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1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1권 17장 의역 (완) (창조자의 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5. 8. 17:20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1권 17장 창조자의 길


 

 

17장 개괄

 

 

17장은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 성숙한 존재로 살아가려는 자들의 각오를 살피고, 성숙한 존재로 나아가려는 삶이 갖는 곤경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장이다.

 

먼저 니체는 성숙함을 지향하는 삶을 사는 것이 그저 그런 삶을 살았을 때 얻을 수 있는 사회적 이점 때문인지를 살핀다.

몇몇 사람들의 경우, 일반적이지 않음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고, 그로 인한 혜택을 보려고 하는데, 성숙함을 지향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성숙함을 지향함으로써 얻는 혜택을 보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체는 해당 인물들이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는 이유에 대해서 주목한다.

이러한 점은 니체가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게끔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니체는 또한 성숙한 존재로 나아가는 삶이 인고의 삶이라는 점을 언급해준다.

사회적 비판을 견뎌야 하기도 하고, 그로 인한 외로움도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각오를 살피는 거라 볼 수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죽을 때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자기검열과 자신을 경멸하는 자들에게 박애를 갖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언급한다.

 

니체는 이러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성숙한 존재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조언을 하려고 한다.

사회에서 조심해야 할 사람들이 누구인지, 성숙한 존재로 나아가는 삶을 사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되고 힘든 이 길을 가는 자를 응원한다.


 

본문

 

 

형제여,

부조리한 사람들 곁을 떠나, 고독으로 나아가려고 하십니까?
사회를 위한 게 아닌, 자신을 위한 길을 가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잠시 제 이야기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위한 길로 나아가려는 이들은 쉽게 길을 잃고 방황한다.

그러므로 고독 속에서 사색하는 것은 죄악이다.”

사회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오랫동안 사회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회적 규율이 몸과 정신에 베여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나는 사회적 규율을 벗어났습니다.” 라고 말한다 해도,

사회적 규율이 무의식적으로 발동하여 마음 한 켠에 부적절한 언행을 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dj,

사회적 규율에 벗어나는 것에 대한 확신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확신의 흔들림은 여러분의 우울하고 복잡한 표정으로 드러나겠죠.

이것은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려는 당신에게 사회적 규율이 펼치는 마지막 발악이겠죠.

 

이런 일이 벌어질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자신을 위한 길을 가려고 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그럴 능력과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 제게 보여주십시오.

 

우선 제 질문에 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기존의 가치와 규율에 맞서는 존재, 새로운 가치와 규율을 주장할 수 있는 존재입니까?

사회적 규율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판단과 기준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입니까?

어떤 보상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행동할 수 있는 존재입니까?
또한 위버멘쉬들, 미래의 존재들의 벗이 될 수 있는 존재입니까?

 

능력과 조건을 검토 중인 관리

차라투스트라는 성숙한 존재로 나아가는 이에 대해서 검열한다.


 

성숙한 존재, 현명한 존재, 올바른 판단을 하는 존재.

다양한 사람들이 이런 존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존재가 주는 위상/특별함을 갖고 싶어하는 것이죠.

당신은 이 위상/특별함에 대한 욕심 때문에 이 길로 나아가는 겁니까?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욕구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제게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에서, 사람들을 고취시키는 생각을 전하는 사람을 두고 위대한 사람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기곤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 자체는 전혀 위대하거나 훌륭하지 않을 뿐더러 가치도 거의 없습니다.

 

“나는 사회적 규율로부터 자유롭다”는 생각도 그 중 하나입니다.

당신은 자신을 뽐내듯 제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듣고 싶은 것은 당신이 사회적 규율로부터 자유롭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제가 듣고 싶은 것은 무엇을 위해서 사회적 규율로부터 자유로워졌냐는 것입니다.

 

당신은 사회적 규율에서 벗어나도 온전할 수 있는 사람입니까?

사회적 규율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들 중에는 사회적 규율을 벗어남으로써 망가진 사람들도 있으니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올바름을 추구하며 사회적 규율을 벗어났지만, 사회적 규율을 벗어난 이후로는 쾌락을 올바르다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말하건대, 당신이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자유로워진 것인가, 왜 자유로워진 것인가?”

