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2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2권 8장 의역 (완) (유명한 현자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5. 30. 00:29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2권 8장 유명한 현자들


 
8장 개괄

 

 

8장은 현명하다고 불리는 자들에 대한 비평이 담긴 장이다.

니체는 대중들에게서 현명하다고 불리는 자들은 대중적 인물이라고 말한다.

그런 면에서 이 현자들은 올바른 이해에 무관심한 존재로 분석된다.

 

니체는 현자들의 모습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올바른 이해는 갖지 못하고 개연성에 따라 추측하고 그것을 맹신하며, 대중의 하인으로서, 대중들이 좋아하는 것만 행하고 비위를 맞춘다는 것이다.

 

니체는 이런 존재들에게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나아가라고 말하며 사회적 규율/대중적 이해를 벗어나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생각하고 탐구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결국엔 니체는 이러한 자들이 올바른 이해를 가지려는 열의가 적다고 판단하며 서로 나아가는 길이 다르다고 말한다.

 


 

본문

 

 

유명한 현자들이여,

여러분이 유명해지고 대중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이유는

여러분이 진리를 섬기지 않고, 대중적인 것들/대중들이 따르는 그릇된 이해를 따르며 정당화했기 때문입니다.

 

대중들이 여러분을 존경하고 있기에, 여러분이 신에 대해서 회의감을 갖더라도 그들은 이해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대중들은 여러분의 이런 회의감을 농담처럼 가볍게 넘겨주거나, 잠깐 신앙에서 일탈했다고 여겨준 것이죠.

마치 주인들이 자신의 노예가 내키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고, 그들의 모습을 보며 즐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대중은 여러분을 웬만하면 미워하지 않습니다.

대중이 미워하는 자는 따로 있는데,

그들은 자유로운 정신을 지녔고, 규율을 적대시하며, 신과 국가를 숭배하지 않고, 홀로 사는 자입니다.

 

대중은 이런 자들을 발색하여 몰아내는 것을 “정의 구현”이라고 했습니다.

아직도 대중은 이런 자들을 발색하고 몰아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기회가 생기면, 발색하고 몰아내려고 노력합니다.

 

결국 사회에는 이런 말이 퍼져 있습니다.

    “진리는 여기 대중들이 따르는 것 속에 있다.

     그러니 진리를 찾아 헤매지 마라.

     진리를 찾아 헤맨다면 화가 있을 것이다”

 

유명한 현자들이여,

여러분은 대중들이 옳다고 여기는 대중적 문화를 정당화해주는 데 노력했습니다.

그것을 진리의 규명이라고 불렀죠.

 

그러면서 당신들의 마음은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나 역시도 대중의 일종이며, 나는 대중적인 것 안에서 신적인 것을 발견한다”

 

여러분은 고집이 세지만 영리한 대중들의 대변자였습니다.

백성들과 함께 한다면 자신에게 이롭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그래서 진리로 향해 나아가지 않고, 대중들에게 나아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대중과 잘 지내고 싶어하는 권력자들은 여러분을 곁에 두려고 했었습니다.

그렇게 여러분을 통해서 자신들의 이미지를 만드려고 했던 것이죠.

 

유명한 현자

차라투스트라는 가장 대중적인 사람이 대중들에게 가장 인정받는다고 말한다.

 


 

 

저는 여러분에게 바랍니다.

이제 탐구자인 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진정한 탐구자인 척 여기게 하지 말란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진실을 구하는 자라는 걸 제가 믿으려면,

우선 여러분은 사회를 숭배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실로 향하는 자.

저는 사회와 사회적 규율을 벗어난 자를 이렇게 부릅니다.

 

이 사람들은 진실/올바른 이해에 대한 갈증을 느끼면서 깨달음을 얻으려 노력합니다.

올바른 이해에 대한 갈증이 심해져, 지친 그가 대중들처럼 오류를 올바른 이해인 것처럼 여길 수도 있을 것 같다구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오류를 믿는 어리석음을 벗어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성숙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그는

자신이 안락함 속에 있지 않기를,

올바른 이해가 아니라면 난폭할 수 있기를,

올바른 이해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홀로 있기를,

신을 믿지 않기를 바랍니다.

 

진실로 향하는 자는

사회적 규율로부터 자유롭고,

종교와 미신으로부터 벗어나며,

성숙한 자신의 모습에 미숙한 자들이 위기감을 느끼게 하고,

위대하면서 홀로 있습니다.

