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서문 의역

차라투스트라 - 서문 4장 의역 (완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5. 17. 15:14

ㅡ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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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서문 4장


 

서문 4장 개괄

 
 
4장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상사회를 추구하는 존재들, 위버멘쉬적 존재들이 갖는 특징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이상 사회를 긍정하고 노력할 수 있게끔 시도하는 자들이며, 사회적 가치관을 벗어나 자신만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만 방종하지는 않는 그런 존재들이다.
 
하지만 그러한 존재로 나아가는 그 과정도 여러 위험이 있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시도하는 개인에 대한 위험이기도 하고, 실패했을 시에 나타나는 사회적 위험이기도 하다.

 


 
 

본문

 
 
사람들의 반응에 놀란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러분,
 인간이란 동물과 위버멘쉬* 사이에 매어진 밧줄을 앞에 둔 존재로,

 처음엔 모두 동물의 지점에 서있고, 소수의 사람들, 정말 몇몇의 사람들만이 위버멘쉬를 향해 나아갑니다.

*위버멘쉬는 부조리를 극복하고 올바른 것을 행동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인간 유형을 말한다.
 
 사람들이 위버멘쉬로 나아가지 않는 이유는 위버멘쉬를 향해 나아가는 시점부터 위험해지기 때문입니다.
 절벽 위의 밧줄을 타면,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위험하고, 나아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도 위험하며, 어쩔 수 없이 가만히 서 있거나 벌벌 떨고 있는 것도 위험하지 않습니까?
 위버멘쉬로 나아가는 것도 그러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위버멘쉬로 나아가는 순간, 우리는 사람들의 무리를 벗어난 존재가 됩니다.
 이제 더는 그들과 비슷하게 생각하기 어려워지며, 이로써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그렇게 다름이 생겨나면, 우리는 사람들에게 불편한 존재로 인식되고, 그에 따라 배척당하게 되거나 처벌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버멘쉬로 나아가는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이 어렵습니다.
 결국 고독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이 고독도 견디기 힘들기는 매한가지죠.
 
 이러한 상태에서 고독이 힘들어 다시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이미 전처럼 사람들과 같이 사유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으니까요.
 이미 우리는 사람들의 사유가 무언가 어리숙하다는 걸 느껴버렸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리숙한 존재가 된 채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자신이 바보같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바보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인데, 이는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또 위버멘쉬를 향해 나아간다고 해서 무조건 위버멘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위버멘쉬로 나아가는 길에 유혹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위버멘쉬가 되려고 나아가는 것은 자신이 가진 앎과 가치에 대해서 부조리함/그릇됨을 느껴서 올바른 이해를 갖추기 위해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억압하던 사회적/종교적 규율들에 대해서 살피게 되고, 그릇된 사회적/종교적 규율을 벗어나려고 하게 되죠.
 이처럼 사회적/종교적 규율을 벗어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벗어난 후에 방종*하는 것이 문제이죠.

*제멋대로 거리낌없이 행동하는 것
 
 사회적/종교적 규율은 우리에게 절대적 가치를 제공해주던 것입니다.
 그 절대적 가치가 우리에게 부정적인 경험을 주었다면, 우리는 절대적 가치를 갖지 않으려는 경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가 따라야 할 어떤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 각자가 원하는 것을 추종하며 살아가려고 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방종하는 존재, 사회적/종교적 규율에 통솔 받던 시절보다 자유를 명분삼아 되려 부조리를 일삼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절대적 가치를 부정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할 수 있게 되면서 우리는 쾌락과 즐거움의 유혹에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위버멘쉬는 향하려다 되려 위버멘쉬로부터 멀어지는 상황에 놓이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과 실패의 위험이 있기에, 위버멘쉬로 나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절벽 사이의 줄을 타는 사람
위버멘쉬를 향해 나아가는 길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진정으로 위대한 인간은 그가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다리와 같은 존재입니다.

 추앙받으려고 하면 할 수록, 인간은 어떻게든 추앙받기 위해서 궤변과 기만을 일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점차 위대한 인간에서 멀어지겠죠.

