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2권 5장 덕 있는 자들
5장 개괄
5장은 미덕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 장이다.
그래서 미덕을 갖춤에 따라 보상을 바라는 게 적절한지, 미덕을 추구하면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보여하는지를 논한다.
또한 사람들이 말하는 미덕을 살피면서, 그 미덕들이 과연 미덕이 맞는지 물으며, 니체는 사람들이 말하는 미덕은 올바르지 못하다고 이야기를 한다.
물론 이에 대한 근거는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기에, 글의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니체는 미덕에 대해서, ‘나다움’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개인적 호오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 미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니체의 입장은 ‘방종’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 같다.
본문
올바름에 대해서 둔감한 사람들에게는 강하고 세게 말해주어야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하지만 성숙함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자신이 말할 대상을 아는 사람이라면,
사람들 앞에서 강하고 세게 말하지 않고, 조용히 말합니다.
그렇게 말해도, 올바른 이해를 가지려 하는 사람들에게는 잘 전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미덕을 갖췄다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갖춘 미덕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어 하더군요.
저는 그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있지만 말을 아끼고 그저 조용히 웃었습니다.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어리숙한 것 같습니다.
미덕을 갖추면서도 아직 보상을 바란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미덕을 갖췄다는 이들은 미덕을 갖춘 보상으로 구원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전에 제가 신은 죽었다고 말하면서, 그들에게 보상할 자를 없다는 듯이 이야기를 했죠.
그래서 그들은 제게 화를 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저는 미덕을 갖춘다고 구원받는다고 이야기는 한 적이 없습니다.
화를 내려면, 제가 아니라 미덕을 갖추면 구원받는다고 말한 이에게 내야 하지 않을까요?
아름다움이라는 방패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머무른 채로 올바른 이해를 나누기 위해,
아름다움이라는 방패를 들고 사람들과 교류한다.
미덕을 갖추는 것을 두고, 어떻게든 보상을 받으려고 하는 모습은 저를 슬프게 합니다.
사람들은 특정 행동에 대해서 처벌하기도 하고 보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미덕을 갖췄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보상과 처벌이 주어진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멧돼지의 주둥이처럼, 여러분의 이러한 인식을 갈아 엎을 것입니다.
저를 쟁기날이라 부르길 바랍니다.
미덕에 대한 진실은 바로 이것입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사랑할 때 보상을 바라지 않듯이, 우리가 미덕을 갖추려 할 때, 보상을 바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추구할 미덕은 여러분에 대해서 알려주는 신체적 반응, 즉 여러분의 개인적 호오를 따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내면에는 나답기 위한 갈망이 있고, 그것을 위해서 노력하게 됩니다.
순간 나다워지는 시점이 오기도 하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다시 또 나다워져야 하는 순간들의 연속입니다.
여러분이 나다워지기 위해 노력했고, 그래서 성취했다면,
미덕을 갖춘 존재로서 빛이 나겠지만, 그 빛은 또 금새 사라집니다.
다시금 새로 미덕적인 모습을 보여야 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니까요.
하지만, 여러분은 순간 미덕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을 가지고 영원히 미덕을 갖춘 존재처럼 자신을 인식합니다.
언제까지 자신을 그렇게 인식하려고 합니까?
언제까지 과거의 명예를 누리려고 하시는 겁니까?
미덕의 목적은 나다워지려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답지 못한 것들, 내가 진정으로 기뻐하지 못하는 것들, 나를 치장해주는 것들은 미덕이 아닙니다.
이것이 미덕에 대한 진실입니다.
땅을 갈아엎는 쟁기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의 미덕에 대한 인식을 갈아 엎고자 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미덕에 대해서 살펴볼까요?
사람들 중에는 부조리나 불의의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을 미덕이라고 합니다.
이는 아마 자주 들어봤을 만한 것일 겁니다.
또 이기적이지 않는 것, 즉 이타적인 것을 미덕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기심이 사라지면, 그래서 미워하거나 질투하는 것이 사라지면, 사회는 평화로워지는데, 이것이 올바르다는 겁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에 대해서 건강한 이기심을 가지라고 말한다; 1권 22장 2절.
사회의 부조리에 의해 절망 속으로 끌려가는 이들은 절망하면 할수록,
그들은 신을 바라고 갈망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봅니다.
아 미덕을 갖췄다고 말하는 이들이여,
여러분은 “개인적 행복을 버리는 것이 미덕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지 않았습니까?