 

전부터 진실로 향하는 자들/자유정신을 가진 자들은 사회를 벗어나 있었습니다.

사회적 규율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지키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사막의 작은 집

자유정신을 가진 이들은 도시에서 벗어나 사막에서 홀로 살아간다.


 

사회에는 안락함에 젖은 자들,

유명한 현자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중들로부터 현명하다고 인정받으면서,

사회에서 대중들을 이끌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진실로 향하고 있지도 않아서 현명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명하다고 인정받고 있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들에게 화가 나는 건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저들은 자유롭지 못하니까요.

저들이 명예와 부를 누리고 있기는 하지만, 대중들의 하인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저들은 혜안을 지닌, 칭찬할 만한 하인입니다.

저들은 자신들이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자신들을 성장시킬 수 있는 존재로 대중을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대중들을 정당화하면서, 그렇게 현자라 불리게 된 것이죠.

 

여러분이 유명한 현자가 된 것은 분명 대중들을 성장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사회적인 인정을 받은 것이죠.

이것이 여러분의 유능한 면이자, 여러분에게 명예로운 것이기에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대중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진실과 옳음에 대해서 전혀 알아보지 못하며, 정신/이성을 장식으로 달고 있는 대중 말입니다.

 

주인과 하인

차라투스트라는 유명한 현자들이 대중의 하인이라고 말한다.


 

여러분은 이런 것을 알고 있습니까?

 

정신/이성이라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며 살아가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생각하고 살아가면서 정신은 성장하는 것이란 겁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정신이 행복을 느끼는 것은 이상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 헌신할 때라는 것,

알고 계셨습니까?

 

탐구자라면 단순히 추측하며 결론 내는 것이 아니라, 입증을 해야 한다는 것,

알고 계셨습니까?

 

깨달은 자는 자신이 깨우친 것을 바탕으로 뭔가를 만들 줄 알아야 합니다.

단지 새로운 지식 새로운 관점을 가지려고 탐구하는 것은 하찮은 짓입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산에 건물을 세우려는 석공

차라투스트라는 탐구하는 자는 자신의 깨달음을 통해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말한다.


 

정신을 통해 올바른 것을 사유하고 그럼으로써 깨달은 것을 현실로 구현하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여러분은 정신을 통한 상상/궤변의 나래를 펼치며 사색의 유희만 할 뿐입니다.

그렇게 대중들과 자신들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탐구를 통해 얻는 자부심이 뭔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정신이 여러분에 대해서 입을 연다면, 정신은 여러분의 무능함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인데,

아마 여러분은 이를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한 번도 자신의 생각에 의문을 가지고 살펴볼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만큼 자신의 생각이 정말 올바른 것인지 탐구할 열정이 없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은 깨달아 가는 기쁨을 모릅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옳음이 진지하게 검토된 적도 없는데, 자신의 생각을 너무나 신뢰합니다.

이런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서, 사람들의 생각을 올바른 것인양 정당화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에 대해서 긍지를 가질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가진 생각이 올바른지 검토하다가 그릇된 이해를 가지고 있음에서 나타나는 좌절을

그리고 그 좌절을 딛고 올바른 이해로 나아가는 행복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릇된 이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라면, 탐구자라 칭해선 안 됩니다.

 

제가 보기에 여러분은 진리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올바른 이해/진실에 관심이 있는 자들에게만 진리가 주어집니다.

여러분에게는 열의가 없으니, 깊게 사고하지도 않고, 그래서 진리를 얻을 기회도 없는 것입니다.

 

대장장이의 작업실

대장장이가 불에 달궈 망치로 두들기고 물에 식히는 과정을 반복하여 쇠를 단련하듯이

탐구자/철학자는 자신의 생각을 구축하고, 그것을 입증 및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 올바른 인식으로 나아간다.


 

유명한 현자들이여,

여러분들은 사회적 권위와 명예를 바탕으로 꼿꼿하고 당당하게 서 있군요.

어떤 이야기를 해도 여러분은 사회적 권위와 명예 속에서 자신을 탐구자라 여기며 살아갈 것 같습니다.

 

강한 바람에 의해 바다를 나아가는 돛단배처럼,

올바른 이해를 향한 강한 의지에 의해 저는 이상 사회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올바른 이해에 관심이 없으니, 어떻게 저와 함께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유명한 현자들이여.

