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1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1권 1장 의역 (완2) (세 가지 변화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4. 12. 23:20

ㅡ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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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1. 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


 

1장 개괄

 
 
성숙해지려는 개인은 성숙해지기 위해 노력하다가, 사회적 규율의 한계로 더 성숙해질 수 없음을 느낀다.
그래서 이 개인은 더 성숙해지기 위해서,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려 하게 된다.
 
사회적 규율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제한이 없어지니 좋은 것이었으나,
사회적 규율에 따르는 사람들과 유대 및 공감을 형성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주장을 해도 공감하는 이가 없으니 비판받고 배척받기 일쑤였고,
주장에 대한 공감이 없으니 연구를 해도 무의미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이 개인에게는 다음의 과제가 따라왔다.
- 즉각적인 보상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올바름에 대해 꾸준히 탐구하기 
- 타인에게 의견을 제시하면서도 사이를 원만하게 유지하기
 
이러한 과제는 아이와 같은 모습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니체는 말한다.


 
본문
 

 
여러분에게 올바름을 추구하는 영혼*이 보이는 세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합니다.

*이 영혼은 차라투스트라 자신과 같은 유형의 존재들이다.
일반적으로 이 장에 대해서 인간 정신의 세 상태를 나타낸다고 해석하지만, 서문 2장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아이가 되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여기서 언급되는 것이 단순히 인간 정신의 변천이 아니라, 차라투스트라 자신이 어떻게 아이가 되어갔는지를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제가 이야기를 하려는 건
올바름을 추구하는 영혼이 어떤 가치와 규율을 따르는지,
그러다 어떤 이유로 사회적 가치와 규율에 맞서게 되는지,
또 어떤 이유로 천진난만한 아이같은 존재가 되는지입니다.
 
먼저 올바름을 추구하는 영혼이 어떤 가치와 규율을 따르는지 보도록 합시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올바름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것은 그릇됨을 추구하는 것보다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지만,
그렇게 추구하면서 얻는 이로움은 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올바름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올바름을 추구하는 영혼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합니까?
    올바른 이해를 얻기위해서 노력하고, 그렇게 성숙의 기쁨을 맛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사람들이 기피하는 이 길로 나아가려 합니다.
그렇게 이 영혼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가치와 규율들을 지고 이루기 쉽지 않은 길로 나아갑니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영혼은 말합니다.
   “이것들이 올바름을 추구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아닌가요?

    교만하지 않고 겸손 하려 하는 것,
    자신의 지혜를 뽐내지 않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찾고 드러낼 줄 아는 것,
    성과를 달성했을 때, 그 공을 내가 아닌 타인에게 돌리는 것,
    나를 유혹하는 본성/본능/욕구들을 되려 유혹하고 지배하기 위해서 높은 산에 올라 수련하는 것,
    사는 동안 진리를 얻기 위해서만 노력하고 향락에 젖지 않기 위해 절제하는 것,
    현재에 안주하지 않기 위해, 나의 아픔을 위로하는 자들과는 어울리지 않고, 성장하는 것에만 몰두하는 자들과 어울리는 것,
    기피하고 싶은 진실이라도 거부하지 않는 것,
    성숙해지기 위해서 살아가는 우리를 사람들이 멸시하고 위협해도 그들에게 인류애를 지니는 것 말입니다.
 
이런 가치와 규율에 따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올바름을 추구하는 영혼은 기꺼이 이러한 규율에 따르려 합니다.
 
그리고 올바름을 추구하는 영혼은 <낙타>처럼 자신이 따를 가치와 규율들을 지닌 채로,

성숙해지기 위해 고독 속에서 탐구하고 사색하게 됩니다.
 

낙타의 모습이 된 영혼
그가 짊어진 것은 성숙한 존재가 되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들이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영혼이 고독 속에서 탐구하던 중에 두 번째 변화가 나타납니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영혼은 올바른 것들에 대해 탐구하던 중에 사회적 가치와 규율에 의해서 자신이 제한받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예컨대, '부조리를 개선하려고 하기' 보다 '부조리를 견디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던 것이죠*.

