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2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2권 20장 의역 (완) (구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6. 18. 23:33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2권 20장 구원


           
20장 개괄

 

 

20장은 사람들이 부조리를 어떻게 긍정하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장이다.

즉, 과거의 불만족스러운 경험을 되돌릴 수 없음에 따라서, 자신의 주변에 앙갚음을 하는데, 이것이 정당화되면서 부조리가 사회에서 수용된 것이란 이야기다.

이러한 점에 따라서 사회가 부조리를 끊어내려면, 자신의 불만족스러운 경험에 대한 집착을 끊어내는 것, 부조리의 대물림을 자신의 대에서 끊으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니체는 말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를 통해서, 성숙해지려는 의지를 가지고서 나아가라고 말하는데, 그 가르침을 통해서 차라투스트라의 제자들은 과거 경험에 집착하는 의지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다 점차 자신의 공로를 말하면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는 차라투스트라의 본심이 드러나는데, 이에 대해서는 꼽추가 날카롭게 지적한다.

즉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 사람들로부터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으니, 자기 스스로 자신의 공로를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차라투스트라가 경계하던 것 중 하나로, 사람들 사이에서 이끄는 자로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모습의 발로다.

 

이에 아차 싶은 차라투스트라는 놀란다.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사회적 욕심을 품는 자신을 보고 놀란 것이다.

이는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앞당기게 하는 사건이 된다.

 


 

 

본문

 

 

차라투스트라가 다리를 건너가고 있을 때, 절름발이와 거지들이 그를 둘러쌌다.

그러더니 한 꼽추가 그에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여,

     사람들이 너에게서 배우고 너의 가르침을 믿어 가는 듯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완전히 따르게 하려면, 우리 불구자들을 설득해야 한다.

 

     자, 여기 우리가 왔으니, 너한테는 그럴 기회가 주어졌구나.

     이제 절름발이를 걷을 수 있게, 꼽추가 등을 펼 수 있게 해보라.

     이런 기적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너를 믿게 할 올바른 방법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아마 사람들은 당신이 한 이야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겁니다.

          ‘꼽추에게 혹을 제거해 준다면, 그는 일반적인 대중*이 되겠죠.

          그러면 건강했던 그의 정신을 앗아가는 꼴이 될 겁니다.

*꼽추로서의 정체성을 잃는다는 이야기다.

정확한 이유는 나타나지 않지만, 일반적인 대중보다는 꼽추가 더 정신적으로 건강하다고 표현되고 있다.

 

          맹인에게 시력을 주면, 맹인이었던 자는 시력을 준 사람을 저주할 겁니다.

          자기가 그렸던 것보다 세상이 더 암울하니까요.

 

          절름발이를 걷게 하면, 그는 마음껏 움직이며 악행을 저지르게 될 겁니다.

          그가 절름발이기에 못했던 것들을 할 수 있게 될 테니 말입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에 대해 저는 배울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사람들 사이에서 있으면서 느꼈던 게, 신체가 일부 온전치 못하거나 정신적 능력이 조금 떨어지는 것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정말 문제되는 것은 단 하나만을 중시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누군가는 보이는 것만 중시하고, 누군가는 먹는 것만 중시하며, 누군가는 본성에 따르는 것만을 중시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저는 이들을 ‘실제 불구는 아니지만, 진짜 불구가 된 자’란 의미에서 온전한 불구자*라고 부릅니다.

*불구가 된 것이 온전한 불구이겠지만,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대상들은 불구가 아님에도 불구가 되었기에 더 심각한 불구자라고 표현하고 있따.

즉 인간다운 인간, 온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점에서 온전한 불구자라고 칭하는 것이다.

 

     제가 하산하여 도시로 나왔을 때, 저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평판을 중시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이 자를 더 자세히 살펴보니, 그는 평판을 중시한 나머지 자신의 본성을 억압하며 내면의

     다른 부분들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있었죠.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존재를 두고서 평판을 중시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위대한 인물이나 천재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사람들의 이러한 평가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온전한 불구자로 여겼죠.”

 

사람들 사이에 있는 거대한 귀

평판을 중시하는 자를 차라투스트라는 커다란 귀를 가진 기형적 존재로 묘사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꼽추에게 말하고는, 제자들을 향해 격앙된 어조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친구들이여,

     사람들 사이를 다니고 있자면, 저는 온전한 인간들 사이를 걷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조

     각들 사이를 걷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굉장히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러한 불완전함은 오늘날의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과거에도 그랬다는 것을 보게 되니 말입니다.

     온전한 인간은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온전한 인간이 없다는 사실.

