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서문 의역

차라투스트라 - 서문 9장 의역 (완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5. 21. 01:13

ㅡ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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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서문 9장


 
서문 9장 개괄

 
 
9장은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이 노력해야 할 대상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장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염두해야 할 대상들이 군중이 아니라, 이미 자신과 같은 길로 나아가고 있는 운둔자나 둘이서 지내는 자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왜냐면,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구상한 무거운 사상에 따라서 이상 사회를 구현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을 이상적 존재가 되게끔 교육하는 것보다, 이상사회를 위해서 노력할 수 있는 존재들을 모아 이상사회를 구축하는 것이 우선 된다.
따라서 설득이 필요한 게 아니라, 함께 노력할 존재가 우선 되는 것이다.


 

6장부터는 차라투스트라가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을 통해서 표현하므로, 
번역과 함께 의역을 남깁니다.


 
 

번역
 
 

새벽 즘에 잠든 차라투스트라는 오전이 지나갈 때까지 잠을 잤다.
마침내 눈을 뜬 차라투스트라는 숲의 고요함에 놀랐다.
그러면서 자신의 내면을 살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뭍을 발견한 항해자들처럼 빠르게 일어서서 환호했다.
그가 새로운 진리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보니 나는 동료가 필요하다.
     나를 추종하는 자나 이미 죽어버린 존재*가 아니라, 살아서 함께 할 동료 말이다.
*죽은 줄타기 곡예사를 말한다.
 
     같은 길을 나아가는 것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내가 가기에, 내가 가자고 했기에 같이 가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원해서 가고 있는데, 그 길이 나와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어제의 일을 겪으면서 생각해봤는데,
     나는 군중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를 향해 말해야 하는 것 같다.

*사회를 벗어나서 살아가는 은둔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혼자이거나 둘인데, 둘인 이유는 남녀 은둔자들이 가정을 이루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잠에서 깬 차라투스트라
그는 자신이 노력해야 할 대상이 군중이 아니라 은둔자들임을 알아차린다.


 
     나는 양 떼를 이끄는 목자나 개가 되어선 안 된다.
     애초에 나는 많은 이들을 이 무리에서 빼내려고 노력해오지 않았나?
     군중과 무리는 나에게 화를 내는 게 맞다.
     그들에게 있어 나는 그들의 양을 빼내가는 강도이니 말이다.
 
     내가 목자라 부르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선하고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부른다.
     또 올바른 믿음을 가진 신자라고 말한다.
 
     선하고 정의로운 자들, 올바른 믿음을 가졌다는 신자들을 보자.
     그들은 누구를 가장 미워하는가?
     그들의 가치/규율을 깨부수는 자, 그들의 규율에 따르지 않는 자들이 아닌가?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규율을 깨부수고 따르지 않는 자는 단순히 그런 존재가 아니라,
     올바른 가치를 판단하고 그에 따른 가치와 규율을 창조하는 창조자*다.

 *이는 위버멘쉬와 같은 존재, 차라투스트라 자신과 같은 존재를 말한다.


     창조자는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동료를 찾지,
     이미 죽어 버린 동료나 군중, 종교인들을 찾지 않는다.

 
     창조자들이 동료를 찾는 이유는 새로운 가치를 같이 발굴할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홀로 가치에 대해서 탐구하고 분석하는 것보다는 여럿이 함께 하는 것이 더 행복하고 수고도 적지 않겠는가?
 
     또한 창조자의 이미 수확의 시기*를 맞았는데, 낫도 없고 일손도 부족하다.
     그래서 그는 홀로 하나하나 이삭을 거두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할까?
     그래서 창조자는 같이 거둘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는 올바른 앎을 사회에 뿌리고 무리를 형성해야 한다.

그래야 이상사회가 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을 혼자한다면, 그래서 무리를 혼자서 형성하려고 한다면, 이상을 추구하는 무리의 성장 속도가 굉장히 더딜 뿐만 아니라, 무리가 성장하다 반이상주의자들로 인해 소멸될 수도 있다.

따라서 다수가 동시에, 동시는 아니더라도 지속적으로 노력해야만 한다.


     군중은 창조자를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자들이라고 할 것이며, 선악을 존중하지 않고 경멸하는 자들이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수확하는 자들이고, 축제*를 벌이는 자들이다.

*이상적 미래를 위한 노력을 하고, 그 노력에 대해서 기리는 축제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1권 21장에서 좀 더 자세히 확인 가능하다.

 
     나 역시도 서판에 새로운 가치와 규율을 함께 써내려갈 동료, 함께 수확할 동료, 함께 이상적 미래를 바라는 축제를 벌일 동료를 찾는다.
     이런 동료가 군중이나 목자나 시체와 어떤 관련이 있겠는가?
 

새로운 서판에 규율을 적는 창조자
그는 이상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규율을 기록하고 있다.


