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2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2권 4장 의역 (완) (사제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5. 25. 15:29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2권 4장 사제들


 
4장 개괄

 

 

4장은 종교에 대해서 비판하는 장이다.

앞서 「차라투스트라 1권 3장」과 「차라투스트라 1권 9장」, 「차라투스트라 1권 21장」에서도 종교에 대한 비판을 하긴 하였으나, 이번에는 좀 더 공격적으로 종교에 대해서 말한다.

 

사제들과 니체는 부조리에 고통받는 존재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하지만 방향성이 다른데, 니체는 고통과 맞서서 개선하라고 사람들에게 말한다면, 사제들은 고통을 견디라고 사람들에게 말한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에서부터 니체는 사제들을 비판한다.

 

그래서 사제들은 올바른 이해를 갖지 못한 동굴 속 존재로 비유된다.

또 현생에 대한 노력의 부재와 죽음에 대한 의지로 인하여 사제들은 죽음의 연못 속의 존재로 비유되게 된다.

 

또한 니체는 종교인들의 순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순교는 교리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는데, 과연 그것이 타당하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자유/구원을 원한다면, 종교에서 말하는 구세주가 아니라, 위버멘쉬적 존재를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본문

 

 

차라투스트라는 제자들에게 손짓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곳엔 사제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다툴 수 있으니, 지금은 조용히 지나갑시다.

 

     저들 중에도 용기와 헌신, 인내 등의 영웅적 자질을 갖춘 이들이 있습니다.

     저들 중에도 많은 이들이 사회적/종교적 규율에 의해서 많은 고통을 받았는데, 우리와 다르게 저들은 그것을 견뎌냈습니다.

     저들은 규율을 견디는 자신들의 삶의 방식이 가장 올바르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고통을 감수하게 하려고 합니다.

 

     저들은 우리와 대립하는 자들 중에서도 사악한 적들입니다.

     저들의 겸손은 위선과 우월감으로 이뤄져, 만약 자신들을 알아서 잘 존경하지 않는다면,

     복수를 하기 때문입니다.

 

     또 저들은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러한 겸손함은 여러모로 유용합니다.

     만약 그들이 누군가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받는다면, 그 사람을 ‘겸손한 자들을 공격하는

     질 나쁜 사람’으로 만들기 쉽기 때문입니다.

 

     저나 사제들이나 생각의 원천은 같습니다.

     모두 사람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합니다.

     다른 점이라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저는 고통에 맞서서 현생을 살라고 하지만,

     사제들은 현생의 고통을 견디면, 내세에서 구원될 것이라고 말한다는 점이죠.

     저는 제 생각이 그들에게도 존중받았으면 합니다.”

 

종교인들 사이를 지나는 차라투스트라

종교인들과 마찰을 피하며 조용히 걷고 있다.


 

사제들을 지나치자, 차라투스트라는 불편한 기색을 비췄다.

이내 곧 안정을 찾은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제들이 따르는 교리와 규율은 제 취향에 맞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사제들의 교리와 규율이 존중받고 있는 것을 보면, 저는 우울해집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렇게 심각한 문제를 지닌 건 아닙니다.

     교리를 따르는 이들은 고통을 견디는 활동만 하며 약간의 부조리를 허용할 뿐, 방종하면서

     온갖 부조리를 저지르려고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저나 사제들이나 사회의 부조리에 고통받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저들은 사회적/종교적 규율의 포로가 되었고 저는 사회적 규율로부터 자유의 몸이 되었죠.

 

     그들이 규율의 포로가 된 이유는

     그들의 구세주가 사회적/종교적 규율을 잘 따르고 견디면

     구원받게 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 저는 누군가가 저들을 저들의 구세주로부터 구원해주기를 바랍니다.

 

석상의 포로가 된 사제들

차라투스트라는 사제들이 종교적 규율에 묶여 자신의 행복을 찾아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부조리에 고통받으며 방황하던 그들은 정신적/심리적 안정을 위해서 종교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종교란 것은 그들 개인의 행복을 잃게 만들 괴물 같은 것입니다.