사람들 중에는 고행하는 이들, 힘겨운 삶을 자처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봉사하는데 열중하거나 헌신하면서 사는 것 사는 것이 미덕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이들은 자신을 선민으로서 인식하고 사람들과 대화하곤 합니다.
사회적 규율에 순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사회적 규율에 순종하는 것을 미덕이라고 평가해 주길 바랍니다.
저는 이러한 사람들에게서 재미를 느낍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들이 따르는 사회적 규율과 가치의 오류에 대해서 말하면, 그 반응이 재밌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중에서 몇몇은 더 생각을 듣고자 하겠지만요.
또 어떤 이들은 정의를 지키겠다며,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로 인해서 세상은 불의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면, 이들의 태도에 따르면, 정의에 따르는 사람보다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에 따르면, 본래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과 정의를 구현하려고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이 있다는 건데, 결국 정의로운 행동을 하는 사람보다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이 많다는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자신들을 두고 뻔뻔하게 “나는 정의로운 사람이야” 라고 말하는데,
이건 정의로운 게 아니라, 그저 불의를 저지르기 위한 수단으로 정의구현을 하는 것으로만 보일 뿐입니다.
이들은 정의 구현이란 이름으로 대상에게 악행을 저지르지 않습니까?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
누군가는 불의와 부조리를 견디는 사람들은 불의와 부조리를 겪고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곤 하는데, 이것을 미덕이라고 여깁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미덕을 갖춘 사람은 예배에 잘 참석하거나, 잘 기도드린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행동만 할 뿐, 어떤 예배 참석과 기도에 진심이 전혀 담겨 있지 않죠.
어떤 이들은 사회적 규율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즉 사회적 규율이 없다면, 사회에 여러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실리를 추구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이상적인 것은 추구할 수도 구현할 수도 없으니, 실리에 따라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죠.
그러면서 부조리를 허용하는데, 이를 미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교양 있는 사람, 선량한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인정받게 해주는 것이 미덕이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이는 인식의 전환/기존 규율을 전복시키는 것이 미덕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름의 덕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만의 선악을 갖추고 있는, 미덕에 정통한 자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미덕 전문가들
미덕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가 전문가라고 선보이고 있다.
제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미덕에 대한 이들의 입장이 오류이자 거짓이라는 점을 말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저 각각의 입장들에 대해서 여러분이 진부하게 느끼길, 그래서 더 나은 새로운 입장으로 나아가게 하고 싶어서입니다.
미덕이 보상을 준다는 것,
보복하고 벌하는 것이 미덕이라는 것,
정의를 위한 불의가 미덕이라는 것,
이타심이 미덕이라는 것을 진부하게 느껴 벗어나도록 말입니다.
벗들이여,
아이의 내면에 자신의 어머니에게 영향 받은 면이 있듯이
여러분의 행위 속에 신체적 반응/개인적 호오이 여러분에게 반영되어져 있다는 것을 부디 알아차리길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의 미덕에 대한 생각을 빼앗으려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제게 화를 내려고 하겠죠.
어쩌면 지금의 저는 아이에게서 늘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빼앗은 파도와 같을 겁니다.
아이가 바닷가에서 장난감을 가지고서 놀고 있었는데, 파도가 장난감을 빼앗아 간 것이죠.
장난감을 뺏긴 아이는 화를 내기도 하고 울기도 할 겁니다.
이때 파도가 아이에게 새로운 장난감을 준다면, 아이는 위로 받을 것입니다.
벗들이여,
저도 미덕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빼앗아 간 것이나 다름이 없지만,
저는 여러분에게 미덕에 대한 새롭고 올바른 생각을 나눠 줄 것입니다.
이게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바닷가의 아이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파도로 비유하며,
벗들의 장난감을 가져가고, 새로운 장난감을 주겠다고 이야기 한다.
생각해볼 거리들
맥 빠지고 잠에 빠진 감각이란?
ㅡ「차라투스트라, 1권 2장」에서 잠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여기서 잠은 사회적 규율을 말한다.
ㅡ이 개념이 여기서도 쓰인다면, 사회적 규율에 빠진 존재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ㅡ사회적 규율에 빠진 존재는 올바름에 둔감해진 상태로도 볼 수 있다.
ㅡ이후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을 지적하는데, 그때 덕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없는 상태를 지적하므로, 이러한 해석이 적절해 보인다.
왜 둔감해진 감각에게는 천둥과 불꽃으로 말해야 하나?
