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1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1권 19장 의역 (완) (독사의 묾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5. 10. 14:25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1권 19장 독사의 묾


 

19장 개괄

 

 

19장은 은둔자로서 살아갈 때 어떤 처세술을 지녀야 하는지를 말한다.

그래서 타인들에게 비판을 받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게 좋을지, 비판할 대상을 보았을 때, 어떤 태도를 보여야 좋은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은둔자로서 살아가다가 자신과 성향이 다른 은둔자를 보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논한다.

 


 

 

본문

 

 

차라투스트라가 무화가 나무 아래에서 두 팔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었다.

그때 뱀이 나타나 차라투스트라의 목을 물었고, 차라투스트라는 아파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뱀을 바라보았다.

독사는 차라투스트라의 눈을 보고는 도망치려 했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도망가지 마라.

    당신은 내게서 감사 인사를 받지 못했으니 말이다.

    당신은 잠들어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던 나를 제때 깨워주었다.

 

독사가 말했다.

   "아니, 나는 너를 죽이려 했고, 그래서 널 물었을 뿐이다.

    너는 이제  얼마 못가 죽을 것이다.

    나의 독은 치명적이니 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용이 뱀의 독에 죽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독은 다시 가져가라.

    너는 내게 독을 줄만큼 넉넉한 존재가 아니니 말이다.”

 

그러자 뱀은 차라투스트라의 목에 매달려 그의 상처를 핥았다.

 

독사와 차라투스트라

차라투스트라는 독사의 공격이 자신에게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한다.


 

차라투스트라의 제자들이 물었다.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방금 한 이야기는 여러분의 적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알려주고 싶었기에 한 이야기입니다.

    이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저는 사회 규율의 부조리를 비판하면서, 적을 두게 되었습니다.

    선하고 정의로운 사람들, 즉 사회적 규율의 옹호자들을 적으로 두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저를 규율 파괴자라고 부르죠.

 

    이런 자들이 당신을 비난하고 공격해 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신을 못마땅하게 여겨 악행을 저지른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신은 성숙한 존재가 되려는 자들이니,

    적의 악행에 대해서도 수용하고 포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마시길 바랍니다.

    왜냐면 그것은 적들이 우리에게 더 악감정을 갖도록 할 뿐이니까요.

    그들의 악행을 성인군자처럼 수용한다면, 그들은 자신의 저열함에 부끄러움을 느낌과 동시에 더 괴롭히고 싶은

    욕구에 빠져들 테니까요.

 

    당신이 저들의 괴롭힘을 성숙한 태도로 벗어나려고 한다면,

    저들의 악행이 당신에게 유익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주면 될 것 같습니다.

    당신을 괴롭히는 게 저들의 목적인데, 오히려 당신을 돕고 있다고 여긴다면, 괴롭힐 의욕이 상실되지 않겠습니까?

 

    이게 어렵더라도, 적들의 악행을 포용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차라리 그들에게 화를 내시는 게 좋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당신이 괴로워하는 것, 스트레스 받아 화나게 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면 그들은 만족하고 당신을 괴롭히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여러분이 적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적들이 당신을 저주라도 한다면, 같이 저주를 하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적에게 선행을 하는 것은 위선적인 존재나 선민의식을 지닌 존재들이 할 법한 행동이니까요.

 

    누군가 당신을 괴롭혀서 고통받고 있다면, 스트레스 받고 있다면,

    조금씩 그 스트레스를 제게 풀어도 좋습니다.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을 보는 것은 끔찍하니 말입니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누군가에게 스트레스를 푸는 것.

    타인에게 내가 받은 스트레스를 나누는 것.

    이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시겠죠.

    하지만 이는 당신의 정신건강에 있어서는 옳은 것입니다.

    당신이 스트레스를 푸는 대상에게는 옳지 못한 일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스트레스를 받아 타인에게 스트레스를 푸는 것은 반쪽짜리 정의*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이 나누는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있으니, 제게 푸셔도 괜찮습니다.

*자신에게는 올바르지만 타인에게는 올바르지 못해서 반만 올바른 행동이 된다.

    이렇게라도 스트레스를 푸는 것은 인간적이지 않습니까?