     이 종교의 교리와 규율에 따라 살아가면서,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억압하고, 그로 인해

     개인적 행복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올바른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동굴 속에 있는 것,

     이데아의 태양*을 벗어나 동굴로 들어가는 것

     이것이 종교이며, 그럴 수 있는 그들만의 동굴을 교회라고 말합니다.

*이데아는 참된 지식을 알려주는 기준을 제공한다.

 

     이들은 그릇된 인식을 올바르다고 여기며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인식이 되려 그릇된 것으로 여겨지고, 올바른 인식과 개인적인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것입니다.

 

     저들은 자신의 신앙심을 보이기 위해서 이렇게 주문합니다.

         "죄인들이여, 무릎을 꿇고 계단을 올라가라!”

 

     신앙을 위해 하는 무의미한 행위와 규율들을 보느니, 수치심이 없는 사람*의 행위와 규율이

     더 나아 보입니다.

     신앙을 위해 하는 이 행위들이 실제로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까?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사회에서 말하는 수치심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이런 종교와 교회, 무의미한 교리들을 만든 것일까요?

     이것을 만든 자들은 현생을 부정적으로 보며 현생에서의 노력을 포기한 이들 아닙니까?

     현생에서 이상사회를 그려낼 수 없었던 이들이 그런 것 아닙니까?

 

     종교가 내세가 아닌 현생에 희망을 가지고 이상사회를 위해서 나아가려 한다면,

     또 이상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 노력한 자들의 희생을 의미있게 살피며 기린다면,

     그렇다면 저는 다시 종교로 마음을 돌릴 것입니다.

 

동굴 속에서 살아가는 종교인들

교리를 통해서 사제들은 올바른 인식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며,

차라투스트라는 이들을 동굴 속의 존재들로 표현했다.


 

     사제들이 따르는 신과 그 교리는 사제들 자신과 모순되는 것, 즉 인간적이지 않은 것들입니다.

     신과 그 교리는 현생에서의 개인적 행복이 아닌 내세의 행복을 바라게 했고, 이로써 현생의 고통을 견디고, 본성을 억압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제들이 신을 따르는 모습을 보면, 고통을 견디려는 용기와 희생이 많이 보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고통 속에 두어, 그 고통을 견디게는 것 외에는 신을 따르는 방법을 모르는 것입니다.

 

     사제들은 자신들의 모습과 말을 통해서 ‘현생에서의 죽음’을 지향하는 자신들의 의지를 표현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통을 견디려고 하며, 죽었음을 상징하는 검은 옷을 입고 다닙니다.

     그리고 그들은 현생에서 고통을 견디고 내세를 찬양하고 바라는 설교를 하고 그러한 노래를 부릅니다.

 

     이러한 저들의 모습은 죽음의 연못에 사는 두꺼비가 감미로우면서도 우울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을 따르는 자들은 이들 근처에 자리 잡은 사람들이구요.

 

     만약 사제들이 저를 자신들의 종교에 귀의하게 하려고 한다면,

     저들은 내세를 찬양하는 노래가 아닌 현생에서 노력하는 것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저들의 구원자를 따르던 제자*들이 고통 속에서 살다 죽는 것이 아닌,

     구원자를 따라 나아가서 구원자보다 더 행복한 모습을 맞이하는 것을 제게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의 열두 제자를 말한다.

 

     아름답고 이상적인 것을 본 사람은 사람들을 이끌 자격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름답고 이상적인 곳으로 사람들을 데려갈 테니까요.

 

     그런데 사제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세상에서 슬픔과 고통만을 보지 않았습니까?

     이런 그들이 사람들을 데려간다면, 아름답고 이상적인 곳으로 데려갈 수 있을까요?

 

     그들의 구세주는 현생이 아닌 내세에서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현생에서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 아름다고 이상적인 현생을 목격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의 구세주는 이 세상을 긍정할 수 있는 깨달음을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입니다.

 

     종교의 구세주들의 가르침은 빈틈이 많습니다.

     하지만 사제들이 그들의 궤변을 통해서 빈틈을 메웠고, 그것을 신이라고 불렀습니다*.

