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2권 12장 자기 복
12장 개괄
12장은 옳고 그름에 민감한 자들에게 성숙함을 좇으라고 말하는 장이다.
즉 단순히 올바른 것에 대해서만 민감하지 말고, 자기검열과 더불어 사회를 위한 노력을 하라는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언급한다.
여기서 힘에의 의지는 우위에 서려는 의지와 비슷하다.
하지만 니체가 말하는 의지는 단순히 우위에 서려는 의지/지배하려는 의지라기 보다는 이런 지배욕을 극복하고 올바르고 이상적인 것을 세우려는 의지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힘에의 의지를 가지면서 자기극복도 하라는 것이다; 단순히 힘에의 의지를 지니면 폭군이 될 수도 있기에.
그러면서 사회의 부조리도 개선하기 위해서 올바른 것들을 세상에 알리려고 노력하라고 이야기한다.
본문
옳고 그름에 민감한 자들이여,
여러분을 옳고 그름에 민감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진리에 대한 의지> 때문이라고 보십니까?
존재하는 모든 것을 무조건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대상으로 삼는 것,
저는 <진리에 대한 의지>를 이렇게 봅니다.
여러분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왜냐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적절한 것이 맞는지 의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여러분을 따라야 합니다.
올바르지 않은 인식은 여러분이 바라는 게 아니니 말입니다.
또 우리에게 인식된 것은 의문이 남지 않도록 되어야 합니다.
의문이 남는다면, 그것은 올바른 이해를 갖지 않았다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거울 앞에 놓인 것이 왜곡되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정신에서 그 자체의 모습으로 담겨야 합니다.
그래야 그릇된 인식을 갖지 않을 테니까요.
옳고 그름에 민감한 자들이여,
이것들이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원하는 전부입니다.
이러한 진리 추구는 성숙한 존재로서 '다른 무언가로부터 지배받지 않을 수 있는/강제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갖추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저는 <힘에 대한 의지*>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선악에 대해서 말하고 가치 평가를 할 때에도, 이 <힘에 대한 의지>가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힘에 대한 의지를 생물을 통해 견주어 보면서, 생물은 모두 힘에 대한 의지가 있다고 이야기를 한다.
왜냐면 어떤 생물도 강한 힘을 바라고 그 힘을 누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생물의 본성의 가장 기초되는 것이 힘에 대한 의지라고 니체는 언급한다.
하지만 니체는 이러한 생물의 의지를 그대로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통찰을 생물의 모습에서 얻은 것이지, 니체가 주장하는 것은 다른 것인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힘에 대한 의지는 지배하려는 의지라기보다는 자유로울 수 있는 의지라고 보아야 적절하다.
즉 주체적이고자 하는 의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지배하려는 의지로 단순하게 본다면, 니체는 지배를 장려하는 철학자로 보게 될 수 있는데, 니체는 지배를 장려하기보다는 부조리한 관계가 아니라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행복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힘에의 의지는 단순히 지배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지배당하지 않으면서 주체적으로 살려는 의지라고 보아야 적절하다.
지배당하지 않으면서 주체적으로 살게 된다면, 개인이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음은 물론이고, 그런 존재들은 서로의 주체성을 존중하면서 이상적인 사회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니체가 바라는 이상 사회의 모습인 것이다.
니체는 개개인의 지배의 욕구가 점철되어진 사회를 바라지 않는다.
왜냐면, 이미 니체가 바라보는 부조리한 사회가 개개인의 지배욕구로 점철되어진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니체의 힘에 대한 의지는 단순히 지배에 대한 의지를 말한다고 보기 어렵다.
여러분은 부조리한 현 사회에 따르지 않고, 따르고 살만한 이상 사회를 창조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이 가질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 될 것이고, 여러분을 이 삶에 도취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것일 겁니다.
진리를 구하는 사람
옳음과 그름에 민감하다는 것은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옳음과 그름에 민감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은 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강에 무엇이 있느냐가 여러분과 대중을 구분 짓게 합니다.
우리는 모두 처음엔 사회에서 제공한 가치관들을 자신의 강 위에 띄워둡니다.
대중들은 정신의 유속이 느리거나 흐르지 않아서 사회에서 제공한 가치관들을 간직하고 있게 됩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정신의 강은 유속이 빨라, 사회적 가치관들을 어느새 저 멀리 떠나보내 버리죠.
