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서문 의역

차라투스트라 - 서문 3장 의역 (완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5. 17. 01:10

ㅡ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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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서문 3장


 
서문 3장 개괄

 

3장은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에게 위버멘쉬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장이다.
위버멘쉬는 이상사회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간상이다.
즉 부조리를 개선하는 존재이자, 그러기 위해서 올바른 이해를 갖춘 존재다.
 
이러한 존재로 나아가게끔 하려고 차라투스트라는 현재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즉,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고 있으며, 맹목적으로 사회적 규율과 종교적 교리를 따르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함에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문제라고 여기지 않는다.
 


 
 

본문

 
 

차라투스트라가 숲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에 도착했을 때, 도시의 시장에 많은 사람들이 줄타기 곡예사의 공연을 보려고 모여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가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느끼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은 부조리한 세상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고통에서 해방되려면, 부조리를 없애려 노력해야 합니다.
 부조리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조리에 대해서 제가 이야기를 해보도록 할 테니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부조리는 인간이 편리와 사적인 이익, 쾌락을 추구하면서 생겨납니다.
 따라서 부조리를 없애기 위해서는 편리나 사적인 이익, 쾌락을 위해서만 행동하는 우리 자신을 극복해야 합니다.
 
 부조리한 자신을 극복하는 존재*,
 단순히 극복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것을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존재,
 이러한 존재를 저는 위버멘쉬라고 부릅니다.

*부조리한 자신을 극복한다는 것은 부조리함을 파악하는 것을 넘어서, 부조리한 사회에 휩쓸리지 않고 부정/거부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지금의 우리는 부조리에 일조하고 있는, 극복되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부조리에 일조하는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이제껏 무엇을 하셨습니까?
 
 지금까지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던 성숙한 존재들/위대한 존재들은
 부조리에 일조하는 자신을 극복하면서 업적을 이루어 왔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극복하려는 이런 흐름에 동참하지 않고, 슬며시 빠져나가실 것이십니까?
 부조리에 일조하는 자신을 극복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사는 짐승이 되시려고 하시는 것이십니까?

 

밀물
무언가를 창조하던 이들은 자기 극복을 통해서 새로운 가치와 규율을 창조할 수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이 흐름에 참여하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에게 원숭이는 어떤 존재입니까?
 어리숙한 짐승이며, 사리 분별 못하고 부끄러운 행동을 서슴없이 하는 짐승 아닙니까?
 
 위버멘쉬에게는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원숭이와 같습니다.
 위버멘쉬들에게 내키는 대로/편의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은 어리숙한 존재들이며, 사리 분별 못하고 부끄러운 행동을 서슴없이 하는 존재들로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아주 작은 벌레에서부터 현재에 이르는 종으로 진화해 왔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모습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아주 작은 벌레의 모습 같습니다.
 그만큼 미개하고 야만적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여러분은 본래 내키는 대로 행동을 했고, 그런 점에서 미개하고 야만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규율과 종교적 교리에 따르는 여러분의 현재 모습, 허구적인 것들을 믿고 따르고 있는 모습, 자신이 희생되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
 짐승들보다 더 미개하고 야만적인 듯합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가장 현명한 자라고 하더라도,
 생각 없이 수동적으로 사회적 가치와 규율, 종교 교리에 따르는, 신과 같은 허구적인 것을 따르는 존재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허구적인 것을 믿고 따르는 것, 이것은 동물들도 하지 않는 행동 아닙니까?

 

원숭이를 바라보는 차라투스트라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차라투스트라는 개선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저는 여러분에게 생각 없는 존재가 되라고 말하지도 않고, 허구적인 것을 믿고 따르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미개하고 야만적인 자신/세상의 부조리에 일조하고 있는 자신을 극복하라고 말할 뿐입니다.
 
부조리한 자신을 극복하는 존재가 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세상이 진심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부조리한 자신을 극복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여러분에게 부조리한 자신을 넘어서는 걸 바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서있는 지금 이 세상에 충실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 세상 너머, 사후의 세계/내세에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을 믿지 마시길 바랍니다.
 