이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당신이 사회적 규율에서부터 벗어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상 사회를 구축할 수 있는 성숙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아닙니까?
당신은 성숙한 존재이고자 하는 의지에 따라서 자신만의 규율을 갖출 수 있는 사람입니까?
자신의 규율들이 성숙함과 거리가 있다면, 자기 검열하고 응징할 수 있는 사람입니까?

 

질문하며 꼼꼼히 살피는 차라투스트라

차라투스트라는 해당 인물이 자신의 동지인지 기만자인지 꼼꼼히 살핀다.


 

올바름을 기준으로 자신의 규율을 검열하고 개선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은 우리를 고독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왜냐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적 규율 속에서 살고,

사회적 규율을 벗어난 사람들도 대부분 자기 검열을 하며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올바름을 추구하는 이 삶은 황량한 공간으로, 차디찬 고독으로 나아가는 삶이 됩니다.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 사회의 부조리를 지적하는 당신,

이상사회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고, 이를 위해서 용감히 주장하는 당신은

여전히 많은 이들로부터 배척당하며 비난받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고독 속에서 당신은 지칠 겁니다.

그래서 당신이 믿고 자부하던 이상사회에 대한 의지는 고독의 힘이 작용하여 현실적 타협을 하게 될 것이고,

이상적 미래를 향한 당신의 용기는 끝이 무뎌져 더는 맹렬하지 못할 것입니다.

 

언젠가 당신은 자신이 혼자라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이상사회보다는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로 나아가고자 할 겁니다.

당신의 이상 사회에 대한 의지는 더 이상 반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의지가 당신을 외로움 속에 가두는 것 같아 기피하는 것이 될 겁니다.

 

그러다 당신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 “모든 것이 부조리하다”라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외로움은 고독한 자의 삶을 쑥대밭으로 만듭니다.

그렇게 하여 고독한 자가 다시 사회로 돌아오게 하려고 말입니다.

외로움이 고독한 자를 세상에서 없애지 못한다면, 그 외로움은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고독한 자에게 고난을 주는 이 외로움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부조리가 가득한 도시를 앞에 둔 사내

고독에 견딜 수 없던 사내는 결국 도시로 돌아가게 된다.


 

형제여,

당신은 사회 부조리를 비판하며 살아갈 때 경멸을 겪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당신의 성숙하고자 하는 의지에 따라, 당신을 경멸하는 자들에게도 성숙하게/올바르게 대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리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까?

 

사람들 속에서 당신은 당신의 주장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알리고 이해시키려고 노력할 겁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경멸과 배척으로 당신을 대해 줄 것입니다.

 

저들이 왜 저럴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당신은 저들에게 당신의 이야기가 잘 와닿게 하려고 노력한 것이지만,

저들은 당신의 이야기에 자신들의 무능함/무지함을 깨닫게 되었을 뿐인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저들은 용서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올바름에 대한 사색과 탐구는 저들보다 수준 높은 자로 만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들은 그러한 높은 수준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저들은 당신을 귀찮은/불쾌한 존재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성숙한 존재를 꿈꾸는 당신은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저를 이렇게 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저는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고, 여러분의 이러한 태도는 이미 감안했던 사항입니다”

 

사람들은 이상 사회/성숙한 존재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을 괴롭히고자 불의한 언행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들이 그렇게 하더라도, 당신은 저들을 미워해서도 안 되고, 덜 노력해서도 안 됩니다.

당신이 성숙한 존재, 사람들을 빛을 비추는 별과 같은 존재이기를 바라는 게 맞다면 말입니다.

 

오물을 맞도고 웃어 보이는 사내

성숙한 존재로 나아가는 길은 인류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위버멘쉬도 인류애가 깊은 존재다.


 

여러분이 성숙한 존재의 길로 나아간다면, 조심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 사회에서 착하다고, 정의롭다고 하는 이들을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저들은 그들의 평판에 맞게 사회적 규율에 복종하는 자들이니,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는 존재에 대해서 가차없습니다.