그리고 여러분들의 정신의 강에는 <진리에 대한 의지>로 만든 가치관과 규율이 자리하게 됩니다.
사회적 규율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옳고 그름을 추구하는 자들 중 지배욕을 가진 이들은 사람들이 자신이 고안한 가치관과 규율을 따르길 바랐습니다.
그리고 추종하는 자들은 이 사람의 가치관과 규율을 오랫동안 따랐고, 그것이 사회적 규율과 가치관이 되어, 사람들에게 선악의 절대적 기준이 된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사회적 가치관을 정신에서 내보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과정에서 마찰이 일어나겠지만, 그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옳음과 그름에 민감한 자들이여,
옳음을 추구하여 사람들과 갈등을 갖는 것.
선악을 벗어나 사회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
이런 것들도 분명 여러분의 삶을 순탄치 않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은 <성숙한 존재로 거듭나려는 의지>입니다.
강 위의 작은 배
차라투스트라는 정신의 강 위에 사회적 규율이 배처럼 있고
그리고 성숙해지면서, 올바름을 알아가면서, 이 배를 떠나보낸다고 한다.
여러분이 방금 제가 한 말을 이해하도록,
생물들의 특징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생물들의 특징을 알아보기 위해서 미개한 생물과 경이로운 생물들을 살펴봤습니다.
생물들은 자신에 대해서 진솔하게 말해주지 않으니,
저는 그들의 행동을 통해 그들의 심리를 관찰하였습니다.
우선 생물들은 기본적으로 복종하고 있는 모양새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거나, 자신을 따르지 못하는 존재는 다른 존재나 힘에 의해 복종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복종하는 것보다 명령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명령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이유는 강제되는 것들을 책임져야 해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명령을 하려면, 명령할 사안에 대해서 생각하고 고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명령에 따라 문제가 발생하면, 그 책임은 자기 자신이 져야 하니까요.
그러니 최대한 고심해서 최대한 좋은 명령을 내리려 노력해야 하죠.
이런 점이 어렵다는 겁니다.
*1권 10장에서 전사들에게 명령에 따르라고 하는데, 이에 대한 설명이라고 볼 수 있다.
자기 자신에게 명령할 때에도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면서, 실패했을 때의 대가를 자신이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존재는 자신에게 명령하면서, 자신의 판단 기준이 올바랐는지 판단하는 판관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판단 기준이 잘못되었다면, 그것을 문제시하고 스스로를 처벌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자기 검열과 그에 따른 반성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검열받는 시민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판단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을 검열해야 한다.
어떻게 생물들은 명령하기도 하고 복종하기도 하는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일까요?
이러한 관계를 형성하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제 이야기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생물의 본성을 살펴서 내린 결론을 이야기할 테니 말입니다.
과연 맞는지 살펴보시죠.
저는 생물들을 보며, 우선 공통적으로 힘에 대한 의지, 주체욕구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복종하는 자들마저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힘이 약하면 어떨까요?
힘이 약한 존재는 자신보다 강한 존재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더 약한 존재를 지배하려고 하죠.
이런 지배의 즐거움도 없다면, 약한 존재는 지내기 힘들 겁니다.
힘이 약한 자는 자신의 힘을 보완하기 위해서 힘이 강한 자에게 의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보장받는 힘을 통해 더 약한 자를 지배하려고 하죠.
힘이 강한 자도 자기 자신을 걸고 지배력을 기르려고 하죠.
힘을 지니는 자들은 모험하고 위험에 맞서며, 목숨을 건 도박을 하는 겁니다*.
*앞서 이야기가 되었지만, 여기서 니체는 생물들이 보이는 본성적인 측면을 언급한다.
하지만 이는 생물 본성에 대한 기초를 다지는 것일 뿐,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개념은 아니다.
여기선 생물들의 지배욕을 말하지만, 니체는 지배욕을 긍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존재를 위해서 희생하거나 봉사하거나 사랑을 나눌 때에도, 지배하려는 의지가 나타납니다.
또 힘이 약한 자는 힘을 얻기 위해서 강한 자의 내면에/감정에 접근하여, 그에게서 힘을 보장받는 것입니다.
힘을 뽐내는 사람
차라투스트라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타인을 지배하는 힘을 가지려고 하며, 그것을 드러내기를 바란다.