현재의 삶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은
사람들이 현생의 삶에 노력하지 못하게 하는 독을 퍼뜨리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현생에 절망한 자들이며, 그래서 현생을 멸시합니다.
또한 그들은 현생에서의 삶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으며, 그래서 죽음 이후에 희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은 이런 자들에게 지쳐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자들이 자신을 떠나가길 바라고 있죠. 
 

독극물 제조자
이들의 독은 사람들이 현생에서 노력하지 않고, 내세/사후세계를 지향하게 만든다.


 

한때 신에 대한 죄가 가장 큰 죄였습니다.
하지만 그 신은 이제 허구란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죄도 사라졌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 가장 큰 죄는 현생에 노력하지 않고, 부조리를 일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것들, 내세나 사후세계의 의미를 현생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것도 가장 큰 죄입니다.
 
한때, 영혼을 중시하던 사람들은 육체를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육체가 갖는 쾌락에 대한 충동과 올바른 인식과 판단을 방해하는 감각적 착각들 때문에 육체를 멸시했던 것입니다.
 
육체가 갖는 이런 특징들 때문에, 영혼을 중시하던 사람들은 육체를 억압하려고 노력했고,
그들은 어서 빨리 육체를 벗어나기를, 현생에서 벗어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야 쾌락에 대한 충동과 감각적 착각을 벗어나 올바른 인식을 할 수 있다고 여겼으니까요.

그러면 육체를 억압하던 그들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그들은 육체를 억압하여 더 나은 존재가 되었을까요?
아뇨,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생각으로 인하여, 그들은 그들 자신을 억압하기만 했을 뿐,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나지는 못했습니다.
어쩌면 이처럼 잔인한 자기 억압이 그들에게 쾌락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형제들이여, 제게 말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본성을 억압하는 것에 만족하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지금의 모습에 대해서 나다운 것이 없고,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남들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들을 따라하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으십니까?
사람들과 같은 의식을 공유하고 집단에 소속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인간이란 것은 본디 본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하지만 본성은 올바른 인식과 판단을 방해하죠.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본성을 억압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이 올바른 인식과 판단을 방해한다고 하여, 본성을 억압하는 게 과연 능사일까요?
 
본성을 무분별하게 억압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행복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야 사람들과 충돌 없이 본성에 따라 지낼 수 있을지 고민하여야 하는 겁니다.
 
부조리는 사회가 우리에게, 타인이 우리에게 저지르는 부조리도 있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저지르는 부조리도 있습니다.
본성에 대한 억압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저지르는 부조리입니다.
우리는 이런 부조리를 끊어내고, 본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이해하여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위버멘쉬, 부조리를 극복한 상태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위버멘쉬를 알려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강물을 받아들이는 바다
강물이 더럽더라도 바다는 그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는다.


 

부조리한 여러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순간이 무어라 생각하십니까?
저는 여러분이 경험할 가장 위대한 순간은 이제까지 여러분이 추구한 행복과 앎과 가치관이 한없이 미숙한 것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순간에 놓이면,
여러분은 행복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가 이제까지 추구해 온 행복은 어쩌면 남들이 말하는 행복을 따라한 것 아닌가?
 진짜 내 행복은 내 존재의 의미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앎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사회에서 인정해주는 교양만을 앎으로 여기고, 얻으려 하지는 않았나?
 한번이라도 내가 앎을 얻기 위해 탐구한 적이 있는가?”
 
가치관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의 가치관들은 정말 나의 취향이 반영된 것들인가?
 생각해 보면 이제까지 내 가치관들은 내 취향과 무관했고 나를 지치게 하던 것들은 아니었나?
 지금의 내 가치관들은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기에 추구하고 있는 것이지 않은가?”
 
정의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진정 정의로운 자들은 불의를 참지 못하고 정의를 주장하는데,
나는 불의를 보고도 끓어오르지 않는다.
나는 정의로운가?
나에게 정의란 대체 무엇인가?”
 
