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1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1권 12장 의역 (완) (시장의 파리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5. 1. 13:25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1권 12장 시장의 파리들


 

12장 개괄

 

12장은 시대의 지식인과 대중에 대한 비평을 담고 있다.

 

니체에 따르면, 세간의 유명한 지식인들은 올바른 지식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자라기 보다는 사람들의 지적 욕구를 자극하기만 하는 수준의 선동가에 해당된다.

그래서 위대하고 뛰어난 학자라고 칭송받더라도, 실제로는 위대하지 않다.

 

하지만 이와 같은 존재들도 순기능이 있다.

사람들은 애초에 지적인 부분에 흥미를 지니지만, 그 지적인 흥미를 충족하기 위한 공부를 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람들을 자극하는 세간의 지식인들은 대중에게 지식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사회의 순기능을 담당한다고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이 퍼트리는 지식의 수준이 좋지 않다고 니체는 평가한다.

 

또 니체는 위버멘쉬로서의 존재가 대중들에게 어떻게 대우받는지를 말한다.

위버멘쉬로서의 존재는 세간의 지식인들에게 의문을 품고 올바른 이해를 알리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위버멘쉬의 뛰어난 통찰은 사람들을 무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세간의 지식인들이 제공하는 자극적인 지식에 감정적으로 감응한 대중들은 위버멘쉬를 체계에 혼란을 야기하는 존재로 바라본다.

그래서 그를 비난하고 배척하려 한다.

 

니체는 위버멘쉬에게 대중들 개개에 대해서 대응하지 말고, 좀 더 큰 목표를 위해서 나아가라고 조언한다.

 


 

본문

 

친구여, 고독으로 피신하는 게 어떻습니까?

제가 보기에 당신은

사회적으로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헛소리와 이들을 따르는 우둔한 사람들의 비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실제 위대하지 않지만, 학력이 좋거나 어떤 사건을 계기로 사람들로부터 추앙받는 존재를 말한다.

차라투스트라에게 단순히 학력이 좋은 것은 그 대상이 위대하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다.또한 올바른 이해와 증명을 해야 하는데,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이런 자들은 탐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설명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따라서 실제 무능력하면서 주목받는, 위대하지 않으면서 위대한 척 하는 사람으로 표현된다.하지만 그나마 사람들 사이에서 올바른 것에 관심을 두고 사람들에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지도자로서 자리할 만하다.**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친구는 그릇된 상식이나 교양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왜냐면 그릇된 상식과 교양을 제공하는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과 그 추종자로부터 비난받고 있기 때문이다.'위대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실제 위대한 능력을 갖추지 않고, 차라투스트라가 비판하는 교조주의에 따라 이야기만 하므로, 차라투스트라 입장에선 그릇된 상식을 전하는 존재가 된다.차라투스트라나 차라투스트라의 친구는 올바른 앎을 전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비난받게 되는 것이다.

 

숲과 바위는 당신처럼 기품있게 침묵할 줄 압니다.

저 넓은 바다 위로 가지를 뻗은 나무처럼

사람들과 교류를 줄이고 내적 성장과 탐구를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고요한 하늘과 바다로 가지를 뻗은 나무

나무는 니체에게 있어, 고독 속에서도 성숙해져 가는 존재를 표현하는 듯 하다.


 

고독이 끝나는 곳에서는 온갖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모이면, 위대한 척하는 이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늘어놓는 잡소리들이 가득해지지요.

 

어떤 올바른 것도 이 위대한 척하는 이들이 사람들에게 알려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올바른 것을 알아볼 능력도 없을 뿐더러,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저 사람들 사이에서 올바르다고 알려지는 것에 대해서만 민감히 반응합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교양이 있다고 여겨질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주변에서 인정해주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을

자신들의 교양 수준을 올려주는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진정한 탐구자들의 발견에 의해서 발전해 나아갑니다.

하지만 대중과 명성은 이런 탐구자들이 아닌, 위대한 척하는 사람들을 위주로 나아갑니다.

 

위대한 척하는 사람들이 능력이 없는 건 아닙니다.

다만 양심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세계가 혹할 만한 자극적인 앎들을 탐구자의 연구에서 찾아냅니다.

그런데 이런 자극적인 앎을 찾고 선정할 때, 그는 그 앎이 정말 옳은지 그를지, 어떤 맥락에서 한 이야기인지를 따지지 않습니다.

그저 그 앎이 자극적이라고 여겨지기만하면 충분하니까요.