     만약 제가 이상 사회를 긍정할 수 없었다면, 전망할 수 없었다면,

     저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이상 사회를 긍정하는, 이상 사회로 나아가기를 바라고, 그러기 위해서 노력하는 존재입니다.

     즉 이상 사회라는 미래를 바라고 원하는 미래적 존재이자, 사람들이 이상 사회로 나아갈 수 있게 돕는 존재인 겁니다.

 

     여러분도 제가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서 의문을 가졌던 것을 압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어떤 존재인가?

          그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그는 이상 사회를 약속하는 자인가?

          이상 사회를 구현하려고 하는 자인가?

          세상을 이상 사회로 물들게 하려는 정복자인가?

          아니면 이상 사회의 의지를 계승하는 상속자인가?

          사람들을 계몽하려고 앎을 나누는 자인가?

          사람들의 오류를 뒤엎는 자인가?

          아니면 절망에서 벗어난 자인가?

 

          그는 상상하는 자인가?

          아니면 그는 진실을 말하는 자인가?

          그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자인가?

          아니면 사람들에게 새로운 가치관과 규율을 제공하는 자인가?

          그는 선한 자인가, 악한 자인가?’

              

차라투스트라에 대해서 논하는 사람들

차라투스트라 라는 존재는 다채로운 특징을 지닌 존재 유형이라, 사람들은 그를 규정하기 어려워 한다.


 

     저는 이상 사회라는 퍼즐을 맞추기 위한 조각들로서 사람들을 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불완전한 존재들을 완전하게 만드려고

     사회에 대한, 인간에 대한 의문을 풀어 내려고

     사람들이 우연이라고 말하며 행하는 폭력과 부조리를 저지하려고 노력합니다.

 

     만약 인간이 상상할 수 없고, 의문을 풀어낼 수 없으며,

     우연이 속에 숨어있는 필연을 찾아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면*,

     제가 어떻게 제 존재를 견딜 수 있었겠습니까?

*우연은 무의미하게 나타나는 현상들을 말한다.

이 현상들 속에서 탐구자들은 법칙이나 질서, 진리, 삶의 지혜들을 깨우치게 되는데, 그러면 이 우연한 일들은 필연적인 것들이 된다.

이를 우연 속에서 필연을 찾아냈다고 표현하게 되는데, 이와 관련된 내용이다.

후술되는 내용과 관련짓는다면, 과거의 경험 속에서 삶의 지혜를 얻어내는 것을 우연 속에서 필연을 찾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인간에게 있어 <구원>은 과거의 불만족스러운 경험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봅니다.

     과거의 영향을 끊어내고 과거와 별개인 삶을 사는 것이 <구원>이라는 겁니다.

  

     저는 의지*를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1권 4장의 신체적 반응을 말한다.

 

     이러한 가르침에 하나를 더 알아두면 좋을 듯한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의지는 아직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기쁘게 하는 의지가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가지는 의지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기쁘게 하려면 의지의 해방이 필요합니다.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이냐구요?

     그것은 과거의 불만족스러운 경험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과거의 불만족스러운 경험은 우리가 복수를 꿈꾸게 하고, 쓸쓸한 상태에 놓이게 합니다.

     과거의 불만족스러운 경험 앞에서 우리는 무력합니다.

     과거의 불만족스러운 경험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채로 바라보는 것 외엔 방법이 없죠.

 

     본디 우리는 과거에 영향을 미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

     이것이 과거의 불만족스러운 경험이 우리에게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이유죠.

 

 

거스를 수 없는 시간

시간을 거를 수 없다는 점에서, 과거의 불만족스러운 경험을 한 사람은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과거로부터 해방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우선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 보도록 합시다.

 

     누군가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는 바보 같은 일을 벌입니다.

     그는 과거의 불만족스러운 경험을 되돌려서 그 경험을 벗어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죠.

     그에 따라서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래서 그는 주변에 역정을 내며 복수를 하게 됩니다.

     그가 이러는 이유는 과거의 불만이 해소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그는 복수하려는/앙갚으려는 자로 자리하게 됩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이러한 일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과거에 겪은 불만으로 인해 복수하려는 것을 정당화 시키게 됩니다.

     그렇게 복수는 과거에 대한 벌로써 사회적 공감*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사회에서 고안한 최고로 혁신적인 생각이라고 봅니다.

*과거의 불만족스러운 경험을 한 구성원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과로, 복수는 잘못에 대한 응당한 벌로서 사회에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복수는 이성적이며 논리적인양 사회에서 다뤄지게 된 것입니다.

 

     과거의 불만족스러운 경험을 벗어나지 못한 자는 고통 속에 있습니다.

     과거의 불만족스러운 경험을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과거의 불만족스러운 경험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인간은 늘 고통받고 있게 되고,

     그로 인해서 타인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모습으로 나아갑니다.

