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2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2권 14장 의역 (완) (교양의 나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6. 10. 19:44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2권 14장 교양의 나라


 
14장 개괄

 

 

14장은 현대인들의 정신적 빈곤함을 비판하는 장이다.

니체는 이상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사람들이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에 따라서 절망했던 것이 앞선 「차라투스트라, 2권 9~11장」들이었다.

사람들의 노력하지 않음에 절망하던 니체는 이제 사람들에 대해서 좀 더 촌철살인적인 분석을 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행동과 판단이 얼마나 빈곤한지 말한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차라투스트라, 1권 16장」의 내용과 비슷한 면이 있다. 사람들이 진정한 자기 모습을 감추고 좋은 평가만 들으려고 한다는 점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 사회를 위해서는 사람들이 필요하므로, 사람들을 포용하고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밝힌다.

 


 

 

본문

 

 

이상적인 사회를 그리다 보면, 종종 불안이 엄습합니다.

저 혼자만 그 사회 속에 덩그러니 남겨질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상 사회에 혼자 나아가지 않고, 여러분과 함께 나아가리라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부조리를 교양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계몽시키겠다는 의지를 가지고서 말입니다.

아마도 이상 사회를 위해서 여러분에게 다가온 자는 제가 처음일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본 여러분들의 모습은 참 실망스러웠습니다.

왜냐면, 여러분의 행동은 자신을 반영하지 않았고, 사회적으로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로 점철되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사람들 사이에서 좋게 평가될 수 있다면, 그러한 행동을 하여, 그에 따른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는구나.”

이게 여러분을 본 제 감상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진짜 모습은 아니지만,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는 행동들을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주변인들은 여러분들의 행동을 보며, 여러분이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있죠.

또 주변인들 역시 여러분처럼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는 행동을 하며, 좋은 사람이라 판단되려 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이런 모습은 다 가짜일 뿐입니다.

과연 이런 모습들로 얻은 ‘나 자신’에 대한 인식은 진정한 나 자신의 모습이 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모습은 그저 과거부터 이어져 온 문화와 풍습의 결과일 뿐입니다.

문화와 풍습에서 요구하는 모습 속에 진정한 여러분의 모습이 숨겨져 있는 것이죠.

 

여러분의 지금 모습은 여러분의 껍데기이며, 여러분의 진정한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지금 모습을 통해 여러분의 진정한 모습을 알려고 해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러한 모습은 문화와 풍습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여러분은 사회적 가치관에 절어져서는 그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만약 여러분에게서 사회적 가치관을 제거한다면, 여러분 스스로 갖는 가치관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한때 사회적인 누군가에게서 사회적 가치관을 제거해 본 적이 있는데, 자기 자신에 의해 고안된 가치관이 하나도 없더군요.

이 사람은 그렇게 사회적 성취는 이뤘지만, 자신의 내적 만족/내적 행복을 이루지 못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에 저는 이 사람을 떠나갔습니다.

 

가지각색의 모습을 한 사람들

이들은 자신의 외면을 가꾸는 자들로, 내면은 텅 비어있다.


 

이런 여러분과 함께 하느니, 차라리 과거의 학자들의 책을 보며 생각하는 것이 더 나아 보입니다.

왜냐면, 여러분보다 죽은 학자들이 올바른 인식을 위한 유익한 의견을 제시해줄 테니까요.

 

이런 저의 처지는 제게 우울함을 느끼게 합니다.

저는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고 싶지만,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려면 사회적 가치와 규율에 순응해야 할텐데,

저는 저의 가치와 규율을 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온갖 곤란을 제게 준다 하더라도, 여러분처럼 지내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

왜냐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현실적이다.

     종교적 믿음도 없고, 이상 사회에 대한 믿음도 없다.”

 

맞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상 사회에 대해서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사회적 가치와 규율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이지 않습니까?

애초에 이상 사회를 긍정할 생각도 해본 적이 없고, 이상 사회의 필요를 느껴본 적도 없는 존재들이지 않습니까?

 

사회적 가치와 규율에 순응하는 여러분은 사람들이 이상 사회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적당히 부조리도 감안해주고 저지르며 지내고 있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면, 과연 부조리라는 것이 근절이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되죠.

 

스스로를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여.  

저는 여러분을 이상을 떠올릴 수 없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의 정신은 이제껏 이어져 온 모든 시대적 문화와 규율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들의 정신보다 모든 시대에서 이뤄졌던 이상 사회에 대한 바람과 이야기들이 더 현실적*입니다.

