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2권 9장 밤의 노래
9장 개괄
9장은 올바른 이해를 선사하는 자로서의 고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장이다.
니체는 자신이 선사하는 자이기 보다는 차라리 받는 존재였다면, 선사하는 자에게 잘 해주었을 것 같다고 말한다.
왜냐면, 선사하는 자에게는 선사하면서 생기는 고독이 있는데, 자신은 그것을 전혀 해소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앎을 선사하지만 보람이 없다는 점은 니체를 지치게 한다.
그에 따라서 점점 사람들에게 앎을 선사하는 것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점차 니체는 사람들에게 악의를 갖추고, 냉소적이게 된다.
벗이 있으면 가장 좋겠지만, 선사하는 자들은 희귀한 존재이고, 세계에 존재했었어도 서로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니체와 같은 존재의 운명은 외로이 살 수밖에 없는 가혹한 운명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니체는 자신의 이러한 고독을 해결해 줄 존재가 나타나길 바라면서, 다시금 이상사회에 대한 앎을 선사하려는 의지를 다잡는다.
본문
올바름과 관련해서 의문과 혼란에 휩싸인 사람이 있다면,
올바른 이해를 선사하는 사람들은 이 사람이 의문과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우려 할 겁니다.
저 역시도 올바른 이해를 선사하는 사람이니, 이런 사람이 있다면 도울 것입니다.
이상 사회에 대해서 의문과 혼란에 휩싸인 사람이 있다면,
이상 사회를 추구하는 자들은 이들에게 이상 사회의 가능성과 그로 인한 혜택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저 역시도 이상 사회를 추구하는 사람이니, 이런 사람이 있다면 이상 사회에 대해서 이야기해줄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올바름이나 이상사회에 대해서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보면, 알려주고 싶습니다.
이상 사회에 대한/올바름에 대한 열망과 함께 하려는 열망이 제 안에 있고, 그 열망에 따라 앎을 선사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한밤중에 빛나는 별
밤은 올바름에 대한 의문과 혼란을 나타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의문과 혼란을 걷어줄 앎을 제공한다.
저는 올바름과 이상 사회에 대한 이해를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종종 올바름과 이상 사회에 대한 의문과 혼란을 가진 자였다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올바름과 이상 사회에 대한 인식을 가지면서, 저는 고독해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올바름과 이상 사회에 대한 의문과 혼란을 가진 자였다면,
저는 올바름과 이상 사회에 대한 앎을 선사하는 자로부터 배우며 성장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게 앎을 나누는 이들을 축복했을 것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앎을 나누면서 이들도 행복해질 수 있기를 말이죠.
하지만 저는 올바른 것에 대한 의문과 혼란을 가진 자가 아니라,
올바름과 이상 사회에 대한 이해를 갖춘 자이며, 남들에게 알려주고 싶어하는 열의를 가지고 있지만,
아무도 알고자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의문과 혼란을 가진 자가 아니기에, 저는 어느정도 올바른 이해를 갖춘 자이기에,
누군가로부터 올바른 이해를 얻는 행복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종종 저는 올바른 이해를 나눔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다른 사람들처럼 교양을 얻는 것이 더 만족감을 주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교양을 쌓으면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혜택이 있으니까요.
올바른 이해는 얻어서 사람들에게 말해봤자, 이상하다며 지적받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제가 앎을 쉬지 않고 나누는 것,
이것은 관계의 결핍, 제가 저와 같은 앎을 지닌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상 사회의 존재들과 이상 사회를 그리는 것,
이것은 이상 사회 속 존재들에 대한 질투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앎을 선사하는 자의 안타까운 처지이자, 어두운 면입니다.
선사하는 자는 이상 사회를 깨닫고 바라면서, 또다른 갈망, 사람들이 자신과 뜻을 같이 하기를 바라는 갈망에 빠지게 됩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이상 사회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얼마나 전달되었을까요?
제 이야기가 그저 길거리 잡음처럼 들리지는 않았을까요?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모두가 다 감응하는 건 아니죠.
누군가를 설득하고, 그리하여 같은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이 가장 어려운 법입니다.
선생과 제자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앎을 나누는 선생의 역할을 하면서 괴로움을 겪는다.
