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1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1권 6장 의역 (완2) (창백한 범죄자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4. 22. 15:15

ㅡ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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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6장 창백한 범죄자


 

6장 개괄

 

6장은 사회적 규율에 저항하다 낙오한 범죄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우선 니체는 범죄자가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 본성에 따른 존재이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판관이나 대중들과 사회적 규율에 의해 억압을 받는다는 점에서 다르지는 않다고 한다.

이에 대한 근거로 우리도 종종 범죄자처럼 생각할 때가 있다는 것을 예로 든다.

 

이렇게 범죄자와 대중들을 같은 선상에 놓은 니체는 범죄자와 일반인을 가르는 기준이 좀 더 좋은 환경이었다는 점을 가늠하게 한다.

일반인들도 좋은 환경에 놓이지 않았다면,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니체는 그저 범죄자는 환경이 좋지 않아서, 사회적 규율의 억압 속에서 버틸 수 없었고, 그에 따라서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에 따라서 사회적 규율이 모든 범죄의 시작이므로, 이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자신이 도와줄테니 스스로 성숙한 존재가 되려 노력하라고 말한다.


 

본문

 


타인을 재판하는 재판관이자, 사회적 규율과 가치를 위해 범죄인들을 제물로 바치는 자들이여,
여러분은 죄인이 잘못을 시인하기 전에는 죽이려 하지 않으시죠?
마녀사냥 때처럼 잘못을 시인해야, 여러분의 명분이 설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저 범죄자를 보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죄를 시인했습니다.

이제 그를 처벌하여 구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회적 규율과 가치들은 나를 억압하고 행복에 이르는 것을 막았다.
    나에게 이 그릇된 사회적 규율과 가치들을 따르게 하려 했던 자들이 너무나 혐오스럽다.
 
    나의 정신은 사회적 규율과 가치에 너무 물들어 있었다.
    따라서 사회적 규율과 가치에 물든 나의 정신을 나는 극복해야 했다.
    나는 사회적 규율과 가치를 벗어나야 했다.

    그러던 중에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이 사람은 사회적 규율과 가치의 억압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에 따라서 사회적 규율과 가치를 벗어나는 행위, 즉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범죄는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려는 시도이지만 실패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사회적 규율과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그가 살며 겪은 순간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범죄를 옹호하는 내용처럼 보일 수 있지만, 범죄를 옹호한다기 보다 사회적 규율과 가치를 벗어나서 행동했던 용기를 옹호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용기 외의 행동에 대해서는 차라투스트라는 칭찬하지 않는다.
 

타인을 재판하는 재판관이자, 사회적 규율과 가치를 위해 범죄인들을 제물을 바치는 자들이여,
이 사람을 다시 사회로 돌려보내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 사람은 사회적 규율과 가치에 의해 고통받다가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고통을 주는 이 세상을 최대한 빠르게 떠날 수 있게 해주는 것 외에는 다른 구원이 없습니다*.

*사형을 선고함으로써, 이 범죄자는 부조리한 사회가 주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만약 이런 자들이 다시 사회로 나아가면, 자신의 성향에 의해서 다시 고통받다가 범죄를 저지를 수 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처형장에 끌려온 범죄자
그는 자신의 부적절한/기괴한 본성에 충실해 진 나머지 처벌을 받고 있다.


 
재판관 여러분,
여러분이 이 범죄자를 처벌할 때, 복수의 대상으로 보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그들을 낙오된 동료, 사회적 규율에 따르다 실패한 동료*로 여겨 동정해야 합니다.

*이 구절에서처럼 범죄자는 낙오자이자 실패자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로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저 자를 죽일 때, 낙오되지 않은 여러분은 자신의 삶을 살펴야 합니다.

왜 자신은 저 범죄자와 다르게 살고 있는지 말입니다.

범죄자야 사회적 규율의 물살을 견디다 버티지 못하면서 범죄를 저질렀다지만,
여러분은 사회적 규율의 물살을 충분히 견딜 수 있는 버팀목이나 지지대가 있기에 지금처럼 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 사회에 대한 불만이나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을 해소할 방법이 적어서 나타나는 것이고, 재판관들과 같은 존재들은 사회에 대한 불만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이 적기도 하겠지만, 그러한 불만을 해소시켜줄 주변인이나 활동들이 더 다양하게 있어서 사회 속에서 잘 견디고 있다는 이야기다.

