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2권 10장 춤의 노래
10장 개괄
10장은 9장과 함께 차라투스트라의 절망이 담긴 장이다.
니체는 자신의 생각대로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을 두고서 사람들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다.
그러면서 삶이라는 것이 절망의 연속이라는 점을 떠올린다.
그렇게 자신의 지침을 토로하지만, 다시금 이상 사회를 위해 시도하려는 의지를 갖추고 있다.
이 과정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삶과 지혜가 유사하다는 점을 살핀다.
삶도 수수께끼 같은데, 지혜도 탐구자에게는 수수께끼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삶과 지혜는 사람들이 알고자 노력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말미에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피로와 그에 따른 우울함을 토로한다.
본문
차라투스트라는 순수한 탐구욕에 따라 올바름에 대해서 토론하는 이들을 마주했다.
그들은 차라투스트라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토론을 이내 멈추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에게 다가가 다정한 몸짓으로 말했다.
“토론을 멈추지 마십시오, 순수한 자들이여.
저는 여러분을 훼방하려고 하지도 않으며,
여러분들이 사회적 관점을 배제한다고 지적하려고 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사회는 순수한 탐구욕에 따라 탐구하지 말라고 하죠.
사회적 규율과 기준에 맞추어서 생각하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사회적 규율에 맞서는 자이자,
이상 사회/올바름에 대해서 대변하는 자입니다.
이런 제가 여러분의 토론을,
이 신성하고 아름다운 토론을 방해하고 비판하려 하겠습니까?
저는 사회적 기준/잣대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입니다.
이러한 벗어남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제가 가진 아름다운 앎들을 경험할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이상 사회를 바라진 않으십니까?
어떻게 해야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을 갖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그에 대해서 저는 답을 가지고 있고, 원하신다면, 알려드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제 생각은 아직 실현되지 못한 채, 제 안에만 있을 뿐입니다.
저는 어서 이상 사회가 구현되기를 바라지만, 아직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이상사회에 대한 열의가 그렇게 강하게 나타나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아 순수하게 토론하는 자들이여,
제가 사람들에 대한 불만을 좀 갖고 토로한다고 해서, 화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들 역시 제게 불만을 토로하겠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은 이상 사회를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여러분들이 다시 토론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맞춰서 저 역시 의견을 내놓을 것이구요.
사회적 규율과 통념에 대한 비판과 이상 사회를 긍정하고 올바른 것을 제시하는 의견 말입니다.”
춤추는 소녀들
깊은 숲의 초원에서 춤을 추는 소녀들은
사회를 벗어난 존재, 이상 사회로 나아가려는 순수하고 어린 존재를 상징한다.
이후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가 삶과 지혜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앎을 나눌 때 했던 이야기다.
“이상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저는 제 앎을 사람들에게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나누는 것에 비해 얻는 보람은 너무나 적었습니다.
부조리한 사회에서 절망하다가,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을 가지면서 그 절망을 벗어났는데, 이제 다시금 절망이라니…
저는 ‘나의 운명이란 정말 끝없는 절망의 연속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운명 속에서 저는 다시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할 의지를 다잡고 살아갑니다.
어제의 절망이 걷히고 다시 꿋꿋이 나아가는 것이죠.
운명이란 것은 우리에게 무엇도 직접적으로 알려주지 않습니다.
늘 간접적으로 알려준다는 면에서 남자를 대하는 여자의 모습 같습니다.
운명이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다 보니, 운명에 대해서 우리는 복잡하게 느낍니다.
예전엔 분명 이러는 것이 좋았는데, 지금은 싫게 느껴지고,
준비할 시간도 없이 막무가내로 시련이 다가오고, 그래서 운명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운명에 대해서 논하는 자들은 운명이란 것이 깊이 있고, 성실하며, 신비하고, 영원한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이 자들이 가져다 붙인 것이지, 운명이 정말 그러한 거라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물론 우리의 운명이 부정적인 것으로 느껴져도, 정말 운명이 부정적인 것이라고 확신하기는 어렵습니다.
운명은 늘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니까요.
황금 낚싯대
삶은 이 낚싯대를 통해 '절망/끝 없는 심연'에 빠진 차라투스트라를 건져 올렸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운명이란 게 무엇인지 알려고 합니다.
운명을 이해해야 삶 속에서 우리는 행복하게, 덜 불행하게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늘 운명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사랑에 빠진 이가 연인을 생각하듯이요.
그런 면에서 우리의 정신/이성은 이 운명을 이해하고 행복한 삶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작용하는 듯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신/이성에 대한 진실입니다.