그래서 자신이 제자이고 따를 선생이 있었다면, 선생의 괴로움을 덜어줄 수 있었을 거라고 아쉬움을 토로한다.
부조리한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절망하다가,
이상 사회로 나아갈 가능성을 보았고, 그로써 저는 충만해졌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 앎을 나눠서, 이상 사회로 구현하려고 노력하려고 합니다.
이상 사회로 나아가려면, 저 혼자선 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렇다 보니 뜻을 같이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한 갈망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죠.
그렇다 보니 제 안에는 악의가 생겨납니다.
한껏 기대했지만 돌아오는 것이 없으니 그런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을 비아냥대고 싶고, 그들에게 절망을 주고 싶어집니다.
앎을 나누는 보람이 없으니, 그들이 알고자 하여 제게 다가와도,
그들이 정성을 보이지 않으면 앎을 나눠주려고 하지 않고 싶기도 합니다.
이런 복수를 나의 선사하려는 마음이 생각해 냅니다.
고독 속에서 선사하다 보니, 이런 교활한 면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앎을 나누는 즐거움이 앎을 나누면서 사라졌습니다.
저의 선사하려는 의지가 기대한 만큼의 보람이 없자 제 풀에 지친 것입니다.
사람이 오랫동안 얻는 것 없이 선사하게 되면, 대가 없이 선사하려는 처음의 의도와 다르게, 대가를 바라게 되곤 합니다*.
저도 앎을 나누지만 기대한 결과가 나오지 않으니,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이죠.
*여기서 말하는 대가는 사회적/물질적 보상이 아니라 앎을 원하는 간절한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상대가 간절히 알길 원한다면 알려주지만, 그리 원치 않는다면 알려주지 않는 것이다.
그 불만으로 인해서, 저는 냉정해집니다.
부조리에 고통받는 자가 있어도, 그를 안쓰러워하며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지 않는 겁니다.
보람없는 나눔에 사람들에 대해서 냉소적이게 되어버린 것이죠.
아, 순수하던 제 인류애는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인류애는 사라지고 보람없는 활동에 따른 고독과 침묵이 제 안에 자리하였습니다!
가르치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선생님
가르침을 통해서 함께 할 이를 찾던 차라투스트라는 그러한 존재를 찾지 못함에 따라서 냉소적이게 변한다.
이상 사회에 대한 앎을 선사할 수 있는 이들이 황량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올바름과 이상 사회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 사람들에게는 말을 건네지만, 제게 말을 건네오는 자는 없군요.
그들은 자신의 시대를 살고, 저는 제 시대를 살고 있으니, 소통할 수 없는 것이겠죠.
이처럼 벗을 두고 싶어도 두기 힘든 것, 같은 생각을 가진 이와 소통하기 힘든 것.
이것이 이상 사회에 대한 앎을 선사하는 자들이 갖는 잔혹한 운명입니다.
앎을 선사하는 자들은 이러한 불공정함을 느끼면서도, 자신과 비슷한 이에게 냉정하게 자기 시대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선사하는 자의 운명을 타고난 자는 냉정하게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며,
올바른 이해/부조리의 개선하려는 의지를 갖추고 사회를 비판하여 주변에 영향을 끼치는 삶을 삽니다.
빛을 선사하는 태양
태양이 만물에게 빛을 선사하듯이,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이들은 사람들에게 이상 사회에 대한 앎을 선사한다.
올바름과 이상 사회에 대해서 의문과 혼란을 가진 이여,
여러분은 선사하는 자의 앎을 통해서 깨우치고 성장하길 바랍니다.
아, 저는 고독에 둘러 쌓였습니다.
그래서 선사하려는 제 의지도 한풀 꺾여 있는 것입니다.
이 고독은 함께함에 대한 갈증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함께 할 수 있는 자를 애타게 찾게 됩니다.
저도 올바름과 이상 사회에 대해서 의문과 혼란을 가진 존재였다면, 덜 고독했을 텐데*.
함께 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갈증과 그에 따른 고독을 느낍니다!
*올바름과 이상 사회에 대한 의문과 혼란을 가진 자는 수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길을 갈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다.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길로 선뜻 나설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전혀 그러지 않았고,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고독하게 된다.