 

위대한 척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믿음/앎을 전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자극적으로 받아들여져서, 자신을 위대한/뛰어난 존재로 여길테니까요.

사람들도 어제는 이걸 주장했다가 오늘은 그와 반대되는 주장을 하곤 하는데,

이처럼 위대한 척하는 사람들도 새로운 자극을 주는 앎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일관성 없이 나아갑니다*.

*사회에서 학자로 인정받는 자들이 제대로 증명하지 않으면서 참신하거나 자극적인 주제를 말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경우, 기존 상식에 위배되거나 모순되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게 되는데, 이러한 위배와 모순을 즐긴다.

이는 곧 새로운 앎의 지평을 연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 때문에, 어느정도 말만 된다면 자극적이고  참신한 것을 주장하려는 경향성을 보인다.

 

위대한 척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앎의 증명과 설득의 조건은 명확합니다.

우선 새로 주어진 앎이 기존의 앎을 어떤 이유로든 간에 전복을 시킨다면, 그것은 증명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새로 주어진 앎이 흥분을 자아낸다면, 그것은 설득력 있다고 말해집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탐구자들이 얻는 엄밀한 앎들은 거짓이거나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 취급받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이슈를 일으킬 수 있는 것에 꽂혀, 그럴 수 있는 앎에 대해서만 찾으려고만 하죠.

 

거대한 척 하는 작은 정령

차라투스트라는 세간의 지식인들이 위대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에게 위대해 보이려 노력한다고 지적한다.


 

사회는 위대한 척하는 존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대중들은 이런 존재들의 위대함을 받들며 자랑하고 있죠.

 

위대한 척하는 존재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의 주인입니다.

그래서 그 시대가 주는 명성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에 의문을 품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그릇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그를 지적하면,

그들은 우리를 몰아 세웁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질문에 ‘예’ 또는 ‘아니오‘로 답하기를 요구합니다.

“당신도 저 분의 의견에 동의하나요?”

 

그릇된 앎을 긍정하여 그들과 비슷한 존재가 될 것이냐?

그릇된 앎을 부정하여 그들로부터 배척될 것이냐?

이걸 묻는 것이죠.

여러모로 슬픈 상황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무슨 대답을 하실 겁니까?
차라리 “잘 모르겠다”고 답할 것인가요?

 

진리를 사랑하는 자여,

이런 상황에서 당신은 저들 무리를 부러워할 수 있습니다.

오류일지라도 자신들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당당히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신들과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무리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너무 부러워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저들의 손에 진실/올바른 이해가 들려 있던 적은 없었으니까요.

 

사람들 속에 계속 있는다면, 당신은 검증의 대상이 될 겁니다.

그러니 사람들을 벗어나 안식처로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깊은 샘에 무언가 던져졌을 때, 샘이 자신에게 던져진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 깊이만큼 오래 걸립니다.

그 무언가가 바닥에 닿아서야 샘은 알아차릴 테니까요.

이 샘처럼 당신에게 주어진 매도와 비난을 알아차리는 데에도 당신은 오래 걸릴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아무렇지 않더라도, 나중에 큰 괴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을 벗어나 안식처로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위대한 통찰은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세속적인 명예로부터 떨어진 곳에서 일어납니다.

그 곳에 늘 진정한 탐구자들 창조자들*이 있었습니다.

*부조리한 가치와 규율을 부수고, 올바른 가치와 규율을 창조하는 자들을 말한다.

 

사상 검증을 위해 답변을 강요하는 사람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이 옳다고 할 수도 없고, 그릇되었다 하기도 어려우므로,

그들로부터 벗어나라고 말한다.


 

저는 사람들 사이에서 당신이 괴롭힘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친구여,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곳으로 피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위대한 통찰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작은 사람들, 사색하지 않는 사람들'과 너무 가까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그릇된 이해를 가진 그들에게 올바른 이해를 나누려 해도, 그들은 그것을 거들떠도 보지 않습니다.

그저 기존의 그릇된 이해를 건드린 대가를 치르게 하려 할 뿐입니다.

 

이들의 비판과 배척에 대해서 일일이 대응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무수히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 하나하나와 다투는 것이 당신의 운명이 아닙니다.

 

위엄있는 건축물들도 비와 잡초로 무너지곤 합니다.

당신이 사람들 속에 있는다면, 이 건축물들처럼 많은 물방울들에 의해 부서지고 갈라질 수 있습니다.

 

당신을 헐뜯고 배척하려는 사람들을 마주하면서도,

당신은 자신의 긍지, 성숙한 존재로서의 긍지에 따라 화를 내지 않을 겁니다.

