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1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1권 10장 의역 (완2) (전쟁과 전사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4. 26. 15:49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Claude 3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10장 전쟁과 전사


 

10장 개괄

 

10장은 사회적 규율에 대한 반감을 지니고 있지만, 면밀한 판단력이나 통찰력을 지니지 못하는 경우에 대해서 말하는 장이다.

 

니체는 사회적 규율에 대한 반감을 지닌다고 해서 무조건 통찰력이 좋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저 반감에 대한 느낌을 지녀서 사회적 규율에 저항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이들에게 지침을 내리고자 한다.

 

그렇게 내리는 지침은 사회를 개선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부조리를 위해서 사람들과 다투면서도 그들과 잘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다투는 것은 분명 자신을 지키는 데에도 좋다고 한다.

 

그리고 부조리와 다투면서 선민의식을 갖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그렇게 되면 결국 부조리한 자들이 자기애에 빠져 부조리를 일으키는 것과 같아지는 양상이 된다는 것이다.

 

선민의식과 함께, 사회적 시선도 견딜 줄 알아야 한다.그러기 위해서 니체는 이들을 독려한다.

 


 

본문

 

 

형제들이여,

우리는 적이나 사랑하는 이로부터 보호받기를 원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가 여러분에게 소신 발언을 하나 하겠습니다.

 

삶/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 반감을 느끼는 나의 형제들이여,

저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친구이자, 여러분들의 적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여러분과 같이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 싸우지만,

우리는 서로의 성장을 위해서 경쟁하는 적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적이자 친구로서, 여러분에게 소신 발언을 하나 하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마음 속에 부조리에 대한 증오와

부조리에 따라 혜택을 보는 이들에 대한 시기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회적 규율에 순종하는 상태라면, 이러한 증오와 시기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사회적 규율에 순종하지 않은 상태이니, 이러한 증오와 시기를 잘 느끼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증오와 시기를 느끼는 것은 미숙한 것이기에,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여길 수 있을 만큼, 올바르다고 여길 수 있을 만큼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전사들 앞에서 발언하는 차라투스트라

그는 부조리와의 다툼을 앞둔 전사들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여러분이 섬세한 정신과 분석력을 지니지 못했다면,

그래서 올바른 인식을 가질 수 있는 탐구자가 될 수 없다면,

여러분은 올바른 이해를 밝히는 탐구자들의 전사가 되어

그들을 도와 부조리와 싸우는 전사*가 되어주길 바랍니다.

*부조리와 싸운다는 것은 부조리와 맞서서 다툰다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한 사회의 요구를 외면하고 올바르고 이상적인 것에 따라 산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논쟁하는 일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부조리와 싸우는 이유는 사람들이 이상적인 것에 따라 살아야만 이상적 가치와 규율에 따라 사는 사회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차라수트스트라는 올바른 탐구를 할 능력이 부족하다면, 이상적인 것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시민이 되어달라고 하는 것이다.

 

부조리에 맞서 싸우는 전사들,

이들은 성스러운 탐구자,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의 동료이면서,

부조리를 극복하며 이상적 미래로 나아가는 선구자들이 될테니 말입니다.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이를 말한다.

 

저는 사회적 규율에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봤습니다.

그들의 정신은 사회적 규율이라는 제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복 속에 숨겨진 이들의 정신에 제복에 대한 불만이 있길 바랍니다.

그래야 이들이 부조리한 사회가 아니라 이상적 미래를 향해 전향하고, 사회적 규율과 맞설테니까요.

저는 사람들이 사회적 규율과 맞서는 모습이 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부조리에 맞서는 전사가 되려 한다면,

여러분은 사회의 부조리를 단박에 느낄 수 있는 섬세한 자여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몇몇 분들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단박에 증오를 느끼기도 하는데,

이것이 부조리와 맞서는 전사의 자질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스스로 적을 찾아내고, 그 적과 다퉈야 합니다.

사회의 부조리를 걷어내겠다는 일념 하에 말입니다.

그렇게 시비를 따지다 부조리가 승리하더라도,

여러분은 적어도 '나는 부조리를 앞에 두고 복종하지 않고 정직했다'며

부조리에 굴복하지 않은 자신을 두고 승리를 외쳐야 합니다.

 

여러분은 부조리를 위해서 다투는 자이지만,

하나의 부조리만을 두고 사람들과 다투다 사회에서 추방되거나 처벌로 사라져선 안 됩니다.

