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2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2권 7장 의역 (완) (타란툴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5. 29. 04:10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2권 7장 타란툴라


 
7장 개괄

 

 

7장은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는 자들에게 민감한 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들은 누군가 사회적 규율을 건드리거나 벗어난다고 느끼면, 그 사람을 응징하는 사람들이다.

니체는 이런 측면을 거미줄을 건드린 먹이를 잡는 타란툴라와 같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존재들이 어떤 심리에서 그러는 것인지, 또 어떤 식으로 우리의 주변에서 존재하는지를 폭로한다.

재밌는 것은 이런 거미형 인간의 모습은 차라투스트라의 모습과 혼동될 수 있다는 것이다.

거미형 인간과 차라투스트라는 모두 이상 사회를 바란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하지만 두 유형의 사람들이 바라는 현 사회의 문제점과 이상 사회의 모습이 다르다.

거미형 인간들은 부조리가 규율을 중시하지 않기에 생긴다고 보고, 따라서 규율을 잘 지키면 이상 사회로 갈 수 있다고 본다.

반면 차라투스트라 유형의 경우, 부조리는 잘못된 규율에서 온다고 본다. 따라서 현재의 규율을 벗어나 올바른 규율을 찾고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점을 의식한 니체는 거미형 인간과 차라투스트라를 혼동하지 말아달라고 이야기하는 걸로 보인다.

 


 

본문

 

 

사람들 중에는 사회적/종교적 규율을 지키지 않는 것에 민감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군가 사회적/종교적 규율을 어긴다면, 그를 응징하려고 합니다.

이는 마치 거미줄을 건드린 벌레를 공격하는 타란툴라와 비슷합니다.

 

타란툴라형 인간을 보고 싶다면, 사회적/종교적 규율을 어겨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 유형의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니까요.

 

개인적 가치관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은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호오를 따르다가 이런 이들을 맞닥뜨린다면, 그들에게 규율을 어겼다며 호되게 비판당하게 될 겁니다.

그러면 처음엔 견딜지 몰라도 누적된다면 결국 세상에 대한 좌절과 염세, 허무를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를 방황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누군가 사회적/종교적 규율을 어기지 않나 하면서 주변을 살핍니다.

그러다가 누군가 어긴다 싶으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응징하죠.

 

타란툴라형 인간은 규율과 획일화를 중시하며, 그렇게 획일화된 규율을 정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의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응징하고 다닙니다.

 

저는 이들의 응징으로터 사람들을 해방시키고자 합니다.

왜냐면 이들은 우리가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상 사회로 나아가는 것을 막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타란툴라형 인간들은 저와 원하는 것이 다릅니다.

그들은 사회적 규율에 따라 살면서 규율을 벗어나려는 자들/따르지 않으려는 자들을 응징하는 자신과 같은 사람이 세상에 가득하기를 바라죠.

이것이 정의가 구현된 세상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타란툴라형 인간들은 자신들과 다른 생각/규율을 가진 사람들을 응징하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획일화된 세상을 바라는데, 이에 따르는 것을 미덕이라고 부릅니다.

 

 

타란툴라

거미줄에 걸린 먹이를 응징하듯, 

사회적 규율에 벗어나는 이를 응징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왜 그렇게 규율을 따르는 것에 대해서 민감한 것일까요?

 

그들은 사실 무능력하면서도 남들 위에 군림하고 싶어하는 존재들입니다.

무능력해서 남들 위에 군림할 수 없지만, 그래도 군림하고 싶으니 규율에 기대는 것입니다.

그렇게 규율을 중시하고 있다 보면, 규율을 무시하는 이들이 나타나는데, 그들에게 규율을 근거로 군림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본성을 숨기고, “규율을 바로 세웠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저들을 <규율의 수호자>처럼 여기곤 하죠.

 

이들은 능력이 없지만, 남들 위에 군림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능력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들은 속으로 분노하고 질투합니다.

그렇게 기회를 엿보다가 그가 사회적 규율이나 도덕을 어긴다면, 참아온 분노와 질투를 터트립니다.

 

어떤 면에서 사회적 규율이나 도덕은 남들 위에서 군림하고 싶었던 욕구의 결과물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를 고안한 사람들은 이것을 군림하는데 쓰지는 않았지만, 이 규율을 따르는 현재의 사람들은 이를 통해서 남들 위에 군림하는데 쓰죠.

 

규율에 민감한 이들은 사정은 살피지 않고, 자신이 중시하는 규율에 어긋나는지만 봅니다.

이러한 점은 사실을 중시하지 않고 자신에게 느껴지는 것을 중시하는 감정적인 사람들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들이 이런 비이성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섬세하고 냉정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이 있는데,

그 순간은 바로 상대를 질투하여 어떻게 응징할지 고민할 때입니다.

 

그들 중에는 종종 자신들의 생각을 사상으로 만드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사상이 갖는 문제는 자신들의 모습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는데 주력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사상이 늘 삼천포로 빠져버리고 맙니다.

