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2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2권 6장 의역 (완) (부조리한 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5. 28. 02:28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2권 6장 부조리한 자들


 
6장 개괄

 

 

6장은 부조리한 존재들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니체 자신이 이상 사회에 이르는 방법을 발견했다고 이야기하는 장이다.

 

니체는 부조리한 사회는 부조리한 존재들로부터 만들어 졌고, 이로써 사람들이 세상에 절망하고 등지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한다.

니체 스스로도 이에 따라서 절망하던 중에, 이상 사회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아쉽게도 6장에서는 어떻게 이상 사회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것인지 언급되지 않는다.

 

6장의 문맥이 자연스럽게 진행되지 않을뿐더러, 비유적 표현이 많기에 조금은 애를 먹을 수 있는 장이다.

 


 

본문

 

 

우리의 삶은 본래 희망과 기쁨이 넘치는 곳이지만,

부조리한 자들이 나타나면서, 절망의 독이 퍼졌습니다.

 

저는 이상 사회를 바랍니다.

그래서 올바름을 추구하고 성숙하려는 자, 즉 이상 사회를 추구하는 자라면 누구든 사랑합니다.

하지만 이상 사회를 방해하는 존재인, 부조리한 자들은 누구든 싫어합니다.

이들이 만족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도 않으며, 그냥 사라졌으면 합니다.

 

부조리한 자들은 세상에 자신들의 욕망을 서슴없이 드러냅니다.

그래서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저는 그들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고, 역겨움을 느끼게 됩니다.

 

부조리한 자들은 세상을 부조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부조리한 모습을 두고, 삶을 만족스럽게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하며, 삶의 즐거움에 대한 인식을 바꿔 놓아 버렸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살면서 추구해야 할 즐거움이 부조리를 추구하는 것으로 왜곡되어져 버렸습니다.

 

오염된 샘

삶/세상은 본래는 맑고 깨끗하였으나, 부조리의 독이 퍼져 절망스러운 곳이 되었다.


 

이상 사회를 추구하는 사람은 부조리한 자와 같이 있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들과 같이 있게 되면, 그들의 부조리함에 스트레스 받기 때문입니다.

 

부조리한 자들은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그들의 편의에 따라 세상을 이해하고 있죠.

 그러면서 이들은 세상을 잘 아는 양 굽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부조리를 비판하고 이상 사회를 긍정하는 주장하면, 그가 사회에서 활동하지 못하도록 망가뜨리려 하죠.

 

세상에 절망한 사람들이 왜 절망했는지 아십니까?

사회를 벗어나서 홀로 살아가는 자들이 왜 사회를 벗어났는지 아십니까?

저 부조리한 자들 때문에 절망했고, 저 부조리한 자들과 함께 지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를 벗어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부조리한 자들을 비판하는 사람은 사회 속에서 야만적인 파괴자로 여겨집니다.

저들이 더 헛소리를 하지 못하게 하고 싶었던 것인데도 말입니다.

 

과일 나무를 꺾는 남자

차라투스트라는 부조리한 사람은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자가 생각을 펼치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살면서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현생에 대해 부정적 전망을 갖고, 내세를 바라며, 부조리와 불의를 견뎌야 한다는 것을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인간에게 부조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부조리는 세상에 대해 절망하게 하고, 인간을 고통받게 하면서, 방종하게 하는 것이자, 개인의 행복을 좀먹는 것인데, 이것이 필요하다고?

 

저는 부조리의 필요를 경험하고서, 그들과 이 문제를 놓고 다투려는 의지보다는 역겨움을 느꼈고,

이 역겨움은 제가 현생에 대한 열의를 잃게 하였습니다.

부조리를 합리화하는 사람들을 보니, 그들의 이성에 호소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 것입니다.

  

부조리는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통치자의 경우를 보더라도, 통치가 국가/사회를 이상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려고 하지 않고,

통치자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서로의 이득을 따지고 협상하는, 부조리한 것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 규율에 따라 살았습니다.

부조리한 규율에 익숙해지기도 싫었고,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부조리를 합리화하는 시대이다 보니, 사람들은 이상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즘의 책들은 사람들이 사색하게 하기 보다는 감정적 고양을 유발할 수 있는 책들, 즐거움이나 재미를 줄 수 있는 책들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회 속에서 살면서도, 사회적 규율에 따르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부조리한 자들과 함께 어울리며 타락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죠.

 

책이 즐비한 서점

차라투스트라는 부조리를 긍정하고 있는 사회 문화 속에서 좋은 책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저는 힘겹게 이상 사회로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렇게 나아가면서 위안이 되었던 것은 사색한 것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앎의 나눔을 통해서 저는 이 사회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제게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저는 절망적으로 여겼던 이 세계에서 희망을 찾았던 것입니다.

저는 이제껏 보지 못하던 세계, 부조리한 존재가 없는 이상 세계의 가능성을 찾게 된 것입니다.

 

절망적인 세계가 제게 이상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혜안을 준 것일까요?

어쨌든 절망적인 세계를 살면서, 저는 이상 사회로 나아갈 방법에 대한 고민을 했었으니까요.

 

형제들이여,

저는 이상 세계로 나아갈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어떤 부조리한 자도 없는 세계를 찾은 것입니다.

이로써 저는 기쁨이 충만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한껏 고양되어진 저는 이 앎을 다른 이들에게 선사하고 싶습니다.