 반면에 사람들에게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려는 목적을 지닌다면, 그는 자신의 평판보다는 목적을 우선할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며 사람들에게 올바른 것을 전하려고 하겠죠.

 그렇기에 위대한 인간은 추앙받는 존재가 아닌, 사람들이 올바른 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다리가 되어주는 존재라 할 수 있는 겁니다.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을 만한 사람은 그가 이상 사회로 나아가려는 자이자, 사람들에게 자신의 앎을 선사하는 사람인 경우입니다.
 
올바른 이해를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그래서 사람들에게 올바른 이해를 선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저는 사랑합니다.
그들은 이상사회로 나아가려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현사회의 부조리한 규율과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그릇된 가치관을 경멸하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그들은 이상 사회에 대한 숭배자들이며, 이상사회로 향해 나아가는 화살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앎을 나누는 이유가 내세나 사후세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현생을 이상적인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인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그들 덕분에 이상 사회의 실현이 앞당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부조리를 개선하기 위해서 올바른 이해를 얻으려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이러한 자들이 이상 사회를 위해서 깨우치고 사람들에게 앎을 나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상 사회를 동경하는 자들에게 기반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수고하고 궁리하는 자들을 사랑합니다.
그들의 노력으로 후대의 사람들이 덕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의 가치관을 갖추고 살아가는 자들*을 사랑합니다.
자신만의 가치관을 가진다는 것은 그들이 사회적 가치관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이상 사회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갖춘 존재이자, 이상 사회로 나아가는 존재라는 걸 말하기 때문입니다.

*후술되지만, 여기서 말하는 자신만의 가치관은 방종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치관을 말한다.


그리고 그 가치관이 사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면서, 자신을 온전히 담고 주변인들과의 관계도 생각하는 성숙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을 사랑합니다.
이로써, 그들은 이상사회에 적합한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가치관에 따라 이상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렇게 그는 이상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 살려고 하며, 또 죽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많은 가치관을 두어 휘둘리지 않고, 하나의 목적에 따라 가치관들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이로써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운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상을 바라지 않으면서, 앎을 나누는 자를 사랑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앎을 나누면서 자신을 돌보지 않는 헌신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행운을 자신의 능력으로 보지 않는 자를 사랑합니다
그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성취한 게 아니라면, 그 성취를 자랑스러워 하지 않고, 부끄러워합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부조리로부터 지킵니다.
 
말한 바를 지키면서도 더 많은 것을 해내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는 책임감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무책임한 사회에 대한 반감을 지니며, 책임감이 있는 사회를 지향합니다.
 
다가올 이상 사회를 긍정하고, 과거에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했던 이의 명예를 높여주는 자를 사랑합니다.
이럴 수 있는 사람은 부조리한 사회 개선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정직을 사랑하여, 거짓되고 그릇된 것을 벌하려는 이를 사랑합니다.
그의 정직으로 인해, 그는 부조리한 사회를 벗어나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비판 받아도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갈 수 있는 둔감한 사람,
그렇지만 사소한 부조리를 경험해도 반감을 지닐 수 있는 섬세한 사람을 사랑합니다.
이런 사람이 이상 사회로 나아가려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이러한 이해가 이상사회로 나아가는 밑거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세상에 대한 이해를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이구요.
 
생각과 감정이 정형화되지 않은 사람을 사랑합니다.
사회로부터 정형화 된 가치와 규율에 따르는 것이 아닌 자신의 느낌을 중시할 때,

그는 이상 사회로/자신의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이들, 이상 사회가 다가올 것이라는 것을 알리는 이들을 사랑합니다.
그들의 노력은 이상 사회의 밑거름이 될 테니까요.
 
저 또한 이상 사회가 다가올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위버멘쉬의 사회가 온다는 것을 알리러 온 것입니다.
 
 

사람들이 저 너머로 건너갈 수 있게 해주는 다리
차라투스트라는 부조리한 사회를 벗어나 이상사회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위대한 존재들을 다리라고 불렀다.