 

 

차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했다.

바람에 따라 나아가는 배

올바름에 대한 강한 열의는 돛단배를 이끄는 강한 바람과 같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열의에 의해 올바른 이해로 나아간다.


생각해볼 거리들

 

유명한 현자는 누구인가?

ㅡ여기서 언급되는 유명한 현자는 대중적으로 현명하다고 인정받는 자를 말한다.

ㅡ현재 시점에서는 대중적으로 똑똑하다고 여겨지는 현자/지식인으로 여겨지는 사람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정리하면, 유명한 현자는 유명한 현자/지식인으로 여겨지는 사람을 말한다.

 

유명한 현자는 왜 대중과 대중의 미신을 섬긴다고 하나?

ㅡ유명한 현자/지식인은 대중적인 인물이다.

ㅡ왜냐면 유명하려면, 대중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ㅡ대중이 바라는 것을 잘 알고, 그것을 건드리는 경우에 유명하다.

ㅡ그리고 대중이 바라는 것을 잘 안다면, 그것은 대중적인 인물이란 것도 의미한다.

ㅡ따라서 이 인물은 대중적인 것을 잘 알고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ㅡ대중의 미신은 그릇된 개념 이해를 말한다.

ㅡ「유고 (1872년 여름~1874년 말)」를 보면 미신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된다.

          철학의 가치 : 혼란스럽고 미신[적인] 표상들을 정화하는 것.

ㅡ이에 따르면, 올바르지 못한 인식/올바르지 못한 표상/올바르지 못한 이해를 미신이라고 칭한다고 볼 수 있다.

 

ㅡ대중적인 이 인물들은 이러한 그릇된 이해를 정당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논리를 개진한다.

ㅡ그래야 대중이 공감하며 받아들이고, 그렇게 받아들여져야 유명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ㅡ정리해 보면, 유명한 현자들은 대중적인 것들/대중이 따르는 그릇된 이해를 따르고 정당화했기에 그들이 유명해지고 존경받았다는 것이다.

 

유명한 현자들의 불신은 왜 대중에게서 용인되었나?

ㅡ여기서 말하는 불신은 Unglauben의 번역어로, 믿지 않음/종교적 불신으로 생각할 수 있다.

ㅡ이런 점에 따라서 신에 대한 회의감으로 보아도 문제는 없을 듯하다.

ㅡ하지만 너무 종교적 의미로 보인다면, 사회적 규율에 대한 불신이라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ㅡ어쨌든 대중들은 이러한 현자들의 불신을 용인해준다.

ㅡ그 이유는 그들이 대중의 편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기회를 준 것이다.

ㅡ이후 후술되는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이, 위버멘쉬적 존재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말하기 위해서 서술되는 부분인 듯하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유명한 현자들을 대중의 노예처럼 이야기하는데, 대중들로 인하여 권위와 명예를 받았고, 대중들의 선택에 의해서 평판이 좌우될 수 있으므로, 주종관계로 보는 듯하다.

 

대중들은 왜 자유정신을 지닌 자를 몰아내는 것을 부추기는가?

ㅡ대중들은 자신들의 공격성을 합법적으로 분출하고 싶어한다.

ㅡ그런 면에서 사회에 순응하지 않는 존재는 공격성을 분출할 대상으로서 적합하다.

ㅡ그래서 유희적 측면에서 괴롭히려고 하는 경향이 생기게 된다.

 

왜 현자들의 심장은 자신이 대중으로부터 왔고, 신의 음성도 저들로부터 왔다고 말하나?

ㅡ이러한 서술은 이 현자들이 자신을 대중성이 강한 인물로 느낀다는 점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ㅡ후술되는 문장에서도 이 현자들은 대중성을 지닌 존재다.

          그런데 그대들은 여전히 그대들의 덕 속에서 대중으로 머물러 있다.

          멍청한 눈을 가진 대중, 정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대중으로.

ㅡ「유고 (1872년 여름~1874년 말)」의 구절에서도, 이 현자들이 대중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현자들, 즉 지친 닭들을 보라. 진정 더 이상 ‘조화로운’ 본성들이 아니다

          그들은 예전보다 더 잘 울어댈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계란 또한 이전보다 작아졌다.

