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1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1권 8장 의역 (완2) (산 속 나무에서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4. 24. 15:42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Claude 3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8장 산 속 나무에서


 

8장 개괄

 
 
8장은 사회적 규율을 벗어났다가 실패한 경우들을 말한다.
 
5장에서도 한번 언급이 되었었는데, 니체는 1장에서 사자의 모습으로 사회적 규율에 저항하는 것만을 두고서 바람직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저항하면서도, 자기 검열을 통해서 사회적 규율이 작용하지 않아도 성숙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8장에서 나오는 인물은 사회적 규율에 한계를 느끼고, 비판적 시선을 가진 청년이다.
그러나 그렇게 비판적 시선을 가지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다 보니, 결국 어떻게서든 비판적인 시선을 제공하려는 경향을 갖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궤변을 일삼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만난 차라투스트라는 비판적 시선을 가지면서도 궤변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니, 이 청년은 차라투스트라를 보면서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청년을 위로하며 조언을 한다.그러나, 그가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면서 자유로움에 빠져든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다.그러면서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 자유롭기만을 바라면 문제가 된다며, 올바른 인식을 가지려는 의지, 성숙한 존재가 되려는 의지를 버리지 말고 지속하길 권하게 된다.
 


 

본문

 
 
차라투스트라는 어느 저녁 <다채로운 암소*>라는 마을 주변의 산을 거닐었다.
그러던 중 마을에서 자신을 자주 피하던 청년이 나무에 기대어 지친 눈으로 골짜기를 바라보는 것을 발견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청년에게 다가가, 그가 기댄 나무에 손을 대고 말했다.
   “저는 이 나무를 손으로 흔들려고 해도 흔들 수 없지만,
    바람은 이 나무를 원하는 대로 흔들 수 있죠.

*1권 1장의 각주 참고

 
    우리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우리도 타인에 의해서는 전혀 흔들리지 않지만,
    우리의 보이지 않는 본성에 의해서는 이리저리 흔들리니 말입니다.”
 
갑작스러운 차라투스트라의 말에 놀란 듯, 청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저는 당신이 전에 하던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방금 당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제가 나타난 게 그렇게 놀랄 일이었나요?
 
    사람은 나무와 같습니다.
    나무가 성장하려면 그 뿌리가 어두운 땅 속 깊숙이 뻗어져야 하듯이,
    인간도 성장하려면 그 인간 이해의 뿌리가 인간 본성 깊숙이 뻗어져야 합니다.
 
청년이 외쳤다.
   “맞습니다. 본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어떻게 제 영혼의 상태를 아시는 겁니까?”
 
차라투스트라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가늠조차 하지 못합니다.
    지금 당신이 겪은 일은 저도 경험해봐서 아는 일이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청년과 만난 차라투스트라.
차라투스트라는 지쳐 있는 청년에게 자신의 본성을 이해하라고 조언한다.


 
청년이 다시 외쳤다.
   “당신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제가 더 성장하기 위해서 제 본성에 대해 살피고 인정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현명한 존재, 명망 있는 존재가 되려고 노력해왔습니다만,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올바른 것을 말하려 노력하지 않고 궤변과 우기기를 일삼다 보니
    아무도 저를 믿지 않으며, 저조차도 이젠 제 자신을 믿지 못합니다.
 
    사람들과 논쟁할 때면, 저는 일관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어제는 이것을 주장했다가 오늘은 그 반대를 주장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면서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 주장을 부정합니다.
 
    또 저는 탐구하는 과정에서 안다고 여겨지는 것들이라면 꼼꼼히 살피지 않고 넘어가 버립니다.
    의문이 생겨도 말입니다.
    그렇게 넘어간 채로 사람들과 논쟁하다가 이처럼 살피지 않은 것들로 인하여 낭패를 보곤 합니다.
 
    그래도 꾸역꾸역 사람들과의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내 말이 옳다고 우겨대면, 논쟁에서 끝내 승리하지만, 결국 혼자가 되어 버립니다.
    아무도 나와 말하려 하지 않는 겁니다.
 
    이렇게 되니 저는 외롭습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이 저를 힘들게 합니다.
 
    저는 현명한 자가 되고 싶습니다.
    논쟁에서 이겨야 저의 현명함이 증명되겠죠.
이를 위해 노력하는 제 모습이 경멸스럽습니다.
 
    왜냐구요?
    이야기했던 것처럼, 현명한 존재이고 싶은 마음에, 대화 속에서 두드러지고 싶은 마음에, 여기선 이랬다 하고 저기선 저랬다 하는 모순적 모습을 보이니까요.
    엄밀하게 사안을 살피지 않고 대충 살피면서,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모면하니까요.
 