그러다 지친 그들은 이상한 결론을 내리곤 하죠.

 

규율에 민감한 이들이 불편해 하는 것들은 응징을 받게 됩니다.

이들은 사회적 규율을 찬양하는 방법으로 사회적 규율과 어긋난 것들에 대해선 응징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규율에 어긋난 이를 심판하는 일을 두고 자신들의 행복으로 삼습니다.

 

여러분에게 충고하는데,

누군가가 남을 어떻게든 응징하려고 한다면, 그의 말을 믿지도 따르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자들은 나쁜 유형의 사람들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어떻게든 처벌하기 위해 상대와 여론을 몰아가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자신이 정의롭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많은 말을 하는 사람도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짜 정의로운 사람은 말하지 않고 행동합니다.

따라서 자신을 정의롭다고 많이 이야기하는 이들은 자신을 정의롭게 여기게끔 현혹시키려 하는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자신을 스스로 선하고 의로운 자라고 부르는 자들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위선적이면서, 형식적인 것만을 중시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바리새인*들과 비슷한데, 바리새인들과 달리 이들은 권력이 없죠.

*바리새인들은 사회적 권위를 지닌 자들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규율에 민감한 자들은 사회적 권위를 지니지 않았기에, 바리새인들과 달리 권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자

지배욕이 강한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자 한다.

그 군림의 방식이 옳든 그르든 간에 군림할 수 있다면 그들은 그러려고 한다.


 

저는 여러분에게 규율에 민감한 자들과 혼동되고 싶지도 않으며, 그런 자로 인식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저 타란툴라형 인간들도 저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고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과 저는 다릅니다.

저는 규율을 벗어나라고 하지만, 이들은 규율을 잘 따르라고 하니까요.

하지만 이들 역시 저처럼 현생에 대한 희망을 놓지 말라고, 현생을 위해서 노력하라고 합니다.

이들은 어떻게든 사회적 규율을 지켜야 이 세상이 온전해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감히 말하건대, 사회적 규율을 지킨다고 해서 이상적인 세계가 나타난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사람들이 사회적 규율을 어기므로 삶에 절망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기에 사회적 규율에 잘 따르며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스스로 규율을 잘 따르고, 규율을 벗어나는 이들을 잘 응징하면, 규율에 잘 따르는 사람들이 사는 좋은 세상이 온다는 것이죠.

 

이들이 이러는 것은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고통을 가하고, 회유하려는 것입니다.

이들은 규율에 따라 잘 살면, 죽어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들이 사람들을 회유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들을, 그들의 이단자들을 화형시키지 않고 다르게 대했을 것입니다.

 

이들과 다른 점은 또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우위를 뺏기지 않기 위해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길 바랍니다*.

그러면서 규율을 어기는 그런 존재들에게서 안전하게 우위를 확보하죠.

그래서 이들은 평등을 말하면서, 사회적 규율을 잘 지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규율을 따르며 지낸다면, 모두가 똑같은 수준의 존재가 된다.

이로써 누가 더 유별나고 특별해지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즉 자신의 위상이 깎일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특별한 재능이 없는 이들의 경우, 사회적 규율을 따르라고 말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있어 더 좋다고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저는 이들과 입장이 다릅니다.

저는 사람이 평등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되려 뛰어난 사람과 열등한 사람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렇기에 저는 위버멘쉬를 고안하고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사회적 규율과 가치관들을 지나 미래에 있을 이상적 사회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토론을 통해 규율과 가치의 모순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위버멘쉬로, 이상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 주제에 대해 나와 다른 생각을 경험하고 토론하면서,

올바른 인식을 갖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상 사회를 바라는 개인은 성숙한 존재가 되려고 합니다.

그리고 행복이 깃드는 이상 사회를 바라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서 올바른 인식을 가지도록 성장해야 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상 사회를 구현하려고 하기에, 이를 위해서 성장하려고 하기에

이를 위한 사색과 토론의 시간이 필요한 겁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오류를 극복하는 것이죠.

 

자신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자를 만난 차라투스트라

차라투스트라와 타란툴라형 인간은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 다르다.

하지만 사람들이 혼동할 여지는 있어 보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를 염려한다.


 

벗들이여

돌들이 하나씩 쌓여서 건축된 사원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사원의 모습을 보면, 이 사원을 건축한 자가 사원 속에 삶의 모든 비밀을 담아두었다 할 수 있습니다.

 

이 사원이 아름다운 이유는 싸움과 불평등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원의 재료들이 모두 둥근 천장이 되거나 모두 아치였다면, 이 아름다움을 갖출 수 있었을까요?

