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2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2권 11장 의역 (완) (무덤의 노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6. 2. 17:31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2권 11장 무덤의 노래


 
11장 개괄

 

 

11장은 차라투스트라가 여전히 절망감을 표현하고 있는 장이다.

9장과 10장에서도 이미 좌절감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지만, 이번에는 좀 더 감정적으로 숨김없이 불만을 토로한다.

즉 자신이 이상 사회를 긍정하기까지의 그 과정이 사람들로 인하여 무너졌다고 말하며, 사람들 탓을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제까지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서 부드럽게 말하고 있었기에 사람들의 모습에 대한 스트레스가 해소되지 않았을 것으로도 보였는데, 이번에 말끔히 말하며 털어내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어쨌든 간에, 니체는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자신은 이겨낼 것이라고 하며,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겠다고 다짐한다.

 


 

 

본문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성숙한 존재로 자리하기 위해서, 많은 시도를 해봤습니다.

그렇게 많은 자기극복의 시도를 하면서, 저는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죠.

저는 지금이 가장 성숙한 존재에, 이상 사회의 구성원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상 사회에 대한 긍정이 가능해지면서, 저는 이상 사회를 구현해보자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이상 사회를 구현해냄으로써, 나의 시도와 노력이 꽤 의미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죠.

이런 마음을 가지고서 사람들에게로 나아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나는 내 노력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이상 사회에 대한 앎을 나누며 사람들의 미지근한 반응을 보니, 이제까지 성숙하기 위해서, 이상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했던 나의 노력들이 부질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성숙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순간들.

그 순간들은 고독한 제게 감미롭고, 아련합니다.

 

제 자신에 대해서, 저는 여전히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숙해지려고 했던 노력에 따라서, 저는 이 현생을 긍정할 수 있는 자가 되었고, 현생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자가 되었으니까요.

과거의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과거의 노력이 없다면, 제가 지금의 상태에 이를 수 있었을까요?

 

의지가 한풀 꺾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제 자신을 버린 건 아닙니다.

저는 여전히 제가 노력 속에서 얻은 신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스스로 노력하고 사색하며 얻은 신념과 가치관들 말입니다.

 

과거의 저와 현재의 저는 생각이 다르지만, 과거의 어리숙한 모습이 지금의 제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저는 과감했습니다.

과거의 저는 과감하게 오류를 가졌고, 과감한 시도 끝에 지금의 제가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과거의 저는 과감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부조리를 벗어나기 위한, 이상 사회를 위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과감하지 않은 존재라고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노력해 온 순간들이여!

지금의 저는 절망하여, 과거의 의미가 모두 퇴색된 듯하니 말입니다.

 

제 노력의 결과,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

이것은 너무나 빠르게 사라졌습니다.

제가 이 희망을 버린 것도 아니고, 이 희망이 저를 버린 것도 아닙니다.

지금 주춤하고 있지만, 그것은 제 탓이 아닙니다.

 

제 희망은 사람들에 의해서 힘을 잃어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을 나누어 주었지만, 사람들은 그 희망을 받아들이 않았던 것입니다.

희망을 나누고 앎을 나누지만, 사람들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변화할 것이란 제 희망도 그렇게 사라지고, 그렇게 저는 절망하고 있습니다.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과 이를 위한 앎들.

이것들은 제게 있어서 진심 어린 것이었고, 제 개인적 산물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들이 받아들여지는 것을 가장 고대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에 의해 쉽게 상처받았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행동은 제가 가장 기대하고 바랐던 것을 무너뜨렸습니다.

가장 희망을 품고 저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을 말입니다.

 

무덤의 섬

이곳의 무덤은 차라투스트라가 자기극복을 위해 노력하며 겪은 절망들을 나타낸다.


 

사람들에게 이 말을 해야겠습니다.

