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1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1권 14장 의역 (완) (친구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5. 5. 20:14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1권 14장 친구


 

14장 개괄

 

 

14장은 친구에 대해서 언급하는 장이다.

 

니체는 자신을 이해할 친구를 간절히 바랬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초반에는 그러한 친구에 대한 동경을 표현한다.

 

니체의 친구는 성장을 위해서 같이 노력해주고, 서로의 성장을 위해 비판도 불사하는 존재다.

하지만 이러한 친구관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우애관과 맞지 않았다.

그래서 니체는 세간에서 친구를 바라지 않게 된다.

 

니체가 보기에 사람들은 서로 미숙한 상태의 존재이면서, 솔직한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는 결국 미숙함만을 서로 보여주는 것이기에 좋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미숙함을 벗어나기 위해서, 즉 성숙한 존재/위버멘쉬가 되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또 현 세상에서 친구를 맺기 위해서는 친구의 잘못을 묵인해주기도 하고, 친구가 원하는 바를 잘 캐치해서 처세를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사람들의 우애관은 대체로 사랑을 중심으로 둔 우애관이다.

즉 사람들은 서로 응원하고 지지하고 사랑하는 관계를 이상적인 관계로 보는 것이다.

니체는 이상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관계보다는 서로 성장을 위해서 비판하는 관계가 이상적이라고 하며, 자신이 말하는 우애관에 따르기를 권한다.

 

 


 

본문

 

 

은둔자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홀로 있어 늘 혼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혼자가 아닙니다

물론 제 존재는 하나이긴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둘이 됩니다.

이때 제 곁에는 저와 또 다른 제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신을 두고 열심히 대화를 나눕니다.

대화를 나눌 제 자신마저 없다면, 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 잘 보낼 수 있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세상에서 말하는 친구는 제 3의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런 친구는 제가 생각에 깊게 빠져 현실감을 잃지 않게 해주는 역할을 해주죠.

 

은둔자가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눌 수라도 있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상 사회를 바라는 은둔자는

자신의 생각과 노력에 공감하는 자가 없다는 점에서 허무와 염세로 이뤄진 <심연>을 가지게 됩니다.

 

은둔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심연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심연을 메꿔줄 친구를,

즉, 이상 사회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노력을 공감해 줄 수 있는 정신적 경지를 가진 이를 그리워합니다.

 

당신이 바라는 친구의 모습은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줍니다.

은둔자는 저런 친구를 바라고 있는데, 당신은 어떤 친구를 바라고 있으십니까?

 

심연 속의 은둔자

은둔자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 속에서 심연에 빠지고,

여기서 자신을 건져줄 친구를 동경하게 된다.


 

성숙해지려는 영혼은 성숙해지기 위한 방법으로 자기 검열 및 비판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행동이 성숙한지 아닌지 검열하고 비판하는 것이죠.

 

이러한 영혼은 자신의 친구 역시 그러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서로 성숙해지기 위해서 서로를 검열해주고 비판해주는 관계가 형성되기를 바랍니다.

그 과정에서 성숙해지려는 영혼은 친구가 잘못을 저지른 경우 비판하게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숙해지려는 영혼이 친구를 위해서 하는 행동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즉,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는지 아닌지 계속해서 관찰하고 있는 것, 그러다 잘못을 저지르면 가감없이 비판하는 것, 이런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숙해지려는 자는 사람들의 심리를 처음부터  알진 못했을 것입니다.

모두가 자신처럼 성숙해지고 싶어한다고 느꼈겠죠.

그래서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르나 안저지르나 살피다가 잘못을 저지르면 비판을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숙해지려는 자의 이러한 비판을 처음에는 친구라는 이유로 감안해주었을 겁니다.

오히려 뛰어난 통찰력을 지녔다며 칭찬해주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점차 이것이 반복된다고 느끼면서,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와 절교하거나 그를 적대시하게 될 겁니다.

 

성숙해지려는 영혼은 이러한 사람들과의 교제 속에서, 자신이 사람들과 방향성이 달라서 친구가 되기 힘들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그는 친구는 바라지 않을 테니, 자신과 성숙함에 대해서 논할 상대라도 되어주길 바라게 됩니다.