*모든 시대적 문화와 규율은 부조리를 어느정도 담고 있다.

이것은 현생을 긍정적으로 여기게 한다기 보다 부정적으로 여기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 점에서 기존 사회의 문화와 규율은 현실의 문제를 반영하고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비현실적이라고 판단된다.

반면 이상 사회에 대한 바람과 이야기는 현실의 문제를 반영하고 있기에 현실적이라고 판단된다.

 

 

교양있는 자의 모습

이들은 자신은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노력하지 않는 자신을 현실적/실용적이라고 이야기 한다.


 

여러분은 그야말로 사색의 불모지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는 이상 사회의 가능성을 그려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색하던 사람들, 그래서 자신만의 가치를 창조하던 사람들은 이상 사회에 대한 바람을 지녔고, 그 가능성을 봤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상 사회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이죠.

 

여러분은 그저 반쯤 열린 문의 틈으로 세상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온전히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지만, 여러분은 여러분이 본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것이 현실이다. 이 세상에 희망이란 없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사색하지 않는 자들이여,

여러분들의 모습은 제가 보기에 굉장히 곤궁에 빠진 자들의 모습으로 보일 뿐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이런 자신들의 모습에 자부하기도 하지만, 여러분들 중 일부는 자신들이 곤궁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 허무해하며, 염세적으로 느낍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은 말합니다.

“신은 왜 나를 이곳에 두는 것일까?

왜 나를 이 공허함 속에 두는 것일까?

이 공허함을 견디라고 여자를 만든 것인가?
이 세상은 참 신기하다!”

 

갇힌 자의 시선

갇혀있는 자에게는 이 문을 통해서 보이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일 것이다.


 

이런 여러분은 허무와 염세를 느껴 절망하기도 우울해하기도 하는데,

이런 모습은 제가 보기엔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스스로를 그런 환경 속에 넣어두고서, 이제 와서 견디기 힘들어 한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런 여러분을 보며 “쌤통이다”라고 여길 수 없다면, 그러면서 여러분들을 포용해야 한다면,

그것은 제게 분명 내키는 일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상 사회로 나아가고 싶기에, 그러기 위해서 사람이 필요하기에 여러분들을 포용할 것입니다.

여러분을 포용하는 것은 이상 사회로 나아가는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 아주 작은 부분이니까요.

그렇기에, 이상 사회로 나아가려는 제게 여러분을 포용하는 것은 그리 부담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게 문제되는 것은 제가 머물 곳입니다.

아, 저는 무엇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할까요, 어디에 머물러야 할까요?

이에 대해 생각해 보지만, 기존의 사회에 절여진 사람들이 있는 어느 곳에서도 저는 머물만한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곳을 찾아 또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미래를 위해서 투자하려고 합니다.

지금 당장은 바뀌지 않는 기존의 질서라도, 추후에는 바뀔 수 있도록 말입니다.

제 가르침이 사회의 상식이 되는 그런 사회, 저는 그런 사회를 사랑합니다.

 

이렇게 노력함으로써, 저는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하던 혈통의 존재임을 인정받고 싶습니다.

현재의 노력으로 미래에 보상을 남겨주고 싶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항해하는 함선

차라투스트라는 미래를 위하여, 이상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항해를 하려 한다. 

 


생각해볼 거리들

 

왜 제목이 교양의 나라인가?

ㅡ현대인들, 즉 현재 부조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교양적인 면을 강조하고 행동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ㅡ그런 면이 부각되는 시대/집단 속에서 살고 있음을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미래로 날아가서 전율하게 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에 대한 긍정적 전망을 가지는 존재다.

ㅡ그러면서 이상 사회에 대한 전망이 실현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해 본 것을 보인다.

ㅡ현재까지 보게 되면, 차라투스트라 자신 외에는 이상 사회에 대한 긍정이 어려웠다.

ㅡ이게 이상 사회가 구현되는 시점까지 변함이 없다면, 이상 사회에는 차라투스트라 외에는 아무도 없게 된다.

ㅡ이것이 이상 사회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또 한 개인만 있는 사회는 불가능하기에, 막연히 이상 사회가 언젠가 오겠지 하기에는 불안하다는 전망이 엄습한 것으로 보인다.

ㅡ이러한 불안감의 엄습을 전율로 표현한 듯하다.

 

왜 시간만이 차라투스트라의 유일한 동시대인이었나?

