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2권 2장 행복의
2장 개괄
2장은 신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올바른 판단을 하려는 의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장이다.
우선 「차라투스트라, 1권 3장」에서 신을 논할 때보다 훨씬 더 공격적으로 이야기를 한다.
신이 허구라는 점과 더불어, 신과 세계에 대한 고전적인 입장, 신은 무한하고 영원불멸하며 진실되는데, 세상은 유한하고 생성소멸하며 허구라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신에 대한 믿음은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자, 현상을 왜곡하는 병이 있기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올바른 판단을 하려는 의지에 대해서는 신을 벗어나려면 이 의지를 지녀야 하고, 그렇게 벗어나면 우리는 부조리한 사회를 벗어나서 자유로워진다고 말한다.
물론 이 의지에 따라서 살아가면서, 부조리한 사회나 방종하고픈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려면, 여러 고통스러운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는 한다.
또 니체는 자신이 이상 사회에 대한 그림자, 위버멘쉬에 대한 그림자를 보았는데, 부조리한 세상 속에 숨겨져 있으므로, 그것을 끄집어 내기 위해서 부조리한 세상에 망치질을 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본문
붉은 껍질이 찢어지는 무화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데,
그것들은 잘 익어서 맛있고 달콤합니다.
저는 잘 익은 무화과가 나무에서 떨어지게 하는 북풍과 같습니다.
벗들이여,
북풍이 무화과를 나무에서 떨어뜨리듯, 여러분에게 제 가르침을 드리고자 합니다.
제 가르침이 주는 고양감과 충만함을 즐기시길 바랍니다.
하늘이 높고 푸른, 풍성한 가을날의 오후 같습니다.
이 풍요로움 속에서 위버멘쉬와 이상 사회를 떠올리며 동경하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잘 익은 무화과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가르침이 잘 익은 무화과 열매와 같다고 한다.
사람들은 먼 바다를 바라볼 때, 신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바다를 바라볼 때 위버멘쉬*를 말하라고 가르칩니다.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올바름을 추구하는 존재를 말한다.
신은 우리의 상상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신을 상상하는 건 괜찮습니다만,
신을 상상하며 신을 기반으로 하는 기존 규율과 가치관에 따르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여러분은 신을 눈 앞에 만들어 낼 수 있나요?
만들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모든 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신은 만들어 낼 수 없지만, 위버멘쉬는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위버멘쉬가 될 수는 없을 지라도,
위버멘쉬의 아버지, 위버멘쉬의 조상이 될 수는 있는 겁니다.
위버멘쉬의 가족이 되는 것, 여러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창조 경험이 되길 바랍니다.
신은 상상입니다.
저는 신에 대한 상상이 여러분의 상상 속에만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신을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은 좋습니다.
다만, 세상의 모든 것을 신과 관련된 것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에서 초월적인 것을 걷어낸 후, 우리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감각을 중심으로, 최대한 생각하려 노력해 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세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여러분을 기준으로 창조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이성, 여러분의 모습, 여러분의 의지, 여러분의 사랑이 담긴 것이 세상이어야 합니다.
신에 의해 창조된 세상이어선 안 됩니다.
행복을 위해서 탐구하고 사색하는 자들이여,
신의 이성과 의지와 사랑에 따른 세상을 살아가면, 우리의 이성도 무용하고, 의지와 사랑도 좌절될 것입니다.
우리의 이성과 의지와 사랑이 담긴 세상을 희망할 수 없다면, 어떻게 우리의 삶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태어날 수도 없고, 비합리적인 것으로부터 태어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 신이 우리를 만들었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친구들이여,
여러분에게 제 마음을 완전히 드러낸다면, 저는 사실 신을 부정하고 싶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신이 상상적 존재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가 신을 상상으로 고안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신을 고안할 수 있는 존재는 어쩌면 신보다도 더 신적인 존재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신을 고안한 우리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죠.
신은 신적인 존재가 고안한 것이 아니니, 우리가 알던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신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고 있고, 이 입장에 따라 나아가고 있습니다.
신은 상상입니다.
그런데 사회는 이 신을 통해서 우리를 억압하고, 우리의 행복을 박탈하고 있는데,
이것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그릇된 상상에 따라 억압하고 있는 이 사회를 말입니다.