이들에게 화내는 것은 당신의 긍지에 맞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저들을 견뎌내는 것이 당신의 운명*이 되지 않게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당신이 아무리 성숙한 존재로서의 긍지를 지녀도, 당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깊은 상처를 받으니까요.

*그릇된 이해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화를 내지 않고 견디며 사는 운명을 살지 말라는 이야기다.

 

당신이 상처받아 힘들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당신을 괴롭히려 듭니다.

그들은 순진한 모습으로 다가와, 당신을 괴롭힐 겁니다.

그들에게 당신은 더 따질 것도 없이 배척하고 짓밟을 대상일 뿐이니까요.

 

그들은 당신을 찬양하며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을 괴롭힐 기회를 엿보는 것입니다.

저들이 당신에게 찬양하고 아부하며 곁에 있는 것은 저들에게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애초에 아첨꾼이니 말입니다.

 

또 그들은 당신에게 사랑스럽게 보이려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의 허를 찌르려는 것이죠.

이러한 것은 그들이 겁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겁쟁이들은 교활하니 말입니다.

 

비와 바람에 의해 무너진 건물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형제가 사람들의 비난 속에서 무너지지 않을까 염려한다.


 

그들의 정신은 복잡하게 사고할 수 없고 그저 단순합니다.

그러다 보니 복잡한 사고를 하게 만드는 당신은 그들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당신이 가진 뛰어난 능력을 벌하려 합니다.

그들은 그저 당신의 실수를 저지른다면, 그들은 용서하려 할 겁니다.

실수를 용서하는 것은 그들의 위상을 높여주니까요.

 

그들이 이렇게 하더라도, 당신은 그들을 이해하고 수용하려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사고하는 것에 그들에게 어떤 잘못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사고하며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당신과 같이 위대한 정신을 가진 자들에게 혼란을 야기하는 죄가 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그들에게 온화하게 대하더라도, 그들은 오만하게 자신들을 대한다며 불쾌해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당신의 선행에 대해서 악행으로 되돌려줄 겁니다.

 

당신의 긍지*는 그들에게 거슬립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긍지를 버리고 사람들의 입맛에 따라 겸손하게 굴면, 그들은 기뻐할 것입니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로서 갖는 긍지다.

이때 그릇된 이해를 가진 자를 이해하고 포용하려고 하는데, 이것이 사람들에게 거슬릴 수 있다.

 

혹시라도 우리가 저들 중 누군가의 미숙한 점을 알아차린다면, 이로 인해 그는 불타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자들을 조심하길 바랍니다.

*자신의 미숙한 점을 누군가 발견해내면, 화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즉 미숙한 걸 보더라도 못본 체 하고 넘어갈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미숙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데 신경을 쓰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들은 당신 앞에서 작아짐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들은 당신에게 적대감을 느낍니다.

저들 스스로도 모르게 적대감을 표출할 수도 있고, 아주 적나라하게 적대감을 표출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자신을 작아지게 한 당신에게 기회가 생기면 복수하려 할 겁니다.

 

당신은 눈치채지 못했습니까?

당신이 저들에게 다가가면, 저들의 말수가 줄어들었던 것을 말입니다.

당신이 저들에게 다가가면, 저들이 무기력해졌던 것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형제여.

당신은 당신 이웃에게 <악한 양심>입니다.

왜냐면 당신이나 당신의 말과 자신들을 견주면, 당신의 올바름에 그들은 한없이 하찮은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저들이 당신을 미워하고, 그래서 괴롭히려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이웃은 늘 당신을 적대시할 것입니다.

당신의 위대한 점, 바로 그것이 그들이 당신에게 적대감을 품게하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여,

그러니 고독 속으로 달아나십시오.

사람들이 다가올 수 없는 곳으로 나아가십시오.

이들을 일일이 상대하는 것은 당신의 운명이 아닙니다.

 

 

차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했다.

 

현자 주위로 몰려드는 파리떼의 모습

차라투스트라의 형제는 비대중적인 인물로, 대중과 달라 대중이 배척하고자 하는 대상이 된다.


생각해볼 거리

 

위대한 자들이 내는 견디기 어려운 소음은 무엇을 말하나?

- 위대하다고 하는 자들이 말을 하는데, 그것이 소음이라는 것을 말한다.

- 즉 올바른 말을 하지 않고, 이상한 이야기만 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왜소한 사람은 누구인가?