 

타인의 행동을 주시하는 은둔자

성숙하지 못한 행동에 대해서 지적하려는 그의 태도는 일반적으로 교제를 위한 행동이라고 납득되기 어렵다.


 

그런데 친구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친구란 우리가 성장하게끔 도와주는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성장이 긍정적이고 응원하는 친구사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올바름에 입각한 진지한 비판에서 성장하게끔 도와주는 관계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친구를 위해서 논쟁을 벌일 수 있어야 합니다.

친구를 위해서 친구의 반대자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친구의 개인적 영역으로 침투하지 않고서 어떻게 친구와 가까울 수 있겠습니까?

서로를 무한히 존중만 한다면, 그것으로 친구와 가깝다 생각하십니까?

 

다른 어떤 관계도 아닌 친구 관계에서 당신을 위한 최상의 적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당신을 존중하는 상태에서 당신에게 진지한 비판을 할 테니 말입니다.

그렇지 않은 존재들과의 논쟁은 오히려 당신을 매장하기 위한 비판, 반대하기 위한 반대만 있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친구가 당신을 비판한다면, 그의 비판과 반박을 가벼이 여기지 말고, 아주 진지하게/진심을 다해 그의 비판과 반박을 마주하시기 바랍니다.

친구의 비판을 진심을 다해 다루지 않는다면, 친구가 한 비판은 무의미하지 않겠습니까?

친구가 비판해도 당신이 진지하게 살피지 않는다면, 당신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서로 싸우기 전인 두 사람

차라투스트라는 성숙한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서 친구와 논쟁을 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당신은 친구에게 솔직하고 싶습니까?
친구에게 솔직한 것이 친구와 자신의 관계를 보여주는 영예로운 징표라고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성숙해지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 당신을 솔직하게 친구에게 보여준다면,

친구는 당신을 악마같이 여길 겁니다.

왜냐면 너무나 미숙하고 추악하니까요.

이 미숙한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낸다면, 친구는 분노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다른 이에게 솔직한 모습을 보이는 걸 두려워하죠.

 

만약 여러분이 성숙한 존재, 아니 더 나아가 신처럼 완전한 존재라면,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친구에게 솔직하고 싶다면, 성숙해지기 위한 노력을 갖추고 솔직해지시기 바랍니다.

*신은 이상적인 존재인데, 이상적인 존재가 자신의 이상적인 면을 솔직하게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람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누군가는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솔직히 말하면서 자신의 미숙한 모습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합리화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받아들이기 좋게 말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구들이 여러분의 모습을 좋게 받아들여주지는 않을 겁니다.

 

여러분이 솔직한 모습을 보이고도 친구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으려면, 여러분의 모습은 성숙해지려는 존재의 모습, 위버멘쉬*라는 목표로 나아가는 화살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친구들이 여러분의 솔직한 모습을 마음에 들어 할 것입니다.

*부조리를 극복하고 올바름을 추구하는 존재를 말한다.

 

여러분은 친구의 솔직한 모습을 보려고 친구를 관찰해 본 적이 있습니까?
친구의 본모습은 어떻던가요?

추하게 일그러져 있던가요?

그 모습은 여러분 자신의 본모습과 같지 않습니까?

 

친구의 본모습을 보고서 놀랐습니까?

그렇다면, 확실히 아시겠군요.

현재 인간의 모습은 모두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모습을 개선시켜 더 나은 모습/더 성숙한 모습이 되도록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현 시점에서 친구를 만난다면, 친구의 모든 면에 대해서 알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러다가 혹시라도 친구의 본모습/추악한 모습을 알게 되었다면, 침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정 말하고 싶다면, 자기 자신을 향해 말하시며 반면교사 하시기 바랍니다.

그 외의 누군가에게도 말하지 마시구요.

 

현시점에서 친구를 둔다면, 친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닌지를 간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친구는 당신에게서 종교적인 요구, 즉 자신을 동정해주길 바랄지도 모릅니다.

그런 친구라면, 여러분은 동정을 해주어야 할 수 있습니다.

