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2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2권 3장 의역 (완) (동정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5. 24. 16:38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2권 3장 동정


 
3장 개괄

 

 

3장에서는 사회에서 말하는 수치심과 동정에 대해서 비판하는 장이다.

즉 사회는 수치스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게 하고, 지나친 동정을 통해서 사람들이 부조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이런 어리숙함을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올바른 이해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올바른 이해를 받을 때 생길 수 있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생길 수 있으므로, 스스로를 잘 단도리 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위대한 사랑, 즉 이상 사회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서 친구들과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위대한 사랑은 타인을 동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데, 동정은 부조리한 세상을 지속시키게 하는 역할을 한다면, 위대한 사랑/이상 사회에 대한 사랑은 타인을 이상적 존재로 만드는 역할을 하여 이상 사회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본문

 

 

친구들이여,

누군가 여러분에게 저에 대해 비아냥대는 말을 할 겁니다.

“차라투스트라를 봐라!

저 자는 우리 사이를 거닐면서, 마치 짐승들 사이에 있는 표정으로 걷고 있지 않나?”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올바를 겁니다.

“깨달은 사람이 짐승같은 사람들 사이를 걷고 있다.”

 

깨달은 사람에게는 사회에 순응하는 사람들이 붉은 뺨을 가진 동물로 보입니다.

왜 사람들은 붉은 뺨을 가진 동물처럼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너무 자주 수치를 느껴야 했기 때문에, 뺨이 붉어져 버린 것은 아닐까요?

 

오, 친구들이여!

깨달은 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부끄러움, 그것이 인간 사회를 말해준다!”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의 사람들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강조합니다.

사회적 규율에 따르지 않으면 수치스러워해야 한다고 말이죠.

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부끄러움을 느낄 줄 모릅니다.

그래서 규율을 따르지 않고 부조리를 저지르며 살아가죠.

 

저는 동정하며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들 같으니까요.

생각해 보십쇼.

그들은 부조리에 상처받는 서로를 동정하고 있지만, 서로를 상처내는 부조리를 여전히 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제가 동정을 해야만 한다면, 동정하며 행복을 느끼는 저 사람들처럼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정말 동정을 해야 한다고 하면, 저는 동정하는 이와 멀리 있으면서 내가 동정했다는 것을 알아보기 전에 동정을 하고 도망칠 것입니다.

이렇게 동정하는 이유는, 삶이 힘겨울 때 동정이 필요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동정에 의존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동정에 의존하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부조리를 견딜 수 있게 되어, 오히려 부조리함 속에서 적응하여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숨기며 동정하시길 바랍니다.

 

제 운명이 부조리에서 벗어난 자들, 여러분과 같은 이들을 나의 길로 인도하기를 바랍니다.

함께 이상사회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앎을 나누는 자들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붉은 뺨을 지닌 원숭이

차라투스트라에게 사회에 순응하는 사람들은 붉은 뺨을 지닌 짐승으로 보인다.


 

생각해 보면, 예전의 저는 부조리한 이의 고통을 살피고 돕는 것은 좋다는 사회적 인식에 따라 부조리에 고통받는 자들을 도우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돕는 것보다 제가 스스로 기뻐하고 만족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늘 사람들을 도울 때보다 더 나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생각해 보면, 인간이 존재한 이래로, 인간은 자신을 기쁘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이여,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원죄입니다!

 

우리가 더 잘 기뻐하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는 타인에게 부조리를 행하지도 않을 것이며, 부조리를 계획하는 것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부조리에 고통받는 자들을 도우려는 것을 중단했습니다.

그렇게 부조리에 고통받는 자들을 돕겠다는 생각도 그만두었습니다.

 

부조리에 고통받는 자들이 사회적 규율에 따르지 못한 자신을 두고 부끄러워하는 것들을 보면서, 저는 그들이 부끄러웠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두고 부끄러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에게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고, 당신의 본성을 인정하라”고 말해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그들의 자부심을 크게 훼손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본성이 이처럼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자신들의 본성은 더 숭고한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처럼 누군가 사람들에게 올바른 이해를 나눠줄 때,

사람들의 생각을 180도 바꾸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이를 달가워하지 않고, 오히려 적대감을 갖습니다.