ㅡ사람들이 올바름에 대해서 둔감한 상태이기에, 그냥 올바른 것에 대해서 말한다면, 사람들은 집중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ㅡ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들에게 강하고 세게 말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저런 표현을 쓴 것 같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ㅡ「차라투스트라, 2권 4장」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사제들 안에는 아름다움이 없고 비탄만 있다고 말한다.
나는 저들의 발가벗은 모습을 보고 싶다.
오로지 아름다움만이 참회를 설교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탄이 위장을 하고 있는 그런 모습으로 대체 누구를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ㅡ지금의 문장에서의 아름다움은 「차라투스트라, 2권 4장」에서 말하는 내면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이 아닐까 싶다.
ㅡ그렇다면 참회를 설교할 만한는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ㅡ사제들 안에 아름다움이 없는 이유는 그들이 세상에서 슬픔만 목격했을 뿐, 세상에서 희망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ㅡ만약 그들이 희망을 목격했다면, 그들의 내면에는 아름다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ㅡ따라서 아름다움이란 세상에서 희망을 본 사람이 갖는 충만한/희망적인 상태라고 볼 수도 있다.
ㅡ그런데 사제들이 세상에서 슬픔만 본 이유는 세상의 부조리를 개선할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세상에서 희망을 본 사람이라면, 세상의 부조리를 개선할 수 있다고 전망하는 사람이 된다.
ㅡ그리고 이러한 상태의 사람은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사람이고, 이상 사회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ㅡ즉 이상사회를 추구하는 사람의 내면에는 아름다움이 충만하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이에 따라 정리한다면, 아름다움은 이상사회를 추구하는 사람의 내면 상태를 말한다.
왜 아름다움의 목소리는 나직하게 말하나?
ㅡ아름다움은 이상 사회를 추구하는 사람을 나타낸다.
ㅡ이 사람은 성숙함을 추구하는 사람이기도 하기에, 사람들에게 성숙한 모습으로 다가서게 된다.
ㅡ그래서 나직하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ㅡ그래서 지금의 구절을 앞의 문장과 관련지어서 본다면, "올바름에 둔감한 사람들에게 강하고 세게 이야기를 해야 이야기를 들을 테지만, 이상사회를 추구하는 사람은 그들에게 나직하게 말을 한다"는 것이다.
ㅡ이와 관련해서는 「유고 (1882년 7월~1883/84 겨울)」을 참고해도 좋을 듯하다.
이러한 예의도 또한 문제가 되어야 한다.
명령할 수 있는 자가 자신의 왕다운 손을 외투 속에 숨기며, 그는 명령하는 대신
자신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설득한다.
방패는 무엇을 말하나?
ㅡ문장들을 보면, 방패의 웃음은 아름다움의 웃음이기도 하다.
ㅡ그럼 왜 아름다움은 방패가 되는 것일까?
ㅡ아름다움은 이상사회를 추구하는 사람의 내면이다.
ㅡ이상사회를 추구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올바른 이해를 선사하려고 하고, 그러려면 사회적 규율에 순응하는/부조리를 저지르는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한다.
ㅡ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배척당해서는 안 된다.
ㅡ배척 당하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앎을 선사하기 위해서, 이 사람은 사람들에게 긍정적 인식을 주어야 하고, 그런 면에서 아름다움을 통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ㅡ따라서 아름다움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일종의 가면이고, 자신을 사회에서 지키는 방패인 셈이다.
ㅡ이와 관련해서는 「유고 (1882년 7월~1883/84 겨울)」의 두 구절을 참고해도 좋을 듯하다.
‘아름다움’이라는 내 방패를 통해 나는 그대들 앞에서 나를 지킨다.
가장 아름다운 것의 형상에 의해서 너희는 벙어리가 될 것이다.
나는 미래의 용과 함께 싸운다.
그리고 너희 왜소한 자들은 지렁이와 싸울 것이다.
3) 나는 증오하지 않으며 아름다움으로 나 자신을 보호한다.
왜 아름다움의 웃음, 방패의 웃음은 신성한 웃음이자 떨림일까?
ㅡ 앞서 다룬 것처럼 신성한 웃음이라는 표현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웃음으로 해석할 수 있다.
ㅡ이런 면에서 「차라투스트라, 1권 1장」에서 나오는 "신성한 예/신성한 긍정"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아이는 무죄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 최초의
움직임이자 신성한 긍정이다.
덕 있는 자는 누구를 말하나?