여러분은 제게 실망을 주었고, 그래서 저는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의 노력하지 않음을 통해서, 제 노력의 무의미를 경험하게 되었고,

결국 저는 이상 사회에 대해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제 노력을 부정하고, 저를 설레게 하던 희망을 부질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여러분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으로 인하여, 제게 영원한 행복을 줄 수 있었던 희망이 일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여러분을 마주치기 직전까지 찰나의 행복으로 희망이 주어진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할 때, 모든 사람이 내 기대에 부합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에 대해서 훌륭한 태도를 보일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 기대하던 그때의 나는 이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을 위해 노력한 날들이 모두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행복의 길을 걷는다고 말이죠.

하지만, 여러분은 제게 절망을 주었고, 이로써 저는 절망에 신음하는 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앎을 선사하면서, 이상 사회의 전조를 보고자 원했습니다.

그렇게 앎을 선사하고서 본 것은 이상 사회가 불가능할 것 같다는 절망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이로써 제 열의는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저는 부조리한 사회를 개선하겠다고 맹세했었습니다.

그런데 노력하지 않는 여러분을 마주하면서, 저의 맹세는 부질없어졌고, 저는 절망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저는 행복의 길로 나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력하지 않는 여러분을 마주하면서, 저는 제가 나아가는 길에 절망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이상 사회를 긍정하게 되어서 기뻐하며 여러분에게 앎을 나눌 때,

여러분은 말했습니다.

제 기대가 여러분에게 상처를 준다고 말이죠.

 

이것이 여러분이 제게 보여준 행동입니다.

여러분은 제 노력을 망쳤습니다.

 

여러분은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하길 바라는 제게서 앎을 제공받았지만, 여러분은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받아만 가는 뻔뻔한 존재 같았던 것입니다.

이로써 제 열의가 식어가게 만든 것입니다.

 

제가 저의 희망에 따라 행동하고, 그렇게 열의를 다해 노력했을 때,

여러분은 그 열의에 따른 앎을 선사 받으면서도 노력하지 않는 모습,

사회와 종교에서 말하는 부조리를 견디는 모습을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절망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시도되지 않았던 것,

이상 사회와 이상적인 존재들을 위한 기초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상 사회를 향해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때 여러분은 제 희망을 절망으로 바꾼 것입니다.

이제 저는 희망을 노래하지 못하고, 절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과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그리며 있었는데, 여러분은 저를 내팽개친 것입니다.

그렇게 제가 기대하고 그리던 상황들이 모두 산산히 부숴진 것입니다.

 

오직 행동함으로써,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이 유의미 해질 수 있는데,

여러분들과의 절망적인 경험으로 인해 이제 행동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저 희망으로서만 제 안에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 과거의 노력은 무색해졌습니다.

 

흉조

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에 대한 노력을 하면서 긍정적인 전망/길조를 볼 수 있기를 바랐지만,

사람들의 노력하지 않음을 통해 부정적인 전망/흉조를 보게 된다.


 

하지만 절망은 늘 제게 찾아왔었고, 저는 늘 절망을 견뎌냈고, 이겨냈으며, 극복했습니다.

절망의 무덤에서 제가 다시 살아나게 해준 것, 그것은 바로 이상 사회/성숙함에 대한 제 의지였습니다.

 

제 의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묵묵히 걸어갑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상처받지 않으며, 늘 한결 같습니다.

 

아 제 의지는 어떤 절망도 다 뚫어버립니다!

제 의지 안에는 과거의 노력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제 의지는 희망을 놓지 않으며, 이 절망의 무덤 위를 뚫고 나와서 앉아 있습니다.

제 의지는 지금의 절망속에서 멈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 나의 의지여!

절망을 통해서만 더 성숙해 줄 수 있으니!

나의 의지에게 행운이 있기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부활

차라투스트라는 부활이란 절망을 이겨낸 것이고 말한다.


생각해볼 거리들

 

무덤의 섬은 무엇을 말하는가?

ㅡ후술되다시피, 무덤의 섬은 성숙한 존재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극복한 자신들이 있는 곳을 말한다.

ㅡ이 극복된 자신들은 과거의 자신이자 지금보다 어린 날의 자신이므로, 젊은 날의 무덤이라고 말하게 된다.

