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Claude 3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5장 기쁨과 열정
5장 개괄
5장은 가치관에 대해서 설명하는 장이다.
기본적으로 니체는 자기 고유의 가치관을 가지되, 그 가치관을 굳이 사회적 기준에 견주어 볼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가치관, 자신만의 미덕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회적 기준에 견주지 않게 되면, 어떤 행위도 올바른 것이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예컨대, 음탕한 사람의 문란한 행동도 올바른 행동으로 평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모순되게도, 음탕한 사람은 타인의 문란함에 대해서 지적도 할 수 있다.
이처럼 모순되는 행동이 나타나는 걸 의식하게 된다면, 우리는 자신의 행동 중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판단하기에 이르게 된다.
이때, 누군가는 올바른 행동을 판단하려 할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가치 판단을 포기하는 양상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가치 판단을 포기하는 양상으로 나아가면, 허무주의 염세주의 쾌락주의로 나아갈 수 있기에 좋지 못하다.
그렇더라도 행동의 가치를 비교는 필요하다고 니체는 말한다.
그래야 사회적 기준을 벗어나도, 성숙한 가치관을 지닐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사회적 기준을 벗어났을 때, 오히려 미숙한 가치관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본문
형제들이여,
여러분에게 어떤 가치관이 있다면,
그 가치관이 여러분 스스로 고안한 것이라면,
그것은 사회에 의한 것이 아닌, 당신 고유의 것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규율과 가치관을 고안했다면, 여러분이 고안한 이 규율과 가치관이 굉장히 자랑스러울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치관을 가만히 둔 채, 필요한 순간마다 그 가치관에 따라 판단하며 살아가도 될 테지만,
여러분은 그것을 여러 상황들 속에서 사람들에게 펼쳐 보이며, 자신만의 규율과 가치관의 뛰어남을 선보이고 싶을 겁니다.
그 결과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가치관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지 인식하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문제있다고 여겨지면, 일부는 폐기하고 일부는 수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분의 가치관은 사회적인 규율에 따라 정돈되면서, 군중, 즉 사회에 길들여진 가축이 되어버립니다!
검사관에 의해 멀쩡한 곡식이 버려짐에도 순응하는 농부의 모습
대중들은 사회적 규율에 따라 자신에게 올바른 가치관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규율에 순응한다.
여러분은 자신의 가치관을 사회적으로 평가받았다 해도 사회적 관점에 따라 수정하지 말고, 이런 태도를 지녀야 했습니다.
“나의 가치관은 지극히 나다운 것이어서, 나를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나를 풍요롭게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단순히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을 단순히 악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여러분,
자신만의 가치관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사회적 잣대에 휘둘리지 않게끔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자신의 가치관에 대해서 선한지 악한지 말해야만 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부끄러워하지 말고 이렇게 말하기 바랍니다.
“이 가치관은 나에게 있어 선이다.
왜냐면 이 가치관은 나를 풍요롭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사랑한다.
나는 이게 아주 마음에 들며, 이처럼 나를 만족시키는 것을 선하다 여긴다.
내가 마음 속에 품는 가치관이 신에 의한 규율이나 인간에 의한 규율로 구성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
나는 죽고나서 낙원으로 가기 위한 가치관을 원치 않는다.
내가 원하는 가치관은 현재의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현재 내 삶을 위한 가치관에는 굳이 사람들이 말하는 지혜와 상식이 더해질 필요는 없다.
모든 사람이 옳다고 동의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게는 현재의 삶을 위한 가치관이 있습니다.
이 가치관이 내 안에 자리하고 있고, 나는 이것을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나는 아주 만족하고 있다.”
사람들 앞에서 주저하다 말하는 사내
사람들 앞에서 소신을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러분이 사회적 가치관에 따르다가 자신만의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다면,
저는 여러분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한때 여러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려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회는 그것을 원치 않기에, 악이라고 취급했었고, 그래서 여러분도 자신을 위한 열정을 악이라고 여겼습니다.
사회적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난 지금, 여러분은 원하는 것을 하려는 열정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원하는 것을 하겠다는 이 열정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이 열정은 여러분에게 여러분을 위한 가치관을 제공하고, 여러분의 삶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당신이 신경질적인 사람이든, 음탕한 사람이든, 광신적인 사람이든, 복수심에 불타는 사람이든,
당신의 <원하는 것을 하려는 열정>은 여러분만의 가치관을 가지게 하고,
그에 따라 기존에 악한 것이라 불리던 것은 현재 당신에게 만족과 기쁨을 주는 것이 됩니다.
한때 여러분은 내면의 깊은 곳에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가두어 두었습니다.