우리는 사회에 나타나는 <부조리들>을 상대해야 하므로, 사회에 머물러서 부조리를 감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부조리한 자들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어야 합니다.

 

부조리한 자들과 평화롭게 지낸다는 것은 그들의 부조리를 용인해주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부조리가 나타날 때 까지만 평화롭게 지낸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부조리함이 나타난다면, 다시 다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조리와 다투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부조리를 요구받아도 따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언쟁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부조리가 요구되어도 이상적인 행동을 하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복을 입은 군사들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서 사회적 규율에 따르고 있지만, 내면 역시 사회적 규율을 따르지 않는다면,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전사가 될 수 있다.


 

저는 여러분에게 반복되는 삶을 살기보다, 부조리를 두고 싸우는 삶*을 권합니다.

부조리한 사람들과 평화롭게 어울리며 사는 것보다, 부조리에 굴복하지 않고 정직했다는 개인적 만족을 위한 삶을 권합니다.

여러분이 반복하는 것이 부조리에 휘둘리지 않고 올바름을 추구하는 것이며, 여러분이 원하는 목표가 사람들과의 평화로운 관계가 아니라 여러분 내면의 평화가 되기를 바랍니다.

*부조리를 따르지 않고, 꿋꿋이 올바름을 추구하는 삶을 말한다.

 

강해보이고 싸울 준비가 된 사람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와 다툼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위험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약해 보이고 싸움에 무방비해 보인다면, 여러 사람들이 다가와 시비를 걸고 다투려 할 것입니다.

 

부조리에 대해서도 이런 태도를 지녀야만 합니다.

즉, 우리는 부조리를 허용하지 않고 다툼으로써 부조리가 우리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부조리가 우리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고, 이로써 우리의 내면을 평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내면의 평화를 가장 바라기를, 그래서 부조리와 다투려 하기를 바랍니다.

 

무장한 궁수

사람들은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그와 거리를 둔다.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은 개인 내면에 있어서는 평화를 이룰 수 있다.


 

부조리와 다투라고 하니 주저하게 되십니까?

굳이 나서서 다툴 명분이 없다는 이유로, 주변에서 나타나는 부조리를 묵인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부조리와의 다툼은 좋은 사회/이상적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좋은 다툼입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다툴 명분이 있든 없든 부조리와 다투는 것은 모두 미래에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조리를 보고 다투는 것에 주저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전쟁과 용기, 이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은 위대한 일들을 해냈습니다.

우리의 연민이 아니라, 용기가 불행한 이들을 더 구해냈다는 것을 잘 알지 않습니까?

 

“선이란 무엇인가?”

누군가 저에게 이렇게 질문한다면, 저는 이에 대해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용감한 것이 선이다”

 

“선을 아름다우면서 감동적인 것이다”

선에 대해서 이렇게 답하는 것은 소녀들이 할 법한 이야기입니다.

용감하지 않다면, 어떤 것도 지킬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명분없는 싸움에 주저하는 전사들

우리는 부조리를 보더라도 나서지 않는 이유가 명분이 없어서다.

하지만 명분이 없더라도, 부조리를 위해서 싸운다면, 그것은 그대로 훌륭한 명분을 갖춘 싸움이 된다.


 

부조리와 다투는 여러분에게, 사람들은 무정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며 부조리를 눈감아 달라고 감정적으로 호소하지만, 여러분은 그걸 받아들이지 않으니 말입니다.

 

이는 여러분이 무정해서 그런 것일까요?

아닙니다. 여러분은 정상입니다.

그저 감정적일 필요가 없는 일에 이성적으로 대했을 뿐이니 말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어떤 일을 감정에 따라 처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데,

일반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너무 이성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여 타인에게 엄격한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이런 차이가 있으니 사람들은 여러분을 무정하다고 말하는 것이겠죠.

 

저는 감정에 따라 일을 처리하지 않으려는 여러분의 모습이 좋습니다.

감정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면, 하나씩 눈감아주고 감정에 따라 규칙을 바꾼다면,

결국 부조리가 생기게 되니 말입니다.

 

엄격한 관리자와 눈물에 호소하는 농부

감정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면, 냉혈한, 무정한 존재로 인식되어지게 된다.

감정에 판단하지 않는 이유는 그렇게 될 수록 부조리함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이성적인 모습을 보고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부조리에 대한 자신의 입장, 고귀한 목표를 말하길 바랍니다.

 

하지만 주의하십시오.