          따라서 ‘혼합된 대중’을 위한 인기 있는 역사의 ‘대중화.’ 그것은 현자들에게 매우

          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극소수의 예외들을 제외한다면, 그들 자체가 ‘아주 혼합된 대중’이고 이

          들의 욕구를 스스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 한 번 실내용 가운을 편안히 걸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그들은 대중적인 욕구에 자신의 작은 연구 영역을 성공적으로 열어놓는 데 성공할 것이다 :

 

왜 현자들은 나귀처럼 집요하고 교활하다고 할까?

ㅡ집요하고 교활하다는 말은 다른 번역을 살피면, 고집 세고 영리하다고 표현된다.

ㅡ그런 면에서 보면, 현자들이 고집이 세고, 영리하다는 것인데, 어떤 면에서 그런 걸까?

 

ㅡ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이 현자들은 진실을 추구하지 않고, 대중성을 고집스럽게 추구한다.

ㅡ그들의 고집은 이런 면을 말하는 듯하다.

ㅡ영리함과 관련해서는, 후술되다시피, 이 현자들이 자신들의 성장에 좋은 것이 대중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으로 보인다.

          저들은 종종 뛰어난 하인, 칭찬할 만한 하인이다.

          저들의 덕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네가 하인이어야만 한다면, 너의 섬김을 최고로 활용할 자를 찾아라!"

 

          “네가 그의 하인이 됨으로써 네 주인의 정신과 덕이 성장해야 한다.

          그러면 네 주인의 정신과 덕과 함께 너 자신도 성장하게 되리라!"

 

대중과 잘 지내기 위한 권력자들은 왜 현자를 곁에 두려고 했나?

ㅡ이에 대해서는 현자들을 곁에 둠으로써 자신들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인식되게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와 관련해서는 「차라투스트라, 1권 11장」을 참고하자.

          국가, 이 새로운 우상은 영웅들과 영예로운 자들을 자기 주변에 들러리로 세우고

          싶어 한다!

          기꺼이 양심이라는 햇볕을 쬐고자 하는 것이다.

          이 냉혹한 괴물이!

 

차라투스트라는 왜 현자들에게 사자의 가죽, 탐구하는 자와 탐색하는 자와 정복하는 자의 머리털을 벗어 던지라고 하는가?

ㅡ여기서 현자는 사자의 가죽을 덮고 있다는 이야긴데, 사자의 가죽을 덮고 있다는 것은, 그가 사자적 존재로 여겨지고 있거나, 그렇게 여겨지길 바라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ㅡ따라서 사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ㅡ여기서 말하는 사자는 「차라투스트라, 1권 1장」에서 나오는 사자로 생각된다.

ㅡ이 사자는 성숙해지기 위해서, 사막으로 나아가다가 황금용과 맞서는 존재다.

ㅡ사막으로 나아가는 이유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고, 이는 「차라투스트라, 서문 2장」에서도 늙은 성자가 이 이유로 황야로 나아갔다.

ㅡ어쨌든 사자는 깨달음을 얻으려고 나서는 존재다.

ㅡ이런 점에 따라서 용기를 갖추고 앎을 찾으러 나아가는 존재로, 과감한 탐구자라고 할 수 있다.

 

ㅡ이러한 해석에 따라서 본다면, 유명한 현자들이 사자의 가죽, 과감한 탐구자로서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이러한 해석은 적절해 보이는데, 후술되는 탐구자/탐색자/정복자의 머리털도 역시 탐구자로서의 모습을 만들기 때문이다.

ㅡ또한 이후 현자들은 올바름/진실을 알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 자로 비춰지기 때문에, 탐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현자로서 인정받고 있는 중이라 할 수 있다.

 

왜 진실성을 믿게 하려면, 숭배하는 의지를 깨부수라고 하는가?

ㅡ여기서 말하는 진실성은 “진실을 구하려는 성질”을 나타낸다.

ㅡ즉 “너희가 진실을 구하려는 성질을 갖춘 사람이라고 내가 믿게 하려면”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ㅡ그런데 진실을 구하려고 하면 왜 숭배하는 의지를 깨야 할까?

ㅡ여기서 말하는 숭배는 사회적 규율이나 신에 대한 숭배인데, 이러한 규율과 신에 대한 숭배는 올바른 인식/진실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를 요구하는 것이다.