어떤 것은 둥근 천장이 되고, 어떤 것은 이 천장을 받치는 아치가 되었기에, 우리는 이 아름다운 사원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아치와 천장의 힘은 서로를 부술 수 있지만, 그것은 적절히 조화를 이루면서 지금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우리도 차이를 인정하면서 이 사원처럼 서로 조화를 이룰 때, 근사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모습으로 서로 대립하며 다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규율에 민감한 자는 저를 이렇게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좀 더 이상적이고 평화로운 사회를 위해선 규율을 지켜야 하고, 그러므로 규율을 지키지 않는 자는 응징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평화를 바라므로, 다툼을 권하는 이야기를 이곳에서 해선 안 된다."

 

이런 비판을 받으면, 저들에 의해 제 생각이 흔들릴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을 따르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을 따를 바에는 불구가 된 사람처럼 그들 속에 있을 것입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지적하고 비판하면서,

사람들에게 이상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하라고는 하지만,

규율을 중시하는 사람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은 아닙니다.

저는 사람들이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 성숙한 존재/자유정신을 가진 존재가 되기를 바라니 말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운 사원의 구조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이러한 건축물의 아름다움에는 힘과 힘의 이상적인 대립과 불평등이 담겨 있다.


생각해볼 거리들

 

타란툴라는 어떤 존재인가?

ㅡ타란툴라는 거미의 일종으로, 거미줄을 쳐서 사냥을 하는 절지동물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특징에 따라서, 사회적 규율을 건드리거나 넘어서려는 자를 응징하는 사람을 표현한다.

ㅡ이후로는 이 존재를 타란툴라형 인간으로 표현하겠다.

 

타란툴라에게는 왜 세모꼴 검은 표식이 있나?
ㅡ이 표식의 의미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는 없는 것 같다.

ㅡ굳이 생각을 해본다면, 두 가지로, 하나는 기독교를 나타내는 종교적 성향이 아닐까 싶다.

ㅡ다른 하나는 경고를 표시하는 문양으로 언급한 게 아닐까 싶다.

ㅡ이 검은 표식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해도 흐름에 영향을 주지는 않긴 한다.

 

타란툴라의 영혼 속에는 왜 복수가 도사리고 있나?

ㅡ타란툴라는 거미줄을 건드리는 존재에게 복수를 한다기 보다는 응징을 하는 동물이다.

ㅡ따라서 복수가 도사린다고 표현하는 것은 의미상 맞지 않는 듯하다.

 

ㅡ복수의 원어를 살피면, rächen인데, 이는 복수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응징하는 것도 의미한다.

ㅡ이런 점으로 볼 때, 복수를 응징으로 이해하면 좀 더 보기 편해질 것으로 생각된다.

 

ㅡ정리하면, 사회적 규율을 건드리면 공격하는 존재인 타란툴라형 인간은 타인을 응징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ㅡ뒤에서 언급되지만, 이 응징하고 싶은 마음은 정의/정의구현이라는 말 뒤에 숨겨서 표출하게 된다.

 

왜 타란툴라가 공격하면, 검은 부스럼이 자라날까?

ㅡ타란툴라형 인간은 사회적/종교적 규율에 어긋나거나 건드릴 때 공격한다.

ㅡ즉, 어떤 사람이 탈사회적인 행보를 보일 때 공격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ㅡ탈사회적 행보를 보인 사람은, 개인적 판단에 따라서 행동을 했다고 한다면, 그는 자신의 의사대로 행동할 때 공격받는다는 인식을 갖게 될 것이다.

ㅡ이렇게 되면, 이 피해자는 세상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음에 따라서 절망하고 염세나 허무를 느끼게 될 것으로 보인다.

ㅡ이러한 절망/염세/허무를 검은 부스럼이라고 한 것 같다.

 

ㅡ관련해서는 「유고 (1882년 7월~1883/84 겨울), 13[1]」의 내용을 참고해 보자.

          그대는 나에게 타란텔 거미다.

          그대의 등에는 타란텔 거미의 검은 삼각 경고 표지가 있다.

          이들 천박한 자들을 그대의 독오른 이빨로 물어라.

          그들의 영혼들이 나에게서 비로소 깊이와 우울 그리고 검은 딱지를 얻도록.

 

          염세주의의 교사들에게.

ㅡ이 구절이 타란툴라에 대한 해석을 온전히 제공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검은 딱지에 대한 부분은 검은 부스럼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왜 타란툴라의 공격/독은 왜 영혼을 돌게 만드나?

ㅡ타란툴라형 인간은 사회적/종교적 규율을 따르지 않는 존재들에 대해서 응징을 한다.

ㅡ이에 따라서 공격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비난에 당황하고 자신의 입장에 대해 회의적이게 될 수 있다.

ㅡ이러한 신념/생각의 흔들림을 영혼이 돈다고 표현한 듯하다.

 

ㅡ영혼이 돈다라는 표현은 drehend의 번역에 따른 표현인데, 이는 ‘회전하는/돌아가는’의 의미를 지닌다.

ㅡ그래서 ‘영혼을 돌게 만든다’로 번역이 된 것이다.

 

ㅡ그런데 타란툴라형 인간의 공격에 영향을 받는 것은 영혼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생각이다.