*구세주들이 신의 아들이라고 해야 믿고 따를 만한 정통성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검은 연못 주변에 모인 검은 사제들

사제들과 교회는 죽음과 내세에 대한 자신들의 의지를 드러내기 위해 검은 복장을 하고 있다.


 

     동정을 중시하며 사제들의 정신은 망가졌고,

     동정을 통해 고양될 때면, 늘 큰 어리석음이 그들에게 자리했습니다.

 

     사제들은 사람들에게 내세가 부조리한 현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유일한 희망인 양 설교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제들도 내세가 유일한 희망인지 아닌지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그저 그들도 그렇게 교육받았던 사람들이기에, 사람들에게 교육하는 것일 뿐이니까요.

 

     사제들은 자신들이 무엇이 옳은지는 잘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저들의 열정만큼은 대단했습니다.

 

     종종 그들은 교리의 진정성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죽음 앞에서도 교리의 올바름을 외쳤다는 것, 이것은 그 교리가 올바르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만약 교리가 그릇된 것이라면 그 교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지는 않았을 거란 것이죠.

 

     하지만 이와 같은 희생을 증명의 수단으로서 삼는다면, 그것은 올바르지 못합니다.

     교리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순수한 의도를 담은 가르침조차 왜곡하여,

     사람들이 망상하고 박해자들에게 증오하게끔 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자신의 가르침을 위해서 희생한다면, 예를 들어 불길 위를 지나간다면,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게 과연 무엇입니까?

     불길 위를 지나가는 것이 그가 믿는 가르침이 진리라는 것에 대해서 어떤 증명을 해주냐는 겁니다.

      차라리 자신안의 불,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불만과 분노에서 나타난 가르침이 훨씬 더 나아 보입니다.

불길 위를 걸어가는 사제

진리임을 증명하는 데에, 이러한 희생은 과연 어떤 근거로 자리할 수 있는지

차라투스트라는 의문을 갖는다.


 

     절망적인 세상에 대한 답답한 마음과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하는 차가운 머리,

     이 두 가지가 만나서, 구세주가 생겨납니다.

     절망적인 세상에서 사람들을 구원하고 싶으니까요.

 

     하지만 사람들이 구세주라고 부르는 자들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고귀한 자들/위버멘쉬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현생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진정한 자유에 이르고자 한다면,

     세상에 알려진 구세주들이 아니라, 이 위대한 자들을 따라 구원되어야 합니다.

 

     제가 봤을 때, 구세주라 불리는 자들 중에 위버멘쉬는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위대하다고 불리는 구세주/성자들을 살펴봐도, 그들은 어리숙한 인간의 특징을 보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황폐해진 세상을 두고 절망하는 사내

차라투스트라는 절망적인 현생을 목격한 이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구세주가 되었다고 말한다.


생각해볼 거리들

 

저들 중에도 영웅이 있다고 하는데, 어떤 의미인가?

ㅡ영웅이라고 한다면, 어떤 숭고한 목적을 두고서 용감하고 헌신하며 인내하는 존재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ㅡ이에 따라서 보면, 사제들 중에도 신앙을 목적으로 두고서 용감하고 헌신하며 인내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사제들은 고통을 당해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려고 한다는데, 그들이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이유는 남을 괴롭히고 싶어서인가?

ㅡ고통을 주고 싶어서 그런다기 보다는 고통을 견디면서 사는 것이 현생을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여기기 때문으로 보인다.

ㅡ즉 그들이 생각하기에 더 수준 높은 인간이란 고통을 견딜 줄 아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견디게끔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ㅡ관련해서는 「유고 (1882년 7월~1883/84 겨울)」 의 두 구절을 살펴봐도 좋을 듯하다.

          7[99]

          비탄 속에서 ‘더 높은 이성’이란 인간이 고통을 의연히 심화시키는 것이며,

          그가 너무 빨리 고통에서 도피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수록 인간은 더 높은 힘을 끌어온다.

 

          8[12]

          격세유전:지금 한 번 무조건 순종할 수 있다는 환희에 찬 감정.

