한 자는 현재 사람들 사이에서 머무르고 있는데, 그것이 선사하는 자로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라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고매한 자는 왜 황소처럼 행동해야 하나?
ㅡ여기서 황소는 후술되다시피 쟁기질을 하는 황소다.
ㅡ쟁기질을 한다는 것은 밭을 뒤엎는다는 것인데, 이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정신의 뒤엎음을 의미한다; 「차라투스트라, 2권 5장」을 참고하자.
나의 말은 멧돼지의 긴 주둥이처럼 그대들의 영혼 밑바닥을 파헤치려 한다.
그대들에게 나는 쟁기날로 불리기를 바란다.
그대들의 바닥에 있는 모든 비밀이 드러나야 한다.
그대들이 파헤쳐지고 부서져 태양 아래 놓일 때,
그대들의 거짓도 그대들의 진실로부터 떨어져 나갈 것이다.
왜 고매한 자의 행복은 대지에 대한 경멸이 아니라, 대지의 냄새를 뿜어야 하나?
ㅡ여기서 말하는 대지는 현생/세상을 말한다.
ㅡ즉 고매한 자는 현생을 경멸해선 안 되고, 전적으로 현생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ㅡ즉 현생을 긍정하며 살아가는 존재 말이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가 지속적으로 언급한 이야기로, 차라투스트라는 현생을 긍정할 수 있는 희망을 선사하려고 하며 앎을 나누고 있다.
왜 고매한 자의 낯빛은 어둡고, 손 그림자가 얼굴을 아른거린다고 하나? 눈의 감각은 왜 그늘져 있나?
ㅡ낯빛이 어두운 것은 지나친 엄격함 때문이다.
ㅡ너무 진지하여 경색된 상태로 보인다.
ㅡ손 그림자가 얼굴을 덮는 것은 빛을 가리고 있다는 것으로, 눈을 부시게 하는 태양을 손으로 가리고 있는 상태라 할 수 있다.
ㅡ빛은 올바른 것을 말하므로 올바른 것을 보고 있지 못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ㅡ눈 감각이 그늘졌다는 것도, 손 그림자와 같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결국 올바른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고매한 자의 행위가 그림자로 자신을 덮친다는 것이나, 자기 행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이 존재는 현재 올바름을 너무 추구한 나머지, 올바른 세상을 구현하는 데에는 노력하지 못하고 있다.
ㅡ이로써 올바름 추구자가 해야 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데, 이는 올바름 추구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ㅡ즉 올바른 이해,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상태란 것인데, 이는 곧 그림자가 덮쳤다고 말해진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고매한 자에게서 천사의 눈을 보고 싶다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이 올바름 추구자가 올바름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인식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ㅡ이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왜 고매한 자는 영웅적 의지를 잊어야 하나?
ㅡ고매한 자, 올바름 추구자는 자신이 올바름을 지켜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ㅡ이에 따라서 그릇됨과 맞서는 태도를 보인다.
ㅡ하지만 올바른 세상을 구현하려면, 그릇된 존재와 맞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릇된 존재를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하기도 하다.
ㅡ그러려면 맞서려는 의지를 버려야 한다.
왜 고매한 자는 고매한 자를 넘어 고양된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나?
ㅡ올바름을 위해서 이 존재는 올바름에 대한 지킴을 넘어서는 게 필요하는데, 이를 고매한 자를 넘어 고양된 자가 되어야 한다고 표현한 것이다.
에테르는 왜 의지 없는 자를 드높이나?
ㅡ여기서 언급되는 의지 없는 자는 영웅적 의지를 버린 상태의 고매한 자를 말한다.
ㅡ즉 차라투스트라가 바라는 상태로, 올바름을 위해서 사람들에게 맞서기보다 내 편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상태다.
ㅡ이런 상태에서는 올바름에 대한 앎을 선사하게 되는데, 이는 차라투스트라의 비유대로 말한다면, 태양 상태다.
ㅡ즉 의지 없는 자는 태양적 존재인 것이다.
ㅡ또한 에테르는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이다.
ㅡ따라서 에테르가 의지 없는 자를 드높이는 것은, 의지 없는 자가 태양적 존재라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그는 괴수들을 제압하고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하는데 무엇인가?
ㅡ여기서 말하는 괴수는 사회적 규율과 부조리라고 할 수 있고, 수수께끼는 사람들의 심리라고 할 수 있다.
ㅡ즉 부조리한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하고 사회적 규율의 문제점을 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고매한 자의 괴수와 수수께끼를 구원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고매한 자의 괴수는 올바름에 대한 민감성이라고 할 수 있다.
ㅡ올바름에 대한 민감성에 따라서 공격성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괴수처럼 보이는 것이다.