저는 운명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행복으로 나아가고 싶으니까요.
불행할 때라면, 더욱 운명을 이해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야 덜 고통스럽고 불행을 벗어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생각하려고 하고 올바른 이해를 가지려고 합니다.
그래야 운명에 대하여 올바르게 파악하고, 운명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으니까요.
우리가 올바른 이해를 가진다면,
운명이 우리에게 주었던 경험들의 의미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지혜라고 불리는 올바른 이해는 우리를 기쁘게 하기도 하고, 절망 속에서 벗어나게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지혜와 운명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지혜를 통해서 운명을 통해서 우리가 웃고 절망에서 벗어난다는 점이 말입니다.
질투하는 여인
지혜는 삶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차라투스트라에게 사랑을 받는다.
이에 따라서 지혜는 삶을 질투한다.
올바른 이해, 지혜라는 건 뭘까요?
많은 사람들은 지혜를 갖길 원합니다.
지혜가 주는 혜택들을 통해서 지혜를 얻는 것이 좋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지혜는 잔인할 수 있습니다*.
*지혜가 잔인한 이유는 사회는 지혜보다는 실리적인 것을 더 가치있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혜를 추구하게 되면, 실리를 추구하는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여, 고독해지게 되는데, 이를 잔인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모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쉽게 지혜를 갖고 그에 따른 혜택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람들, 나이가 지긋한 식자도 지혜를 구하려고 하게 되는 것이죠.
*지혜는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고 지시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이런 점에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지혜를 얻고자 한다.
하지만 혜택만 누리고 싶어하는 자들이 많기에, 제대로 노력하면서 구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부조리가 생겨난다.
지혜도 탐구자들이 갈구한다는 점에서, 여성적이라 느껴집니다.
더불어 지혜,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죠.
우리가 내린 이해가 올바른지 그른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하지만 지혜가 구하기 어려울수록 매력적으로 여겨져, 사람들이 더 지혜를 얻고자 하게 됩니다.
운명과 지혜는 비슷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늘 원하는 것이라는 점,
즉 행복을 위해서 운명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듯이, 행복을 위해서 지혜를 얻으려고 하는 점,
우리에게 쉽게 이해되거나 얻어지지도 않는 점,
이해하고 얻는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늘 간접적으로 주어지고 우리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그물을 던지는 어부
낚시보단 그물이 쉽게 물고기를 잡듯,
사람들은 탐구가 아닌 보다 쉬운 방법으로 지혜를 구하려고 한다.
“아 이렇게 말을 하다 보니, 최근의 일이 떠올라 다시 절망감을 느낍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렇게 이야기가 끝나자, 토론은 끝나 토론하던 이들도 자리를 떴다.
그러자 차라투스트라는 우울해졌다.
마침내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말했다.
“보람없는 일에 집중하다보니 이제 지쳐버렸습니다.
제 열의가 많이 사그라진 것입니다.
이제 그에 따른 우울감이 제 안에 느껴지네요.
부정적인 생각들이 제게 찾아옵니다.
'대체 뭘 하고 있나?
무엇을 위해서 지금 존재하고 있나?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아, 나의 친구들이여,
제가 이러는 것은 열의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러한 우울함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지쳐버린 저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저녁
좌절함에 따라 열의가 사라진 차라투스트라는 태양이 무는 것으로 자신의 상태를 표현한다.
생각해볼 거리들
차라투스트라 앞에 나타난 소녀들은 누구인가? 왜 춤을 추고 있나?
ㅡ이 소녀들의 경우, 순수한 존재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ㅡ차라투스트라에게 순수한 존재라면, 사회적 관점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의 존재인데, 이런 존재인 것이다.
ㅡ춤을 춘다는 것은 자신을 억압하던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이 원하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한다는 것을 말한다.
ㅡ즉 사회적 규율에 따르지 않고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ㅡ따라서 상황적으로 본다면, 순수한 자들이 모여서 사회적 규율을 벗어난 채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춤을 출 수도 있겠지만, 이런 자들이 모여서 춤을 출 이유는 없어 보인다.
ㅡ후술되는 내용을 보면, 훼방꾼이나 적이 오면 그것을 중단한다.
ㅡ그런 점에서 보면, 또 이들은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다.
ㅡ뭔가 사회적 관점을 벗어난 대화를 하다가, 차라투스트라가 나타났는데, 그 대화를 중단한 것이다.
ㅡ이에 따라서 저들이 춤을 춘다는 것은 토론을 하고 있었다는 의미로 보는 편이 괜찮아 보인다.