동정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동정은 타인을 부조리의 제물로 삼는 것 아닌가?
부조리에 괴로워하는 타인을 동정하면서, 그 타인이 부조리를 견디게끔 하여, 부조리 속에서 삶을 지속하게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나는 동정이 그런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정말 그를 동정한다면, 그를 괴롭히는 부조리를 근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제가 들었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그러나 여러분은 현재에 만족한다고 말하고 있군요.
여러분의 현재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군요.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음에도, 여러분들의 이기심이 하늘을 향해 '만족한다!'고 소리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어떻게 각성시켜야 할까요?
어떻게 여러분이 위버멘쉬가 되려고 노력하게 할까요?
 
여러분에게 위버멘쉬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제 이야기에 여러분은 각성되고, 위버멘쉬가 될 열의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군중 중 한 사람이 외쳤다.
“이제 줄타기 곡예사에 대한 소개*는 충분히 들었으니, 그를 보여달라!”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는데, 사람들은 줄타기 곡예사에 대한 소개로 이해한다.
이는 줄타기 곡예사가 위버멘쉬, 자기 극복을 시도하는 존재로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줄타기 곡예사의 상징성을 이해하는데, 좋은 근거가 된다.
 
이 말에 사람들은 차라투스트라를 비웃었다.
줄타기 곡예사는 그 말이 자신에게 공연을 준비하라고 한 말인 줄 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하게 내리치는 번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위버멘쉬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서 각성하길 바란다.


생각해볼 거리들

 
위버멘쉬란 무엇인가?
ㅡ 위버멘쉬 개념이 나타나는 이유는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개선을 필요로 하면서 나타난다.
ㅡ 즉 이상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인간상인 것이다.
 
ㅡ 부조리는 인간의 편의에 의해서, 쾌락 추구에 의해서 생겨난다.
ㅡ 예를 들면, 과정을 간편하게 하기 위해서 부패나 비리가 생기고, 자신을 치켜세우고 싶어서 타인을 일부러 깎아내리기도 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올바르지 못한 것을 올바르다고 하기도 하고, 자신이 즐겁기 위해서 타인의 권리를 박탈하게도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부조리에 해당되는 것이다.
ㅡ 이런 부조리가 생기는 이유는 미숙함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ㅡ 따라서 부조리를 개선하기 위해서 성숙함/계몽은 필수적이다.
ㅡ 그리고 계몽된 인간, 부조리를 일삼는 이기적인 자신을 넘어선 인간을 니체는 언급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인간이 바로 위버멘쉬다.
 
ㅡ 계몽된 인간/성숙한 인간이 되기 이해서는 성숙하려는 의지와 올바른 이해를 하려는 노력이 필요한데, 추후 나오는 내용들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개념이 된다.
 
지금까지 모든 존재는 자신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창조해왔다는 말은 어떻게 보아야 하나?
ㅡ 이 문장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창조를 하는 존재다.

ㅡ 하지만 실제로 모든 인간이 창조를 하던 존재는 아니다.
ㅡ 따라서 창조를 하던 모든 인간으로 치환해서 보아야 할 것이다.
ㅡ 그렇게 보면, “무언가를 창조하던 존재들은 자기 극복을 하면서 창조를 해왔다”는 의미로 해석해볼 수 있다.
ㅡ 창조하는 인간이 되려면, 자기극복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거대한 밀물의 썰물이 되고자 하는가”라는 말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ㅡ 창조하는 이들은 모두 자기 극복으로 나아가는 밀물과도 같다.
ㅡ 이에 따르면 자기 극복에서 멀어지는 이들은 썰물이라고 할 수 있다.
ㅡ 즉 “창조하는 이들은 모두 자기극복을 하는데, 너희는 자기극복을 하지 않으려는 것인가?”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벌레에서 사람에 이르는 길을 걸어왔다는 것은 무엇인가? 왜 사람들은 여전히 벌레라 취급받는가?
ㅡ 사람이라는 동물/존재가 나타나는 과정이 어떤 발달 과정을 거쳐왔다는 것을 말한다.
ㅡ 그런데 그런 발달 과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즉 더 성숙하고 발달된 존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는 행동은 벌레들이나 할 법한 본능적이고 근시안적 행동이라는 것이다.
ㅡ 즉 인간의 탈을 쓴 아메바와 같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왜 사람들은 원숭이였는데, 지금도 인간은 어떤 원숭이보다도 더 원숭이 같아졌나?
ㅡ 여기서 말하는 원숭이는 미개하고 야만적인 것을 말한다.
ㅡ 쾌락을 중시하거나 감정적인 것들을 말한다고 보면 좋을 듯하다.
 