             “너는 착취받고, 훔침을 당하고, 기만당해야 한다”

          —가톨릭 성직자 국가의 근본 감정,

          특히 예수회에서는 완벽하다.

          지성을 희생한다는 것은 태고의 것이며 근원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생이라고 느껴지지 않고, 그 반대가 고통으로 느껴진다.

ㅡ각각의 구절은 고통을 겪는 것이 성숙한 존재로서 인식된다는 점을 나타낸다.

 

왜 저들의 겸손은 복수욕에 불타게 하는가?

ㅡ글의 흐름상 사제들은 실제로 겸손하지 않음에도 겸손한 모습을 보인다.

ㅡ그런데 누군가 자신들을 알아서 잘 존중하지 않는다면, 겸손하지 않은 속내에 따라 그 사람에게 자신을 존중하지 않음에 대한 벌을 내리려고 한다는 것을 말한다.

ㅡ이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저들을 공격하는 자는 자신을 더럽히기 쉬울까?

ㅡ저들은 겸손한 자로, 저들을 공격하는 자는 겸손한 자를 공격하는 자가 된다.

ㅡ겸손한 사람은 남에게 공격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존재로 인식되기 때문에, 겸손한 자를 공격한 자는 질이 나쁜 공격적인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다.

ㅡ즉 평판이 나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왜 내 피는 저들의 피와 닮았다고 이야기를 하나?

ㅡ피는 ‘생각’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 1권 7장」의 피로 쓴 글이란 표현에서 피가 ‘생각’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ㅡ이에 따라 해석하면, 차라투스트라의 생각과 저들의 생각이 닮았다고 말하는 구절이 된다.

 

ㅡ그럼 왜 서로의 생각이 닮았다고 말할까?

ㅡ차라투스트라나 사제들의 생각이 공통적으로 고통에서 사람들을 벗어나게 하고 싶어하기에 닮았다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

ㅡ그러나 그 방법이 다른데, 차라투스트라는 고통과 맞서고 현생을 살라고 하는 반면, 사제들은 현생의 고통을 견디면 내세에서 구원받는다고 한다.

ㅡ이러한 입장 차이에 대해서, 차라투스트라는 사제들에게 존중받을 수 있을지 알고 싶어하는 것 같다.

 

차라투스트라가 사제들 옆을 지나갈 때 왜 고통이 덮쳤을까?

ㅡ사제들을 보면서, 불편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ㅡ왜냐면 사제들의 존재는 그들의 그릇된 교리와 규율의 융성함을 보여주는데, 이는 차라투스트라에게 달가운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사제들의 어떤 취향이 거슬리는 것인가?

ㅡ사제들이 따르는 교리와 규율이 차라투스트라의 취향에 거슬린 것으로 보인다.

 

왜 사제들의 교리와 규율은 겪었던 일 중 사소한 일이 되나?

ㅡ종교적 규율에 따라 사는 것은 그나마 사회적으로 좀 더 문제가 없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예컨대, 방종하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ㅡ즉 방종하는 자들보다는 부조리를 덜 저지른다는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와 사제는 무슨 고통을 같이 받았고 여전히 받고 있나?

ㅡ차라투스트라 자신이나 사제들이나 사회의 부조리로부터 고통받고 있다는 의미로 보인다.

 

사제들을 휩쓰는 바다는 무엇인가?

ㅡ사제들이 어떤 상황에 휩쓸렸다가 종교에 귀의하게 되는 상황을 나타내는데, 이에 따라서 보면, 부조리에 따른 혼란이 아닐까 싶다.

 

잠든 괴물은 무엇인가?

ㅡ 사제들의 귀의한 곳이므로 종교를 나타낸다.

 

거짓 가치와 미친 말은 왜 사멸하는 인간에게 고약한가?

ㅡ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사멸하는 인간은 현생에 집중해야 하는데, 거짓 가치와 미친 말이 이를 방해하므로 고약하다고 말한다.

