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1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1권 7장 의역 (완2) (읽고 쓰는 것에 관하여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4. 23. 17:27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Claude 3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7장 읽고 쓰는 것에 관하여


 

7장 개괄

 

 
7장은 책을 대하는 태도와 자신이 잠언으로 글을 쓰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갖는 한계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말하는 장이다.
 
니체는 자신의 피, 즉 사색 끝에 쓴 글을 좋아한다고 말한다.이는 개인이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탐구한다는 것이기에, 니체가 늘 말하던 주체적 판단을 하는 존재의 모습이다.그러면서 사색하지 않는 독자들로 인해 사색을 요하지 않는 글들이 생겨나고, 그렇게 반복되면 결국 사회가 망가지리라 말한다.
 
자신이 잠언을 쓰는 이유도 설명하는데, 미성숙한 사람들의 비평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의 글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 그러하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미성숙한 사람들과 자신 사이의 상태에 대해서 설명한다.미성숙한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보고 싶어도, 즉 이상 사회를 바라고 싶어도 한계를 마주하는데, 니체는 그러지 않는다고 말한다.그리고 그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라고 말한다.
 
사회적 규율은 개인이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데 방해하는 요소라는 점에서, 우리가 땅에 붙들게 만드는 중력처럼 표현된다.그리고 이 중력을 벗어날 수 있는 날아다니는 존재들, 사회적 규율을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본문

 
 
다른 이의 의견에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치열한 사색과 탐구 끝에 쓴 글을 저는 가장 사랑합니다.
치열하게 사색하며 쓴 글에는 그 저자 본인만의 탐구의 결과가 담기니 말입니다.
 
타인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기에, <글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고 제멋대로 보는 독자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나태한 독자들을 싫어 합니다.
 
이러한 독자들을 잘 아는 저자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사색하고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자신 역시 굳이 치열하게 사색하고 탐구하여 책을 낼 필요가 없다고 여깁니다.
그저 그들의 취향에 맞게, 
해를 위해 별도의 노력이 필요 없으면서도 <책을 읽고 교양을 쌓았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책을 쓸 뿐입니다.
 
이러한 독자들로 사회가 100년 정도 유지가 된다면,
사람들의 정신은 사색할 줄 모른 채로 가볍고 단편적인 생각들만 하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이런 점으로 인해서, 누구나 읽을 줄 아는 것은 미래를 위해 두고 볼 때 좋지 못한 일로 여겨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글을 깊게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자신의 교양을 위해서 글을 읽습니다.
소수의 사람만이 글을 깊게 이해하려고 하죠.
저자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책을 팔고 돈을 벌어 명성을 누리고자 할 텐데, 어느 쪽을 위해 그들이 글을 쓰겠습니까?
당연히 다수의 독자들의 취향에 맞추어 글을 쓰려고 하겠죠.
그러면 점차 책들은 깊게 이해하려는 소수를 위해 글을 쓰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다수 독자들의 취향에 따라, 가벼운 책들만 나오게 된다는 이야긴데, 
이는 다수의 무지한 독자들로 인해 출판 시장이 망쳐지게 됨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수 독자들의 취향을 위한 책들, 즉 가벼운 책들이 즐비하게 되면,
사람들이 접하는 책들도 결국 가벼운 수준에 불과한 책들 일테니,
아이들도 가벼운 책들을 보며, 가벼운 내용들이 상식이자 심오한 진리로 여겨지게 될 것이고, 그렇게 아이들의 의식 수준이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결국, 다수 독자들의 가벼운 취향이 아이들의 정신 마저 파괴하는 것입니다.
 
한때 사회적으로 사람들은 깊게 사고하고 판단하려 하고, 뛰어난 사람의 생각을 배우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근래에 들어서는 "깊게 사고하고 판단하고 싶은 사람은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그러기 싫은 사람은 그러지 말자"였다면,
지금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굳이 깊게 사고하고 판단할 필요가 있나"?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자신의 피로 글을 쓰다.
자신의 피로 글을 쓴다는 건 '자신의 것'으로 글을 쓴다는 의미이기에,
자신만의 치열한 사색과 탐구를 바탕으로 글을 쓴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타인의 지식을 차용해서 쓰는 건, 자신의 피가 아닌 타인의 피로 글을 쓴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자신만의 치열한 사색과 탐구를 아포리즘*의 형식으로 쓰는 저자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저자들은 독자들이 자신의 글을 그저 읽어내기만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온전히 독자에게 스며들기를 바랍니다.
왜냐면 이러한 저자들은 독자들이 자신의 글을 통해서 사색하고, 그에 따라 영향을 받길 바라며 글을 쓰기 때문입니다.