 

또한 종교에 빠져 있는 자들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저들은 당신을 이단이나 악마에 씌였다고 여겨 벌하려 들겁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들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고독한 자는 외로움을 벗어나고 싶어하기에,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에게 쉽게 정을 주고 관계를 만드려고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온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누군가는 손을 내밀어 관계를 맺어도 되지만, 누군가에게는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닌 자신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들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가장 조심해야 하는 존재는 바로 사회적 규율에 젖어 있던 자신, 사회적 자아입니다.

이 사회적 자아는 사회적 규율을 벗어난 당신 안에서 당신의 행동에 대해 지적할 기회만 엿봅니다.

 

당신이 자신을 위한 길로 나아갈 때,

사회적 자아는 당신을 이단자/마녀/점쟁이/얼간이/의심하는 자/타락한 자/악당으로 인식하게 할 겁니다.

당신은 이런 사회적 자아를 견뎌내고 제압할 만큼 강인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당신은 성숙함에 이르 길로 나아가기 힘들 수 있습니다.

 

위태로운 다리를 건너는 사내

성숙한 존재로 나아가는 길에는 조심해야 할 것들이 많다.


 

당신이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 있다면, 그것은 창조자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저는 당신이 사회적 자아의 비판 속에서 하나의 일관된 가치체계/하나의 성숙한 가치체계를 구현하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 있다면, 그것은 성숙함/위버멘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로써 당신은 성숙해지는 과정에서 올바르게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사회적 규율에 물든 자기 자신을 경멸하게 됩니다.

이는 성숙함을 사랑하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건강한 자기 경멸입니다.

 

성숙해지려는 사람은 성숙함으로 나아가기 위한 가치를 창조해야 합니다.

사회적 가치와 규율에 따라서는 성숙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숙해지려는 사람은 사회적 가치와 규율을 경멸합니다.

 

사회적 가치와 규율은 개인을 억압하고 희생시킵니다.

이런 사회적 가치와 규율을 경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을 괴롭게 둔다는 것인데,

이런 자가 과연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무엇을 알까요?

 

형제여,

성숙함/위버멘쉬에 대한 사랑과 이를 위한 가치 창조의 의지를 가지고서 고독 속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당신의 이상적인 미래에 대한 사랑과 의지가 진심이라면,

당신이 창조한 가치와 규율은 당장은 아닐지라도, 훗날에는 올바른 것으로 인정받을 것입니다.

 

형제여

힘든 길이란 걸 알지만, 고독 속으로 나아가십시오.

 

사회적 규율을 넘어서, 성숙한 자신/사회를 위한 가치관과 규율을 만들려고 하는 자,

이를 위해서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자,

저는 이런 사람을 사랑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고독 속에서 써낸 가치관과 규율

성숙함과 올바름에 대한 의지의 결과물이라면, 이 가치관과 규율은 끝내 정의로 인식될 수 있다고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생각해볼 거리들

 

차라투스트라는 왜 고독 속으로 나아가려는 이를 멈춰 세우는가?
- 고독 속으로 나아가는 이를 멈춰 세우는 것은 진심을 확인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 하지만 누군가 고독으로 나아가는 것을 검열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바는 없다.

- 그런 면에서 그저 이상사회/성숙한 존재에 대한 삶을 살아갈 때 어떤 각오를 지녀야 하는지,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멈춰세우는 장면이 나오는 듯 하다.

 

찾는 자는 왜 쉽게 잃어버리고, 홀로 있는 것은 왜 죄악인가?

- 고독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올바름을 찾으러 간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 왜냐면 고독은 사회를 벗어나는 것이고, 사회는 부조리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 하지만 올바름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도 하고, 찾는 과정에서 올바름에 대한 규정이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하다고 여기게 될 수 있다.

- 이렇게 되면 사회적 규율에 따르지도 않고 올바름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이러면 사회적으로 불만만 갖는 존재가 생겨나는 꼴이 된다.