 
     나의 첫 동료였던 곡예사여, 이제 안녕히 가거라.
     나는 너를 짐승들이 접근하지 못할 나무 속에 잘 숨겨두었다.
 
     이제 우리는 헤어질 시간이 된 듯하다.
     새벽 중에 내게 새로운 진리가 왔다.
 
     나는 목자가 되어서도 안 되고, 묘지기여서도 안 된다.
     나는 다시는 군중들과 말하지 않을 것이다.
     죽은 이와 말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나는 창조자들, 수확하는 자들, 축제를 벌이는 자들과 함께하고자 한다.
     나는 그들에게 무지개*를 보여주고, 위버멘쉬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보여줄 것이다.

*이상적 미래를 말한다.
 

     나는 은둔자나 둘이서 사는 자들*에게 내 노래를 부를 것이다.
     이제껏 전례가 없는 것을 들을 귀가 있는 이가 있다면, 그는 나의 행복을 들으면서 무거운 진리를 마음에 갖게 될 것이다.

*앞서 이야기를 했듯이 부조리로 인해서 사회로부터 멀어진 자들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동료로 삼을 만한 조건에 있는 자들이 된다.

 
     나는 내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
     내 길을 갈 것이다.
     이상사회로 나아가는 데에 주저하거나 느리게 가는 이가 있다면, 나는 그들을 지나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가는 길은 현재에 머무르는 자들이 몰락하는 길이 될 것이다!"
 

숲을 벗어나는 차라투스트라
그는 자신의 길을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하나씩 방법을 알아간다.


 

의역

 
제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는데, 제게는 동료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를 추종하는 이나 나와 같은 길을 가다 죽은 이가 아니라, 같은 길로 함께 나아갈 살아있는 동료 말입니다.
 
같은 길로 간다는 것은
내가 가니 따라오는 것도 아니고, 내가 가자고 해서 가는 것도 아닌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서 가던 길이 저와 같은 것을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군중을 꼬득이기 위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를 향해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사람들을 이끄는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미 저는 사람들을 이끄는 집단들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고 있으니,
제가 만약 그런다면, 저는 언행이 불일치하는 인간이 되어 우스워지고 말 것입니다.
 
또 동료를 모으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집단에서 벗어나라고 말을 하긴 했으니,
집단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인 듯합니다.
선하고 정의롭다 불리는 사람들, 신실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이들은 저 같은 사람을 굉장히 싫어 합니다.
그들의 질서/가치/규율을 따르지 않으면서, 질서/가치/규율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비판하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저와 같은 이를 규율을 부수고 따르지 않는 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들은 규율을 깨부수고 따르지 않는 자가 아니라,
올바른 가치를 세우고 그에 따른 가치와 규율을 창조하는 창조자들이니까요.
 

같은 길을 나아가는 두 사람
차라투스트라는 이처럼 같은 길로 나아가는 존재를 찾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런 창조자가 애초에 군중이나 종교인에게서 자신의 동료를 찾는 것은 이상해 보이긴 합니다.
애초에 사람들 속에 창조자의 동료가 있기는 할까요?
이미 죽어버린 존재를 동료로 삼는 것은 어떤가요?
 
창조자가 동료를 찾는 이유는 혼자선 이상적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가 버겁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가치를 세우고 규율을 만드는 일도 혼자서 하기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창조자가 구상한 이상사회를 수립하는 것도 혼자서 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머리로는 이미 완성이 되어 있더라도 그 구상이 실현되어야 의미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실현을 위해서 동료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야 사회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이러한 창조자를 사회의 가치관과 규율을 무시하며 질서를 파괴하는 자들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이상 사회를 실현시키려고 노력하는 자들일 뿐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긍정할 것으로 여기고, 삶을 공허한 것이 아닌 생동감 있는 것으로 만드려고 노력하는 자들일 뿐입니다.
 
이런 존재가 어떻게 군중이나 목자, 이미 죽어버린 존재들 사이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혼자서 추수하는 남자
추수할 것이 많으나 일손이 부족하니, 그에게는 동료가 필요하다.


 
이상적 미래를 향해 나아가다 실패한 자여,
이제는 그대와 작별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대의 삶의 가치는 누구도 훼손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할 동료들을 찾고,
그들과 함께 현생을 긍정할 수 있게끔, 이상 사회로 한 걸음씩 나아가게끔 시도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그들에게 이상사회의 가능성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들에게 위버멘쉬*로 나아가는 과정을 알려줄 것입니다.

*부조리를 극복하고 올바름을 추구하는 존재를 말한다.


저는 부조리한 사회를 떠난 은둔자들*에게 갈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제껏 불가능하다 여겨졌던 이상사회로 나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알려줄 것이고, 그들을 고양시킬 것입니다.