 

ㅡ이에 따라서 진실하다는 자로 불리려면, 신이 없는 사막으로 가서, 사회적 규율과 신을 외경하는 자신의 심장을 부순 자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진실하다고 불리는 자가 모래밭에서 목말라 하며 샘물이 넘쳐 흐르는 섬을 곁눈질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ㅡ모래밭에서 목말라 한다는 것은 사막에서 목말라 한다는 것이다.

ㅡ사막은 기본적으로 도시에서 벗어난 곳을 말한다.

ㅡ즉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 자신만의 탐구를 하러 나온 곳인 것이다.

ㅡ자신만의 탐구를 하러 나와서 갈증을 느낀다는 것인데, 이 갈증의 대상은 비유로는 물이지만, 자신만의 현 탐구/의문과 관련된 정답/진리/올바른 이해를 말한다.

 

ㅡ이에 따라서 샘물이 넘쳐흐르는 섬은 정답/진리/올바른 이해가 있는 곳을 말한다.

ㅡ즉 진실하다고 불리는 자, 진실을 구하는 자는 올바른 이해를 얻으려고 애타게 찾는다는 것이다.

 

진실하다고 불리는 자의 갈증은 왜 그를 안일에 빠진 자가 되게 설득하지 못하나? 오아시스의 우상 이야기는 왜 나오나?

ㅡ진실을 구하는 자는 올바른 이해를 얻고자 하는 상태, 올바른 이해에 대한 갈증 상태에 놓여 있다.

ㅡ그런데 올바른 이해를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ㅡ그렇다보니 대충 올바를 것 같은 이해를 갖고 싶은 충동도 생길 수 있다.

ㅡ하지만 그런 충동에도 올바른 이해를 구하는 자들은 그러지 않는다.

ㅡ왜냐면 그러한 이해를 갖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ㅡ여기서 올바른 이해를 구하기 어려워져 대충 이해를 하려는 충동에 빠지면 안일한 자가 된다.

ㅡ오아시스의 경우, 오아시스는 샘처럼 목을 축일 수 있게는 해준다.

ㅡ따라서 샘의 대체재는 될 수 있지만, 샘은 아닌 것이다.

ㅡ올바른 이해가 샘이라면, 올바를 것 같은 이해가 오아시스로 비유된 것이다.

 

왜 진실을 추구하는 자는 굶주리고, 난복해지고, 고독해지고, 신을 믿지 않게 되기를 바라나?

ㅡ진실을 추구하는 자는 성숙해지길 바라는 자로, 이러한 자들은 안락함 속에서 안주하지 않기를 바란다.

ㅡ이를 굶주리기를 바란다는 것으로 표현했다.

 

ㅡ다음으로 난폭해지는 것은 올바른 이해나 부조리에 대해서 난폭해지기를 바라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ㅡ부조리에 순응하는 사람들은 부조리에 난폭하지 않으니 말이다.

 

ㅡ고독해지는 것은 올바른 이해를 나눌 상대가 있는 게 아니라면, 홀로 있으려고 하는 그들의 성향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다음으로 신은 올바른 이해를 방해하며, 세상에 대한 그릇된 관점이므로, 신을 믿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

 

진실된 자는 왜 노예의 행복에서 해방되고, 신들과 경배로 구제되고, 두려워하지 않지만 남을 두렵게 하고, 위대하면서 홀로 있는 것을 원하나?

ㅡ노예의 행복은 사회적 규율을 따르는 걸 행복으로 느끼는 것을 말한다.

ㅡ신이나 대중적인 것들을 경배하는 것에서 구제되는 것은 말 그대로 종교적/미신적인 것을 벗어나고 싶다는 것을 말한다.

ㅡ두려워하지 않지만 남을 두렵게 하는 것은, 왜소한 자들은 성숙한 자가 옆에 있으면 있는 것만으로도 두려움과 질투를 느끼는데, 왜소한 자들이 이렇게 느끼게끔 하는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을 말한다.

ㅡ위대하면서 홀로 있는 것은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홀로 있는 것을 말하는 걸로 보인다.

ㅡ이는 곧 추종되고자 하지 않고, 홀로 있으면서 홀로 있는 자들과 관계 맺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ㅡ이러한 것들은 당연히 진실을 추구하는 자로서는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유명한 현자들은 왜 대중을 끄는 존재인가?