ㅡ 지금의 인간은 저 상태보다 더 미개하고 야만적으로 변했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인간 사회의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듯하다.
ㅡ 예컨대, 허구적 존재를 믿고 따르는 모습이나 자기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사회적 규율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는 모습들은 일반적인 짐승들이 보이는 행동이라기 보다는 좀 더 병적인 짐승들의 행동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ㅡ 또한 그러한 종교적/사회적 규율에 따라서 처벌하는 행위를 보면 더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양상을 보인다.
ㅡ 그런 면에서, 문명/사회가 발달하기 전의 인간보다 현재의 인간이 더 미개하고 야만적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가장 현명한 사람도 식물과 유령 혼합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 식물과 유령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는 없는 듯하다.
ㅡ 그럼에도 생각을 해본다면, 식물은 능동적일 수 없는 존재를 말한다고 보여진다.
ㅡ 유령의 경우, 허구적 존재를 말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ㅡ 따라서 너희의 현자를 식물과 유령의 혼합체라고 말하는 것은 “너희의 현자도 결국 수동적 존재이자 허구적 존재의 혼합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ㅡ 수동적 존재는 교조주의자, 즉 교리에 따르기만 하는 수동적 존재라고 치환이 가능할 것 같고, 허구적 존재는 종교적 교리에 따르는 존재이거나 사회적 규율에 따르는 존재라고 봐도 될 듯하다.
ㅡ 이런 면에서 식물과 유령의 혼합체는 능동적이지 못하고 사회적/종교적 규율에 순종하는 존재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대지의 뜻은 무엇을 말하나?
ㅡ 차라투스트라에서 대지는 여러 의미로 쓰일 수 있지만, 여기선 천상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ㅡ 천상은 내세/사후세계와 같은 초현실적 영역으로 분류되므로, 대지는 현생/현세계와 같은 현실적 영역으로 분류할 수 있다.
ㅡ 따라서 대지의 뜻은 현세계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ㅡ 즉 “이 세상이 바라는 것은 너희가 위버멘쉬가 되는 것이다” 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초월적인 희망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은 왜 독극물 제조자인가?
ㅡ 그들은 현생에 노력하지 못하게 하는 독을 섞는다.
ㅡ 현생에 노력하지 못하게 되면, 개인의 삶은 행복보다는 고통이 늘어가게 된다.
ㅡ 따라서 개인의 현생에서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독이 되는 셈이다.
 
왜 독극물 제조자들은 삶을 경멸하고, 죽어가며, 중독된 자인가? 왜 대지는 저들에게 지쳐있나?
ㅡ 독극물 제조자들은 현생이 아닌 내세에서 우리가 행복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다.
ㅡ 그렇다 보니 현생에서의 삶을 무의미하게 보는데, 이를 삶을 경멸한다고 표현했다.
 
ㅡ 죽어간다는 것은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활력이 떨어진 채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는 걸로 보인다.
 
ㅡ중독된 자라는 것은 현생에서의 삶에 노력하지 않는 독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ㅡ앞서 말했던 것처럼 대지는 현생/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말하는데, 세상은 저세상에 대해서 긍정하기 보다는 현세에서 열심히 살기를 바란다.
ㅡ 그런 면에서 내세를 중시하는 사람들을 대지/현생과 대립된다.
ㅡ 그런 면에서 대지/현생은 이들로부터 방해받고 있고, 따라서 지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대지에 불경을 저지르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 대지는 현생을 말하는데, 현생에 대한 불경/죄는 현생에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충분히 노력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ㅡ 자신의 행복을 억압하는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지 않는 것도 포함한다.
 