ㅡ미덕을 갖췄다고 말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뒤에 나오는 표현으로 보면, 모든 개인이 나름대로 미덕에 관여하고 있기에, ‘자신이 덕을 갖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식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름대로 덕에 관여하고 있다고 믿는다.
누구라도 최소한 선과 악에는 정통한 자이고자 하는 것이다.
덕 있는 자들은 무슨 대가를 바라나?
ㅡ후술되는 것을 보면, 구원을 보상으로 바라는 듯 하다.
오늘에 대한 보상으로 영원을 원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오늘 한 행동, 즉 오늘 미덕을 행한 것을 통해서, 천국으로 나아가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로 보인다.
왜 미덕이 그들에게 주어진 보상이라 가르친 적이 없다고 이야기를 하나?
ㅡ사람들은 구원을 바라면서 미덕을 갖추려고 노력했다.
ㅡ그런데 차라투스트라는 그 구원을 해주는 신이 죽었다고/없다고 했다.
ㅡ그런 면에서 사람들이 차라투스트라에게 항의하고 있는 상황이다.
ㅡ이런 상황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나는 신에 대한 사실을 알려준 것 밖에 없고, 너희를 속인 건 '미덕을 갖추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한 이 아니냐?" 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물의 바닥에 보상과 처벌이라는 거짓이 끌어들여졌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여기서 사물은 Dinge의 번역어로, thing의 의미와 같다.
ㅡ그런 면에서 사물로만 보기는 어렵고, 어떤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따라서, “어떤 것에는 보상이 주어지고, 어떤 것에는 처벌이 주어지게끔 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다.
ㅡ이 장의 문맥에 따르면, 행위에 대한 보상과 처벌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적합해 보이므로, 어떤 행위는 보상을 주고, 어떤 행위는 처벌을 한다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ㅡ이에 따르면, 차라투스트라는 행위에 대한 보상과 처벌의 논리는 허구라고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영혼의 밑바닥에 마저 보상과 처벌을 끌어들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미덕을 갖춤으로써, 영혼 자체에도 보상과 처벌이 주어진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쟁기날로 불리려고 하나?
ㅡ사람들이 갖는 미덕에 대한 인식을 뒤엎고 개선시키려는 모습을 비유한 것으로, 쟁기처럼 갈아엎으려는 것이다.
왜 미덕을 갖추는데 대가를 바라면 안 되나?
ㅡ미덕에서 보상을 바라게 되면, 그것은 미덕적인 것이 아니게 되기 때문인 듯하다.
ㅡ애초에 미덕이 무언가 보상을 야기하는 것도 아니란 것이다.
왜 '자기'가 너희들의 덕이라고 이야기하나?
ㅡ자기는 신체를 말하고, 신체는 우리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차라투스트라, 1권 4장」을 참고하자.
ㅡ이에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개인적 호오에 기반한 미덕을 갖추게 되는데, 이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ㅡ즉 너희들의 덕이란 것은 ‘너희 개인적 호오가 반영된 미덕’이라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추가적으로 자기/개인적 호오에 기반한 미덕은 사회에 기반한 미덕과 충돌하게 되어, 문제가 생기게 되긴 한다.
ㅡ이와 관련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자기/개인적 호오에 기반한 미덕을 갖추고 사회에 기반한 미덕을 벗어나라고 이야기를 전반적으로 하고 있다.
둥근 고리에 대한 갈망은 무엇을 말하나?
ㅡ반복되는 갈망을 말하는 것 같다.
ㅡ차라투스트라는 개인적 호오에 따른 미덕을 형성하고 그에 따라 행위하며 살아가라고 이야기를 한다.
ㅡ그런데 후술되는 내용을 보면, 현재 미덕에 따라 살았다 할지라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또 미덕에 따라 살아야 하는 문제의 반복이 나타난다.
ㅡ문제는 이렇게 미덕에 따라 살고 다시 문제를 맞닥뜨리는 반복을 하면 가장 좋겠지만, 중간에 미덕에 따라 살지 못할 수도 있다.
ㅡ이렇게 반복하는 것을 원형적 반복이라고 한다면, 중간에 미덕에 따라 살지 못하는 것은 비원형적 반복/이탈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ㅡ이런 점에 착안해서 하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왜 덕이 하는 모든 일은 꺼져가는 별과 같나?