*부조리를 견디는 것은 자신을 억압하고 고통을 주는 것이기에 미덕이 아니다.

이에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던 영혼은 부조리로부터 벗어날 필요를 느끼고,
사회적 규율과 가치에 따르는 게 아닌, 자신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는, 주체적인 존재가 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 영혼은 사회적 규율과 다투려 하게 됩니다.

사회적 규율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영혼에게 주인이자 무서운 용과 같습니다.
이 용은 사회적 규율과 가치를 비늘로 두른 채,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죠.
사회적 규율과 가치가 이토록 빛을 내뿜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규율과 가치를 위대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 용은 사람들이 활동할 때 마다 관여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나만이 너희가 추구할만한 것이다.
    나 이외의 것은 너희가 추구하고 따를 것이 아니다.
    그러니 개인적 의지를 갖지 말고/의심하지 말고,  나를 따르기만 하라.”

형제들이여,
올바름을 추구하는 영혼이 사회적 규율에 맞서는 이유를 주목해야 합니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영혼은
사회적 규율과 가치에 따르면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자신이 바라던 성숙한 존재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성숙한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 사회적 규율과 맞서게 되었던 것이죠.
그러면서 올바른 가치와 규율의 필요를 느끼고는,

기존의 올바르지 못한 사회적 규율이 아닌 새로운 가치와 규율을 창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새로운 가치와 규율을 창조하는 것은 사회적 규율과 맞선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 규율과 맞서는 것은 그저 사회적 규율에 따르지 않는 자유를 얻을 뿐이니까요.
그렇기에 사회적 규율에 맞선다는 것만으로는 성숙함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규율과 가치에 문제를 느껴 맞서려고 하는 용기,
이 용기는 과연 얼마나 신성한 것입니까?

그릇되다고 여겨지는 규율과 가치를 벗어나는 것은 단순히 가치와 규율에 순응하는 모습으로는 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자신을 압도하던 규율과 가치에 투쟁하고 저항하기 위해선 용감한 모습으로, <사자>와 같은 모습으로 변화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한때 영혼은 사회적 규율과 가치에 순응했지만,
이제 영혼은 사회적 규율과 가치를 다시 바라보며, 그릇된 것들을 찾아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 그릇된 사회적 규율과 가치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사회적 규율과 가치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는다.
왜냐면 사회적 규율과 가치 중에서도 올바른 것은 있기 때문이다.


 

황금용과 사자의 대립
황금용이 가로막는 곳 너머로 나아가기 위해, 사자는 황금용과 대립한다

 


 
 
하지만 형제들이여,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는 사회적 규율과 가치에 순응하며 나아가다가, 사회적 규율과 가치의 그릇됨을 느껴 맞서게 됩니다.
그런데 앞서 저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가 천진난만한 존재가 된다고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사회적 규율과 가치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사회 속의 존재가 아니게 됩니다.
이에 따라서 사회적인 인물들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겠죠.
그러면 올바름을 추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상황이 이렇기에, 사람들의 지적과 비판 속에서 꾸준히 올바름을 추구하려면, 누군가에게 지적 받아도 꿋꿋이 올바름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지적과 비판에 마음 상해선 안 되며, 그들의 지적과 비판을 잊고 다시 올바른 것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순진무구한 아이들이 잘못을 지적해도 망각하고 다시 저지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람들의 지적에 불쾌해하기 보다는 긍정하며 그들의 이야기가 맞다고 동조해야 합니다.
그들의 말이 옳지 못해도, 그들의 말에 따를 생각이 없어도 말입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순수한 긍정, 이를 저는 <신성한 긍정>이라고 부릅니다.
이 역시도 아이들이 보이는 부모에게, 어른에게 보이는 모습 중 하나죠.
물론 아이들이 의도하여 자신의 잘못을 망각하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것은 반사회적으로 여겨지기에, 사람들은 올바른 앎에 대해서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보니 열심히 탐구하고 사색하여 사람들에게 앎을 전해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반응과 보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는 이러한 것에 일희일비하면 안 됩니다.
그저 아이처럼 올바름을 추구하며 나타나는 즐거움에 만족해야 합니다.
그렇게 놀이로서 올바름을 추구해야 하는 겁니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는 이처럼 어떤 보상이 없더라도, 스스로 움직여야 하는 존재, 자기 힘으로 움직이는 존재여야 하는 겁니다.
아이들이 무언가 보상을 바라고서 행동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러면서 기존의 가치와 규율이 올바르지 못하다고 판단된다면, 새로운 가치와 규율을 만들어 그에 따릅니다.
그야말로 새로운 가치와 규율의 시작을 행하는 것이죠.
이 역시도 놀이의 규칙을 자신의 방식대로 바꿔 즐기는 아이들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은 이처럼 <아이>와 같은 모습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이래야 그들이 바라는 올바름을 세상에 전할 수 있을 겁니다.