그저 사람들과 함께 의문과 혼란을 가진 채 있었더라면, 고독하진 않았을 텐데, 자신만의 길을 나선 것이 되려 복병이 된 것이다.
올바름과 관련해서 의문과 혼란에 휩싸인 사람이 있다면, 저는 이 사람을 도울 것입니다.
이상 사회에 대해서 의문과 혼란에 휩싸인 사람이 있다면, 이상 사회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해줄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노래했다.
얼어붙어 버린 나눔의 손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노력에 상응하는 보람을 느끼지 못하면서,
사람들에게 냉소적이게 되어 앎을 나누는데 주저한다.
생각해볼 거리들
밤은 무엇을 말하나?
ㅡ여기서 차라투스트라는 빛이자 빛을 나눠주는 존재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나눠주므로, 여기서 빛은 이상 사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ㅡ그리고 밤은 이러한 빛을 받는 존재이므로, 이상 사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받는 존재다.
ㅡ이런 존재는 이상 사회에 대한 의문, 올바름에 대한 의문을 가진 존재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솟아오르는 샘은 무엇을 말하나?
ㅡ솟아오르는 샘은 앎을 나누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사랑하는 자들의 노래는 무엇을 말하나?
ㅡ여기서 사랑하는 자는 이상사회를 사랑하고 바라는 자를 말한다.
ㅡ이런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 것인데, 이 사람은 이상 사회에 대한 긍정적인 면을 노래한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ㅡ따라서 이상 사회의 좋은 점, 긍정적인 면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 안에는 진정되지 않고, 진정될 수도 없는 뭔가가 있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상사회/올바름에 대해서 알려주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ㅡ이런 경향이 있는 것은 이상 사회를 구현하려는 욕망과 함께 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ㅡ이 두 욕망이 차라투스트라의 내면에서 진정되지 않고 진정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ㅡ사랑을 향한 열망은 이상 사회에 대한 열망으로 보면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밤이었기를 바라나? 왜 빛으로 둘러싸인 것은 고독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현재 고독을 느끼고 있는 상태다.
ㅡ이제껏 앎을 선사하긴 했지만, 함께 할 이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ㅡ이에 따라 차라투스트라는 “자신과 함께 할 이를 찾는 것보다 자신이 함께 할 이가 되어주는 게 더 함께 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 같다.
ㅡ빛/올바른 이해를 갖추는 것이 고독으로 이어지는 이유는 올바른 이해로 나아가기가 어렵다 보니 주변에 사람들이 없어져서 고독해지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밤과 같았다면, 빛의 젖가슴을 빨려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앎을 누군가에게 받는다면, 자신의 성향상 그 앎에 흥미를 가지고 더 노력해서 성장했을 것이란 이야기다.
ㅡ젖가슴을 빤다는 것은 “아이가 젖을 먹고 크듯 성장하다”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ㅡ차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하는 걸로 봐서는, 사람들이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를 듣고서 그렇게까지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인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작은 별들을 축복하나? 왜 별들이 행복을 느끼길 바라나?
ㅡ이 부분은 오역이라고 의심되는 부분인데, “그대들 빛의 선물을 받아 지복을 느꼈을 것이다” 라는 표현은 마치 선물을 받는 차라투스트라가 빛의 선물을 받아서 행복을 느꼈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ㅡ하지만 흐름상으로 보면, 선물을 받는 차라투스트라가 선물을 주는 존재들을 축복하고 있고, 선물을 주고받는 활동 속에서 행복을 느끼길 바란다는 의미로 볼 수 있어 보인다.
ㅡ따라서 이 후자에 따라서 글을 보도록 하겠다.
ㅡ이 구절에서 작은 별은 선사하는 자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선사하는 자들이 앎을 선사함에 따른 보람을 얻지 못하면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알고 있다.
ㅡ그래서 이들에게 앎을 선사하고 보람도 함께 얻기를 기도해주는 것이다.
빛 속에서 살고 있고, 솟아오르는 불꽃을 자기 안으로 되마신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ㅡ빛 속에서 살고, 불꽃이 솟아오른다는 특징은 후술되는 태양의 특징으로 보인다.