     그렇게 이 세상/삶 자체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란 존재가 벌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기반으로 다음과 같은 입장이 생겨납니다.

     ‘이 세상은 고통뿐인 곳으로, 정말 부질없는 곳이다.’

 

     '고통 속에서 살아가며, 삶을 견디기 위해서 다른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

     이것은 그릇되지 않았다’

 

     '이 세상의 모든 행위에는 선과 악이 정해져 있는데, 과연 우리는 이 세상에서 구원될 수 있을까?

     영원한 정의가 있다면, 그것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하지만 과거의 불만족스러운 경험은 돌이킬 수 없지 않나?

     그렇다면 그에 따른 복수/벌도 영원할 수밖에 없다.’

 

     분명 어떤 과거도 그에 따른 복수와 벌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삶이라는 것은 과거의 고통스러운 경험과 그에 따른 복수가 반복되는 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죄인이 되며, 세상이 끝날 때까지 벌을 받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도 벗어날 방법이 있습니다.

     이 모든 분노와 복수의 시작은 과거의 불만족스러운 경험에 집착하면서 나타난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과거의 불만족스러운 경험에 대한 집착을 끊어내는 것,

     과거를 되돌리고 싶어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시간과 다투는 사람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에도 과거에 갇혀 있는 사람의 삶은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과거에 대한 집착을 끊어내야 한다.


 

     나의 친구들이여, 지금 말한 입장들이 굉장히 궤변이라는 것을 잘 알지 않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창조자가 되라”고 가르쳤을 때,

     저는 여러분이 이 궤변에서 벗어나게 이끈 것입니다.

 

     과거의 불만족스러운 경험은 우리가 성숙해지려는 의지를 가지기 전까지는 어떤 의미있는 것도 아니며, 그저 의문이면서도, 그릇된 의견을 갖게 하는 요소일 뿐입니다.

     우리의 성숙해지려는 의지가 그 불만족스러운 경험에 대한 집착을 걷어내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성숙해지려고 합니까?

     성숙해지려고 한다면, 그것은 언제 성숙해집니까?

     여러분은 과거의 경험에 대한 집착을 끊어냈습니까?

     그렇게 여러분은 과거로부터 벗어나 기쁨을 얻고자 합니까?

     여러분은 이제 복수하기를 멈추었습니까?

 

     이것을 누가 가르쳤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과거의 경험에서 벗어나게끔 했습니까?

 

     과거의 경험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끝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더 성숙해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성숙해지기 위해 가져야 하는 의지가 바로 간섭받지 않으려는/자립하려는 의지, <힘에 대한 의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이런 변화를 겪을 수 있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누가 여러분에게 힘에 대한 의지를 가지라고 가르친 것입니까?”

 

차라투스트라는 순간 놀라 말을 멈추었다*.

그렇게 놀란 눈으로 제자들을 바라보았고, 그는 제자들이 지금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 눈치챘다.

그는 다시 웃으며 온화하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제자들이나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에 대해 인정해주지 않자, 자기 스스로 자기 능력을 과시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서 차라투스트라가 순간 놀라 말을 멈추었다.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왜냐면 침묵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특히 저와 같은 수다쟁이에게는 말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얼굴을 가리고 이 이야기를 듣던 꼽추는 차라투스트라의 웃음소리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차라투스트라를 천천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차라투스트라여,

     왜 우리에게 말할 때와 다른 모습인가?

     왜 제자들에게는 다르게 말하는가?”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그들은 저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꼽추에게는 꼽추에게 어울리는 말로 하는 것이죠.”

 

꼽추가 말했다.

    “좋다. 그렇다면 제자들에게 좀 더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같은데,

     어째서 너는 너의 속내와 다른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하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제자들이 자신의 가르침에 대해서 좀 더 고평가해주고,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길 바라는데, 실제로 그러지 않아 불만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자화자찬을 하게 된 것인데, 이를 꼽추가 알아차린 것이다.

 

열변을 토하는 차라투스트라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을 향해서 열변을 하다가

자신의 공로를 강요하는 말실수를 한다.

이러한 자신의 모습에 당황한다.

 

생각해볼 거리들

 

차라투스트라가 다리를 건널 때, 왜 곱사등이들이 다가와서 자신들을 설득시키라고 하나?

ㅡ이는 차라투스트라가 교조주의적 모양새를 갖추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ㅡ즉 차라투스트라가 일반적인 교조적 단체였다면, 세력을 더 키우기 위해선 지금과는 다르게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갖고 단체에 가입하게끔 만들 퍼포먼스를 벌여야 한다고 꼽추가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ㅡ즉 약간의 사이비화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ㅡ물론 차라투스트라는 이를 거절함으로써, 사이비화 되는 것을 막으려 한다.