ㅡ이들은 대중들을 선도하는 존재로 사회에서 여겨지기 때문이다.

ㅡ이들이 괜찮다고 추천하거나 말하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교양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현자들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고 표현하나?

ㅡ우선 언급되는 현자들은 올바른 인식을 갖지 않았음에도 사회적으로 명예와 부를 누리고 있다.

ㅡ그런 점에서 올바르지 못하다고 느끼는 차라투스트라는 저들에게 화가 날 수도 있는 것이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저들은 대중들의 하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기에 화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 현자들은 뛰어난 하인, 칭찬할 만한 하인이 되나?

ㅡ이 현자들은 자신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 대중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에 따라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ㅡ그들은 사회적 성공을 위한 방법을 잘 알았다는 점에서 칭찬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현자들이 대중과 함께 성장했다는 것을 말하며, 현자들의 명예를 위해 하는 말이라고 덧붙였나?

ㅡ현자들은 자신들이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로 인해서 유명세를 얻었다는 것에 대해서 자부심/명예로운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으로 보인다.

ㅡ즉 현자들을 나름 칭찬한 것이다.

 

왜 현자들은 멍청한 눈을 가진, 정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대중인가?

ㅡ현자들은 진실/올바른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도 하고, 정신/이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활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은 왜 스스로 삶을 베어대는 삶인가?

ㅡ여기서 정신은 단순한 정신이 아니라,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고 활용하는 삶”을 말한다.

ㅡ그에 따라서 본다면, 정신을 활용하는 삶은 스스로 삶을 베어대는 삶이라고 말한다.

 

ㅡ삶을 베어대는 삶은 무얼 말할까?

ㅡ이 문구의 의미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삶 속에서 부딪히고 싸우고 하는 삶이라고 볼 수 있다.

ㅡ이러한 삶을 겪으면서 정신은 성장하게 된다.

ㅡ이렇게 사는 것이 자신의 정신을 활용하는 삶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정신의 행복은 왜 제물이 되는 것인가?

ㅡ여기서 말하는 제물은 이상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차라투스트라, 1권 21장」에서 죽음에 대해서 말하듯이, 자신의 과업을 위해서 살아가다 죽는 삶을 살라고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내 방식의 죽음을 권한다.

          내가 원해서 내게 다가오는 자유로운 죽음을.

 

          그렇다면 나는 언제 죽기를 원해야 하는가?

          이미 목표와 상속자를 갖고 있는 자는, 바로 그 목표와 상속자를 위해 제때 죽기를

          바란다.

                    (중략)

          나 자신도 그렇게 죽고 싶다.

          내 죽음으로 인해, 그대 내 벗들이 대지를 더욱 사랑하게 되는 죽음 말이다.

          그러고는 다시 나를 낳아준 대지의 일부가 되어 편히 쉴 것이다.

 

눈먼 자의 맹목, 탐색과 모색은 왜 태양의 힘을 입증해야 한다고 말하나?

ㅡ현자들이나 대중의 경우, 추측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한다.

ㅡ즉 입증된 내용에 따라 판단하지 않고, 입증하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다.

ㅡ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하며, 온전한 정신/이성은 이러한 것을 바란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깨우친 자는 왜 산으로 뭔가를 만들라고 하는가? 정신이 산을 옮긴다고 하는 것은 왜 하찮은 것인가?

ㅡ깨우친 자는 자신의 깨달음을 산처럼 가지고 있다고 보는 듯하다.

ㅡ이런 상태라면, 이제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ㅡ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이상사회를 위해 자신의 깨달음을 나누라고 이야기를 한다.

ㅡ그래야 이상사회를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ㅡ반면 정신이 산을 옮긴다는 것을 보자.

ㅡ산이 정신이 깨달은 것들을 말한다면, 산을 옮긴다는 것은 기존의 깨달은 것을 버리고 다른 깨달음으로 옮겨간다는 이야기로 보인다.

ㅡ따라서 새롭고 자극적인 것에 끌리는 대중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와 비슷한 내용이 「차라투스트라, 1권 12장」에서도 언급이 된다.

          그는 내일이면 새로운 믿음을, 모레는 더 새로운 믿음을 갖는다.

          대중과 마찬가지로 재빠른 감각을, 변덕스러운 날씨를 갖고 있으니.

ㅡ이처럼 새롭고 자극적인 것에만 끌리는 것은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는 미개한 짓으로 보이는 것이다.