ㅡ따라서 “생각이 회전한다. 생각이 돌아간다”는 의미로 보아야 적절해 보인다.

ㅡ이러한 의미는 좀 더 의역해 본다면, ‘기존에 가진 생각에 대해서 회의적을 보다/기존의 생각이 흔들리다’ 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을 듯하다.

ㅡ결국 ‘기존 생각에 대해서 회의적으로 생각하게 되다’는 의미로 나아가는 게 적절해 보인다.

 

평등을 설교하는 자들은 왜 타란툴라인가?

ㅡ타란툴라형 인간은 사회적/종교적 규율이 건드려지는 경우에 공격을 하는 특징을 보이는 사람이다.

ㅡ이들이 사회적/종교적 규율을 지키도록 하는 이유는 사회적 측면과 개인적 측면에서 살필 수 있다.

 

ㅡ먼저 사회적 측면의 이유를 보면, 그들은 세상의 부조리는 규율을 지키지 않아서 생긴다고 보기에, 사회적/종교적 규율을 지키게 한다.

ㅡ개인적 측면에서 보면, 사회적 규율을 지키게 함으로써 타인에게 군림할 수 있기에, 사회적/종교적 규율을 지키게 한다.

 

ㅡ그런데 왜 이들은 타인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 사회적 규율을 수단으로 쓴 것일까?
ㅡ타인 위에 군림하길 원한다면, 뛰어난 능력을 갖추면 된다.

ㅡ그러나 그럴 능력이 부족한 이가 있다면, 그는 타인 위에 군림하기 어려울 것이다.

ㅡ즉 그는 군림할 기회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ㅡ그래서 무능력하더라도 타인에게 군림할 수 있는 경우를 찾은 것이고, 그것이 사회적 규율인 것이다.

ㅡ이는 뒤에 차라투스트라가 추가로 언급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ㅡ또한 이들은 지배욕이 있기에 순종하려 하지 않는데, 그러기 위해서 자신들의 가치를 최대한 잃지 않을 방법이 고안하게 된다.

ㅡ이때 “모두가 평등하다”고 하면, 능력에 따라서 차별받지 않아도 된다.

ㅡ따라서 이들은 평등을 이야기 하게 되는 것이다.

          무기력이라는 폭군의 광기가 그대들 내면에서 "동등"을 외쳐대는구나!

          그대들의 가장 은밀한 폭군적 갈망이 덕이라는 말로 자신을 위장하고 있구나!

 

왜 타란툴라는 숨어서 복수/응징을 노리는 자인가?

ㅡ이들은 사회적/종교적 규율을 따르지 않는, 실수하는 자가 나타날 때까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ㅡ이런 면을 보고서 숨어서 노린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타란툴라들이 숨은 곳을 폭로하나?

ㅡ이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타란툴라형 인간들과 자신을 혼동하는 걸 막기 위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사회의 부조리한 인간 유형을 알리고 싶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타란툴라들 면전에서 드높은 웃음을 터뜨리나?

ㅡ정확히 언급되지 않으나, 그들의 내면이 성숙하지 못하다고 여겨 웃는 것으로 보인다.

 

왜 타란툴라들의 정의란 말 뒤편에서 복수/응징이 튀어 오르나?

ㅡ타란툴라형 인간들은 누군가를 응징하고 누군가 위에 군림하고 싶어하는 심리를 정의라는 이름 하에서 진행하며 합리화하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을 복수로부터 구제하려고 하는가? 왜 그게 최고 희망에 이르는 길인가?

ㅡ여기서 인간은 타란툴라형 인간이 아닌 일반적 사람들을 말한다.

ㅡ그리고 복수는 타란툴라형 인간들이 사회적 규율을 벗어났다고 응징하는 것을 말한다.

ㅡ즉 차라투스트라는 사회적 규율을 벗어났다고 응징받지 않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ㅡ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이런 사회적 응징을 받지 않게 해주는 것일까?

ㅡ왜냐면 이런 사회적 응징은 사람들이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ㅡ즉, 이런 응징을 받는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된 것인가 하며 사회적 규율에 다시 따르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ㅡ이렇게 되면, 차라투스트라의 바람과는 다른 일이 펼쳐지게 된다.

ㅡ왜냐면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 개인적 호오에 따른 규율을 만들고 살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이 사회적 응징을 받지 않을 수 있게 해준다면, 그들을 구제한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사회적 규율을 벗어날 사람들을 더 확보할 수 있게 되기에, 이런 활동은 최고 희망에 이르는 길이 된다.

 

타란툴라는 왜 자신들의 복수/응징이 일으키는 폭풍으로 세상이 가득차기를 바라나?
ㅡ타란툴라형 인간은 사람들이 사회적 규율을 잘 따르는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한다.

ㅡ그런 면에서 자신들의 응징을 통해 사회적 규율을 따르는 이가 많아지기를 바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ㅡ그래서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된다.

 

타란툴라는 왜 자신들과 동등하지 않은 자들에게 복수/응징하고 욕을 퍼부으려고 하나?