ㅡ태양은 빛의 원천이기에, 빛이 주변에 즐비하고, 제 스스로 폭발하면서 불꽃이 터져나오기 때문이다.
ㅡ즉 이 구절은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을 태양과 같은 존재로 비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런데 불꽃을 자기 안으로 되마신다고 말하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ㅡ정확하지 않지만, 생각해본다면 이렇다.
ㅡ불꽃은 빛을 발하는 것이다.
ㅡ빛이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불꽃은 깨달음을 산출하는 어떤 것이 된다.
ㅡ깨달음을 산출하는 것으로는 사색이 될 수도 있고, 올바른 것을 파악하려는 열의가 될 수도 있다.
ㅡ여기서는 사색보다는 올바른 것에 대한 열의로 보는 것이 적절한 듯하다.
ㅡ이에 따라 본다면, 올바른 것에 대한 열의가 빛을 발하고서도 다시 되마셔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즉 올바른 것에 대한 열의가 깨달음/앎을 얻고 나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자신 안에 자리한다는 뉘앙스로 보인다.
ㅡ다시 말해, 자신은 올바른 이해에 대한 강한 열의를 지닌 존재라고 보는 게 아닐까 싶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받는 자의 행복을 모르나?
ㅡ차라투스트라는 태양과 같은 존재이기에, 앎을 선사하는 측면에서만 삶을 살아왔다.
ㅡ따라서 실제로 앎을 받는 자들의 행복과 심리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훔치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기를 꿈꾼다고 하나?
ㅡ여기서 훔친다는 것은 교양을 쌓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왜냐면 흐름상, 받는 것은 자신에게서 앎을 받는 것을 말하고 있으므로, 훔친다는 것은 앎을 훔치는 것을 말한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ㅡ그리고 훔치는 것이 교양을 의미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차라투스트라, 1권 11장」에서 언급이 된다.
여기 잉여인간들을 보라!
저들은 창조자의 업적과 현자의 보물을 훔쳐내고는, 그런 도둑질을 '교양'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모든 것이 저들에게서는 병이 되고 재앙이 되어버릴 수밖에!
ㅡ이에 따라 보면, 차라투스트라는 “교양을 쌓는 것이 자신에게서 앎을 선사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기를 꿈꾸곤 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이렇게 보아도 의미가 이상하게 전개되는 것 같은데, 독어본을 참고해서 해석한다면, 이렇게 파악이 가능하다.
Ich kenne das Glück des Nehmenden nicht;
나는 받는 자의 행복을 알지 못한다;
und oft träumte mir davon,
그리고 종종 ~을 꿈꾸었다,
dass Stehlen noch seliger sein müsse, als Nehmen.
훔치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할 거라고.
ㅡ정리해 보면, “교양을 쌓는 것이 자신에게 앎을 선사받는 것보다 더 행복할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ㅡ그렇다면 왜 교양을 쌓는 것이 앎을 선사받는 것보다 행복하다고 할까?
ㅡ이제까지 차라투스트라는 교양을 쌓으려고 하는 것을 비난했는데 말이다.
ㅡ이는 선사받는 자에게 더 이로운 것이 어쩌면 교양을 쌓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ㅡ왜냐면 이상 사회에 대한 올바른 앎을 선사받는 것은 이상 사회를 추구한다면 분명 좋은 것이지만, 현생에 살아가는 존재라면, 교양을 쌓는 것이 주는 혜택이 더 크다고 보이는 것이다.
ㅡ그런 면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가르침보다 교양적 지식이 인간에게 더 이로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인 셈이다.
왜 차라투스트라의 손이 선물을 줄 뿐 쉬지 않는 것은 가난으로 취급되나? 또 왜 자신이 기다리는 눈을 보고 빛나는 밤을 보는 것은 시샘이 되나?
ㅡ이 구절은 차라투스트라가 앎을 선사하는 동기와 이상사회에 대해 동경하는 심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ㅡ먼저 차라투스트라는 열심히 사람들에게 올바른 이해/앎을 선사하는데, 그러는 이유가 뭘까?
ㅡ이는 여러 차례 이야기가 되긴 했지만, 이상사회를 구현하고 싶어서다.