영혼이 육체를 경멸의 눈으로 바라본 이유는 무엇인가?
ㅡ 이는 고대에서 나타난 관점이기도 한데, 육체의 감각은 착각을 일으키기에 올바른 인식을 방해하고, 육체의 본성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켜 올바른 행동을 하는데 방해한다고 보기 때문에 나타난다.
ㅡ 그래서 고대에서는 육체를 벗어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살을 긍정하지는 않았다; 플라톤, 파이돈.
 
영혼은 왜 야위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나? 육체를 억압했는데?
ㅡ 영혼을 중시하는 자들은 육체를 억압하는데, 이들의 몰골이 좋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ㅡ 육체의 억압은 지나친 절제나 쾌락에 대한 거부로 나아갔기에, 그들의 삶은 오히려 더 풍요롭다기 보다는 황량했다고 볼 수 있다.
ㅡ 따라서 그들의 상태가 좋지 못했다고 본 듯하다.
 
그대들의 영혼이 궁핍하고 때묻었고 가여운 안일에 젖어 있다고 하는 건 왜 그런가?
ㅡ 억압당한 육체는 자신에게 가해진 억압에 대해서 불만을 표출하게 된다.
ㅡ 즉 육체가 “이게 지금 맞다고 생각해? 내가 보기에는 판단할 능력도 없고, 사람들 사이에서 뒤쳐지기는 싫고 하다보니 너무 안일하게 세상의 기준을 따르고 있는 것 같은데?”라고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ㅡ다시 말해 육체는 영혼이 안일하게 판단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왜 갑자기 더러운 강물과 바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나?
ㅡ 육체가 억압을 당한 것은 감각적 착각이나 욕구로 인해 영혼이 바라는 올바른 인식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ㅡ 육체에게 깨끗한 것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육체를 억압하여 깨끗한 것만 있는 상태로 만들려고 한 것인 셈이다.
ㅡ 하지만 그렇게 되면서 영혼을 중시하던 자는 퀭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ㅡ 이는 이들의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ㅡ 그러면서 차라투스트라는 육체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ㅡ 인간, 즉 육체는 본디 쾌락적인 부분과 착각을 갖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을 받아들이고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생각해야지, 쾌락적인 부분과 착각하는 부분을 억압시켜선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ㅡ 그래서 더러운 강물을 받아들이는 바다와 같이, 육체의 특징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ㅡ 즉 인간 본성에 대한 수용하는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다.

왜 위버멘쉬는 바다인가?
ㅡ 부조리는 사회가 자신에게, 타인이 자신에게 하는 부조리도 있지만, 자기가 자신에게 하는 부조리도 있다.
ㅡ 현 이야기 상에서는 육체를 억압하는 것이 자기가 자신에게 저지르는 부조리에 해당된다.
ㅡ 위버멘쉬는 부조리를 개선하는 인간상이므로, 육체를 억압하는 상황에 대한 가르침을 준다.
ㅡ 그렇게 되면, 육체의 본성을 억압하지 않고 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체험할 수 있는 위대한 것은 왜 경멸의 순간인가?
ㅡ 현재의 사람들은 부조리를 저지르는 사람들이다.
ㅡ 그런 사람들이 가장 위대한 경험을 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부조리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될 것이다.
ㅡ 따라서 이후 후술되는 것은 부조리함에 대해 자각하는 내용이다.
 
내 행복은 왜 삶 자체를 정당화해야 하나?
ㅡ 개인의 행복인데 자기 삶에 대한 만족을 제공해주지 않는다면, 자기 삶의 가치를 확인시켜주지 않고 공허함을 준다면, 그것은 행복이라 하기 어렵다.
ㅡ 그런 면에서 사회가 행복이라고 하는 것들을 따라가기 보다는 자신의 행복을 찾아야 하는데, 대체로 사람들은 남들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것을 쫓아간다는 것이다.
ㅡ 이를 자각하는 것을 위대한 순간이라고 본 듯 하다.
 
