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1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1권 22장-3 의역 (완) (선사하는 덕, 3절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5. 14. 18:34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1권 22장 선사하는 덕 - 3


 
 

22장 3절 개괄

 

 

23장 3절은 이상사회를 바라는 이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말하는 장이다.

 

니체는 자신에 의해서 감응한 자들이 자신을 추종하며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왜냐면 그것은 니체가 그렇게나 지적하던 교조주의의 일면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 서문에서도 이야기가 나오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따르는 이를 원치 않고, 자신처럼 사유할 수 있는 이를 원한다.

그러한 이는 자신의 생각을 받드는 존재가 아닌, 자신과 유사한 사유를 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춘 이다.

 

현재의 제자들은 차라투스트라의 말에 공감하고 자극받는 수준일 뿐이므로, 차라투스트라가 원하는 수준에 이르려면 먼 것이다.

스스로 사유할 줄 알게 되는 것은 차라투스트라가 도와줄 수 있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완전한 독립은 지원이 있을 때가 아닌 모든 지원이 끊어졌을 때 도전이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제자들을 떠난다고 볼 수 있다.

 

추가적으로 니체는 올바른 이해를 갖추는 것을 위버멘쉬에 이르는 절반의 성과로 본다.

이 이해를 나누고 새로운 존재를 자극하는 것까지가 위버멘쉬로서의 삶으로 나아가는 길이란 것이다.

이는 차라투스트라 1권 18장이나 20장에서 말하던 위버멘쉬를 낳고 기르려는 의지에 대한 부분과 이어진다 할 수 있다.

 

니체는 “정오가 가장 찬란한 순간일 수 있지만,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새로운 존재를 양성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본문

 

 

차라투스트라는 이야기를 하다가 잠시 침묵했다.

그는 손에 든 지팡이를 까딱거리며 골똘해 있었는데, 뭔가 할 말이 더 있는 듯 했다.

그러다 마침내 다시 그가 말하였는데, 목소리가 변해 있었다*.

*떠나기 위해 말을 하므로, 엄중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제자들이여,

저는 이제 혼자 가겠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헤어져서 홀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진심을 담아 조언을 하건대,

저로부터, 저의 사상으로부터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아니, 저를 부끄럽게 여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속였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제가 이제껏 한 이야기를 곱씹어보며 오류가 없는지 다시 한번 겸토 해보시기 바랍니다.

 

올바른 이해를 갖춘 사람이라면, 자신의 적을 통해서 성장하려고만 하지 않고,

자신의 친구도 비판하면서도 성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가르쳐주는 것만을 받아들이려는 학생>으로만 남으려고 한다면,

이는 가르치는 이에게 나쁜 보답을 하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이는 무얼 위해서 가르친다고 생각하십니까?

가르치는 이는 학생의 성장을 바라지, 학생이 늘 학생 상태에 머물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왜 저의 권위에 도전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저를 숭배하다가, 제 권위가 떨어져 저를 더 이상 숭배할 수 없게 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제 권위가 무너지는 날 여러분도 함께 무너지고 싶으신 겁니까?

저를 너무 믿지 말고, 소신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차라투스트라를 믿는다고 이야기하십니까?
그런데 차라투스트라가 뭐라고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제 신도라고 하던데, 신도란 게 뭡니까?

여러분은 소신을 가지려고 하지 않고, 저를 여러분 안에 담아두려고 합니다.

이런 게 바로 신도들이며, 이런 게 신앙 아닙니까?

 

현명한 자의 말을 받들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제가 비판하던 교조주의 아닙니까?

 

이제 여러분에게 말하니, 저를 받들지 마시고, 스스로 세계에 대한 이해를 쌓아 올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저를 받들지 않고서, 스스로 세계에 대한 이해를 구축한다면, 그때 저는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가 제가 다시 오면, 저는 다른 눈으로 여러분들을 바라볼 것입니다.

지금과 달라진 여러분을 보며, 다른 사랑을 베풀 것입니다.

 

다가오는 양들을 저지하는 양치기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추종하는 자를 원하지 않았다.

자신과 함께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벗을 원했기에, 추종하는 자들이 쫓아오지 못하게 한다. 


 

언젠가 여러분은 제 벗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처럼 부조리한 세상에 희망을 선사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위대한 정오*>를 기릴 것입니다.

*정오에 대해서는 후술되겠지만,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가 앎과 관련해서 완성되는 시점을 말한다.

즉 완전한 성장을 이룬 상태인 것이다.