ㅡ또한 수수께끼의 경우, 여기서는 자신의 방향성에 대한 문제로 보인다.
ㅡ즉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로서 어떤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남는데,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ㅡ왜 이러한 삶의 문제가 남냐면, 올바름을 지키기 위해서 사는 것은 거의 고독한 채로 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고매한 자의 괴수와 수수께끼는 왜 아이로 변화해야 하나?
ㅡ괴수는 공격성을 말하고, 수수께끼는 삶의 방향성을 말하는데, 이 둘을 해결하는 방법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내 편을 많이 만드는 것을 통해서 해결이 된다.
ㅡ즉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로서, 올바른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데, 공격적 상태로 있으면 고독하면서도 올바른 세상이 오지 않는 문제에 놓이므로, 이걸 해결하려면,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들을 늘려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ㅡ그러려면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면서 올바름을 추구할 것 같은 자들은 계속해서 낚아 올리는 수밖에 없다.
ㅡ그런데 이렇게 사람들을 낚아 올리면, 부조리를 따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오히려 궤변을 일삼는 존재로 인식되게 될 것이다.
ㅡ그러면 공격받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이때를 잘 넘겨야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올바름 추구를 하게끔 꼬득일 수 있게 된다.
ㅡ즉 자신의 정체를 감추면서도 사람들을 이끌어야 하는 문제에 놓이는 것이다.
ㅡ이런 문제 때문에, 이번 장 서두에 자신이 사람들에게 어떤 태도로 대하고 있는지를 설명한 것이다.
ㅡ즉 사람들에게는 선량한 존재인 양, 정말 몰라서 그랬던 것인양 태도를 보이지만, 속은 아닌 상태가 되는 것이다.
ㅡ이런 상태를 가리켜 아이 상태라고 한다.
ㅡ아이들이 쉽게 긍정하고 따르는 것 같지만, 매번 까먹고 다시 잘못을 저지른다는 점에서 말이다.
ㅡ그리고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을 아이니까 그런 것이라고 봐주면서 넘어가는데, 이러한 것이 사회에서 존재하는데 유용하다고 차라투스트라는 말하는 것이다.
고매한 자가 배우지 못한 웃음과 질투 없이 있는 법은 뭘 말하나?
ㅡ웃음은 사람들과 지내면서 어두운 표정, 심오한 표정, 진지한 표정으로 있지 않는 것을 말한다.
ㅡ그렇게 어둡고 심오하게 있다면, 사람들은 올바름 추구자의 행동을 반사회적으로 볼 것이고 그를 배척하려고 어떤 꺼리도 찾아내 비판할 것이다.
ㅡ그렇기에 장난인 것처럼, 모르고 그런 것처럼 웃으며 상황을 풀어가야 하는데, 아직 언급되는 고매한 자는 그런 기술이 없다.
ㅡ질투 없이 있는다는 것은 우선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받는 것이 올바름인지 그릇됨인지를 파악해야 이해할 수 있다.
ㅡ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사회는 올바름보다 그릇됨을 인정하고 있다.
ㅡ그래서 이 올바름 추구자는 그것은 견디지 못한다.
ㅡ그렇기에 올바름 추구자는 그릇됨을 비판하고 싶고, 쏘아붙이고 싶은 것인데, 이것이 바로 그릇됨에 대한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란 이야기다.
고매한 자의 세찬 열정은 아름다움 속에서 잔잔해지지 않았다는데, 그것은 무슨 말인가?
ㅡ고매한 자는 올바름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있다 보니, 그리고 그릇됨에 대해서 질투를 하고 있다 보니, 그릇됨이 나타나고 인정받으면 그의 열정에 따라 참지 못한다.
ㅡ이는 분명 용감한 일이지만,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회에 이바지하지 않으므로, 미숙한 상태로 본다.
왜 고매한 자의 열정은 포만 속이 아니라 아름다움 속에서 침묵하고 가라앉아야 하나?
ㅡ앞서 말한 것처럼, 열정이 강해서 그릇됨에 일일이 맞서도, 그것은 올바름을 구현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사람들을 내 편으로 만드는 노력이 필요한데, 그러려면 열정을 드러내기 보다는 웃는 얼굴로 넌지시 던지고 대화하면서 사람들을 이끌어야 한다.
ㅡ그렇게 사람들이 호감을 표할 모습으로 다가서야 하는 것이다.
왜 영웅은 팔을 머리 위로 올리고 쉬어야 하나?
ㅡ여기서 영웅은 올바름 추구자를 말한다.
ㅡ팔을 머리 위로 올리고 쉬라고 하는데, 쉰다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머무르다로 바꿀 수 있다.
ㅡ즉, 올바름 추구자는 팔을 머리 위로 올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머물러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사람들에게 공격적으로 대응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자신의 휴식마저 극복해야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나?