ㅡ두 가지 이유에서 자신들과 동등하지 않은/다른 자들에게 응징하려 한다.

ㅡ하나는 이상적 사회를 이루는데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ㅡ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다.

ㅡ자신들과 동등하지 않아서 응징하고 욕을 퍼붓는 대상는 자신들보다 뛰어난 존재일 확율이 높다.

ㅡ만약 자신들보다 무능한 존재라면, 그들의 남다름은 감안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 힘을 갖고 있는 것들에 대항하는가?
ㅡ여기서 말하는 힘은 Macht의 번역어로, Macht는 능력/힘을 나타내는 단어다.

ㅡ해석을 좀 더 용이하게 하려면 능력으로 보는 것이 좋다; 이후에도 Macht가 나오지만, 그 의미가 지금 문맥과는 조금 다르다.

 

ㅡ어쨌든 힘을 갖고 있는 것들은 능력이 있는 것들, 유능한 것들, 뛰어난 것들이다.

ㅡ앞서 언급했고, 뒤에 나오겠지만, 타란툴라형 인간들은 타인에 군림하고 싶어하는 자들이고, 그에 따라서 자신들보다 뛰어난 것에 대해서 괄시할 수가 없다.

 

왜 타란툴라는 무기력이란 폭군의 광기로 동등을 외치나?
ㅡ여기서 무기력은 Ohnmacht의 번역어인데, 이 단어는 무력함/무능력함으로 해석할 수 있다.

ㅡ또 der Tyrannen-Wahnsinn der Ohnmacht가 ‘무기력이란 폭군의 광기’로 해석이 되는데, 이것도 무능력함의 폭군적 광기로 해석할 수 있다.

 

ㅡ폭군적 광기에서 폭군적은 광기를 수식하는 것이므로, 우선 제외하고 본다면, 무능력함의 광기를 의미한다.

ㅡ즉 무능력함의 광기로 동등을 외친다는 말이 된다.

ㅡ이는 곧 타란툴라들이 무능력해서 동등을 외친다는 이야기가 된다.

 

ㅡ폭군적 광기도 본다면, 무능력에 따른 광기가 폭군적 특징을 지닌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폭군은 자신이 가진 힘이나 권력을 바탕으로 제멋대로 하는 존재를 말한다면, 이 광기는 남 위에 군림하여 나타나는 광기라고 볼 수 있다.

ㅡ따라서 타란툴라형 인간은 무능력하면서도 남 위에 군림하는 재미를 누리고 싶어하는 인간이란 점을 알 수 있다.

 

ㅡ정리해보면, 이런 타란툴라형 인간은 무능력하지만 순종적 존재는 되고 싶지 않고, 지배적 존재로 군림하고 싶기에, 동등을 외친다는 것이다.

 

왜 폭군적 갈망이 덕이라는 말로 자신을 위장한다고 하나?
ㅡ폭군적 갈망이라는 것은 폭군과 같은 갈망이거나 폭군처럼 굴고 싶은 갈망일 수 있다.

ㅡ이제까지의 이야기로 보면, 후자의 해석이 더 적절해 보인다.

ㅡ이에 따라 보면, 타란툴라형 인간은 폭군처럼 굴고 싶은 자신의 갈망을 미덕으로 치장하고 있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분노에 찬 오만과 억눌린 질투는 왜 언급되나? 그리고 왜 이것이 복수/응징의 광기가 되어 나오나?

ㅡ우선 타란툴라형 인간에게 오만과 질투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ㅡ그런데 왜 분노에 찬 오만이며, 억눌린 질투일까?

 

ㅡ타란툴라형 인간은 현재 폭군이 되고 싶으며, 유능한 존재는 나타나지 않길 바란다.

ㅡ그런데 나타난다면, 당연히 이들에게서 질투를 느낄 것이다.

ㅡ하지만 이 질투를 드러내지는 않을 것이고.

 

ㅡ또 이들은 능력은 없지만 남들 위에 군림하려는 오만함을 가지고 있는데, 유능한 존재가 나타나니, 그 오만함은 위기에 처하고 따라서 분노에 찰 수밖에 없다.

 

왜 오만과 질투는 선조들의 것이라고 언급되나?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는 왜 나오나?

ㅡ여기서 말하는 선조는 타란툴라형 인간의 선조일 수도 있지만, 타란툴라형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의 선조를 말하는 것일 확률이 더 커보인다.

ㅡ이 선조들과 타란툴라형 인간의 관계를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 타란툴라형 인간은 자신들이 타인 위에서 군림하기 위해서 사회적/종교적 규율을 이용한다.

ㅡ그런데 이 사회적/종교적 규율은 누군가가 고안했기에 그들이 이용하는 것이다.

ㅡ여기에 타란툴라형 인간들은 이 규율들을 자신의 군림을 위해서 이용하지 않나?