생각해볼 거리들

 

인간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의 밧줄인가?
ㅡ 엄밀하게 말하면 이러한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ㅡ 이 장에서 후술되기도 하지만, 인간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의 밧줄을 건너가거나 건너가지 않는 자이기 때문이다.
ㅡ 따라서 밧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ㅡ 그리고 짐승에서 위버멘쉬로 나아가는 것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짐승의 지점에 있다.
 
왜 짐승에서 위버멘쉬로 건너가는 것은 위험한가?
ㅡ 몇 가지 경우가 있다.
 
ㅡ 우선 위버멘쉬로 나아간다는 것은 무리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ㅡ 이는 곧 무리로부터 수용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ㅡ 따라서 고독 속에 놓이게 되는데, 이러한 것을 굳이 자처할 필요가 있느냐는 문제가 생긴다.
 
ㅡ 다음으로 위버멘쉬로 나아가다가 다시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는 경우다.
ㅡ 위버멘쉬로 나아간다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서 문제를 느꼈기에 벗어나려고 했다는 것이다.
ㅡ 이에 따르면 문제를 느낀 집단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인데, 문제를 마주하면서 아무 문제가 없는 듯이 지낼 수 있느냐는 문제에 놓인다.
ㅡ 그리고 저들처럼 행동해야 하는데, 그럴 때 거리낌 없을 수 있느냐의 문제에도 놓인다.
ㅡ 이런 불만족스러운 상황 속에서 지내는 문제에 놓이는데, 이를 자처할 필요가 있느냐는 문제에 놓인다.
 
ㅡ 또한 위버멘쉬로 나아가는 길 자체도 만만치 않다.
ㅡ 위버멘쉬로 나아가게 되면, 사회적 규율들을 벗어나게 된다.
ㅡ 왜냐면 사회적 규율들의 부조리를 느꼈기에 위버멘쉬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ㅡ 그런데 사회적 규율들은 어떤 특정한 것들에 대해서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던 규율이다.
ㅡ 그래서 위버멘쉬로 나아가려던 사람들은 사회적 규율에 대한 반감으로 절대적 가치를 두려고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ㅡ 절대적 가치가 상실되게 되면, 어떤 것들이라도 가치를 지니는 상황이 되고, 이렇게 되면 자유롭게 행동하게 되는 상황에 이른다.
ㅡ 이런 상황으로 나아가면, 행동의 제약이 사라지게 되면서, 방종/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ㅡ 즉 부조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한 행동이 결국 더 큰 부조리를 낳는 경우로 나아갈 수도 있다.
ㅡ 이는 사회로서는 질서를 해치는 상황이 되므로 사회는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려는 시도 자체를 좋지 않게 본다.
 
ㅡ 이처럼 위버멘쉬가 되려 나아가는 것에는 개인적 차원에서의 위험과 사회적 차원에서의 위험이 함께 도사리고 있다.
 
“인간의 위대함은 목적이 아니라 다리”라는 표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ㅡ 여기서 말하는 인간은 일반적인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인간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 위대한 인간은 사람들을 부조리한 사회에서 이상사회로 나아갈 수 있게끔 하는, 니체 말로는 건너가게끔 하는 다리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ㅡ 또한 위대한 인간은 목적이 아니라고 하는데, 이는 위대한 인간이 사람들의 목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ㅡ 즉 위대한 인간은 사람들이 추종하고 닮으려는 대상이 되는 게 아닌, 사람들이 성장하게만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강하는 자란 무엇을 말하나?
ㅡ 하강한다는 말은 「차라투스트라, 1권 22장 3절」을 보면 이해하기 편하다.
 
ㅡ 우선 하강은 태양이 정오에 이르렀다가 내려가는 것을 말한다.
ㅡ 여기서 태양은 올바른 이해를 갖는 사람을 말하는데, 정오에 이른다는 것은 충분한 올바른 이해를 갖춘다는 것을 말한다.
ㅡ 이 상태에서 하강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올바른 이해를 선사하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차라투스트라, 서문 1장」의 차라투스트라의 행보와 같다.
ㅡ 올바른 이해를 갖춘 이가 사람들에게 올바른 이해를 선사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의 유한함 때문이다.
ㅡ 즉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 올바른 이해를 자신만 가지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다.
ㅡ 따라서 사람들에게 알리고, 자신처럼 올바른 이해를 가지려고 노력할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자극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해를 선사하게 된다.
ㅡ 니체는 하강하는 자는 내일의 태양을 위해서 하강을 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한 개인의 하강과 더불어 새로운 개인의 떠오름을 말하는 것이다.
 