왜냐면, 이제껏 자신을 너무 보잘 것 없게 만들기도 하면서, 기존 관념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의 생각을 180도 바꾸는 게 아니라, 그들이 몰랐던 것에 대해 알려줄 때에도,

그것이 너무 탁월하다고 여겨지면, 사람들은 시기심을 갖게 됩니다.

 

“누군가로부터 올바른 이해를 얻을 때에는 조심해야 합니다.

적대감과 시기심만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올바른 이해를 나눠 받음으로써, 적대감과 시기심을 갖기 보다는

새로 얻은 올바른 이해를 통해서 이전의 자신보다 더 나은 자신이 될 수 있게 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올바른 이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충고합니다.

 

무표정한 사람들

사회적 규율을 자신의 행복보다 우선시하면서, 그들은 기뻐하는 법을 잊었다.


 

저는 제가 가진 올바른 이해를 주는 사람입니다.

저는 올바른 이해를 가지려는 사람으로서 올바른 이해를 가지려는 사람들에게는 기꺼이 나눠줍니다.

 

하지만 올바른 이해를 가지려 하지 않는 자들이라면, 그저 부조리에 고통받고 있을 뿐인 이들이라면,

이들에게 직접 말해주지는 않습니다.

제가 이야기를 할 대상이 아니니까요.

그들은 소문으로 듣던 책으로 보던 스스로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제가 나누는 올바른 이해를 자신의 것 마냥 도용하려는 이들, 교양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줄 것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올바른 이해를 주어도 자기 생각인양 허세를 부리기도 하고, 그릇된 이해를 가진 채 왜곡하여 헛소리를 하는데, 이는 몹시 불쾌합니다.

 

또, 사회적/종교적 규율에 순응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줄 것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올바른 이해를 나누면, 되려 저를 비판하고 해치려 할 것이니 말입니다.

 

친구들이여,

사람들의 이런 모습에 대한 제 이야기를 믿어주십기 바랍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면, 우선적으로는 잘못을 깨닫게 한 것을 물어뜯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으니 말입니다.

 

교양만 추구하거나 사회에 순응하는 것보다 가장 좋지 못한 것은 적당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적당함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악행을 저지르는 게 낫다고 봅니다.

 

적당함을 추구하는 자들은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사소한 악행*을 하는 것이 큰 악행** 저지르는 걸 막아준다.

그러니 사소한 악행은 묵인해도 된다.”

*기만이나 사소한 일탈들을 말하는데, 범죄가 아닌 사회적으로 어느정도 용인해줄 수 있는 것들을 말한다.

**범죄를 말한다.

 

하지만 큰 악행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사소한 악행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왜냐면, 악행은 종양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종양이 처음에는 간지럽다가 결국 터져나오는 것처럼, 악행도 처음에는 사소한 것들로 시작해서, 결국에는 큰 악행을 저지르게 될 테니까요.

 

악행에 대해서 우리는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악행이 병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악행보다 적당함을 추구하는 것이 더 심각합니다.

적당함을 추구하면 이상적인 것도 악한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그 중간의 애매한 상태를 바라죠.

 

이 상태는 적당히 이상적이며, 적당히 악합니다.

그렇다 보니 이상적이라고 비판 받는 일도 없고, 악하다고 비판 받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실리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들은 적당한 부조리를 긍정하기에, 결국 부조리한 존재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처럼 적당함을 추구하는 것은 눈에 띄지 않게 있다가 서서히 신체를 잠식하는 균을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악행의 충동에 사로잡힌 자에게 저는 차라리 이렇게 말할 겁니다.

“악행에 대한 충동을 더 키우시길!

그러면 당신에게도 위대한 순간을 맞이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아 형제들이여,

우리는 사람들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에게 투명하게 속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가 투명하게 보인다 해도, 우리가 그 존재가 우리가 무시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보이는 그들의 속내와 부조리를 말하지 않고 참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진균에 잠식된 거리

실리를 추구하면서 작고 사소한 부조리들이 세상을 잠식한다.

편함 속에 부조리가  숨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부조리한 행위를 하는 자들에 대해서 말하고 지적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 부조리를 저지른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지적을 하게 될텐데, 이러한 지적은 정당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부조리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에게도 지적을 하게 될 겁니다.

부조리와 관련해서는, 우리 자신의 일이 아니더라도, 명분이 없더라도 나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우리의 지적이 부당하다고 할 지도 모릅니다.