ㅡ그리고 한 가지 더 있는데, 자신과 같이 이상 사회를 구현하려고 노력할 존재를 찾고 싶어서다.
ㅡ이것은 곧 자신과 함께하는 이가 없기에 사람들에게 앎을 선사하고만 있다는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ㅡ즉 차라투스트라의 인맥의 결핍/빈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ㅡ다음을 보자.
ㅡ차라투스트라가 기다리고 있는 눈은 위버멘쉬의 눈일 것이다.
ㅡ다음으로 밝게 빛나는 밤을 본다는 것은 별이 반짝이는/별이 비추는 밤을 본다는 것인 것, 별은 위버멘쉬를 말하므로, 위버멘쉬들이 비추고 있는 세상을 말하고, 이는 곧 이상 사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ㅡ즉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를 보고, 이상 사회를 본다는 것인데, 이것들은 모두 미구현된 상태다.
ㅡ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이것들을 상상하고 떠올리며 그리워한다.
ㅡ그는 위버멘쉬들 사이에 있고 싶고, 이상사회에 머무르고 싶어하는데, 실제 그러지 못하고 있다.
ㅡ이런 면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위버멘쉬를 바라고 이상 사회를 그리워하는 것은 그들 존재와 순간을 부러워한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ㅡ이런 의미에서 가난과 시샘이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자신의 행동들은 자신의 현재 상태를 보여준다는 이야기다.
선물하는 자들의 불행, 태양의 일식, 갈망을 향한 갈망, 포만 속에 깃든 허기는 무엇을 말하나?
ㅡ글의 흐름상으로 보면, 차라투스트라는 선사하는 자로서 살면서의 불만을 느끼고 있고, 그에 따라서 자신의 불만/처지를 토로하고 있는 상황이다.
ㅡ각각의 문구들도 차라투스트라의 불만족스러운 상태를 나타내는데, 하나씩 보자.
ㅡ먼저 선물하는 자들의 불행이다.
ㅡ이것은 이상 사회에 대한 앎을 선사함에도 불구하고 보람이 없는 것을 말한다.
ㅡ어떤 보상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선사함에 따른 소득, 함께 할 이는 구해졌으면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오는 고독을 말한다.
ㅡ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하고 정진하는 것은 엄격한 올바름 추구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하기 어려워서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가 잘 전달된다고 하더라도 함께 하기 어려워할 수 있고, 그래서 보람되기가 어렵다.
ㅡ다음으로 태양의 일식은 앎은 선사하는 존재로서 태양과 같은 자신이 갖는 어두운 면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는 앞서 말한 보람없음/고독함을 말한다.
ㅡ다음으로 갈망을 향한 갈망은 차라투스트라의 심리에 대한 표현이다.
ㅡ즉 이상 사회를 갈망하면서 사람들에게 선사를 했는데, 그 속에서 함께할 동료에 대한 갈망이 생긴 것이다.
ㅡ이것은 차라투스트라가 선사하면서 불행을 느끼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ㅡ포만 속에 깃든 격렬한 허기란 것은 앞서 갈망을 향한 갈망과 관련된다.
ㅡ즉 이제 이상사회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서 충만해졌는데, 그 충만함 속에서 다시금 함께 할 존재에 대한 허기를 가지게 된 것이다.
받는 것과 주는 것 사이에 틈새가 있다는 것은? 왜 가장 작은 틈새에 다리를 놓기가 가장 어렵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앎을 선사하지만, 그에 따른 효과가 없다.
ㅡ이 상황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앎이 사람들에게서 차단되거나 그렇게 효과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ㅡ효과적으로 작용하지 않는 것이 사람들과 자신 사이에 틈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ㅡ이 틈은 관심사와 재능이 관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애초에 이상사회에 대한 관심이 없거나, 이상사회로 나아가려고 할 때 요구되는 능력, 올바름에 대한 강박이 없다면 차라투스트라의 말에 따라서 행동하고 살기가 어렵다.
ㅡ그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의 말에 따라 행동하고 살려면, 극악의 조건을 갖춰야 한다.
ㅡ그렇기에 차라투스트라의 말이 타인에게 잘 전달되고, 그들이 차라투스트라처럼 열심히 살려면 굉장히 어려워지는 것이다.