이후로는 태양이 저물듯이 저물어가는데, 이는 올바름 추구자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상황을 나타낸다.

그렇게 저무는 태양은 빛을 세상에 비추게 되는데, 이를 올바름 추구자가 세상에 앎을 나누는 모습으로 이해하게 된다.

 

정오는 태양이 가장 높이 떠오른 시간을 말합니다.

이 시간 이후로는 태양은 점점 하강하기 시작하고, 그렇게 저녁이 찾아옵니다.

 

올바름 추구자도 이와 같은 모습으로 나아갑니다.

그는 사회적 규율과 가치관을 벗어나 신체를 중심으로 규율과 가치관을 만들면서 그의 정신에는 올바른 이해가 가득차게 됩니다.

가장 높이 떠오른 정오의 태양과 같아지는 것이죠.

이때만큼은 올바름 추구자에게 희망이 가득하기에,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가 맛볼 가장 <위대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는 태양이 하강하듯이, 사람들에게로 하강해야 합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에 세상에 계속하여 머물 수 없으니,

자신을 이어줄 내일의 존재, 새로운 태양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 위대한 순간을 저는 함께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앎을 전하기 위해 사람들에게로 나아가는 여러분에게 축복이 깃들기를 바랄 것입니다.

앎을 전하는 그 과정 속에서 분명 많은 고통과 외로움이 찾아올 테니 말입니다.

 

이 순간에 있는 사람은 이상적인 미래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점을 깨달을 겁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애틋한 마음을 가지며, 자신을 축복할 것입니다.

 

“어리숙한 인간으로 부조리한 사회와 그릇됨으로 가득한 종교적 세계관 속에서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성숙한 인간으로 이상사회 속에서 살기를, 이상사회가 오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위대한 정오에서 갖는 우리의 마지막 의지가 되길 바랍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정오

니체에게 정오는 개인의 성장이 이뤄짐과 동시에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시간이다.

차라투스트라 역시 이 위대한 정오를 맞이하여 하강했다.

 


생각해볼 거리들

 

왜 차라투스트라는 제자들에게 홀로 가라고 하며, 자신과 맞서라고 하는가?
- 차라투스트라는 교조주의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 차라투스트라 서문 9장에서 언급되었다시피, 같이 추수할 수 있는 자를 바라기에, 제자들이 그런 존재로 거듭나길 바라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제자들과 헤어지고 난 후 두 번 더 만나는가?

- 이에 대해서는 제자들의 정신적 성숙을 살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 우선 헤어지는 당시의 제자들은 성숙해지려는 의지를 가진 상태의 모습이다.

-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헤어질 때 그들이 자신만의 소신을 가지기를 바라는데, 이는 자신만의 가치 체계를 구축할 힘을 기르는 단계다.

- 그런 면에서 사자의 단계라고 볼 수 있다.

 

- 마지막으로 위대한 정오를 앞두고 만난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이때는 위대한 정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추가로 언급하겠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이 배운 것에 대한 영향을 끼치는 단계, 즉 아이의 단계라 할 수 있다.

- 그래서 니체는 이 마지막 상태를 두고서, "너희는 내 벗이 되어야 하며, 희망의 아이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 즉, 저 문장에서 말하는 아이들이 아이 단계인 것이다.

- 대체로 사람들은 아이 단계를 개인이 아이처럼 자유로운 상태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정오를 맞이한 존재의 상태를 말하고 있다.

 

위대한 정오란 무엇인가?

- 위대한 정오란 해가 가장 높이 뜬 상태로, 개인의 성장이 최대로 나아간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 그렇게 성장을 한 상태에서는 이제 쇠락의 길만 남게 된다.

- 성장을 이뤘다는 것은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이는 곧 죽음이 가까워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이 존재는 자신이 깨달은 것은 사람들에게 상속시키고 새로운 태양이 뜨게끔 설파해야 한다.

- 이런 상태가 바로 아이의 상태다.

 

- 아이의 상태는 사람들에게 설파하려고 하면서 교류하는 상태다.

- 이때 어떻게든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해야 하므로, 많은 처세술을 요구하게 된다.

- 그 중에 가장 좋은 것이 바로 망각과 사람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예"라는 대답이다.

- 게다가 이상 사회에 대한 설파는 사람들이 무시하는 것이기도 하므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

- 그렇기에 제힘으로 굴러가는 바퀴처럼 자신의 뚝심 하나만으로 나아가야 하는 특징을 보인다.