중력의 정신은 무엇이길래 악마인가?
ㅡ「차라투스트라, 1권 7장」에서 중력의 정신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내 악마를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이 진지하고 철저하고 깊고 장엄하다는 것을
알았다.
중력의 정신이었던 것이다.
중력의 정신으로 인해 모든 것이 아래로 떨어져 버린다.
ㅡ중력의 영은 하늘을 날아다니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하는데, 즉 제약을 주는 것을 말한다.
ㅡ그런 점에 따라서 중력은 사회적/종교적 규율이라고 볼 수 있다.
아름다운 복사뼈를 지닌 발은 무엇을 의미하나?
ㅡ정확히 알 수 없으나, 춤을 추는 자의 발을 말하는 것 같다.
ㅡ발은 춤을 추기 위한 기본적 조건이므로,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려는 의지와 같은 기본 자질을 언급하는 듯하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숲이며, 어두운 나무들의 밤인가?
ㅡ숲은 도시로부터 떨어진 곳이다.
ㅡ도시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며, 사회를 말하고, 따라서 숲은 사회로부터 떨어진 곳을 의미한다.
ㅡ즉 자신은 사회적이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ㅡ어두운 나무들의 밤의 경우, 숲이자 어두운 나무들의 밤이라고 하였으므로, 숲과 의미상으로 같다.
ㅡ따라서 사회적이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 식으로 관련을 짓는지는 정확히 알기가 어렵다.
ㅡ후술되는 측백나무의 경우, 빛을 좋아하는 성질을 지닌다고 하므로, 빛을 올바른 이해라고 하고 보면, “어두운 나무들의 밤”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존재로서 의문과 혼란을 갖추고 있다”는 뉘앙스로 볼 수 있다.
ㅡ즉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자란 것이다.
ㅡ따라서 정리한다면, “나는 사회적이지 않으면서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측백나무 아래 장미꽃 비탈은 뭘 말하나?
ㅡ측백나무가 빛을 좋아하므로, 빛을 좋아하면서 생겨난 올바른 이해, 아름다운 결실을 의미한다고 보인다.
꼬마 신은 무엇을 말하나?
ㅡ꼬마 신은 차라투스트라 내부에 있는 아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러나 의미가 단순히 아이라기 보다는 몇 가지 의미가 더 있어 보인다.
ㅡ우선 이상 사회다.
ㅡ왜냐면 차라투스트라 안에서 잠을 자고 있기 때문에, 생각만 되고 있지 구현되지 못한 것으로 봐야 하고, 그렇다면 이상 사회가 이 특징을 갖기 때문이다.
ㅡ그리고 이것을 차라투스트라가 바라는 신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아 보인다.
ㅡ다음으로 자신이 설파한 사람들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 꼬마 신을 꾸짖게 되는데, 현재까지 차라투스트라가 이상 사회를 꾸짖을 이유는 없다.
ㅡ그러면 이상사회와 관련하여 꾸짖을 이유를 갖춘 존재를 찾아야 하는데, 「차라투스트라, 2권 9장」에 따르면, 이상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열의를 갖지 않은 존재들이 그런 존재다.
ㅡ따라서 이 꼬마 신은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 차라투스트라의 벗/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ㅡ물론 이러한 해석은 꼬마 신이 직접적으로 지칭하는 지칭물은 아닌 것 같긴 하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를 의인화하여 “왜 너는 이상 사회를 구현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적극적이지 않은 것이냐? 왜 나만 이러고 있는 것이냐?”라고 하는 중일 수 있는 것이다.
ㅡ그렇게 보더라도, 실질적인 비판의 대상은 이상 사회라기보다는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 존재들에 대한 비판이 된다.
ㅡ즉 이상 사회를 의인화했기에 비판의 대상이 이상 사회가 된 것일 뿐인 것이다.
왜 무희들에게 꼬마 신을 꾸짖어도 화내지 말라고 하는가?
ㅡ앞서 말한 바에 따르면, 차라투스트라가 꾸짖는 꼬마 신은 이상사회를 나타내는 것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비판하는 건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 자들이다.
ㅡ그런데 무희들도 이 이상사회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존재에 해당되기에, 차라투스트라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그들이 좀 더 경각심을 가지고서 노력하기를 바라게 된다.
차라투스트라가 큐피드와 소녀들이 춤출 때 노래를 불렀다고 하는데, 이 표현은 왜 나오는가?