 

부조리로 인하여 고통받는 친구가 있다면, 우리는 그의 고통의 휴식처가 되어야 할 겁니다.

그러면서 편안함과 안정을 제공하기 보다는, 올바른 인식을 할 수 있는 휴식처가 되어주어야 할 겁니다.

그렇게 할 때, 그 친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만약 친구가 당신에게 악한 짓을 한다면, 이렇게 말하길 바랍니다.

“네가 나에게 한 일은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네가 너 자신에게 악한 짓을 한다면, 내가 어떻게 그것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말하는 용서와 동정을 넘어서는 위대한 사랑**, 이상 사회에 대한 사랑은 이렇게 친구에게 말합니다.

*성숙한 영혼을 지닌 차라투스트라와 형제들은 친구가 자신에게 한 악행은 이해하고 기회를 주려고 한다.

그게 성숙한 자가 친구를 대하는 모습일 테니 말이다; 1권 21장 참고.

하지만 친구로서 친구가 자신에게 악한 짓을 한다면, 그것은 비판해야 한다.

성장하게 하는 것이 친구이기 때문이다; 1권 14장 참고.

**단순히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름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통해서 부조리를 근절하고 올바름을 추구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용서하고 싶고 동정하고 싶은 마음을 잘 붙잡아 두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상 사회로 나아가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조리한 세상에서 서로를 동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동정보다 사람들에게 더 고통을 초래한 것도 없습니다.

동정하면서 우리는 세상의 부조리를 견디게 되고, 그러면서 부조리는 또 다시 허용되어지는 악순환을 이루는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사랑을 한다면서 동정하는 것 외에 할 줄 모르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어야 합니다!

신은 인간들이 이상적인 모습들, 선한 모습들을 갖추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악한 이들도 있었고, 사람들은 악의 충동에 시달렸고, 타인과 자신의 악행에 의해 고통받았습니다.

인간을 사랑한 신은, 그들을 이 고통에서 구원해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악이 주는 고통에서 구원받기만을 바랄 뿐, 고통을 주는 부조리와 악행을 개선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부조리와 악행을 저지르고 용서를 빌며, 구원 받기만을 바란 것입니다.

 

이로써 세상은 부조리와 악행이 가득해졌고, 세상을 평화롭고 조화롭게 만들려던 신의 계획은 무산이 되었습니다.

신은 그렇게 자신을 따르지 않는 인간들을 동정하다가 고통받았고, 그러다 죽게 된 것입니다.

 

동정이란 것은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정을 경계해야 합니다.

 

동정은 사회 부조리를 양산하고, 이로써 인간은 현생에서 절망하게 됩니다.

이 절망의 먹구름, 염세와 허무에 대해서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위대한 사랑을 한다면, 동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습니다.

왜냐면, 위대한 사랑은 동정과 달리 다른 사람도 이상적 존재/위버멘쉬가 되게끔 하기 때문입니다.

동정은 이와 달리 부조리를 저지르는 존재가 되게끔 하죠.

 

창조하는 자*들, 위버멘쉬들은 모두 이렇게 말합니다.

“나 자신을 내 사랑에 바치고, 이웃을 나와 같이 여깁니다”

이것이 모든 창조자들, 모든 위버멘쉬들의 말입니다.

*그릇된 가치를 파괴하고 올바른 가치를 창조하는 자들을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창조자들이 감정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성적이며 단단한 마음을 지녔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동정하는 악마

차라투스트라는 동정이 개인이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견디고,

또 부조리를 저지르게끔 하는 사회악적인 요소라고 말한다.


 

생각해볼 거리들

 

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 사이를 짐승들 사이를 걷듯이 걸었나?
ㅡ 사람들이 부조리를 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미개하다고 여긴 것으로 보인다.

 

왜 사람은 붉어진 뺨을 가진 원숭이인가?

ㅡ 인간은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수치스러워할 것들을 부여받는다.

ㅡ 이에 대해서 차라투스트라는 지나친 수치심이라고 보는 것이다.

ㅡ 그래서 지나치게 수치심을 느낀다고 하여, 당황하는 표정의 특징인 붉어지는 뺨을 이야기한 걸로 보인다.

 

왜 수치는 인류의 역사인가?