 

여러분이 정말 범죄자들보다 좋은 삶의 조건을 지녔다면, 그리고 다른 이를 사랑한다면,

나쁜 삶의 조건을 지닌 다른 이들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적절한 사회적 규율의 물살을 개선하려는 노력, 개인의 본성을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성숙한 사회 문화를 만들려는 노력 말입니다.
 
여러분은 범죄자의 처지를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안타까워만 하는 게 아니라, 더는 범죄자들, 이 안타까운 낙오자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올바른 것들을 따르는 이상적 미래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지녀야 합니다.
 
어쩌면 사회적 규율의 물살을 개선하는 것이 여러분이 좋은 조건의 삶을 살게 된 이유이자 삶의 소명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명에 따라 살았을 때 여러분의 삶은 자신의 좋은 조건을 낭비하지 않고 정당한 삶을 살았다고 평가받을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범죄자들을 놓고,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의 피해자들로 보아야지, 본래 악한 자들이라고 해선 안 됩니다.
그들은 사회적 규율의 물살을 버티기 힘든 조건 속에서 그리 된 것일 테니까요.

그들의 환경이 여러분과 같았더라면, 같은 범죄를 저질렀겠습니까?
 
범죄자들을 좋지 못한 환경 속에서 자라 사회적 규율의 물살을 버티지 못한 자들이라고 보아야지,

막돼먹은 자들이라고 해선 안 됩니다.
그들에게도 여러분과 같이 지지대나 버팀목이 있었다면, 그들도 여러분과 다르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들을 어리석고 안타까운 사람이라고 해야지, 죄를 저지른 이라고 해선 안됩니다.
최악의 조건 속에서 그릇된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기에 그들이 그렇게 나아간 것이지,

그들도 본래는 죄를 짓고 싶어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재판관 여러분,
여러분들이 종종 머릿 속에 품는 생각들을 말로 꺼내 본다면, 사람들은 당신을 범죄자 보듯이 보며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이 더럽고 독한 것을 처단하라!”
 
하지만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내가 한 모든 생각이 행동이 되지 않으며, 또한 나의 모든 행동의 의도와 상관없이 행동에 대한 평가가 이뤄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재판관들의 삶에 대한 정당화
그들이 사회적 규율에 낙오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좋은 환경 때문이다.
그들은 그 환경을 십분 활용하여 세계에 이바지 해야, 자신의 삶이 정당화 될 수 있을 것이다.


 

범죄자들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범죄자들은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 창백한 얼굴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범죄자가 범죄를 저지를 당시에는 적어도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할 이유를 지녔습니다.
하지만, 이후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평가하면서, 자신의 행동이 사회적 지탄을 받을 것임에 견딜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의도와 다른 '행동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이뤄질 것임을 알고 견딜 수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두고 <어떤 사회적 관점에도 자유로운 존재이자 사회적 관점에 좌우되지 않는 존재>로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만약 그가 사회적 관점에 휘둘리지 않는다면, 그는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 창백해지지 않았을 테니까요.

창백해졌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이 범죄자가 사회적 규율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범죄자는 자신이 사회적 규율과 가치로부터 자유로운 존재, 그래서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는 존재라고 여겼더라도,
그것은 운이 좋아서 그랬던 것이지, 실제 그가 자유로웠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지극히 사회적인 그가 자신에 대해 <사회적 규율로부터 전적으로 예외적 인물>이라고 착각한 것이죠.
 

그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보이는 창백한 모습이 이를 드러내는 겁니다.
암탉의 몸을 고정시키고, 눈 앞에 줄을 그으면, 꼼짝 못 하듯이
범죄자의 이성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회적 기준에 따라 평가하면서 큰 당혹감에 빠져 창백해지는 것이죠.
저는 이 사람이 자신에 대해 몰이해했기에 이런 모습이 나타났다고 봅니다.

 

죄의식에 시달리는 범죄자
죄의식에 따라 이성은 온전히 기능하지 못하게 된다.