    도대체 저는 무엇 때문에 현명한 자가 되려고 하는 것일까요?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임기응변하고 일관성 없는 제 모습을 보면, 부끄럽습니다.
    현명한 존재인 척 하려고 온갖 억지를 부리는 모습이 얼마나 우습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현명한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미운지 아십니까?
    나는 이렇게 억지스럽게 노력해야 현명한 존재인 척이나 할 수 있는데, 그들은 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현명하지 않습니까?”
 
 

현명한 존재가 되고 싶은 청년의 노력.
하지만 그의 비일관되고 주먹구구식의 주장은
그가 '현명한 존재'라고 인식되기 보다는 '궤변을 하는 존재'로 인식되게 하고,
사람들이 그를 기피하게 만든다.


 
청년이 입을 다물자, 차라투스트라는 주변의 나무들을 바라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현명해지기 위해서 홀로 서있었습니다.
    대중적이지 않기 위해서, 동물같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고, 그래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대중들에게 말을 하려고 한다면, 대중들 중에는 이 존재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이미 대중적 수준을 넘어섰으니까요.

*이 청년은 사회적 규율의 문제나 모순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선을 갖추어 보았고, 이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받은 적이 있다.
문제는 이 청년이 인정받은 것이 순간적인 예리한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란 점이다.
청년이 늘 사색하고 탐구하여 인정을 받은 것이라면, 궤변이나 우기기를 통해서 존재 증명을 하지 않았을 것인데, 현재 모습으로는 전혀 그러지 못한다.
하지만 사회적 가치과 규율의 모순을 발견했다는 것은 분명 대중적 관점을 초월한 것이기에, 차라투스트라는 청년이 사색하며 탐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실한 존재로 오판하고, 그의 노력의 가치를 인정해준다.

 
    사회적 가치와 규율을 벗어난 당신은 무얼 기다리고 있을까요?
    사회적 가치와 규율에서 벗어났지만, 한계*를 느낀 당신은 그 한계를 넘어서게 해줄 깨달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청년은 현재 사회적 규율과 가치를 벗어났지만, 그가 사회적 규율과 가치를 벗어난 것은 올바름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현명한 존재로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함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서 이 청년은 어떤 식으로든 논쟁에서 이기면 된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고 있다.
문제는 청년 스스로 이런 식으로 살아서는 현명해지지 못하며 자신이 바라는 현자의 모습에 다가설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점이 청년에게 한계로 다가온다.
 

차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하자, 청년은 격한 몸짓을 보이며 외쳤습니다.
   “맞습니다! 차라투스트라, 당신은 정확히 꿰뚫고 있습니다.
    제가 현명한 존재이고자 맘먹게 되었을 때, 저는 지금의 제 모습을 경멸했고, 그래서 지금 모습에서 벗어나길 바랐습니다.
    당신이 저를 이 모습에서 벗어나게 해줄 존재*라 생각합니다.

*청년은 자신의 모습이 현명한 자의 모습과 다르다고 인식한다.
그러다 차라투스트라가 나타났고, 궤변을 일삼는 자신과 차원이 다른 현명함을 느끼게 된다.
이에 청년은 자신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차라투스트라에게 지도를 받고 싶어하는 상태다.

 
    당신이 마을에 나타난 이후 저는 당신에 대한 질투에 사로잡혀 버렸습니다.
    하지만 제 능력의 한계를 파악했고, 그래서 당신에 대한 반감과 질투심에 저는 점점 더 기괴한 모습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청년은 이렇게 말하고 비통하게 울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를 감싸고서 길을 나서기 시작했다.
 

청년을 달래주는 차라투스트라.
청년은 자신의 임기응변적이면서도 미성숙한 모습을 부정할 수 없었기에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얼마간 그렇게 걷더니,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당신의 모습을 보니, 제 마음이 찢어집니다.
    당신의 말보다는 당신의 눈에서 당신의 본성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차라투스트라가 이렇게 판단한 근거는 글 자체에서는 파악하기 어렵다.
니체 스스로가 청년을 궤변과 부조리를 일삼는 존재로서 상정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신은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지만,
    사회적 규율을 벗어난 후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추구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당신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 방황이 당신을 초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현명해지려고 노력해도 모자른 시간인데, 이렇게 방황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당신은 현명한 존재, 성숙한 존재가 되길 바랍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눈과 행동을 보면, 그와 동시에 쾌락도 누리고 싶어 하는 걸로 보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 모순을 발견했을 때,
    당신의 쾌락에 대한 욕구*는 설레고 들떴던 것입니다.