ㅡ 인류 문명에서 수치심을 가르치고, 점점 더 수치심을 느껴야 할 것들이 늘어났기 때문으로 보인다.

 

왜 고귀한 자는 수치심을 느끼지 말라고 자신에게 하나? 왜 사람들에게는 수치심을 느끼라고 명령하나?

ㅡ 여기서 말하는 고귀한 자는 사회적 지도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 즉 이 구절은 지도자 층의 몰염치한 모습을 지적하는 것이다.

ㅡ 그래서 정작 본인은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몰염치한 행동을 하면서, 사람들에게는 수치심을 느끼라고 말하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왜 동정하며 행복을 누리는 자들을 좋아하지 않나?

ㅡ 부조리에 고통받는 이들을 동정하면서, 부조리를 견디게 되고, 그러면서 부조리를 어느 정도 포용하게 되면서, 부조리에 대한 개선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ㅡ 이와 관련된 구절은 「차라투스트라, 1권 9장」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저들이 철저하게 동정하는 자들이라면,

          저들의 이웃들로 하여금 삶을 싫어하도록 만들 것이다.

          악하게 있기.

          이것이야말로 저들의 참다운 선의일 것이다.

ㅡ 이 구절은 동정하는 자들은 자신의 이웃들이 세상을 싫어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ㅡ 즉, 동정함으로써 악행을 수용하게 하고, 악한 채로 있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왜 동정을 해야만 해도, 동정하는 자라고 불리고 싶어하지 않을까?

ㅡ 동정하는 자는 사회 부조리를 방치하는 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ㅡ 따라서 동정은 하고 싶지 않은 것이며, 그렇게 인식되기를 원치 않아 보인다.

ㅡ 동정에 대한 이러한 단호함은 「차라투스트라, 1권 14장」에서도 나온다.

          벗에 대한 동정은 단단한 껍질 속에,

          그것을 깨려다 이 하나쯤은 부러질 각오를 해야 하는 껍질 속에 가두어 놓으라.

          그래야 동정이 섬세함과 감미로움을 갖추게 된다.

 

왜 동정을 해야 한다면, 멀리서 동정하고, 자신이 동정해주는 걸 알아보기 전에 도망칠까?

ㅡ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정을 통한 관계를 형성하지 않아야 한다고 보는 듯하다.

ㅡ 가까이서 동정한다면, 누가 동정했는지 알 것이고, 이로써 나중에 동정을 받고 싶을 때 찾게 될 것이다.

ㅡ 즉 동정에 의존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ㅡ 동정에 의존하며 지낸다면, 결국 부조리한 사회를 개선하려는 의지/이상 사회를 구축하려는 의지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나 자신이 기뻐할 줄 알게 되었을 때, 더 나은 일을 한다고 느꼈다는데, 이 구절은 무슨 의미인가?

ㅡ 이 구절은 타인을 돕는 것보다 자신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이 더 낫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ㅡ 즉 자신을 위해서 살아라 이런 이야기다.

 

왜 기뻐하며 살지 못한 것이 우리의 원죄인가?

ㅡ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지 못하고, 집단을 위해서 살았기에, 우리 개인의 본성이 억압당하고, 부조리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 이것이 인간의 죄란 이야기.

 

왜 우리가 더 잘 기뻐할 줄 알게 되면, 다른 이들을 고통스럽게 하지도, 고통스럽게 할 생각도 안 하는가?

ㅡ 우리가 기뻐할 줄 알게 된다는 것은, 자신을 위한 삶을 산다는 것을 말한다.

ㅡ 여기서 “더 잘 기뻐할 줄 알게 되면”이 중요한데, 그냥 단순히 기뻐하는 것만 한다는 게 아니라, 잘 기뻐하는 법을 알게 된다는 점 때문이다.

ㅡ 즉 내키는 대로 기쁜 것만 찾는 게 아닌, 올바른 기쁨을 찾는다는 이야기이다.

 

ㅡ 만약 올바른 기쁨을 누리려고 한다면, 우리는 타인에게 부조리를 행하는 것보다는 타인과 잘 어울리면서 자신의 기쁨을 누리려고 하는 경향성이 생기게 된다.

ㅡ 이를 통해서 부조리가 사라지고, 이렇게 부조리가 사라지다 보면, 부조리를 행하려는 생각 자체가 사라질 수 있기에 하는 이야기로 보인다.