 
재판관 여러분,
범죄자들이 보이는 <자신에 대한 몰이해*>는 범죄를 저지른 후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도 자신의 심리와 동기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니까요.

*자신이 사회적 규율로부터 자유롭다고 여겼던 것을 말한다.

 
여러분은 이런 점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강도짓을 하려다가 사람을 죽인 범죄자를 보고서 이렇게 생각하니 말입니다.
   “이 범죄자는 강탈을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왜 굳이 살해를 했을까?”
 
그러나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이 범죄자는 애초에 강탈을 원한 게 아니라, 살인을 원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세상에 <저항하고자/파괴하고자 하는 욕구>를 지녔던 것입니다.
살인에 대한 충동을 내면 깊숙이 담아두고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범죄자는 이러한 자신의 충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살인에 대한 자신의 충동을 납득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는 사회적 규율에 물든 존재이니까요.
그래서 그는 강탈하는 것이 자신이 바라는 것이라고 여기고 강도짓을 저질렀던 겁니다.
 
이 범죄자는 사회적 규율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서, 자신의 살인 충동을 억눌렀을 겁니다.
그런데 막상 실제 상황에 놓이니, 억눌린 충동은 터져 나와버렸고, 그래서 그는 살인을 저지르면서 강도질을 한 것입니다.
자신의 충동을 외면하기 힘들었던 것이죠.
범죄자는 진정으로 자신이 바라던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몰이해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는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행위가 죄로 평가받을 것에 주목하고, 그것에 몰입하게 됩니다.
그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죄라는 인식을 떨칠 수 있다면, 그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을텐데,

과연 누가 쉽게 그럴 수 있을까요?
 

범죄자의 범행 동기를 논하는 사람들
차라투스트라는 범죄자의 범행 동기를 사회적 규율에 따른 본성의 억압에서 찾는다.


 
이 범죄자는 어떤 존재일까요?
그는 사회화 된 정신이 지배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정신이 사회화되면서 그의 본성은 억압되어 결국 온갖 병들에 걸리게 됩니다.
 
억압된 본성들은 어떻게 해서든 그 억압을 벗어나고자 하지만, 풀려나지 못하고, 불만이 쌓이게 됩니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그 불만을 표출해내고자 하는 것이죠.
이 범죄자는 그 불만을 표출할 먹잇감을 찾아서 살인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 범죄자는 어떻게 보면 가련한 존재입니다.
그는 사회가 요구하는 <본성의 억압/고통>을 견디기 힘들었을 뿐*입니다.
그는 본성에 주어지는 억압/고통을 견디려 했지만, 억압 속에서 피어난 불만이 너무 컸고,
그에 따라 불만을 표출하는 것이 자신이 가장 바라는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진정 바라는 것이 살인이자 파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 사회에 대한 불만이나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을 해소할 방법이 적어서 사회의 요구에 더 지치고 피폐해지게 된다고 보고 있다.

 
이처럼 본성이 억압되어 병들고 지친 자들에게, 우리가 악하다고 하는 것들, 즉 범죄에 대한 충동이 덮칩니다.
그는 자신이 강제, 억압, 폭력을 당했던 것처럼,

세상에도 강제, 억압, 폭력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교조주의의 시절에는 의심하고 자기 의지를 갖는 것이 악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의심하고 자기 의지를 갖는 사람들은 이단자나 마녀로 취급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강제, 억압, 폭력을 당했고, 그와 같이 세상에 되돌려주려고 했습니다.
 
이처럼 범죄자나 마녀, 이단자들은 사회적 규율에 본성이 억압당하면서 생깁니다.
그렇습니다. <사회적 규율이 범죄자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여러분들에게 들리지 않겠죠.
 
여러분은 사회적 규율이 범죄자를 만들어 낸다고 말을 하는 건

사회적으로 선한 자들*과 사회 질서에 해를 끼칠 뿐이라고 제게 말합니다.

*사회에서 선하다고 평가받는 자들을 말한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선한 자들은 제게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제게 있어 그들은 역겨운 존재들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악하고 역겹다고 하는 것들은 제게 악하지도 역겹지도 않습니다.
 
