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1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1권 4장 의역 (완2) (신체를 멸시하는 자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4. 18. 17:51

ㅡ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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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4장 신체를 멸시하는 자들


4장 개괄

 

 

4장에서는 우리 자신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지적한다.

 

우선 언급되는 것은 '나'라는 주체에 대한 규정이다.

니체는 '나'라는 것은 정신이 아니라, 정신을 포함하는 신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정신은 작은 이성에 해당되며, 신체(정동)가 정신보다 큰 이성인 점을 설명한다.

이 부분은 정동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니체는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설명하게 되는데, 정신은 신체의 반응을 따르는 것이자, 신체의 만족을 위해서 노력하는 존재로 취급된다.

 


 

본문

 

 

이 세상에는 자신의 신체를 멸시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신체를 극도로 멸시하여,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기도 하죠.

*신체를 벗어나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롭다고 여겨서 그렇다.

 

저는 이처럼 신체를 멸시하는 자들이 신체에 대해서 올바르게 다시 배워,

신체의 가치에 대해서 전파하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그들이 바라는 대로, 신체에서 벗어나 죽음에 이르길 바랄 뿐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더 이상 그릇된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지 못할 테니까요.

 

<나> 라는 것이 무어라고 생각하십니까?

신체를 멸시하는 자들은 정신만이 <나> 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물으면, 아이들은 몸과 정신이 <나> 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저 신체를 멸시하는 자들처럼 정신만이 <나> 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들은 아이들처럼 말하지 않는 것일까요?

 

사실 아이들의 대답도 충분한 대답은 아닙니다.

왜냐면, 현명한 자는 “ <나>은 전적으로 신체이며,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현명한 자들은 정신도 신체의 일부라고 여기는 겁니다.

 

 

나는 무엇인가?

현명한 사람은 "나"를 신체라고 규정한다고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신체에서 나타나는 반응들*을 보면,

신체는 정신을 뛰어넘는 뛰어난 이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체에 나타나는 반응들은 우리의 정신이 당장 파악하지 못하는 것들을 계산하여 나타난 것이니까요.

예컨대, 종종 우리에게 나타나는 흥분이나 답답함, 배고픔 등은 우리의 신체가 자체적으로 판단하여 나타난 반응입니다.

이것들을 일일이 정신을 통해 반응하려고 한다면, 과연 가능할까요?

*신체에서 나타나는 감정적/감각적 반응을 말한다.

화가 날 때의 흥분, 우울할 때의 답답함, 배고픔 등을 말한다.

이러한 반응을 가리켜 정동이라고 한다.

 

**신체가 정신보다 뛰어난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가 감정적 반응을 할 때를 보면 된다.

화가 날 때 우리는 흥분하게 된다.

이때의 흥분은 우리가 정신적으로 의도한 것이 아니라, 몸이 스스로 반응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정신은 왜 이런 반응이 나타난 것인지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즉 신체가 흥분하고는 있는데, 왜 흥분하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이 흥분은 어떤 이유에 의해서 나타났을 것인데 우리는 그 이유를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이 흥분은 정신보다 뛰어난 것이 일으킨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이를 니체가 말하고 있다.

 

또 신체는 하나의 의미*, 즉 행복이라는 삶의 목적을 위해 연합한 신체의 여러 기관과 세포들로 이뤄져 있고,

신체와 정신은 서로의 목적에 따라서 서로 갈등하기도 하고 조화를 이루는 관계로,

이미 흥분한 사람이 쉽게 흥분을 가라 앉히지 못한다는 점에서, 신체적 반응이 정신을 이끌어 간다고 할 수도 있고,

배고픔을 느껴도 참는다는 점에서, 신체는 정신의 의지에 따라 이끌려 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 Sinne(Sinn) 의 번역어로 일부 책에서는 감각/감관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하지만 신체가 하나의 감각/감관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므로, 의미/목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정신은 신체라는 이성에 비하면 그 능력이 하찮다 할 수 있습니다.

신체는 나라는 존재가 무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반면,

정신은 늘 신체가 내놓은 결과물에 따라 배우고 분석하며 그에 맞춰 행동하는 기능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신체는 정신을 <도구>처럼 이용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신체가 대부분의 정보를 처리한 후 정신에게 전달하면,

정신은 그 정보에 따라서 어떻게 행동할지를 판단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신체와 정신의 관계는 어쩌면 <스핑크스와 그를 마주한 인간>의 모습과 같습니다.

신체는 정신에게 행복한 삶이라는 문제를 내고, 정신은 신체가 내어주는 반응/힌트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TV 속 존재들이 과제를 수행하는 것을 보며 우리가 즐기듯이, 신체도 정신을 바라보며 즐기는 듯합니다.

 

신체와 정신의 관계 1

신체는 정신에게 자기와 세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정신은 그에 따라 행복에 이르는 답을 찾으려 한다.