 

고통받는 자의 고통을 보면서 왜 그의 수치심을 수치스럽게 여겼나?

ㅡ 고통받는 자의 수치는 사회적 기준에서의 수치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 왜냐면 고통받는다는 것 자체가 부조리에 따른 고통이기 때문이다.

 

ㅡ 그리고 차라투스타라가 느낀 수치는 개인 기준에서의, 성숙함 기준에서의 수치였다.

ㅡ 이에 따라서 보면, 고통받는 자는 수치를 느끼지 않아도 되는 걸 가지고서 수치로 여겼다.

ㅡ 이에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그렇게 오류를 저지르는 존재를 두고서 수치스럽게 여긴 것이다.

ㅡ 여기서는 수치보다는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가 도운 것이 왜 그의 자부심에 상처가 되었나?

ㅡ 고통받는 자가 느끼는 수치는 인간 본성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ㅡ 예컨대 성적이거나 악하고 저열한 면 말이다.

 

ㅡ 차라투스트라는 이런 면에 대해서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라고 알려주면서 그를 돕고자 했을 것 같다.

ㅡ 문제는 고통받는 자가 사회적 규율에 따르고 있다는 점인데, 이를 따르고 있으므로,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는 오히려 수치를 느끼는 자신에게 본성적으로 수치스러운 존재로 인식시키는 이야기가 되었을 수 있다.

ㅡ 이런 점에서 이 사회적 규율에 따르는 자의 자부심을 뭉개버린 것이다.

 

큰 빚과 작은 선행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나?

ㅡ 이 두 이야기는 차라투스트라가 돕기 위해서 올바른 이해를 선사하는 것과 관련된 사람들의 반응을 나타내는 것 같다.

 

ㅡ 우선 큰 빚이라는 것은 인식적 전환을 야기하는 앎을 선사한 경우로 보인다.

ㅡ 즉 앞서 자신의 본성을 두고 수치심을 느끼는 이에게, 그것은 본성이지 수치를 느낄 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 말이다.

 

ㅡ 이런 경우, 그들은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달가워하지 않고 화를 낼 수 있다.

ㅡ 왜냐면 자신의 기존 사고방식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ㅡ 그에 따라서 감사가 아닌 복수욕/적대감을 느낀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 작은 선행의 경우 차라투스트라가 그 사람이 고민하던 문제나 어려워하는 문제에 대한 도움을 준 경우가 아닐까 싶다.

ㅡ 이에 따라서 도움을 받은 사람은 분명 도움을 받아 좋지만, 자신의 문제를 단순 명료하게 탁월하게 해결하는 그에게 시기와 분노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ㅡ 이렇게 본다면, 후행되는 내용과도 잘 이어지게 된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받을 때 냉정하게 받으라고 했나?

ㅡ 차라투스트라는 앞서 큰 빚과 작은 선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올바른 앎을 제공받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적으로 격해지는 경우를 이야기했다.

ㅡ 그러므로, 감정적으로 격해지지 않으면서, 즉 냉정한 채로 앎을 전수받으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왜 받아들임이 그대를 구별하게 하라고 하는가?

ㅡ 이 부분은 해석이 갈리는 듯하다.

 

ㅡ 내가 확인한 바로는 “받음으로써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라!”로 해석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ㅡ 이에 따라서 보면, “올바른 앎을 감정적으로 대하지 말고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통해 성장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ㅡ 이러한 해석은 앞서 올바른 앎을 전수함에도 자부심에 상처를 입고 그랬던 것과 대조되는 상황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적절한 해석을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벗에게는 선물을 하고, 다른 이들에게는 직접 열매를 따게 하는가?

ㅡ 차라투스트라는 친구들을 위해서 이야기를 선사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ㅡ 이와 관련해서는 「차라투스트라, 서문 9장」에서도 나온다.

한 줄기 빛이 내게 떠올랐다.

차라투스트라는 군중이 아니라 길동무들에게 말하련다!

차라투스트라는 무리의 목자나 개가 되어서는 안 된다!

ㅡ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길동무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스스로 체득하거나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바란다.

 

벗과 낯선 자와 가난한 자는 누구를 말하나?

ㅡ 낯선 자와 가난한 자는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길을 나아가지 않는 자들, 즉 위버멘쉬로 나아가야 할지, 아니면 사회적 규율에 따라야 할지 고민하는 자들로 보인다.