ㅡ여기서 큐피드는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또 소녀들은 순수한 탐구자들이라고 할 수 있고, 춤을 춘다는 것은 토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ㅡ그에 따라서 본다면, 순수한 탐구자들과 사랑이 함께 있고, 순수한 자들이 토론을 하고 있을 때, 차라투스트라가 노래를 불렀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그런데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차라투스트라가 순수한 자들이 토론할 때, 애정을 담아서 뭔가를 이야기했다”는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을 듯하다.
삶은 무엇을 말하나?
ㅡ삶은 삶 자체, 세상/세계를 의미한다.
삶의 눈을 들여다본 차라투스트라는 왜 심연에 가라앉나?
ㅡ삶의 눈을 봤다기 보다는 자신 앞에 펼쳐진 삶의 모습을 본 것이다.
ㅡ그에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앎선사의 부질없음을 목격하게 되고, 그에 따라서 절망하게 된다.
ㅡ이를 묘사했다고 본다.
황금낚싯대는 무엇을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세상에 대한 기대가 좌절되면서 절망에 빠졌는데, 이 낚싯대를 통해서 끌어 올려진다.
ㅡ즉 절망에서 구해내는 뭔가라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삶을 두고 끝 모를 심연이라고 하였나?
ㅡ차라투스트라가 삶에서 절망을 느꼈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전에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절망을 가지고 있다가 이를 극복했다.
ㅡ그런데 현재 또 다시금 절망을 맞이하니까 끝을 모르겠다고 표현한 것이다.
왜 삶은 변덕스럽고 거칠며, 여자 같고 덕도 없나?
ㅡ삶이 변덕스럽다는 것은 삶에서 예전엔 좋았던 것이 나쁜 것으로 취급되는 점을 말한다.
ㅡ삶이 거칠다는 것은 시련이 주어질 때 막 주어진다는 점을 말한다.
ㅡ삶이 여자같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현재의 상황의 의미와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도 간접적으로만 알려준다는 점, 직접적으로 속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는 점을 말한다.
ㅡ삶이 덕을 지니지 않는다는 것은 미덕에 따라서 우리를 대해주지 않는다는 점을 말한다.
그대 사내들은 무엇을 말하나?
ㅡ사내들은 삶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 즉 탐구자를 말한다.
ㅡ여기서 사내들이 언급되는 이유는 삶이 여성적 특징을 가지고 있고, 삶에 대해 이해하려는 자는 이러한 여성적 특징을 지닌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ㅡ남자가 여자를 추구한다는 점에 따른 표현이다.
왜 삶을 깊이 있고, 신실하며, 영원하고 비밀로 가득찬 것이라고 하나?
ㅡ삶이 깊이 있다는 것은 삶은 곱씹어보면 다른 유익함도 있다는 점 때문이다.
ㅡ삶이 신실하다는 것은 조금 표현이 이상하므로 대체할 수 있는 단어인 성실하다로 보면, 삶은 어떻게 해서든 꾸역꾸역 나아간다는 점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ㅡ삶이 영원하다는 것은 삶의 성실함과 관련되어 보이는데, 삶은 쭈욱 지속된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삶이 비밀로 가득차 있다는 것은 삶에서 주어지는 여러 사건 사고들이 어떻게 나아갈지 어떤 의미에서 주어진 것인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ㅡ이러한 특징들을 탐구자들은 삶의 특징으로 언급한다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삶이 자신에 대해 나쁘게 말해도 그녀와 그녀의 웃음을 믿지 않는가?
ㅡ삶이 자신을 나쁘게 말한다는 것은 자신을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는 곧 삶에 대해서 차라투스트라가 부정적으로 느낀다는 것인데,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부정적이라 느껴지는 것도 정말 부정적인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왜 지혜는 화가 났는가?
ㅡ현 상황을 보면, 삶에 대한 탐구자는 삶만을 이해하려고 하고 있다.
ㅡ그런 점에서 사람들에게 알고자 하는 대상인 지혜는 삶을 더 이해하려고 하는 탐구자들의 태도를 보고 불만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ㅡ후에 차라투스트라가 지혜를 삶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 쓴다고 하므로, 의인화된 지혜로서는 자신이 도구처럼 이용당하는 것에 화를 내는 것이다.
ㅡ그리고 이것이 곧 지혜에 대한 진실이 된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삶을 사랑하며, 삶이 미울 떄 가장 사랑하나?
ㅡ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상 사회를 사랑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삶만을 이해하고자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ㅡ여기서는 후자가 더 적절해 보인다.
ㅡ후자에 따라 해석한다면, 차라투스트라는 근본적으로 삶을 이해하려고 한다.
ㅡ그런데 왜 차라투스트라는 삶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일까?