ㅡ여기서 거짓 가치는 내세와 부조리를 견디는 것, 또 동정하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며, 미친 말은 이러한 거짓 가치를 따르라는 말로 보인다.

 

날조된 빛과 후텁지근한 공기는 무엇인가?

ㅡ날조된 빛은 그릇된 것이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것을 말한다.

ㅡ후텁지근한 공기는 답답한/숨막히는 공기를 말한다.

ㅡ이는 교회에서 그릇된 것을 올바르다고 여기면서 따르고 있기에 답답하다고 표현한 것 같다.

 

영혼의 드높은 비상은 무엇을 말하나?

ㅡ 비상은 중력을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ㅡ 중력은 사회적/종교적 규율로 비유되므로, 비상은 사회적/종교적 규율을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ㅡ 해석과 관련해서 「차라투스트라 1권 7장」을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중력의 정신으로 인해 모든 것이 아래로 떨어져 버린다.

               (중략)

          나는 걷는 법을 배웠다.

          그 후로 나는 줄곧 달린다.

          나는 나는 법을 배웠다.

          그 후로 나는 움직이기 위해 먼저 부딪치는 일을 하지 않는다.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 이는 성계단Scala Sancta을 말하는데, 참회를 위해서 무릎꿇고 계단을 오르는 것이다.

ㅡ 여기서 차라투스트라가 말하고자 한 것은, 신앙을 위해 하는 무릎 꿇고 계단을 오르는 행위의 부질없음인 듯하다.

ㅡ즉 ‘신앙심과 무릎꿇고 오르는 계단은 무슨 상관이 있냐’는 것이다.

 

수치와 경건의 사팔뜨기 눈은 무엇인가? 왜 파렴치한에게 눈길을 주나?

ㅡ 종교에서 말하는 수치와 경건은 실제로 별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 즉 이상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ㅡ 계단을 무릎꿇고 오르는 것과 신앙심이 대체 무슨 관련이 있냐는 이야기인 것이다.

ㅡ 그런 면에서, 파렴치한이 자신을 위해 하는 행위가 오히려 더 의미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동굴과 참회의 계단을 만든 자들, 자신을 숨기고자 했던 자들, 맑은 하늘을 부끄러워하던 자들은 누구인가?

ㅡ 맑은 하늘은 후술되는 문장으로 볼 때, 이상 사회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ㅡ 왜냐면 맑은 하늘이 교회의 무너짐을 통해서 드러날 때, 차라투스트라가 교회로 마음을 돌릴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ㅡ 그런 면에서 맑은 하늘을 부끄러워하는 자들은 이상 사회를 긍정하지 못하던 이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무너진 벽과 붉은 양귀비는 무엇을 말하나?

ㅡ무너진 벽은 교회의 벽이 무너진 것으로, 그릇된 규율이 부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ㅡ붉은 양귀비는 희생을 말하므로, 이상사회를 위해서 희생한 자를 말하지 않나 싶다.

ㅡ 따라서 무너진 벽 주변의 풀과 양귀비를 굽어보는 것은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한 자들의 희생을 종교가 살핀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왜 신은 사제들과 모순되고 고통을 주는 존재인가?

ㅡ신은 개인적 행복을 추구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과 다르다.

ㅡ그렇기에 신은 사제들의 본성과 모순되며 충돌하는 존재가 된다.

ㅡ본성을 억압하고, 부조리를 견디게 하므로, 신은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로 인식된다.

 

그 사람을 십자가에 매다는 것이란 무얼 말하나?

ㅡ여기서 그 사람이라 표현되지만, 단순히 사람이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해 보인다.

ㅡ즉 사제들은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것 말고는,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견디게 하는 것 말고는 신을 따르는 법을 몰랐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왜 두꺼비의 감미롭고 우울한 노래가 들려오는 검은 연못 이야기가 나오나?

ㅡ사제들의 모습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보기 때문에, 두꺼비 이야기가 나오는 듯하다.

ㅡ왜냐면 사제들은 내면에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보다는 슬픔/비탄에 대한 인식이 있다고 후술되기 때문이다.

 

ㅡ감미롭고 우울한 노래는 현생의 부조리/고통에 대한 우울한 이야기라고 보인다.

