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2권 21장 인간적 지혜
21장 개괄
21장은 니체가 세상을 살아갈 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장이다.
여기서 니체는 세상에 대한 자신의 마음가짐, 즉 이상사회를 이룩하겠다는 자신의 마음을 먼저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에 맞춰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이야기하는데, 니체는 이상 사회의 구현을 위해서 사람들 사이에서 부조리와 그릇됨을 견뎌 배척당하지 않으려고 한다.
니체가 이러는 이유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그나마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할 존재를 찾아볼 수도 있고, 부조리한 사회를 개선할 기회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체는 최대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숨긴 채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게 된다.
즉 단순히 올바름만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전략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이는 「차라투스트라, 1권 1장」에서 아이가 언급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즉, 사람들에게서 아이와 같은 존재로 인식되면, 이상한 소리를 해도 배척당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아이란 부조리한 사회에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보여지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의 최종적 모습인 것이다.
본문
높은 곳에 있을 때보다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는 중간 비탈에서 우리는 많은 고민에 빠지는 듯합니다.
밑을 바라보며 “괜히 올라가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래도 정상은 올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교차하면서 드니 말입니다.
저의 마음도 그러한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이상 사회를 구현하고 싶다”는 마음과 더불어서 “이상적 존재로서 노력하며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상 사회를 구현하고 싶다는 마음은 사람들로 나아가게 하고, 이상적 존재로서 노력하며 살고 싶다는 마음은 나를 고독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여기서 저도 고민에 빠지는 겁니다.
당장의 저는 이상 사회를 구현하고 싶기에, 사람들 사이에 머무르고자 합니다.
사람들과 함께 나아가야 이상 사회라는 게 가능하니까요.
그렇게 저는 모두와 함께 나아가는 이상적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겁니다.
산비탈을 오르는 자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만 중단하고 내려갈지 더 올라갈지 고민한다.
차라투스트라도 이상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절망하면서 고민했다.
이상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
저는 사람들 사이에서 부조리하고 그릇된 것을 보더라도 못본 체하며 있습니다.
당장의 부조리하고 그릇된 것보다 더 간절히 바라는 것,
사람들 사이에 머물며 이들을 이상 사회로 이끌어야 한다는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에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러한 태도로 사람들 사이에서 버티는 것이죠.
그러면서 저는 그릇된 것, 부조리한 것을 행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릇된 것을 올바른 것이라고 말해도 말이죠.
이게 부조리한 사회에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안한 첫번째 깨달음입니다.
그릇된 것을 올바른 것으로 속이는 사람들 속에서 문제없이 어울리는 것 말입니다.
제가 만약 이들을 배척하고 거리를 둔다면, 이들에게 저의 올바른 이해는 전달될 기회조차 없을 겁니다.
“그릇된 자들을 배척하지 말고 공존해야 한다”
이 명령이 제 운명에 드리워져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공존하려면, 올바른 이해만을 취해선 안 됩니다.
그릇된 이해도 받아들여야 하죠.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모습을 지키려면, 부조리한 모습도 참고 견딜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저는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부조리/그릇됨을 허용하여 그들에게 배척당하지 않게 되었으니, 이상사회를 위해 노력할 기회를 얻었다.
이것은 내게 다행이다.”
더러운 물이 담긴 컵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있으려면, 그릇됨과 부조리를 견딜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어떤 잔의 물도 마시고, 더러운 물로도 자신을 씻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저는 성숙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자보다는 허영심이 많은 자들을 더 아낍니다.
그래서 허영심을 가진 자들에게 비판하지 않으려고 하는 편입니다.
이것이 부조리한 사회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안한 두 번째 처세술입니다.
성숙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자라면, 비판은 분명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역할을 할 테지만,
허영적 존재에게 비판은 그저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분명 자신들을 비판한 자를 파멸에 이르게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상 사회를 위해 사람들 사이에 머무르려는 제 목적은 이루지 못하게 되니,
저는 이들을 분별하고 특별 대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허영심을 가지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허영심을 갖는 이유는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삶을 멋지게 보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허영심을 갖고, 자신들이 대단한 사람인양 뽐내고 다니는 겁니다.