ㅡ앞서 말했지만, 현재 이상 사회를 긍정하고 전망하는 이가 자신 밖에 없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현대인들에게 돌아오고, 선의의 열망을 가지고 왔나?

ㅡ이상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혼자 이상 사회에 대한 전망을 가질 게 아니라, 나눠야 한다고 느껴서 그러하다.

 

왜 차라투스트라의 눈에 사람들은 알록달록한 반점투성이로 보였나?

ㅡ이는 14장의 전반적인 부분을 보아야 좀 더 이해하기 쉽다.

 

ㅡ우선 여기서 나타나는 사람들은 「차라투스트라, 1권 16장」에서 언급되는 사람들의 모습과 같다.

          그대들은 그대들 자신을 견뎌내지 못하며 그대들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웃을 유혹해 그대들을 사랑하도록 만들고, 이웃의 오류로 그대들 자신을 미화하려는 것이다.

               (중략)

          그대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좋게 말하고자 할 때 증인을 끌어들인다.

          증인을 유혹해서 그대들에 대해 좋게 생각하도록 유도하고 나서, 그대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해버린다.

 

          자신의 앎에 반하는 말을 하는 자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자신의 무지에 반하는 말을 하는 자도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대들은 이웃과 만나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한다.

          자기 자신과 더불어 이웃을 속이는 것이다.

               (중략)

          어떤 사람은 자신을 찾기 위해, 또 다른 어떤 사람은 자신을 잃기 위해 이웃으로 달려

          간다.

          그대들 자신에게 좋지 않은 사랑이 고독을 그대들의 감옥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ㅡ위 글에서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긍정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고, 그에 따라 평가받으면서, 그것이 자신인 양 살아간다.

ㅡ이번 장에서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 구절들 때문이다.

          그대 현대인들이여!

          얼굴과 사지를 쉰 개나 되는 얼룩들로 칠하고는 거기 그렇게 앉아 나를 놀라게 하는

          구나!

 

          그대들의 색채 놀이에 아양을 떨며 따라 말하는 쉰 개나 되는 거울들로 그대들을 둘

          러싸고 있구나!

 

          참으로 그대들 자신의 얼굴보다 더 나은 가면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대 현대인들이여!

          그 누가 그대들을 알아볼 수 있겠는가!

ㅡ얼굴과 사지를 얼룩으로 칠하고, 거울들이 둘러싼다는 표현은, 자기 자신을 특정한 모습으로 보이게 하고, 주변 사람들은 그 모습 그대로를 자신에게 보여준다는 이야기다.

ㅡ이러한 점으로 볼 때, 차라투스트라의 눈에 비친 사람들의 모습은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에 해당될 것이다.

 

ㅡ그렇다면 왜 사람들의 모습은 좋은 평판을 얻은 모습이 아니라, 알록달록한 작은 반점투성이가 되나?

ㅡ이를 위해선, 앞서 인용한 구절을 다시 보아야 한다.

          그대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좋게 말하고자 할 때 증인을 끌어들인다.

          증인을 유혹해서 그대들에 대해 좋게 생각하도록 유도하고 나서, 그대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해버린다.

ㅡ이 구절을 보면,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게끔 유도한다고 했다.

ㅡ즉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좋게 보이게끔 꾸미는 자다.

ㅡ그런데 이 꾸밈이 과연 특정한 측면에서만 꾸미려고 할까?

ㅡ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ㅡ사람들은 자신을 어떤 상황에서도 좋은 인물, 어떤 면도 괜찮은 존재로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지적인 존재, 활동적인 존재, 다정한 존재, 냉철한 존재 등등.

ㅡ그렇다 보니 이런 저런 존재의 모습으로 보이려고 노력하는데, 차라투스트라는 이를 알록달록한 반점투성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다양한 존재의 면을 담으려고 하니까 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사람들의 알록달록한 반점투성이를 보고서 웃을 수밖에 없었나?

ㅡ앞서 살폈던 것처럼, 사람들의 이러한 모습은 그야말로 자기 본연의 모습이 아니라, 그렇게 비춰지길 바라면서 보여준 모습이다.

ㅡ문제는 이러한 모습이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고 여기면서 자부심을 갖는다는 점이다.

ㅡ이러한 면이 차라투스트라에게는 어이없게 여겨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을 보고서 “염료통들의 고향”이라고 말하나?

ㅡ사람들은 이상적 존재, 다양한 좋은 특징을 가진 존재로서의 모습을 보이려고 행동한다.