 

ㅡ검은 연못은 사제들이 현생에서의 죽음을 지향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왜 구원자의 제자들이 더 구원받은 자들처럼 보여야 한다고 하나?

ㅡ기독교의 제자들의 삶이 구원받지 못한 채 고통 속에서 살다가 죽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ㅡ제자들은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거나, 참수당하거나, 못박혀 죽었다.

ㅡ「유고 (1882년 7월~1883/84 겨울)」의 구절을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14. 순교자의 제자는 순교자보다 더 많은 고통을 받는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사제들의 발가벗은 모습을 보고 싶어하나? 왜 아름다움만이 참회를 설교해야 한다고 하나?

ㅡ사람들을 설교하는 것은 사람들을 이끌기 위함이다.

ㅡ그런 면에서 이끌려고 한다면, 이상적인 것/아름다운 것을 본 사람이 이끌어야 이끌려 가는 것에 의미가 있을 것이다.

ㅡ하지만 사제들의 경우, 현생에서 이상적인 것/아름다운 것을 보지 못한 존재들로, 그들은 현생에서 슬픔만을 목격했고, 그래서 죽음을 자처하며, 내세를 사람들에게 설교하게 된다.

ㅡ그런데 문제는 내세라는 게 존재하는지, 아름다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오히려 허구에 가깝다는 것이다.

ㅡ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저들은 설교를 할 만한 사람들인지 알고 싶어하는 것이다.

ㅡ물론 이미 사제들이 현생에서의 슬픔만을 알고, 내세로 사람들을 이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일곱번째 천국은 무엇을 말하나

ㅡ 유대교나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천국의 단계를 말하는데, 여기선 어떤 의미를 지닌다고 하기 어렵고, 그저 단순히 이상세계/천국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그저 수사적 표현이라 보인다.

 

저들의 구원자는 왜 자유로부터 오지 않았다고 하는가? 저들의 구원자는 왜 깨달음의 융단을 걸어본 적이 없나?

ㅡ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저들은 현생에서의 자유를 제공하지 않고, 오히려 내세의 구원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ㅡ진정 깨달음을 얻었다면, 현생에서의 자유를 제공할 것이라고 차라투스트라는 생각하는 것이다.

 

사제들이 구원자의 정신의 틈새를 망상으로 채워 넣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ㅡ교리를 형성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ㅡ즉 큰 틀은 구원자가 제시했다면, 애매한 부분들을 사제들이 궤변으로 채웠고, 그것이 교리가 된 것이다.

 

동정으로 부풀어 오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ㅡ동정을 행하고 그에 따라서 고양된다는 것 같다.

 

동정은 왜 어리석음이 감도나?

ㅡ동정은 일시적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은 되지만, 스트레스를 원천적으로 제거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동정에 따른 안도는 바보같은 행동인 것이다.

 

좁은 판자 다리는 무엇이길래 미래로 이어지는 다리로 인식되는가?

ㅡ여기서 미래로 이어지는 다리라는 것은 희망이 있는 다리라는 의미로 보인다.

ㅡ미래가 이 다리를 통해서만 이어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ㅡ 미래가 이어지는 게 희망인 이유는, 미래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절망스러운 일이고, 미래가 이어진다는 것은 희망스러운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ㅡ사제들이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희망은 내세이다.

ㅡ 따라서 사제들이 사람들을 몰아가는 저 다리는 현생을 포기하고 내세로 향하는 다리라고 할 수 있다.

 

작은 정신을 지니면서 광대한 영혼을 지닌 목자는 누구인가? 사제인가? 구원자인가?

ㅡ사제를 말한다.

 

왜 사제의 정신은 작고 영혼은 광대한가?

ㅡ정신이 작다는 것은 올바른 인식을 하기 어렵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영혼이 광대하다는 것은 열의를 지녔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 즉 올바르지 못한 것에 열의를 가지고 행동했다는 말로 볼 수 있을 듯하다.