여러분이 많은 부조리와 맞서는 과정 속에서, 여러분들은 선민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오만해지게 되고, 그렇게 자기애에 빠져선

부조리에 맞서는 것이 아닌 타인을 무시하기 위한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오만해지게 되면, 부조리를 저지르는 어리숙한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어집니다.

하지만 둘은 서로가 다르다고,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하겠지만 말입니다.

 

여러분은 부조리한 사람 하나하나를 상대해선 안 됩니다.

그것은 부조리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부조리의 원천을 개선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사회적 규율에 대한 반문을 제기해서 사회적 규율에 의문을 품는 자들을 전향시키면 됩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목적하는 대상은 의문을 품는 자이고, 따라서 부조리에 물든 사람들과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의문을 품는 자를 전향시키는 과정에서 부조리에 물든 사람들과 논쟁하게 될 수도 있다.

 

또 우리는 사회적 규율을 두고 반감만 갖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규율에 대해서 제대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사회적 규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규율의 부조리를 개선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니체의 도덕 비판이 단순히 도덕의 파괴가 아니라, 도덕의 개선에 있음을 드러낸다.

이는 「우상의 황혼」 1장 36절에서도 드러난다.

 

파리들과의 싸움에서 이겨 즐거워 하는 전사

진정으로 싸워야 하는 대상은 이러한 파리가 아니라, 파리를 만드는 서식지다.


 

사회적 규율을 두고 반감을 가지며 폭력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노예들이 하는 행동입니다.

전사들이여, 그러니 사회적 규율에 반항하지 말고, 부조리를 개선하려는 명령에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행동은 가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이 뛰어난 전사라면, 올바른 인식을 할 수 있는 탐구자가 아니라면,

여러분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탐구자의 지시에 따르는 게 오히려 편합니다*.

올바른 게 무엇인지 파악할 능력이 낮으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것, <부조리를 없애고 이상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명령하게 하십시오.

*차라투스트라는 스스로의 기준에 따라서 행동하라고 하지만, 여기서는 명령에 따르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 모순을 느낄 수 있는데, 명령에 따르라고 할 때에는 올바름을 판단하기 힘들다면 올바른 것의 명령에 따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스스로 판단하라고 할 때에는 부조리한 것의 명령에 따르지 말라는 이야기를 한 것이라서 사실 모순되지는 않는다.

이에 대한 이유는 2권 12장에서 언급된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부조리를 없애고, 이상 사회를 이룩하려 하는 것>,

이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이자,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희망입니다.

이 희망이 여러분이 제일 우선으로 삼는 목표가 되기를!

 

올바른 인식을 할 수 있는 탐구자인 제가 여러분에게 명령하겠습니다.

제 명령은 이렇습니다.

“사람의 정신은 부조리한 사회적 규율과 본성에 물들어 있다.

우리는 이 정신의 부조리를 극복하고 성숙한 존재로 나아가야 한다”

 

이 생각에 복종하고, 이 생각을 위해 싸우는 삶을 살길 바랍니다.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면, 오래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회의 부조리를 느끼는 사람 중에, 부조리 속에서 인정받고 살길 바라는 이가 누가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부조리한 사회에서 순응하며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부조리와 싸우고 있는 여러분들을 온전히 사랑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전사들을 지휘하는 차라투스트라

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를 위해서, 부조리와 싸우는 전사들에게 지침을 내리고 있다.


생각해볼 거리들

 

차라투스트라는 전사들을 놓고 어떤 진실을 말하려 하는가?
- 실질적으로 전사들에게 진실을 말한다기 보다는, 전사들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지침을 주는 듯한 내용으로 구성이 된다.

- 따라서 진실 보다는 조언을 한다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하다 느껴진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형제들에게 친구이자 적인가?
- 사회의 부조리라는 같은 적을 두기에 친구이자 동료이고, 서로를 성장시키려고 하는 경쟁자이기에 적으로 불리는 듯 하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증오와 질투를 모를 정도로 위대하지 않다고 했는가?
- 위대하다면 증오와 질투를 모른다는 것인데, 이는 사회적으로 말하는 성숙한 모습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성숙한 모습을 취하고 이지 않다는 것을 말하므로, 사회적으로 순응하지 않은 상태의 사람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어떤 것에 대해 증오와 질투를 가지게 되는가?
- 부조리함에 대한 증오와 부조리로 득을 보는 사람에 대한 질투를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증오와 질투를 부끄러워 하지 않을 정도로 위대해지라는 것은 사회적이게 되라는 것인가? 사회를 벗어나라는 것인가?