비추었던 자들에게 고통을 주고 싶고, 선물했던 자들의 것을 빼앗고 싶다는 건 뭘 말할까?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결과에 이르지 못한다.
ㅡ그러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짜증이 나게 되는데, 이에 따라서 받는 자들을 괴롭히고 싶어지는 것이다.
ㅡ따라서 그는 받는 자들에게 고통을 주고 싶어하는데, 그 방법은 아마도 그들에 대해서 말해도 모른다며 비아냥대고 그렇게 해서는 이상 사회로 나아갈 수 없다고 절망시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자신을 향해 손이 내밀어지면 자기 손을 거두는가? 왜 쏟아져 내리다가 멈칫거리는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로부터 보람이 없어서 실망한 상태다.
ㅡ그러므로 선사하는 일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고 있다.
ㅡ이런 불만 상태를 극복하려면, 받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앎을 얻으려고 정성을 보이는 태도라도 보고 싶을 것이다.
ㅡ그렇기에 알려주다가도, 사람들의 정성을 확인하고 알려주는 모습을 보이려고 하는 듯하다.
차라투스트라의 복수는 왜 충만함이 생각하고, 고독에서 솟구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상사회로 나아가고 싶은데, 그것이 안되니까, 자신의 노력을 보람없게 만드는 사람들에게 복수하고자 한다.
ㅡ즉 이상사회로 나아가고 싶은 욕구에서 복수가 비롯되는 것이다.
ㅡ또 고독한 상태에서 선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함께하는 이가 하나씩 늘었더라면, 그는 이런 복수를 기획하지 않았을 것이다.
ㅡ따라서 고독한 상태에서 선사했기에 술수가 솟구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선물할 때의 행복이 왜 선물하면서 죽었나? 왜 차라투스트라의 덕이 넘쳐 흐르면서 자기 자신에게 싫증이 났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앎을 나누면서 불만을 갖게 되었다.
ㅡ따라서 선물을 하면서 선물할 때의 행복, 이상 사회로 갈 수 있다는 충만함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로 나아가고 싶어서, 선사하게 되었다.
ㅡ그런데 이런 선사하려는 의지가 작용하는 중에 보람이 없으니 제 풀에 지치게 된 것이다.
ㅡ이를 차라투스트라의 덕이 넘쳐 흐르면서 싫증이 났다고 표현한 것이다.
왜 늘 선물을 해대는 자의 위험은 수치심을 잃는다는 것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보람을 바라며 앎을 선사했었다.
ㅡ하자민 선사하는 것이 보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ㅡ이런 상황이 놓이니, 차라투스트라는 보람은 아녀도 선사하는 것에 대한 대가를 바라게 된다; 물론 그 대가가 자신에게서 앎을 얻어내고자 하는 정성일 것이지만.
ㅡ그러면서 초기의 자신의 태도와 달라지는데, 이렇게 태도를 바꾸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ㅡ하지만 보람없이 선사를 하다 보니 이런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늘 나누기만 하는 자는 왜 손과 심장에 못이 박혀버리나?
ㅡ보람을 바라고 한 일인데, 보람을 얻지 못하니, 선사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 불만이 쌓여간다.
ㅡ그렇게 되다 보니, 선사 받는 사람에 대해서, 냉정해지게 된다.
ㅡ이처럼 냉정해지는 것을 손과 심장에 못이 박혔다고 표현한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의 눈은 애원하는 자들의 수치심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가?
ㅡ차라투스트라는 본래 사람들이 수치스러워하지 않아도 될 것에 대해서 수치스러워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ㅡ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을 긍정하는 방법을 알려줬었다; 이는 「차라투스트라, 2권 3장」에서 언급이 된다.
인간이 존재한 이래 인간은 너무도 기뻐하지를 못했다.
내 형제들이여, 오로지 그것만이 우리의 원죄다!
우리가 더 기뻐할 줄 알게 되면, 다른 이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도, 고통스럽게
하려는 궁리도 가장 잘 잊을 수 있다.
나는 고통받는 자들을 도왔던 내 손을 씻는다.
내 영혼도 씻는다.