 

ㅡ 차라투스트라의 벗은 위버멘쉬로 나아가려고 마음을 먹은 자들이다.

 

왜 낯선 자와 가난한 자는 직접 열매를 따면 덜 부끄러울까?

ㅡ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를 듣고 나아가는 것은 그들이 반사회적 존재로 여겨질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ㅡ 그러니 차라투스트라 곁에서 나눔을 받는 것보다는 혼자서 몰래 하는 것이 그들의 사회적 평판에 있어서 낫다고 보는 듯하다.

 

거지는 누구인가?

ㅡ 거지는 지식을 도용하려는 자, 교양으로서 차라투스트라의 앎을 취하려는 이기적인 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 관련해서는 「차라투스트라, 1권 11장」, 「차라투스트라, 1권 22장 1절」을 참고해보면 좋을 듯하다.

          여기 잉여인간들을 보라!

          저들은 창조자의 업적과 현자의 보물을 훔쳐내고는, 그런 도둑질을 '교양'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모든 것이 저들에게서는 병이 되고 재앙이 되어버릴 수밖에! 

           「차라투스트라, 1권 11장」

 

          또 다른 이기성도 있는데, 늘 훔치려고만 드는 너무나도 가난하여 굶주린, 병든 자들의

          이기성, 병든 이기성이다.

 

          이 이기성은 광채를 내는 모든 것을 도둑의 눈으로 응시하며, 먹거리를 풍부하게 갖고

          있는 자를 굶주린 자의 탐욕스러운 눈으로 헤아린다.

          그러면서 선사하는 자들의 식탁 주변을 늘 어슬렁거린다.

          「차라투스트라, 1권 22장 1절」

 

죄인과 악한 양심은 누구인가?

ㅡ 여기서 죄인과 악한 양심은 원죄를 갖추고 있고, 양심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존재로 보인다.

ㅡ 우선 죄인이라 하면, 앞서 차라투스트라가 원죄라고 했던 죄를 저지른 자, 기뻐하며 살지 못한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사회에 순응하면서 나타나는 존재다.

ㅡ 악한 양심의 경우, 양심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악한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한다.

ㅡ 그러므로 부조리에 적응한 존재의 양심이라 할 수 있다.

ㅡ 따라서 죄인과 악한 양심은 부조리에 순응한 존재를 말한다.

 

가책받는 양심은 물어뜯는 법을 배우게 한다는데, 그게 무슨 말인가?

ㅡ 가책받는 양심이란 올바르게 기능하는 양심, 죄의식을 갖게 하는 양심을 말한다.

ㅡ 이 양심에 따라 물어뜯는다면, 그릇된 것을 보고 물어 뜯을 것이다.

ㅡ 즉 그릇된 행동을 비판한다는 것이다.

ㅡ 관련해서는 「우상의 황혼, 1장 29절」의 구절도 살펴보면 좋다.

          29.

          “이전에 양심은 물어뜯을 것을 얼마나 많이 가졌던가?

          얼마나 좋은 이빨을 가졌던가?—

          그런데 오늘날은? 뭐가 부족한 것일까?”

          —어떤 치과의사의 의문.

 

왜 별 볼일 없는 생각이 가장 나쁜가?

ㅡ 여기서 별 볼일 없다는 것은 악하지도 이상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말한다.

ㅡ 즉 적당한 실리적인 생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ㅡ 이런 생각의 경우 두드러지지 않아서 비판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ㅡ 또한 적당히 실리적이기 때문에, 부조리도 감수하게 된다.

ㅡ 이런 점들로 인해서 비판받지 않으면서도 부조리를 저지르게 하는데, 이는 결국 부조리를 근절하는데 있어서 찾기도 비판하기도 어려워서 가장 나쁘다고 보는 듯하다.

 

왜 사소한 악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ㅡ 사소한 악행에 대한 이야기는 별 볼일 없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하는 생각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ㅡ 즉 적당히 타협점을 찾아서 행동하는 것이 별 볼일 없는 생각의 특징인 것이다.

 

왜 별 볼일 없는 생각은 진균인가?

ㅡ 잘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그 대상을 잠식시키기 때문이다.

ㅡ 별 볼일 없는 생각 역시 잘 눈에 띄지 않으면서, 부조리를 저지르게 한다.