ㅡ 아무튼 하강하는 자라는 것은 자신의 지식을 나누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저쪽으로 건너가는 자란?
ㅡ 저쪽은 저승이나 내세가 아닌 이상사회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 하강하는 자들은 이상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ㅡ 차라투스트라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위대한 경멸자란 무엇인가?
ㅡ 차라투스트라는 이상사회를 추구하고 있고 부조리한 사회를 경멸하고 있다.
ㅡ 이런 점에서 따라 보면, 위대한 경멸자는 부조리한 사회를 경멸하는 사람들이다.
 
왜 위대한 경멸자는 위대한 숭배자인가?
ㅡ 이상사회를 숭배하면서 부조리한 사회를 경멸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왜 위대한 경멸자는 다른 물가로 향하는 동경의 화살인가?
ㅡ 경멸자는 현 사회가 아닌 이상 사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를 말한다.
ㅡ 이들은 이상사회를 동경하고 그리로 나아가고 싶어하기에, 화살로 비유된다.
 
별들의 배후를 찾는 자는 누구인가?
ㅡ 여기서 별은 천상의 빛나는 것들로 내세나 사후세계를 의미한다; 왜냐면 대지가 바로 후술되기에 대비되는 별은 대비되는 개념이 되는데, 대지는 현생을 말하므로, 별은 내세나 사후세계를 의미한다.
ㅡ 이에 따라서 별들의 배후를 찾는다는 것은 내세/사후세계의 근거를 찾는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ㅡ 또 다르게 보면, 종교적 교리를 공고히 하려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대지가 위버멘쉬의 것이 되도록 하고, 대지를 위해 희생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ㅡ 대지는 현세계를 말한다.
ㅡ 현세계는 부조리한 자들이 장악한 상태인데, 이 사람들은 위버멘쉬가 장악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ㅡ 즉 이상사회를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위버멘쉬가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깨우치기를 원하는 사람은 왜 몰락을 원하나?
ㅡ 이 문장은 앞서 하강하는 자의 특징을 설명한다.
ㅡ 즉 이상 사회를 위해서 올바른 이해를 쌓고, 그런 사회를 위해서 사람들에게 설파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몰락이 나오는가?
ㅡ 몰락은 하강을 나타내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ㅡ 실제로는 몰락 또는 하강으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다; Untergang.
ㅡ 따라서 몰락/하강/파멸/멸망으로 번역될 수 있다.
 
ㅡ 이후로도 몰락은 하강을 나타낸다고 보면 되는데,
ㅡ 하강하는 자라는 의미를 담기도 하지만, 그저 위버멘쉬를 향하는 자라는 의미를 담기도 한다; 하강하는 자와 위버멘쉬를 향하는 자는 차이가 있는데, 하강하는 것은 지적 성숙에 이른 상태라면, 위버멘쉬를 향하는 자는 지적 성숙을 이룬 자와 지적 성숙을 아직 못 이뤘으나 성숙하려고 하는 자를 모두 말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덕을 사랑하는 사람은 왜 몰락하려는 의지이자 동경의 화살인가?
ㅡ 자신의 덕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회가 제공하는 덕을 거부한다는 것을 말한다.
ㅡ 사회가 제공하는 덕을 거부한다는 것은 그 덕에서 불만족을 느끼기 때문이다.
ㅡ 즉 이상 사회에 대한 동경을 가진 자라는 것을 말하는데, 이로써 동경의 화살이란 표현이 나온다.
ㅡ 또 몰락하려는 의지는 하강하려는 의지를 가진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으므로,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자라고도 해석해볼 수 있다.
 