저는 이러한 생물의 모습을 보며, 비밀을 알아차렸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극복해야 하는 존재*이다.”
*생물들은 자신들의 지배욕을 위해서 노력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들에게 적용되면서, 사회가 부조리하게 되었다.
사회는 이처럼 부조리한 것으로 가득하고, 이로 인해 인간은 고통을 받고 있으니, 이상적인 삶을 위해선 이런 부조리를 근절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이런 부조리를 근절하려는 일환으로 지나친 지배욕을 줄이고, 사람들과 함께 잘 지낼 수 있는 올바른 것을 찾아내야 한다.이러한 과정의 일환으로 부조리한 사회적 가치와 규율을 극복해야 하며, 인간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이럴 때에만 인간과 사회는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극복은 가치와 규율을 창조하려는 의지이자, 이상 사회를 향한 의지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결국 같은 것입니다.
자기극복, 창조하려는 의지와 이상 사회를 향한 의지.
이것을 부정하고 사회적으로 사느니, 저는 사회를 벗어나는 쪽을 선택하겠습니다.
그렇게 사회를 벗어남으로써, 저를 제물로 바침으로써, 저는 올바른 사고를 하고 판단할 힘을 얻게 되겠죠.
부조리와 싸우고, 올바른 가치를 만들고, 내가 내 삶의 목적이어야 하고, 그렇게 사회와 모순되어야 한다는 것.
이런 제 의지를 알아차리는 사람은 제가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지 알아차릴 겁니다.
자기극복의 길로 나아간다면,
자신이 창조한 생각이나 가치관을 얼마나 사랑하든, 우리는 그것을 늘 맹신하지 말고, 오류가 있으면 언제든 오류를 따질 수 있는 검열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극복하는 자의 모습이며, 이것이 이상 사회를 향한 의지인 것입니다.
겸손한 이의 모습
자기극복을 하려는 이는 늘 자신을 검열하려는 태도로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생각에 대해 열려있어, 겸손하다.
진리를 추구하는 자여,
여러분이 나아가는 길은 제가 말한 자기극복의 길과 관련됩니다.
제가 추구하는 힘은 성숙함을 추구하여, 단순히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이해를 구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생물의 본성과 관련해서, “생물은 생존하려는 의지가 있다”고 이야기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생물의 본성을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왜냐면 그런 의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생존하려는 의지는 생존하지 않은 것들이 할 의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생존하고 있는 것이 어떻게 또 생존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살아있는 것들, 생명이 있는 것들만이 의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의지는 생존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힘에 대한 의지입니다.
즉 생물의 근본 원리는 힘에 대한 추구인 것입니다.
생물들에게서 사는 것보다 높이 평가되는 것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힘과 관련이 있구요.
지배를 위한 다툼
모든 생물의 모습에서 힘에 대한 추구, 지배욕을 파악한 차라투스트라.
이를 생물의 기본 원리로 이해한다.
생물을 관찰하면서, 저는 우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깨달음을 여러분에게 나눠 마음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주고자 합니다.
진심으로 말 하건대,
고정된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이 있고, 그것은 어떤 순간에도 옳다는 것,
이것은 거짓입니다.
왜냐면,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은 늘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함과 악함은 늘 순간순간마다 과거의 척도를 부수고 다시 만들어야 하는 자기극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회에서 정해준 선악에 대해 평가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치에 대한 평가를 하는 자들인 것이죠.
선악에 대한 가치평가를 하는 것,
이것은 여러분들이 이상 사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며, 이로써 여러분의 영혼은 고조됨 속에서 그 빛이 흘러 넘칩니다.
이러한 가치 평가로 인하여, 여러분은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힘을 얻게 됩니다.
그렇게 사회적 가치를 부수어 자기극복을 하게 되는 것이죠.
올바른 선악의 창조자가 되려고 한다면, 우선 이 창조자는 파괴자의 모습을 지녀야 합니다.
즉 기존 가치를 부수고, 그 부숴진 잔해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하는 겁니다.
이렇게 기존 가치를 부순다는 최고의 악은 최고의 선, 즉 이상적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인 것입니다.
옳고 그름에 민감한 자들이여,
기존 가치를 부수라는 제 말이 악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더 악한 것은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도 침묵하는 것입니다.