ㅡ즉 이 규율들은 군림하기 위한 용도로서 개발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ㅡ상황이 이렇게 된다면, 이 규율을 고안한 사람들도, 현재 타란툴라형 인간들과 비슷하게 규율을 통해서 군림하고, 자신보다 유능한 존재를 견제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ㅡ물론 이 사회적 규율 고안자들이 사회적 규율을 타란툴라형 인간들처럼 쓰려고 만들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ㅡ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아버지가 침묵했고, 아들이 발설한다고 말한다.

ㅡ즉 사회적 규율 고안자들은 군림을 목적하면서 활용하지 않았을 지언정, 이 규율을 이용하는 자들은 군림을 목적하면서 사용하므로, 애초에 고안자도 이런 비밀을 지녔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타란툴라는 왜 열광하는 자들과 같나? 왜 그들은 심장이 아니라 복수에 열광되나?

ㅡ의미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해석을 해본다면, 그들은 열광하는 인간, 한껏 감정적으로 고양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ㅡ감정적으로 고양되는 이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자극/상황에 대해서 주관적으로 해석하면서 고양되어진다.

ㅡ이들도 비슷한데, 이들은 어떤 사람의 행동을 어떤 의도인지 객관적으로 살피지 않고 주관적으로 사회적/종교적 규율에 위배되는지를 살피고 응징한다.

ㅡ즉 비이성적인 측면에서 감정적인 사람과 비슷한 것이다.

ㅡ그래서 열광하는 자들/감정적인 자들과 비슷하다고 하는 것 같다.

 

타란툴라가 냉정해진다면 왜 정신이 아니라 시샘 때문인가?

ㅡ타란툴라형 인간은 앞서 말한 것처럼 대체로 감정적인 특징을 보인다.

ㅡ그런데 이들이 감정적이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그게 언제냐면, 응징할 대상을 어떻게 응징할지 고민할 때라는 것이다.

ㅡ즉 시샘해서 응징하려고 할 때만 이성적이라는 것이다.

 

타란툴라들의 질투가 사상가의 길로 이끈다는데, 이게 무슨 말인가?
ㅡ타란툴라형 인간들은 유능한 존재를 질투한다.

ㅡ그에 따라서 그들도 유능한 존재인양 행동하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경우에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체계화하게 된다.

ㅡ이를이야기 한다.

 

왜 타란툴라들은 언제나 멀리간다고 하나? 왜 저들은 눈위에서 누워 잠을 잔다고 하는가?

ㅡ타란툴라들은 유능한 존재가 아니다 보니, 자신들의 사상을 정리할 때,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데 주력한다.

ㅡ그러다 보니 그들의 글은 허황되고 삼천포로 빠진다는 것이다.

ㅡ그래서 결국 그들의 사상과 글은 이상한 결론에 이르고 만다고 하는 것이다.

 

왜 타란툴라의 탄식은 복수가 울려 퍼지고, 타란툴라의 찬양에는 ‘고통을 주자’가 들어 있나?

ㅡ타란툴라형 인간들의 불평은 응징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응징을 하면, 찬양한다는 이야기다.

ㅡ이처럼 심판하는 것은 찬양받고 칭찬받기에, 사람들은 판관이 되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

 

왜 남을 처벌하려는 충동이 강한 자는 믿지 말아야 하나?

ㅡ처벌에 집착하는 자는 자신만의 가치를 중시하며 타인에게 군림하려는 자이기 때문이다.

ㅡ그래서 비천한 족속이라고 평한다.

 

왜 정의에 대해 많은 말을 하는 자는 믿지 말아야 하나?

ㅡ정의롭지 못한 자들이 정의에 대해 많은 말을 하기 때문이다.

ㅡ정의로운 자는 행동으로 보여준다.

 

자신을 선하다고 하는자는 왜 바리새인과 비슷한가?
ㅡ바리새인은 위선적이고 형식을 중시하는 지도계층이다.

ㅡ타란툴라형 인간은 정의와 이상사회를 중시한다고 하지만,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군림하는 것이다.

ㅡ이점에서 타란툴라형 인간과 바리새인은 비슷하다.

ㅡ하지만 타란툴라형 인간은 지도계층은 아니기에, 이점만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와 비슷한 타란툴라가 있나? 왜 차라투스트라는 그들과 자신이 혼동되는 게 싫다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와 타란툴라형 인간은 모두 이상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존재들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가 부조리한 규율을 벗어나면서 가능하다고 말하고, 타란툴라형 인간은 이상 사회가 규율을 철저히 지키면서 가능하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ㅡ사람들이 보기에 둘 다 이상 사회를 가능하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혼동할 수도 있긴 하다.

 

타란툴라형 인간은 왜 삶에 등을 지고 있지만, 삶에 대해 좋게 가르치나?

ㅡ타란툴라형 인간은 부조리가 넘치는 사회에 절망하지만, 규율에 따르려고 노력하다보면 나아지리라고 생각하고 그런 삶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게 된다.

ㅡ이 점을 말한 것이다.