ㅡ이것을 두고, 좋은 모습으로 보이게끔 자신을 덧칠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ㅡ그리고 이것이 마음에 드는 자들, 그러니까 자신을 꾸미는 것에 동의하는 자들은 이 집단에 머물려고 할 것이다.

ㅡ이런 점에서 “자신을 꾸미는 자들, 덧칠하는 자들의 고향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현대인들은 얼굴과 사지에 얼룩을 칠하나?

ㅡ자기 자신에 대한 좋은 평가를 받고 싶어서 그러하다.

ㅡ이는 앞서 인용한 구절에서 다시금 살펴볼 수 있다.

          그래서 이웃을 유혹해 그대들을 사랑하도록 만들고, 이웃의 오류로 그대들 자신을

          미화하려는 것이다.

               (중략)

          그대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좋게 말하고자 할 때 증인을 끌어들인다.

          증인을 유혹해서 그대들에 대해 좋게 생각하도록 유도하고 나서, 그대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해버린다.

 

왜 사람들은 거울들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나?

ㅡ거울은 자신을 꾸미는 자들을 평가해주는 자들을 말한다.

ㅡ즉 자신을 꾸미는 자들이 진지한 존재, 다정한 존재 등으로 자신을 보이면, 그것에 따라 평가해주는 것이다.

 

ㅡ이러한 평가자들은 말이나 행동 몇 가지만을 보고서 단정지어준다.

ㅡ왜냐면 차라투스트라는 이 현대인들을 보면서, 겉과 속이 다르다고 느끼는데, 이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꾸미는 자와 평가자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어울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보다 더 나은 가면을 쓸 수 없다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자신을 꾸며서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는 것보다 자기 본연의 모습을 갖추려고 노력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ㅡ즉 현재 사람들이 가지는 모습은 가면과 같은 것이고, 본연의 모습은 자기 스스로의 얼굴이라는 이야기로, 자기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과거의 기호들이 적혀 있고, 덧칠된 것은 무엇인가?

ㅡ이는 사람들의 가면의 모습을 말한다.

ㅡ이 가면은 또 꾸미는 자들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모습이다.

ㅡ보여주기 위한 모습이다 보니, 꾸미는 자의 본래 모습은 숨겨지고 있다.

ㅡ그렇다 보니, 기호해독가/내면을 보려는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본래 모습이 드러나지 않게 된다.

 

신장검사관은 왜 나오나?

ㅡ신장검사관은 내면을 파악하는 존재를 말한다.

ㅡ그런데 꾸미는 자들은 내면을 가꾸지 않고 외면만 꾸미기 때문에, 내면을 파악하려는 사람에게서는 그들의 내면은 알 수 없게 된다.

 

왜 이들은 색을 입히고 종잇조각으로 구워낸 존재로 보이나?

ㅡ이들은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모습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내면이 가꿔지지 않은 채로 있다; 이를 불모지로 말하기도 한다.

ㅡ즉 껍데기만 있는 존재로 보이는 것이다.

ㅡ이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왜 이들의 베일로부터 온갖 시대와 민족이 알록달록 내다보고 있다고 하나?

ㅡ이 사람들이 꾸미는 모습은 대체로 시대적으로 민족적으로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온갖 관습과 믿음이 그들의 행동에 말을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이들에게서 가면/베일을 벗겨내면, 새들을 놀라게 할 것이 남나?

ㅡ꾸미는 자들은 외면을 꾸미지, 내면을 꾸미지 않으므로, 이들의 내면은 곪아 있거나 문제가 있게 된다.

ㅡ외면을 꾸미고 내면을 꾸미지 않는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자기 본성을 위한 삶을 살지 않는다는 이야기이거나, 생각이 빈곤한 모습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ㅡ이런 존재는 차라투스트라가 바라는 존재의 모습이 아니기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런 모습을 뼈만 남은 것/해골로 취급하고, 그래서 이러한 존재를 벗어났다고 이야기한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하계에서 과거의 망령들 사이의 날품팔이꾼이 된다고 하나?

ㅡ이는 차라투스트라가 현재의 사람들보다 과거의 사람들과 어울리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ㅡ현재의 사람이 과거의 사람과 어울리는 것은 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왜냐면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인식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과 어울리려고 하니까.

ㅡ그러므로 이 과거의 망령들은 책을 쓴 자들을 말하고, 엄밀하게 본다면 올바른 인식을 위해서 노력한 학자들이라 할 수 있다.