ㅡ미덕적인 행위로 얻게 되는 ‘미덕적이다’라는 평가의 일시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미덕적 행위가 별이라면, ‘미덕적이다’라는 평가는 별빛인 셈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미덕적인 행위를 지금 했다면, 지금만 미덕적이라 여겨질 수 있는 것이지, 그 행위 한 번으로 평생 미덕적이라 여겨질 수 있는 건 아니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왜 그 빛은 아직도 길 위에서 떠돌고 있다고 하나?
ㅡ미덕적인 행위에 따른 자부심이 지속된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미덕적 행위에 대한 자부심은 순간 가지면 되는 것인데,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ㅡ그에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언제까지 그걸로 자부심을 가질 거냐고 묻는다.
왜 그대들의 덕은 그대들 자신인가?
ㅡ여기서 말하는 것은 덕의 목적인 것 같다.
ㅡ즉, 너희들의 덕의 목적은 너희다워지는 것이란 이야기로 보인다.
미덕이 낯선 것, 표피, 겉옷이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
ㅡ낯선 것은 나답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에 따라서 보면, 너희가 지니는 미덕이 너희를 억압하고 사회를 우선시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미덕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ㅡ표피는 좋다고 여겨지지만 실제로 좋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ㅡ즉 겉으로만 좋아 보이고 속으로는 좋지 못한 것이다.
ㅡ이러한 미덕은 사회적 미덕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 역시 개인이 추구할 미덕이 아니란 이야기로 보인다.
ㅡ겉옷은 내 외부에 걸치는 것으로, 보호하거나 치장하는 용도로 보인다.
ㅡ여기서는 앞선 문맥에 따라서, 치장하는 의미로 보는 게 좋아 보인다.
ㅡ즉 미덕은 치장해주는 것이 아니란 이야기다.
채찍 아래서 경련을 일으키는 건 무엇을 말하나?
ㅡ여기서 말하는 덕은 자신의 본성을 억압하고 부조리를 따르고 견디는 것이거나, 고행을 하는 것을 덕이라고 부르는 것일 수도 있다.
ㅡ하지만 후행되는 문장은 "사람들이 많이 들은 것"을 의미하기에, 본성을 억압하고 부조리를 따르는 것을 덕이라고 여긴다고 보는 게 적절해 보인다.
악덕이 느슨해지는 것은 왜 덕이라 불리나?
ㅡ악덕이 이기심에서 비롯된다고 한다면, 이기심이 느슨해지면서 이타심이 생기고, 이로써 집단이 평화로워지기 때문이다.
왜 미움과 질투가 사지를 늘어뜨리면, 정의가 깨어나나?
ㅡ미워하거나 질투하지 않으면, 불의가 사라지고, 그에 따라서 정의가 생겨난다는 이야기다.
저들이 말하는 “정의”는 무슨 정의인가?
ㅡ사회가 추구하는 정의로 보인다.
ㅡ사람들 사이에서 미움과 질투가 사라지면, 집단이 평화로워지는데, 이는 사회가 추구하는 올바른 상태이기 때문이다.
ㅡ 이와 관련해서는 「차라투스트라, 1권 2장」을 참고하는 게 좋아 보인다.
신과도 화평하고 이웃과도 화평하라.
단잠이 원하는 바가 이것이다.
그러니 이웃의 악마와도 화평하라!
그러지 않으면 그 악마가 밤에 그대 주위를 맴돈다.
ㅡ단잠이 사회적 규율에 따르는 것을 말하므로, 사회가 바라는 것이 화평임을 이야기하는 구절이다.
ㅡ이를 통해 사회가 추구하는 것이 집단 내부의 평화라는 것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저들이 말하는 “정의”, 미덕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나?
ㅡ저들이 말하는 미덕은 다툼을 없애기 위해서 이기심을 줄이는 것을 말한다.
ㅡ이것이 목적하는 것은 집단의 평화이므로, 타인의 악행에 대해서도 미워하지 않아야 한다.
ㅡ집단의 평화를 위한 노력에 대해서는 「차라투스트라, 1권 2장」에서도 언급이 되는데, 여기서 차라투스트라는 집단의 평화를 추구하는 사회적 규율/잠에 대해서 "이상사회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좋을지 몰라도, 이상 사회를 추구한다면, 바보같다"고 이야기한다.
ㅡ따라서 이 구절은 긍정적인 의미로 보기 어려워 보인다.
ㅡ 또한 만약에 이 구절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저들이 말하는 <정의>"라고 강조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래 밑으로 내려가는 자는 누구인가?
ㅡ부조리한 사회에 절망하는 자로 보인다.