 

물론 고양되어진 이 상태에서 조금은 템포를 낮출 필요가 있을 겁니다.

격앙된 상태에서 조급하게 나아가면, 혼자 지치고 좌절할 수도 있을 테니 말입니다.

 

이상 사회를 향한 나의 열의는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할 방법을 찾기를 얼마나 갈망했었는지!

사회의 부조리를 두고 절망하던 시기도 이제는 지나갔습니다.

이상 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전망도 이제는 극복할 수 있게 되었구요.

 

이제 저는 이상 사회의 가능성을 인식하였습니다.

이상 사회를 바라는 이로써 찾고자 하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오아시스 같은 샘

차라투스트라는 부조리한 세상에 절망하여 이상 사회를 부정하다가, 이상 사회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벗들이여.

이상 사회에 대한 최고의 깨달음을 얻으러 오시길 바랍니다.

이 깨달음 속에서 우리는 평온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 깨달음을 통해서 우리가 평온함과 행복을 느끼는 이유는

이 깨달음이 우리가 가장 바라던 것이자, 우리가 늘 가고자 하던 이상 사회로 나아가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조리한 자들에게는 이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부조리한 자들은 범접할 수 없는 곳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벗들이여,

이상 사회와 관련하여 의문이나 궁금증이 있다면, 이야기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확신할 수 있는 답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에 이르러 이상 사회를 구현할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에게 당장은 보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상 사회에 대한 우리의 긍지가 그 동력을 제공해줄 것입니다.

 

현생에 대해 냉소적이면서 이상 사회에 대한 긍지가 없는 부조리한 자들에게,

우리의 긍지는 너무나 지나치게 열정적인 상태로 인식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상 사회에는 부조리한 자들을 위한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상 사회가 펼쳐진다면, 부조리한 자들은 고독 속에서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부조리한 자들이 머물 수 없는 보다 높은 수준의 이상 세계에 살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 부조리한 자들을 청소하는 거센 바람으로서의 삶,

긍지를 가진 채로 부조리한 자들과 맞서 올바른 이해로 그들을 청소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언젠가는 저 부조리한 존재들을 쇠락하게 할 것입니다.

제 미래, 이상 사회가 그것을 바랍니다.

 

저는 부조리한 사회를 비판하는 존재입니다.

제 적들에게 충고하니, 저를 향해 허튼 소리를 내뱉지 않도록 조심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 사이로 부는 거센 바람

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를 위해서 언젠가 거센 바람이 되어 부조리한 자들을 제거하려고 한다.


 생각해볼 거리들

 

삶은 왜 기쁨의 샘인가?

ㅡ삶, 즉 세상은 원래 기쁜 곳이란 이야기로 보인다.

 

잡것은 무엇인가?

ㅡGesindel의 번역어로, 이 단어는 불량배/깡패를 의미하는 단어다.

ㅡ하지만 이 장에서 말하는 것은 불량배나 깽패보다는 현생에 열심히 살지 않는 자들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따라서 현생에서 부조리를 개선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서 부조리를 활용하는 자, 부조리한 자로 보는 것이 좋아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깨끗한 것을 좋아하나?

ㅡ 깨끗한 것은 순수한 것을 나타내는 것 같다.

ㅡ이에 따라서, 타락하지 않은 것을 좋아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타락하지 않은 존재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이상 사회를 추구하는 자로 볼 수 있다.

ㅡ그러므로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 이상 사회를 추구하는 자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왜 불결한 자들의 히죽대는 주둥이와 갈증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가?

ㅡ불결이 깨끗함과 반대되고, 깨끗함이 타락하지 않음을 말하므로, 불결한 자들은 부조리한 자들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또한 차라투스트라의 입장에선, 부조리한 자들은 악/부조리/불의를 행하는 자들로, 이상 사회로 나아가는데 기여하지 않고, 오히려 부조리한 사회에 앞장서는 부조리한 자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ㅡ여기서 히죽대는 주둥이와 갈증을 살피면, 히죽대는 주둥이는 만족스러워하며 웃는 것을 말하고, 갈증은 기쁨의 샘을 마시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세상을 살아가려고 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 부조리한 자들이 샘의 물을 마시지 않기를 바라는데, 이는 곧 그들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이에 따라 정리한다면, "차라투스트라는 부조리한 자들이 만족해하는 것과 그들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샘물 속으로 저들이 눈길을 던진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ㅡ샘은 삶을 의미하고, 삶은 세상을 의미한다.

ㅡ눈길의 경우, 눈이 무언갈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ㅡ이에 따르면, 저들은 세상에 자신이 바라는 것을 던졌다는 것이다.

ㅡ자신이 바라는 것을 던질 수는 없으니, 내비췄다는 것으로 보면 해석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ㅡ즉, "저들은 세상에 자신들이 바라는 것/욕망을 서슴없이 내비췄다"는 의미로 보면 될 듯하다.

 

왜 저들의 역겨운 미소가 샘물에 비쳐 올라오나?

ㅡ세상에 자신들의 욕망을 내비춘 상태이므로, 그에 따라서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차라투스트라에게도 그것이 보여 질 것이다.

ㅡ그것을 보고 역겨워하는 것이다.

 

신성한 물은 무엇을 말하나? 신성한 물에 갈망의 독을 풀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ㅡ이는 서두의 샘을 말하고, 따라서 세상/삶을 말한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 세상/삶을 기쁨이 가득한 곳으로 인식한다.