이들은 대단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싶어하기에 사람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길 바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관심을 받을까 하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이죠.
저는 이렇게 꾸며대는 자들을 가까이서 구경하길 좋아합니다.
왜냐면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상 사회에 대한 의지를 다잡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생기는 우울감을 이겨내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이러한 존재들을 아낍니다.
허영심이 많은 자들은 사람들 앞에서 겸손한 모습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들이 겸손한 자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을 좋게 평가하게 함으로써 자신에게 도취되고 싶은 거니까요.
그런 점에서 저들의 겸손은 사람들의 좋은 평가를 상세히 듣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저는 타인의 평가를 통해 자신에게 도취되는 모습이 참 안쓰럽습니다.
그러한 평가 속의 자신이 진정한 자신은 아니니 말입니다.
어쨌든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여기고 싶은 이들은, 가장 손쉬운 방법을 택한 겁니다.
대단한 인물들이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 여겨, 이를 활용한 것이죠.
그래서 좋은 평가를 들을 수 있다면, 그 평가가 진실되든 거짓되든 상관없이 이들은 만족스러워합니다.
자기 자신을 모르는 게 겸손의 덕이라면, 허영심이 많은 자들은 너무나 미덕적입니다.
왜냐면 이들은 진정한 자신을 정말 모르니 말입니다.
연기하는 배우들
허영심을 지닌 자들은 자신들의 정신적 빈곤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아름답고 훌륭한 존재로 보이려고 한다.
부조리한 사회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안한 세 번째 처세술은 악하다고 평가받는 것을 살피는 것입니다.
저는 올바른 이해에 따른 현상들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올바른 이해를 갖춰서 사회와 다투는 자를 보는 것,
올바른 이해를 갖춰서 성장한 자를 보는 것,
올바른 이해를 가진 자가 사회에 그릇됨을 알리는 것을 보는 것.
이런 것들을 좋아하지만, 이런 것들은 사회에서 악하다고 평가되곤 합니다.
사회적 평가와 그 실제가 다른 것은 이 뿐 만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현자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별로 현명해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죠.
사회적으로 악하다고 불리는 자들은 그 평판만큼 악하지 않은 겁니다.
저는 악하다고 평가받는 자들, 사회의 그릇됨을 외치는 자들을 보며, 왜 이들이 그렇게 외치는지 생각했습니다.
굳이 악한 존재로 취급받으면서 말이죠.
제가 보기에 올바름을 외치는 존재들, 그래서 악하다고 여겨지는 존재들은
올바른 이해가 충만한 미래를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 미래가 나타나지 않아서 ‘악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죠.
올바름을 외치는 것은 법적으로는 그리 큰 죄로 취급받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올바름을 외치는 것을 아주 고약한 것으로 취급하죠.
하지만 언젠가 올바름을 지킬 용과 같은 존재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들은 위버멘쉬로, 올바름을 세상에 정착시키는 존재들이죠.
이런 위버멘쉬가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올바른 이해를 이 무지하고 야만적인 사회에 설파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올바른 이해를 위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부조리와 그릇됨에 대해 혼자 몰래 불만을 갖는 게 아니라, 부조리와 그릇됨에 맞설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릇된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이해를 찾아 나설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릇됨에 민감하게 되어야 올바른 이해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용들의 싸움
사회적 규율을 나타내는 황금용과 위버멘쉬라는 거대한 용이 다투고 있다.
선하고 정의롭다고 불리는 자들이여,
여러분에게는 우스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악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한 공포가 가장 그렇습니다.
이 공포는 위대한 것/올바른 것에 대한 낯설어 하면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위버멘쉬가 여러분에게 선의를 가지고 나타나더라도 여러분은 위버멘쉬를 무서워하는 것이죠.
현명하고 똑똑하다 불리는 자들이여,
그릇된 이해를 가진 여러분은 올바른 이해를 마주하면 도망칠 것입니다.
사회에서 존경받는 자들이여,
여러분은 아마도 위버멘쉬를 보고 악마라고 부르겠지요.