ㅡ그 이유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불행이 주어져도 견디기 위해서로 보인다.
ㅡ삶을 이해해야 행복해지는 법을 알고, 불행을 견디는 법을 알기 때문이다.
ㅡ그럼 삶이 미울 때 사랑한다는 건 어떻게 보아야 할까?
ㅡ삶이 밉다는 것은 불행을 느낀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러면 차라투스트라의 말은 삶이 불행하다고 느낄 때, 더 삶을 이해하고 싶어한다는 말로 볼 수 있다.
ㅡ이는 적절한 말로, 삶이 불행할수록 우리는 더 삶에 대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혜는 어째서 삶처럼 웃음과 황금낚싯대를 가지고 있나?
ㅡ우리가 어떤 상황이나 문제에 대해서 올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절망을 벗어날 수 있다.
ㅡ황금낚싯대는 우리를 절망에서 구해주는 것이므로, 지혜도 이런 능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ㅡ지혜와 삶이 웃음을 보이는 것은 우리에게 웃음으로 때운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ㅡ직접적으로 다 표현하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지혜를 베일을 통해 보고 그물로 잡으려고 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ㅡ베일을 통해서 본다는 것은 치장하게끔 가린 것을 통해 본다는 것으로, 지혜를 너무 좋은 것으로 본다거나 아름다운 것으로 본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ㅡ후술되지만, 지혜는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고 차라투스트라는 본다.
ㅡ그도 그럴 것이 지혜는 올바른 이해를 갖게 하는 것인데, 올바른 이해에 따라서 뭔가를 보거나 깨닫게 되면 추하거나 미숙한 모습이 드러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ㅡ이에 따라 지혜는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 아름답다고 보기 어렵다.
ㅡ하지만 이를 모르는 사람들은 지혜가 주는 명성에 따라서 좋은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ㅡ그물로 잡으려고 한다는 것은 쉽게 얻으려고 한다는 것을 말한다.
ㅡ낚시하는 것에 비하면 그물은 광범위한 영역의 것을 쉽게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혜는 왜 노회한 잉어도 꾈 수 있나?
ㅡ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으나, 노회한 잉어는 현명하다 불리는 자들이 아닐까 싶다.
ㅡ사회적으로 현명하다고 불리는 나이든 자들도 지혜를 구하려고 한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는 것이다.
ㅡ이는 곧 “사회적으로 현명하다고 불리는 자들도 지혜를 잘 모른다”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다.
지혜는 왜 변덕이 심하고 반항적인가?
ㅡ우리가 지혜/올바른 이해를 얻으려고 할 때, 예전에 지혜였던 것이 어떤 순간에는 아니게 되는 현상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ㅡ이에 따라서 변덕이 심하다고 느낄 수 있다.
ㅡ또 지혜를 구하려고 할 때,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ㅡ그런 점에서 반항적이라고 느낄 수 있다.
왜 지혜는 여자라 불리는가?
ㅡ변덕이 심하다는 특징, 쉽게 얻을 수 없다는 특징, 사람들이 얻길 원한다는 특징 등이 여성적 특징이라고 보아서 그렇다.
왜 지혜에 대해서 나쁘게 말할 때, 지혜는 유혹적인가?
ㅡ지혜가 자신을 나쁘게 말한다는 것은 자신을 비하하거나 부정하는 것보다, 자신을 얻기가 쉽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ㅡ그런 경우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더 끌리게 될 것이니 말이다.
삶과 지혜는 왜 비슷한가?
ㅡ삶과 지혜 단어 자체를 놓고 보면 비슷하다고 보기 어려울 수 있다.
ㅡ여기서 실질적으로 비교되는 것은 삶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과 지혜를 얻으려고 하는 것의 유사점이기 때문이다.
ㅡ삶과 지혜 모두 이해하고 얻으려고 할 때, 그 과정이 녹록치 않고 쉽게 찾아지지 않는점, 더불어 잘 이해하도 얻는다면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다시 심연으로 잠기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고양되어 졌으나, 다시금 앎을 선사하면서 얻은 피로감/절망감을 떠올린 것 같다.
태양이 이미 오래전에 졌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여기서 태양은 이상 사회에 대한 열의/의지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풀밭이 축축해지고 숲에서 한기가 오는 것은 뭘 말하나?
ㅡ우울감을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를 둘러싼 미지의 것은 무엇인가?
ㅡ자신의 행적과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로 보인다.
저녁은 무엇을 말하나?
ㅡ앞서 태양이 진 상태이므로, 이상 사회에 대한 열의/의지가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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