 

ㅡ무덤에 대한 추가적인 이야기는 말미에 더 하도록 하겠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삶의 늘 푸른 화환을 무덤으로 가져가려고 했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성숙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이상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자기극복을 해왔다.

ㅡ그리고 이 상태에서 이상 사회를 구현하려고 사람들에게 나아간다.

ㅡ만약 이후 이상 사회를 구현하게 된다면, 자신의 삶은 보람차게 될 것이다.

ㅡ그런 면에서 자신의 과거에게 그 영광을 돌리고 싶다는 것이다.

 

ㅡ삶의 늘 푸른 화환의 의미를 살핀다면, 늘 푸르다는 것은 말라빠진 것과는 대조된다.

ㅡ그런 의미에서 생기로움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ㅡ즉 삶의 늘 생기로운 화환을 의미하는데, 이는 곧 삶에 대한 긍정/희망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희망은 삶을 생기롭게 하는 것이니까.

 

ㅡ그런 면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이상 사회에 대한 생각이 정말 가능하다는 기쁨, 그에 따른 희망을 가지고서 인생을 돌아보기를 바라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바다를 건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이는 무덤의 섬에서 출발하여 바다를 건넌 것이므로, “고독을 벗어났다, 탐구 생활을 마쳤다. 하산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ㅡ즉, 세상을 향해 나아갔다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젊은 날의 환영과 현상은 무엇인가?

ㅡ차라투스트라가 세상을 두고 가졌던 갖가지 생각을 말한다.

ㅡ염세적인 생각이나 종교적인 생각들을 모두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그런데 이것들이 환영과 현상으로 불리는 이유는 이제 와서 봤을 때 터무니없는 생각들이기도 하고, 그릇된 생각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환영이라 불리는 것이다.

ㅡ또 괜찮은 접근도 있었을 것이기에, 그것들은 환영이라고 하지 않고 현상으로 부르려 한다고 볼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의 젊은 날의 환영과 현상은 서둘러 죽었다고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젊은 날의 환영과 현상을 통해서 이상 사회에 대한 가능성을 보았고, 이를 구현하려고 했다.

ㅡ그런데 문제는 차라투스트라의 이러한 노력이 사람들과 무언가를 도모하기 전에 시도조차 안 되었다는 것에 있다.

ㅡ즉 사람들과 모여서 탐구하고 집단을 이루길 바랐는데, 사람들은 이상 사회를 위한 자기 검열을 하기를 꺼렸던 것이다.

ㅡ그래서 와서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를 듣더라도 노력하지 않는 상태이니, 이상 사회를 위한 시도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ㅡ거의 이상 사회를 위한 노력의 초반에 불가능한 상태가 된 것이다.

 

왜 가장 사랑스러운 죽은 자들의 향기가 고독한 항해자의 심장을 뒤흔드나?

ㅡ여기서 말하는 죽은 자들은 차라투스트라의 과거 자신이다.

ㅡ즉 자기 극복된 자신 말이다.

ㅡ이들로부터 향기가 나는 것인데, 그것은 모두 성숙한 존재가 되려는 의지, 이상 사회를 만드려는 의지가 담긴 모습이기 때문이다.

ㅡ이런 열의를 지닌 채로 열심히 노력했었는데, 지금은 열심히 노력할 의지가 사라진 것이다.

ㅡ즉 절망에 따라서 과거의 열정을 돌아보면서 고양되면서도 쓸쓸함을 느끼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여전히 풍요롭고 부러움을 사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절망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이상 사회에 대해서 긍정할 수 있는 존재다.

ㅡ이상 사회에 대한 노력과 구현이 자신의 조건에서 이뤄질 수 없다고 여기기는 하지만, 이상 사회에 대한 가능성은 여전히 보고 있는 것이다.

ㅡ즉 차라투스트라는 여전히 삶을 긍정하고 있고, 자신의 행복을 위한 이해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ㅡ그런 점에서 풍요롭고 부러운 존재로 여겨진다.