저는 이처럼 선하고 훌륭하다는 자들에게 지쳤습니다.
저는 저들의 척도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위버멘쉬를 향해 성숙한 존재를 향해 나아가고 싶었습니다.
저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자들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질색했고, 이상 사회로 나아갈 의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상가가 그렸던 것보다도 이상적인 세계, 성숙한 내면을 가진 자들이 있는 세계로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저는 여러분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게 좋습니다.
여러분들의 그릇된 모습을 통해서 사람들은 올바름으로 더 나아가려고 할 것이니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들 사이에 여러분들처럼 있으면서, 올바름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을 찾아 하나씩 거둬들일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최대한 여러분 사이에서 있을 것이고, 여러분들에게서 배척당하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이것이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안한 마지막 처세술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위험한 강아지
차라투스트라의 입장에서, 위버멘쉬를 악마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강아지를 악마라고 부르는 것과 같을 것이다.
생각해볼 거리들
왜 차라투스트라는 꼭대기가 아니라 비탈이 무섭다고 하나?
ㅡ여기서 말하는 비탈은 산의 정상이 아닌 산 중간을 말한다.
ㅡ산 중간이 무서운 이유는 앞으로 더 나아갈지 아니면 다시 내려갈지를 고민하게 되기 때문이다.
ㅡ즉 산 정상에서는 이미 올랐기에 고민하는 것이 없지만, 오르는 중간에는 “이쯤에서 돌아갈까” 하는 마음이 계속해서 드는 것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를 “이중 의지”라고 표현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자신의 심장의 이중 의지를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를 위해 나아가는 존재다.
ㅡ즉 이상 사회로 나아가는 길 중간에 있는 존재인 것이다.
ㅡ그런 면에서 보면, 차라투스트라는 앞서 말한 비탈의 존재처럼, 이상 사회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나아가지 않을 것인지 고민하고 갈등하게 된다.
ㅡ이 고민과 갈등은 「차라투스트라, 2권 9~11장」에서 언급된 바가 있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ㅡ하지만 해당 장에서는 차라투스트라의 이중 의지가 명확히 나타나지는 않는다.
ㅡ굳이 차라투스트라 내면의 이중 의지를 따진다면, 이상적 존재로서 홀로 나아가려는 의지와 이상적 사회를 위해서 사람들에게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동시에 나타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ㅡ여기서 차라투스트라는 이상적 사회를 위한 의지를 택한다.
ㅡ그렇기에 차라투스트라의 의지는 인간을 향해 있다고 표현되고, 자기 자신을 인간에게 묶어둔다고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장님이 되어 살고 있나? 왜 확고한 것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모든 사람을 이상 사회로 나아갈 동료로 여기지 않는다.
ㅡ이는 자신과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을 찾기 위해서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ㅡ그런데 사람들은 부조리를 일삼기 때문에,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충돌할 수 있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의 목표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상 사회로 나아갈 동료를 찾는 것이므로, 사람들과 다퉈선 안 된다.
ㅡ다투게 될 경우, 사람들 사이에서 배척당할 것이고, 그러면 자신의 동료를 찾는 일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최대한 사람들과 마찰을 피한 채로 지내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부조리나 그릇됨을 보더라도 모르쇠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ㅡ문제는 부조리를 일삼는 사람들을 볼수록 차라투스트라가 희망을 잃는다는 점이다.
ㅡ부조리한 사람들을 일일이 의식한다면, 사람에 대해서 부정적이게 될 것이고, 그게 악화되면, 이상 사회를 위해 나아갈 동료가 있다는 믿음을 잃게 되는 지경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ㅡ그러므로 부조리를 일삼는 사람들을 최대한 외면하고 있어야 동료에 대한 믿음을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게 된다.
ㅡ그런 점에서 장님처럼 있으려고 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속이는 자를 경계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자신을 속이도록 놔두나?
ㅡ속이는 자를 경계한다는 것은 배척하고 거리를 두는 것을 말한다.
ㅡ여기서 속이는 자는 그릇된 것을 올바른 것인 양 속이는 자를 말한다.