*은둔자들은 홀로 있거나 은둔자들끼리 가정을 이루고 있을 수 있다.


저는 이상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나아갈 것입니다.
이상 사회로 나아가는 것에 주저하거나 의지를 갖지 않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를 지나칠 것입니다.
그는 나의 동료가 되기 어려운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상사회로 나아가는 이 길은 부조리한 사회에 순응하는 사람들에게는 몰락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위버멘쉬를 동경하는 커플을 찾은 차라투스트라
차라투스트라는 동료를 찾기 위해 위버멘쉬를 동경하는 은둔자와 커플들에게로 나아간다.


 

생각해볼 거리들

 
차라투스트라는 왜 송장/시체/죽은 곡예사는 어떤 존재이기에 언급되는가?
ㅡ 송장/시체/죽은 곡예사는 당연히 길동무가 될 수 없다.
ㅡ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라투스트라는 그를 동료의 선상에 올렸었고, 9장에 이르러서 그가 동료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ㅡ 도대체 왜 차라투스트라는 이런 생각에 빠진 것일까?
 ㅡ 이를 알기 위해선, 곡예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ㅡ 차라투스트라는 자신과 같은 뜻을 가지고 시도하다가 죽은 곡예사를 발견하게 된다; 곡예사는 줄을 타는 자이고, 차라투스트라는 줄을 타서 위버멘쉬로 나아가라고 말을 하니까.
ㅡ 문제는 곡예사와 대화를 했다 하더라도, 차라투스트라와는 함께 나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고, 이제는 함께할 수 없는 사람, 즉 과거의 사람을 나타내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ㅡ 따라서 송장/시체/죽은 곡예사 등은 모두 ‘과거의 시도자’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ㅡ 죽은 곡예사를 과거의 사람이라고 치환한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배척을 받다가 과거의 시도자를 알게 되었고, 과거의 시도자를 벗 삼아서 길을 나아간 것이라 할 수 있다.
ㅡ 그런데 과거의 존재를 벗 삼아서 나아간다는 것을 보면, 과거 학자를 벗 삼아서 나아갔다는 뉘앙스로도 해석해 볼 여지가 있다.
ㅡ 즉 죽은 곡예사는 니체보다 먼저 살았던, 이상사회를 그렸던 자, 그러한 사상을 책으로 남겼던 자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ㅡ 차라투스트라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위버멘쉬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그에게는 사색의 벗이 필요했기에, 책이 벗이 되었을 수 있다.
ㅡ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죽은 이와 함께 길을 나아갔을 것이다.
ㅡ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제는 성장이 아닌, 자신의 사상의 실현을 위해 활동해야 하는 상태가 옴으로써, 죽은 자의 산물인 책은 더 이상 함께할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창조자는 왜 추수하는 자인가?
ㅡ 현재 언급되는 창조자는 이상 사회에 대한 구상을 마친 존재로 보인다.
ㅡ 따라서 구상을 실현만 하면 되는 상황, 구상을 실현해서 결실만 보면 되는 상황인 것이다.
 
ㅡ 하지만 문제는 이상사회로 나아가려는 창조자의 계획은 개인이 수행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ㅡ 왜냐면 이상 사회의 구축은 실제로 그런 노력들이 현실로 나타나고, 그러한 집단이 구축되었을 때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ㅡ 즉 집단이 형성이 되어야 비로소 결실을 얻는 것인데, 이상사회를 같이 구현할 존재가 없는 것이다.
ㅡ 따라서 창조자는 이미 영글은 곡식을 가지고 있지만, 수확을 못하고 있는 상태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ㅡ 이에 따라서 같이 이상사회를 위해서 노력해 줄 수 있는 동료가 필요한 것이다.
 
ㅡ 혼자서 이상 사회를 구현하기 어려운 관계로, “그에게는 백 개의 낫이 없다”고 하며, 혼자서 어떻게든 노력하는 것을 보면서 “이삭을 손으로 쥐어뜯으면서 짜증을 내고 있다”고 표현한다.
 