ㅡ이런 자들과 어울리는 것이 차라투스트라에게는 현대의 대중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ㅡ그렇기에 과거의 망령이 현대인보다 살이 더 붙고, 충만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발가벗은 현대인, 옷을 입은 현대인을 견디지 못하나?

ㅡ현대인들은 꾸미는 자인데, 꾸미는 자는 내면을 가꾸지 않는다.

ㅡ차라투스트라는 내면을 가꾸라고 말하기에, 내면을 가꾸지 않는 모습을 보는 것도 힘들고, 외면만 가꾸는 모습을 보는 것도 힘든 것이다.

ㅡ그래서 스트레스를 받는 차라투스트라는 “이것이 내장의 쓰라림이다” 라고 말한다.

 

미래에 벌어질 섬뜩한 일과 새들을 날아가게 만드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왜 차라투스트라는 이것들인 현대인들보다 마음에 든다고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는데, 그 이유는 성숙한 사람들 속에서 살며 개인의 행복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다.

ㅡ문제는 현재가 이상 사회가 아니기에 부조리한 사회이기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면, 사람들과 부딪히게 된다는 것이다.

ㅡ그러면 자연스럽게 배척당하거나 비난받는 여러 곤란한 일들이 생기게 된다.

 

ㅡ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상태가 현대인들과 어울리는 상태보다 낫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현대인들은 현실적이라고 말하면서 믿음도 미신도 갖지 않는다고 말하나?

ㅡ현대인들은 자신을 꾸미려고 할 뿐, 내면을 가꾸려고 하지 않는다.

ㅡ그러는 이유는 내면을 가꾸는 고행은 무의미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ㅡ이러한 측면은 실리를 추구하는 면에서 올바르며 현실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ㅡ내면을 가꾼다는 것은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성숙한 존재로서 살아가려는 것을 말한다.

ㅡ하지만 현대인들은 이를 무의미하게 여기는데, 그 이유는 성숙한 존재로 살아가도 세상이 달라질 것은 없기 때문이다.

ㅡ그렇기에 이들은 이상 사회의 가능성을 전혀 믿지 않는다.

ㅡ또한 이들은 종교적 내세도 믿지 않는다.

ㅡ왜냐면 종교적 내세의 가능성도 없다고 보는 현실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왜 이상 사회에 대한 믿음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이 장에서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을 긍정하는데, 그가 긍정하는 믿음은 이상 사회에 대한 믿음 밖에 없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은 이제껏 믿어졌던 것 일체에 대한 그림인가? 왜 이들은 믿음을 가질 수 없나?

ㅡ사람들은 자신을 사회적으로 좋은 존재로 꾸민다.

ㅡ이것은 다르게 말하면, 사회적으로 좋은 존재라는 것이 있었고, 그것을 이 사람들이 인식했기에, 그런 존재처럼 자신을 꾸민다는 이야기가 된다.

ㅡ즉, 이제껏 좋다고 여겨지는/믿어지는 뭔가가 있었고, 그것을 자신을 캔버스삼아 그려냈다는 이야기다.

ㅡ결국 사회적으로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그린 존재라는 이야기다.

 

ㅡ이는 사회적인 것을 좇는 존재란 이야기고, 다르게 말하면 이상 사회를 긍정하는 존재가 아니란 이야기가 된다.

ㅡ그렇기에 이상 사회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왜 이들은 믿음 자체에 대한 걸어다니는 반박인가?

ㅡ사회적인 것을 좇는 존재들은 이상 사회를 긍정할 수 없게 하는 이유가 된다.

ㅡ이는 누군가 이상 사회를 긍정할 수 없는 이유를 댄다면, 사회적인 것을 좇는 존재들을 이유로 댈 수 있다는 이야기다.

ㅡ그렇기에 살아있는 반박 근거인 셈이다.

 

왜 이들은 모든 사상의 사지를 부러뜨리나?

ㅡ이들은 앞서 현실적이어서 이상 사회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존재라고 해석했다.

ㅡ이에 따라서 보면, 부조리한 사회가 개선될 수 없다는 자들이고, 이는 곧 세상에 대해서 염세/허무를 느끼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ㅡ세상에 대해서 염세와 허무를 느낀다면, 어떤 사상도 무의미하다고 여기게 된다.

ㅡ그렇기에 사고하고 사색하는 것 자체를 무의미하게 여기기에, 사상들은 자라날 수가 없게 된다.