ㅡ 이러한 문맥에 따라서, 올바르지 못한 교리를 두고서 열심히 노력하는, 즉 순교하는 것과 관련한 문장들이 나오는 듯하다.

 

핏자국은 무엇을 말하나?

ㅡ교리에 따르는 희생을 말하는 것, 순교로 보인다.

 

피를 통해서 진리를 증명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ㅡ사제들이 교리의 진정성을 알리기 위해 순교함으로써, 진리로 판명되는 것이라는 점을 말한다.

 

피는 왜 진리에 대한 최악의 중인인가?

ㅡ교리를 위해서 순교하는 것이 교리가 진리임을 증명하는 데에 있어서 최악이란 이야기다.

ㅡ왜냐면, 순교는 교리가 진리임을 나타내는데 아무런 근거가 되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ㅡ 이와 관련 「안티크리스트, 서문」의 구절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53.

          —순교자가 어떤 사태의 진실에 관해 무언가를 보여준다는 것은, 순교자가 한 번이

          라도 진실과 관계를 맺은 적이 있다는 것을 부정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진실과는 거

          리가 있다.

          자기가-참으로-간주하는 것을 세상에 대놓고 말해대는 순교자의 어조에는 저급한 지적

          성실성과 진리 문제에 대한 둔감함이 이미 표현되고 있다.

               (중략)

          —덧붙여 말하자면 순교자의 죽음은 역사상 큰 불운이었다

          :그것은 유혹해왔던 것이다

          ……여자와 대중도 포함해서 모든 백치의 추론은 이렇다.

          즉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또는 초대 그리스도교처럼 치명적인 전염병을

          발생시킨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무언가 중요하다.

               (중략)

          모든 박해자들의 세계사적 우매함은 바로 그들이 자기들의 적대자에게 명예로운

          모습을 부여했다는 데 있다

          —그들에게 순교의 매력을 선사했다는 데 있다.

          ……여자는 오늘날에도 어떤 오류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누군가가 그 오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이야기되기 때문이다.

 

피는 왜 순수한 가르침도 심장의 망상과 증오로 오염시키나?

ㅡ오염시킨다는 표현은 vergiften의 번역어인데, 오염시킨다는 표현 보다는 손상시킨다로 보는 편이 나아 보인다.

ㅡ즉 교리를 위한 희생, 즉 순교는 순수했던 가르침의 목적을 왜곡하여, 사람들이 망상하고 증오하게 한다는 이야기다.

ㅡ 이와 관련 「안티크리스트, 서문」의 구절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이런 추론은 검증에 대해서는, 검증하고 신중한 정신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장애물이 되어왔다.

          순교자는 진리에 해를 입혔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자체로서는 보잘것없는 종파일지라도 명예로운 이름을

          얻으려면, 조잡한 박해라도 박해만 있으면 된다.

          —뭐라고? 어떤 것을 위해 누군가가 목숨을 버리면, 그것의 가치가 뭔가 달라진다고?

               (중략)

          모든 박해자들의 세계사적 우매함은 바로 그들이 자기들의 적대자에게 명예로운 모습을

          부여했다는 데 있다

          —그들에게 순교의 매력을 선사했다는 데 있다

          ……여자는 오늘날에도 어떤 오류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누군가가 그 오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이야기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타오르는 불길은 무엇을 말하나?

ㅡ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나 불만으로 보인다.

 

왜 후덥지근한 심장과 머리에서 구원자가 나오나?

ㅡ 후텁지근함은 Schwül인데, 이 단어는 열감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숨막힘/답답함 등을 나타내기도 한다.

ㅡ해석을 위해서는 후자를 통해서 보는게 맞아 보인다.

ㅡ이에 따라서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절망적인 마음/답답함을 해결하고자 할 때, 구원자적 생각이 몰아친다"는 의미로 볼 수 있을 듯하다.

 

훨씬 더 위대하고 고귀한 자들은 위버멘쉬가 아닌가?

ㅡ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진정한 자유로 우리를 이끄는 존재, 위대한 자’는 위버멘쉬적 인물이 맞다.

ㅡ 관련해서는 밑의 해석에서 이야기를 더 하도록 하겠다.