- 따라서 사회에서는 이러한 존재가 애초에 발생하지 않게끔, 사회적 규율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를 바라게 된다.

 

- 사회의 부조리를 밝히고 올바름을 찾는 과정은 사회에서 어울리지 않고 홀로 사색할 때 나타나게 된다.

- 그리고 사색하는 과정에서 실패할 경우, 사회 질서를 해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 따라서 애초에 사색을 하는 것을 사회는 좋아하지 않는다.

- 그렇기에 사색하게 되는 고독을 사회는 죄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대'가 "무리(사회)와 하나의 양심을 공유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왜 비탄과 고통이 생기나?
- 애초에 '그대'는 사회적 규율을 따르던 존재다.

- 그렇게 살아오면서 사회적 규율은 그의 의식 곳곳에 퍼져 있게 된다.

-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규율에 반기를 들게 되면, 그의 의식 곳곳에 퍼진 사회적 규율들이 그 발언을 지탄하게 된다.

- 이때 자신의 발언과 의지에 대한 회의감이 생길 수 있게 되는데, 이를 비탄과 고통이 생기게 된다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

 

- 이러한 점을 바탕으로, 비탄과 고통이 양심에서 비롯된다고 언급하기도 한다.

 

새로운 힘이자 권리, 최초의 움직임,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 별들을 주위에 돌게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 새로운 힘이자 권리는 기존의 힘과 권리에 맞서는 것을 말한다.

- 따라서 사회적 규율에 맞설 수 있는 존재인지를 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최초의 움직임은 어떤 기존의 평가나 규율에 따르는 것이 아닌, 스스로 개척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 따라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느냐를 묻는 것이다.

 

-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는 부조리에 맞서고 성숙해지려고 하는 행동의 동력이 어떤 보상도 명예도 아닌 스스로의 만족에서 기인할 수 있느냐는 것을 묻는 것이다.

- 따라서 어떤 보상이 없어도 행동할 수 있는지 묻는 것이다.

- 이는 중요한데, 사회적 부조리를 개선하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굳이 보상이나 명예를 제공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 따라서 어떤 보상이나 명예를 갖지 않고서도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 어떤 보상이나 명예를 바란다면, 중도에 포기하게 될테니 말이다.

 

- 별들은 위버멘쉬/성숙한 의식을 가진 존재를 말한다.

- 이들이 주위에 돈다는 것은 위버멘쉬의 영원회귀의 흐름 속에 이 존재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 어떤 존재가 위버멘쉬의 영원회귀 흐름 속에 있으려면, 그 존재도 위버멘쉬여야 한다.

- 따라서 별들이 주위를 돌게 할 수 있냐는 것은 위버멘쉬적 존재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을 말한다.

- 한 존재가 위버멘쉬적 존재가 되려면 영원회귀를 이해해야 하는데,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느냐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 또한 영원회귀는 허무주의/염세주의를 극복하게 해주는 기능을 하므로, 다르게 치환을 한다면, "사회의 부조리를 개선하려는 너는 허무주의/염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존재인가?" 라는 질문을 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드높음에 대한 탐심과 야심가의 발작은 무엇을 말하나?

- 고독으로 가는 것은 사회로부터 벗어남이고, 이는 사회 부조리에 대한 문제 의식을 말하기도 하며, 성숙한 존재가 되려는 의지를 지녔음을 말하기도 한다.

- 즉, 고독으로 가는 것은 성숙한 존재들이 나아가는 길인 것이다.

- 이 길로 들어서는 이유는 정말 성숙해지고 싶어서도 그렇겠지만, 성숙한 존재로 사람들에게 인식 받으면 사람들 위에 중요한 인물로 여겨질 수 있다는 이유도 있을 수 있다.

- 이것이 바로 성숙한 존재가 갖는 혜택에 대한 탐욕이며, 야심가들이 꿈꾸는 것이 된다.

- 즉 이 구절을 통해서 니체는 순수하지 못한 의도로 성숙한 존재로 나아가는 길에 들어오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위대한 사상들은 왜 부풀리고 비워지게 하나? 니체는 왜 이것을 풀무와 비교했고 풀무만도 못하다고 했나?