그에 따라, 여러분 내면의 깊은 곳엔 억압당하여 거칠어진 여러분의 일면이 있었죠.
하지만 원하는 것을 하려고 함에 따라서, 그 억압당하던 것들은 풀려나 여러분에게 만족을 주는 것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사회적 규율이 자신에게 이롭다고 여겨, 그 규율을 따라 살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규율은 사실 여러분을 옥죄고 억압하던 독이었습니다.
그래서 사회적 규율 속에서 스스로 슬픔을 짜내었던 것이죠.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슬픔*을 계기로, 여러분은 이제 자신만의 가치관을 가짐으로써, 기쁨과 만족을 느낍니다.
*사회적 규율에 따르면서 생긴 억압된 본성의 슬픔.
사회적 규율에서 벗어난 존재
자신만의 목표를 성취할 때 느끼는 기쁨은 사회적 규율 속에서 맛보는 어떤 기쁨보다도 크게 느껴진다.
사회적 규율과 가치를 벗어남으로써, 여러분에게는 만족스러운 것, 원하는 것만 남습니다.
여러분이 원하여 만든 가치와 규율 중에 악하고 나쁜 건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치관을 살피다가 스스로 좋지 못하다고 여기면서도 좋다고 여기는 가치관, 모순되다고 여기는 가치관들을 발견하게 될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면, 자신 안에 정직해야 한다는 가치관과 거짓말을 해도 좋다는 가치관을 둘 다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죠.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행복과 성숙함을 바라고 가치관들을 만들어 낸다면,
모순되는 가치관들을 지니지 않고, 하나의 유기적 질서를 이루는 가치관들을 가질 겁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정말 이러하다면, 여러분은 성숙한 인간이 되는 방향으로 쉽게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양립되기 힘든 가치관을 지니는 것,
앞서 말한, 정직해야 한다는 가치관과 거짓말을 해도 좋다는 가치관을 둘 다 가지고 있으면,
개인 입장에서는 좋을 수 있습니다.
왜냐면, 정직하지 못한 타인을 지적할 수 있기도 하고, 거짓말을 하는 자신을 합리화 할 수 있기도 하니 말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처럼 이중 잣대들을 가지고서 살아갑니다.
그러다 갑자기 혼란이 찾아오면, 이중 잣대 중에 무엇이 옳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상황 속에 놓이면서 좌절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들은 올바른 것을 판단하기를 멈춰버리고,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은 채 순간 순간의 만족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형제들이여,
자신이 가진 가치관들의 모순을 살피고, 무엇이 옳은지 따지는 것,
이것이 불필요한 것이라 생각하시나요?
하지만 가치관을 비교하고 따지는 것은 성숙한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앞서 차라투스트라는 사회적 기준에 따라 자신의 가치관을 비교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서 자신만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그에 따라 살기만 하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겠지만, 여기서는 가치관의 올바름에 대해서 검토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저 자신의 만족을 위하더라도 더 우선해야 할 가치가 있다면, 이를 위해서 가치관을 포기하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치관에 대한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무조건 내키는 대로 가치관을 형성하고 행동하라는 이야기로 봐서는 안 된다.
여러분의 가치관은 자신들이 옳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여러분이 자신에 따라 행동하기를 바라죠.
분노할 때에도, 증오할 때에도, 사랑할 때에도 그렇습니다.
각각의 상황에서 가치관들이 서로 모순될 지라도, 모두 서로 옳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가치관들이 서로 충돌하게 되는데,
이러한 충돌로 우리는 앞서 말한 정신적 몰락에 빠지게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누군가 정신적 몰락에 빠지는 경우, 가치관의 모순 속에서 헤매다가 정신적으로 몰락하게 된 경우를 본적이 없으신가요?
자신 안에서 모순되는 가치관을 보고서는
"애초에 가치를 누가 판단할 수 있나? 누가 옳은 지 판단할 수 있나? 판단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고 오만하다"면서 공허해하거나,
"가치 판단이 무의미하니 절대적 가치도 없고, 그러니 내키는 대로 살아야 겠다"고 하는 경우들을 보신 적이 없으신 가요?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올바른 가치 판단을 해서 저 정신적 몰락을 막으려고 해야 합니다.
여러분,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하려는 열정을 가져야 하며, 그러한 열정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사회적 규율이 여러분을 파괴할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가치관의 다툼 속에 혼란한 개인
가치관의 시비를 가리는 것은 필요한 일일까?
아니면 불필요한 일일까?
생각해볼 거리들
덕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무엇을 말하나?