ㅡ즉 그릇된 것을 말하는 자를 배척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배척되지 않아야 한다.
ㅡ왜냐면 자신의 동료가 될 존재들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ㅡ즉 낚시꾼처럼 물고기를 낚을 때까지 강가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ㅡ그런데 사람들과 트러블이 생기게 되면, 차라투스트라는 사회라는 낚시터에서 쫓겨나게 된다.
ㅡ즉 동료를 낚을 수 없는 조건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ㅡ그러므로 사람들 사이에서 배척당하지 않게끔, 그들과 동류의 존재인 척을 해야 한다.
ㅡ그래서 그릇된 이해를 올바른 이해인양 속여도 놔두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인간을 경계하면, 어찌 인간이 차라투스트라의 공을 붙들어 매는 닻이 될 수 없다고 하나? 왜 위로 쏠려간다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을 배척하게 되면, 사람들은 차라투스트라의 의견을 배척할 것이다.
ㅡ그러면 차라투스트라의 의견은 사회라는 영역에서 자리할 곳이 없어지고, 허무하게 소멸될 것이다.
조심하는 일 없이 존재해야 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ㅡ사람들의 그릇된 이해를 너무 배척하지 말고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 틈에서 어떤 잔으로든 마시는 법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ㅡ사람들 사이에서 존재하려면, 좋은 것과 올바른 것만을 가려대면 안 된다는 것이다.
ㅡ왜냐면 사람들은 그릇된 것도 수용하고 살아가는데, 만약 그릇된 것을 수용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면,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배척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 틈에서 깨끗함을 유지하려면 더러운 물로도 씻을 줄 알아야 하나?
ㅡ사람들은 올바르지 않은 것으로도 자신들을 단장하는데, 이를 거부하거나 따르지 않으면 못마땅하게 여길 것이다.
ㅡ그러면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으므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선 사람들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불운을 벗어났으니 그것을 행복으로 즐겨라” 라고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의 그릇됨을 허용함으로써, 동료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ㅡ이를 되뇌는 것이다.
긍지에 찬 인물은 누구인가?
ㅡ이들은 성숙한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는 자들로 볼 수 있다.
ㅡ후술되는 내용에서 보면, 이들은 비판을 받더라도 건설적으로 활용할 줄 아는 존재다.
허영기 있는 자들은 누구인가? 왜 이들을 더 신경쓰는가?
ㅡ허영기 있는 존재들은 평판을 중시하는 자들로서,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듣기 위해 노력한다.
ㅡ이들은 긍지에 찬 인물들과 다르게, 비판하게 되면, 불만을 갖는다.
ㅡ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이런 자들을 비판하는 것을 비교양적으로 볼 수 있다.
ㅡ따라서 잘못 건드렸다간 사회적으로 매장/배척당할 수 있게 된다.
ㅡ그러므로 이들을 건드리고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저들의 삶을 구경하기 좋아하나? 왜 저들은 차라투스트라의 우울을 치유해주나?
ㅡ차라투스트라의 입장에서, 허영기 있는 자들은 성숙한 존재/대단한 존재인 척을 하며 실제 자신의 모습에 비해서 많은 혜택을 받는 자들이다.
ㅡ일반적으로 올바름을 추구하는 경우, 이런 과잉 혜택을 받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ㅡ즉 투지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ㅡ이 투지를 바탕으로 차라투스트라는 다시금 사람들에게서 열심히 노력하여 이상 사회의 동료를 찾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ㅡ이를 차라투스트라는 “(저들은) 연극에 집중하듯 (내가) 사람들에게 집중하도록 해주기에”라고 표현한다.
ㅡ차라투스트라의 경우, 어떻게 보면 부조리한 사회 속에 잠복하여 자신의 동료를 찾고 있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ㅡ그런데 동료를 찾는 일이 보람없고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ㅡ그러면 차라투스트라는 우울함을 느낄 것이다.
ㅡ이런 우울함의 극복을 위해서 투지를 갖게 하는 저들의 존재가 필요한 것으로 본 것 같다.
허영기 있는 자의 겸손의 깊이를 잴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은 무얼 말하나?