 

차라투스트라와 제자들

차라투스트라는 은둔자로서 어떤 처세술을 지녀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저는 여러분의 엄격함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보기에 미숙한 자, 부조리한 자가 있어 응당한 책임을 물게 하고 싶더라도,

    그것이 부조리한 자가 지적받고 책임을 지는 걸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응당한 책임을 반드시 물리고자 하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과 대화를 한다면,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는 것보다 상황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 자신이 옳지 않다고 인정하는 것이 더 고상한 것 같습니다.

    특히나 자신이 옳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고상하다 생각합니다.

    당신은 이러기 위해서는 충분히 마음의 여유를 지닌 자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눈에서 부조리한 자를 결단코 처벌하고자 하는 엄중한 의지가 보입니다.  

    저는 이러한 여러분의 엄격한 정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주는 정의를 구현할 생각은 없는 것입니까?

    잘못을 저지른 이에게 기회를 줄 수 있는 아량을 갖기를 바랍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너그러운 아량 말입니다.

 

    당신은 제게 “불의가 응당한 처벌을 받아야 정의가 바로 서지 않겠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미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사람마다 능력과 성향이 다릅니다.

    누군가는 본성적으로 정의로워서 애초에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정의에 따른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본성적으로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신을 개선시켜 나갈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이들에게 정의롭지 못했다며, 무조건 행동에 걸맞는 처벌을 받으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러한 생각에 따라, 그들이 자신을 행동을 개선시키기 위해 필요하다 생각되는 것들을 줄 것이며, 이렇게 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의의 실현 문제

불의에 대한 처벌은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불의에 대한 처벌보다는 계도할 방향을 찾는 게 맞는가?

불의한 행동의 정도에 따라서도 답이 갈릴 문제다.


 

    끝으로 은둔자인 형제들이여,

    다른 은둔자에게 불의를 행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가뜩이나 고독한 자가 동지에게 받는 불의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가 반가운 동지에게 어떻게 보복하려 할 수 있겠습니까?

 

    동지에게 받은 불의는 가뜩이나 고독한 은둔자에게 깊은 상심을 줄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은둔자를 모욕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만약 다른 은둔자를 모욕해야 했고, 그래서 모욕했다면,

    그의 원수/적이 되어, 그가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도록 맹렬히 공격하시기 바랍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은둔자들

은둔자들은 벗이 필요하므로 서로가 간절하고 진심으로 대하겠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은둔자들 사이에서도 기본적인 행동지침이 있어야 한다.


생각해볼 거리들

 

독사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을 담고 있나?

- 독사의 이야기는 공격받는 차라투스트라가 어떻게 공격에 대해서 대처하는지를 보여준다.

- 즉 비판에 대한 처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왜 악을 선으로 갚지 말라고 하는가?
- 악을 선으로 갚게 되면, 적들이 바라는 것과 거리가 멀어진다.

- 즉 적들은 자신의 악행을 통해서 괴로워하는 것/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보고자 하는데, 되려 자신의 악행으로 선한 척 할 기회를 주었다고 봐서, 더 괘씸하게 여기게 된다.

- 따라서 부끄러워 한다고 번역되기는 하지만, 적을 울그락불그락 하게 만들게 된다.

- 이는 실패한 처세가 된다.

 

- 처세라는 것은 자신에게 스트레스 주는 일, 괴롭게 하는 일을 잘 대처해서 스트레스나 괴로움을 피하는 것이다.

- 이런 점에 따르면, 적의 악행이 악행으로서 기능하지 못한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편이 낫다.

- 그런 면에서 악행이 오히려 자신을 도왔다는 식으로 전개해야 하는 것이다.

- 뱀의 비유를 보더라도, 뱀이 묾으로써 자면서 정체해 있던 차라투스트라가 일어나 다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한다.

- 이는 곧 뱀의 묾이 자신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오히려 유익했다고 말하면서 뱀의 묾의 목적을 상실시켜 버리는 것이다.

 

왜 부끄럽게 하기보다 화를 내라고 하는가?

- 적의 목적은 자신의 악행을 통해서 괴로워하는 것/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보고자 하는 것이므로, 그들이 원하는 것을 빠르게 보여주면, 오히려 스트레스/괴로움을 겪는 일이 없을 것이기에 나오는 말이다.

 

왜 저주하는 누군가를 축복하지 말라고 하는가?
- 이는 선민의식으로 나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악행을 하는 자와 그 악행을 선행으로 되갚는 자의 구도가 되는데, 이로써 자신을 보다 특별하게 여길 수 있게 된다.