 

왜 곱사등이는 장님의 눈을 뜨게 하고, 절름발이를 걷게 하라고 하나?

ㅡ이는 사람들의 흥미를 더 끌으려면, 기적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ㅡ종교가 세를 확장할 때 쓰던 방식을 따라하라는 것으로, 차라투스트라가 일반적인 교조적 단체로 나아가게끔 유혹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곱사등이에게 대중이 가르치는 것을 말하나?

ㅡ대중은 불구자들을 온전하게 만드는 것은 이들을 일반인으로 만들고, 그 결과 이들은 타락하게 된다고 이야기를 한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의 의견과 일치하므로, 자신은 이런 입장에 동의하며, 그에 따라

곱사등이의 제안을 거절한다.

 

왜 곱사등이에게서 혹을 떼어내면 그에게서 정신을 떼어내는 것이 되나?

ㅡ곱사등이에게 혹을 떼면 일반인이 되게 되는데, 그러면 곱사등이였을 때는 올바랐던 정신이 일반인이 되면서 망가진다고 보는 듯하다.

ㅡ즉 일반인의 정신 상태가 좋지 못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저 표현을 쓴 것이다.

 

대중이 차라투스트라에게 배우는데, 차라투스트라가 대중들로 배우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ㅡ대중이 가르치는 것에 대해 자신도 같은 입장이라는 것을 말한다.

ㅡ즉 ‘대중들도 불구자가 일반인이 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이라고 하는데, 자신도 같은 입장이므로, 너희를 낫게 하는 기적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한 가지만 지나치게 가지고 있는 자를 좋아하지 않는가?

ㅡ한 가지만 중시하는 사람은 올바른 사고를 하지 않고 맹목적인 경향을 보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커다란 눈만 지닌 자, 커다란 주둥이만 지닌 자, 커다란 배를 지닌 자는 무얼 말하나?

ㅡ눈만 보이는 자는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 중시하는 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유물론적 입장을 중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ㅡ주둥이만 지닌 자는 먹고 사는 것만 중시하는 자를 말하는 걸로 보이는데, 돈이나 생활에 관한 것만 중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실리적인 존재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배를 지니는 자는 본능적 쾌락을 중시하는 자를 말한다.

ㅡ향락주의자들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거꾸로 된 불구자는 무얼 말하나?

ㅡ여기서 언급되는 자들은 불구가 아닌 자들, 일반적인 사람들이다.

ㅡ그런데 어떤 한 가지만 중시하면서 불구가 된다.

ㅡ즉 불구가 아닌데 불구가 되는 기현상이 나타나는 것인데, 이를 거꾸로 된 불구자라고 말한다.

ㅡ즉 거꾸로된 불구자는 불구가 아닌데 불구가 된 자를 말하는 것이다.

 

거대한 귀인 존재는 무얼 말하나?

ㅡ평판에 민감한 사람을 말한다.

 

왜 사람들은 거대한 귀가 위대한 인간이자 천재라고 말하나?

ㅡ이들은 평판에 민감하여 사람들이 좋아할 말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ㅡ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곱사등이에게 말하다가 언짢은 심사로 제자들에게 몸을 돌렸나?

ㅡ곱사등이의 요구는 차라투스트라를 시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ㅡ곱사등이는 차라투스트라가 교조적 인물로서의 행보를 보이게끔 하려고 “기적을 행해보라”는 식으로 차라투스트라를 자극했다.

ㅡ그런 면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ㅡ또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곱사등이가 사회의 부조리에 순응한 존재라는 걸 의미하기에 언짢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차라투스트라에게 세상은 사람의 파편이 돌아다니는 것과 같나?

ㅡ사람들이 균형 잡히지 않은 채로 하나의 관점을 가지고서만 살아가기 때문이다.

ㅡ즉 쾌락이나 보여지는 것만 중시하는 등의 맹목적인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는 문제를 지닌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현재에서도 과거에서도 손발과 우연들만 보고 사람을 보지 못했나?

ㅡ손발은 균형잡히지 않은 관점을 가진 자를 나타낸다.

ㅡ즉 앞서 말한 것처럼 어떤 하나의 입장에 경도된 존재를 말한다.

 

ㅡ소름끼치는 우연들의 경우, 우연히 발견한 사실들이 진리로 여겨지는 것을 말한다.

ㅡ즉 그릇된 이해를 말하는데, 왜 소름끼치는 우연이냐면, 그릇된 이해가 우연히도 올바른 이해인양 둔갑되기 때문이다.

