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1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1권 9장 의역 (완2) (죽음의 설교자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4. 25. 21:58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Claude 3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9장 죽음의 설교자들


 

9장 개괄

 
 
9장은 현사회를 두고 좌절한 존재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이다.
 
이 장에 나타나는 인물들은 염세적이고 허무함을 느낀다.
왜냐면 사회의 부조리가 너무 팽배해 있는데, 그것을 개선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세를 벗어난 내세의 삶을 추구하기도 하고, 현세의 고통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 반출생주의를 외치기도 한다.
 
니체는 이러한 자들은 설득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그들을 설득하여 개선을 시켜도, 기존의 생각에 따른 관성으로 세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리라 생각하는 듯 하다.
따라서 니체는 이러한 자들이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사회에서 사라지기를 바라게 된다.
 


 

본문

 
세상에는 별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여 사는 것보단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설교하는 사람들*과
이러한 설교를 들어 마땅한 사람들**이 있죠.

*염세주의자와 허무주의자를 말한다.
이들은 삶에 절망하여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고 다니기도 한다.
**미약하게 나마 삶의 공허함을 느끼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 사람들은 삶이 무의미하다고 여겨서 열심히 노력하며 사는 것에 열의를 갖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부조리한 행위도 서슴없이 저지르곤 합니다.
이로써 우리의 삶은 부조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삶에 대해 절망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저는 그들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다는 그들의 생각에 따라,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죽음의 설교자와 추종자들
죽음의 설교자는 삶보다는 죽음이 더 인간에게 이롭다고 말한다.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유대교인이나 기독교인 같은 종교인 입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모습이 있으니, 그들의 다양한 모습에 대해 이야기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본성과 욕구에 충실하게 행동하여, 본인의 정신과 육신을 피폐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욕구에 따라 방종하며 살거나, 자신들의 만족을 위해서 사람들에게 궤변이나 부조리를 일삼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이지만, 제가 보기엔 자신을 파괴하고 있는 중이라고 보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 자신의 본성에 따라 살라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자신의 본성과 욕구에 따라 살면서 피폐해진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서 차라투스트라의 입장은 모순되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다.

하지만 의미가 다른데,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본성을 따르라고 한 것은 가치를 판단하고 분별할 때, 자신의 본성적 반응을 두고서 판단하고 분별하며, 늘 무엇이 더 올바른 것인지 고민하라는 이야기다.

여기서 언급되는 본성과 욕구에 충실한 것의 경우, 자신의 본성적 반응에는 충실하지만, 무엇이 더 올바른 것인지 고민하지 않는 경우다.

따라서 본성에 따르는 것은 같지만, 올바름을 고민하며 본성에 따라 사는 경우와 생각없이 본성에 따라 사는 경우로 구분되고 있다.

 
이 사람들은 본성에 충실해짐으로써,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성숙한 인간이 되지 못하여 무질서함과 방종 속에 자리하고 있었죠*.

*1권 1장에서 언급되는 사자의 상태가 된다고 해서 모두 이상적인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미숙한 자들은 사람들에게 삶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며 죽는 것이 최고라고 말하곤 하던데,
저는 그런 말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고, 그들 스스로가 그 말에 따랐으면 합니다.
하지만 제 바람과 달리 그들은 전혀 그러질 않고 있죠.
 
사람들 중에는 성향 자체가 부정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역시 비관적으로 바라보곤 합니다.
그들 또한 사는 것에 무의미함을 느끼며, "살기 싫다. 죽고 싶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를 허용해주어야 할 겁니다.
 
우리는 죽고 싶다고 말하는 이들을 자극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살고 싶어하지 않는 자들은 아쉬울 게 없어서
우리가 그들을 자극한다면, 우리를 죽음의 동반자로 삼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병이 든 자나 노인, 죽은 자를 보면서 자신들이 옳다고 말합니다.
   “이들을 보라.
     결국 인간은 결국 고통 속에서 죽지 않는가?

      누구나 이러한 고통 속에 끝을 맞이하지 않는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이 고통 속에서 죽을 텐데, 열심히 사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아! 삶은 무의미하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오히려 더 낫다!”
 
하지만 병이 든 자나 노인, 죽은 자를 보면, 실제론 그들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면 병이 든 자나 노인, 죽은 자들은 죽음이 가까이 있는 순간에서도 좀 더 건강히 살 수 있다면, 그러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정말 삶이 의미가 없었다면, 병 들고 늙고 죽은 자에게 죽음이 더 기꺼운 것이었다면, 그들은 어째서 살길 바라겠습니까?

죽음을 긍정하는 자들은 우울한 모습으로, 죽음이 자신에게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꾸역꾸역 하루를 살아냅니다.
 
아니면 삶의 순간순간의 유의미함과 유희를 즐기려 하는데,
이들은 이런 자신들의 모습을 두고 참 부질없는 노력이라며 비웃습니다*.
어떻게든 꾸역꾸역 살아가는 자신을 비웃는 것이죠.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을 말한다.