- 사회적으로 보면, 증오와 질투는 없애야 맞다.

- 그러나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보면, 증오와 질투를 없애라는 말이 아닌, 증오와 질투는 그대로 두고, 이 둘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라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 따라서 사회적 규율/미덕에 따르지 않은 채로 당당하게 있을 수 있는 정신적 성숙을 이루라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인식의 성자와 인식의 전사는 어떤 차이가 있나?

- 인식의 성자는 올바름을 인식할 수 있는 존재, 탐구적 재능을 지닌 존재로 볼 수 있다.

- 인식의 전사는 올바름을 느낄 순 있어도 구체화할 수 없는 존재, 부조리에 반감을 갖지만, 정확한 분별을 하지 못하는 존재로 볼 수 있다.

- 그렇기에 차라투스트라가 10장의 말미에서 전사들에게 명령을 하게 되는데, 이들이 부조리에 대한 감각은 있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제대로 판별하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병사들이 보임에도 전사들을 보고자 하는가?
-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병사들은 사회적 규율에 순응하는 자들이다.

- 그들 중에서도 분명 사회적 규율의 부조리를 느끼고, 반감을 가진 이들이 있을 것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자들이 전사라고 보고 있다.

- 그리고 사회적 부조리를 개선하는 데에 힘을 싣기 위해서는 이런 자들이 많아야 하기에, 많은 전사들을 보고자 한다고 할 수 있다.

 

병사들의 유니폼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 유니폼은 사회적 규율을 말한다.

- 사회적 규율에 몸을 감쌌기에, 우리는 겉으로 볼 때, 이들이 사회적 규율에 순응하는 존재로 생각할 수 있다.

- 겉이 그러하더라도, 내부는 다를 수 있기에, 차라투스트라는 내부는 다르기를 바란다.

- 그리고 겉과 속이 다르다면, 그는 차라투스트라가 바라는 전사가 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전사들은 왜 자신의 눈으로 적을 찾아야 하나?
- 전사들은 사회의 부조리를 느끼는 자다.

- 사회의 부조리를 느끼지 못한다면, 부조리를 두고서 맞서지 못한다.

- 따라서 전사의 기본 조건은 사회의 부조리를 느끼는 것이 된다.

 

왜 전사들은 사상이 굴복하더라도, 정직성은 승리를 외쳐야 하는가?

- 사회의 부조리를 지적하고 문제시 한 결과가 부조리를 척결하는 게 아닐 수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조리를 문제시 한 사람은 정직함을 지켜냈기에, 승리라고 외칠 수 있다.

 

왜 전사들은 긴 평화가 아닌 짧은 평화를 사랑해야 하나?

- 사회에 존재해야만 사회의 부조리를 경험하고 다툴 수 있다.

- 그러므로 사회에서 사람들과 융화되어 살아야 하는데, 평화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면 배척당하게 될 것이다.

- 따라서 사회의 부조리를 느끼더라도, 사회에서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

- 하지만 이 어울림은 그들의 부조리를 눈감아주기 위한 게 아닌, 그들의 부조리가 드러나지 않음에 따른 어울림이다.

- 따라서 곧 부조리가 나타나면 다툴 수 있어야 하는데, 이를 짧은 평화라고 지칭한 것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전사들에게 노동보다 싸움을 권하나?

- 노동은 반복되는 일이자, 순응하는 일에 해당이 된다.

- 따라서 "사회에 순응하지 말고 부조리에 맞서 다퉈라" 라고 말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평화가 아닌 승리를 권하나?
-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사람들과의 화평을 말한다.

- 승리는 부조리에 굴하지 않은 정직성을 말한다.

- 따라서 화평하는 것보다 정직하기를 권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전사들의 노동이 싸움이고, 평화가 승리라 말한 이유는?

- 노동은 반복하는 일을 말하는데, 전사들은 부조리와 다투는 걸 반복하길 차라투스트라가 바란다고 할 수 있다.

- 평화의 경우, 내면의 평화라고 생각되어진다.

- 왜냐면 앞서 언급되는 승리는 "정직성"의 승리를 말하기 때문이다.

 

활과 화살 이야기는 왜 나올까?

- 활과 화살은 무장한 상태를 말하는 듯 하다.

- 이런 점에서 다툴 태세를 갖추는 것은 사회적 규율의 접근을 막으며 내면의 평화를 가져다 준다는 뉘앙스로 보인다.