ㅡ사람들은 허영기 있는 자들의 겸손을 보고, 그저 겸손한 자라고 본다.
ㅡ그렇기에 이들이 겸손한 이유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저들의 겸손 때문에 저들을 잘 대해주고 동정한다고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저들의 겸손이 자기 자신들을 위한 것이란 점을 알고 있다.
ㅡ즉 좀 더 좋은 평가, 좀더 상세한 칭찬을 듣고 싶기 때문에 겸손한 것이란 점을 알고 있는 것이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자신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아닌 것을 통해서 자기 도취에 빠지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자기 도취를 원하는 사람의 얄팍한 수인 것이다.
ㅡ그런 점에서 딱한 존재로 인식되는 것 같다.
왜 허영기 있는 자들은 사람들에게서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배우려고 하나?
ㅡ이는 「차라투스트라, 1권 16장」을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그대들은 그대들 자신을 견뎌내지 못하며 그대들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웃을 유혹해 그대들을 사랑하도록 만들고, 이웃의 오류로 그대들 자신을
미화하려는 것이다.
ㅡ이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서 보잘 것 없게 느끼거나, 자신을 가꾸기 노력하기 싫은 경우, 간편하게 사람들의 평가를 통해서 자신을 좋게 인식하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덕이라는 점을 모르는 것이 진정한 덕이라면, 허영기 있는 자도 자신의 겸손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ㅡ이 부분은 번역이 조금 갈릴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ㅡ해당 구절은 “자신을 모르는 것이 진정한 덕이라면, 허영기 있는 자는 자신의 겸손을 알지 못한다”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ㅡ이를 다르게 보면, “허영기 있는 자는 겸손한 자다. 자신을 모르는 것이 겸손의 덕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정말 자신을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볼 수 있다.
그대들이 두려워한다 해도 악인들의 눈길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왜 이것은 차라투스트라의 세번째 인간적 영리함이 되나?
ㅡ사람들은 악인을 두고서 두려워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악인을 두고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는 문구다.
ㅡ이는 곧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 사이에서 악인이라 불리는 자들을 눈 여겨 본다는 것을 말한다.
ㅡ차라투스트라가 악인을 눈 여겨 보는 이유는 사회의 기존 질서에 반한다는 점 때문이라 할 수 있다.
ㅡ사회의 기존 질서에 반한다고 해서 무조건 차라투스트라의 동료가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동료일 가능성이 생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동료를 찾기 위한 방법으로 이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뜨거운 태양이 부화시키는 경이로움은 무얼 말하나? 호랑이, 야자나무, 방울뱀은 왜 차라투스트라에게 행복을 주나?
ㅡ뜨거운 태양은 올바른 이해를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ㅡ따라서 태양이 부화시킨다는 것은 올바른 이해로 인하여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ㅡ그러므로 결국 올바른 이해로 인하여 호랑이, 야자나무, 방울뱀이 나타난다는 것이 된다.
ㅡ호랑이의 경우 후술되기는 하지만, 사회와 맞서는 사자와 같은 존재로 인식할 수 있다.
ㅡ즉 기존 규율과 맞서는 존재인 것이다.
ㅡ야자나무의 경우, 뜨거운 태양 아래서 자라나는 나무이므로, 강한 태양 빛을 받은 존재로 볼 수 있다.
ㅡ태양 빛을 올바른 이해로 본다면, 야자나무는 올바른 이해를 많이 받고 자라난 존재로 볼 수 있는 것이다.
ㅡ방울뱀의 경우, 뱀이라는 점에서 사악한 것으로 취급되는 것 같다.
ㅡ그런데 이 뱀이 방울을 흔들면서 소리를 내므로, 사악한 존재이면서 무언가를 외치는 존재를 떠올릴 수 있다.
ㅡ무언갈 외치는 사악한 존재를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올바른 이해를 외치는 존재로 볼 수 있다.
ㅡ따라서 방울뱀은 올바름을 외치는 존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렇게 보면 호랑이/야자나무/방울뱀은 모두 올바른 이해에서 비롯된 존재들이므로, 차라투스트라에게 행복을 준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왜 악인에게 경탄할만한 것이 많다고 하나?
