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서문 2장
서문 2장 개괄
서문 2장은 하산하는 중에 늙은 성자와 차라투스트라의 만남에 대해서 다루는 장이다.
이 장에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가 세상에 대한 실망과 혐오를 이겨내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제공하려고 한다는 점을 언급한다.
여기서 말하는 선물을 받는 대상은 지금 당장 하산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미래의 존재라는 점을 유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2장에서 나타나는 늙은 성자의 경우, 차라투스트라와 비슷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에게 앎을 선물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차라투스트라와 완전히 입장이 다르다.
이런 점은 유의해서 봐야 잘 읽힐 것으로 보인다.
본문
차라투스트라는 홀로 산을 내려갔고, 내려가는 동안 어떤 이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그가 숲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한 노인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는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구하기 위해서, 사회를 떠나 숲*으로 온 자였다.
*숲은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고독을 지칭한다.
차라투스트라는 더 깊은 산 속에 있었기에, 니체가 이 노인은 차라투스트라보다는 세속적인 인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기도 하다.
늙은 성자가 차라투스트라에게 말했다.
“이 자를 전에 본적이 있는 것 같은데….
몇 년 전에 이곳을 지나간 사람 같군.
이름이 차라투스트라였나?
자네, 꽤 변했구만.
전에는 부조리한 세상에 실망하여 혐오감을 잔뜩 가지고선 산에 올랐는데,
지금은 전과 달리 세상을 계몽시키겠다는 열의가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아.
차라투스트라여,
지금 자네는 자네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로 다시 나아가려는 것 같은데,
세상을 계몽시키겠다고 올바른 이해를 나누면,
자네에게는 올바른 이해를 나눠줌에 따른 보상이 아니라,
올바른 이해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절망하게 되고,
사람들은 자네가 이상한 것을 퍼뜨린다며 추방하거나 처형할 것이라는 것을 모르나?
자네는 이것이 두렵지 않나?
아 차라투스트라여,
나는 몇 년 전의 자네를 기억하네.
그때 자네의 눈은 탁하고, 입은 세상에 대한 혐오를 담고 있었지.
그런데 지금은 다르군.
자네의 눈은 또렷해졌으며, 자네의 입은 세상에 대한 어떤 혐오도 담고 있지 않으니 말이네.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실망과 혐오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 같아.
춤추는 존재처럼 가벼운 발걸음을 하고 있으니 말이야.
마을로 향해 나아가는 차라투스트라
늙은 성자는 차라투스트라의 모습에서 아이 모습을 보고 있다.
차라투스트라여,
자네는 아이*가 되었구만.
절망과 혐오라는 잠에서 깨어난 자가 되었어.
*단순히 밝고 긍정적인 존재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세상에 올바른 앎을 퍼트리기 위한 의지를 가진 존재를 나타내기도 한다.
「차라투스트라, 1권 1장」에서 언급되는 아이와 이어진다.
그런데 자네는 사회적 규율에 빠져 스스로 판단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나?
자네는 고독 속에서 올바른 것들을 살피며 지냈고, 그 결과 성장하였네.
그런데 자네는 왜 고독을 벗어나서 사람들에게로 가려고 하나?
왜 다시금 부조리한 세상, 그릇된 것들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인가?
자네에게 주어지는 지적 충만함과 평안함을 버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저는 인간을 사랑합니다.”
늙은 성자가 말했다.
“나도 전에는 사람들을 사랑하였었네.
그래서 사람들에게 올바른 이해를 선사하려고 사색하고 탐구했던 적이 있었지.
하지만 어땠는 줄 아나?
나는 그들이 올바른 이해를 알게 되면 기뻐할 줄 알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네.
그들은 올바른 이해에 관심이 없었던 거야.
그들은 세상에 대해 부조리함을 느끼고 괴로워해도,
실제로 나아지기 위해서 올바른 이해를 얻으려고 하거나 올바른 행동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던 걸세.