신을 긍정하는 것은 기존 가치와 규율을 따른다는 것이고,
이는 올바른 가치와 규율을 판단하고 창조하지 않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면에서 신에 대한 긍정은 올바른 가치와 규율을 창조하는 자에게서 창조하려는 의지를 빼앗는 것과 같은데,
이는 독수리에게서 비행 능력을 빼앗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줄에 묶여 날지 못하는 독수리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에게 있어 신에게 순응하는 것은 독수리가 날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신은 우리에게서 올바른 인식을 방해하는 상상입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이 세계는 유한하고, 사멸하는 것은 허구이며, 그래서 신만이 무한하고 진실되다고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이를 보면, 몸이 뒤틀리고, 현기증이 나며, 구토할 것 같습니다.
진실로 이러한 말을 믿고 생각하는 것을 저는 왜곡하는 병이 있어서 그런다고 생각합니다.
유일자, 완전자, 부동자, 만족자, 불멸자*.
이러한 것은 악한 것이자, 인간에게 적대적인 것이라고 봅니다.
*신의 특징을 말한다.
불멸의 것들,
이것은 그저 상상의 산물일 뿐입니다.
시인들은 이러한 것들이 현실에 존재하는 것인양 거짓말을 해댑니다.
그래서 우리가 혼동하는 것이죠.
시인들은 신이나 불멸 등에 대해 말하곤 하는데, 참 무의미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시인들이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면, 이 세계를 두고서 해야 합니다.
즉 시인들이 유한하고 소멸하는 것*에 대해 찬양하고, 긍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도 무한하거나 영원하지 않고, 소멸한다는 현생의 특징을 말하고 있다.
신을 그려내는 시인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시인은 허구적인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사람들에게 그것이 올바른 것인양 착각하게 한다.
우리는 사회적/종교적 규율에 따라 판단하다 보니 우리를 강제하고 억압하는데,
스스로 판단하고 가치를 창조하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를 강제하지도 억압하지도 않으므로,
우리를 강제의 고통 속에서 해방시키며, 우리의 삶이 보다 가볍게 느껴지게 합니다.
즉 스스로 판단하고 가치를 창조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구원하는 것인 겁니다.
하지만 스스로 판단하고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가 되려면, 많은 고통과 변화가 있게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 실패와 좌절을 겪으면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은 이 유한한 세상의 변호자이자, 긍정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창조자가 되려면, 즉 여러분의 내면에 이상사회를 향하여 나아가는 아이*로 거듭나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아이로 거듭나기 위해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 올바름을 추구하며 겪는 고통도 각오해야 합니다.
저 역시도 이상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의지를 가진 채로, 이상적 존재가 되기 위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사회에서 올바름을 설파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의 최종 상태다.
이에 대해서는 1권 1장의 아이를 참고하면 좋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과 변화는 이상사회로 나아가려는 제 의지에 따른 것이며, 제 운명이 원하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러한 고통과 변화는 이상사회에 대한 제 의지가 올바름을 향해 나아가는 운명으로 나아가면서 생기는 부산물인 것입니다.
부조리한 삶을 살아가는 이상, 부조리를 느낄 수 있는 나의 본성과 의식과 감각, 이 모든 것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감옥에 갇힌 듯이 강제되고 억압되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데 부조리한 세상에 저항하는 나의 의지, 올바른 판단을 하려는 나의 의지는
나를 이 억압 속에서 해방시키고, 내게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이처럼 올바른 판단을 하려는 의지는 우리를 사회적 규율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조리에 맞서는 의지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이며, 이를 통해서 우리는 자유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여러분에게 가르칩니다.
스스로 원하지 않고, 스스로 평가하려 하지 않으며, 스스로 올바른 것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 것.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이것들은 제게 항상 멀리 있기를 바랍니다.
임신한 여성
차라투스트라는 창조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안에 아이를 가지고 출산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아이의 출산에는 고통이 뒤따른다고도 한다.
탐구와 사색을 하면서, 제 이러한 탐구와 사색이 후대로 이어가길 바라고, 그렇게 하여 이상 사회가 구현되기를 바랍니다.
만약 제 탐구가 어떤 이익도 추구하지 않고 순진무구하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오롯이 탐구와 사색이 후대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이 이상 사회를 만들려는 의지가 상상물인 신에게서 멀어지게 했습니다.