 

장미사과는 무엇을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의 올바른 이해를 말한다.

ㅡ즉 올바른 이해를 가진 것은 자기 자신뿐이라는 것인데, 이를 얻게 된 이유는 성숙함을 향한 자기극복 덕분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여전히 그대들의 사랑의 상속자인가?

ㅡ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성숙함/이상 사회/위버멘쉬에 대한 사랑이다.

ㅡ즉 과거에도 위버멘쉬를 추구했는데, 지금도 위버멘쉬를 추구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다채로운 야생의 덕이 꽃피우고 있는 토양인가?

ㅡ차라투스트라의 가치관은 사회에서 제공한 것이 아니다.

ㅡ즉 사회를 벗어나서 자신이 직접 고안한 것들이라는 것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사회를 벗어났다는 것을 대체로 숲/광야/사막으로 표현한다.

ㅡ따라서 차라투스트라의 가치관은 숲/광야/사막에서 찾은 것이 되고, 그런 면에서 야생의 것으로 표현한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과거의 자신들과 가까이 되어 있나?

ㅡ차라투스트라의 과거는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ㅡ즉 과거의 경험에서 깨달음을 얻어 지금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과거는 왜 수줍은 새처럼 찾아온 게 아니라 신뢰하는 자로서 왔다고 말하나?

ㅡ이 부분은 번역을 좀 살펴볼 필요가 있다.

ㅡ신뢰하는 자라고 번역되는 독일어는 Trauende와 Trauenden이며, 이것들의 원형은 trauen이다.

ㅡ이 단어는 ‘신뢰하다/신용하다’의 의미를 지니는데, 여기에 더해서 ‘용기 있다/감히 ~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ㅡ번역에 대한 자세한 부분은 차치하고, 이에 따라서 보면, ‘용기 있는 자/감히 하려는 자’로 해석도 가능한데, “차라투스트라의 과거는 감히 하려는 자/과감한 자로서 왔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ㅡ이렇게 나아가면 신뢰하는 자보다는 좀 더 의미를 떠올리기 쉽다.

 

ㅡ이에 따라서 보면, 차라투스트라의 과거는 과감한 자로서 현재의 자신에 이르게 해주었다는 표현을 한 것이다.

ㅡ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현재 역시 이상 사회/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과감한 행동을 하므로, 과감한 자다.

ㅡ이러한 이해를 가지고서 본다면, ‘과감한 자(과거의 자신)로서 과감한 자(현재의 자신)에게 찾아왔다’는 것을 말한다.

ㅡ즉, 결국 “자신은 늘 과감한 자로서 존재했다. 부끄러워하는 자에서 과감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늘 일관된 모습이었다”는 뉘앙스로 해석이 가능하다.

ㅡ앞서 살폈던,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도록 되어 있었지”라는 표현은 결국 “나는 일관된 모습을 보였지, 변화무쌍한 건 아냐.” 라는 뉘앙스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처럼 그대들도 신실하도록 영원히 다정하도록 만들어졌나?

ㅡ이 부분도 번역을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ㅡ신실하다는 표현은 Treue에서 번역된 단어인데, 앞서 살핀 trauen와 어원적으로 같다.

ㅡ그러므로 신실하다는 해석보다는 ‘과감하다’의 해석을 이어가는 것이 좋아 보인다.

ㅡ이에 따라서 본다면, 차라투스트라의 과거도 과감하도록 영원히 다정하도록 만들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ㅡTreue를 단순히 신실하다로 봐야만 한다면, “올바름/성숙함/이상 사회에 신실하도록 만들어졌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면 같은 의미가 되기는 한다.

 

ㅡ그럼 왜 영원히 다정하도록 만들어졌을까?