옳은 것을 알리지 않는다면, 그릇된 것을 허용하는 것이고, 이는 곧 부조리를 허용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옳은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릇된 것들을 부숴버리도록 합시다.
우리가 올바르게 세워야 할 옳은 것들이 아직도 많으니 말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망치를 든 파괴자
그는 기존의 선악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악하지만,
새로운 선악을 창조한다는 점에서 선하다.
생각해볼 거리들
현자란 누구인가?
ㅡ현자란 옳고 그름에 민감한 자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후술되는 내용을 보면, 현자들은 기존의 모든 종류의 앎/가치관/규율에 대해서 의심하고 그것이 적절한지 따진다.
ㅡ이러한 것은 그릇된 것에 대한 민감성, 올바른 것에 대한 민감성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진리의지는 무엇인가?
ㅡ진리를 추구하려는 경향성이라고 말할 수 있고, 이는 앞서 말한 옳고 그름에 대한 민감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유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은 뭘 말하나? 진리의지와 무슨 관련이 있나?
ㅡ이 사회의 모든 것들 중에는 사유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들이 있다.
ㅡ예를 들면, 종교적 교리나 사회적 관습이 그러하다.
ㅡ모든 것을 사유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은 이처럼 사유를 막은 것들을 사유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ㅡ이는 곧 사회에서 막은 것을 하는 것이므로,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ㅡ앞서 차라투스트라가 「차라투스트라, 1권 1장」에서 말한 사자 상태인 것이다.
ㅡ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올바른 것을 인식하려는 시도이고, 이 올바른 인식을 진리라고 하므로, 진리에 대한 의지라고 표현된다.
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유가능한 것으로 만들려고 하나?
ㅡ이는 "사유 불가능한 것도 있으니까, 가능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다.
ㅡ사유 불가능한 것은 사회적 규율로 사유하지 못하게 막아둔 것을 말한다.
사유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불신을 가지고 의심하는 이유는?
ㅡ사유할 필요가 없거나, 사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믿고 따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대에게로 휘어져야 하나?
ㅡ휘어지다 = 굽히다
ㅡ너를 따라야 한다, 너에게 올바르다고 평가받아야 한다.
그것들은 왜 매끄럽게 되어야 하나?
ㅡ하나의 체계를 이뤄서, 튀어나오는 곳이 없어야 한다.
ㅡ매끄럽게 이해되어야 한다.
왜 정신의 거울과 반사로서 정신에게 예속되어야 하나?
ㅡ사물의 모습과 정신의 상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
왜 이것이 지혜로운 자들이 갖는 (진리)의지의 전부인가?
ㅡ진리에 대한 의지가 바라는 것은 올바른 이해이기 때문이다.
ㅡ지혜로운 자들은 모든 앎이 옳음을 바라는 자신에 따라 옳은 앎의 상태이기를, 의심되는 부분이 없기를, 정신이 사물을 왜곡되게 인식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진리의지는 왜 힘에의 의지의 한 경우인가?
ㅡ진리를 찾는다는 것은 올바른 기능을 하기 위한 존재가 되기 위한 것이다.
ㅡ즉 사회적 규율에만 의존하는 존재가 아닌,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립적 존재가 되기 위한 것이다.
왜 선과 악에 대해, 그리고 가치 평가에 대해 말할 때에도 힘에의 의지의 한 경우인가?
ㅡ선악을 논하고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모두 올바른 이해를 갖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ㅡ사회적 선악과 가치를 평가해서 올바른 것을 이해하면, 사회적 규율에 따르지 않는 존재, 스스로 판단하는 존재가 된다.
왜 이들은 아직도 무릎을 꿇을 만한 세계를 창조하려 하나?
ㅡ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따르고 받든다는 것을 말한다.
ㅡ즉, 이들은 따르고 받들만한 세계를 창조하려고 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이는 곧 이상적인 세계/이상 사회를 만드려고 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왜 이상사회는 그들에게 마지막 희망이자 도취가 되나?
ㅡ이상 사회는 부조리한 현재를 살아감에 있어서 희망을 주는 요소가 된다.
ㅡ이상 사회의 존재는 부조리한 현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이다.
ㅡ그렇게 희망을 얻으면 그나마 지금의 삶에 대해서 만족하고 도취될 수 있게 된다.
대중은 왜 조각배가 떠다니는 강물인가?