- 이는 성숙한 행동일 수 있지만, 이로써 자기애가 충만해질 수 있으므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듯 하다.

 

불의를 겪으면 왜 자신에게 다섯개의 작은 불의를 하라고 하는가?

- 불의를 겪으면서 스트레스 상태가 되는데, 이 상태를 벗어나는 게 좋으므로, 스트레스 풀이를 하라는 것이다.

- 그리고 자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라고 하는 이유는, 자신은 그러한 불의는 잘 견딜 수 있고 이해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왜 나누어진 불의는 절반의 정의인가?
- 이 말을 불의를 쪼갠다는 의미로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이 말은 불의를 쪼갠다기 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나누어 준다는 말로 볼 수 있다.

-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불의를 나누면, 스트레스를 푸는 꼴이 되는데, 이것은 자기 자신의 정신 건강에는 분명 좋은 거라 올바른 일이다.

- 하지만 스트레스 풀이의 대상이 되는 자에게는 그릇된 행동이 될 것이기에, 완전히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 그래서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위한 불의는 절반의 정의라 불린다.

 

벌이 위반자에게 권리와 명예가 되지 않는다면 왜 차라투스트라의 맘에 들지 않는가?

- 이 말은 다르게 보면, "위반자가 벌을 받는 것을 자신의 권리이자 명예로 여긴다면, 차라투스트라의 맘에 든다"는 것이다.

- 잘못을 저지른 자가 응당히 자신이 벌을 받는 것이 맞다고 여기는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곧 자기의 미숙함을 인식하고 성장하기 위한 계기로 삼을 때를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 그러므로 "위반자에게 벌이 권리나 명예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잘못에 대한 인식이 없어 수긍하지 않는 상태로 보인다.

- 이처럼 자기 성장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벌을 하려고 하는 것은 자기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 왜냐면 이러한 처벌은 강제적으로 이뤄질 텐데, 이는 갈등을 야기하기만 하며 문제 개선에 도움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 또한 이러한 처벌은 사회적 규율의 부조리와 비슷한 양상으로 비춰질 수 있기에 맘에 들어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옳음에도 자신이 옳지 않다고 인정하는 것이 고귀하다고 하는데, 이는 부조리를 방치하는 상황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 맞다. 옳음에도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부조리를 허용하는 것과 같다.

- 그래서 앞서 니체가 보였던 싸우는 존재의 모습과 다르다.

- 하지만 입장이 다른 존재와 짧은 평화도 필요하다고 1권 10장에서 니체는 말한다.

- 이런 점에서 보면, 너무 갈등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은 배척당할 수만 있기에, 적당히 부조리를 지적해보고 넘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 너무 올곧게 지내면 생활이 어려우니 나름의 처세를 통해서 살아가라는 의도로 보이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냉혹한 정의를 좋아하지 않으며, 판관의 눈에 사형집행인과 냉혹한 칼날이 번뜩인다고 했나?

- 냉혹한 정의는 엄격하게 집행하는 정의 심판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 이런 경우에는 어떤 식으로든 원리 원칙에 따라 처벌해야 하는데, 이를 사형집행인과 냉혹한 칼날로 표현한 것 같다.

 

주시하는 눈을 지닌 사랑인 정의는 무엇인가?
- 이는 두 수식어가 혼용된 표현으로, '주시하는 눈을 지닌 정의'와 '사랑이 있는 정의'로 나누어 보면 된다.

- 주시하는 눈은 앞서 칼날이 번뜩이는 눈과 대조된다.

- 즉, 주시하는 눈은 처벌하지 않고 바라보는 눈이라면, 칼날이 번뜩이는 눈은 처벌하려고 하는 눈인 것이다.

 

- 사랑이 있는 정의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 냉혹한 정의는 처벌을 목적한다면, 사랑이 있는 정의는 처벌보다는 기회를 제공하는 정의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 벌과 죄를 짊어지는 사랑이란 말도 이를 통해 이해해 볼 수 있다.

 

판관을 제외한 모든 이에게 무죄 선고를 하는 정의는 무엇인가?

- 이는 모든 이에게 죄가 없다고 말하는 정의는 아니다.

- 또한 죄를 규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 정의도 아니다.