이처럼 모순되고 불완전한 존재가 또 어디에 있는가?
일련의 일을 겪은 후, 나는 사람들의 모습에 실망하고 더는 그들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네.
이제는 사람이 아닌 신을 사랑하며, 고독 속에서 사색하고 탐구할 뿐이네.
내가 만약 사람들을 더 사랑하여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올바른 이해를 전하려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나?
나는 아마도 사람들로부터 사회로부터 배척당하거나 처형당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네.
내가 그들의 사회에 반하는 앎을 선사했다고 하면서 말이지.”
이끌려 나가는 늙은 성자
성자는 사람들을 위해서 올바른 이해를 나눈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사회에 유해하다고 여겼다.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저는 당신처럼 현재의 부조리한 사람들을 사랑하여 저들에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인류에게 보다 나은 세상을 선물로 주고 싶어서 사람들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자가 말했다.
"아니, 저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말게.
저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고 싶다면,
차라리 저들처럼 사회적 가치와 규율에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좋을 것이네.
그러면 저들은 자신들처럼 규율을 따르는 동지가 생겨 기뻐할 것이니 말일세.
저들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다면, 고독에 지쳐 사람들과의 관계가 필요하다면,
사람들에게 동정을 나누어 주게나.
그러면 원하는 대로 될 걸세.”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아뇨, 저는 사람들을 동정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고독에 질려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그리워서 사람들에게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자는 차라투스트라를 비웃으며 말했다.
“그런가?
그렇다면 자네 생각대로 해보게.
그들은 우리와 같이 올바른 이해를 준답시고 오는 사람들을 잘 받아들이지 않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는 올바른 이해라고 주는 것도 선물이라 생각하지 않지.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와 같은 이는 섞이지 못하고, 외로움만 느끼게 될 걸세.
저들은 우리를 사회 질서를 해치는 존재라고 보고,
'저 놈이 무슨 꿍꿍이로 저리 돌아다니는 거지?'하고 우리를 바라볼 걸세.
그러니 사람들에게로 가지 말고 그냥 홀로 지내는 것은 어떤가?
홀로 지내면서 사색하고 탐구하며 지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차라투스트라를 설득하는 늙은 성자
그는 도시로 나아가지 말기를 권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그런가요?
과연 당신은 당신의 말대로 홀로 지내고 계시는 것 같은데, 무엇을 하며 지내십니까?”
늙은 성자가 말했다.
“나는 탐구하고 사색한 것을 노래로 짓기도 하고 부르기도 한다네.
그러면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중얼거리기도 하지.
이렇게 신을 찬양하는 거야.
그건 그렇고, 자네는 나에게 어떤 선물*을 가져왔는가?”
*늙은 성자가 차라투스트라에게 선물을 바라는 이유는 늙은 성자를 기쁘게 해줄 무언가를 제공하기를 바라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때 선물은 늙은 성자와 차라투스트라의 사색적 성향으로 볼 때, 이야깃거리나 생각해볼 거리들을 말하는 것 같다.
즉 늙은 성자는 사람들에게 가지 말고 자신과 이야기나 나누며 놀자고 제안을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말을 들은 차라투스트라는 성자에게 작별 인사를 하며 말했다.
“제가 당신에게 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당신의 생각*을 굳이 부정하고 싶지 않으니, 가던 길을 마저 가게 해주시지요.”
*차라투스트라는 신에 대한 늙은 성자의 생각을 반박하려고 하지만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또 신에 대한 생각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앎을 전하는 것과 관련한 생각도 반박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나아가는 것을 의미있게 여기는 반면, 늙은 성자는 덧없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늙은 성자와 차라투스트라는 소년들처럼 웃으며 헤어졌다.
혼자있게 되자 차라투스트라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이 늙은 성자는 우리가 진정으로 노력해야 하는 것은
허구적인 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한 세상이 더 나아지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나 보구나!”