이로써 스스로에 대하여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문제는 어떤 개선도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저들은 말합니다.
   “살아 있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있으니, 바보다.
    살아 있는 게 바보라는 걸 알면서도 살아가고 있는 것,
    이게 제일 바보 같은 짓이다.”
 

사신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염세주의자
이들은 삶의 무의미를 주장하면서도, 막상 죽음을 앞에 두지 않으려 한다.


 

 
삶의 무의미함을 느끼는 사람들 중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살아 있는 건 고통일 뿐이다.”
 
물론 이것은 거짓이 아닙니다.
그러나 정말 삶에 대해서 이렇게만 생각한다면,

그리고 이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양심적인 자라면,
그들은 스스로 깨달은 대로 고통 뿐인 세상을 벗어나려고 그래서 죽음으로 나아가려고 해야 할 겁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겁니다.
   “우리는 삶을 포기해야 한다, 우리는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는 삶은 고통 뿐이라고 말하면서 죽지 않는 모순을 지적한다.

즉 이들은 입으로만 삶을 부정적으로 인식할 뿐, 실제로 열심히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귀류법에 따라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중 누군가는 또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성욕을 쫓아 사는 건 죄다.
    성욕에 따라 살면 아이를 낳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러니 성욕도 버리고 아이도 낳지 말라.
 
    출산은 힘든 일이다.
    왜 출산을 하려고 하는가?
    왜 아이들을 낳아 이 고통의 굴레 속으로 떠미는가?”
 
또 그들 중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고통뿐인 세상에서 우리는 서로를 동정해야 한다.
    서로가 주는 고통을 받아들이고 서로를 동정하자.
    우리가 서로에게 주는 삶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체념한다면,
    고통으로부터 우리는 그나마 좀 덜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말처럼 고통 뿐인 세상 속에서 서로를 동정하며
그래서 서로가 주는 고통에 대해서 받아들이고 체념한다면,
우리는 이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서로를 동정하더라도, 우리가 겪는 이기적이며 부조리한 행동들은 여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고통을 주는 이기적인 행동은 개선하면 해결되는 쉬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실제론 쉽지 않습니다.
왜냐면 이기적인 행동은 이들에게 편리와 쾌락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기적인 행동을 개선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저들에게는 그리 좋지 못한 것이 되고,
그래서 지금 상황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우습지 않습니까?
죽음을 긍정하는 사람들은 삶을 벗어나길 그렇게 바라면서 왜 그렇게 이기적으로 굴고 있는 것일까요?

그들이 그토록 부질없다고 하는 현생에서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 아득바득하는 것일까요?
 

삶의 무의미를 느끼는 피폐한 개인의 이미지
실제로 이런 모습은 아니겠지만, 차라투스트라의 눈에는 이렇게 비춰지지는 않았을까?


 
삶이라는 것이 반복되는 노동과 불안 뿐이라고 말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삶에 몹시 지치지 않았습니까?
삶의 무의미함, 죽음에 대해 긍정하는 설교에 혹하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단순한 것과 자극적인 것에 끌리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단순한 것과 자극적인 것을 쫓는 이유는 괴로움을 마주하기 보다는 괴로움을 잊기 위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
 
여러분은 복잡하고 정적인 것, 즉 스스로 사색하고 탐구하여 복잡해지는 것을 싫어 합니다.
그렇다 보니 여러분은 단순한 것을 반복하거나 자극적인 것 속에서 만족을 얻으려고 하고,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사색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렇게 사색을 요구하는 문제들로부터 도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삶을 무의미하다 여기지 않았더라면,
살면서 무엇을 긍정하고 노력해야 할지 알고 행동했더라면,
이처럼 순간순간의 만족을 위해서 사는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쉽게도 여러분은 아직 삶의 긍정적인 면을, 삶의 희망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삶의 긍정적인 면을 찾기 위해서 시간을 쓰자니, 그것도 쉽지 않습니다.
당장의 먹고 사는 문제가 우리를 곤란하게 하니 말이죠.
그리하여 삶에 대해 단편적으로 판단하고 살아가게 되는데, 그 결과가 현재 여러분의 모습이겠죠.
 
삶의 무의미, 삶은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자들의 목소리는 어디서나 울려 퍼지고 있고,
이에 동감할 사람들 또는 사후세계가 더 의미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가득해 보입니다.
 
상황이 어떻든, 저는 좋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라는 세계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 준다면 말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의 영역으로 이주하는 사람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라도 해서 생의 의지가 가득한 존재들의 세계를 마주하고 싶었던 것 같다.


생각해볼 거리들

 
죽음을 설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 죽음이 삶보다 더 낫다는 것을 설교하는 것을 말한다.
- 이러한 입장은 삶의 무의미함/삶의 덧없음/삶은 고통이라는 점을 주장하게 된다.
 
잉여인간/쓸모없는 사람은 어떤 인간들인가?
- 잉여인간이란 표현은 이 세계에 없어도 되는 존재로 칭해진다.
- 그들은 삶의 무의미함/덧없음을 느끼게 하는데 일조하는 존재들이다.
- 따라서 비이성적이거나 부조리한 행위를 하는 등의 악덕과 관련된 존재들을 지칭한다.
 