ㅡ이 부분도 번역이 조금 다를 수 있는데, “영원히 다정하도록”은 “부드러운/다정한 영원함”으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ㅡ해당 문장을 보면, “Ja, zur Treue gemacht, gleich mir, und zu zärtlichen Ewigkeiten.”로 이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Ja, zur Treue gemacht: 그래, 충성(과감/신실)을 위해 만들어졌어

          gleich mir: 나처럼

          und zu zärtlichen Ewigkeiten: 그리고 부드러운 영원을 위해

ㅡ이에 따라서 본다면, 과감하기 위해서, 부드러운 영원을 위해서 차라투스트라의 과거와 현재가 있는 것이다.

 

ㅡ차라투스트라가 과감할 대상은 이상 사회이고, 부드러운 영원이라고 생각할 것은 신이 아니라 이상 사회라 할 수 있다.

ㅡ결국 차라투스트라나 차라투스트라의 젊은 날이나 모두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게끔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이제 그대들을 신실하지 않다고 부를 수밖에 없다고 하나?

ㅡ현재의 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에 대한 좌절을 맛보았고, 그에 따라서 과거의 노력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고 있다.

ㅡ그런 면에서 신실함/과감함으로 여겨졌던 과거의 의미를 덧없게 느꼈고, 그에 따라서 자신의 과감했던 삶 전체의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ㅡ그런 의미에서 위 표현이 나온 듯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그대들이 내게서 달아난 것도 아니고, 내가 그대들에게서 달아난 것도 아니라고 하나?

ㅡ여기서 말하는 그대들은 과거의 자신이지만, 엄밀하게 의미를 생각해보면, 과거의 자신들을 통해서 얻은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ㅡ사람들 속에서 시도하면서, 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을 잃었기 때문이다.

 

ㅡ이에 따라서 보면, 자신에게서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이 달아난 이유가, 즉 절망한 이유가 자신이 이상 사회를 포기해서 그런 것도 아니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ㅡ이는 현재 차라투스트라의 진술에 따르면 맞는데, 차라투스트라가 절망하게 된 이유는 사람들이 노력을 하지 않아서이기 때문이다.

ㅡ즉 현재 절망의 이유는 사람들인 것이다.

 

사람들이 차라투스트라를 죽이려고 그대들의 목을 조른 것인가?

ㅡ이는 좀 과한 표현이기는 하다.

ㅡ우선 여기서 목을 졸리는 것은 차라투스트라가 아니라 희망이다.

ㅡ즉 희망이 목졸려 질식하여 쓰러졌다는 것이며, 절망을 말한다.

 

ㅡ이에 따라서 보면, 차라투스트라는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을 잃긴 했지만, 차라투스트라를 괴롭게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대들(희망)이 자신의 충심의 것이었고, 자신의 것이어서 젊어서 죽어야 했다고 말하는데, 무슨 의미인가?

ㅡ차라투스트라의 그대들, 즉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은 자신의 충심이었다고 하는데, 여기서도 충심이라는 번역보다는 가장 진심 어린 것이라는 번역이 나아보인다; 충심은 Herzlichstes의 번역어인데, 이 단어는 herzlich가 원형으로, ‘진심의/성실한/간절한’의 의미를 담는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에 대해서 가장 진심이 담겨 있었고, 그래서 가장 바라고 고대했던 것인데, 사람들은 이를 위한 차라투스트라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았다; 후행되는 문장 “내 것 가운데 가장 상처 입기 쉬운 것을 향해 사람들은 화살을 쏘았다”는 문장도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할 수 있다.

ㅡ그렇다보니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반응에 더 빠르게 지치고 좌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ㅡ그것을 젊어서/일찍 죽었다고 표현한다.

 

왜 그대들(희망)의 피부는 솜털 같고, 스러질 미소가 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굉장히 소중히 여기고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ㅡ희망이 솜털 같다는 것은 함부로 하기 어려움을 나타낸다면, 희망의 스러질 미소는 차라투스트라가 그 희망을 간절히 바라고 좋아한다는 의미를 담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사람들이 되찾을 수 없는 것을 앗아갔다고 하는가?

ㅡ이상 사회에 대한 열의를 가지던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의 노력하지 않음에 의해서 열의를 잃었다.