ㅡ그런데 세상/삶을 두고 이러한 기쁨이 자리하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상 사회에 대한 추구가 있어야 한다.

 

ㅡ문제는 부조리한 자들의 경우, 성숙하고 이상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영역에서 전혀 그렇게 살아가지 않는다.

ㅡ즉 그들은 욕망에 따라 행동하며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ㅡ이러한 그들의 삶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만족과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ㅡ따라서 사람들이 성숙하고 이상적인 모습으로 살려고 하지 않고, 이들에 따라 살아가게 된다.

ㅡ결국 이 세상은 부조리를 저지르는 이들로 가득차는 상황으로 가고, 이상사회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를 이 부조리한 자들이 독을 풀어서 그런 것이라고 표현하는 듯하다.

 

불결한 꿈을 쾌락이라고 부르면 왜 쾌락이란 말이 오염되나?

ㅡ저들의 불결한 꿈은 불결한 욕망을 말한다.

ㅡ이에 따라 보면, 즉 불결한 욕망을 쾌락이라고 부르면서 쾌락이라는 말이 오염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그런데, 쾌락이란 말은 불결한 욕망을 나타내기도 하므로, 해석어가 부적절한 느낌이 있다.

ㅡ쾌락의 번역어를 살펴보면, Lust인데, 이는 즐거움/유쾌함/쾌감 등을 말하는 단어이므로, 따라서 즐거움이라고 보는 것이 좋지 않나 싶다.

ㅡ정리해보면, "부조리한 자들은 자신들의 불결한 욕망을 따르는 것이 삶의 즐거움이라고 불렀고, 이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즐거움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하게끔 만들었다"로 볼 수 있을 듯하다.

 

눅눅한 심장은 무엇을 말하나?

ㅡ눅눅함이라 번역된 feuchten는 눅눅함보다는 축축함으로 번역하는 것이 나아 보인다.

ㅡ축축한 심장은 활활 타오르는 심장/끓어넘치는 심장과 반대된다; 끓어넘치는 심장은 의욕이 가득한/긍정적 전망을 하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차라투스트라, 1권 16장」에서 언급이 된다.

          나는 그대들이 온갖 부류의 이웃과 그 이웃의 이웃을 참아내지 않기를 바란다.

          그대들 자신으로부터 그대들의 벗과 그 벗의 끓어넘치는 심장을 창조해내야 하니.

ㅡ그런 면에서 축축한 심장은 열정이 없는 심장으로 이해해 볼 수 있을 듯하다.

 

ㅡ축축함의 의미에 대해서는 「선악의 저편, 8장」을 참고해 보면 좋을 듯하다.

          244.

               (중략)

          모든 사물이 자신의 비유를 사랑하듯이, 독일인은 구름을 사랑하고, 불명료하고

          생성하고 있으며 어슴푸레하고 축축하고 가려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

          :즉 모든 종류의 불확실한 것, 형태가 갖추어지지 않은 것, 위치가 바뀌는 것, 성장

          하는 것을 독일인은 ‘깊다’고 느낀다.

ㅡ이 구절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언가 막연하고 불명확한 것을 축축함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에 따라 정리해 보면, 축축한 심장은 세상에 대한 열정을 잃은 심장, 무언가 막연해하고 있는 심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엔 세상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가지고 있기에 놓이는 상태다; 왜냐면 차라투스트라는 자신과 자신의 벗이 끓어넘치는 심장을 갖는다고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 1권 16장」

          나는 그대들이 온갖 부류의 이웃과 그 이웃의 이웃을 참아내지 않기를 바란다.

          그대들 자신으로부터 그대들의 벗과 그 벗의 끓어넘치는 심장을 창조해내야 하니.

                    (중략)

          나는 그대들에게 벗에 대해 그리고 벗의 넘쳐흐르는 심장에 대해 가르치노라.

          그런데 이 넘쳐흐르는 심장에게 사랑받기를 원한다면, 해면으로 있을 줄을 알아야

          한다.

 

ㅡ 따라서 눅눅한 심장은 세상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는 상태, 세상에 대한 기대를 잃은 상태라고 할수 있을 듯하다.

 

저들의 손에 있는 과일은 무엇인가? 왜 들척지근하고 짓무른가?

ㅡ과일이 「차라투스트라, 2권 2장」의 무화과 열매와 관련된다고 보면, 앎/깨달음/이해를 말한다.

ㅡ즉 저들이 가진 앎과 깨달음은 들척지근해지고 짓무르다는 것이다.

ㅡ여기서 저들은 부조리한 자들이고, 따라서 저들의 깨달음은 맛있게 달지 않고, 무르다는 것인데, 결국 좋은 앎/깨달음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을 말한다.

 

왜 저들의 눈길은 과일나무를 부러지게 하고 시들게 하나?

ㅡ저들의 눈길은 앞서 눈길에 대해서 해석한 것과 같다면 눈길은 ‘저들이 바라는 것’을 말한다.

ㅡ여기서 저들은 부조리한 자들이므로, ‘부조리한 자들이 바라는 것이 과일나무를 부러지게 하고 시들게 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ㅡ이제 과일나무에 대한 해석이 필요해 보이는데, 과일나무는 「차라투스트라, 2권 2장」에서의 무화과 나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ㅡ이 무화과 나무는 차라투스트라를 의미하며, 그에 따라서 무화과 열매는 자신의 앎을 말했다.

ㅡ즉 사람들에게 올바른 이해/이상 사회에 대한 긍정을 가능하게 해주는 앎/깨달음인 것이다.