ㅡ사회적으로 악인이라 분류된 자들 중에서, 올바른 이해를 가진 존재가 있기 떄문으로 보인다.
인간의 악의도 평판만큼 대단치 않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사회적으로 악하다고 불리는 것도 실제로 대단히 악한 것은 아니란 이야기다.
ㅡ즉 사회에 의해서 평가가 왜곡되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왜 방울뱀들에게 차라투스트라는 머리를 저어가며 묻는가?
ㅡ방울뱀들은 앞서 말한 것처럼 올바름을 외치는 존재인데, 이들이 왜 올바름을 외치는지 묻는 것이다.
ㅡ그리고 이들의 목적에 대해서는 그 후에 후술되는데, 미래/가장 뜨거운 남녘, 즉 이상 사회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악에게 미래가 있다고 말하나?
ㅡ사회적으로 악하다고 불리는 것이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면서 나타난 것일 수 있고, 그런 경우 올바른 이해와 이상 사회를 추구하면서 악으로 취급된 것어기 때문이다.
ㅡ그런 점에서 미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가장 뜨거운 남녘은 무엇을 말하나? 왜 발견되지 않았나?
ㅡ태양이 작열하는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므로, 이는 올바른 이해가 충만한 곳, 이상 사회라고 할 수 있다.
ㅡ이상사회는 현재로서는 사람들에게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므로, 발견되지 않았다고 표현한다.
ㅡ그리고 이러한 이상 사회가 나타난다면, 이들은 악한 존재가 아니라 선한 존재로 거듭날 기회를 갖추고 있다.
ㅡ그런 점에서 악에게 미래가 있다고 표현되어질 수 있다.
“열두 자 정도 넓이에다 삼 개월 정도 밖에 되지 않는데도 얼마나 많은 것들이 악으로 불리는지” 라는 건 무슨 말인가?
ㅡ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독일의 수감시설과 수감 기간을 나타낸다는 걸 전제로 보면, 올바름을 외치는 것의 형량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ㅡ즉 올바름을 외치는 것은 형법에 따르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란 이야기다.
ㅡ그런데 사람들 사이에서는 올바름을 외치는 것이 굉장히 고약한 악으로 불리는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언젠가 출현할 더 큰 용은 무엇을 말하나?
ㅡ이는 위버멘쉬에 맞서는 용이라기보다는 위버멘쉬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지금 당장은 위버멘쉬적 존재가 올바름을 외치는 게 아니지만, 나중에는 위버멘쉬적 존재가 나타나서 올바름을 외칠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ㅡ그리고 이 용은 사회적 규율의 용을 압도하는 용으로 보인다.
ㅡ그러서 용을 초월한 용, 용을 능가하는 용으로서 묘사된다.
왜 용의 출현을 위해서 뜨거운 태양이 축축한 원시림을 달구어야 하나?
ㅡ뜨거운 태양은 올바른 이해를 말하고, 축축한 원시림은 뜨거운 태양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은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축축한 원시림은 부조리한 사회를 말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ㅡ앞서 용은 위버멘쉬라고 봤으므로, 위버멘쉬의 출현을 위해선 올바른 이해가 부조리한 사회에 더 전파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왜 그대들의 살쾡이와 독두꺼비가 나오나? 왜 호랑이가 되고 악어가 되어야 하나?
ㅡ호랑이는 사회적 부조리에 맞서는 존재라면, 살쾡이는 사회적 부조리에 직접 맞서는 존재라기 보다는 사회적 부조리에 불만을 가진 존재라고 볼 수 있다.
ㅡ이런 존재는 호랑이처럼 직접 사회적 부조리에 맞서야 하는데, 그래야 올바른 이해가 사회에 퍼지고, 그래야 위버멘쉬가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ㅡ독두꺼비의 경우, 정신이라는 샘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데, 정신에게 독은 그릇된 이해를 말하므로, 독두꺼비 역시 그릇된 이해로 생각해볼 수 있다.