 

왜 구원자들보다 위대한 자들에게 구원받아야 하나?

ㅡ진정한 삶의 자유에 이르려면, 현세상에 절망할 것이 아니라 현세상에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

ㅡ대체로 구원자들은 현세상에 절망하여 나타났고, 더 위대한 자들은 현세상에서 희망을 찾아낸다.

ㅡ그런 점에서 더 위대한 자들에게서 구원받아야 하는 것이다.

 

위버멘쉬는 존재한 적이 없나? 말미의 이 말은 무슨 말로 보아야 하나?

ㅡ이는 위버멘쉬적 존재가 존재하지 않았다기 보다는 종교적 인물 중에서 위버멘쉬가 없었다는 이야기로 보인다.

 

ㅡ이에 대해서는 두 관점에서 접근이 가능하다.

ㅡ하나는 위버멘쉬적 존재에 대해서 니체가 존재했었음을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ㅡ이에 대해서는 「안티크리스트, 서문」을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지상의 서로 다른 여러 곳에서, 서로 다른 여러 문화에서 좀더 높은 유형은 실제로

          제시되어왔다

          :인류 전체와 비교해서는 일종의 위버멘쉬인 유형이.

 

ㅡ다른 하나는 후술되는 내용이 종교적 존재에 대한 내용이라는 점이다.

ㅡ차라투스트라가 말하고 긍정하는 사람은 왜소한 자들과 다른 존재다.

ㅡ이와 관련해서는 「차라투스트라, 1권 12장」을 살피면 좋지만, 관련 구절만 몇 개 본다면, 다음과 같다.

          그대의 성품이 너그럽고 올곧아서 "저들이 왜소하게 사는 것이 저들 탓은 아니지"라고 하면,

          저들의 옹색한 영혼은 "모든 위대한 존재의 탓"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그대 앞에서 저들은 왜소하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저들의 비열함이 그대를 향해 희미하게 타오르든지 활활 타오르든지

          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복수로서 말이다.

               (중략)

          그렇다, 내 벗이여, 그대는 그대의 이웃에게는 악한 양심이다.

          저들이 그대에게는 가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인데,

          바로 그렇기에 저들은 그대를 미워하고 기꺼이 그대의 피를 빨려고 하는 것이다.

 

          그대의 이웃은 늘 독파리일 것이다.

          그대의 위대한 점, 바로 그것이 그들을 더욱 유독하게 만들고 더욱 파리답게 만드니.

ㅡ그런데 현 시점에서는 위대한 자가 왜소한 자들과 같은 존재라고 취급하므로, 차라투스트라가 긍정하는 인물이 아닌, 차라투스트라가 부정하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ㅡ 그런 면에서 종교적 인물, 사회적 인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ㅡ따라서 이 둘에 따르면, 종교적으로 위버멘쉬적 존재/상술한 위대한 자는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 역시 위버멘쉬적 인물인데, 이에 대해서는 「이 사람을 보라,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를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선한 인간의, ‘최고의 인간’의 인식이야말로 그를 인간에 대해 경악하게

          만들었던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런 혐오로 인해 그에게는 ‘먼 미래로 계속 날아오르는’ 날개가 생겨났다고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숨기지 않는다.

          자기 같은 유형, 비교적 위버멘쉬적인 유형이 선한 인간과 비교하면 바로 위버멘쉬라는

          점을.

          선한 인간과 정의로운 인간들은 자기의 위버멘쉬를 악마라고 부르게 될 것이라는 점을……

 

왜 위대한 자들마저 너무나 인간적인가?

ㅡ여기서 말하는 인간적이라는 표현은, 볼이 빨간 짐승과 같다는 의미로 봐야 한다.

ㅡ왜냐면 여기서 말하는 위대한 자는 앞서 말한 것처럼 "더 위대한 자, 사람들을 자유로 이끄는 자"가 아닌 사회적으로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ㅡ 이러한 점에 따라서, 사회적으로 위대하다 여겨지는 자들의 본성은 어리숙한 인간과 같은 수준의 내면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