-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그나마 있는 단서들로 생각을 해본다면, 우선 해당 개인은 자신만의 덕/가치관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 그런데 이 가치관이 개인만의 것이기 때문에, 타인/사회에 의한 것이 아닌 가치관, 즉 개인 고유의 가치관이란 말로 보인다.
왜 덕에 이름을 붙이고 싶어할까?
- 이 역시도 단서가 적지만 생각해 본다면, 이러하다.
- 본래는 이름이 없던 덕인데, 대중들과 이름을 공유하면서 이 개인은 대중이 되어버린다.
- 그런데 대중과 이름을 공유한다는 것이 뭘까?
- 이는 대중에게 이름을 알려주었다는 의미도 될 수 있지만, 대중들이 사용하는 이름이 있다면, 그것을 공유하여 자신의 것에도 이름을 붙인다는 뉘앙스가 될 수 있다.
- 그런 면에서 보면, 덕에 이름을 붙이고 싶어한다는 것은 사회에서 자신의 가치관을 어떻게 평가할지 시험해보고 사회적 덕인지 아닌지 살펴보려고 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듯 하다.
- 따라서 자신의 생각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살피는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을 듯 하다.
덕의 이름을 공유하는데, 왜 대중이 되고 가축떼가 되는가?
- 덕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두고, 앞서 자기 고유의 가치관에 대해 사회적 평가를 받는 것이라고 하였다.
- 그렇게 되면, 우리는 뭔가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고, 사회적으로 배척당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 이러면 우리는 배척당하지 않기 위해서 가치관 수정을 하게 될 텐데, 그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위험하거나 부정적 평가를 받는 가치관은 버리게 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거나 긍정적 평가를 받는 가치관을 취하게 될 것이다.
- 이에 따라 가치관의 사회화가 이뤄진다고 본 것 같다.
왜 덕은 왜 영혼을 고통스럽게도 하고, 감미롭게도 하며, 내장의 굶주림인가?
- 사회적 가치관이 아닌 자기 고유의 가치관은 사회적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
- 이런 점에서 개인은 정신적으로 힘들 수 있다.
- 또한 자기 고유의 가치관을 지니면, 자기 뜻 대로 산다는 점에서, 자기가 만족할 인생을 산다는 점에서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 이러한 자기 고유의 가치관은 사회적 가치 잣대에 바로 평가되지 않는다.
- 그런 점에서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사회적 분류를 할 필요가 없기도 하다.
- 그러므로 선악에 대한 평가도 존재하지 않는다.
- 또한 자기 고유의 가치관들은 자기의 본성적 만족을 요구하므로, 내장의 굶주림이라 표현이 되는 듯 하다.
지상의 덕이란 표현은 어떤 의미로 볼 수 있나?
- 자기 고유 가치관을 지니는 개인이 말하는 부분에서 "지상의 덕"이 언급된다.
- 이것은 천상의 덕과 대비되는 덕을 말한다.
- 따라서 종교적/사회적 덕이라기 보다는 개인적 /현세적 덕이라고 할 수 있다.
새가 품은 황금알은 무엇인가?
- 새가 품은 황금알은 별도의 의미를 지닌다기 보다는 만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암소는 무엇을 말하는가?
- 암소는 비탄/슬픔이라는 이름을 지니는데, 그에 따라서 비탄/슬픔을 비유한 것으로 볼 수 있을 듯 하다.
- 사회적 규율을 통해서 비탄/슬픔을 얻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서 우리는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덕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 하나의 질서를 갖춘 덕을 갖는다는 걸 말한다.
- 기본적으로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게 되면, 자신의 모든 행동이 합리화될 수 있는데, 이때 모순되는 것들이 합리화 될 수 있다.
- 예컨대, 도둑질 하지 말라면서 자신은 도둑질하는 것이다.
- 이는 다른 질서의 가치관이 병존하는 모습으로 볼 수 있다.
- 반대로 이런 모순되는 가치관들이 병존하지 않고, 하나의 획일화된 가치체계가 형성될 수 있는데, 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많은 덕을 갖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서로 다른 질서 체계를 갖춘 가치관들이 병존하는 모습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사막으로 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 이는 가치관의 무너짐이라던가 옳음에 대한 판단 의지를 상실한다는 것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 왜냐면 가치 혼란은 가치 판단을 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하는데, 이때 포기하는 경우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 차라투스트라에서 사막으로 나아가는 것은 도시에서 나아가는 것이며, 도시에서 나아가는 것은 사회적 잣대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사회적 잣대에서 벗어난 것은 자신만의 가치를 찾아 나아가겠다는 것인데, 그것을 포기한 것이므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표현이 나오는 듯 하다.
'니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1권 의역'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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