ㅡ왜냐면 여기서 언급되는 존재는 신을 향하는 존재를 말하는데, 신을 향하는 존재는 대지에 절망한 존재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차라투스트라, 1권 3장」을 참고하자.
그러므로 나는 배후세계론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노라.
고통과 무능력.
이것이 배후세계 일체를 만들어냈다.
가장 고통받는 자만이 경험하는 그 짧은 행복의 망상이 그 세계를 만들어냈다.
단 한 번의 도약, 죽음의 도약으로 끝을 보려는 피로감,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원하지
못하는, 저 가련하고도 무지한 피로감.
그것이 신들과 배후세계들 일체를 만들어낸 것이다.
내 형제들이여, 내 말을 믿으라!
신체에 절망한 것은 신체였다.
절망에 빠진 신체가 혼미한 정신의 손가락으로 마지막 벽을 더듬었던 것이다.
내 형제들이여, 내 말을 믿으라!
대지에 절망한 것은 신체였다.
절망에 빠진 신체가 존재의 배가 자신에게 하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ㅡ여기서 신을 고안한 것은 대지에 절망한 존재인데, 대지는 천상과 대비되어 현생을 말하는데, 현생이 한 개인을 절망하게 했으므로, 해당 구절에서는 문맥상 대지의 의미가 부조리한 사회라고 치환할 수 있다.
ㅡ지금의 구절은 신을 고안하고 신을 추종하는 자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아래로 내려가는 자는 부조리한 사회에 절망한 자라고 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악마는 누구인가?
ㅡ앞의 해석에 따라서, 부조리한 사회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유고 (1882년 7월~1883/84 겨울)」의 구절을 참고하자.
1[61]
이상을 창조하는 것.
즉 자신의 악마를 자신의 신으로 변형시키는 것.
바로 이것을 위해 사람들은 자신의 악마를 창조해야만 했다.
ㅡ이 구절에서도 악마를 신으로 변형시켰다고 했으므로, 부조리한 사회를 기반으로 신을 고안한 것임을 생각해볼 수 있다.
내가 아닌 것이 내게 신이자 덕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ㅡ이 구절은 앞서 말한 "덕"들에 대해서 종합하여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앞에서 언급된 "덕"들은 모두 자신을 억압하거나, 이타적이거나, 현생의 나를 부정하는 것이다.
ㅡ따라서 나답다기 보다는 나답지 못한 것들이 덕으로 취급받고 있다.
ㅡ이를 종합적으로 나타낸다고 보인다.
돌을 싣고 내려오는 수레처럼 힘겹게 삐걱대며 다가오는 자들은 누구를 말하나?
ㅡ이들은 고행하는 자로 보인다.
ㅡ힘겨운 삶을 자처하는 자들로, 봉사하거나 헌신하는 존재들로 보인다.
ㅡ고행은 삶을 힘겹게 하는 역할을 하므로, 이 고행을 제동기체라고 말한다.
태엽이 감긴 시계 같은 자들은 무얼 말하나?
ㅡ단순하여, 사회적 규율에 순종하는 자들을 말한다.
ㅡ이에 대해서는 「유고 (1882년 7월~1883/84 겨울)」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12[10]
너희는 자유롭다는 망상에 빠져 있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가 조정하는 철사에 의해 돌고 있다.
가치와 견해들이 너희 위에 그리고 너희 안에 서식하고 있다.
너희는 우리, 평가하는 자들에 의해 태엽이 감겼다.
그대 시계들이여!
ㅡ이에 따르면, 기존의 가치와 견해들에 잘 따르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왜 이런 자들이 재밌고, 그들을 조롱으로 태엽을 감아주려고 하는가?
ㅡ이 자들은 자신들이 교육받은 가치와 규율 속에서만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ㅡ이런 자들은 오류가 있고 문제가 있는 가치와 규율을 맹신하고 의존하고 있다.
ㅡ따라서 이들을 조금만 건드려도 이들은 오류를 보이거나 감정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ㅡ이러한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우습다고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
ㅡ관련해서는 「유고 (1882년 7월~1883/84 겨울)」의 두 구절을 참고해 보자.
9[17]
너희는 나에게 도구이며 시계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조소로 그대들을 육성하고자
하며 그 경우 너희는 나에게 투덜대리라.
13[12]
그대들은 나에게는 도구이고 시계일 뿐 그 이상의 것이 아니다! 이렇게 나는 내 조소로
그대들을 육성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들은 나에게 구걸할 것이다.