ㅡ예를 들면 천체를 두고서 신과 관련하여 해석하는 것과 같은 것이 이런 경우에 속한다.

ㅡ즉, 신에 대한 가설이 우연히 천체와 맞아 떨어진 것인데, 그것을 맹신하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반드시 도래해야 할 것을 내다보지 못했다면, 살아갈 수 없었을까?

ㅡ현재 세상의 존재들은 그릇된 이해들로 점철되어진 상태다.

ㅡ이런 곳에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고 있으므로, 꽤나 절망적으로 세상을 느꼈을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앞을 내다보는 자, 의욕하는 자, 창조자, 미래 그 자체, 미래로 향하는 다리, 다리 옆의 불구자가 되나?

ㅡ앞을 내다본다는 것은 미래의 이상 사회를 긍정한다는 점에서 표현된 것이다.

ㅡ의욕하는 자는 미래의 이상 사회를 바란다는 점, 성숙한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표현된 것이다.

ㅡ창조자는 사회적 규율의 부조리를 개선하려 한다는 점에서 표현된 것이다.

ㅡ미래 그 자체는 차라투스트라가 바라는 것이 오롯이 미래의 이상 사회라는 점에서 표현된 것이다.

ㅡ미래로 향하는 다리는 차라투스트라가 이상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사람들을 이끌고 이상 사회로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표현된 것이다.

ㅡ다리 옆의 불구자는 차라투스트라가 현재 이상 사회 속에 있지 못함에 따라 제대로 기능하거나 평가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표현된 것이다.

 

제자들은 왜 차라투스트라를 언약하는 자, 성취하는 자, 정복자, 상속자, 가을, 쟁기, 의사, 건강을 되찾는 자, 시인, 진실된 자, 해방자, 구속하는 자로 인식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미래의 이상 사회를 사람들에게 약속한다는 점에서 언약하는 자로 인식된다.

ㅡ차라투스트라가 미래의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한다는 점에서 성취하는 자로 인식된다.

ㅡ차라투스트라가 부조리한 세상을 이상 사회로 바꾸려고 한다는 점에서 정복자로 인식된다.

ㅡ차라투스트라가 올바른 이해를 갖추려는 사람들의 명맥을 잇는다는 점에서 상속자로 인식된다.

ㅡ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에게 앎을 선사하고 그렇게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자를 얻고 싶어한다는 점에서, 추수의 계절인 가을로 인식된다.

ㅡ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의 그릇된 이해를 갈아 엎으려고 한다는 점에서 쟁기로 인식된다.

ㅡ차라투스트라가 절망에서 사람들을 구한다는 점에서 의사로 인식된다.

ㅡ차라투스트라가 절망에서 벗어낫다는 점에서 건강을 되찾는 자로 인식된다.

ㅡ차라투스트라가 이상적 존재, 위버멘쉬, 이상 사회를 상상한다는 점에서 시인으로 인식된다.

ㅡ차라투스트라가 올바른 이해를 나눈다는 점에서 진실된 자로 인식된다.

ㅡ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을 부조리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점에서 해방자로 인식된다.

ㅡ차라투스트라가 올바른 이해로 사람들을 구속하려 한다는 점에서 구속자로 인식된다.

 

왜 인간들은 미래의 파편으로 인식되나?

ㅡ차라투스트라 혼자서는 이상 사회를 구축할 수 없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사람들을 이상 사회의 일원으로 만들어 이상 사회라는 퍼즐을 맞춰야 한다.

ㅡ그런 면에서 사람들은 이상 사회를 위한 자원이긴 하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파편과 수수께끼와 소름끼치는 우연을 하나로 압축하고 모으나?

ㅡ파편은 불완전한 상태의 사람들을 말한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들을 잘 가르치고 모아서 이상 사회를 구축하려고 한다.

 

ㅡ수수께끼는 이상 사회에 대한 의문이나 부조리에 대한 의문 등을 말하는데, 차라투스트라는 이를 모으고 해결해서 사람들이 이상 사회를 긍정하게 하려고 한다.

 

ㅡ소름 끼치는 우연은 앞서 말한 것처럼 그릇된 것인데 우연을 계기로 올바른 것으로 인식되는 생각을 말한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를 모아서 개선시키려고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인간이 시인이자 수수께끼를 푸는 자이자 우연을 구원하는 자라고 여기나?

ㅡ사람들이 이상 세계, 이상적 존재를 그린다는 점에서 시인으로 여겨지고,

ㅡ사람들이 사회의 옳고 그름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풀려고 한다는 점에서 수수께끼를 푸는 자라고 여겨지고,

ㅡ그릇된 이해에서 벗어나 우연에 따른 올바른 이해를 갖추려고 한다는 점에서 우연을 구원하는 자라고 여겨진다.