ㅡ휴식은 앞서 말한 것처럼 머무름으로 바꿀 수 있다.
ㅡ따라서 이 문구는 사람들 사이에서 머무르는 것 마저도 극복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다.
ㅡ앞서 해왔던 이야기와 상통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영웅에게는 아름다움이 어렵나? 왜 격렬한 의지로는 아름다움을 얻을 수 없나?
ㅡ영웅은 올바름 추구자를 말한다.
ㅡ아름다움은 사람들을 내편으로 만드려고 부드러운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한다.
ㅡ이 아름다움을 얻으려는 이유는 올바름을 추구함에 있어서 그릇된 자와 다투는 것보다 그릇된 자를 올바름 추구자로 바꾸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ㅡ그런데 올바름 추구자들은 대체로 이러한 인식변화가 어렵다.
ㅡ왜냐면 그릇됨에 대한 반감/올바름을 지키려는 열정이 너무 크다 보니, 다투는 경향성이 큰 것이다.
ㅡ그래서 자기 자신을 검열하고 통찰하지 않는다면, 얻기가 어려운 것이다.
약간의 넘침과 약간의 모자람은 무엇을 말하나?
ㅡ앞서 말했던 열정이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근육의 긴장을 풀고, 의지를 벗는다는 것이 왜 어렵나?
ㅡ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릇됨을 보고서 공격적이지 않고, 올바름을 추구하려는 강한 의지를 벗어던지는 것이 어렵다는 이야기다.
힘이 자비로워진다는 것은 무얼 말하나? 왜 이걸 아름답다고 말하나?
ㅡ올바름 추구에 대한 열정이 사그라들어져 자비로워지는 걸 말한다.
ㅡ이렇게 되면 사람들에게 공격적으로 대응하기 보다는 여유를 두고서 그릇됨 문제를 논하게 되는데, 이것은 올바름을 세상에 구현하는 작업이므로,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이들의 선의가 마지막 자기 압제가 되길 바란다고 하는가?
ㅡ올바름 추구자들이 차라투스트라 자신과 비슷해지려면, 그래서 선사하는 자가 되려면, 결국 자기를 통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ㅡ즉 열정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 목표를 보며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왜 고매한 자들은 악을 행할 수 있다고 말하나?
ㅡ고매한 자들은 올바름을 추구하면서 여러 대립을 만들고, 이로써 그릇된 자들이 올바름 추구를 더 기피하는 경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약한 자들을 자주 비웃었나?
ㅡ그들이 선하다고 자신을 말하기 때문인데, 그 이유가 자신의 약함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ㅡ즉, 자신이 약한 존재이기에 선하다는 것인데, 약함과 선함은 비례 관계가 아니기에, 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여기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고매한 자들에게 둥근 기둥의 덕을 지니라고 하나?
ㅡ우선 기둥이라는 점을 보면, 기둥은 무언가를 받치는 것이다.
ㅡ여기서 받치는 것이라면 올바름이므로, 올바름을 추구하는 덕을 지녀라는 이야기다.
ㅡ또한 둥근 기둥의 경우, 매끈함을 표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모난 곳이 없다는 이야기다.
ㅡ모난 곳은 매끄럽지 못함을 말하고, 이것은 곧 이해되지 않음을 의미할 수 있다.
ㅡ그런 면에서 보면 둥근 기둥은 올바른 이해를 최대한 갖춘 상태의 미덕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사회적 규율의 경우 매끄럽지 못한데, 납득되지 않는 규율들이 있기 때문이다.
ㅡ이렇게 올바름을 추구하면서 온전한 이해를 바탕으로 쌓아 올리면, 그것은 아름다움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사람들에게 앎을 선사하고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왜 고매한 자들은 언젠가 아름다워져야 하는가?
ㅡ그들이 바라는 것이 올바름의 구현이고, 사람들을 올바름으로 이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ㅡ그러려면 사람들 속에서 잘 자리하면서 살아남아야 한다.
ㅡ그러기 위한 아름다움이다.
왜 고매한 자들의 영혼은 신적인 욕망으로 전율하나?
ㅡ올바름 구현의 방법을 깨닫게 되면서, 전율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기존에는 올바름을 지키면서 이지만, 이제는 올바름으로 사람들을 모으면서 라서, 그들은 보다 현실적인 방법에 고양되어지는 것이다.
영웅이 영혼을 저버릴 때, 영웅을 넘어선 존재가 꿈속에서 다가온다는데, 어떤 존재인가?
ㅡ여기서 말하는 영웅을 넘어선 존재는 위버멘쉬를 말한다.
ㅡ위버멘쉬는 이상사회가 구현될 때 나타나는 존재라서, 당장은 나타날 수 없고 꿈속에서 본다고 표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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