신들이 있다면, 우리가 어떤 필요를 느껴 뭔가를 창조하려고 했을까요?
신들이 이미 다 창조했을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이상 사회를 만드려는 제 의지는 저를 사람들에게로 다시 데려갑니다.
망치를 작업할 돌이 있는 곳으로 가지고 가듯이 말이죠.
아, 여러분,
이 세상이란 돌 속에는 이상 사회가 잠들어 있습니다.
내가 바라고 바라는 이상 사회 말입니다.
이 이상 사회가 이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잠들어 있어야만 하다니!
부조리한 사회에 분노한 저는 이제 망치로 돌을, 부조리한 사회를 잔인하게 깨부수려 합니다.
부조리한 사회도 나름의 저항을 합니다만, 그게 제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부조리한 사회를 부수어, 그 안에 있는 이상 사회를 꺼내고 싶습니다.
왜냐면, 이상 사회에 대한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고요하고 가벼운 이상 세계의 가능성, 위버멘쉬의 가능성이 제게 그려진 것입니다.
아 형제들이여,
이런 상황에서 신들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바위 속에 있는 보석
차라투스트라는 부조리한 사회 속에 숨겨진 이상사회를 목격했고,
한시라도 빨리 이상사회를 꺼내고 싶어한다.
생각해볼 거리들
무화과는 무엇을 말하나? 무화과에 대한 설명은 무엇을 담는가?
ㅡ 무화과 자체가 의미하는 바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ㅡ 그저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에 대한 비유일 뿐, 어떤 상징을 넣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ㅡ 즉 자신의 가르침이 아주 좋은 것이란 이야기를 하려는 것뿐이란 것이다.
가을 풍경을 이야기하는 것은 왜 그러한가?
ㅡ 자신의 가르침이 풍요로움을 선사해준다고 보기 때문에 그런 듯하다.
ㅡ 즉 단순히 풍요로움에 대한 설명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신이 창조의지를 넘어서지 말라고 하는가?
ㅡ 신을 떠올려도 되기는 하는데, 신을 떠올리면서 신에 순종하지 말라는 것이다.
ㅡ 즉 신을 통해 기존 관습과 규율에 따르지 말라는 이야기다.
신을 창조해낼 수 있냐고 물으면서, 왜 일체의 신에 대해서 침묵하라고 하나?
ㅡ 여기서 창조한다는 것은 실제로 만들어 낼 수 있느냐를 말한다.
ㅡ 왜 이렇게 해석이 되냐면, 후술되는 것을 보면, 위버멘쉬는 창조해낼 수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ㅡ 즉 실제로 창조할 수 있느냐를 놓고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 이에 따르면, 신은 실제로 만들 수 없으니, 신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말하는 거라 볼 수 있다.
위버멘쉬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닌가?
ㅡ 아쉽게도 위버멘쉬가 되는 과정은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ㅡ 즉, 위버멘쉬가 되려는 의지를 가진다고 해서 누구나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란 이야기이며, 실패자들 포기자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ㅡ 그 과정에서 자기 검열이 필요한데, 이것이 잘 되지 않기도 하며, 자기 확신이 부족하여 실패하기도 한다.
ㅡ 이러한 존재들에게 위버멘쉬가 되려고 하지 말고, 위버멘쉬가 나타날 수 있게 노력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ㅡ 이와 관련하여, 「차라투스트라, 서문 6~9장」, 「차라투스트라, 1권 6장」, 「차라투스트라, 1권 8장」, 「차라투스트라, 1권 17장」 등에서 나타난다; 의역을 참고.
ㅡ 1권에서는 실패자들의 병적 모습이 언급이 된다면, 이번 장에서는 실패를 받아들이고, 후대를 기약하는 자들의 모습이 언급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다.
ㅡ 또한 서문에서는 확신이 부족하여 실패한 자가 나타나게 되는데, 이번 장에서는 이러한 존재들은 죽음을 선택하지 말고, 위버멘쉬의 부모가 되려고 해보라고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왜 신에 대한 추측이 사유가능성의 한계 내에 머물기를 바라나?
ㅡ 이는 신에 대한 생각을 상상물로서만 받아들여야지, 현실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왜 만사를 인간이 생각하고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보라고 하는가?