 

- 앞서 사랑이 있는 정의를 설명할 때, 벌을 주지 않고 죄를 감안하여 기회를 주는 정의로 이야기했다.

- 무죄 선고를 하는 정의는 이러한 정의를 언급한다고 할 수 있다.

 

- 그렇다면 왜 판관은 제외하는 걸까?

- 판관은 정의와 관련하여 엄격한 사람을 말한다.

- 왜냐면 앞선 문장에서 '그대들 판관의 눈'이라는 표현으로 볼 때, 엄격한 정의를 실현하려는 사람의 눈을 말하기 때문이다.

- 이에 따라서 본다면, 엄격한 정의관을 가지고 자기 자신에게만 유죄선고를 하는 정의를 가지란 이야기가 된다.

- 이는 남들은 사정이 있어 그런거라고 이해하더라도, 자기 스스로는 정의 구현을 위해서 노력하라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바탕에서부터 정의롭고자 하는 자에게는 거짓말조차 인간에 대한 호의가 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 바탕에서부터 정의롭고자 하는 사람은 본성상 정의로운 사람을 말한다.

- 이에 따라서 뭔가 불의하다가 정의로워진 사람이 아닌, 그야말로 정의 그자체인 사람이라 할 수 있다.

- 이런 사람은 거짓말이 악행이 아니라 선행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 이는 다르게 말하면, 본성상 정의롭지 못한 경우, 본성에 따라 거짓말을 악하게 쓰게 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 이런 경우, 악한 의도로 거짓말을 하는 것은 본성에 따른 것이므로 이해할 수 밖에 없는 문제가 된다.

- 이런 사람에게 응당한 처벌을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 만약 엄격한 정의관을 가진 사람도, 본성에 따라 그렇게 된 것일 텐데, 만약 불의한 본성 지녔다면, 지금과 다르지 않았을까?

- 그러면 이 본성이 악한 사람은 처벌을 해야 하는 것일까?

- 이런 점에 따라서 범죄자에 대한 처벌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생긴다.

 

- 어쨌든 본성상 차이가 있다면,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고, 그에 따라 개선할 기회를 주어야 하기도 한다는 입장이 나오게 된다.

-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즉 자신이 생각하기에 부조리한 자들에게 필요한 기회를 줄 수 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 이를 "자신의 것을 줄 수 밖에 없고 이에 만족한다"고 표현한다.

 

- 그런데 이러한 차라투스트라의 입장은 평소 싸우고 다투라고 하는 입장과 다르다.

- 그러면 차라투스트라는 부조리와 싸우고 정의구현을 하라고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부조리를 감안하고 넘어가라고 말하는 것일까?
- 부조리와 싸우고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니체의 입장이 맞다.

- 다만 부조리와 싸우고 정의가 구현이 되었다면, 처벌보다는 계도가 필요하다고 본다고 할 수 있다.

- 따라서 부조리와 불의를 싫어 하되, 박애정신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끝에서 등장하는 은둔자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일까?

- 차라투스트라가 해당 부분에서 은둔자에게 불의나 모욕을 하지 말라고 하는 대상은 차라투스트라의 형제들이다.

- 즉 차라투스트라와 비슷한 존재인데, 결국 은둔자에 해당된다.

- 따라서 은둔자가 은둔자에게 불의를 저지르거나 모욕을 하게 되는 경우를 방지하고자 말하는 부분인 것이다.

 

- 기본적으로 은둔자들이라면, 비슷한 가치관을 가질 것이기 때문에, 서로 다투거나 모욕할 일이 없을 것이라 보인다.

- 하지만 여러 정황상의 이유로 다투거나 모욕해야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 그럴 경우에서도 최대한 서로를 모욕하거나 다투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은둔자를 모욕했다면, 그 은둔자를 죽이라고 하는가?

- 앞서 말한 것처럼,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대상은 은둔자이기에, 은둔자가 은둔자를 모욕한 상황이다.

- 이처럼 모욕을 했다면, 두 은둔자는 친구가 되기 어려워질 것이다.

- 그러하므로 두 은둔자가 서로를 위하는 방법이라고 남은 것은 적이 되는 것이다.

- 그렇게 적이 되면, 서로를 성장시켜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 하지만 은둔자를 죽이라고 했다.

- 이는 실제로 죽이거나, 죽이는 수준의 무언가를 하라는 것이라기 보다는 극도의 적대성을 지니라는 이야기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