ㅡ이러한 구절을 보면, 차라투스트라가 조롱으로 태엽을 감는 것, 이것은 조롱하면서 그들을 교육하려고 하는 것이란 의미로 볼 수 있다.
왜 시계는 덜덜 거리나?
ㅡ시계는 사회적 가치와 규율 속에서만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ㅡ이들은 차라투스트라의 조롱하는 태엽감기, 조롱 섞인 지적을 받게 된다.
ㅡ이에 따라서 감정적 반응을 보이거나, 오류에 따라 흥미를 가지게 될 텐데, 이를 덜덜거린다고 표현한 듯하다.
한 줌 정의에 긍지를 느끼고 못된 짓을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ㅡ정의를 명분 삼아 불의를 저지른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후술되는 문장을 보면, 이들은 정의를 위해서 복수를 하고, 처벌을 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 1권 2장」의 야경꾼 이야기와 관련된다.
현자는 이렇게 말했다.
"잠에 대한 경의와 잠 앞에서의 조심스러움!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니 잠을 잘 못 이루며 밤에 깨어있는 자 모두를 멀리하라!
도둑조차도 잠 앞에서는 조심한다.
그래서 그는 밤에는 늘 살금살금 돌아다니지.
반면 밤을 지키는 야경꾼은 뻔뻔하다.
뻔뻔스럽게 뿔나발을 불어대니 말이다.
ㅡ위 구절에서 잠을 자는 것은 사회적 규율에 순응하는 것을 말하는데, 밤을 지킨다는 것은 잠을 잘 자게 한다는 것을 말한다.
ㅡ이에 따라서, 야경꾼은 사람들이 사회적 규율을 순응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존재다.
ㅡ문제는 이들은 잠을 자지 않고 깨어있는 채로 과감한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ㅡ잠을 자지 않는다는 것은 사회적 규율에 순응하지 않는 것이며, 뻔뻔하게 뿔나발을 부는 것은 그만큼 과감하게 사회적 규율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ㅡ즉, 사회적 규율을 지키겠다는 명목하에 과감하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왜 사회는 저들의 불의의 늪에 빠져 익사하나?
ㅡ정의를 명분 삼아 저지르는 불의는 결국 불의의 허용을 의미한다.
ㅡ이렇게 되면 정의로운 활동보다 불의한 활동이 더 많아진다.
ㅡ우선 기본적으로 정의로우려 하지 않는 자들이 불의한 행동을 한다.
ㅡ또 정의를 지키는 자들이 불의한 행동을 한다.
ㅡ여기에 정의롭고자 노력하는 이들만 정의로운 행동을 하는 것이다.
ㅡ이런 점에서 사회에는 정의보다는 불의가 더 많아진다고 할 수 있고, 이에 따라 세상은 불의의 늪에 빠지는 것이다.
자신을 높이는 것은 다른 이들을 낮추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이유는 뭘까?
ㅡ지금 저들은 정의구현을 목적으로 타인들에게 불의를 저지른다.
ㅡ이에 대한 동기를 설명하는 것인데, 타인을 낮추기 위해서 불의를 저지른다고 말한다.
ㅡ이는 지배욕의 발현으로도 볼 수 있지만, 다른 한켠으로는 저들은 사회에 정의를 안착시키는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ㅡ그렇기 때문에, 저들은 불의하다 판단되는 자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다.
자신들의 늪은 무엇을 말하나?
ㅡ앞선 이야기의 연장이라면, 부조리와 불의가 가득한 늪을 말한다.
또한 어떤 자들은 자신들의 한 줌 정의에 긍지를 느끼고는 모든 것에 못된 짓을
해댄다.
그리하여 이 세계는 저들의 불의의 늪에 빠져 익사하고 만다.
덕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자들은 어떤 이들인가?
ㅡ이 사람들은 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 미덕을 옹호하는 자들이다.
ㅡ이들이 옹호하는 미덕은 당연히 사회적 규율이 될 것이다.
인간에게서 드높음을 보지 못한 많은 이들은 누구인가?
ㅡ이들은 이상적인 것의 구현이 어렵다고 보는 이들로 보인다.
ㅡ왜냐면 사회의 부조리를 근절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ㅡ즉 악행을 저지르는 자를 감시할 수도 없고, 일일이 검열할 수도 없다 보니, 누군가 불의를 저지른다면, 부조리한 행동을 한다면, 그것을 방치할 수밖에 없다.