올바름을 추구하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강하게 표현하고 다툰다면,
사람들에게 배척받아서 결국 홀로 올바른 것을 알다 사라지게 될텐데
그러면 올바름을 추구하는 의미가 없게 됩니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이유는 올바름이 지배하는 이상 사회를 바라기 때문인데,
부조리한 사회에서 배척당해버리면 부조리한 사회를 개선시키지 못하여 이상 사회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죠.

또 보상을 바라고 올바름을 추구한다면, 역시 오래가지 않아 올바름을 추구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취향에 맞지 않아 홀대 받을 것인데, 어떤 보상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는 아이와 같은 모습을 보일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던 바를 이루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가 이상적인 미래를 바란다면, 이렇게 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올바름을 추구하는 영혼은 현재의 세계에서 배척당하고 고독 속에 놓일 수 있겠지만,
자신이 바라던 이상적 미래의 세계에 이바지하게 될테니까요.

심각한 상황 속의 해맑은 아이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은 면죄부가 되어주기도 한다

 


 
 
저는 여러분에게 올바름을 추구하는 영혼의 세 변화,
올바름을 추구하는 영혼이 어떤 규율을 짊어지는지,
어떤 이유로 사회적 규율과 맞서게 되는지,
어떤 이유로 천진난만해 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 드렸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그는 다채로운 암소*라는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올바름과 관련하여 민감한 인간은 사회의 부조리에 역겨움을 느껴 구토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역겨움을 느끼면서 부조리한 사회에 사는 것은 힘들기에, 부조리한 사회에서 처세하는 방법으로 되새김질, 즉 역겨워도 구토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암소는 되새김질을 잘 하는 존재다; 이에 대해서 차라투스트라 4권 8장을 참고하자.
현재 1장에서는 이러한 암소 마을에 차라투스트라가 있다고 하고 있으므로, 소의 상징에 따라 치환해보면, 차라투스트라가 부조리를 느끼면서 사회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사는 지역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앞서 서문 9장에서 차라투스트라가 말하기로 했던 대상들이 사는 지역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정신이 성숙해지는 과정
낙타와 사자와 아이는 성숙해지려는 영혼의 발달 과정을 보여준다.