 

여러분은 정신을 <나> 라고 말하며 나에 대해 충분히 증명했다고 느껴 자부심을 가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신이 정말 <나> 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정신보다 뛰어나고 정신을 고안한 것, 그것이 바로 신체이기 때문입니다.

즉 신체가 바로 <나>인 것입니다.

 

진정한 <나>인 신체는 여러분이 정신을 <나> 라고 부르던 말던 상관하지 않습니다.

신체는 <나>로서 그저  묵묵히 활동할 뿐입니다.

즉  <나>와 세계에 대한 온전한 정보를 정신에게 전달하여 정신이 삶을 꾸려나가게 할 뿐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의식*하는 것이 <나>를 규정함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의식하는 것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왜냐면, 의식하는 것이 <나> 라고 한다면, 왜 <나>가 존재하는지, 무엇을 목적하는 것인지 등을 전혀 설명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감각하고 인식하는 것

 

의식/정신이 이처럼 불온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의식/정신이 <나>라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정신은 사람들이 자신을 <나>로 여기게 하는 허영적인 것이라 볼 수도 있을 듯합니다.

 

왕 행세를 하는 걸인

정신은 "나"가 아님에도 부끄럼없이 "나" 행세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의식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의식하는 것은 행복 때문입니다.

 

신체는 자신의 행복과 만족의 임무를 달성하게 하기 위해서 정신을 고용했습니다.

그 임무에 따라 정신은 신체가 주는 정보를 활용하며,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입니다.

 

정신이 나름의 답을 찾아 그 답으로 신체를 이끌고 가면,

신체는 만족스러움이나 불쾌함 등의 반응을 통해서 정신이 내놓은 답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렇게 신체는 정신에게 답을 찾을 때까지 탐색하게 하고 비교하게 합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정신은 신체의 종이며, 신체는 정신의 주인인 셈입니다.

 

신체와 정신의 관계 2
신체를 이끌고 행복으로 나아가는 정신의 모습은 맹인을 이끄는 개의 모습과 비슷해 보인다.


 

형제들이여,

여러분의 의식의 뒤에 있는 강력한 지배자이자

여러분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현자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체입니다.

 

신체는 정신보다 <나> 및 세계와 관련하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나> 및 세계에 대해서도 더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토록 뛰어난 신체가 왜 정신에게 판단을 맡긴다고 생각하십니까?

 

신체는 본인들을 <나> 라고 주장하는 정신의 오만함을 보며 비웃으며 말합니다.

“나에게 이러한 정신의 오해와 오류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정신의 오해와 오류는 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 중 하나다.

진실로 내가 바로 <나>를 이끌고 있다.

내가 바로 정신에게 <나>에 대하여 귀뜸해주고 있는 존재다.”

 

그런데 신체는 어떻게 정신에게 귀뜸해주고, 어떻게 정신에게 힌트를 줄까요?

이는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습니다. 

신체에 고통이 나타나면, 정신은 고통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러면 정신은 어떻게 해야 고통을 벗어날지 생각하게 됩니다.

신체에 쾌감이 나타나면, 정신은 쾌감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러면 정신은 어떻게 해야 쾌감을 더 느낄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됩니다.

 

이처럼 신체는 정신에게 나 자신 및 세계에 대한 정보와 과제를 주고,

정신은 그 정보를 바탕으로 과제에 대한 답을 찾아가게 됩니다.

신체는 이로써 정신을 수양시키고, 이 과정을 통해서 정신이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규율들을 고안하고 행동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정신에게 계시를 주는 신체 

신체에 나타나는 반응은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계시와 비슷하다.


 

신체를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신체를 멸시하고 있겠지만,

정신에 대한 존중감과 신체에 대한 멸시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신체입니다.

어떤 것이 가치있는지, 가치가 있다면 얼마나 있는지도 인식하게 하는 것이 바로 신체입니다.

어떤 것을 지향하고 어떤 활동을 할지 판단하게 하는 것도 바로 신체입니다.

신체에 나타나는 즐거움과 괴로움이 없었다면,

우리는 무엇이 더 가치있고 가치없는지 알 수 없고,

그로 인해 어떤 것을 지향할지, 어떤 것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지 판단할 수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체적 반응이 나타나는 장(field)인 신체는 우리가 가지는 감정과 생각 등 많은 것들의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감정과 감각적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신체는 정신을 수양시키고,

이 과정을 통해서 정신이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규율들을 고안하고 행동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신체를 멸시하는 사람들이여,

여러분이, 그러니까 여러분의 정신이 신체를 멸시하고 있다고 해도, 그 정신은 몸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이 죽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은 여러분의 신체가 죽기를 원하고 있기에 그런 것이며,

신체의 요구에 따라 여러분의 정신이 그것을 의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체를 멸시하는 사람들이여,

여러분의 신체는 자신이 가장 바라던 일,

사회적/종교적 규율을 벗어나서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규율을 창조하는 것을 더 이상 할 수 없습니다.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위한 가치와 규율을 창조하는 것,

이것이 신체가 가장 원하는 것이자, 가장 열렬히 바라는 것인데,

여러분의 정신은 성숙한 인간으로서 규율을 창조하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신체는 몰락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신체가 몰락하는 것을 원하기에, 여러분은 신체를 멸시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규율을 더는 창조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삶과 세계에 대해 분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세상에 대한 분노에는 자신을 위한 가치와 규율을 창조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질투가 숨겨져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같은 길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나아가는 길은 초인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신체를 멸시하는 자들

이들은 정신을 중시하고 신체를 멸시하는데, 결국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 것과 같은 상황에 놓인다.