ㅡ이에 따라, 이 열의를 찾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을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젊은 날의 환영과 사랑스러운 경이를 죽여버렸다고 말하는가? 놀이 친구인 행복한 영들을 빼앗았다.

ㅡ차라투스트라가 이상 사회를 희망하기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ㅡ젊은 날의 환영과 경이를 통해서 이상 사회를 희망하게 되었다.

 

나의 영원한 것을 차가운 밤에 부서지는 음향처럼 단명하게 만들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ㅡ자신이 바라던 이상적인 것을 제대로 시도도 해보지 못했는데,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단명하게 했다/찰나의 반짝임, 순간으로 빛나게 했다”는 이야기가 언급된다.

 

좋았던 시절의 차라투스트라는 왜 모든 존재가 자신에게 신성하기를 바랐나?

ㅡ자신에게 신성하기를 바랐다기 보다는, 자신의 이야기에 따라서 이상사회를 위한 신실함을 바랐다고 보는 것이 맞아 보인다.

ㅡ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상 사회를 위해서 신실하지 않았고, 그러한 특징을 “유령을 거느리고 덮쳤다”고 말한다.

ㅡ여기서 유령은 사회적 규율/종교적 규율이라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이 이 규율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모든 나날이 신성하기를 바랐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나날들이 충만함으로 가득차기를 바랐던 것이다.

 

내게서 밤을 빼앗고 잠 못 이루는 고통에 팔아넘겼다.

ㅡ차라투스트라는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충만함에 잠들었을 밤에 절망하고 있게 된다.

ㅡ이를 설명한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상서로운 길조를 바라고 있었는데, 역겨운 괴물 부엉이를 날려 보냈다고 하나?

ㅡ상서로운 길조는 이상사회에 대한 좋은 전망을 말하며, 이는 곧 차라투스트라가 활동하면서 이상 사회의 가능성을 더 확신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는 것을 말한다.

ㅡ하지만 정작 돌아온 것은 부엉이, 즉 부정적인 전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부엉이가 흉조로 인식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여기선 부정적 뉘앙스로 쓰였다.

 

역겨운 것을 뿌리치려고 했는데, 내게 가장 가까운 것들 농양으로 변질시켰다는 건 무얼 의미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사회의 부조리를 개선하려고 했다.

ㅡ이것이 역겨운 것의 의미로 볼 수 있다.

ㅡ그런데 사람들의 태도로 볼 때, 차라투스트라의 의지는 부질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ㅡ그러면서 자신에 대한 회의감을 갖게 되는데, 이를 자신의 부조리를 개선하려는 의지를 회의적인 것으로 변질시켰다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눈이 멀어 길을 가는데, 거기에 오물을 뿌렸다는 말의 의미는?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를 향해서만 나아가는 상태였다.

ㅡ따라서 사회적인 것은 전혀 고려치 않는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맹인으로 비유한 것 같다.

ㅡ그렇게 나아가는 중에 사람들이 그가 나아가는 길에 부정적인 전망을 하도록 했다.

ㅡ이를 오물을 뿌렸다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어려운 일을 해내고 자축하고 있을 때, 내가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주고 있다고 외치게 했다.

ㅡ이 부분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해석을 해본다면 이렇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에 대한 긍정을 하게 되면서, 사람들에게 알리고 이를 위해 노력하라고 권한다.

ㅡ하지만 이는 사람들에게 버거운 일로 다가왔을 것으로 보인다; 늘 자기 검열하고, 자기나 타인이 잘못한 게 있으면 비판하는 일을 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피로했을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했을 것인데, 이는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것이 된다.

ㅡ이에 따라서 사람들은 차라투스트라가 고통을 준다고 외칠 수 있을 것이다.

ㅡ이를 지적한 게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왜 최상의 꿀과 벌들의 노고를 쓰디쓰게 만들었나?

ㅡ차라투스트라의 최상의 꿀과 노고는 이상 사회의 실현에 있다.

ㅡ그런데 사람들은 전혀 이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지 않으므로, 차라투스트라는 절망을 맛보게 된다.