마을로 향하는 차라투스트라
차라투스트라는 늙은 성자를 떠나 마을로 향한다.
생각해볼 거리들
뿌리는 무엇인가?
ㅡ여기서 말하는 뿌리는 원인/근원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성자는 누구인가?
ㅡ성자는 속세에서 성직자로 지낸 자로 보인다.
ㅡ왜냐면 성스러운 오두막, 교회와 같은 곳에서 생활을 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ㅡ성자가 숲으로 왔다는 것은 기존 사회 안에서는 올바른 탐구가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ㅡ즉 숲은 세속적 관점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차라투스트라가 산으로 나르던 재는 무엇인가?
ㅡ산은 사람들이 없는 곳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사람이 거주하는 도시와 대조되는 개념이다.
ㅡ도시의 의미는 하나 더 생각할 수 있는데, 사회적 장치들의 영향이 미치는 곳이란 것이다; 즉 사회적 규율/관습, 종교적 교리 등이 영향을 미치는 장소다.
ㅡ사람들이 대체로 도시를 떠나고 싶어하는 이유는 사회적인 요소들에 의해서 지치거나 실망하여 벗어나고 싶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ㅡ차라투스트라도 마찬가지로 사회적 요소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했던 것인데, 이는 곧 사회적 규율에 의해서 실망하고 지쳤기에 그렇다고 할 수 있다.
ㅡ그런 관점에서 보면, 산에 오르는 차라투스트라는 사회에 대한 실망과 피로를 가지고 있는 산에 오른 상태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ㅡ 따라서 차라투스트라가 산으로 나른 재는 사회에 대한 실망과 피로로 해석한다.
ㅡ이는 세상에 대한 혐오로도 파악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계곡을 향해 나르는 불은 무엇을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앎이 충만해진 상태로 사람들에게 앎을 나누려고 내려간다.
ㅡ그런데 숲 속의 노인은 그가 불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내려간다고 한다.
ㅡ이에 따라서, 차라투스트라의 앎을 놓고 불이라 지칭함을 알 수 있다.
ㅡ추가적으로 차라투스트라는 재를 지니고 산에 올랐다가, 불을 가지고 내려간다.
ㅡ재는 세상에 대한 실망이라고 한다면, 불은 다시 타오름을 말하므로, 세상에 대한 희망을 말한다고 할 수도 있다.
ㅡ 따라서 차라투스트라의 불을 세상에 대한 희망/계몽하려는 열의에 대한 표현과 앎으로 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춤추는 존재인가?
ㅡ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춤춘다는 것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ㅡ 니체는 예술을 두 가지로 보는데, 이상적인 것을 외부로 구현하는 것이 있고, 이상적인 것을 자기 몸의 활동을 통해서 구현하는 것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ㅡ 이상적인 것을 외부로 구현하는 것은 아폴론적 예술이라고 한다면, 이상적인 것을 자기 몸의 활동을 통해서 구현하는 것이 디오니소스적 예술이다.
ㅡ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예술의 필요를 강조하는데, 이상적인 것을 외부에 말이나 그림이나 장치로 표현하는 것보다, 실제로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ㅡ 그런 면에서 춤은 이상적인 것을 행하는 행위인 셈이다.
ㅡ 이에 따라 보면, 차라투스트라가 춤을 추는 존재라는 것은 이상적인 것을 행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 하지만 이러한 해석에는 의문이 하나 생기게 되는데, 차라투스트라와 마주한 노인이 차라투스트라가 이상적인 것을 행하는 상태가 되었는지 어떻게 아냐는 것이다.
ㅡ 지금 당장의 상황으로 보면, 차라투스트라와 마주친 것 외에는 차라투스트라가 행동한 것이 없다; 어떻게 보면, 그저 가만히 서있는 상태다.
ㅡ 그렇기에 차라투스트라가 디오니소스적 상태에 있다는 것을 노인이 파악할 수 없을 것이라 보인다.