 

타란툴라가 고통을 주고자 하는 대상, 힘을 갖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ㅡ힘을 갖고 있는 자는 앞서 말한 것처럼 유능한 자를 말한다.

 

왜 타란툴라는 힘을 갖고 있는 자에게 고통을 주려고 하나?

ㅡ이 부분은 차라투스트라의 자의적 부분으로 보인다.

ㅡ우선 타란툴라형 인간이 응징을 하는 것은 자신들의 개인적 욕망이 크다.

ㅡ따라서,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려고 응징을 한다고 보기에는 좀 어렵다.

ㅡ타란툴라형 인간들은 그저 자기 좋은 일을 하는 것이지, 차라투스트라형 인간을 고통받게 하려고 그런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 타란툴라들에게는 죽음의 설교가 친숙한가?

ㅡ타란툴라형 인간은 현생을 규율에 따라 열심히 살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기에, 죽음의 설교, 즉 죽음 이후의 내세에서의 행복이 친숙하게 느껴질 수 있어 보인다.

 

타란툴라가 힘을 갖고 있는 자에게 고통을 주려고 하지 않으면 왜 다르게 삶을 가르친다고 하나? 왜 한때는 최고의 세계비방자이자 이단처벌자라고 하는가?

ㅡ이 부분은 정확히 알 수 없다.

ㅡ타란툴라형 인간은 세계에 절망한 상태이고 사회적 규율에 대한 응징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한때만 그런 게 아니라, 지금도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평등을 원하지 않는가?

ㅡ사람마다 수준이 갈리는 것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를 사랑하는 것이고.

 

천개의 다리와 좁은 길을 지나면서 많은 싸움과 불평등이 조성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ㅡ천개의 다리는 여러 규율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며, 좁은 길은 종교적인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여러 규율과 종교적 사상에 대해서 다퉈야 한다는 것이다.

ㅡ그럼 불평등 조성은 무엇을 말하나?

ㅡ이는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살피는 것을 말한다.

ㅡ즉 옳고 그름을 나누면서 위계가 형성되는데, 이를 불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선악/부와 가난 등은 전투의 무기여야 하는가?

ㅡ선악과 같은 것 자체가 전투의 무기라기 보다는, 선악이라는 전장에서 이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다르 사람들과 부딪혀 봐야 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따라서 무기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선악이 아니라 선악에 대한 자신의 입장이다.

 

삶은 자신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을 알려주는 표지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ㅡ선악과 부 가난 등을 놓고 나타나는 토론을 말한다.

ㅡ사람들은 각 주제들에서 입장차이를 보이게 될 텐데, 이때 가지각색의 입장의 대립이 나타난다.

ㅡ이 대립에서 올바른 인식을 찾을 필요를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삶 자신은 무엇을 말하나?

ㅡ여기서 말하는 삶 자신은 이상적 사회를 추구하는 사람의 삶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렇기에 높이 올라가기 위한 기둥과 계단으로 자신을 세우려 한다는 표현이 나오는 듯하다.

 

ㅡ다르게 보려면, 이상 사회를 말한다고도 볼 수 있는데, 후행되는 먼 곳의 응시와 지복이 깃든 아름다움을 이상사회가 바랄 필요는 없어 보이기에, 이상 사회를 추구하는 사람의 삶이라고 보는 편이 나아 보인다.

 

왜 높이가 필요하다고 말하나?

ㅡ이상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선 성숙한 의식이 필요한데, 그러려면 내적 성장이 필요하다.

ㅡ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계단들 사이의 모순, 오르는 자들의 모순이 왜 필요한가?

ㅡ이는 입장의 대립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부조리와 그에 대한 대립/충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ㅡ그래야 부조리를 파악하고, 자신의 부조리도 검열하며 성장하려는 의지를 갖는다는 것이다.

 

타란툴라의 굴이 있는 낡은 사원은 무엇을 말하나?

ㅡ타란툴라형 인간은 사회적 규율을 기반으로 한다.

ㅡ이에 따라서 낡은 사원은 사회적 규율이라고 볼 수 있다.

 

ㅡ또 사회적 규율은 오래 되었기에 낡은 사원으로 표현할 수 있다.

 

자신의 사상을 돌에 담아 높이 쌓아 올린 자는 누구인가?

ㅡ이 자는 낡은 사원을 건축한 자, 즉 자신의 사상을 통해 사회적 규율을 만든 자이다.

 

왜 사상을 돌에 담아 쌓아 올린 자는 삶의 모든 비밀을 안다고 하는가? 비밀은 무엇인가?

ㅡ돌을 쌓아 올린 자는 그렇게 돌을 쌓아서 사원을 만든다.

ㅡ이 자는 돌을 쌓아 올리면서, 돌들의 싸움과 불평등이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차라투스트라는 이야기한다.

ㅡ즉 아름다움은 싸움과 불평등 속에 있다는 삶의 비밀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아름다움 속에도 싸움과 불평등이 있다는 것, 힘을 위한 싸움과 힘을 넘어서는 힘을 위한 싸움은 무엇을 말하나?