생각해볼 거리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신체는 무엇인가? (3장의 내용과 같음)

- 우리는 정신과 신체로 구성이 된다.

- 그리고 우리는 정신이 본체이며, 신체는 정신을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 문제는 신체에서 모든 감정적/감각적 반응이 나타나고, 정신이 이 감정적/감각적 반응을 분석 파악하게 된다.

- 이 부분이 중요한데, 감정적/감각적 반응이 나타나는 과정은 정신이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즉 신체는 정신의 관여를 받지 않는데, 어떻게 감정적/감각적 반응을 만들어서 정신에게 제공하느냐는 것이다.

- 정신은 신체가 만든 결과물을 보고 있으니 말이다.

- 신체가 만든 결과물들, 감정적/감각적 반응들을 가리켜 정동이라고 칭한다.

 

- 정리해 본다면, 신체라는 것은 정신에게 우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기피하는 것 등의 다양한 것들을 제공하는 원천이다.

 

신체는 왜 큰 이성인가?

- 우리의 정신은 신체적 반응을 분석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갖는다.

- 그런데 신체적 반응도 분석해 보면, 어떤 이성적 메커니즘에 따라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런 점에서 볼 때, 신체도 정신과 별개인 이성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볼 여지가 생기게 된다.

- (물론 이는 현시점에선 뇌과학에서 밝혀지기에, 별도의 이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다)

- 독특한 점은 신체의 판단이 대체로 정신의 판단보다 더 많은 이성적 계산을 내포한다는 특징이다.

- 예컨대, 어떤 직관적인 감정이나 판단 속에 과거의 기억이라던가, 전혀 의식하지 못한 가치관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내포되어진 경우들이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 이런 특징에 착안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신체를 큰 이성이자, 현자라고 표현한다.

 

정신은 왜 작은 이성인가?

- 정신과 신체의 관계 속에서 보면, 정신은 신체가 제공하는 정보를 분석하여 이해하는 정도의 수준 밖에 되지 않는다.

- 게다가 신체가 직관적 판단을 내리는 것을 보면, 정신은 고려치 못할 많은 정보들이 관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런 점에서 신체의 이성적 능력이 정신의 이성적 능력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정신은 왜 허영된/오만한 것인가?
- 이제까지 진술한 내용을 보면, 신체의 일부 기관으로서 정신이 기능한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 그런데 신체를 멸시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보면, 정신은 신체의 일부가 아닌 신체 전체를 통솔하는 것으로서 자신을 이해한다.

- 즉 올바른 이해도 갖지 못한 채로 자신을 과대평가하므로, 허영되고 오만하다고 비판받는 것이다.

 

신체(자기)는 왜 정신(나)을 고용해야 하는가?

- 차라투스트라가 언급하기도 했지만, 뛰어난 이성능력을 지닌 신체가 왜 굳이 정신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의문스러운 점이다.

- 신체가 그렇게 뛰어나다면, 정신을 요구할 필요 없이, 제 스스로 하면 되는 문제이니 말이다.

- 하지만 신체는 외부 정보에 따른 반응을 제공할 뿐이다.

- 결국 반응을 하긴 하지만, 정신이 없다면, 반응에 따른 운동을 하지 못한다는 것인 셈이다.

- 이런 점에서 신체는 반응을 일으킬 정신을 필요로 한다고 볼 수 있고, 정신이 신체에 의존하듯이, 신체도 정신에 의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체(자기)는 왜 자기 자신을 넘어서기를 바라는가?

- 여기서 말하는 자기 자신은 사회적/종교적 규율에 따라 형성된 정신을 말한다.

- 이러한 규율에 따르는 정신은 우리의 감정을 신경쓰지 않고, 규율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 이에 따라서 우리는 고통스러워 하는데, 이는 신체적으로 나타나고, 의식하게 된다.

- 이러한 고통스러움은 규율을 벗어나길 바라게 되는데, 그 이유는 당연히 고통스럽지 않기 위해서 또는 행복하기 위해서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신체를 멸시하는 자들을 개선시키려고 하지 않는가?

- 이미 그들은 너무나 염세적 관점에 사로 잡힌 존재들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 애초에 사고의 회로 자체가 염세적인 회로이기 때문에, 그것을 개선하는 것보다는 사라지는 편이 더 낫다고 여긴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