ㅡ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강물은 정신을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생성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 구절에서 이야기하겠다.
ㅡ조각배는 사회적 가치관을 말한다.
ㅡ그에 따라서 대중들의 정신에는 사회적 가치관 말고는 없다는 의미로 표현한 것 같다.
왜 가치평가들이 가면을 쓴 채 엄숙하게 앉아 있나?
ㅡ여기서 말하는 가치평가는 사회적 가치관들을 말한다.
ㅡ사회적 가치관들은 대중들 안에서 선악의 기준이 되어준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이것들은 선악을 제대로 구분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ㅡ이에 따라서, 선악에 대한 옳은 잣대가 아닌 것이 선악에 대한 옳은 잣대인양 있는 모양새가 된다.
ㅡ따라서 사회적 가치관들이 가면을 쓰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그대들은 의지와 가치를 생성이라는 강물에 띄워놓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강물은 정신을 말한다.
ㅡ기재되기는 생성의 강이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생성이 이뤄지는 곳이 정신이다.
ㅡ왜냐면 생성이라는 것 자체가 의미하는 것은 올바른 가치의 생성, 올바른 규율의 생성이기 때문이다.
ㅡ올바른 가치와 규율의 생성은 정신과 옳음에 대한 의지에 의해서 나타난다.
지혜로운 자들이 조각배에 그런 손님(사회적 가치관)을 만든 존재인가?
ㅡ여기서 지혜로운 자는 옳고 그름에 민감한 자들을 말한다.
ㅡ이러한 자들은 자신만의 가치관과 규율을 만든다.
ㅡ그런데, 이 중에서도 지배욕구가 강한 사람은 이러한 자신의 가치관과 규율을 사람들이 따르기를 바라게 된다.
ㅡ이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이를 집단에서 유지하게끔 하게 되고, 따라서 개인의 가치관과 규율이 사회적 가치관과 규율로 자리하게 된다.
왜 그대들의 강물은 조각배를 멀리 떠나 보내지 않을 수 없나?
ㅡ여기 그대들은 진리에 대한 추구를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ㅡ즉, 사회적 가치관은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보기에 올바르지 않아 보이므로, 떠나보내게 된다.
물결이 거품을 일으키고, 배밑창에 부딪힌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사회적 가치관을 내보냄으로써, 마찰이나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 걸로 보인다.
강물은 왜 지혜로운 자들에게 위험이 아닌가?
ㅡ여기서 강물은 조각배를 떠나보낸 것이다.
ㅡ조각배는 사회적 규율을 말하므로, 강물은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ㅡ사회적 규율을 벗어나는 것이 삶의 어려움이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ㅡ왜냐면 사회에서 배척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보다 더 큰 어려움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선과 악의 종말도 왜 지혜로운 자들에게 위험이 아닌가?
ㅡ선과 악의 종말이란 것은 사회적 선악의 종말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ㅡ왜냐면 추후에 다시금 새로운 선악 기준을 마련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ㅡ어쨌든, 지금 여기에서는 사회적 선악의 종말, 사회적 선악을 벗어남을 말한다.
ㅡ이는 곧 지혜로운 자와 대중들 사이의 선악에 대한 입장이 달라지는 것을 말한다.
ㅡ이 역시도 삶의 어려움이 될 수 있지만, 이보다 더 큰 삶의 어려움이 있다.
왜 지혜로운 자들의 의지 자체, 힘에의 의지, 생명을 탄생시키는 생의지는 지혜로운 자에게 위험인가?
ㅡ우선, 지혜로운 자들의 의지는 성숙한 존재로서 자리하려는 의지를 말한다.
ㅡ지혜로운 자들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그릇된 인식을 갖고 행동하지 않으려는 것인데, 이는 미숙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ㅡ또한 힘에의 의지 역시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힘을 지니는 것과 더불어 성숙한 존재로 나아가려 의지를 말한다.
ㅡ생의지의 경우, 현생/삶에 대한 의지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의지는 현생/삶을 행복하게 살려는 의지다.
ㅡ종합해보면, 지혜로운 자들의 의지는 결국 성숙한 존재로서 자리하며,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하려는 의지를 말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하 이들의 의지는 '성숙한 존재가 되려는 의지'라고 하자.
ㅡ그렇다면, 왜 성숙한 존재가 되려는 의지는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위험이 될까?