 

ㅡ만약 이런 의지가 사람들에게 없었다면, 우둔한 채로 살아가야 하는데, 차라투스트라는 이런 점에서 우둔하지 않으므로, 사람들 사이에서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었지’를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로 변형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그랬었지’는 이미 벌어진 일을 서술하는 표현이다.

ㅡ즉 과거의 경험을 말한다; 물론 부정적 경험을 말한다.

 

ㅡ’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의 경우, 과거를 인정하는 모습을 말한다.

ㅡ즉 과거의 경험에 대한 책임을 자신의 의사로 보는 것이다.

ㅡ이는 과거에 대한 책임 문제에서 벗어나게 하고, 후술되겠지만, 이로 인한 불만을 걷어내고, 좀 더 삶을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

 

왜 ‘그랬었지’에서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로 가면 구원이 되는가?

ㅡ과거의 부정적 경험은 인간이 어떻게 되돌릴 수 없다.

ㅡ하지만 여기에 집착한 상태가 되면, 이 존재는 그 경험으로 인하여 계속해서 불만을 갖는 상태가 된다.

ㅡ이 불만은 현재의 주변인들에게 표출될 수 있는데, 이로써 부조리가 발생하게 된다.

ㅡ그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런 과거 경험에서 벗어나는 것이 한 개인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ㅡ즉 과거에 함몰되지 말고, 과거를 매듭짓고 나아가야 긍정적 존재가 될 수 있단 이야기다.

 

의지는 왜 해방하는 자이고 기쁨을 가져오는 자라 불리나?

ㅡ여기서 말하는 의지는 창조하려는 의지/성숙해지려는 의지를 말한다.

ㅡ이런 의지에 따르면, 사회적 부조리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ㅡ또한 그렇게 사회적 부조리를 벗어나면, 개인적 행복/기쁨을 누리게 될 수 있다.

ㅡ이런 점에서 이 의지는 창조하려는 의지/성숙해지려는 의지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의지가 아직 갇혀 있는 자라고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창조의지/성숙의지를 말하고 가르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창조 의지를 갖지 못한 채로, 과거의 경험을 전복시키려는 의지 속에 갇혀 있다.

ㅡ이러한 점을 언급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부조리를 저지르는 이유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의지는 해방시키는 것인데, 아직 사슬에 묶어둔다고 말하나?

ㅡ의지는 해방시키는 것인데, 이 해방시키는 것을 묶어두고 있다는 것이다.

ㅡ즉 사람들을 부조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무어냐고 묻는 구절이다.

 

ㅡ그리고 그것을 보고 ‘그랬엇지’, 즉 과거의 경험이라고 말한다.

ㅡ즉 과거의 경험을 벗어나지 못하고, 과거의 경험을 전복시키려는 의지를 가지면, 사회의 부조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왜 행해진 일 앞에서 의지는 무기력해지며, 과거의 일에 대한 악의를 지닌 방관자가 되나?

ㅡ의지가 있어도 과거의 일은 되돌릴 수 없기에, 의지는 행해진 일 앞에서 무기력해진다.

ㅡ또한 과거의 일에 대해서 만족하지 않기에 악의를 지니고 있지만, 무언가 대응할 수 없기에 방관자처럼 바라만 봐야 한다.

 

의지는 왜 되돌림을 의욕할 수 없나? 의지는 왜 시간의 흐름과 시간의 욕구를 꺾을 수 없나? 왜 이것이 의지에게 비탄인가?

ㅡ의지가 있어도 과거의 경험을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ㅡ이는 곧 시간의 흐름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고, 시간의 미래로 향하려는 욕구를 꺽을 수 없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ㅡ이러한 점에 따라서 과거의 불만족스러운 경험을 한 자는 슬퍼하며 한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갇혀 있는 자들은 누굴 말하나? 왜 이들은 시간이 역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노하나? 왜 이들은 자기처럼 분해하지 않는 것에게 복수를 하나?

ㅡ과거의 경험에 갇혀 있는 자들을 말한다.

ㅡ이들은 과거의 경험을 되돌리고 싶어한다.

 

ㅡ하지만 누구도 과거를 되돌릴 수 없기에, 불만이 가득한 상태가 된다.

ㅡ그래서 분노한다.

 

ㅡ과거의 경험에 갇힌 자들은 과거의 경험에 갇히지 않은 자들이 부럽고 싫기 때문이다.

ㅡ그래서 모두 같은 처지가 되길 바라는 것이다.

 

왜 해방하는 자인 의지는 고통을 가하는 자가 되나?