 

ㅡ이처럼 차라투스트라가 제공하는 앎과 깨달음은 부조리한 자들과 반대되고, 부조리한 자들은 차라투스트라의 앎과 깨달음을 부정하고 비판한다.

ㅡ이런 면에서 부조리한 자들이 부러지고 시들게 하는 나무는 차라투스트라와 같이 올바른 이해를 선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ㅡ정리해보면, "부조리한 자들의 욕망/바람이 올바른 이해를 선사하는 것을 방해하고, 비판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삶으로부터 등을 돌린 사람들은 왜 이 잡것에게 등을 돌린 것인가?

ㅡ부조리한 자들은 자신들의 만족을 위해서 행동한다.

ㅡ그러면서 불의, 악행, 부조리를 저지르게 된다.

ㅡ그런데 그들이 저지르는 불의와 부조리, 악행은 사람들이 세상에 절망하게 만드는 요소다.

ㅡ이에 따라서, 세상에 절망한 사람들이 있다면, 이 부조리한 존재들 때문에 절망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잡것들과 나누려고 하지 않는 샘물, 불꽃, 열매는 무엇일까?

ㅡ샘물은 세상/삶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따라서 샘물을 같이 나누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은 같은 세상에 살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볼 수 있고, 그러므로 삶으로부터 등을 돌렸다고 할 수 있다.

 

ㅡ불꽃은 이상사회에 대한 열의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ㅡ앞서 축축한 심장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을 때처럼, 불꽃은 끓어오르는 심장/넘쳐 흐르는 심장을 나타낸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ㅡ즉 이상사회에 대한 열의를 나누고 싶은 대상이 아니란 것으로 보인다.

ㅡ다시 말해, 같이 노력할 동지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듯하다.

 

ㅡ열매의 경우, 「차라투스트라, 2권 2장」에서 나온 무화과로 보이며, 이는 곧 이상 사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의미하는 것 같다.

ㅡ앞서 불꽃을 나누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처럼, 같이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할 존재가 아니라고 여겼던 것이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 2권 3장」에서 말하는 낯선 자/가난한 자/거지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나는 선사하는 자다.

          벗으로서 벗에게 기꺼이 선물을한다.

          낯선 자들과 가난한 자들은 내 나무에서 직접 열매를 따도 좋다.

          그러면 덜 부끄러울 테니.

 

          하지만 거지만큼은 남김없이 제거해버려라!

          참으로 그들에게는주어도 화가 나고 주지 않아도 화가 난다.

 

사막으로 가서 맹수들과 갈증에 시달린 사람들은 누구인가?

ㅡ사막으로 갔다는 것은 도시를 벗어났다는 것이고, 이는 곧 홀로 사는 존재/은둔자를 의미한다.

ㅡ맹수는 황금용과 맞서 싸우는 존재로, 사회적 규율에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호오에 따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ㅡ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 자신만의 가치관을 형성한 존재들인데, 이들의 갈증은 개인의 행복을 위한 이상 사회에 대한 갈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므로, 이상사회를 바라는 자들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더러운 낙타몰이꾼은 누구인가?

ㅡ「차라투스트라, 1권 1장」을 보면, 성숙해지려고 하는 낙타가 사막으로 나아가는데, 이 낙타의 길을 가로막는 황금용이 나타난다.

ㅡ즉 황금용은 이 낙타가 일정 영역 이상을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역할, 기존의 영역으로 돌려보내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황금용이 낙타를 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ㅡ그렇다면, 낙타몰이꾼이 황금용일까?

ㅡ낙타몰이꾼은 황금용이 아니다.

ㅡ왜냐면 황금용은 사회적 규율이고 낙타몰이꾼은 어떤 존재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낙타몰이꾼은 황금용에 따르는 자/황금용의 일을 수행하는 자로 볼 수 있다.

ㅡ즉 낙타몰이꾼은 사회적 규율을 따르고 받드는 자인 것이다.

 

ㅡ그러나 문맥에 따르면, 이 낙타몰이꾼은 부조리한 자가되어야 한다.

ㅡ그러면 부조리한 자가 사회적 규율을 따르는 자냐는 물음이 남게 된다.

ㅡ왜냐면 사회적 규율을 따르는 자들이 모두 부조리한 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ㅡ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꼼꼼히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ㅡ즉, 차라투스트라는 단순한 "낙타몰이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낙타몰이꾼"을 말하기 때문이다.

ㅡ다시 말해, 단순히 사회적 규율을 따르는 이를 낙타몰이꾼이라고 한다면, 부조리와 불의를 행하면서 사회적 규율을 따르는 이를 더러운 낙타몰이꾼으로 구분 짓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ㅡ따라서 더러운 낙타몰이꾼은 이제껏 말해오는 부조리한 자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파괴자처럼, 열매가 익어가는 들녘에 우박처럼 찾아든 이들은 누구인가?

ㅡ우선 이 사람들은 후행되는 문장으로 볼 때, 부조리한 자들을 공격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ㅡ자신의 발을 잡것의 입 속에 밀어 넣고 목구멍을 막고자 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현재 잡것/부조리한 자들을 비판하고 있으므로, 이들을 공격한 자들은 차라투스트라가 긍정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ㅡ그런데 이 차라투스트라가 긍정하는 존재들이, 열매가 익어가는 들녘을 파괴하려고 찾았다.