- 사고가 단순하고, 사고의 깊이가 낮은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 그렇기 때문에 복잡한 이야기를 하는 차라투스트라의 벗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위축되기만 한다.

 

왜 니체는 나무가 되라고 하는가?

- 나무는 생물로서, 다른 존재와 직접적으로 소통하지 않지만, 자신을 성장시킨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인식되는 듯 하다.

 

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것도 그것을 보여주는 자가 없으면 무의미한가?

- 여기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뛰어난 앎, 탁월한 앎, 올바른 이해를 말한다.

 

- 사람들은 재미를 위해 살기도 바쁘기에, 올바른 이해를 하는 것에 대해 관심이 없고,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 그러다 보니 위대하고 훌륭한 것도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존재하게 된다.

- 따라서 그것을 대중에게 보여줘야만 관심받고 훌륭함을 찬양받을 수 있다.

 

배우는 왜 가장 강한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믿나?
- 여기서 배우는 위대한 존재처럼 보이려 하는 존재를 말한다.

- 그렇다 보니 실제로 열심히 탐구하기보다는 위대해 보일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

- 따라서 증명보다는 자신이 보기에 말이 되고 자극적인 앎이라면 그것을 선호하는 경향을 갖는다.

 

왜 뒤집어 엎는 것과 열광시키는 것은 증명이자 설득인가?

- 사람들은 자신이 기존에 알던 것의 허점을 찾아서 전복시키는 것에 대해서 큰 흥미를 지닌다.

- 또한 그러한 지식이 흥분을 자아낼 수 있다면, 그것은 획기적이고 시대를 앞선 것이라고 본다.

- 이러한 대중들의 앎에 대한 가치척도를 지적하는 것이다.

 

왜 배우들은 섬세한 귀에 들리는 진리는 거부하고, 세상에 커다란 소음을 불러일으키는 것만을 믿나?

- 배우들은 위대한 존재인 척 하고 싶은 자들이지, 실제로 위대한 존재이려고 하는 자들이 아니다.

- 그렇다 보니 섬세한 관찰/탐구 속에서 얻어지는 진리는 원치 않는다.

- 그저 세상에 이슈를 일으킬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데, 그래야 자신의 위상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니체는 진리를 거부하는 존재인 것 같은데, 왜 진리를 사랑하는 자라는 표현이 나타나며, 진리가 무조건적인 자에게 매달리지 않는다고 하는가?

- 니체는 진리를 거부한다기 보다는 교조주의를 거부한다.

- 교조주의는 앞선 현자나 학계의 앎을 진리로 받들어 그에 따라서 살고 생각하려 하는 것을 말한다.

- 니체는 이러한 교조주의적 진리를 비판을 한 것이지, 진리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깊은 샘은 무엇을 말하나?

- 깊은 샘은 외부 자극에 반응이 느린 것을 말한다.

- 깊은 샘에 던져진 돌은 밑바닥에 닿기 전까지는 별다른 자극을 느끼지 못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돌이 던져졌음을 알게 된다.

- 이처럼 차라투스트라의 벗은 당장은 괜찮을지 몰라도 나중에 괴로움을 느낄 수 있으니, 나중에 큰 괴로움에 시달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람들 사이를 벗어나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 깊은 샘의 해석과 관련해서는 '1권 19장 독사의 묾'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차라투스트라의 벗은 파리채의 운명이 아니라면, 어떤 운명인가?

- 1권 10장에서 경멸할 적을 두지 말고, 증오할 적을 두라는 말이 나온다.

- 12장에서 언급하는 대중이 경멸할 적이라면, 대중들을 이렇게 만든 문화/체계가 증오할 적이 될 것이다.

- 이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무한히 많은 대중들의 인식을 개선하려 하지 말고, 이런 대중들을 양산하는 문화/체계를 개선하는 게 형제들의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차라투스트라의 벗은 자신을 쏘아대는 대중들에게 화를 내지 않는가? 어떤 긍지를 지녀서 그러는 것인가?

- 차라투스트라의 벗은 위버멘쉬적 성향을 지닌 존재들이다.

- 위버멘쉬는 성숙한 인간이 되려 노력하는 존재로, 이상사회를 구축하는 존재들이다.

- 이들은 성숙함을 지향하고, 자신의 성숙함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지닌다.

- 이러한 상황에서 미숙한 존재를 마주한다면, 그들은 미숙한 존재를 지적한다기 보다는 그들을 이해하고 성숙한 방향으로 이끌려고 하게 된다.

- 따라서 자신을 공격하는 미숙한 존재들을 포용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