 

세간에서는 이웃의 자잘한 문제들에도 동정을 남발하기를 바라곤 하지만,

사실 동정이라는 것은 웬만해서는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정말 동정이 필요한 순간에만 하는 것이 좋죠.

 

동정이 정말 필요한 순간을 알아차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동정이 필요한 순간이란 그 사람의 입장에 충분히 몰입해보아야만 아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이뤄지는 동정은 우리에게 섬세함과 감미로움을 느끼게 해줍니다.

 

 

서로의 추악함을 보고 놀라는 두 친구

친구에게 우리의 내면을 친구는 그 추악한 모습에 분노할 것이라고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문제에는 미숙하지만, 다른 이의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성숙한 관점에서 바라보기도 합니다.

친구가 문제에 시달리고 있을 때 적절히 환기시켜 주기도 하고, 충분히 생각하게끔 조력하기도 하며, 답을 주기도 하니 말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친구가 되고자 한다면, 친구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친구의 잘못에 대해서 쉽게 묵인하구 순응하는 존재라면,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자기 감정에 따라 행동할 뿐이라면,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이런 경우라면, 친구를 올바르게 비판할 능력/친구가 성장하게 도와줄 능력이 없으니 말입니다.

 

대체로 여자들의 관계는 이런 특징을 갖습니다.

여자들은 관계의 기능을 ‘성장’이 아닌 ‘안정과 사랑’에 중심을 둡니다.

그렇다 보니, 친구가 감정적이어도 묵인해주고, 자신이 감정적이어도 친구는 묵인해주는 관계 양상이 나타납니다.

서로 위로해주고 이해해주는 관계 말입니다.

그렇다 보니, 제가 말하는 서로를 성장시켜주기 위한 관계는 맺을 준비가 되어져 있지 않습니다.

 

여자들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안정과 사랑을 중시하는 관계>는 친구와 친구가 아닌 자에 대한 차별과 맹목적인 지지가 있습니다.

즉 친구에게 더 잘 해주려고 하고, 친구가 아닌 자에게는 차가울 수 있는 것이죠.

이것은 사회적으로 좋은 관계라고 하지만, 제가 보기엔 좋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지식을 두고도, 여자의 안정과 사랑을 중시하는 태도가 나타나곤 하는데, 이는 좋은 현상은 아닙니다.

왜냐면, 안정과 사랑을 중시하는 태도로 인해, 올바른 입장과 그릇된 입장이 모두 수용되고 존중받는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지식/탐구와 관련해서는, 본디 올바른 입장만이 수용되고 존중되어야 함에도 말이죠.

 

이런 점들로 볼 때, 여자들은 성장에 도움이 되는 관계를 형성하는 존재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쉽게 묵인하기도 하고, 쉽게 감정적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그나마 여자들의 성향은 같이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는 건 아니지만, 좌절하거나 절망할 때 지지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해주는 모습

차라투스트라는 이상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이러한 관계보다는 서로 비판하며 성장을 돕는 관계를 권장한다.


 

남자들의 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남자들의 관계에서 서로의 성장을 위한 관계가 있기는 합니까?

남자들은 서로의 성장을 위하지 않습니다.

그저 친구들 사이에서의 자신만 성장을 하는 것을 가장 바라죠.

그래서 친구의 성장을 위해서 조언하거나 노력하려 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에게 친구를 성장시킬 만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아! 이 인색하고 무능한 남자들이여!

 

그렇다고 남자들이 친구들에게 아무것도 베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남자들은 친구를 성장시키지 않는 선에서, 친교를 위해 베풉니다.

 

하지만 저는 친구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적이 될 것이고 의견을 낼 겁니다.

이렇게 친구들을 성장시킨다고 해서, 내가 친구들과 비교해서 더 못나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흔한 우정은 친구에게 서로를 위로하고 공감하는 동지애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친구에게 동지애를 지닌다면,

서로의 성장을 위해서도 노력하는 진정한 우애를 갖기를 바라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친구의 성장을 위해서 노력하는 차라투스트라

친구의 성장이 자신에게 어떤 득이 되지 않을 지라도,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차라투스트라는 노력한다.