ㅡ그렇다는 것은 이 열매가 익어가는 들녘이 공격의 대상이었다는 것이고, 이는 곧 부조리한 자들의 들녘이란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이를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열매가 앎/깨달음을 말하므로, 열매가 있는 들녘을 공격했다는 것은 부조리한 자들의 깨달음을 오류를 지적하고 비판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하지만 문제는 부조리한 자들의 논리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받는다는 점에 있는 듯하다.

ㅡ그렇기에 이들의 부조리한 자들에 대한 공격은 파괴자로서 여겨지게 되고, 그에 따라 부조리한 자들의 논리를 공격하는 자들을 파괴자라고 표현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삶 자체가 적의와 죽음과 수난의 십자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ㅡ현생에 대한 적대감, 이상 사회를 부정하고 내세를 바라며 부조리와 불의를 견디려 한다는 의미를 담는 듯하다.

 

삶이 잡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왜 차라투스트라를 잘식하게 하나?

ㅡ이 세상이 부조리한 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말하는 구절이다.

ㅡ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이들은 필요하지 않은데, 필요하다고 하니 질색하는 것이다

 

왜 잡것이 삶에 필요한가?

ㅡ우선 이상적인 것이 세상에 자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ㅡ즉 사럼들이 이상적인 것만을 행하며 살고자 하지 않고, 그럴 능력도 없기도 하다.

ㅡ따라서 이에 맞춘 적당한 부조리와 불의의 허용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독으로 오염된 샘은 무얼 말하나?

ㅡ부조리와 불의가 있는 사회/세상을 말한다

 

악취를 내뿜는 불꽃은 무얼 말하나?

ㅡ불꽃이 열의라면, 부정적이고 그릇된 것에 열의를 갖는 것을 말한다.

ㅡ이에 따라서, 사회적 규율, 부조리나 불의를 받아들이고 행하려 하는 경향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는 사람들을 고통받게 하는 것에 해당되므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으로 의역했다.

 

불결한 꿈은 무엇인가?

ㅡ이상적이지 못한/불결한 욕망을 말한다.

 

생명의 빵을 파고드는 구더기는 무엇인가?

ㅡ생명은 개인의 삶을 의미한다고 보인다.

ㅡ개인의 삶을 좀먹는, 개인의 진정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사회적 규율을 말한다고 보인다.

 

왜 증오가 아니라 구역질이 생명을 먹어 들어 갔다고 하나?

ㅡ상술되는 삶은 현재 차라투스트라가 기피하고 싫어하는 것들이 필요하다고 이야기를 한다.

ㅡ자신이 기피하고 싫어하는 것을 필요하다고 하는 삶은 자신이 전혀 바라던 삶의 모습이 아니다.

ㅡ이런 상황에 놓이자 실망한 차라투스트라는 그릇된 인식에 맞서 싸우기보다 현생/삶에 대한 의지를 잃게 된다는 것으로 보인다.

 

잡것들이 제법 정신을 갖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부조리와 불의를 저지르는 부조리한 존재들이 자신들의 부조리와 불의를 정당화/합리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한다.

ㅡ부조리와 불의는 어떻게 합리화될 수 있을까?

ㅡ대체로 부조리와 불의를 합리화하는 것은 실리를 따지면서이다.

ㅡ따라서 실리적인 측면에서 부조리와 불의를 합리화한 것으로 보인다.

 

왜 나는 정신에 마저 종종 싫증을 냈나?

ㅡ정신은 분석하여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여 현상을 이해하려는 성질을 지닌다.

ㅡ그런데 문제는 이 정신이 그릇된 것에 대해서도 합리적인 것으로 만드는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다.

ㅡ이에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정신/이성의 한계에 대해서 목도한 것으로 보인다.

 

왜 지배자들이 말하는 지배를 보고서 등을 돌렸나?

ㅡ차라투스트라가 지배자들을 보고서 등을 돌렸다면, 흐름상 부조리한 자들과 결탁했기 때문에, 등을 돌렸을 것이다.

ㅡ그런데 이것을 두고 지배라고 표현한다면, 부적절한 해석으로 보인다.

 

ㅡ또 Herrschen라는 단어가 지배의 번역어인데, 이 단어는 통치라는 의미로도 번역할 수 있다.

ㅡ이에 따라 통치로 번역하고 접근하면, 좀 더 자연스러운 구절이 되는 듯하다.

 

ㅡ이에 따라 보면, "통지자들이 말하는 통치는 사실 부조리한 존재들을 상대로 흥정하고 거래하는 것이었다"는 의미가 된다.

ㅡ통치라는 것이 국가나 집단을 이상적인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인데, 그게 아니라 그저 부조리한 이들과 권력을 위한 거래를 하는 상태이니 차라투스트라가 절망한 것이다.

 

대중들 틈에서 왜 낯선 혀로 살고, 귀는 닫은 채 살았나?

ㅡ「차라투스트라, 1권 11장」에서 혀는 선악/가치관을 말하는 것을 말한다.

ㅡ그런데 혀가 낯설다고 했으므로, 낯선 선악 기준, 낯선 가치관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ㅡ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대중적이지 않은 말을 했다는 것이고 이는 개인적 가치관에 따라 말을 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다음으로 귀를 닫은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지 않은 채로 살려고 했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정리하면, 차라투스트라는 사회적 통념에 따르지 않고, 개인적 가치관을 말했으며, 통념에 대한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은 채로 지냈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리고 그렇게 한 이유는 실리에 따라 흥정하고 거래하는 저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ㅡ혀에 대해서는 「차라투스트라, 1권 11장」의 구절을 참고하자.