ㅡ후술되기는 하지만, 지혜로운 자들은 명령하는 자인데, 이들은 스스로 명령 및 검열을 하는 역할과 더불어, 실패시 처벌받는 자이기도 하다.
ㅡ즉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것, 현생/삶을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은 반면, 늘 자기 검열하고 올바른 행동을 했는지 살피고 스스로에게 벌을 주어야 하는데, 이것이 어렵다는 것으로 보아야 맞지 않나 싶다.
선악에 대한 말을 이해하게끔 설명한다는 게 무슨 말인가?
ㅡ앞서 위험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는데, 이를 이해하게끔 설명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런데 왜 선악에 대한 말이라고 했을까?
ㅡ정확하게 알기는 어려우나, 선악의 종말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기에 그런 게 아닐까 싶다.
ㅡ후술되는 내용을 보면, 차라투스트라가 추적한 대상은 타인에게 복종하거나, 자신에게 복종하고 타인에게 명령하거나, 자신에게 복종하고 자신에게 명령하는 존재가 나온다.
ㅡ여기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므로, 앞서 언급한 '위험'에 대한 내용과 이어진다고 보인다.
생명과 살아있는 것 일체는 무얼 말하나?
ㅡ후술되는 내용을 보면, 차라투스트라가 추적한 대상은 다른 것에게 복종하거나, 자신에게 복종하고 다른 것에게 명령하거나, 자신에게 복종하고 자신에게 명령하는 존재가 나온다.
ㅡ이에 따라서 보면, 이 존재는 인간이라고 보는 것이 맞아 보이나, 이런 특징은 사회적 동물들 사이에서도 나타나는 듯하여, 생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해 보인다.
살아있는 것의 가장 큰 길과 작은 길을 걸어가 봤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살아있는 것들이 생물을 말하므로, 생물이 나아가는 큰 길과 작은 길을 봤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을 듯하다.
ㅡ이에 따라서 본다면, 큰 길로 나아가는 생물과 작은 길로 나아가는 생물이 있다는 것인데, 이는 원시적인 생물과 경이로운 생물로 구분하는 게 아닐까 싶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살아있는 것들의 눈을 보려고 했나?
ㅡ위대한 사람이든 어리숙한 사람이든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진술해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들의 행동을 보았고, 그 속의 심리를 봤단 것으로 보인다.
ㅡ즉 여기서 눈은 심리적 동기, 의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왜 살아있는 것을 발견한 곳에서만 복종이라는 말을 들었나?
ㅡ여기서 살아있는 것은 모든 생물 전체를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ㅡ이에 따라서 보면, 모든 생물은 복종한다고 말하고 있다.
ㅡ이것은 다른 생물에 복종하거나, 자신의 본성에 복종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자기 자신에게 복종할 수 없다는 것은?
ㅡ자기 자신의 판단을 믿지 못하거나, 뭔가 뛰어난 능력이 없는 경우로 보인다.
ㅡ이런 경우 의존하는 것이 더 낫다.
명령에는 왜 시도와 모험이 깃들고, 자기 자신을 걸어야 하나?
ㅡ기본적으로 우리는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고심해야 한다.
ㅡ그런데 누군가가 능력이 떨어지거나 목표 달성을 위한 자원을 많이 갖지 못한 경우, 능력이 있거나 자원이 충분한 대상에게 의존하려고 하게 된다.
ㅡ그렇게 의존하는 대가로, 능력과 자원이 있는 존재에게 명령받고 복종하게 된다.
ㅡ이로써, 복종하는 자는 목표 달성을 위한 문제에서 배제되는데, 이때 문제에 따른 스트레스에서도 같이 벗어난다; 하달되는 명령만 따르면 되니까.
ㅡ반면 명령하는 자는 자신의 능력과 자원을 통해서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문제에 여전히 놓인다.
ㅡ이에 따라서 목표를 위한 방법을 찾고 그에 따라 시도해보아야 한다.
ㅡ또한 그 시도는 늘 목표달성을 확정해주지 않기 때문에, 모험이라 할 수 있다.
ㅡ또 명령하는 자는 명령에 따르다 실패한 경우, 책임을 져야 할 수 있다.
ㅡ그런 면에서 자기 자신을 걸어야 한다; 복종하는 자도 그러는 건 같을 테지만.