ㅡ 다음으로 춤추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본다면, 춤춘다는 것이 가벼운 상태/흥겨운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ㅡ 이는 차라투스트라를 억누르던 것에서부터 벗어난 가벼운 발걸음을 표현한다고 볼 수도 있다.
ㅡ 그러면 차라투스트라를 억누르던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당장으로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차라투스트라가 가졌던 재라고 할 수 있다; 즉 세상에 대한 혐오와 실망인 것이다.
ㅡ 즉 이런 면에서 보면, 차라투스트라는 세상에 대한 혐오와 실망을 걷어낸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아이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 아이는 기본적으로 「차라투스트라, 1권 1장」에서 언급이 되기도 하지만, 관련하여서는 「차라투스트라, 1권 21장/22장」에서도 언급이 된다.
ㅡ 기본적으로 사회적 규율을 벗어난 상태의 존재인데, 22장을 기준으로 본다면, 아이는 설파를 위해서 하강하는 존재를 말한다.
ㅡ 1권 1장에서의 아이는 일반적으로 모든 사회적 규율과 억압 속에서 자유로운 존재로 이해되곤 한다.
ㅡ하지만 이는 아이에 대한 오해로 보인다.
ㅡ왜냐면, 1장에서 아이가 보이는 특징들은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고 구현하려는 존재로서 갖춰야 하는 처세를 특징으로 한다.
ㅡ따라서 단순히 자유로운 존재라고 보기만은 어렵다.
ㅡ이에 대해선 차라투스트라 1권 1장을 살피며 다시 보도록 하자.
차라투스트라가 아이가 된 것을 노인은 어떻게 알고 있는가?
ㅡ춤을 춘다는 것은 이상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을 말한다.
ㅡ이상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은 성숙해진 것을 말하고, 이는 사자가 되고, 아이가 됨을 의미한다.
ㅡ따라서 춤을 추는 듯한 차라투스트라의 모습이 아이가 됨을 인식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 잠이라는 것은 어떤 것에 빠져 있는 것을 말한다.
ㅡ차라투스트라의 경우, 자신의 절망에 빠져 있었고, 이에 따라 산에 가서 수련을 한 뒤 절망을 이겨내게 된다.
ㅡ잠이 든 사람들의 경우,「차라투스트라, 1권 2장」에서도 언급이 되지만, 사회적 규율에 빠져 있는/사회적 규율에 따르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바다는 무엇을 말하나? 왜 차라투스트라는 바다 속에서 있듯 고독 속에살았다고 하는가?
ㅡ바다의 경우, 고독/사색의 바다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바다에서 뭍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성자가 사람들을 사랑해서 숲과 광야로 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 숲과 광야는 도시를 벗어난 것이고, 도시를 벗어났다는 것은 사람들 사이로부터 벗어났다는 것, 고독으로 나아갔다/사색을 하러 갔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ㅡ 이에 따르면, 성자는 사색하러 갓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을 사랑해서 그런 것이다.
ㅡ 그런데 왜 성자는 사람들을 위해서 사색을 하려고 한 것일까?
ㅡ 이는 사람들을 계몽시키기 위한 것으로, 사람들에게 올바른 이해를 선사하여 잘못된 행동을 막고 올바른 행동을 하게끔 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ㅡ 그렇게 해야 세상의 부조리가 해결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ㅡ 따라서 사색하는 것은 부조리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제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ㅡ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제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확인된다.
성자는 왜 사람을 사랑하다가 신을 사랑하게 되었나?
ㅡ 앞서 성자가 사람들을 사랑했기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했고, 그러기 위해서 올바른 이해를 강구하려고 했다고 했다.
ㅡ 문제는 그 다음부터인데, 사람들을 위해서 올바른 이해를 구했다 해도, 사람들이 그 이해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ㅡ 올바른 이해에 따라 사는 것은 되려 삶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ㅡ 예컨대, 탐욕하지 않으면 부조리를 방지할 수 있다고 하자.