 

현자들은 왜 정신의 불꽃만 알고 있나? 왜 정신의 모루와 망치를 못 보나?

ㅡ차라투스트라는 현자들의 대중성, 즉 현자들이 대중들처럼 추측과 개연성에 따른 판단만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ㅡ이는 정신을 통해서 사유를 하기는 하는데 부질없는 일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반면 차라투스트라는 앞서 깨달은 자가 산으로 무언가를 만든다고 했던 것처럼, 깨달은 바를 통해서 부조리한 사회를 개선시키려고 노력한다.

ㅡ이 과정은 망치를 들고서 부조리한 사회에 숨어 있는 이상 사회를 끄집어 내는 것이라고 「차라투스트라, 2권 2장」에서 언급한 바가 있다.

 

ㅡ이러한 차이는 정신/사유하는 능력에 대한 이해와 활용하는 능력이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ㅡ정신의 불꽃이 단순히 사유하는 것이라면, 모루는 사유를 검증하려고 토론하고 사색하는 것이며, 망치는 올바르다고 판단된 생각에 따라 부조리한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ㅡ이런 점에서 입증하지 않는 대중성을 지닌 현자는 불꽃만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현자는 왜 정신의 긍지를 알지 못한다고 지적받나?

ㅡ정신의 긍지는 올바른 이해를 하고, 그에 따라서 세상을 올바르게 개선할 때 생긴다고 보는 듯하다.

ㅡ그런 면에서 보면, 현자는 대중들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게 중요하니, 정신의 긍지와는 관련이 없고, 따라서 알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왜 현자는 정신의 겸양이 입을 열게 되면, 견디지 못할까?

ㅡ이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해석을 해본다면 이렇다.

 

ㅡ현자는 정신의 입장에서 볼 때, 아주 건성으로 정신을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명하다고 불리고 있는데, 정신의 입장에선 현명한 것도 아니고 단순한 상태인 것이다.

ㅡ그러므로 ‘현명하다고 불리는 것은 지나치다’라고 말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ㅡ하지만 정신이 겸손이 있기에, 이런 말은 안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ㅡ이는 마치, 컴퓨터를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컴퓨터를 켜서 게임하는 법을 보여준 것과 같다.

ㅡ컴퓨터 입장에서는 이 사람이 컴퓨터를 잘 안다기 보다는 그냥 게임만 할 줄 아는 것이라서, 게임하는 법을 보여준 걸로 컴퓨터 박사라고 불리는 것을 보면, 지나치다고 느낄 것이다.

ㅡ다만 컴퓨터가 말을 할 줄 모르니, 냅두는 것일 뿐.

 

왜 현자들은 정신을 눈구덩이에 던져 본적이 없다고 지적받는가? 왜 충분히 뜨겁지 못하다고 하나? 눈이 주는 냉기의 황홀함도 왜 알지 못한다고 지적하나?

ㅡ현자들은 올바른 이해에 관심이 없고, 대중을 자극하고 이끄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ㅡ따라서 대중들이 새롭게 느낄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대중들의 앎을 전복시킬 만한 것을 찾게 된다.

ㅡ즉 이들은 올바른 이해를 찾고 입증하는 것보다는 흥미를 느낄 것을 대중들에게 주는 것에 관심이 많은 것이다.

ㅡ이러한 점들을 통해서 보면, 이 현자들은 올바른 이해를 얻으려는 열정이 없다.

ㅡ이 열정을 온도로 친다면, 이들은 열정이 없기에 뜨겁지 않다.

 

ㅡ올바른 이해에 대한/진실에 대한 열정이 뜨거우면, 이들은 자신이 생각한 것이 있더라도, 그것이 올바른지 고민하게 된다.

ㅡ이것을 담금질한다고 표현할 수 있는데, 그러면 이들은 자신의 불타는 열의에 생각을 담금질하고 식히고 하면서 단련시켜야 올바른 이해로 나아갈 수 있다.

ㅡ그러려면 냉기가 필요한데, 그것이 눈구덩이로 표현된 것이다.

ㅡ실제로는 이 냉기는 토론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즉 현자들은 자신의 앎에 대한 철저한 검증, 토론을 겪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ㅡ그런데 만약 자신의 앎의 올바름과 관련된 토론과 검증을 통하다 보면, 결국 올바른 인식을 얻을 수 있을 텐데, 이 현자들은 그런 노력을 해본 적 없기에, 올바른 인식을 얻음에 따른 황홀함을 모르는 것이 된다.