 

왜 사람들의 정신 속에는 온갖 시대가 반목하며 지껄이나?

ㅡ이 사람들의 정신은 사회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왜 온갖 시대의 꿈과 잡담이, 사람들의 깨어있음보다 더 현실적인가?

ㅡ현재 언급되는 사람들은 사회 속의 대중적 존재를 말한다.

ㅡ이들은 그저 살아 있을 뿐, 사색하지 않는다.

ㅡ그런 점에서 과거 꿈꾸던 자들이나 사색하는 자들보다도 노력하지도 생각하지도 않는 존재들이다.

ㅡ게다가 이들은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세상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있다.

ㅡ시대가 나아지고 문명이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비현실적인 것이다.

ㅡ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왜 현대인들은 불모의 존재들인가?

ㅡ이들은 스스로 사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그들의 내면/정신은 어떤 것도 없는, 불모지인 것이다.

 

창조하지 않을 수 없던 자는 왜 참된 꿈과 별의 조짐을 가지고 있었나?

ㅡ창조하지 않을 수 없던 자들은 사색하던 자들로서, 올바름에 대해서 사색하고, 가치를 창조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ㅡ이런 성향의 사람이라면, 응당 이상 사회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고, 그 가능성을 짐작하게 되었을 것이다.

 

왜 현대인들은 무덤파는 자들이 기다리는 반쯤 열린 문인가? 왜 이들은 “모든 것은 몰락할 만하다”고 말하나?

ㅡ무덤파는 자들은 삶을 부정적으로 보는 자들을 말한다; 그렇기에 죽음을 구원으로 보는 자들이라 할 수 있다.

ㅡ이들은 삶을 절망적인 것으로 보는 특징을 지니는데, 현대인들도 같은 관점을 갖는다.

ㅡ그렇기에 모든 것이 몰락할만 하다고 말한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이런 절망적 관점은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아니라, 너무 단순한 인식이다.

ㅡ따라서 반쯤 열린 문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왜 불모의 존재들 중 몇몇은 자신들이 앙상하다는 것을 아는가?

ㅡ현대인들, 즉 꾸미는 자들은 자신들 중 일부는 세상의 부조리에 별로 괘념치 않는다.

ㅡ왜냐면 생각해도 의미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ㅡ반면 또 몇몇의 꾸미는 자들은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서 생각하곤 한다.

ㅡ그런 면에서 자신들의 처지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을 자각한다.

 

왜 불모의 존재 중 일부는 자신이 잠든 동안 신이 뭔가를 훔쳐갔다고 여기는가? 왜 갈비뼈/여자 이야기가 나오나?

ㅡ여기서 언급되는 사람들은 세상의 부조리를 느끼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ㅡ이들은 공허함을 느끼면서, 자신들이 왜 이 부조리한 세상에 있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ㅡ즉 이들이 보기에, 신이 뭔갈 뺏어가서 자신들이 공허함을 느낀다고 보는 것이다.

 

ㅡ그러면서 이 존재는 공허함을 견딜 수 있는 수단이 있음을 자각하는데, 그것이 바로 여자다.

ㅡ즉, 신이 부조리한 세상을 견디라고 인간에게 성性을 부여했다고 본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놀라워할 때 웃는가?

ㅡ사람들의 모습이 어리석기 때문인데, 스스로들 노력하지 않으면서 세상의 부조리에 절망하고 놀라기 때문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을 보고 웃지 못하고, 사람들 안의 역겨울 것을 마셔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이끌어서 이상 사회를 함께 하려고 한다.

ㅡ그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부조리하게 살다가 부조리에 괴로워하는 것을 보며 고소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포용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ㅡ이 점을 이야기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라에서 고향을 발견하지 못하나?

ㅡ자신이 나고 자란 기존 사회에서는 자신이 안주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ㅡ그렇기에 그는 안주할 수 있는 나라/사회를 건설하려고 한다.

 

아이들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ㅡ아이들의 나라는 미래의 사회를 말한다.

ㅡ기존 사회에서 자신이 안주할 수 없는 것은 기존 사회의 질서가 너무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 기존 사회의 질서와 부딪히면서, 기존 사회의 변화를 이끌고, 이로써 미래에는 좀 더 이상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질서로 만드려고 하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자기 조상들의 아이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보상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조상은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는 존재들을 말한다.

ㅡ즉,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한 존재들 중 하나로서 아이들에게 남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ㅡ그렇게 노력해서 아이들에게 이상 사회를 제공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