생각해 볼 거리들

 
왜 차라투스트라는 영혼의 세 변화를 말하나?
- 차라투스트라 또는 니체는 자신의 정신의 변화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 1장에서 영혼은 최종적으로 아이의 모습이 되는데, 차라투스트라 서문이나 1장 이후로 나타나는 내용들을 보더라도, 차라투스트라는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 이러한 점에 따라서 보면, 일반적인 정신의 세 양상이 아닌, 차라투스트라가 아이의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 즉 1장은 차라투스트라의 자신의 정신적 변화과정을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혼의 세 변화는 <낙타 ↔ 사자 ↔아이 ↔ 낙타>의 관계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 일반적으로 이러한 이해를 갖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 인간의 정신이 어떤 때는 순종적이고, 어떤 때는 저항적이었다가, 어떤 때는 아이 같아진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1장에서 각각의 형상에서의 전환을 의미하는 표현은 없습니다.
- 또한 낙타가 된 영혼이 사자가 되기 위해서 낙타를 포기하거나, 아이가 된 영혼이 사자임을 포기한다는 내용도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 이런 점들로 볼 때, 저 영혼이 차라투스트라/니체의 영혼이라면, 낙타인 면과 사자인 면과 아이인 면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 즉 성숙해지려는 경향성(낙타)과 성숙해지기 위해서 관습도 뛰어넘겠다는 경향성(사자), 그리고 관습을 뛰어넘더라도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하고 살아가려는 경향성(아이)의 모습이 섞여 있는 것인 셈입니다.
- 이 셋이 적절히 공존하고 있는 상태가 차라투스트라에 해당됩니다.
- 만약 이 세 상태가 적절하게 공존하지 못하는 경우, 어느 한 부분이라도 미숙하게 된 경우, 「1권 6장 창백한 범죄자에 대하여」나 「1권 8장 산 위의 나무에 대하여」 , 「1권 9장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에 대하여」 에서 언급되는 존재들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낙타가 지는 것은 가치관이나 의무라 할 수 있나?
1) 낙타가 지는 것들은 성숙한 존재가 보이는 모습입니다.
ㅡ그래서 실질적으론 성숙한 존재의 모습을 지는 것인데, 그것이 가치관이 된다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2) 낙타가 지는 것을 의무라고 보기는 어려운데, 사회적 의무를 제공받는 건 아니라, 스스로 성숙해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ㅡ 「유고 (1882년 7월~1883/84 겨울)」에서의 내용을 보더라도, 낙타의 모습은 단순한 사회적 규율이 아니다.
     162. 
     인간이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은 무엇인가? 
     우리를 경멸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 
     우리의 목적이 실현되었을 때, 그것에서 떠나는 것. 
     진리를 위해서 외경심에 저항하는 것. 
     병들었을 때 위로해주려는 사람을 거부하는 것. 
     차갑고 더러운 물 속에 들어가는 것. 
     비둘기와 우정을 맺는 것. 
     유령이 우리를 겁 주려고 할 때, 유령에게 손을 내미는 것.
     —“이 모든 것을 나는 했고 그걸 떠맡고 있다” 라고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그리고 작은 것을 얻기 위해 나는 오늘 이 모든 것을 주어버릴 것이다
     —아이의 미소를 얻기 위해.
 
낙타가 짊어지는 것은 황금용일까? 아니면 황금용과는 다른 것인가?
- 낙타가 지고 다니는 것은 황금용이 아닌 성숙한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 그렇게 되면, 낙타는 성숙한 존재가 되기 위한 가치관을 지닌 채로 돌아다니는 게 됩니다.
- 그런데 그 상황에서 황금용이 낙타의 길을 가로막는 듯 합니다.
- 아무튼 가치관이 성숙해지기 위한 것과 사회적 관습에 따른 것, 이 두 종류로 나뉜다고 볼 수 있습니다.
ㅡ 다음의 구절도 참고해 볼만 하다; 「유고 (1882년 7월~1883/84 겨울)」
4[237]
정말, 무거운 짐을 지고서 나는 내 황야로 서둘러 갔다. 그러나 거기서 비로소 나에게 가장 무거운 것을 발견했다. 
ㅡ 이 구절을 통해서 볼 때, 황금용을 벗어나서 새로운 짐을 지게 되는 것으로 볼 수 있기도 하다.
ㅡ 따라서 짐 자체를 벗어던졌다고 할 수는 없다.
 