          그에 대한 징표를 내가 그대들에게 주겠다.

          개개의 민족은 각각 자신의 혀로 선과 악에 대해 말한다.

          이웃 민족은 그 혀를 이해하지 못한다.

          개개의 민족이 양속과 율법으로 자신들의 언어를 고안해낸 것이니.

 

왜 코를 막고 언짢아 하면서 지나왔나?

ㅡ깊은 사색과 통찰이 없는 책들이 많기 때문이다.

ㅡ즉 재미 위주의 글들이 많을 뿐이라서, 차라투스트라는 견디기 힘들어 한다.

ㅡ이러한 글들은 현실을 버티게, 안주하게 만드는 역할만 하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앞서 낯선 혀로 살다가 여기선 왜 벙어리가 되었나? 왜 모순된 이야기를 하는가?

ㅡ낯선 혀로 살았던 것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일이 있다면, 사회적 통념에 따르지 않고 말했다는 것을 말한다.

ㅡ벙어리로 살았다는 것은 사람들에 대해서 무언가를 지적하고 싶은 상황이 있어도 참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ㅡ따라서 지적하고 싶어도 참았고, 자기 의사표현을 해야 하면 표현했다는 것이다.

ㅡ정리해보면 모순된 말을 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듯하다.

 

차라투스트라의 정신은 어떤 계단을 오른 것인가?

ㅡ위버멘쉬에 이르는 계단을 올라간 것이다.

 

왜 삶은 지팡이에 의지해서 살금살금 지나갔나? 지팡이는 무엇인가?

ㅡ여기서 말하는 지팡이는 선행되는 문장에 따라 볼 때 앎의 나눔으로 보인다.

ㅡ즉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사색하고 나누는 것을 통해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구역질은 무엇을 말하나?

ㅡ부조리한 자들이 주도하는 세게에 대한 절망을 말한다.

 

눈이 젊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더 멀리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ㅡ이제까지 절망스러운 상황만을 마주하다가, 더 넓은 혜안을 가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다.

 

어떤 잡것도 샘가에 있지 않는 드높은 경지는 무엇인가?

ㅡ샘가는 삶/세상을 말한다.

ㅡ이 구절에 따르면, 세상에 부조리한 존재가 없는 상태를 '드높은 경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이상 세계를 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구역질 자체가 날개를 달아주고, 샘물을 예감하는 힘을 주었다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나?

ㅡ구역질은 절망적인 세상을 말하고, 샘물은 삶/세상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좀 더 이상적인 세상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리고 날개는 이런 이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능력/혜안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따라서 절망적인 세상이 이상 사회를 인식할 수 있는 혜안을 주었다고 보면 될 듯하다.

 

기쁨의 샘물이 솟구쳐오르는 이유는?

ㅡ이상 사회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격한 기쁨을 맛보고 있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에 따라서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이 앎/인식을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어하게 되고, 따라서 다시 채우려고 비운다는 말이 나온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기쁨의 샘에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하나?

ㅡ기쁨의 샘에 대하여 인식은 했다지만, 그리로 가는 길이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ㅡ즉 기쁨의 샘에 이르는 방법을 알았다고 하지만, 그리로 나아가는 길은 단번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ㅡ따라서 지금의 격한 상태로 나아가면, 지치게 될 것이고, 좌절하게 될 것이다.

ㅡ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를 염두해야 하는 것이다.

 

여름은 무엇을 말하나?

ㅡ여름은 가을이 오기 전이며, 가을은 수확의 시기다.

ㅡ그러므로 여름은 수확하기 전 자라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ㅡ즉 곡물이나 과일 등이 성장하는 시기인 것이다.

 

ㅡ따라서 "여름이 작열하고 있는 내 심장"은 "성장하고 있는 시기의 나"로 보면 좋을 듯하다.

 

그대의 냉기는 무엇을 말하나?

ㅡ이는 샘물의 차가움을 말하는데, 의미를 따진다면, 여름인 상태에서 냉기가 주어지므로, 계절의 변화를 유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여름에서 가을로 꺾이게 하는 것이다.

 

ㅡ가을은 수확의 시기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열매를 나누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ㅡ즉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다.

ㅡ따라서 기쁨의 샘, 이상 사회에 대한 앎을 얻은 차라투스트라는 이제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나눠줄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ㅡ따라서 이 냉기는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에서 앎을 선사할 수 있게 해주는 최종적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ㅡ이상 사회에 대한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했다면, 차라투스트라는 가을을 맞이 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앎을 나눠줄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봄날은 왜 머뭇거렸나?

ㅡ현재 봄과 여름이 언급되며, 가을에 대해서도 앞서 「차라투스트라, 2권 2장」에서 언급된 바 있다.

ㅡ각각의 시기는 인간의 삶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봄은 성장하기 전의 시절이고, 이는 사회적 규율이나 부조리에 대해서 고민하던 시기로 보인다.

ㅡ이때 부조리나 이상사회에 대한 문제들을 씨앗으로 가지고 있었고, 그것에 대해서 고민하는 듯하다.

ㅡ이것을 이 구절에서는 머뭇거린다고 표현한 것 같다.

 

ㅡ그러면서 여름이 되고, 사회적 규율이나 부조리에 대한 고민이 하나둘 풀리면서 성장의 최고조로 나아가는 것 같다.