살아있는 것을 설득하여 복종하고 명령하도록, 명령하고 복종하도록 하는 것을 묻는데, 왜 묻는가?
ㅡ앞서 언급된 생물(사회적 생물)들을 보면, 명령하기도 하고 복종하기도 한다.
ㅡ이러한 관계의 구조를 이루게 되는 이유가 뭔지를 묻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힘에의 의지는 무엇인가? 힘에의 의지가 성숙함에 대한 의지라고 하지 않았나?
ㅡ여기서 말하는 힘에의 의지는 힘을 갖고자 하는 의지를 말한다.
ㅡ이 힘은 자신의 자유, 권리를 쟁취하고 타인의 자유 권리를 박탈하려는 힘이라 볼 수 있다.
ㅡ개인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이기적이며 부조리를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 차라투스트라에게 부정적이다.
ㅡ따라서 뒤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그리고 살아있는 것 스스로가 내게 이 비밀을 말해주었다.
"보라, 나는 늘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그 무엇이다."
ㅡ만약 지금 언급되는 힘에의 의지가 있는 그대로 좋은 것이라면, 여기서 극복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 될까?
ㅡ힘에 대한 의지를 지녔으니, 의지에 따라 힘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고 극복해야 한다는 것일까?
ㅡ이는 부적절한데, 차라투스트라는 우리가 힘을 얻어야 하는 이유가 개인의 행복과 이상 사회를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ㅡ즉 단순히 어떤 관계를 지배하는 존재로 자리하기 위해서가 아닌 것이다.
생식의지는 무엇을 말하나?
ㅡ생식의지는 번역을 좀 살펴봐야 할 듯하다.
ㅡ생식의지는 Wille zur Zeugung의 번역어로, 각 단어의 해석은 이러하다.
Wille: 의지
zur: ~을 향한
Zeugung: 출산/생식
ㅡ이에 따라서 생식의지로 번역된 것으로 보이는데, 문제는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ㅡ이에 따라서 Zeugung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데, Zeugung는 출산/생식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창조의 의미를 담기도 한다.
ㅡZeugung는 무언가를 산출한다는 의미로서 쓰이는 것이다.
ㅡ예컨대, "Die Zeugung des Geistes ist eine höhere Form der Schöpfung."와 같은 표현은 "정신의 출산/생식은 더 높은 형태의 창조다"라는 말이 된다.
ㅡ여기서 정신의 출산/생식은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므로,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창조로 해석될 수 있다.
ㅡ따라서 생식의지는 출산하려는 의지로 볼 수도 있겠지만, 창조하려는 의지/뭔가 정신적인 것을 만드려는 의지로 볼 수 있을 듯하다.
ㅡ정리해보면, "자기극복은 창조의지이며, 높은 것/먼 것/다양한 것에 대한 충동이다"는 이야기가 된다.
ㅡ다르게 해석을 해본다면, 생식 의지는 이상적 존재를 낳고 기름으로써 이상 사회로 나아가려는 의지로 볼 수도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몰락하겠다고 하는 것은 뭘 의미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자기극복을 포기하느니, 몰락하겠다고 한다.
ㅡ이는 뭔가 자기극복을 포기의 뉘앙스가 보이나, 여기서 몰락은 사회적 몰락으로 보인다.
ㅡ왜냐면, 차라투스트라가 몰락하는 이유는 힘을 얻기 위함인데, 자기극복을 포기하면 힘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자기극복을 시도하고 사회를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ㅡ그리고 사회를 벗어남으로써 개선된다는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와도 상통한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목적이면서 목적들 사이에서의 모순이어야 한다고 말하나?
ㅡ자신이 목적이어야 한다는 부분은 삶의 목적이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으로, 삶의 목적이 사회가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ㅡ그렇게 삶의 목적이 자신이 된다면, 삶의 목적을 사회로 두라는 입장들과 충돌이 생기게 되는데, 이것을 목적들 사이의 모순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자신이 창조한 것을 대적하는 사람이어야 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자기극복을 바라고 있다.
ㅡ자기극복을 바란다는 것은 단순히 힘만을 좇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존재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ㅡ성숙한 존재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자기 검열이 필요하다.
ㅡ왜냐면 자신이 이상적이라고 창조한 가치관이나 생각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오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늘 자신이 창조한 생각과 가치관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ㅡ이런 점에서 보면, 자기가 공을 들여 창조한 것을 적대시하는 상태가 된다.