ㅡ그리고 누군가가 신고하거나 처벌을 요구한다면, 그때 처벌할 수도 있지만, 이 역시도 쉽지 않을 수 있다.
ㅡ그런 면에서 부조리의 근절은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ㅡ상황이 이렇다 보니, 현실적으로 타협을 하게 되는 이들이 생기는데, 이들은 실리를 추구하면서 약간의 부조리를 허용한다.
ㅡ그리고 그러한 부조리를 잘 파악하고 따라 사는 것을 올바르다고 여긴다.
ㅡ하지만 결국 부조리는 부조리이기 때문에, 차라투스트라가 사악하다고 말한다.
제대로 세워지고 똑바로 서게 되기를 원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세워지고 똑바로 서게 되기를 바라면서, 후술되는 차라투스트라가 '거짓말이고 바보같은 진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덕이라면, 교양적 측면에서의 미덕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ㅡ교양적 측면에서의 미덕이라면, 어떤 것을 따르거나 동의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면, 미덕을 갖췄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서 그의 사회적 입지가 생겨나는데, 이를 사회에서 자신을 제대로 세우고 교양인으로서 서게 된다는 뉘앙스로 볼 수 있을 듯하기 때문이다.
ㅡ교양에 대한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차라투스트라, 서문 5장」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저들이 나름의 자부심을 갖는 것이 있다.
저들은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지?
교양이라고 부르지.
그 교양이라는 것이 저들을 염소치기와는 다르게 만든다고 하지.
그래서 저들은 "경멸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한다.
이제 나는 저들의 자부심에 대고 말하고자 한다.
ㅡ이를 통해서 사람들은 교양있는 존재로 인정받기를 바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전복되는 것을 덕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전복된다는 것은 기존에 자신이 가진 믿음을 뒤집는 것을 말한다.
ㅡ이는 새로움과 흥미로운 것을 중시하는 자들이 추구하는 바다.
ㅡ이에 따라서 새로움을 주고 의식의 전환을 주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자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ㅡ이와 관련한 구절로는 「차라투스트라, 1권 12장」에서 관련된 구절을 볼 수 있다.
그는 내일이면 새로운 믿음을, 모레는 더 새로운 믿음을 갖는다.
대중과 마찬가지로 재빠른 감각을, 변덕스러운 날씨를 갖고 있으니.
뒤집어 엎기. 이것이 배우에게는 증명이다.
열광시키기. 이것이 배우에게는 설득이다.
그리고 피야말로 그에게는 모든 근거들 중 최상의 근거다.
ㅡ이 구절에서의 '뒤집어 엎는 것'이 지금의 구절에서의 '전복'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ㅡ여기서 배우는 위대한 척을 하는 존재인데, 이 사람은 사람들이 가진 믿음을 전복하는데, 사람들은 믿음의 전복에 흥미로워 하면서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왜 아이의 내면에 어머니가 있나?
ㅡ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아이의 내면에 어머니가 영향을 끼치는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ㅡ후술되는 자기와 행위의 관계에서도 같은 관계를 나타내므로, 이렇게 보는 게 가장 좋은 해석 같다.
그대들의 '자기'가 그대들의 행위 속에 있다는 것이 왜 덕에 관한 말이 되기를 바라나?
ㅡ여기서 말하는 '자기'는 '신체'를 말한다.
ㅡ'신체'는 「차라투스트라, 1권 4장」에서 나오는 신체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불쾌해하는 것들, 개인적인 호오를 알려주는 정동을 말한다.
ㅡ행위 속에 신체가 있다는 것은 자신의 개인적 호오가 행위 속에 반영되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ㅡ일반적으로 우리의 행위는 개인적 호오보다는 사회적 호오가 반영된다는 측면에서, 사회적 규율에 따르지 않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가 늘 말해 온 개인의 행복을 위한 미덕을 갖추라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한다; 물론 개인의 행복을 바란다면서 방종하는 것을 차라투스트라가 원하는 것은 아니다.
백 가지 말은 무엇을 말하나?
ㅡ백 가지 말은 미덕과 관련한 다양한 입장을 말한다.
바닷가에서 놀고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가치관에 따라 잘 생활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파도는 무엇인가? 놀잇감을 가져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 본인을 말한다.
ㅡ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의 가치관을 앗아가는 것을 말한다.
새롭고도 다채로운 조개는 무엇인가?
ㅡ개인적 호오를 반영하는 가치관을 의미한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가치관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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