ㅡ부조리나 이상 사회에 대한 문제들을 점차 통찰해 나아가게 되는 듯하다.

ㅡ지금의 장에서 언급하는 내용이 이 시기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러다 가을이 되면서 무르익은 부조리/이상사회에 대한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나누게 된다.

ㅡ즉 위대한 정오에서 내려가는 시기이자, 아이로서 사회에서 지내는 시기기도 하다.

 

왜 봄날엔 비애가 있었나?

ㅡ봄의 시기는 부조리에 따라서 절망하고 힘들어 하던 시기로 보인다.

ㅡ그에 따라서 비애가 있었던 시기라고 표현한 듯하다.

 

유월에 내리는 눈송이는 무엇인가?

ㅡ유월에 우박이나 눈이 내린다면, 작물의 성장에 방해가 된다.

ㅡ그런 점에서 부조리/이상 사회에 대한 문제를 탐구하고 사색하는 것에 방해가 되는 일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부조리/이상 사회에 대한 문제를 탐구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 같은 것인데, 이는 사회 부조리의 근절이 어렵다는 부정적 전망이 아닐까 싶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 전망을 극복해 냈다.

ㅡ그래서 기쁨의 샘을 찾은 것이고, 여름의 한낮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차가운 샘물과 지복의 고요를 누리게 친구들을 오라고 하나?

ㅡ이상 사회를 바라지만 전망이 어두워서 절망하던 차라투스트라에게 이상 사회의 가능성이 보였으므로, 그 행복감은 높을 것이다.

ㅡ이 행복감을 나누고 싶어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높은 경지이자 고향인 이곳은 어느 곳을 말하나?

ㅡ여기서 ‘우리’는 이상 사회를 바라고 부조리한 사회를 거부하는 사람을 말한다.

ㅡ이들은 자신의 고향인 것처럼 이상 사회를 늘 바라고 있다.

 

ㅡ또한 이상 사회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은 이상 사회를 바라는 자들이 이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깨달음이다.

ㅡ왜냐면 세상에서 부조리를 근절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쉽게 떠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ㅡ정리한다면, 높은 경지이자 고향인 이곳은 이상 사회이자 이상 사회에 대한 깨달음이다.

 

불결한 자들에게는 왜 높고 가파른가?

ㅡ우선 이상 사회를 떠올리려는 생각을 불결한 자/부조리한 자들은 하지 않는다.

ㅡ왜냐면 부조리한 세상에서도 살만하기 때문이다.

ㅡ그래서 그들에게는 너무 높다고 표현한다; 물론 그들이 이상 사회로 나아가려고 하지도 않아서, 그들은 이상 사회를 그려내는 것이 어렵든 쉽든 상관이 없지만 말이다.

 

ㅡ또 이상 사회가 부조리한 자들에게 가파른 이유는, 이상사회는 부조리를 저질러선 안 되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부조리한 자들이 이상 사회에서 잘 정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가 된다; 물론 마찬가지로 이들은 굳이 부조리를 안 저지를 이유도 없다.

 

맑은 눈길을 던지는 자들은 누구인가?

ㅡ이들은 이상사회를 바라는 자들이다.

ㅡ하지만 이상 사회에 대한 확신이 없다.

ㅡ부조리가 근절되는 세상은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맑은 눈길을 샘 속으로 던지라는 건 무슨 의미인가?

ㅡ여기서 샘은 이상 사회이자 이상 사회에 대한 인식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리고 맑은 눈길을 던짐으로써, 샘이 흐려지지 않는다는 걸로 봐서는, 맑은 눈길은 이상 사회에 대한 의심과 궁금증으로 보인다.

ㅡ만약 이 궁금증과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상사회에 대한 차라투스트라의 발언은 모두 착각이자 거짓이며, 이상사회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ㅡ즉 이 기쁨의 샘이라 불리던 것은 흐려지게 되는 것이다.

ㅡ따라서 맑은 눈길은 의심과 궁금증이라 할 수 있다.

 

샘은 왜 자신의 맑음으로 이들에게 웃어줄 거라고 하나?

ㅡ샘은 이상 사회를 말하고 있다.

ㅡ이상 사회에 맑은 눈길, 즉 의심과 궁금증을 던져도 차라투스트라의 샘이 흐려지지 않는다면, 그 샘은 사람들에게 이상사회에 대한 확신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ㅡ그리고 이것은 긍정적인 것이므로, 맑다고 표현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ㅡ정리한다면, "이상 사회에 대한 의심과 궁금증을 던져도, 확신할 수 있는 답을 줄 것"이란 이야기다.

 

미래라는 나무 위에 우리의 보금자리를 짓는다는 것은?

ㅡ’우리’의 보금자리라고 한다면, 이상 사회를 추구하는 자들이며, 그들의 보금자리는 그에 따라 이상 사회를 나타내게 된다.

ㅡ문장은 즉, 미래에 이상 사회를 구현하려고 할 거란 이야기다.

 

독수리는 무엇을 말하나?

ㅡ독수리는 긍지를 말한다; 「차라투스트라, 서문 10장」을 참고하자.

          그러자 보라! 독수리 한 마리가 커다란 원을 그리며 공중을 날고 있고, 뱀한 마리가

          독수리에 매달려 있었다.

          뱀이 독수리의 목을 휘감아서 지탱하고 있었기에 먹잇감이 아니라 여자친구처럼 보

          였다.