 

현자들이 정신을 신뢰하는 것에 대해서 왜 지적하나?

ㅡ유명한 현자들은 대중적 특징에 따라서 생각을 입증하지도, 철저히 검증하지도 않는다.

ㅡ그렇기에 그들의 생각은 막연한 생각이라 할 수 있다.

ㅡ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러한 생각을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ㅡ뿐만 아니라,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대중들을 위로하고 정당화 해주고 있다.

ㅡ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엔 한심해 보일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현자를 독수리가 아니라고 하나?

ㅡ독수리는 긍지이자 날아오르는 존재/올바른 인식을 가져 그릇된 인식에서 벗어나는 존재를 나타낸다.

ㅡ그런데 현자들은 독수리가 아니므로, 현자들은 스스로에게 긍지를 가질만한 존재도 아니고, 올바른 이해를 찾을 수 있는 존재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ㅡ이들은 앞서 말한 것처럼 자신의 정신/생각을 입증하거나 검증하지 않기에, 생각의 오류를 개선함에서 오는 행복도 경험하지 못한다; 생각의 오류는 정신이 바라지 않는 일이므로 공포스럽고 경악할 일이라는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정신의 경악/공포라고 표현한다.

ㅡ그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들이 탐구자인 것처럼 사색의 영역에 발을 들이지 않기를 바라는 것으로 보인다.

 

왜 현자들은 미적지근한 사람들인가?

ㅡ이들은 앞서 말한 것처럼 올바른 이해를 가지려는 열의가 없는 사람이다.

ㅡ이런 특징을 온도로 표현한다면, 미지근하거나 미적지근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심원한 인식이 차갑게 쇄도한다는 이야기는 왜 나오나?

ㅡ현자들은 올바른 이해를 가지려는 열의가 없다 보니, 이들은 올바른 이해/진실을 얻을 수 없게 된다.

ㅡ올바른 이해는 올바른 이해를 가지려는 열의와 그것을 입증하고 검증하는 시간을 거쳐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ㅡ올바른 이해를 가지려는 열의가 뜨거움을 나타낸다면, 그 뜨거움을 거쳐 나온 생각을 입증하고 검증하는 건 차가움으로 이해할 수 있다.

ㅡ이런 과정을 거쳐야 심원한 인식/올바른 이해가 나온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ㅡ하지만 현자들은 미적지근한 존재이므로, 이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

 

차라투스트라의 정신은 왜 광포하고, 바다를 가르게 되나?

ㅡ광포하다는 표현은 Ungestüm 번역어로 보이는데, 이는 격렬하다/격정적이다/거칠다는 의미를 좀 더 강하게 표현하려고 쓴 표현 같다.

ㅡ애초에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정신에 대해서 부정적 단어로 수식하려고 하지 않기에, 저것을 긍정적 의미로 보아야 할 듯하다.

ㅡ애초에 자신의 정신을 현자의 정신보다 나은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ㅡ그런 면에서 본다면, 차라투스트라의 정신은 광포하다기 보다는 강하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ㅡ그렇다면 정신이 강하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

ㅡ차라투스트라와 현자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올바른 이해에 대한 열의가 얼마나 있느냐의 차이로 볼 수 있다.

ㅡ즉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이해를 가지려는 열의가 강하고, 현자는 거의 없는 것이다.

ㅡ그런 점에서 볼 때,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이해에 대한 강한 열의를 가지고서 바다를 나아간다는 뉘앙스로 볼 수 있을 듯하다.

ㅡ즉 광포한 정신은 강한 정신, 올바른 이해에 대한 강한 열의를 나타내는 것이다.

 

ㅡ그리고 이 올바른 이해에 따라서 나아가면, 앞서 말한 심원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

ㅡ그런 면에서 바다를 가른다는 것은 올바른 이해로 나아간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또 이제까지 차라투스트라의 비유를 보면, 이상 사회는 섬으로 비유되고, 바다는 위버멘쉬로 이해되므로, 위버멘쉬적 인간이 되어 이상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ㅡ또한 이러한 열의가 차라투스트라와 현자에게서 차이가 있으니, 서로 같은 길을 나아가는 것은 무리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