- 우리는 특정한 생각을 한다면, 그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하곤 한다.

- 그 사람이 정말 깨어있어서 그 생각을 한건지 아닌지 상관없이 말이다.

- 만약 깨어있는 상태의 사람이 아닌데, 특정 생각을 한다면,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게 될 텐데, 그는 자신의 본 모습보다 부풀려지게 된다.

 

- 이러한 특징을 바람을 불어넣는 풀무와 관련지어 니체가 표현한 것이다.

- 풀무는 바람을 넣긴 하지만, 대장일을 하는데 도움을 준다.

- 그런데 저 특정 생각은 과대평가를 받게 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 그러므로 저 생각은 풀무보다 생산성도 영양가도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위대한 사상들에 대한 이야기는 왜 나왔나?

- 직역본에서 이어지는 부분을 보면, 차라투스트라의 질문을 받는 존재는 "나는 사회적 규율에서 자유롭다"고 말하는 상황이 나온다.

- 이는 곧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므로, 성숙한 존재로서의 길을 가는데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식의 의미를 갖는다.

-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단순히 저 생각을 한다고 해서 성숙한 존재로서의 길을 가는데 충분하다고 보지 않는다.

-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해당 존재에게 "저 생각을 가져서 본인을 과대평가하는 것 같은데, 정작 중요한 것은 너가 왜 사회적 규율을 벗어났느냐는 것이다. 사회적 규율을 벗어난 이유/목적이 무엇인지, 사회적 규율을 벗어난 이후 무엇을 할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 정리한다면, 특정 생각을 함으로써 자신에게 자격이 충분하다고 과대평가하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언급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그대는 굴레에서 벗어나도 되는 자인가"라고 묻는가?
- 여기서 굴레는 사회적 규율을 말한다.

- 앞서 1권 5장(환희)과 8장(산의 나무) 9장(죽음의 설교자)에서 언급되지만, 사회적 규율을 벗어난 이후 타락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다.

- 따라서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는 것 자체만으로 성숙해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성숙한 존재로서의 길을 나아가는 사람에게 굴레를 벗어나도 타락하지 않을 수 있는 존재인지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자기의 선악을 부여하고, 의지를 걸어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 사회적 규율을 벗어난 존재는 새로이 자신만의 선악을 가지게 된다.

- 하지만 이 상태로 두면, 내키는 대로 하는 것이 선이고, 하기 싫은 것은 다 악이 되어 버릴 수 있다.

- 이런 경우로 가면 거의 방종을 저지르는 상태가 되므로, 사회적 규율을 따를 때보다 상태가 악화된다.

-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규율을 벗어날 때 가졌던 의지, 성숙한 존재/이상사회에 대한 의지의 제한을 받아야 한다.

- 그래야 사회적 규율이 없이도 성숙한 행동을 하는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그저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 짐승처럼 행동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숙한 존재/이상사회에 대한 의지를 중심으로 선악/가치관을 지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 그리고 성숙한 존재로 나아가는 가치관/규율도 오류나 착각 속에서 생길 수 있으므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를 늘 염려하며 자기 검열하는 존재인 판관이자, 문제가 있으면 개선할 수 있는 응징자여야 한다고 말한다.

 

왜 자기만의 규율과 가치관을 가진 자는 황량한 공간과 차가운 고독으로 던져지나?

- 이 존재는 사회적 규율에 따르는 자들 사이에서도 벗어나며, 내키는 대로의 선악을 따르는 자들 사이에서도 벗어난다.

- 그나마 있던 다수들 사이에서 벗어나는 존재가 되므로, 비슷한 존재가 거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 이러한 점을 묘사했다.

 

왜 혼자인 자는 용기와 희망을 온전히 간직해서 고통받나?

- 혼자인 자는 이상사회에 대한 희망과 이를 위해서 현 사회의 부조리와 싸우는 용기를 지닌 자다.