고통받는 자의 고통을 보면서 나는 그의 수치심이 수치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그를 도왔을 때, 그의 자부심에 심하게 상처를 입히고 말았기 때문이다.
ㅡ해당 구절은 세상을 긍정하게 되면, 부조리가 사라진다는 점을 말한다.
ㅡ그러면서 부조리에 고통받는 자들에게 세상에 절망하지 않고, 긍정할 수 있게 앎을 나누려고 하게 된다.
ㅡ그런데 이랬던 차라투스트라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고통받아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자들의 수치심을 보고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 도우려 하지 않는다.
ㅡ이는 사람들에게 냉정해졌다는 것을 말한다.
ㅡ그 이유는 앞서 누누히 말했지만, 자신의 앎에 대해서도 반응이 없는 사람들에게 실망했기 때문이다.
ㅡ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남을 돕고자 하는 자신의 손의 떨림/의지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왜 많은 태양이 황량한 공간을 돌고 있나?
ㅡ태양은 빛을 선사하는 존재로, 차라투스트라와 비슷한 이상사회를 위해서 앎을 선사하는 존재들을 말한다.
ㅡ이들이 황량한 공간을 도는 이유는, 앞서 말한 것처럼 앎을 나누지만 보람이 없기 때문이다.
태양은 왜 차라투스트라에게만 침묵하나? 왜 침묵하는 것은 적의로 인식되나?
ㅡ태양이 차라투스트라에게 침묵하는 이유는 후술되는데, 직역본에 나온 대로 말한다면, 이 태양들은 “자신의 궤도”를 돌기 때문이다.
ㅡ여기서 궤도는 한 개인이 사는 시대를 말한다.
ㅡ즉 시대적으로 차라투스트라와 동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ㅡ이 이야기인 즉, 차라투스트라형 인간은 동시대에 존재하기 힘든 유형의 인간이라고 볼 수 있다.
ㅡ이는 즉 차라투스트라형 인간은 비슷한 존재를 마주하지 못할 운명, 마음에 드는 소통을 하지 못할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고, 이것이 빛을 선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가혹한 운명이고, 빛의 적의에 의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왜 빛을 발하는 자는 가슴 속 깊이 불공정하게, 태양들에 대해서 냉정하게 자신의 궤도를 도나?
ㅡ선사하는 자는 자신의 운명이 불공정하다는 것을 느낀다.
ㅡ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시대에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올바른 앎을 선사한다.
ㅡ이 특징을 서술한 표현이다.
왜 태양들은 폭풍처럼 궤도를 날아가나?
ㅡ태양인 존재는 이상 사회를 바라는 존재다.
ㅡ이런 존재가 세상에서 산다면, 기존 질서에 대해서 비판하고 파장을 일으키려 할 것이다.
ㅡ이러한 특징을 폭풍과도 같다고 표현한 것 같다.
태양이 자신들의 의지에 따르는 것이 왜 태양의 냉정함인가?
ㅡ차라투스트라형 인간이 올바른 이해를 선사하며 산다는 것은 고독으로 나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ㅡ그런 면에서 단호한 결정이 필요한데, 이 유형의 존재들은 과감하게 이성적으로 자신의 의지에 따른 삶을 산다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빛으로부터 온기를 만들어 내라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앎을 통해서 사람들이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다.
ㅡ이를 요청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얼음에 둘러싸였고, 그의 손은 얼음에 화상을 입나?
ㅡ차라투스트라는 현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독한 상태/불만을 가진 상태에 놓였다.
ㅡ그러면서 자신의 앎을 받는 자들에게 나눠주고 싶지 않은, 나눠주려고 해도 순수하게 나눠주기 힘든 상태에 놓였다.
ㅡ이 점을 묘사한 구절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어떤 갈증을 지니고, 왜 그대들의 갈증을 찾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를 함께 구현할 사람에 대한 갈증을 지니고 있다.
ㅡ그리고 그러한 존재는 이상 사회에 대한 갈증을 지닌 존재여야 한다.
ㅡ이 두 각각의 갈증을 언급하고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빛이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해서 외치는가?
ㅡ선사하는 자로서의 삶이 고독하고 힘들기 때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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