자신을 위해 한 방울의 정신도 남겨두지 않고, 자기 덕의 완전한 정신이 되고자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ㅡ 이는 해석이 애매한 부분이기는 하다.
ㅡ 한방울의 정신도 자신을 위해 남겨두지 않는다는 것은 사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러면서 자신이 자기 덕의 완전한 정신이 되고자 한다고 하는데, 덕을 가치관으로 본다면, 가치관이 자신을 완전히 반영한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 이를 종합해보면, 사리를 위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반영하는 가치관을 가진 자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 왜 이런 표현이 나오는지 생각해 보면, 사리를 위하는 경우 방종하는 상황에 이를 수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ㅡ 그래서 방종하지 않을 가치관이면서 자신을 온전히 담은 가치관을 가진 자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자신의 덕으로 자기 성향과 운명을 만드는 이는 누구인가?
ㅡ 자신만의 가치관으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정한 사람을 말한다.
ㅡ 이는 사회적 가치관에 따르지 않는 존재인데, 이들이 자신만의 가치관을 구축한 것은 자기 자신의 행복, 부조리로부터의 벗어남을 목적해서다.
ㅡ 이러한 목적에 따라서 가치관이 생겨나고, 그 가치관과 목적에 따라 사는 존재를 말한다.
 
너무 많은 덕을 갖고 싶어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ㅡ 「차라투스트라, 1권 15장」에서 나오겠지만, 다양한 덕들이 하나의 목표를 지니지 못하면, 인간은 이 덕들의 모순과 충돌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행복과 멀어지게 된다.
ㅡ 그러므로 다양한 덕들을 갖는 것보다는 하나의 목표 안에서 덕들을 통제하기를 바란다.
ㅡ 그렇게 되면 덕들이 개인을 침범하지 않고서 행복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왜 한 가지 덕이 두 가지 덕보다 더 큰 덕이고, 왜 거기에는 운명이 매달리나?
ㅡ 여기서 말하는 한 가지 덕이란, 실제 한 가지 덕을 말하는 게 아니고, 하나의 목표에 의해 통합된 덕을 말한다.
ㅡ 이런 상태에서 개인은 가치판단을 함에 있어서 혼란으로 나아가지 않지만, 다른 목표를 두고 덕 체계를 가지게 된다면, 혼란으로 나아가게 된다.
ㅡ 예컨대, 쾌락을 중시하는 가치체계와 성숙을 중시하는 가치체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쾌락과 성숙을 고민하는 상황에서 혼란을 겪게 되고,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다른 가치체계에 따른 후회가 남는다.
ㅡ 반면 성숙만 중시하는 가치체계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고민하는 상황에 놓이지 않고, 선택에 따른 후회도 하지 않게 된다.
ㅡ 따라서 하나의 가치 체계를 갖는 것이 중요한데, 여기서 차라투스트라는 부조리를 저지르지 않는 가치체계, 성숙한 태도를 보일 수 있는 가치체계를 갖추기를 권하고 있어서, 쾌락을 중시하는 가치체계는 차라투스트라가 갖길 바라는 가치체계는 아니다.
 
ㅡ 어쨌든 이상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올바른 이해를 가지려는 가치체계를 지녀야 하는데, 거기서 이상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운명이 매달리게 된다.
 
왜 자신의 행운을 부끄러워하는 이를 사랑하나?
ㅡ 자신의 행운이 자신의 능력으로 이해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ㅡ 이러한 자기 능력에 대한 착오도 부조리를 만든다.
 
미래의 세대를 정당화하고, 지난 세대를 구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ㅡ 이상사회를 원하는 사람은 역사적으로 없었던 것은 아니다.
ㅡ 다만 그 수가 적어 늘 핍박받았고, 오류로 치부되었다.
ㅡ 그런 면에서 현 시점의 이상 사회 추구자는 지난 세대가 오류를 저지르지 않았음을 증명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ㅡ 또한 이상사회에 대해서 부정하는 자들에게 이상사회를 긍정할 수 있게 해주는 증명을 제공한다.
ㅡ 그렇기에 이러한 표현이 나온다.
 