ㅡ창조하는 의지는 인간을 해방시키지만, 과거의 경험에 함몰된 의지는 인간에게 고통을 가하게 되기 때문이다.

 

시간과 시간의 ‘그랬었지’에 대한 의지의 적의는 왜 복수 그 자체가 되나?

ㅡ시간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기에, 과거를 되돌리고 싶어하는 의지는 불만을 갖고, 그것을 애꿎은 다른 사람에게 풀어간다.

ㅡ이런 특징을 설명한다.

 

어리석음이 정신이라는 것을 배워 인간적인 것에 저주가 된다는 것은 무얼 말하나?

ㅡ여기서 말하는 어리석음이란, 과거의 경험에 집착하여 불만을 갖고, 그 불만을 타인에게 쏟아내는 것을 말한다.

ㅡ문제는 이런 어리석음에 정당화하는 입장이 생기면서 인데, 그렇게 되면서 사람들은 이런 어리석음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거리낌없이 행할 수 있게 된다.

ㅡ이렇게 되면 사회는 부조리를 뻔뻔하게 저지르는 상황으로 나아간다.

ㅡ이는 이상 사회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저주가 내린 것과 다름이 없다.

 

ㅡ이것이 부조리한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성찰로 여겨지게 된다.

 

왜 고통이 있는 곳에 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나?

ㅡ고통이란 과거의 부정적 경험을 말하고, 그에 따라서 사람들은 애꿎은 사람에게 복수한다.

ㅡ이러한 복수를 정당화하는 사람들은 부조리의 연쇄의 작용일 뿐이며, 인간이 세상을 살면서 벌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ㅡ즉 이 세상에 살아있음에 따라 벌을 받는다는 것인데, 여기서 벌은 부조리를 정당하게 저지르기 위해서 고안한 개념인 셈이다; 그래서 복수는 자신을 벌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ㅡ이로써 부조리는 합리화된다.

 

왜 의욕 자체와 삶 일체는 벌이어야 하나?

ㅡ과거의 경험을 되돌리고자 하는 것에게 삶은 고통이다.

ㅡ과거로 돌아갈 수 없으니 그러하다.

ㅡ그래서 이들은 계속 고통을 받는데, 그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서 주변을 공격한다.

ㅡ그리고 이게 정당화되려면, 세상은 인간이 벌받는 곳이라는 논리가 필요하다.

ㅡ그렇게 부조리를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정신 위로 구름이 겹겹이 모여든다는 것은 뭘 말하나? 왜 광기가 설교한다고 말하나?

ㅡ부조리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대해서 집단의식이 되면서, 하나의 이론이 되는 것을 표현한다.

ㅡ애초에 부조리를 정당화하는 논리는 그릇된 것이기에, 광기로 표현된다.

ㅡ그리고 이 논리가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것이 광기의 설교로 표현된다.

 

광기의 설교는 무엇을 말하나?

ㅡ모든 것이 사라지고 사라져 마땅하다고 하는 것은 세상이 덧없고 괴로운 것임을 나타낸다.

ㅡ즉 고통스러운 경험이 가득한 곳이므로, 세상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ㅡ아이들을 먹어 치운다는 것은 자신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ㅡ즉 과거의 일에 따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재와 미래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다.

ㅡ이것이 시간의 법칙인데, 이것이 올바르다고 말하는 것으로, 부조리를 긍정한다.

 

ㅡ사물들의 옳음과 벌은 선악에 대한 정형화를 말한다.

ㅡ문제는 옳음과 벌/죄가 정형화되어져 있다면, 구원이 가능한지의 문제가 생긴다.

ㅡ왜냐면, 옳음과 벌/죄가 정해졌다면, 벌/죄는 언제까지고 벌/죄가 되기 때문이다.

ㅡ이렇게 된다면 구원이 될 수 없다.

 

ㅡ또 벌/죄가 영원하다면, 이 세상은 벌/죄가 계속해서 나타날 수밖에 없다.

ㅡ즉 이 세상은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벌하는 것이 계속해서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이 세상의 자연스러운 섭리라는 것이 된다.

ㅡ이로 인해, 타인에게 과거의 불만을 표출하고 해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인식된다.

 

왜 의지가 자기 자신을 구원하지 않는 한 벌은 영원해지나? 왜 의욕이 무욕이 되지 않으면 벌은 영원한가?

ㅡ현재 이 부조리의 문제는 과거의 불만족스러운 경험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의지 때문에 생긴다.

ㅡ즉 내가 부조리를 당했는데 개선할 수 없으니 그 불만을 현재에서 풀면서 생겼기 때문인 것이다.

ㅡ그러므로 과거의 불만을 없애는 게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과거의 경험을 전복시키려는 의지를 가져선 안 된다.