- 이에 따라서 살아가면, 사회적 부조리와 맞서다가 사람들과 대립하고 배척 당하게 될 수 있다.

- 이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독한 자를 죽이려는 감정은 무엇인가?

- 고독한 자는 외로움으로 인하여, 자신의 삶의 방향성에 대해서 재고하게 될 수 있다.

- 외로움에 의해 고독함에서 벗어나 사람들에게로/사회로 돌아가려 할 수 있는데, 이는 고독한 자의 소멸이자 죽음이 된다.

 

고독한 자는 왜 살해자가 되어야 하는가?

- 고독한 자는 외로움에 의해서 시험받게 된다.

- 이때 성숙해지려고 노력하면서 생기는 외로움을 없애야 고독한 자는 더 나아갈 수 있다.

- 그렇지 않다면, 외로움을 견디다 끝내 사회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 그래서 고독한 자는 외로움을 말끔히 없애거나 외로움을 인정하고 사회로 돌아가거나 하는 이분법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 이는 성숙한 존재로 나아가는 길을 겪는 사람들이 다 시도하다가 실패하는 지점인데, 이를 해결할 수 있느냐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 니체는 이를 외로움을 말끔히 없애기 위해서 영원회귀 개념을 이용하는데, 실제 자신의 삶에 잘 반영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경멸과 경멸하는 자를 올바르게 대하려는 고통에 대해 언급하나?

- 성숙해지려는 존재는 올바른 이해를 구하려고 노력한다.

- 그렇게 구해진 올바른 이해를 성숙해지려는 자는 타인과 나누려고 하는데, 이때 사람들은 굳이 원하지 않는 것을 거들먹 거리며 자신들을 하찮게/무능력하게 만들기에 이 성숙해지려는 자를 경멸하게 된다.

- 이런 상황에서 성숙한 존재는 어떤 행동을 보일까?
- 그들의 경멸을 이해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노력할 것이다.

 

- 따라서 경멸받으면서도 자신을 경멸하는 자들에게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 이는 "너희가 이렇게 대하는 것도 내가 바라던 바다" 라는 표현이나, "불의와 오물을 던져도 저들에게 빛을 덜 비춰선 안된다"는 표현을 통해서 다시 확인이 가능하다.

 

- 정리하면, 성숙한 존재로 나아가려는 삶이 고됨이 있다는 것을 언급해주는 것이다.

 

저들에게 가까이 갔으나, 저들을 지나쳐 버렸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 성숙해지려는 존재가 올바른 이해를 전하기 위해서 그들과 대화를 했으나, 그들의 수준을 넘어버렸고, 오히려 그들을 압도해버렸다는 것을 말한다.

- 압도당한 이들은 이를 용서치 않는 것이다.

 

저들을 넘어 위로 올라가 작게 보이게 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 사람들에게 있어 성숙해지려는 자는 귀찮은 존재, 벌레처럼 자신을 괴롭히는 존재가 된다는 이야기다.

 

그대가 마주칠 수 있는 가장 고약한 적은 왜 자신인가? 그리고 동물과 숲은 무엇을 말하는가?
- 성숙해지려는 존재는 예전에 사회적 존재였다.

- 그렇기에 앞서 말했던 것처럼, 사회적 성향이 남아 있다.

- 이 사회적 성향은 완전히 없애는 것이 어려우므로, 지속적으로 성숙해지려는 존재의 방향성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인식하게 한다.

- 즉 성숙해지려는 존재는 자기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게 된다는 이야기다.

- 이러한 사회적 자아의 비판은 사람들이 비판하는 것보다 더 빈번하게 나타나게 되며,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주저하게 하기 때문에, 고약하다고 표현하는 듯 하다.

 

- 동물과 숲의 경우, 숨어있는 것들과 숨을 수 있는 공간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 의식으로 드러나지 않은 영역, 즉 무의식적 영역에 있는 사회적 자아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곱 악마는 무엇을 나타내나?
- 일곱 악마는 사회적 자아가 성숙해지려는 자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보인다.