ㅡ 그러면 탐욕하지 재물이든 쾌락이든 줄여야 한다는 것인데, 이렇게 사는 삶에서 어떤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까?
ㅡ 따라서 차라리 탐욕하며 사는 것이 더 낫다고 보는 입장들이 생기고, 부조리를 막을 수 있는 방안을 알더라도 행동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ㅡ 따라서 부조리는 올바른 인식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올바른 인식이 있어도 그렇게 행동할 동기/이득이 너무나 적기 때문인 것이다.
ㅡ 이러한 점에 따라서 보면, 사람들은 올바른 것을 알아도 행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ㅡ 이에 실망한 성자는 사람들에게서 희망을 놓게 된 것이다.
ㅡ그렇게 사색과 탐구를 즐기게 된 상태가 되었는데, 이는 신의 권능/신비를 체험하는 활동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신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표현한 것 같다.
ㅡ 다음의 구절을 살핀다면, 좀 더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을 듯 하다; 「유고(1882년 7월~1883/84 겨울), 4[167]」
4[167] 은둔자와의 마지막 대화.
— 나는 네가 내 제자가 되지 않은 것에 대해 너를 칭찬한다.
은둔자. 나는 인간들을 아주 경멸하고, 그들을 아주 사랑한다—나는 그들을 견딜 수 없었다—나는 사랑과 경멸
두 가지 면에서 나를 위장해야만 한다.
나는 그들에게 새로운 사랑과 새로운 경멸을—위버멘쉬와 최후의 인간을 가져다준다.
나는 너를 이해할 수가 없다—네가 그들에게 가져다 준 것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먼저 적선을 구걸하게 하라!
차라투스트라 ---
그러나 그들에게는 적선만이 필요할 뿐이다.
그들은 너의 보물들을 필요로 할 수 있을 만큼 부유하지 않다.
ㅡ 이 구절은 성자와 차라투스트라의 대화로 볼 수 있는데, 사람들이 가져다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과 그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성자는 왜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하는가?
ㅡ 성자가 사람들에게 올바른 인식을 제공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ㅡ 이때 성자의 올바른 인식은 사회 부조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거나 사람들의 미숙한 행동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된다.
ㅡ 그런 점에서 보면, 개인은 자신의 미숙함을 마주해야 하고, 사회는 사회의 악함을 마주해야 한다.
ㅡ 이런 마주함의 순간에서 성숙한 존재나 집단이라면, 그것을 개선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존재나 집단이라면, 자신의 미숙함을 마주하게 하는 존재를 배척하거나 괴롭히게 될 것이다.
ㅡ 이러한 상황이 주어지는 데도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올바른 인식을 제공하려고 한다면, 그의 삶은 꽤나 고단해질 것이고, 결국 배척과 괴롭힘을 넘어서 처형하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ㅡ 따라서 성자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인식을 더 제공하는 것이 과연 자신의 목숨을 바칠만한 일인지를 고려하게 될 것이고, 그 사랑을 접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하더니, 성자의 말을 듣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가져간다고 입장을 바꾸었나?
ㅡ늙은 성자가 인간에 대한 사랑이 덧없음을 의미하므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ㅡ즉 인간을 사랑한다는 거창한 이유로는 설득할 수 없으니, 사소한 이유, 즉 선물을 주려고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정당화하는 것이다.
ㅡ이 역시도 사람들이 바라는 선물은 차라투스트라가 주려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되지만 말이다.
성자는 왜 사람들에게 어떤 것도 주지 말고, 저들과 함께 짊어지는 일을 하라고 하나?
ㅡ 우선 상황을 보자; 지금 상황은 사람들을 위해서 앎을 선사하려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사람들을 위해서 올바른 이해를 선사하려는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성자가 설명하고 하고 있는 상황이다.
ㅡ 그러므로 성자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앎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ㅡ 그러면 무엇을 해주는 걸 사람들이 좋아할까?