- 이런 점들로 볼 때, 1권 1장에서의 아이의 모습은 사람들 사이에서 설파하는 존재로서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 이상사회나 올바른 이해에 대해서 설파하는 과정은 혼자 성숙해지는 과정보다 더 어렵다.

- 왜냐면 탐구의 충만함으로 이제까지 버텼다면, 이제는 동지나 함께 하는 이에 대한 의존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 게다가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받는 비난과 경멸 등은 고독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 이레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제자들에게 축복을 빌어주려고 하게 된다.

 

왜 위대한 정오는 위버멘쉬와 짐승 사이에 있나?

- 위대한 정오는 위버멘쉬로 나아가는 과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 위대한 정오는 위버멘쉬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씨를 뿌리는 작업과 같다.

- 그리고 위버멘쉬는 그렇게 뿌린 씨가 자라나 추수를 할 때 나타난다.

- 그래서 이렇게 씨를 뿌리는 위대한 정오의 시점은 위버멘쉬로 나아간 단계라고 보기는 어렵게 된다.

- 그래서 중간에 있는 것이다.

 

왜 저녁으로 가는 그의 길을 희망으로 기리나?
- 저녁으로 간다는 것은 해가 내려가는 것이고, 어둠이 온다는 것을 말한다.

- 이는 인생의 황혼기로 간다는 것과 비슷하게 볼 수 있다.

- 황혼기로 가기 때문에 자신이 깨달은 것은 그냥 두면 그대로 사라지게 된다.

- 그렇기에 설파해야만 한다.

- 그래야 새로운 사람이 이상사회를 위한 씨를 다시금 뿌릴 것이기 때문이다.

- 그렇기에 설파하는 길은 새로운 아침, 새로운 태양, 새로운 정오를 만드는 길이 된다.

 

하강하는 자는 왜 저쪽 너머로 건너가는 자임을 깨닫는가?

- 여기서 말하는 저쪽 너머는 이상 사회일 수도 있고, 영원회귀의 순환일 수도 있다.

- 따라서 건너가는 자는 이상사회로 나아가는 자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고, 영원회귀의 순환에 따르는 자라고 볼 수도 있다.

 

- 하강하는 자는 충만해진 자신의 이해를 세상에 나누는 자이고, 올바른 이해를 선사하는 자다.

- 이 자는 이상사회를 구축하려고 노력한 자인 것이다.

- 따라서 이상사회를 구축하려고 노력한 자는 자신이 이상 사회나 영원회귀의 순환에 따르는 자라고 본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상사회로 건너간다고 보기에는 태양의 비유가 적절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 왜냐면 태양이 뜨고 지는 과정 속에서 태양은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태양처럼 하강하는 자는 새로운 존재의 모습으로 다시 떠오른다고 봐야 맞을 듯 하다.

- 그런 면에서 영원회귀의 순환에 따르는 자라는 것을 깨닫고 자기를 축복하는 것 같다.

- 그래서 니체는 나중에 반복되는 삶을 축복하게 된다.

 

깨달음의 태양은 왜 정오의 태양인가?

- 태양이 저물기 시작하면서 태양은 쇠락한다.

- 그래서 태양이 만약 하강하는 자의 깨달음의 수준/올바른 이해의 수준을 이야기 한다면, 태양의 하강은 올바른 이해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뉘앙스로 해석할 수도 있다.

- 이러한 점에 대해서 보완하기 이해서 "깨달음의 태양은 정오의 태양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 즉 깨달음의 측면에서는 정오인 상태와 다름없다는 것이다.

 

모든 신들은 죽었다. 우리는 위버멘쉬가 살기를 바란다는 말은 어떻게 보아야 하나?

- 이제까지의 맥락상으로 보면, 신들은 종교적 사회적 규율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 왜냐면 종교적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라고 이야기를 해왔기 때문이다.

- 그런 면에서 종교적 사회적 규율을 따르면서 살기를 원치 않는다고 해석하는 게 올바라 보인다.

- 그리고 "위버멘쉬가 살기를 바란다"는 것은 "성숙한 존재로서 이상 사회에서 살길 바란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듯 하다.

 

- 정리한다면, "이제 종교적 사회적 규율에 따라 살지 않고, 성숙한 인간으로서 이상 사회 속에서 살기를 바란다"는 말이 될 듯 하다.

- 이는 위대한 정오의 사람들, 이상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설파하는 사람들의 의지이기를 바란다는 것인데, 이제껏 차라투스트라가 언급했던 사항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