저는 선하다고 불리는 자들도 범죄자처럼 사회적 규율과 가치를 벗어나 <자신의 본성/신체적 반응>에 따라 행동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선하다 불리는 자들이 가지는 신체적 반응이 그들 자신에 대한 진실이자, 그들 자신에 대해 충성하는 것이며, 그들 자신에게 있어 올바른 것이라 불리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저 선하다 불리는 자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사회에서 적당한 고통과 만족을 누리며 오래 살기 위해서 지금의 미덕들, 자신을 억압하는 미덕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억압당한 자의 복수심
사회의 억압 속에서 개인은 사회에 대한 복수심에 따라 범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심리를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는 시도로 분석하지만, 그렇다고 범죄를 옹호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형제들이여, 
우리 인간은 사회적 규율 속에서, 사회적 규율의 물살 속에 서 있습니다.
이 물살은 우리의 본성을 괴롭히며 우릴 괴롭게 합니다.

 

누군가 사회적 규율에 시달려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사회적 규율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제가 손을 뻗을 테니 규율의 물살 밖으로 나오십시오.
 
하지만 여러분이 제 도움에 따라 사회적 규율에 시달리자 않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제가 무언갈 더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제 사회적 규율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성숙한 존재,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아는 존재가 되기 위한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제게 의지하는 존재이길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사회적 규율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부조리한 사회가 바뀔 필요가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저와 함께 부조리한 사회적 규율과 다투고 이상적인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성숙한 존재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게 된다면, 제게 의지하지 마시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아는 존재로 거듭나길 바랍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물살에 휩쓸린 사람들
누군가는 자신을 괴롭히는 물살 속에서 더이상 살려고 하지 않을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에게 물살을 벗어날 수 있는 난간이 되어주지만,
물살을 벗어난 이후에는 그들 스스로 살아 나가야 한다.


생각해볼 거리들

 
왜 범죄자를 처벌하는 이들은 재판관인 건 알겠는데, 왜 제물을 바치는 자인가?
-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하여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이므로, 사회를 위한 제물이 된다고 볼 수 있다.
 
범죄자는 왜 경멸의 눈을 하는가?
- 범죄자는 본성이 사회적 억압받다가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존재가 된다.
- 이때 자신을 억압한 것이 세계이자 사람들이긴 하지만, 자기 자신 역시 사회적 규율에 따라 자신을 억압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판단한다.
- 이에 따라 범죄자의 눈에 세계, 사람들, 자기 자신에 대한 경멸이 서려 있다고 말하는 듯 하다.
 
범죄자가 자신을 판결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 범죄자가 자신을 판결했다는 표현은 본성에 대한 자신의 악행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했다는 것으로 보인다.
- 즉 사회적 규율이 자신의 본성에 저지른 악행을 파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범죄자가 자신을 판결하는 게 왜 최고의 순간이 되는가?
- 니체는 서문 3장에서 위버멘쉬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내가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겠다. 너희가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순간은 이제까지 따르던 행복과 이성과 덕을 경멸하고 역겨워할 때다."
- 이에 따라서 보면, 자신의 본성에 악행을 저지른 사회적 규율을 자각할 때가 최고의 순간이라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 범죄자는 이를 파악하였기 때문에, 최고의 순간을 맞이 했다고 말한다.
 
재판관들은 왜 범죄자를 처벌하면서 스스로의 삶을 정당화해야 하는가?
- 이후 언급되는 내용에 따르면, 범죄자와 재판관의 차이는 범죄를 생각만 했느냐 범죄를 생각하고 행동했느냐의 차이다.
- 따라서 범죄자와 재판관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존재가 된다.
- 그런데도 불구하고 재판관은 범죄자와 다른 삶을 사는데, 이는 범죄자처럼 본성에 따라 충동에 따라 살지 않을 수 있는 좋은 환경 덕분일 것이다.
- 즉, 재판관은 사회적 규율 속에서도 좋은 조건을 지녀 잘 사는 것이고, 범죄자는 사회적 규율 속에서 나쁜 조건을 지녀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 이 부조리를 알고 인간에 대한 애정을 지닌다면, 더 나은 조건의 이들은 되도록 많은 사회적 규율 속에서 낙오자가 되지 않도록 개선해야 할 것이다.
- 그래야 그들의 삶은 이기적이지 않았고 적절한/인류애적 삶을 살았다고 평가될 것이다.
- 이런 부분을 염두하라는 이야기다.
 