ㅡ이를 표현한다.

 

나의 인자함에 뻔뻔한 거지를 보냈다.

ㅡ여기서 거지란, 받아먹기만 하고 갚지 않는 존재를 말한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앎을 선사하면서 대가를 바라지 않았지만, 같이 노력하기를 바랐다.

ㅡ하지만 이런 피드백은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뻔뻔한 거지처럼 사람들을 여긴 것이다.

 

나의 신성한 것 옆에 경건함이라는 기름진 제물을 두었다고 하는데 무얼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에게 신성한 것이라면, 그것은 이상 사회에 대한 것이다.

ㅡ즉 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를 위해서 앎을 바치고 나눈 것이다.

ㅡ그런데 사람들은 그러한 앎을 전달받고도, 사회적 부조리에 맞서거나 자기 검열을 하며 부조리를 없애려는 게 아니라, 종교에서 말하는 경건한 상태, 즉 사회적 부조리를 견디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ㅡ이에 따라 차라투스트라 의지가 질식되고 만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춤추려고 했는데, 가수를 꼬드겼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ㅡ춤을 춘다는 것은 자신이 느낀 것을 행위로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ㅡ이에 따라서 보면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ㅡ이에 따라서 치환하면, 차라투스트라가 춤을 추려고 했다는 것은 차라투스트라 자신이 생각한 것, 즉 이상 사회에 대한 생각을 구현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문제는 이상 사회를 구현하려고 하는 순간, 사람들의 노력하지 않음에 따라서 구현의 시도가 좌절되고 만다는 것이다.

ㅡ즉 사람들에 의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 것인데, 이를 춤추기 위한 노래를 부르는 가수를 꼬드겼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ㅡ이 가수는 차라투스트라 본인의 감정을 나타내는데, 본래 차라투스트라의 기대와 설렘에 따라 좋은 노래를 불러줄 것이었지만, 사람들의 노력하지 않음에 의해서 답답함/절망감을 노래로 부르게 된다.

 

춤으로 최상의 것을 비유하려고 했는데, 못하게 해서, 내 사지에 남게 되었다는 말은 어떻게 보아야 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아는 것을 구현하려고 했지만, 사람들의 노력하지 않음에 구현하기를 주저하게 된다.

ㅡ그에 따라서 차라투스트라의 아는 것은 외부로 실현되지 못하고 차라투스트라의 내면에 자리하게 되는데, 이를 표현한 것이다.

 

무덤은 무엇을 말하나?

ㅡ앞서 무덤의 섬은 자기극복의 영역이라고 했다.

ㅡ이 자기극복의 과정을 보면, 자신의 생각대로 하다가 자신이 틀렸음을 알고, 그 틀림을 수용하여 거듭나는 것을 말한다.

ㅡ과정을 단순하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틀렸음을 알아차릴 때 절망이 나타난다.

ㅡ이 절망을 이겨냈을 때, 이제 비로소 성장이 가능한 것인데, 그것을 무덤을 파헤치고 나왔다/부활했다고 말한다.

ㅡ따라서 무덤은 절망을 말한다.

 

차라투스트라의 의지는 무엇인가?

ㅡ이상 사회/성숙한 존재에 대한 의지를 말한다.

 

왜 젊은 날의 구원받지 못한 것이 여전히 그대 안에 살고 있다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젊은 날부터 현재까지 이상 사회/성숙한 존재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ㅡ이 의지가 현재 한풀 꺾여서 토로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자신 안에 잔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부활의 의미는 무엇인가?

ㅡ앞서 말한 것처럼, 차라투스트라는 성숙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중에서 절망을 맛본다.

ㅡ그 절망을 이겨냈을 때가 부활이라고 할 수 있다.

ㅡ여기서 조금 독특한 점은 이 절망을 이겨냈을 때 성장이 이뤄진다는 점이다.

 

ㅡ또한 여기서 말하는 부활은 종교적 부활을 부정하고, "현생에서 부활이라고 말할만한 것은 절망을 이겨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