ㅡ 신적 세계관에 따라 세상을 보지 말라는 이야기다.
ㅡ 현실을 올바르게 파악하려면, 인간의 사고와 판단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왜 자신의 감관에 대해 그 끝에 이르기까지 생각하라고 하는가?
ㅡ 상상으로 세상을 다 살피려고 하지 말고, 감각에 따라서 세상을 살피고 탐구하라는 이야기다.
ㅡ 여기서 상상은 신적 세계관을 말한다.
왜 세계는 그대들에 의해서 창조되어야 하나?
ㅡ 세계의 창조와 관련하여 신을 통해서 해석하지 말란 것이다.
ㅡ 신을 통해서 해석하면, 신을 받아들이고, 신적 세계관에 따른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ㅡ 그런 면에서, 우리의 판단 능력에 따라서 사유하고, 자신들의 의지를 반영하는 세계를 구축하면, 보다 인간적인 세상이 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ㅡ 그렇게 되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억압이나 강제가 덜 해질 것으로 보는 건데, 이로써 삶은 살만 해지게 된다.
ㅡ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점차 이상 사회로 나아가는데, 이것은 이상사회에 대한 희망으로 작용하게 된다.
어떤 희망이 없으면, 삶을 견딜 수 없는가?
ㅡ 인간 중심적 관점에 따른 사회에 대한 희망을 말한다.
ㅡ 이것은 다르게 말하면,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 즉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현생은 고통 뿐이지 않냐는 이야기다.
파악할 수 없는 것이나 비이성적인 것을 왜 태생으로 삼으면 안 되나
ㅡ 파악 불가능한 것과 비이성적인 것은 신적인 것을 말한다.
ㅡ 즉 우리가 신의 창조물이라는 인식을 가져선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ㅡ 이는 신의 창조물이란 인식을 가지면, 신적 세계관에 순응하게 되어, 스스로 올바른 판단을 하려고 하지 않는 상태가 되기에 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신들이 존재한다면, 왜 차라투스트라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견딜 수 없나? 왜 신은 존재하지 않는가?
ㅡ 차라투스트라는 신이라는 것이 개인의 산물이라고 보기 때문에, 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개인들이 신을 창조했다는 것이 된다.
ㅡ 이에 따르면, 신을 창조한 개인이 신보다 우월해지는, 더 신적인 존재가 되는 상황이 생긴다.
ㅡ 그런 면에서 개인이 신보다 더 신이라는 사실을 긍정해야 하는 것이다.
ㅡ 따라서 신이 존재해도 개인이 신이므로, 우리가 말하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신이 주는 고통을 마시고 죽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ㅡ 신이 주는 고통이란, 신에게 순응하면서 생기는 고통을 말한다.
ㅡ 신에게 순응한다는 것은 종교적 규율에 따른다는 것이므로, 종교적 규율에 따르는 것에서 생기는 고통을 말하는 것이다.
ㅡ 그런데 문제는 종교적 규율에 따르게 되면, 개인을 억압하므로 고통이 유발된다.
ㅡ 또한 스스로 판단하고 평가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행복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되므로, 고통이 유발된다.
ㅡ 이에 대해서 차라투스트라는 독수리에게서 비행 능력을 뺏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다.
신은 왜 곧은 것을 구부리고, 서 있는 것을 비틀거리게 하나?
ㅡ 올바른 인식을 방해한다는 것으로,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방해하여, 세상을 긍정할 수 없게 만든다고 보는 것이다.
시간이 사라지고, 사멸하는 것이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 시간의 사라짐은 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ㅡ 즉 영원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ㅡ 또한 사멸하는 것은 신적이지 않은 것을 지칭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말한다.
ㅡ 신적인 것은 불멸하기 때문이다.
ㅡ 신적인 것은 불멸하고 영원하기에, 진리를 나타내는 것인데, 이 세계는 소멸하고 유한하기 때문에 진리를 담고 있지 못하다고 본다.
ㅡ 따라서 이 세계는 허구이고, 진정한 세계는 신적인 것이라고 말하게 되는데, 이는 고대의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ㅡ 즉 차라투스트라는 고대 세계관에 대해서 비판하려고 하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유일자, 완전자, 부동자, 만족자, 불멸자에 대해서 악이며, 인간에게 적대적이라고 보는가?