 


생각해볼 거리들

 

은둔자는  시간이 지나면 둘이 되나?

- 은둔자는 대화를 원하기에, 자기 자신을 두고 대화하는 상황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는 상황은 스스로 자문자답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만약 실제로 대화가 이뤄진다면 병적인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친구는 코르크인가?

- 친구를 ‘내가 독단에 빠지지 않게 의견을 제시해주는 사람’으로 보는 경우도 있기는 한데, 그렇게 보면 문제가 있다고 보인다.

- 먼저 자기와의 대화가 독단으로 빠진다는 것으로 볼 이유가 글 내용 상에서 충분하지 않다.

 - 물론 이후의 내용은 친구가 성숙해지는데 도움을 주는 존재의 모습을 그리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 당장의 코르크로서의 친구는 성장하게 하는 역할 보다는 가라앉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인다.

- 따라서 은둔자의 친구가 갖는 감정적 기능에 대해서 말한다고 할 수 있다.

 

- 또한 심연의 의미를 독단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홀로 있는 자가 자신과의 대화 속에서 깊게 가라앉는다는 말은 침잠되어지는 형상으로 보이기 때문에, 독단으로 나아간다는 뉘앙스로 보기 어렵다.

 

사랑으로 질투를 넘으려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 이는 사람들이 질투의 대상을 사랑으로 덮으려고 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 이렇게 치환을 하면, 은둔자가 질투의 대상이 되고, 이 은둔자를 친구인 사람이 사랑으로 감싸려 한다는 뉘앙스로 볼 수 있다.

- 은둔자가 질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은둔자가 가질 수 있는 뛰어난 능력으로는 통찰력이 있을 듯 하다.

- 그에 따라서 본다면, 은둔자는 인간에 대한 통찰력, 나도 몰랐던 나 자신에 대한 통찰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해 봄직하다.

- 왜냐면 은둔자는 성숙하고자 하는 의지에 따라서 타인의 행동을 분석하고 비판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 그리고 일반인들은 처음에 이러한 은둔자의 상태가 뛰어나다고 느낄 것이고.

- 어쨌든 은둔자의 친구는 은둔자의 지적을 통해서 은둔자의 뛰어난 감지력/통찰력에 대한 질투를 가질 수 있는데, 친구이기에 이를 잘 포용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참된 외경은 어떤 존재인가?
- 참된 외경은 1권 1장의 서두에서 언급이 된다.

- 1장에서는 중요하게 볼 필요가 없긴 했지만, 참된 외경을 가진 영혼은 올바른 것을 따르려는 경향성을 지닌 영혼이라 할 수 있다.

- 이는 곧 성숙해지려는 영혼을 말하는데,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존재를 말한다.

 

참된 외경은 왜 사람들에게 친구는 됐고, 적이라도 되어달라고 하는가?
- 참된 외경, 성숙해지려는 존재는 성숙해지려고 하는데,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여긴다.

- 이에 기반하여 교제하게 되면, 사람들은 친구로부터 미성숙함을 지적 받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이는 일반적인 교제에 해당되지는 않는다.

- 따라서 사람들은 성숙해지려는 존재와 친구가 되려 하지 않게 된다.

 

- 성숙해지려는 존재는 성숙과 관련된 대화를 하고 싶어하는 상태기에, 자신의 화두에 대한 상대자가 있기를 바란다.

- 친구와 그럴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사람들과 성숙해지려는 존재의 방향성이 다르므로, 그럴 수 없게 된다.

- 이에 성숙해지려는 존재는 친구는 없어도 좋으니, 논의라도 같이 해달라고 요청하는 상황에 이르는 것이다.

 

왜 친구에게서 최상의 적을 찾아야 할까?
- 친구가 최상의 적이 되어야 상호 존중 속에서 건설적인 토론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만약 친구가 아닌 존재와 토론을 하게 된다면, 서로를 잘 모르기도 하여, 건설적인 토론이 어려울 수 있다.

 

왜 친구와 대적할 때에는 가슴으로부터 가장 가깝게 느껴야 할까?