ㅡ여기는 비유적 표현이다

ㅡ사회적 규율을 만든 자를 소개한 차라투스트라는 사회적 규율을 낡았지만 아름다운 사원으로 비유한다.

ㅡ그러면서 이 아름다움의 세세한 면을 살피는데, 이 사원은 둥근 천장과 아치형 벽의 힘 싸움과 어떤 것은 천장이 되고 어떤 것은 아치가 되는 불평등으로 구성된 것을 밝힌다.

ㅡ즉 우리가 아름담다고 여기는 것은 싸움과 불평등 속에서 가능했다는 것이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가 주장하는 바, 평등을 싫어한다는 것과 싸움을 장려하는 것에 대한 사례가 되어준다.

 

ㅡ힘을 위한 싸움과 힘을 넘어서는 힘을 위한 싸움은 천장과 아치의 힘 싸움, 나를 억누르는 힘에 저항하고, 나를 억누르는 힘을 넘어서는 것을 말한다.

ㅡ이와 관련해서는 「유고 (1882년 7월~1883/84 겨울)」의 두 구절을 보자.

ㅡ유사한 내용이지만 살짝 의미가 다르다.

          따라서 나의 친구들이여, 우리 서로 적이 되자!

          그대들 위에서 둥근 천장과 아치가 서로 다투면서 굴절하고 있는 것처럼.

          빛과 그림자가 그대들 위에서 거룩하고 의연하고 아름답게 적대하고 있는 것처럼,

          그대들의 사상과 그대들의 벗의 사상도 이렇게 의연하고 아름답게 서로 대립해야

          한다.

 

          하늘의 지붕과 아치들이 격투장에서 서로를 부러뜨리는 것처럼 그리고 빛과 그림자

          와 함께 그것들이 대립하면서 유희하는 것처럼 이 신적으로 유희하는 자들.

          이처럼 확실하고 아름답게 우리도 또한 서로 적이 되어야 한다.

          나의 친구들이여!

          신처럼—우리는 서로에 대립해 유희하자!

 

타란툴라는 왜 갑자기 차라투스트라를 물고, 처벌과 정의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나? 왜 적대관계를 예찬하지 말라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다툼과 불평등을 주장했기 때문에 그렇다.

ㅡ타란툴라형 인간은 평등을 주장하고, 이를 통한 평화를 추구한다.

ㅡ따라서 다툼을 옹호하는 차라투스트라의 주장은 용인될 수 없다.

 

ㅡ또 타란툴라형 인간이 바라는 이상 사회는 규율을 잘 지키면서 나타나므로, 사람들을 응징해야만 한다.

ㅡ그래서 처벌과 정의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기둥에 묶이려고 하는가?

ㅡ이는 제대로 활동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 위한 것으로, 앞장에서 불구자로서 살아온 것을 이야기하는 것과 관련되어 보인다.

나는 오랜 세월을 귀가 먹고 눈이 멀고 벙어리가 되어 불구자처럼 살아왔다.

권력을 추구하는 잡것, 글 쓰는 잡것, 쾌락을 추구하는 잡것"과 함께 살지 않기 위해서.

ㅡ즉 타란툴라형 인간들에 의해서 자신의 생각을 의심할 바에, 그냥 어울리지 않고 그들과 거리를 두겠다는 이야기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돌풍과 회오리 바람을 말하나?

ㅡ타란툴라형 인간은 앞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이 우리의 복수(응징)가 일으키는 폭풍으로 가득 차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는 정의다.

          우리는 우리와 동등하지 않은 자 모두에게 복수(응징)를 하고 욕을 퍼부을 것이다."

ㅡ즉 타란툴라형 인간은 사람들이 규율을 따르게 만드는 폭풍으로 세상을 채우겠다고 이야기를 한 것이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와 비슷한데, 차라투스트라도 사람들을 지적하고 이상 사회로 나아갈 존재를 늘리겠다 심산을 가진 것이다.

 

ㅡ따라서 사람들이 보기에, 두 사람 모두 타인을 어떤 방향으로 몰아가는 돌풍적 존재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자신과 다르다고 이야기를 한다.

 

ㅡ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돌풍이 회전한다는 것에 착안하여, 춤을 춘다고 표현한다.

ㅡ차라투스트라에게 춤을 춘다는 것은 자유정신을 갖췄다는 것을 의미한다.

ㅡ이런 면에서 타란툴라도 춤을 추고, 차라투스트라도 춤을 추는 상태의 존재가 된다.

ㅡ하지만 타란툴라의 응징/돌풍은 자유정신을 갖춰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ㅡ따라서 타란툴라도 춤을 추고 있고 자신도 춤을 추고 있지만, 자신이 추는 춤은 타란툴라의 춤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ㅡ차라투스트라가 춤을 추고 있다면, 그것은 자유정신/위버멘쉬의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