ㅡ 나열된 것은 신을 말하는데, 신은 인간을 순응하게 만들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최고의 비유는 왜 시간과 생성에 대해서 말하며, 사멸성 일체에 대해 찬미하고 정당화해야 한다고 하는가?
ㅡ 시간과 생성, 사멸성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말한다.
ㅡ 차라투스트라는 현생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노력하라고 이야기를 한다.
ㅡ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해서 찬미하고 정당화하려고 해야 최고의 비유, 즉 가치 있는 표현을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창조는 왜 위대한 구원이며, 삶을 가볍게 만드나?
ㅡ 올바른 판단을 하고 가치를 창조하는 것은 부조리한 사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ㅡ 왜냐면 기존 규율과 가치관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ㅡ 이에 따라서 개인은 억압/강제되던 삶에서 구원되며, 이로써 삶이 가벼워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창조자이려면, 왜 고통과 수많은 변신이 있어야 하나?
ㅡ 창조자는 올바른 이해와 판단을 하려는 존재인데, 이 올바름이라는 척도를 갖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ㅡ 누군가에게는 쾌락이 올바르고, 누군가에게는 이성적인 것이 올바르다.
ㅡ 이런 점에서 올바름에 대한 판단이 어렵고, 자신이 올바르다고 여겼던 것에 따라 판단하다가 자기 검열을 거쳐서 벗어나는 이런 과정이 필요하다.
ㅡ 이 과정이 순탄치 않으며, 여러 오류를 저지르고 후회하게 된다.
ㅡ 이 점에서 고통과 변신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창조자의 삶에는 수없이 많은 쓰라린 죽음이 있어야 하나?
ㅡ 앞서 말한 쾌락주의자, 이성주의자 등의 모습을 하다가, 쾌락주의자인 자신을 없애고, 이성주의자인 자신을 없앤 후 새로운 자신의 모습으로 나아가야 한다.
ㅡ 이 과정을 죽고 살아나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멸성을 변호하는 자이자 정당화하는 자란?
ㅡ 사멸성은 현 세계/세상을 말한다.
ㅡ 즉 세상을 긍정하고 변호하는 자를 이야기한다.
ㅡ 추가적으로, 현 세계에 대한 일반론은 현 세계는 부정적이고 고통만 가득하다는 것이다.
ㅡ 이에 따라서 사람들은 신적 세계관을 받아들이곤 하는데, 이에 맞서는 존재가 위버멘쉬적 존재다.
ㅡ 따라서 신적 세계관에 맞서기 위해서는 현 세계를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ㅡ 하지만 이것이 쉽지 않은데, 현 세계를 긍정할 수 있으려면, 현세계에 존재하는 부조리의 제거가 가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ㅡ 따라서 사멸성을 변호하고 정당화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창조자는 왜 아이가 되려고 산모가 되고 출산의 고통도 겪어야 하나?
ㅡ 이는 비유적으로 한 말로, 앞서 말한 창조자가 되기 위한 고통과 변신을 산모로서 표현한 것이다.
ㅡ 또한 차라투스트라에게 위버멘쉬는 최종적으로 아이의 상태에 놓이게 되는데, 이 아이의 상태가 되려면, 고통이 따른다고 말하는 것이다.
ㅡ 이후 아이를 갖는 과정에 대한 비유도 다 창조자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인 점을 유의하자.
ㅡ 아이의 의미는 「차라투스트라, 1권 1장」의 의역을 참고하자.
왜 나의 의지가 자신의 운명을 바란다고 말하나?
ㅡ 이상 사회에 대한 의지, 올바른 이해를 하려는 의지, 자신의 행복을 찾으려는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창조자의 운명으로 나아간다는 이야기다.
ㅡ 만약 올바른 이해를 하려는 의지가 약하다면, 올바른 이해를 덜 하게 될 텐데, 그러면 위버멘쉬로서의 모습보다는 평범한 존재로서의 모습이 나타나게 될 것이고, 그렇게 살게 될 것이다.
ㅡ 따라서 이러한 자는 위버멘쉬가 되는 운명으로 나아갈 수 없다.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이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왜 감옥에 갇혀 있나?