*청년은 사회적 규율과 가치의 모순을 발견하면서 자신의 존재가 통찰력 있다고, 남들보다 혜안을 지녔다고 인식하게 되어, 기쁨과 뿌듯함을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제가 보기에,
    당신은 성숙한 존재가 되고 싶어하지만, 여전히 어리숙함*에 갇혀 있는 듯합니다.
    당신은 성숙함을 바라여 대중들보다 영리하지만, 쾌락에 대한 욕구 때문에 교활하고 저열해진 겁니다.

*청년은 사회적 규율과 가치를 벗어났지만, 현명한 자가 누리는 혜택 때문에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현명한 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이 점을 차라투스트라는 어리숙함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사회적 가치와 규율을 벗어났다는 것이 성숙함의 징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회적 규율을 벗어났다고, 자신의 욕구를 자유롭게 해선 안 됩니다.
    당신은 사회적 규율의 영역에 있을 때보다 더 성숙해지지려고 사회적 규율을 벗어난 게 아닙니까?
    이를 위해서 당신의 내면을 정돈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당신의 욕구가 방종하게 해선 안 됩니다.
    그것은 당신의 성숙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니까요.
 
    제가 보기에, 성숙한 존재이기를 바라는 당신은 쾌락을 바라는 욕구를 다스려서 더 성숙해질지 말지, 고귀한 존재*로 거듭날지 말지의 기로에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간절히 청하니, 성숙함/고귀함에 대한 사랑과 희망을 버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고귀한 존재는 올바름을 추구하고, 사회적 규율과 가치를 벗어난 존재를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도 이 유형에 속한다.

 
    당신은 사회적 규율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당신이 사회적 규율에 벗어나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는 성숙해질 수 있는 조건 중 하나를 획득한 상태와 같습니다.
    성숙해질 조건을 갖춘 고귀한 존재인 것이죠.
 
    사회적 가치와 규율을 벗어난 고귀한 존재는
    사회적인 존재들, 사회의 선한 자*들과 대립하며, 그들의 길을 막습니다.
    그래서 고귀한 존재들이 사회의 선한 자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더라도,
    사회의 선한 자들은 언제든 기회가 오면 고귀한 존재를 비판하고 제거하려고 노력합니다.

*사회적 규율을 잘 따르는 존재들로, 사회적으로 선하다고 평가받는다.

 

사회의 선한 자는 기존의 덕과 관습을 원하며, 그것이 오랫동안 유지되기를 바라지만,
    고귀한 존재는 기존의 덕과 관습의 병폐를 알아, 올바른 덕과 관습을 새로 창조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규율에서 자유로워진  청년
보다 성숙해지는 길로 나아갈 것인가?
자유를 얻었으니 쾌락을 즐기는 삶으로 나아갈 것인가?


 
    제가 당신에게 염려하는 것은 당신이 퇴화하는 것, 다시 사회적 규율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염려하는 것은 당신이 사회적 규율에 벗어나 자유롭게 쾌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되려 자신의 행동에 대해 뻔뻔하게 행동하고, 어리숙한 사람들을 조롱하며, 성숙해지려는 자신의 의지를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저는 <사회적 규율에서는 벗어났지만, 성숙해지려는 의지를 잃는 경우>를 봐왔습니다.
    지금 그들은 성숙해지는 것 자체를 무의미하게 여기고 비판합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하루하루 순간순간의 쾌락 속에서 뻔뻔하게 살아가며, 어떤 목표도 방향성도 갖지 않은 채 살아갑니다.
 
    그들의 정신은 쾌락을 지향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숭고하던 목표/성숙함이라는 목표'를 잊고 추락하여,
    과연 어떻게 해야 더 쾌락을 느낄 수 있을지만을 생각하며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한때 이들은 성숙한 존재가 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쾌락에 대한 지나친 추구로 인해 실패했고, 지금은 쾌락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누군가가 성숙한 존재로 거듭난다면, 괴로울 것입니다.
그 성숙한 존재는 이들이 실패했다는 것을 확정해주는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성숙한 존재가 나타나길 원치 않습니다*.

*서문 6장에서 나타나는 광대를 설명한다.
줄타기 곡예사가 만약 위버멘쉬로 나아가는데 성공한다면, 광대는 실패자로서 세상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 광대는 줄타기 곡예사를 방해한 것이다.