 

전쟁의 명분 이야기는 왜 나올까?
- 여기서 말하는 전쟁은 부조리와의 전쟁이다.

- 그리고 부조리와 다툼에 있어서 명분이 있어야 다투지 않냐고 논하기에 나오는 부분 같다.

- 즉 나와 관련이 있거나 막대한 피해를 주거나 해야 부조리를 두고 싸울만 하지 않냐는 입장에 대한 답변인 것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와 관련해서, 부조리와 싸우는 것은 명분이 없어도 훌륭하므로, 명분없이 다툴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고 보인다.

 

- 하지만 부조리와 싸운다는 명분 하에서 부조리와 다투는 것이기에, 좋은 명분이 좋은 다툼으로 나아간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훌륭한 전쟁이 모든 명분을 신성하게 한다는 니체의 말은 약간의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

 

부조리와 맞서는 전사는 왜 무정해지는가?

- 대체로의 부조리는 봐주는 일에서 생긴다.- 봐주는 일은 이성적으로만 판단하지 않고, 상대의 사정이나 이득을 고려하면서 나타난다.

- 이것은 상대의 감정적 부분을 고려하는 것인데, 부조리를 막으려는 이들은 이런 부분을 막는다.

- 따라서 감정적으로 대응해주지 않는 상황이 생겨 무정하다고 보일 수 있다.

 

- 또한 전사들은 부조리와 맞서는 자들이기에, 감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수치가 된다.

- 왜냐면 감정적으로 판단하여 대응해주는 것은 부조리를 허용해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 이런 점에서 사람들과 대비를 이루는데, 사람들은 자신이 너무 이성적으로 사람을 대하면 문제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전사들은 왜 오만해지게 되는가?

- 사람들의 부조리를 지적하게 되다 보면, 사람들이 열등하다고 느낄 수 있다.

- 그렇게 되면, 선민의식을 가지게 되고, 이에 따라서 오만해지게 되는 것이다.

- 따라서 부조리를 비판하는 사람은 선민의식을 갖지 않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전사들과 나약한 자들은 왜  서로 일치하나?

- 그리고 오만해지게 되면, 결국 자기애에 빠진 상태와 같아지는데, 이렇게 되면, 나약한 자들이 자기애에 빠졌든, 부조리에 맞서는 자가 자기애에 빠졌든 결과는 동일해진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서로 입장이 다르다고 봐서 다른 존재라 여기지만, 결국 자기애가 가득한 존재들에 불과하다.

 

왜 증오할 적을 지니고 경멸할 적을 지녀선 안되나?

- 경멸할 적은 사회의 부조리에 따르는 사람들을 말하고, 증오할 적은 사람들을 그렇게 만든 시스템을 말한다.

- 나중에 시장의 파리떼 장에서 나오겠지만, 이들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원천되는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

- 그러므로 경멸스러운 적만 마주하고 있는 것은 시간낭비이고,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전사들은 왜 복종해야 하는가?

- 전사들은 올바른 인식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 따라서 올바른 인식을 할 수 있는 자를 도울 수는 있지만, 자신의 판단에 따라 무언갈 한다고 할 때 문제를 일으킬 여지도 많다.

- 따라서 사회 부조리 개선의 문제를 두고, 올바른 인식을 하는 사람의 요청에 따라 행동하는 편이 문제 개선에 있어서 더 효과적이게 된다.

- 따라서 올바른 인식자를 따르는 게 가장 낫다고 보는 것이다.

 

- 사회의 부조리와 맞서는 전사들은 사회적 규율에 복종하지 않는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 그런 점에서, 일반적인 해석에 따르면, 전사는 낙타에서 사자로 변모한 존재다.

- 그런데 애매한 것이, 앞서 1권 1장에서 낙타가 사자로 변모할 때, 복종을 벗어난다는 뉘앙스로 보이는데, 여기서는 오히려 복종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 전사는 사회 부조리를 느껴 낙타가 사자로 바뀐 존재인데도 말이다.

- 이런 점으로 볼 때, 낙타에서 사자로의 전환은 복종을 하지 않는다 라기 보다는, 복종할 대상을 바꾼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 즉, 전사들은 사회적 규율에 대한 복종에서, 다른 것에 대한 복종으로 바뀐다고 할 수 있다.

- 그리고 이 전사들이 복종하는 것은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성숙한 개인/위버멘쉬가 되려는 규율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