- 즉 자기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의구심과 정신적 흔들림, 자기비하를 갖게 된다는 이야기로 보인다.

- 각각의 개념이 별도의 상징이라고 보여지진 않는다.

 

- 차라투스트라는 사회적 자아를 제거/무력화하기 위한 강한 성숙에 대한 의지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곱 악마로부터 신 하나를 창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볼 수 있나?

- 일곱 악마는 어떤 상징을 갖는다기 보다는 사회적 규율과 사회적 규율에 따른 비판으로 보인다.

- 따라서 일곱 악마를 통해 신을 창조하라는 것은 사회적 규율의 부조리를 지적하고 무력화하는 과정에서, 성숙에 이르는 일관된 가치 체계와 규율을 형성하라는 것으로 보인다.

- 신을 창조하라는 표현으로 볼 때, 올바름/성숙함/이상사회와 관련된 신을 어느정도 인정하고 있으므로, "신이 죽었다"는 표현은 퇴색된 신, 부조리한 사회와 관련된 신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랑하는 자의 길은 무엇을 말하나?
- 성숙함을 사랑하는 자, 위버멘쉬를 사랑하는 자의 길을 말한다.

 

사랑하는 자의 길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의 길이라고 할 수는 없나?

- 사실 성숙함/위버멘쉬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기도 하다.

- 그래서 별 차이가 없기는 하지만, 문맥상으로 볼 때, "그대의 사랑과 그대의 창조와 함께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라는 부분을 자연스럽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성숙함/위버멘쉬에 대한 사랑이라고 보는 것이 좋아 보인다.

 

그럼 성숙함을 사랑하는 자는 왜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자기 자신을 경멸하게 되나?

- 성숙함을 사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사회적 규율을 따르는 자신은 경멸의 대상이 된다.

 

- 성숙한 존재가 되려는 이는 올바른 이해를 가지려고 하게 된다.

- 올바른 이해를 가지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이 아닌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 왜냐면, 우리 자신에 대한 혐오와 부정이 아닌 긍지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 이는 1권 3장(사후세계)에서 나 자신을 올바르게 이해하면서 긍지를 가지게 된다고 말한 구절과 관련이 있다; "나의 '나'는 내게 새로운 긍지를 가르쳤다. 그것을 나는 사람들에게 가르치노라."

 

- 이처럼 우리가 올바른 이해/성숙함을 추구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우리의 이전 자신을 경멸하게 되는 상황에 놓인다.

- 이는 올바른 이해/성숙함을 추구하지 않는 자들은 경험하지 못하는 사랑과 경멸이다.

 

"그대의 사랑과 창조와 함께 고독으로 가라. 그러면 나중에 정의가 절뚝거리며 뒤를 따를 것이다"는 말은 어떻게 보아야 하나?

- 그대의 사랑과 창조와 함께 고독으로 가라."부터 보자.

- 이 구절은 성숙함에 대한 사랑/추구와 함께, 성숙함에 이르는 규율과 가치관을 창조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고독 속에서 사색하라는 이야기다. 

- 그렇게 되면, 올바른 통찰이 가능해지고, 올바른 규율과 가치관을 가지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절뚝거리는 정의인데, 이것은 '성숙함에 대한 사랑'과 '규율과 가치를 정립하려는 의지'에 따라 나타난 가치관과 규율이 험난한 과정을 거쳐서 정의로 인정받는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을 넘어 창조하려 하고, 그로 인해 파멸하는 자'는 누구인가?

- 여기서 자기 자신은 사회적 규율에 젖은 자신, 즉 사회적 자아를 말한다. 

- 따라서 자신을 넘어 창조하려는 자는 사회적 자아를 넘어서/사회적 규율을 넘어서서 성숙에 이르는 가치와 규율을 창조하려는 자를 말한다.

 

- 성숙에 이르는 가치와 규율을 창조하게 되면, 사회적으로 배척당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 이런 점에서 이 존재는 사회에서 파멸했다고 표현할 수 있다.

- 따라서 앞서 누누히 말한 성숙한 존재로 나아가는 길을 택한 사람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