왜 이성이 사자가 먹이를 탐하듯이 지식을 갈구하는지 묻는가?
ㅡ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이성은 탐구하는 것보다는 교양적 수준의 앎을 획득하는데 노력한다.
ㅡ 즉 지식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기 보다, 남의 지식을 악세서리처럼 지니고 있는 것이다.
ㅡ 이런 부조리한 상태를 지적하는 것이라 보인다; 이성의 능력이 없지만, 아는 건 있는 상태이므로, 이성의 측면에서 부조리한 상태다.
 
왜 덕은 나를 열광시킨 적이 없고, 선악에 대해서 나는 지쳤는가?
ㅡ 덕이 나 자신을 위한 덕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하다.
ㅡ 즉 사회적 덕인 경우, 나의 만족과 무관하기에 열광시키지 않는데, 이를 지적한다.
 
ㅡ 마찬가지로 선악은 나의 만족과 무관하기에 나를 지치게 한다.
 
정의와 관련하여 작열하는 불꽃과 숱 이야기가 나오나?
ㅡ 정의감이 활활 타오르는 상태를 논하기 위해서 불꽃과 숱 이야기가 나온 것이라 본다.
ㅡ 지금 현재 부조리를 자각하는 개인은 이제껏 자신은 정의를 외쳤지만, 실제로는 정의롭지 않은 모습을 마주한 것으로 보인다.
 
왜 동정은 인간을 사랑했던 자가 못 박힌 십자가라고 하는가?
ㅡ 사회에서 동정은 어떤 고됨/고통을 느낀 존재를 위로하는 것이다.
ㅡ 동정하는 행위는 개인이 상처를 받음에도 상처받을 행위를 지속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ㅡ 그런 면에서 개인의 희생을 강제하는 역할을 한다.
ㅡ 즉 타인을 위로하고 돕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타인을 점차 피폐하게 하고 희생하게 하는 것이 동정인 것이다.
 
ㅡ 차라투스트라는 동정을 십자가라고 보았는데, 십자가는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하는 역할을 한다.
ㅡ 그러므로 동정은 상처받은 타인을 십자가에 계속 매달리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ㅡ 부조리에 대해서 자각하는 인물은 자신이 하는 동정이 실제로는 타인을 희생시키게 하는 것이란 점을 깨닫는 것으로 보인다.
ㅡ 그래서 자신의 동정은 십자가형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늘을 향해 외쳐댄 것은 왜 분수를 아는 만족인가?
ㅡ 사람들은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듣고도, 그것에 공감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서 만족한다고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보인다.
ㅡ 그래서 그들의 외침은 “그대들의 죄가 외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게 된다.
ㅡ 즉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죄라고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버멘쉬는 왜 번갯불이자 광기인가?
ㅡ 차라투스트라가 생각하기에, 사람들에게 위버멘쉬란 존재에 대해서 가르치면, 사람들이 자극받고, 그래서 위버멘쉬가 되려고 노력하게 될 거라고 본 듯하다.
 
ㅡ 번갯불의 경우, 사람들을 각성시키는 것이라는 의미로 보이고, 광기의 경우, 각성된 사람들이 열의를 가지고 위버멘쉬가 되려고 하는 동력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을 혀로 핥아줄 번갯불을 말하나?
ㅡ 이제까지의 상황을 보면 사람들은 전혀 자신들의 상태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는다.
ㅡ 그런 면에서 경각심을 심어줘야 하는데, 그게 번갯불이고, 위버멘쉬에 대한 이해라고 본 듯하다.
ㅡ 즉 부조리에 대해 자각하게 하는 것이 위버멘쉬인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접종되어야 할 광기를 말하나?
ㅡ 사람들은 위버멘쉬, 성숙한 존재가 되려는 의지를 가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위버멘쉬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ㅡ 사람들이 위버멘쉬에 대한 이해를 가지면, 분명 위버멘쉬가 되려고 노력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 것이다.
 
왜 군중 속 누군가는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를 줄타기 곡예사에 대한 이야기라고 들었을까?
ㅡ 이는 후행되는 장들에서 나오겠지만, 줄타기 곡예사는 짐승에서 위버멘쉬로 나아가려고 시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