- 가슴으로부터 가장 가깝게 느낀다는 것은 위협적으로 느낀다는 것/심각하게 느낀다는 것을 말한다.

- 가슴으로부터 가장 멀게 대적하게 된다면,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모습으로 대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벗은 전쟁/토론을 해야 한다고 하더니, 왜 벗을 두고 갑자기 추측하고 침묵해야 한다고 하는가?

- 흐름상 전쟁/토론의 상대로서의 벗은 차라투스트라가 이상적인 벗으로 상정하고 말하는 벗이다.

- 추측하고 침묵해야 할 상대로서의 벗은 현실적 교제에서의 벗을 말한다.

- 따라서 같은 벗이라는 명칭 속에서 의미하는 대상이 다르다.

 

벗이 사랑하는 것이 불굴의 눈과 영원의 눈길이라는 표현은 무엇을 말하나?
- 벗이 동정을 원하는지를 논하면서 나오는 부분이다.

- 동정이라는 단어로 볼 때, 불굴의 눈과 영원의 눈길은 종교적 의미를 담는다고 보인다.

- 따라서 해당 구절은 "벗이 너에게서 종교적 의미로서의 벗을 기대할 수도 있다"는 말로 볼 수 있다.

 

노예와 폭군은 무엇을 의미하나?
- 노예는 순종적인 존재를 말하고, 폭군은 감정적인 존재를 말한다.

- 이 둘 모두 건설적 의미로서의 벗과는 거리가 멀다.

 

여자에게 노예와 폭군이 있다는 것은 여성비하인가?
- 여성에게서 순종적인 면과 감정적인 면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다.

- 이 부분을 볼 때, 여자라면 자신을 배제하고, 대체적인 여자의 특징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 일반론에 따르면,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순종적이고 감정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우애를 맺을 능력이 없다는 것은 여성비하인가?

- 여기서 말하는 우애는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이상적인 우애를 말한다.

- 차라투스트라는 친구를 성장시키는 능력, 친구를 비판하고 따지는 능력이 있어야 우애를 맺을 능력이 있다고 본다.

- 하지만 친구의 성장을 위해서 비판하고 따지는 관계는 여자들이 원하는 관계가 아니다.

- 또한 여자들은 차라투스트라의 교제법을 따르려고 할 이유가 거의 없다.

- 즉 여자들이 기피하는/원치 않는 교제 방법이므로, 차라투스트라가 "여자들은 내가 말하는 교제를 할 능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해 긍정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여자는 그저 사랑만을 알 뿐이라는 건 여성비하인가?

- 현재 언급되는 문장은 "여자는 사랑만 아는 존재다"라기보다는 이 장의 주제상 "여자는 사랑을 중시하는 관계만 알 뿐이다"로 보아야 더 적절해 보인다.

 

- 차라투스트라의 관계와 여자의 관계는 큰 차이가 있다.

- 차라투스트라의 관계의 중심에는 "성장"이 있는 반면, 여자의 관계에는 "안정과 사랑"이 있다.

- 즉, 여자의 관계는 "서로 비판하고 문제를 지적하는 것보다, 서로 응원하고 지지하고 사랑해주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 이러한 표현이 비하적으로 해석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여자의 사랑에는 불공정과 맹목이 있고, 지식에 대한 사랑에도 빛, 기습, 번개, 밤이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보아야 하나?

- 여자의 관계는 서로를 응원하고 지지하고 사랑해주는 것이 목표다.

- 그렇기 때문에, 여자의 관계는 관계 구성원에 대해서 각별한 모습을 보이고, 관계의 외부에 있는 상대에게는 차별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다.

- 또한 응원하고 지지하고 사랑해줘야 하므로, 친구가 그릇된 일이나 잘못된 일을 저지르더라도 맹목적으로 수용해주려고 하는 경향도 나타나게 된다.

- 이런 점에서 불공정과 맹목이 언급되는 걸로 보인다.