행위 후의 망상과 행위 전의 망상은 무엇인가?
- 행위 후의 망상은 행위를 저지른 이후, 헛된 생각에 빠져 혼란을 겪는 것을 말한다.
- 정신이 온전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 행위 전의 망상은 행위의 의도나 동기에 대해서 행위자 스스로가 잘못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 이로써 행동에 대한 이해가 그릇되게 된다.
 
칼의 행복은 무엇인가?
- 칼은 파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 따라서 본성의 억압이 억압으로부터의 벗어남으로 나아가지 않고, 억압됨에 따른 파괴로 나아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듯 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범죄를 저지르고 갖는 죄의식을 떨치라고 하는가?
- 범죄는 자기 내면의 본성/충동에 따른 행동을 나타낸다.
- 그래서 범죄 자체는 부정적인 것이지만, 차라투스트라는 본성/충동에 따르는 행동에 초점을 두고 말하는 것 같다.
- 따라서, 본성/충동에 따르는 행동에 죄의식을 갖지 말라는 것으로 보인다.
- 그렇다고 하여 차라투스트라가 범죄를 옹호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듯 하다.
- 왜냐면 추후의 장들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성숙한 존재로서의 삶, 정신적 성숙에 이르는 삶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정신을 통해서 세상으로 손을 뻗는 질병덩어리란 표현은 무슨 말인가?
- 현재 범죄자의 모습을 보면, 자신의 행위의 동기를 착각하고, 자신의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 죄의식을 느끼며 곤란에 빠진다.
- 착각하고 죄의식에 빠지는 이유는 모두 사회적 규율에 젖어든 정신 때문이다.
- 범죄자가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 생각할 수 있었다면, 그는 강탈을 무의미하게 여겼을 것이지만, 그에게 사회적 규율이 작용하면서 살인 충동을 억압하고 그것이 되려 살인 충동을 자극하여 살인을 일으키게 된다.
- 또한 범죄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도 사회적 규율에 따라 평가하지 않았다면, 그는 죄의식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 결국 범죄자의 정신은 사회적 규율에 젖어든 정신인 것이다.
- 따라서 초기의 문구는 '사회적 규율에 젖어든 정신을 통해서 세상에 손을 뻗고 있는 질병 덩어리'로 이해할 수 있다.
- 이는 다르게 보면, 사회적 규율에 따라 행동하면서 병들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 그렇게 병든 존재는 자신의 병듦을 잊기 위해서 먹이를 찾는다고 표현해봄직 하다.
 
왜 범죄자는 뱀들의 얽히고 설킴으로 해석되는가?
- 사회적 규율에 의해서 본성이 억압된 존재는 불만을 갖는다.
- 그리고 이 불만이 가득해지면, 불만을 표출하게 되는데, 이를 독으로 본 듯 하다.
- 그런 점에서 독을 가진 존재로 뱀을 삼고, 사회적 불만을 가진 존재가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 신경질적이게 된 상태를 묘사한다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자신을 급류 가장자리에 놓인 난간이라고 하는가?
- 여기서 급류는 사회적 규율이라고 보는 게 좋다.
- 왜냐면 범죄자는 이 급류에서 버티지 못하고 불만을 갖춘 채 살다가 범행을 저지르면서 낙오했기 때문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처럼 급류를 버티기 싫은 사람, 버틸 수 없는 사람들에게 급류를 벗어나라고 말하는 자다.
- 그런 면에서 급류를 벗어나는 것을 돕는 난간과 같아진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난간을 잡은 이들의 지팡이가 아니라고 하는가?
- 지팡이는 의지하는 것을 나타낸다.
-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의지할 대상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상황인 것이다.
 
- 이는 차라투스트라 서문 9장을 보면 좀 더 이해하기 쉽다.
- 차라투스트라는 서문 9장에서 무리의 목자나 개가 되고 싶지 않으며, 길동무이자 함께 수확하는 자를 원한다고 말한다
.- 이런 점에서 자신을 지팡이로 쓰려는 사람을 원치 않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