ㅡ 부조리한 사회에서 지내면, 나란 존재는 어떤 식으로든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ㅡ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받는 고통은 강제와 억압이기에, 감옥에 있다고 표현한다.
ㅡ 왜 갑자기 부조리한 사회 속의 나를 언급하냐면, 내 의지가 작용함으로써 내가 해방되고 기쁨을 누리기 때문이다.
ㅡ 따라서 부조리한 사회에서 고통받는다고 해석하는 게 올바르다고 본다.
왜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의지와 자유에 대한 가르침인가?
ㅡ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올바른 인식에 대한 의지를 가지라는 것이다.
ㅡ 이를 통해서 의지를 갖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ㅡ 그런데 그렇게 올바른 인식에 대한 의지를 가지면, 사회적 규율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된다.
ㅡ 따라서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진정한 자유에 이르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의지하지 않고 평가하지 않고 창조하지 않는 것이 자신과 멀어지기를 바라나?
ㅡ 이는 곧 순응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인식을 하면서, 생식-욕구와 생성-욕구를 느끼나?
ㅡ 차라투스트라가 인식을 하나는 것을 올바른 이해를 얻는다는 것, 탐구하고 사색하여 결과물을 얻는다는 것을 말한다.
ㅡ 차라투스트라가 인식하는 것은 대체로 이상 사회나 부조리한 사회의 문제점이다.
ㅡ 이에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싶을 것이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사색의 결과물을 이어가는 이가 있기를 바라게 되는데, 이를 생식 욕구라고 표현한 것 같다.
ㅡ 또한 이렇게 결과물이 이어져 가면, 이상 사회가 구현될 것이므로, 이를 생성-욕구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왜 차라투스트라의 인식에 무죄/순수함이 있다면, 생식의지가 있다는 것인가?
ㅡ 차라투스트라의 인식은 차라투스트라의 탐구와 그에 따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ㅡ 그런데 여기에 순수함이 있다는 것은 어떤 실리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 따라서 실리를 추구하지 않은 탐구에는 생식 의지가 있다는 것인데, 생식의지는 앞서 퍼트려서 지속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라고 했다.
ㅡ 이는 곧 이상사회의 구현을 염원하기 때문이다.
ㅡ 따라서 자신의 탐구와 그 전파가 실리를 추구하지 않는 것은 이상 사회의 구현을 염원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왜 이 의지가 신을 떠나게 했는가?
ㅡ 이상 사회를 구현하려는 의지는 신을 떠나게 했다는 것인데, 이상 사회를 신이 구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ㅡ 즉, 모든 것을 창조하는 신이 이상 사회는 구현하지 않았으므로, 모든 걸 창조한 신이 없다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로 나아가는가?
ㅡ 이상사회 구현을 위해서는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ㅡ 즉 머릿 속으로 이상사회를 구현하고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돌 속에 형상이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왜 돌은 단단하고 추한가?
ㅡ 돌은 부조리한 사회를 말한다.
ㅡ 형상이 이상 사회를 말하기 때문이다.
ㅡ 차라투스트라는 현생에서 이상 사회가 구현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이므로, 현생 속에 이상사회가 숨겨져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ㅡ 그런데 이 부조리한 사회는 깨부수기가 쉽지 않기에 많은 사람들이 현생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진 것이다.
ㅡ 그래서 돌이 단단하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ㅡ 또한 부조리한 사회는 부조리로 인해서 추하기에, 이 돌도 추하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형상을 꺼내는 일을 완수하려고 하는가?
ㅡ 이상 사회에 대한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ㅡ 만약 그 가능성을 보지 못했다면, 현사회를 건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에게 다가온 그림자, 위버멘쉬의 그림자는 무엇을 말하나? 왜 그 그림자는 만물 가운데서 가장 고요하고 가볍나?
ㅡ 그림자는 가능성을 말한다.
ㅡ 차라투스트라에게 다가온 그림자는 위버멘쉬의 그림자라고 하지만, 위버멘쉬가 가능하다면 이상 사회도 가능하므로, 이상 사회에 대한 그림자라고도 볼 수 있다.
ㅡ 그리고 이상 사회는 사람을 억누르지도 않고 고통을 주지도 않는 것이기에, 가장 고요하고 가벼운 것이라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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