 

- 지식에 대한 사랑에서 빛은 탐구자들이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 반면, 기습/번개/밤은 탐구자들이 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 하지만 지식을 사랑하는 여자의 경우, 하나의 의견만을 소중히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견을 수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 왜냐면 여자의 관계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 따라서 박애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어서, 빛만이 아닌 다양한 것들을 존중하는 모습으로 간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를 지적하는 것이다.

 

여자는 왜 고양이이자 새이자 최고의 경우에도 암소에 불과하나?

- 고양이는 감정적인 면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고, 새는 순종적인 면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 따라서 앞서 말한 여자의 특징에 대해서 상징적으로 나열하는 듯 하다.

 

- 암소의 경우는 유일하게 가축인데, 이 가축은 가정에 여러모로 도움을 준다.

-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성장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긍정적 영향을 주긴 하지만, 성장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는 않는 존재라고 표현하는 듯 하다.

- 즉, 성장하길 바라고 기도하면서 옆에서 챙겨주기는 하지만, 성장을 위한 비판을 제공하지는 않는다는 것으로 보인다.

 

여자에게 우애를 맺을 능력이 없다고 하더니, 남자들은 왜 우애를 맺을 능력이 없다고 하는가?

- 여자들의 교제는 친교적이다.

-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교제는 여성만의 것은 아니며, 남자들도 이런 친교적 교제를 한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왜 앞에서는 여자들만의 특징인 것처럼 썼을까?

- 그 이유는 아마도, 기본적으로 남자들의 문화가 경쟁 문화이기는 하지만, 살아가면서 그 경쟁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고, 친교에 대한 관심을 두기 때문으로 보인다.

- 여자들의 경우, 경쟁 문화보다는 화합/조화/수용 문화가 기본적이라고 보이기 때문에, 여자들에 대해 꼭 집어 말한 것 같다.

 

왜 남자들에게 가난하고 인색하다고 했을까?
- 이는 남자들의 경쟁 문화 때문으로 보인다.

- 남자들의 경쟁 문화에 따라서, 친구가 잘되게끔 도와주지 않는 경향성을 보인다고 본 것 같다.

- 그런 면에서 보면, 친구가 성장하는 것을 돕는데 있어서 인색하다고 표현한 것 같다.

 

- 다음으로 남자들의 비판력이 좋지 못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 즉 아는 체하거나 허세 부리는 문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남자들의 상태는 적절한 비판이나 교류를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 이는 능력의 부족이므로 가난하다고 표현한 것 같다.

 

왜 남자들이 벗에게 주는 만큼 차라투스트라는 적에게 준다고 했을까? 무엇을 준다고 본 걸까?

- 남자들이 친구에게 성장을 위해서 제공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해도, 친구에게 관계를 위해서 베푸는 것이 없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 그렇지만, 남자들은 자신의 적에게나 적이 될 것 같은 존재에게는 베풀지 않는다.

- 그렇게 할 경우, 적이 자신보다 잘나질 확율만 높여주는 것이니 그러하다.

 

- 반면 차라투스트라는 적이 잘나지든 어떻든 상관없이 베풀 것이라고 한다.

- 왜냐면 적에게 베푼다고 해서 자신이 더 못나질 것이 없기 때문이다.

- 즉 적에게도 자신은 베풀었다는 성숙한 태도를 보일 수 있기에, 경쟁자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자신의 성숙의 징표가 되지, 미숙함의 징표가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동지애와 우애는 왜 나올까?
- 기본적으로 여자나 남자가 하는 교제는 동지애에 따른 교제다.

- 왜냐면 서로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 위로/응원/노력을 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 서로가 서로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 말이다.

 

- 그런데 진정한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는 미성숙한 상태로 있어선 안된다.

- 성숙한 상태로 나아가야 진정한 안정과 평화로 나아갈 수 있는데, 동지애의 경우, 성숙한 상태로 나아가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게 된다.

 

- 차라투스트라는 우애를 성숙한 상태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한다.

- 그런 면에서 동지애만 가질 것이 아니라, 우애를 가져서 성숙한 상태로 나아가려고 하기를 바란다고 할 수 있다.

- 동지애가 서로를 위한 것이니, 서로를 위한다면 서로를 성숙하게 만드려고 노력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뉘앙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