 

왜 악의 충동에 사로잡힌 이에게 더 악을 키우라고 말하나?

ㅡ 악의 충동에 잡혔다는 것은 악행을 저지르고 싶다는 것이고, 이는 무언가 불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듯하다; 물론 악행이 불만에서 다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ㅡ 그래서 지금 당장의 불만을 보는 게 아니라, 좀 더 분명하게 사태를 파악하여 악행을 하려고 하면, 결국 부조리한 사회를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본 듯하다.

ㅡ 이 구절을 부조리의 목격에 초점을 두고 해석하는 이유는, 차라투스트라는 사람이 위대해질 수 있는 경우가 사회의 부조리, 기존에 따르던 것들 것 부조리를 발견할 때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 서문 3장」

          그대들이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위대한 경멸의 순간이다.

          그대들의 행복이, 그와 마찬가지로 그대들의 이성과 그대들의 덕이 역겨워지는 때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사람들이 빤히 보이지만 관통하지는 못한다고 말하나?

ㅡ 이 구절은 해석이 갈리는 것 같다.

ㅡ 내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사람들은 투명하게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를 관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로 볼 수 있다.

ㅡ 이렇게 보면, “사람들이 투명하게 보이지만, 실제로 통과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라는 말로 해석해볼 수 있다.

ㅡ 즉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란 이야기다.

ㅡ 다시 말해, 그 사람들이 없는 것처럼 무시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ㅡ 그래서 후술되는 문장, “침묵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ㅡ 즉 투명하게 보이는 것을 말하지 않고 참기란 어렵다는 이야기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들을 거역하는 자가 아니라, 상관없는 자들에게 부당하게 대하나?

ㅡ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이고, 이에 따라서 자신에게 부당한 일을 한 사람은 지적한다.

ㅡ 그런데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이다 보니, 자신에게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적을 하게 된다.

ㅡ 이 지적을 받는 당사자는 “당신에게 한 일도 아닌데 왜 그러냐?”는 입장을 밝힐 수 있다.

ㅡ 즉 부당하게 지적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다.

ㅡ 이는 부조리에 대해서 참지 않아야 한다는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보여주는데, 「차라투스트라 1권 10장」에서도 관련 구절을 볼 수 있다.

          그대들은 전쟁조차 신성하게 만드는 것이 좋은 명분이라고 말하는가?

          내가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훌륭한 전쟁이야말로 모든 명분을 신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ㅡ 이 구절은 부조리와의 다툼을 벌일 때, “나와 관련이 없으면 다툴 이유가 없지 않나?”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ㅡ 그에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부조리와의 다툼은 너와 관련이 없어도, 다퉈야 하고, 그렇게 다투는 것은 신성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왜 고통받는 벗에게 딱딱한 침상/야전침상이 되라고 하나?

ㅡ 여기서 딱딱한 침상은 부드러운 잠자리와 반대된다.

ㅡ 부드러운 잠자리는 안락하고 편안한데, 딱딱한 침상은 불편하다.

ㅡ 여기서 안락과 편안은 동정의 특징이라면, 불편함은 올바른 앎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ㅡ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친구에게 동정하지 말고 올바른 앎을 주라고 말하고 있다.

ㅡ 관련해서는 「차라투스트라, 1권 22장 1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대들이 몸을 눕히면서는 편안함과 부드러운 잠자리를 경멸하고, 여린 자들로부터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도 충분치 않다고 할 때, 거기에 그대들의 덕의 근원이 있다.

ㅡ 여기서 차라투스트라는 부드럽고 편한 잠자리를 경멸할 때, 덕의 근원이 있다고 말하는데, 부드럽고 편한 잠자리는 사회적 규율에 따르거나 동정을 받는 것을 말한다.

 

왜 친구가 자신에게 악행을 하는 건 용서하면서, 친구가 자신에게 하는 악행은 용서하지 못하나?

ㅡ 나에게 하는 악행은 타인의 미숙함에 따른 것이라고 이해해줄 수 있지만, 자신에게 하는 악행은 이해하고 넘어가줄 수 있는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하다.

ㅡ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개인은 개인에 대해서는 너그럽지 말고 엄격해야 하기 때문이다.