          "내 짐승들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태양 아래 가장 긍지 높은 짐승이고 태양 아래 가장 영리한 짐승인 내 짐승들이 뭔가

          를 살펴보려고 나온 것이다.

 

왜 독수리가 먹을 거리를 가져다줄까?

ㅡ미래에 이상 사회를 구현하려고 할 때, 그 과정이 녹록치 않다.

ㅡ무언가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비난과 고독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이상 사회를 구현하려는 의지가 사라질 수 있다.

 

ㅡ하지만 이때 성숙한 존재로서의 긍지, 이상 사회로 나아가려는 존재로서의 긍지가 이상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동력을 제공할 것이란 이야기다.

 

불결한 자들은 왜 독수리가 주는 먹거리를 함께 맛보면 왜 안 되나? 왜 그들의 주둥이는 불타고 있다고 느낄까?

ㅡ이상 사회를 구현하려는 자들에게 주는 먹거리란 결국 성숙함에 대한 긍지이자 이상 사회에 대한 긍지다.

ㅡ이 긍지가 있기에 사람들은 이상 사회 구현을 위해서 노력하게 된다.

 

ㅡ문제는 이러한 긍지, 이상 사회를 위한 노력은 불결한 자들, 부조리한 자들에게 자신들의 모습을 하찮은 존재의 모습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ㅡ따라서 그들은 이 긍지에 의해서 부정당하는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저렇게 표현한 듯하다.

 

ㅡ그리고 이상 사회를 바라고 노력하는 자들의 경우, 이상 사회를 긍정하며 끓어오르는 열의를 갖추고 있다.

ㅡ이것이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하게 하는 동력이다.

ㅡ반면 부조리한 자들은 이상사회를 긍정하지 않고 냉소적인 상태기 때문에, 축축한 심장이라고 불렸다.

ㅡ이런 자들에게 이상 사회를 위한 동력을 주면, 그들은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며, 너무 뜨겁고 열정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ㅡ이러한 점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왜 우리의 행복은 불결한 자들에게 얼음동굴일까?

ㅡ이상 사회에서 불결한 자들은 고독한 존재이자 배척당하는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거센 바람처럼 위에서 살고자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이에 대해서는 「차라투스트라, 1권 12장」의 구절을 보는 것이 좋다.

          내 벗이여, 그대의 고독으로 달아나라.

          내 보기에 그대는 독파리들에게 마구 쏘이고 있구나.

          달아나라, 거세고 강한 공기가 흐르는 그곳으로!

ㅡ이 구절에 따르면, 독파리들이 오지 못하는 곳이 거센 바람이 부는 곳이다.

ㅡ이 독파리들은 사회적인 존재들이면서 어리숙한 존재들을 말하는데, 지금 말하는 부조리한 자들/불결한 자들과 특징이 유사하다.

ㅡ따라서 거센 바람은 이런 부조리한 자들이 오지 못하는 곳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정리한다면, 이상 사회에서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독수리와 이웃하고, 눈과 이웃하고, 태양과 이웃하여 거센 바람으로 살고자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ㅡ우선 거센 바람으로 살고자 한다는 것은 후술되는 부조리한 자들의 정신의 숨결을 앗아가는 존재로서 살고 싶다는 것을 말한다.

ㅡ즉 이상 사회를 위해서 청소를 하는 존재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ㅡ이에 착안해서 독수리, 눈, 태양을 살펴보자.

 

ㅡ독수리는 긍지를 말하므로, 독수리와 이웃한다는 것은 긍지와 이웃한다는 것인데, 이는 긍지를 가지고 산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거센 바람이 부조리한 자들을 제거하는 게 목적이기에, 긍지를 가지고서 부조리한 자와 맞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ㅡ눈의 경우, 앞서 나왔던 우박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파괴자처럼 찾아들었던, 열매가 익어가는 들녘에 우박처럼 찾아들었던 여러 사

          람들.

          이들은 단지 자신의 발을 잡것의 입속으로 밀어 넣어 그 목구멍을 틀어막고자 했

          을 뿐이었다.

ㅡ즉 부조리한 자들을 파괴시키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ㅡ여기서의 눈을 앞서 말한 유월의 눈을 말하는 것이라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ㅡ유월의 눈은 개인에게 있어 절망이나 곤란하게 하던 문제를 일컬을 수 있는데, 지금은 부조리한 자들을 공격하는 눈을 의미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ㅡ태양의 경우, 정오의 태양보다는 「차라투스트라, 서문 1장」에서 언급되는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을 비추는 태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 서문 1장」에서 태양이 차라투스트라에게 올바른 인식을 하게끔 가르쳤다.

ㅡ그래서 이 태양을 이데아로 해석했는데, 여기서도 이 의미로 해석하는 게 맞아 보인다.

 

ㅡ이렇게 본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데아와 이웃한 채로 거센 바람이 되어 부조리한 자들을 쇠락시키려고 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떤 미래가 불결한 자들의 정신의 숨결을 빼앗으려고 하는가?

ㅡ이상사회가 불결한 자들의 정신을 쇠락케 하기를 바란다.

ㅡ왜냐면 이상 사회는 불결한 자들이 있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왜 바람을 거슬러 침을 뱉지 않도록 해야 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이 말을 하는 시점은 허튼 소리를 하는 사람들을 제거하려는 시점이다.

ㅡ따라서 해당 시점에 허튼 소리했다가 제거당할 것이라고 충고하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