ㅡ그리고 악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릇된 이해를 벗어나서 먹이를 구하는 존재, 올바른 이해를 구하는 정신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다.
ㅡ즉 호랑이나 악어는 모두 부조리에 맞서고 올바른 이해를 구하려는 존재의 특징을 설명하는 것이다.
ㅡ그리고 이런 특징을 지닌 존재가 되어야 이상 사회가 오고, 위버멘쉬가 나타나는 세상이 가능하다.
ㅡ그런 면에서 이것이 제대로 된 사냥을 하는 것, 위버멘쉬/이상 사회를 취하는 것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선한 자들과 의로운 자들이 ‘악마’라고 부르는 것을 보며 공포스러워하는 것은 왜 차라투스트라에게 우스운가?
ㅡ이들이 악마라고 부르는 것은 올바른 이해다.
ㅡ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올바른 이해를 보고서 두려워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 된다.
ㅡ물론 후술되다시피 이들이 올바른 이해를 보고서 두려워하는 것은 그릇됨 속에서 지내왔기 때문에 올바른 것/위대한 것이 낯설어서 그렇다.
ㅡ그래서 오히려 배척하고 악하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왜 현자들은 위버멘쉬가 즐기는 지혜의 뙤약볕 앞에서 도망치나?
ㅡ앞서 선하고 의로운 자들처럼, 올바른 이해를 제공하는 지혜의 뙤약볕이 낯설기 때문이다.
왜 최고의 인간들은 위버멘쉬를 두고 악마라고 부르나?
ㅡ이 최고의 인간들은 사회적 기준에 따른 최고의 인간인데, 위버멘쉬적 존재는 사회적 규율을 벗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ㅡ그래서 그들 기준에서는 위버멘쉬가 사회적 규율에 반하는 존재, 악한 존재가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저들의 높이에서 벗어나려고 하나?
ㅡ사회적인 선함/의로움/현명함/최고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ㅡ즉 사회적 척도들이 모두 그릇되다고 보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최선인 자들의 맨몸을 보고 전율에 휩싸이나?
ㅡ그들의 모습에서 부조리와 그릇됨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떤 창작자가 꿈꾸었던 것보다도 더 머나먼 미래/남방적 남녘은 무얼 말하나?
ㅡ미래와 남녘은 모두 이상 사회를 말한다.
ㅡ머나먼 미래는 멀리 있다는 측면, 미래에 있다는 측면에서 차라투스트라에게 이상 사회를 의미하고, 남방적 남녘의 경우,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 곳이며, 태양이 올바른 이해를 제공하므로, 올바른 이해가 충만한 곳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들은 옷가지를 왜 부끄럽게 여기나?
ㅡ신들은 내면이 성숙하고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ㅡ이런 존재들이 내면을 보여주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바라지 않는 일이고, 그것은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이 된다.
ㅡ왜냐면 아름다운 내면을 보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방향을 찾아 나아가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ㅡ그런 면에서 성숙하고 아름다운 내면을 감추는 것은 부적절하고, 잘못된 생각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ㅡ그래서 올바른 판단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아름다운 내면을 감추고 홀로 간직하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 된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변장한 모습을 바라나?
ㅡ사람들이 위대한 척하고 선한 척을 해야 그릇됨을 자각한 사람들이 올바름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ㅡ이는 앞서 차라투스트라가 최선인 자들의 맨몸을 보고서 위버멘쉬를 향해 나아가려고 했던 것을 떠올리면 좋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변장한 채로 그들 사이에 있으려고 하나?
ㅡ자신의 동료가 될 존재들을 사회에서 물색하는 중인데, 정체가 탄로나서 사회에서 배척당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니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2권 의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차라투스트라 - 2권 22장 의역 (완) (고요한 시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0) | 2024.06.20 |
---|---|
차라투스트라 - 2권 20장 의역 (완) (구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0) | 2024.06.18 |
차라투스트라 - 2권 19장 의역 (완) (예언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 2024.06.17 |
차라투스트라 - 2권 18장 의역 (완) (큰 사건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 2024.06.14 |
차라투스트라 - 2권 17장 의역 (완) (시인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 | 2024.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