 
    그러나 제가 당신에게 간청하니,
    성숙해지려는 의지를 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숙해지려는 의지를 지켜 나가시기 바랍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성숙하려는 의지를 버린 사람
그는 성숙하려는 의지를 잊고 쾌락주의에 빠진다.
그래서 그는 올바름보다 쾌락을 위해서 행동한다.


생각해볼 거리들

 
청년은 어떤 존재인가?
- 전체적인 내용상, 청년은 사회적 규율을 벗어난 존재다.
- 그래서 약간의 통찰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 하지만 그의 통찰력은 탐구에서 비롯된 게 아닌 감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 그렇기에 올바른 탐구를 하지 않고, 주먹구구식의 일관되지 못한 주장을 펼친다.
- 그런 면에서 남들에게 현명한 존재로 여겨지고 싶어하지만, 실제론 현명하지 못한 존재로 그려진다.
- 게다가 쾌락주의도 추구한다는 점이 차라투스트라에 의해서 후술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청년에게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가?
- 차라투스트라는 나무를 소통하지 않으면서 성장하는 존재로 보는 듯 하다; 이에 대해서는 1권 12장에서 이야기가 나온다.
- 즉 나무와 같은 인간은 차라투스트라에게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살아가는 모습이라 본 듯 하다.
- 사람들과 소통하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성장을 꾸리는 것을 이상적이라고 본 것인데, 이런 면에서 보면, 서문의 2장에서 성자가 말한 것에 동의한다고 볼 수 있다; "숲 속에 머물거나 차라리 짐승들에게 가라. 그래서  곰 중의 곰, 새 중의 새가 되려 하게"
- 어쨌든 인간의 내적 성숙을 형상화한 것이 나무라고 볼 수 있다.
 
나무를 이리저리 뒤흔들며 굽히기도 하는 바람은 무엇인가?
- 여기서 바람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다.
- 혹자는 관습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현재 나무를 빗대어 청년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으므로, 관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 전체적 내용에서 청년을 좌우하는 것은 쾌락에 대한 욕구, 본성 그자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왜 청년은 차라투스트라를 생각하고 있었나?
- 청년은 자신의 미숙한 모습에 따라 성숙한 모습을 보이는 차라투스트라를 생각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 이를 통해서 삶에 대한 회의와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듯 하다.

인간은 왜 더 성장하려면 악 속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 여기서 악이라는 것은 사회가 규정한 악에 해당되는데, 이는 본성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러므로, 인간이 성장하려면, 본성을 이해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 인간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인간에 대한 통찰이 어렵다는 측면에서 언급한다고 보면 될 듯 하다.
 
청년이 "어떻게 내 영혼을 알아차린 것이냐"고 할 때 차라투스트라가 한 말은 대체 무엇인가?
- 어떤 직역본을 보더라도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들 수 있는 부분이다.
- 직역이나 영어본 독어본 번역을 종합해보면, "발명하거나 고안한 적이 없다면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 이를 치환해 보면, 차라투스트라는 청년의 영혼을 발명하거나 고안한 적이 있기에 이해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왜 사람들은 청년을 믿지 않고, 청년은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었을까?
- 청년은 자신이 현명한 존재가 되길 바라면서, 여러 기행을 벌이게 된다.
- 먼저 순간의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한 입장을 주장하고, 다음날 벌어지는 다른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어제 자신이 한 주장을 버려 버리는 것이다.
- 또한 자기 스스로 제대로 검증하지 않으면서 주먹구구 식으로 사람들의 주장에 반박하고, 자기 주장을 한다.
- 이런 점을 종합해 보면, 어떻게든 자신이 잘 안다는 걸 어필하기 위해서 억지 주장을 하거나 반박한다는 이야기다.
- 그렇다보니 사람들은 청년의 말에 일관성이 없으므로 귀기울이지 않고, 청년 자신도 비일관되며 제대로 탐구하지 않는 모습에 자신에 대한 신뢰가 사라진 것이라 할 수 있다.
 
-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청년은 궤변을 하는 기이한 자가 되기에, 주변에 사람이 없어진다.
- 물론 청년도 처음에는 자신이 어떻게든 상대를 압박했다며, 논쟁에서 이겼다고 생각하지만, 제 스스로의 모습을 비참하게 여기게 된다.
 
계단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 이는 청년이 사색을 할 때의 모습으로 보인다.
- 계단은 절차나 검증 과정이라고 한다면, 청년은 절차나 검증과정을 뛰어넘고 있다는 이야기다.
 