ㅡ즉 과거의 경험을 전복시키는 것을 무욕해야 하는 것이다.

ㅡ그러면 과거의 경험을 전복시키지 못해서 생기는 불만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광기의 터무니없는 노래는 무얼 말하나?

ㅡ현재 광기가 말하는 것은 부조리의 정당화이다.

ㅡ이처럼 부조리를 정당화하는 것이 터무니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의지는 창조자”라고 가르치는 것은 왜 광기의 터무니없는 노래에서 벗어나게 이끌었나?

ㅡ의지가 창조자라는 것은, 가치를 창조하는 걸 바라는 상태를 말한다.

ㅡ이런 상태에서 창조하는 걸 의지한다고 말할 수 있으므로 말이다.

 

ㅡ가치를 창조하는 것은 올바른 것을 분별한다는 것을 말한다.

ㅡ올바른 것을 분별한다는 것은 맹목적으로 사회에서 말하는 올바름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ㅡ이는 올바름을 추구한다는 것인데, 올바름의 추구는 성숙해지려는 존재가 갖는 특징이다.

ㅡ이 성숙해지려는 존재는, 자신이 과거에 연연해서 전복하고 싶어하는 것을 미숙하게 바라본다.

ㅡ그러므로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만드는데, 이런 면에서 과거에 집착하는 의지가 개선된다.

ㅡ이런 의미에서 나타난 구절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의지에 대한 질문을 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창조하는 의지를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ㅡ그리고 자신의 가르침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상술한다.

ㅡ즉 “나는 너희들에게 이처럼 광기를 벗어날 방법을 알려줬는데, 지금 너희는 하고 있어?”라는 식으로 묻는 것이다.

ㅡ이에 따라, 질문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이렇다.

          너의 의지는 창조의지가 되려고 하는가? 너는 성숙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

          그러려고 한다면, 언제 그 의지가 나타날 것인가?

          의지는 과거의 경험에 대한 전복을 바라는 것을 벗어났는가?

          의지는 그렇게 부조리로부터 너 자신을 구원하는가? 그래서 너를 기쁨/행복으로 나

          아가게 하는 의지가 되었나?

          이제 과거의 경험을 전복시키려는 것에 대한 집착은 잊은 것인가?

 

왜 차라투스트라는 의지와 시간과 화해하는 걸 가르친 사람을 묻는가? 그는 누구인가?

ㅡ여기서 말하는 의지는 과거의 경험에 대해 집착하는 의지다.

ㅡ이 의지는 과거를 되돌릴 수 없음에 따라서 분노하는데, 이를 시간에 불만을 갖는다고 본 것이다.

ㅡ그래서 시간과 화해하게 하는 건데, 이러려면 의지의 변화, 즉 과거의 경험에 대한 집착은 끊고, 성숙해지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ㅡ이 성숙해지려는 의지도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갖기가 힘들다.

ㅡ이 의지를 가지려면 이상 사회가 가능하다는 낙관적 전망이 있어야 하는데, 이를 가르치는 것은 차라투스트라다.

ㅡ즉 사람들이 시간과 화해하게 한 것은 차라투스트라인 것이다.

ㅡ이는 곧 사람들에게 자신의 공로를 확인하려고 하는 모양새로 보여지게 된다.

 

왜 의지는 일체의 화해보다 더 높은 것을 의욕해야 하나?

ㅡ왜냐면, 과거의 경험에 집착하지 않는 것은 이상 사회로 더 나아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놀라는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공로에 대해서 스스로 언급하고 있다.

ㅡ이는 자신이 선호하지 않던 모습이다.

ㅡ즉 자신의 탐욕적인 모습이 드러남에 따라 놀란 것이다.

 

ㅡ그런 면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기 어렵다고 말한다.

ㅡ실언을 하기 때문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곱사등이와 제자에게 다르게 대하고 말하는가?

ㅡ차라투스트라는 곱사등이에게는 요구를 거부하면서 차라투스트라를 곤란케 하려는 그들의 의도를 언짢아 하는 반면, 제자들에게는 앎을 나누려고 한다.

ㅡ이런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곱사등이는 차라투스트라를 곤란에 빠뜨리게 하려고 시도한 자고, 제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순순히 따라 듣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곱사등이는 왜 차라투스트라가 제자들에게 속내를 말하지 않는다고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고 싶어하고 으스대고 싶어하는 상태로 볼 수 있다.

ㅡ그런데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황급히 숨긴다.

ㅡ제자들은 여기에 대해서 별 의심없이 바라본 것으로 보이지만, 곱사등이는 이런 차라투스트라의 본심을 포착하고 지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