인식하는 자들의 진리의지는 왜 차라투스트라의 힘에의 의지의 오솔길이자 발자국에 해당되나?
ㅡ우선 힘에의 의지는 지배하려는 의지를 나타내지만, 차라투스트라의 힘에의 의지는 자기극복을 동반하는 의지다.
ㅡ자기극복은 앞서 살핀 것처럼, 성장하기 위하여 나아가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올바른 것을 추구하게 된다.
ㅡ진리에 대한 의지는 올바른 인식을 하려는 것인데, 이것은 자기극복을 하는 것의 하위 범주에 해당된다고 보인다.
ㅡ왜냐면, 올바른 인식을 하려는 것이 반드시 자기극복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ㅡ하지만 자기극복을 하려면 올바른 인식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진리에 대한 의지는 자기극복의 수단으로써 이용됨을 알 수 있다.
ㅡ이러한 특징을 니체가 표현한 듯하다.
생존의지는 왜 나오나?
ㅡ현재까지 이야기를 보면, 생물이 갖는 원천적 의지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ㅡ그 속에서 진리에 대한 의지와 힘에 대한 의지가 언급되는 것이다.
ㅡ지금은 생물의 원천적 의지로 생존하려는 의지를 언급한다.
ㅡ즉 생물의 활동은 생존에 대한 의지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생물에 대한 원천 의지는 해석이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ㅡ그 이유는 다음 구절에서 설명한다.
생존 의지가 진리로 여겨지지 않는 이유는?
ㅡ생존하려는 의지는 생존하지 않는 것이 지니는 의지다.
ㅡ왜냐면 이미 생존하는 것은 생존에 대한 의지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ㅡ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생존하려는 의지를 갖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생물이 지니는 것은 왜 생존 의지가 아니라 힘에의 의지인가?
ㅡ생물의 원천적 원리를 찾으려는 차라투스트라.
ㅡ그에 따르면 생존 의지는 이미 살아있는 것이기에, 생물을 구성하는 기본 의지가 아니다.
ㅡ그리고 많은 면에서 볼 때, 생물들은 힘을 추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ㅡ힘을 추구한다는 것은 지배자가 되거나 권력을 원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겠지만, 온전히 그러한 힘만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ㅡ왜냐면 자기극복과 관련한 힘을 원하는 경우도 있고, 그것을 차라투스트라가 말하기 때문이다.
왜 살아있는 것에게는 생(사는 것)보다 더 높이 평가되는 많은 것이 있나?
ㅡ이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단순히 생존하는 것보다 더 높이 평가되고 추구되는 것들이 있으며 그것들은 힘을 추구하면서 나타나는 것이란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렇다면 무엇들이 생존하는 것보다 높이 평가 되고, 힘을 추구하는 것이 될까?
ㅡ내 생각에는 생존을 추구한다는 것은 그저 단순히 먹고 사는 것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비춰지는 게 아닐까 싶다.
ㅡ즉, 돈을 벌어 먹고 사는 것보다 어떤 사람들 사이에서의 지배 상태, 권력이 더 가치있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ㅡ물론 먹고 사는 것도 받쳐줘야 하겠지만, 무엇이 더 가치있냐고 한다면, 단순히 밥먹고 생활하는 것보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영향을 끼치는 게 가치있다고 느껴지니 말이다.
불변의 선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의 의미는?
ㅡ순간순간의 선악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선악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 선악은 늘 자기 자신으로부터 극복되어야 한다고 말하나?
ㅡ이전의 선악이 지금의 선악과 순간마다 선악이 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 자기극복을 말한다.
왜 그대들의 가치평가로부터 강한 위력과 새로운 극복이 자라나나?
ㅡ기존 가치에 대한 평가를 하면서, 기존 가치를 비판하게 되기 때문이다.
ㅡ이것을 새로운 힘의 등장으로 보고, 그와 동시에 기존 가치를 극복하는 것으로 본다.
왜 은폐된 진리는 모두 독이 되는가?
ㅡ진리가 독이 된다기 보다는 은폐된 상황이 독이 된다고 보아야 맞을 듯하다.
ㅡ왜냐면 진리가 은폐된 경우, 그릇된 것에 따른 부조리한 전개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ㅡ부조리는 사회의 독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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