창조자들은 왜 축제를 벌이는 자들인가?
ㅡ 축제를 벌인다는 것은 니체가 차라투스트라 1권에서 세 번 정도 언급한다.
ㅡ 그 중에서 축제를 벌이는 것과 관련된 표현은 「차라투스트라, 1권 21장」인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올바른 축제는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의지를 갖는 자들을 축복하는 축제다.
          모두가 죽음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런데도 죽음은 아직도 축제 가 아니다.
          인간은 가장 아름다운 축제를 벌이는 법을 아직도 배우지 못했다.
               (중략)
          완성을 가져오는 자는, 희망하는 자와 서약하는 자에 둘러싸여 승리에 찬 죽음을
          맞는다.
          이렇게 죽는 법을 사람들은 배워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죽어가는 자가 살아있는 자들의 서약을 축성하는 자리가 아니라면,
          어떤 축제도 열려서는 안 된다!
ㅡ 대략적인 의미를 본다면, 이상사회를 위해 과업을 위해 노력하다 과업을 완수했다 여겨질 때 죽는 법을 배워야 하며, 이렇게 과업을 완수하는 자가 과업을 이어받는 자를 축복하는 자리가 아니라면 어떤 축제도 열려선 안 된다는 것이다; 자세한 해석은 21장 의역을 참고하길 바란다.
ㅡ 아무튼 이런 축제를 벌이는 자는 위버멘쉬를 지향하는 자들이고, 이상 사회를 구현하려는 자들이다.
ㅡ 그리고 이상 사회를 구현하려는 자들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창조자들이므로, 창조자들은 21장에서 말하는 축제를 벌이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ㅡ 결론적으로, 창조자는 이상 사회를 위한 의지를 이어받는 자들을 축복하는 축제를 벌이는 자인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은둔자와 둘이서 사는 자에게 자신의 노래를 불러주는가?
ㅡ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동료가 될 여지가 보이는 자들에게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 은둔자는 사회로부터 벗어난 자들이므로, 후보 대상에 오르는 게 자연스럽다.
ㅡ 그런데 둘이서 사는 자는 왜 후보에 올리는 것일까?
 
ㅡ 차라투스트라는 「차라투스트라, 1권 18장」, 「차라투스트라, 1권 20장」에서 남녀 커플이 서로를 사랑하는 과정에서 위버멘쉬를 향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이야기를 한다.
ㅡ 따라서 둘이서 사는 자는 위버멘쉬를 동경하며 살아가는 남녀 커플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ㅡ 결과적으로, 위버멘쉬를 동경하는 자들은 혼자이거나 둘일 것이기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런 존재들에게만 자신의 노래를 불러준다고 할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의 노래를 들은 자는 차라투스트라의 행복으로 심장이 무거워지나?
ㅡ 차라투스트라가 부르는 노래는 무거운 사상/무거운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ㅡ 그래서 듣는 이의 마음도 무거워진다는 것이다.
ㅡ 그렇다면 어떤 사상/진리이길래 그런 것일까?
 
ㅡ 이는 「유고 (1882년 7월~1883/84 겨울)」의 문구를 참고해 보면 좋을 듯하다.
          21[1]
          가장 무거운 진리를 불러냄.
          이제까지의 모든 염세주의자에 대한 조소의 노래.
          종교와 그것의 도피 시도에 대한 조소의 노래.
          사회주의자, 예수회원, 향락주의자들에 대한 조소의 노래.
          이제까지의 예술가들에 대한 조소의 노래.
ㅡ 이를 통해서 보면, 가장 무거운 진리는 염세주의를 이겨내고, 종교와 현생 도피도 비웃을 수 잇는 진리라는 점을 알 수 있다.
ㅡ 따라서 가장 중요하고 중대한 진리,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염세주의의 극복, 현생에 대한 긍정을 가능케 하는 진리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ㅡ 이런 진리를 들으면서 그들은 마음이 가득차 오르거나 고양되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긴 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길을 가는 중에 머뭇거리거나 느리게 가는 자를 뛰어넘을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곡예사가 아닌가?
ㅡ 곡예사는 머뭇거리고 느리게 줄을 타던 이고, 차라투스트라는 머뭇거리거나 느리게 가는 이를 뛰어 넘을 거라고 했으므로, 차라투스트라는 곡예사를 뛰어 넘을 것이라고 말하는 거라 생각할 수 있다.
ㅡ 하지만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머뭇거리고 느리게 나아가는 자는 곡예사와는 달라 보인다.
ㅡ 곡예사는 위버멘쉬가 되러 가는 길에서 확신이 없었지만,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ㅡ 차라투스트라의 경우, 위버멘쉬가 되려고 나아가는 길이 아니라, 이상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서 나아가는 길이다.
ㅡ 따라서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려고 하지 않는 이는 제낄 것이란 이야기로 볼 수 있지, 위버멘쉬로 나아가는 게 느린 사람은 제낄 것이라는 말로 보이지는 않는다.
ㅡ 따라서 차라투스트라가 뛰어 넘는 자는 곡예사라고 보기 힘들어 보인다.
 
차라투스트라가 가는 길은 왜 그들에게 멸망이 되나?
ㅡ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그들은 이상 사회를 위해서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 자들이다.
ㅡ 이상 사회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 자들은 부조리한 현사회에 만족하는 자들을 말한다.
ㅡ 이렇게 그들을 규정하면, 이상 사회로 나아가는 길은 부조리한 사회에 머무는 이들을 몰락시키게 된다.
ㅡ 왜냐면 이상 사회에서 부조리한 사회에 머무는 이들을 위한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