그럼 왜 현 세대로 인해 파멸하고자 할까?
ㅡ 현 세대가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ㅡ 여기서 파멸한다는 것은 Untergang의 번역어로, 하강한다고 보면 된다.
ㅡ 즉 미래 세대를 정당화하고, 지난 세대를 구원하는 사람은 이상사회를 위해서 노력하고 올바른 이해를 선사하려고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자신의 신을 사랑하기에 벌하는 사람을 왜 사랑하나?
ㅡ 여기서 말하는 신은 종교적 신이라고 보기 어려워 보인다.
ㅡ 현재 차라투스트라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부조리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ㅡ 이들은 정직함과 같은 미덕을 중요시한다.
ㅡ 그런데 자신이 이제껏 따르던 종교의 신이 허구로 인식되면, 정직을 중요시하는 이들은 종교의 신을 따르기를 거부하게 될 것이다.
ㅡ 그리고 정직을 중요시하는 자신의 성향으로 인하여, 올바른 것을 찾으러 나가게 될 것이다.
 
ㅡ 이러한 점에 따르면, 자신의 신이 동어로 반복되고 있지만, 징계되는 것은 기존 종교의 신이고, 사랑받는 것은 자신의 정직함이 아닐까 싶다.
ㅡ 그리고 “자신의 신의 분노로 파멸/하강해야 한다”는 말은 자신의 정직함의 분노에 따라서 이상사회로 나아가려 한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어 보이므로, 이러한 해석이 적절하다고 본다.
 
상처를 입어도 깊이를 유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ㅡ 이는 상처에 둔감하다는 것으로, 상처를 받아도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 이는 사회에서 처벌이나 제약이 주어져도 쉽게 의지가 꺽이지 않는다는 점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작은 체험으로도 파멸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 이는 작은 체험으로도 민감히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므로, 섬세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 이는 부조리에 대한 민감성을 말하는 듯 하다.
 
ㅡ 따라서 이 구절의 경우, 둔감하면서도 섬세한 인물이 이상 사회로 나아가게 된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기 자신은 잊고 모든 것을 모든 것을 담는 이는 왜 사랑하는가?
ㅡ 기본적으로 하강하는 사람은 박애정신이 있기 때문에 하강을 한다.
ㅡ 그리고 위버멘쉬로 나아가려는 사람은 “성숙하려는 의지” 때문에 나아간다.
ㅡ 그런 면에서 성숙한 존재로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마주하면, 포용하려는 의식과 기회르 주려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ㅡ 즉 이 구절은 하강하는 자의 박애정신을 나타내는 구절인 것이다.
 
ㅡ 하강하는 자/자유정신을 가진 자의 박애정신은 「차라투스트라, 1권 12장」과 「차라투스트라, 1권 17장」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왜 자유로운 정신과 심장을 지닌 사람에게 그의 머리는 심장의 내장이고, 심장은 그를 하강하게 하나?
ㅡ 이는 정신보다 신체를 중시하는 관점에서 나오는 표현이다.
ㅡ 따라서 「차라투스트라, 1권 4장」을 참고하여 보면 이해하기 편한 문장이다.
 
ㅡ 신체는 정신보다 뛰어난 연산 능력을 가진 이성이자, 나 자신에 대해서 가장 잘 설명하는 이성이다.
ㅡ 그런 점에서 자유로운 사유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기존에 사회적으로 배운 규율을 따라서 사유하지 않고, 자신의 신체 반응에 의지하여 사유하게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신체의 반응이 사회적 규율이나 정신적 판단보다 월등한 판단력과 통찰력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ㅡ 이러한 관점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고 싶다면, 「차라투스트라, 1권 4장」을 보는 것이 좋다.
 
ㅡ 심장/마음은 이런 신체의 반응을 나타내는 표현인데, 이런 신체의 반응에 집중하고 나아가는 것이 자기만의 가치관을 가지는 것이므로, 이상사회로 나아가려는 사람이라면, 신체의 반응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고, 그래서 신체의 반응은 이상사회로 나아가게 하는 역할을 한다.
 
번개는 위버멘쉬인가?
ㅡ 번개는 실질적으로 위버멘쉬라기 보다는 위버멘쉬가 장악한 세상이라고 보아야 맞을 듯하다.
ㅡ 왜냐면 차라투스트라는 단순히 위버멘쉬의 등장보다는 위버멘쉬 사회, 즉 이상 사회의 가능성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