영혼은 왜 황금용과 맞서려고 하는가.
- 자신의 길을 나아가던 낙타는 황금용에 의해서 가고자 하는 길로 가지 못하게 됩니다.
- 이러한 황금용의 방해로 인해 성숙해지지 못하게 된 영혼은 황금용을 넘어서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 그래야 자신이 바라는 성숙에 이를수 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 만약 황금용의 영역 안에서만 성숙한 태도를 취하려 한다면, 자신의 성숙하고자 하는 태도와 사회적 규율 사이에서 모순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황금용과의 다툼 이후 아이가 나타나는 건 무엇 때문인가?
- 황금용과의 다툼은 황금용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충격적인 일입니다.
- 이에 따라서 이 사자적 존재를 배척하는 경향이 생길 것입니다.
- 사자가 바라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 따라서 이 영혼은 아이처럼 자신을 보이게 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이 수용될 수 있길 바랄 것이라 생각해 봄직 합니다.
- 물론 니체는 대중들을 좋아하지 않지만, 사람들에게 수용되어서, 사람들과 교류하고 운이 좋다면 자신과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존재를 찾으려고 할 것이므로,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입니다.
 
아이에 대한 해석
ㅡ아이는 자기 가치관을 지니게 된 존재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처세를 배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관련한 구절은 다음을 보자; 「차라투스트라, 2권 13장」
          그는 괴수들을 제압했고 수수께끼를 풀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자신의 괴수와 수수께끼를 구원하는 일이 남아 있다. 
          이것들을 그는 천상의 아이로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의 깨우침은 아직도 웃음을 배우지 못했고, 
          질투 없이 있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의 세찬 열정은 아름다움 속에서 아직도 잔잔해지지 않았다.

          참으로 그의 열망은 포만 속에서가 아니라 아름다움 속에서 침묵하고 가라앉아야 한다! 
          우아함은 훌륭하게 생각하는 자의 고결함에 속한다.

          팔을 머리 위로 올리고, 영웅은 그렇게 쉬어야 한다. 
          자신의 휴식마저도 그렇게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웅에게는 아름다움이 그 어느 것보다도 어렵다. 
          온갖 격렬한 의지로도 아름다움을 획득할 수는 없으니.
ㅡ여기서 아이는 자기 안에 있던 사회적 규율을 제압하고, 인간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는데, 그때의 모습만으로는 온전치 못하다고 보는 것이다.
ㅡ따라서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이들은 자기 만의 가치관과 더불어, 처세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
 
ㅡ아래의 구절들도 인간 성숙의 최종 단계가 단순히 자기 가치관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통제에 있다고 이야기를 한다; 「차라투스트라, 2권 13장」
          그대 고매한 자들이여! 
          근육의 긴장을 풀고 의지를 벗어던지고 서 있는 일. 
          이것이 그대들 모두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다.

          힘이 자비로워져 가시적 세계로 내려올 때, 나는 그런 하강을 아름답다고 부른다.

          그대 막강한 자여, 나는 그 누구도 아닌 그대로부터 이런 아름다움을 원한다. 
          그대의 선의가 그대의 마지막 자기-압제이기를.
 
ㅡ 「차라투스트라, 2권 21장」에서도 차라투스트라의 처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암소라는 마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ㅡ암소의 경우, 차라투스트라에게 있어서는 구역질을 하지 않는 존재, 구역질을 하지 않고 잘 견디는 존재로 묘사된다; 「차라투스트라, 4권 8장」
     우리가 전향하여 암소처럼 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우리가 암소들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하나 있으니, 되새김질이 그것이지.

     참으로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이 되새김질 하나를 배우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런 자는 비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자의 커다란 비탄, 오늘날 그것은 구역질이라고 불리지. 
     오늘날 심장과 입과 눈이 구역질로 가득하지 않은 자가 있던가? 
     그대도 마찬가지다! 
     그대도! 하지만 이 암소들을 잘 보라!"
ㅡ이로 볼 때, 사회의 부조리나 그릇된 것을 잘 견디는 존재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고, 암소 마을은 그런 자들이 모인 마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