ㅡ 성자는 올바른 이해는 사람들이 전혀 좋아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은 자신들처럼 사회적 규율에 따르고 힘겨워하며 서로 동정해주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말한다; 왜냐면 사람들은 현재의 상태를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으니 그러하다.
ㅡ 하지만 이러한 것은 성자나 차라투스트라가 바라는 것은 아니다.
ㅡ 그러므로 성자는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에게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 성자는 동정/적선을 하라고 하고, 차라투스트라는 동정/적선을 할 생각이 없으며, 가난하지 않다고 하는가?
ㅡ 성자는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에게 나아가는 이유에 대해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그리워서 나아간다고 보는 듯하다.
ㅡ 왜냐면 성자의 입장에서는 현재 상태에서 사람들에게 굳이 갈 이유가 없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ㅡ 따라서 성자는 “정 사람들에게로 나아가고 싶다면, 사람들과 비슷한 가치관을 가지고, 사람들처럼 규율에 종속되는 삶을 사는 게 좋다”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원한다면, 사회에서 원하는 기본 교양인 동정이 필요하다”고 조언하는 것이다.
ㅡ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그리워서 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존재들을 위한 선물을 남기려고 가는 것이다.
ㅡ 따라서 사회적 관계를 위한 성자의 조언은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ㅡ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이 가난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외로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한다고도 볼 수 있다.
왜 사람들은 차라투스트라가 주는 선물을 선물로 받아들이지 않나?
ㅡ 이미 사회적 규율에 따르는 이들이기에, 그에 반하는 것을 준다고 해서 선물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노래를 짓고 부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노래는 홀로 탐구하고 사색하고 글을 쓴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다른 의미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노래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문학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일 수도 있다.
ㅡ노래함에 대한 이러한 의미는 차라투스트라 3권 13장 이후부터 말을 직접하는 것과 대비하여 언급이 된다.
홀로 노래짓고 부른다는 것이 어떻게 신을 찬양하는 것이 되나?
ㅡ 노래가 홀로 탐구하고 사색하는 것이라면, 사색의 대상이 있는 것인데, 이때 사색과 탐구의 대상은 만물이라 할 수 있다.
ㅡ 그렇게 만물에 대해서 사색하고 탐구를 하면, 만물의 본성/신비가 드러나게 되는데, 이를 관장한다고 할 수 있는 신의 경이로움을 마주하게 된다.
ㅡ 즉 신의 경이로움을 목격하는 것이 신에 대한 찬양인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성자에게 인사하면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을 테니 보내달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 왜 협박조로 말했나?
ㅡ 차라투스트라는 성자에게 사람들에게 내려가는 이유를 비판받는다.
ㅡ이에 차라투스트라 역시 반박하며 논할 수도 있겠지만, 성자와 논박하는 것은 자신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그저 자신의 길을 가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ㅡ즉 차라투스트라는 성자와 논박하면서 성자의 논리를 비판할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는 것이다.
ㅡ여기서 차라투스트라가 만약 성자의 논리를 비판해낸다면, 성자는 자신이 꾸려오던 논리 하나를 잃게 된다.
ㅡ이는 다르게 말하면 자신의 논리를 차라투스트라에 의해서 빼앗긴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성자의 논리를 부정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으로 보이고, 그런 점에서 성자의 논리를 부정하지 않을 테니 보내달라고 말하는 상황이라고 보인다.
신이 죽었다의 의미는 무엇인가?
ㅡ신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신의 존재가 없다는 이야기만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ㅡ엄밀하게 본다면, 신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신을 향해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생에 대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가 하산을 하는 이유도 단순히 진리나 올바른 이해에 대한 인식만을 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냐는 점에서 하산을 하는 것이니, 탐구만 하면서 사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보는 것이다.
ㅡ따라서 신의 죽음은 “절대적 가치의 상실”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현생에서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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