청년은 왜 몰락을 바라는가?
- 청년은 자신의 모습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 이런 점에서 현재 자신의 모습이 무너지고 다시금 성장해 나가길 바란 것으로 보인다.
 
청년을 응원하던 차라투스트라는 왜 청년에게 염려가 된다고 말하는가?
- 차라투스트라는 청년이 사회적 규율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보고서, 자신과 동류라고 여겨 자신의 도움을 기다리는 존재라고 봤다.
- 자신과 동류라고 봤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 이유를 그가 대중들보다 성장하여 통찰력이 있고, 사람들은 그런 통찰력을 수용하지 못하니까 그런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청년이 스스로 말한 자신의 행태를 보면, 차라투스트라가 생각한 것과 다른 모습에 놓인 것을 알 수 있다.
- 즉 청년의 지금까지의 상황이 대중들보다 성장한 상태라기보다는, 현명한 사람이 되면서 얻는 즐거움을 위해서 궤변을 일삼은 상태라는 것이다.
-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그가 오히려 쾌락주의에 젖어들었다고 판단하고, 그가 염려된다고 말하게 된다.
 
왜 청년은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고, 자유를 찾고 있다고 말하나?
- 청년은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기는 했지만, 이제는 쾌락/본능에 구속되어 있다.
- 이는 빈번한 모습이긴 한데, 사회적 규율을 벗어난 존재들은 이제 자신들 본성의 만족을 위해 나아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 이러한 점은 사회적 규율이라는 황금용에 맞서는 사자의 모습이 한 개인에게 주어져도, 그것이 위버멘쉬로 무조건 나아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말한다.
- 또한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의 자유를 찾으라는 말도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 그러므로 1장 세 가지 변화에 대해서 해석할 때,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라고 해석한다면, 니체의 의도를 오해할 수 있다.
- 그렇기에 니체는 "정신이 해방되어도 자기 자신을 정화해야 한다"고 표현한다.
- 쉽게 풀어 보면, "정신이 사회적 규율에서 해방되어도, 억압된 본성이 자신을 지배할 수있으므로, 자기 자신을 정화해야 한다"로 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청년에게 어떤 것에 대한 희망과 사랑을 포기하지 말라고 하는 것인가?
- 차라투스트라는 청년이 성숙함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포기할까봐 염려한다.
- 이에 따라서 성숙함에 대한 희망과 사랑, 위버멘쉬에 대한 희망과 사랑을 버리지 말라는 이야기로 생각해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청년을 고귀하다고 표현하나?
- 고귀하다는 것은 대중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 대중들은 사회적 규율에 따르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 그런 점에서 대중적이지 않은 것은 사회적 규율에 따르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이것이 고귀한 것이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청년이 사회적 규율로 회귀할까봐 염려하지 않는가?
-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이미 사회적 규율의 부조리를 안 존재는 사회적 규율로 다시 가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고 본 듯 하다.
- 그리고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면서 되려 자유를 맞이하면, 그때 방종이 생기는 것을 염려한다.
- 사회적 규율을 벗어난 자에게 방종이 나타나면, 자신의 본능에 따른 행동을 더 잘 합리화하는데 이래서 뻔뻔해질 수 있다.
- 또한 사회적 규율에서 벗어나지 못한 존재를 놀리면서 재미를 얻으려 할 수 있다.
- 그러는 과정에서 대중과 자신을 분리하면서, 자신을 특별하다고 여기고, 그렇게 안주하면서 성숙해지려 노력하지 않는 상황에 이를 수 있다; 이를 파괴자라고 니체는 표현한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점을 염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다시 이야기를 하지만, 사회적 규율을 벗어난다고 해서 모두 위버멘쉬를 말하는 게 아니다.
- 따라서 본성대로 사는 것, 본능대로 행동하는 것은 위버멘쉬에 해당되지 않는다.
 
고귀한 자들은 최고의 희망을 상실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 그 이유는 몇 가지 나열 될 수 있다.
- 하나는 사회의 부조리를 끊어낼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 이로써 성숙해지는 것의 의미가 상실될 수 있다.
- 다른 하나는 쾌락에 대한 집착이다.
- 쾌락을 얻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는 상태에서 자유로이 쾌락을 추구할 수 있다면, 굳이 성숙해질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 따라서 애초에 성숙함에 대한 강박이 있는 존재만이 위버멘쉬가 될 수 있다.
 
"정신은 쾌락이다"라고 불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 성숙을 포기한 자들은 이제 쾌락을 정신의 핵심 목표로 삼기 때문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