차라투스트라는 노란 사람/검은 사람의 다른 빛을 보여준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인가?
-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해석을 유의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 우선 노란 사람은 유대교인을 말하고, 검은 사람은 기독교인을 말한다.
- 이들이 죽음의 설교자라고 언급되는 이유는 그들이 죽음 이후의 내세에 대해서 설교하기 때문이다.
- 하지만 현세의 삶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언급하는 이들은 이들 말고도 더 있다.
-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노란 사람/검은 사람의 다른 면을 보여준다기 보다는, 현세의 삶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다른 유형의 사람들을 설명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내면에 맹수를 두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 이 사람은 1권 1장에서 언급된 사자를 품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 이를 통해서 사회적 규율에 대해서 자유롭게 지내는 존재를 상정할 수 있다.
- 그리고 이러한 존재가 방종하는 것에 대해서 1권 8장에서 언급된다.
-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뻔뻔하고, 사회적 규율에 있는 타인을 조롱하는 것을 즐기는 식으로 정신적/육체적 향락을 즐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향락주의가 결국 자기 자신을 파괴한다고 말한다.
 
왜 이 끔찍한 자들은 아직 인간이 되지 못했다고 하는가?
- 이 끔찍한 자들은 내면에 맹수를 둔 사람들이다.
- 1권 8장을 보면, 사회적 규율에 반기를 들어 자유를 획득했지만, 삶의 방향성을 잃으면서 또는 향락주의에 빠지면서 성숙해지려는 의지를 잃게 된다.
-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인 이상 성숙해지려는 의지에 따라 살며 위버멘쉬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여기서 언급되는 끔찍한 사람들은 성숙하려는 의지 없이 자유를 맛보고 있으므로, 위버멘쉬에 이르지 못한 존재들을 말한다.
- 위버멘쉬는 초인이지만, 인간다운 인간을 말하기 때문에, 인간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한다.
 
병자/노인/송장에 대한 죽음의 설교자들의 반응과 그에 대한 비판은 어떤 이유로 나타나는가?
- 병자/노인/송장은 인간 삶의 덧없음을 나타내는 존재들이라고 죽음의 설교자들이 보았던 듯 하다.
- 결국 인간은 무얼 해도 고통 속에 죽게 되기 때문이다.
-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이 어떻게서든 더 살려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죽음의 설교자들의 말이 틀렸다고 한다.
- 즉, 고통 뿐인 세상인데도 왜 병자는 건강해서 더 잘 살려고 하며, 노인도 젊음을 바라고, 저 시체도 더 살길 바랬었느냐는 것이다.
 
동정심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은 왜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 자신 그대로를 받아들이라고 하는가?
-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성숙해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 그러면서 서로를 괴롭게하는 부조리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러한 부조리, 고통을 개선하려 하지 말고 원래 그런 거라면서 수용하라는 것이다.
- 고통을 피하려고 하면서 더 괴롭게 느껴지므로, 수용하라는 것이다.
- 하지만 이는 결국 고통 속에 있는 것은 그대로이므로, 전혀 개선책이 되지 못하게 된다.
 
삶이 고단한 노동이자 불안함이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 삶이 단순한 반복이자, 불안의 연속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 이에 따르면 삶이라는 것은 기피할 만한 것이 된다.
 
고달픈 노동을 좋아하고 빠르고 새롭고 낯선 것을 좋아하는 것은 왜 자신을 견디지 못하나?
- 노동은 반복되는 것을 말하고, 빠르고 새롭고 낯선 것은 시선을 끄는 자극적인 것을 말한다.
- 이렇게 시간을 보내게 되면, 개인은 자기 내면의 문제나 사색할 거리들을 전혀 살피지 못하게 된다.
- 그러면 이 개인은 자기를 돌보지 않은 상태가 되는데, 자신을 전혀 살필 능력이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그래서 자신을 견디지 못한다/감당하지 못한다고 표현한다.
 
사람들이 삶을 더 신봉한다면, 왜 사람들이 순간순간의 만족 속으로 자신을 맡기지 않을 거라고 하는가?
- 삶을 신봉한다는 것은 삶이 의미있다고 하는 것이다.
- 이는 죽음을 신봉하는 것과의 반대이기에 그러하다.
- 삶이 노력할 의미가 있다면, 그들은 삶의 노력을 하루하루 쌓아가려 할 것이다.
- 하지만 새롭고 빠르고 낯선 것에만 쏠려 살아가게 되면, 즉흥적 재미를 위한 활동들이기에 남는 것이 순간의 만족 말고는 없다.
- 그래서 생존의 의미, 삶의 목표를 갖는 것이 필요한데, 그러기에는 과연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 그런 면에서 너무 자신을 방임하는 느낌이 들게 되고, 따라서 삶의 의미를 더 찾기보다 삶의 만족을 쫓는 상황으로 이어지게 된다.
-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게을러서 자신을 방치한 느낌이라면, 삶의 만족을 찾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모양새로 나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