ㅡ 개인이 자신에게 엄격해야 자신의 행동에서 부조리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ㅡ 이와 관련해서는 「차라투스트라, 1권 19장」을 참고해 보면 좋다.

          나는 그대들의 냉혹한 정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대들 판관의 눈에는 늘 사형집행인과 그 냉혹한 칼날이 번뜩인다.

 

          말하라. 주시하는 눈을 지닌 사랑인 정의는 어디 있는가?

          모든 벌뿐만 아니라 모든 죄까지도 짊어지는 그런 사랑을 창출해다오!

          판관을 제외한 모든 이에게 무죄선고를 하는 그런 정의를 창출해 다오!

ㅡ 이 구절은 정의로움과 관련해서 판관인 자신에게만 엄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세상의 불의를 넋놓고 보란 이야기는 아니다. 불의는 지적하되 처벌하지 말고 기회를 주라는 이야기다.

 

위대한 사랑은 왜 용서와 동정을 뛰어넘나?

ㅡ 위대한 사랑은 이상사회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

ㅡ 이러한 사랑을 가지고 타인을 대하면, 타인은 이상적 존재로 거듭날 수 있게 된다.

ㅡ 왜냐면, 이상 사회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타인 역시 이상 사회를 위한 존재로 거듭나게끔 지적하고 비판하게 되기 때문이다.

 

ㅡ 반면 용서와 동정의 경우, 사회 부조리에 대해서 견뎌낼 수 있게 하기 때문에, 부조리를 묵인하는 꼴이 되며, 이로써 이상 사회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여, 그 가치가 낮게 평가된다.

 

동정하는 자는 왜 어리석고, 동정은 왜 세상에 고통을 가져오나?

ㅡ 동정은 부조리를 견디게 하고, 이로써 부조리를 허용할 여지를 만들기 때문이다.

ㅡ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동정하는 자를 싫어한다.

 

왜 신에게 인간에 대한 사랑은 지옥이며, 왜 신은 인간에 대한 동정으로 죽었나?

ㅡ 본디 신은 인간들이 자신의 규율에 따라 선량하게 살기를 바랐다.

ㅡ 하지만 세상에는 악한 자들이 있었고, 그들에게 고통받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여긴 신은 그들을 동정하여 구원하고자 하게 된다.

 

ㅡ 문제는 그렇게 구원이 가능하게 되면서부터 시작된다.

ㅡ 구원이 가능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현생의 부조리에 맞서기 보다는 어떻게든 버티다가 구원받으려고 노력하게 된 것이다.

ㅡ 또한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도 구원의 회개한다면 구원의 대상이 되다 보니, 악행을 저지르고 구원받으려고 하는 경향이 생기게 된다.

ㅡ 이로써 세상은 부조리와 악행이 넘쳐나게 되는데, 이로써, 신은 자신이 원하던 세상을 이룩하지 못하고,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아 죽게 된 것이다.

 

동정으로부터 인간에게 먹구름이 몰려든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ㅡ 동정을 하게 되면, 사회의 부조리가 지속된다는 특징을 지닌다.

ㅡ 이로써 사회는 부조리를 개선할 수 없다는 전망이 나오게 되는데, 그러면 인간은 절망, 즉 염세와 허무에 빠지게 된다.

 

ㅡ 그런데 이 염세와 허무 속에서 위버멘쉬가 나타난다고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차라투스트라, 서문 4장」, 「차라투스트라, 서문 7장」

         「차라투스트라서문 4장」

          나는 사랑하노라.

          인간들 위에 걸쳐 있는 먹구름에서 하나하나 떨어지는 무거운 빗방울 같은 자 모두를.

          그들은 번개가 칠 것을 예고하고 예고자로서 파멸한다.

 

         「차라투스트라서문 7장」

          나는 사람들에게 그들 존재의 의미를 가르치려 한다.

          위버멘쉬가 바로 그것이요, 사람이라는 먹구름에서 번쩍이는 번개다.

 

창조하는 자들은 왜 하나같이 냉혹하다고 말하나?

ㅡ 창조하는 자들은 사랑을 위해서 노력한다고 말한다.

ㅡ 이는 종교에서 보이는 말과 비슷하다.

ㅡ 하지만 이들은 종교처럼 단순히 용서하고 동정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ㅡ 이들은 이성적이며 강한 존재들인 것이다.

ㅡ 이런 특징을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