*진리나 통찰에 대해서 짧고 간결한 문장으로 써내는 것을 말한다.
속담이나 격언보다는 긴 형태의 글로 2~3문장으로 표현한다.
니체의 경우의 예시를 보면, 이렇다."나귀가 비극적일 수 있는가? —짊어질 수도 던져버릴 수도 없는 무거운 짐 밑에서 사람들이 몰락한다는 것…… 철학자의 경우." - 우상의 황혼 1장 11절이와 같이 어떤 비유와 상징들을 통해 통찰을 던져주는 글의 형태를 아포리즘이라고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역시 긴 형태의 아포리즘이라 할 수 있으므로, 이 저자들에는 니체 자신도 속한다.

 
그런데 왜 하필 아포리즘으로 쓰는 것일까요?
아포리즘이라는 것은 사색과 통찰을 담은 문학적으로 담는 짧은 글을 말합니다.
아포리즘을 이해할 능력이 된다면, 긴 설명을 듣는 것보다 빠르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즉 조건만 갖춰진다면, 누군가를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빠른 수단이란 겁니다.
 
탐구하는 저자가 책을 쓰는 이유는 자신의 앎을 나누기 위해서,
이를 본 독자나 후대의 탐구자들이 자신보다 더 나은 탐구를 하게 하기 위해섭니다.
그러므로 탐구하는 저자들은
후대의 탐구자들이 보다 빠르게 자신이 탐구한 것을 넘어 탐구를 해나갈 수 있도록,
그래서 되도록 빠르게 자신의 탐구를 익혀서 나아가게 하려고 할 겁니다.
 
탐구라는 것은 산에 오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올바른 이해, 정답을 찾아서 의문의 산을 오르는 것이죠.
그렇게 정상 위에 오를 때까지 말입니다.
 
탐구하는 것을 산에 오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탐구자는 후대의 탐구자가 자신이 오른 산을 똑같이 고생하며 오르게 하고 싶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선대 탐구자들은 후대의 탐구자가 보다 빠르게 이해하고 나아갈 수 있도록, 의문의 산을 쉽게 오를 수 있도록 할 것이며,
그렇게 다음 의문의 산도 쉽게 나아갈 수 있게 도울 텐데, 이때 아포리즘을 통해 후대의 탐구자들을 이끄는 것입니다.
물론 이 아포리즘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후대의 탐구자가 갖춰야 하겠지만요.
 
아포리즘은 설명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아포리즘을 보고 "대체 이게 무슨 소리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아포리즘은 능력을 갖춘 자들이 소통을 하기 위한 암구호,
조건을 갖추지 못한 자들이 자신의 이야기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는 암구호인 것입니다.
 

의문의 산을 앞에 둔 남자.
모든 의문의 산을 다 오르는 것도 좋지만,
이미 누군가가 개척한 곳을 처음 오르는 자처럼 수고를 들이며 올라가는 건 효율적이지 못하다.


 
저는 더 이상 여러분들처럼 느끼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한계 아래에서 고통받으며 염세적이고 회의적인 채로 머물러 있다면,
저는 그 한계를 넘어서서 염세주의도 회의주의도 손을 뻗지 못하는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선 화제가 갑자기 변화한다.

 
여러분은 세상을 바라볼 때, 이 세상은 부조리하기에 이상적 사회를 추구하기에 한계가 있다고 느낍니다.
그로 인해 여러분은 이상을 위해 노력하는 삶의 무의미함을 느끼며, 이상으로 향하게 하는 가치와 규율의 절대성을 부정하기에 이르죠.
그러면서 삶의 방향성을 잃게 되는데, 이때 염세적이게 되거나 삶에 대해 회의적이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느끼는 이 세상이 갖는 한계,
이상적 세상이 불가능하다는 세상의 한계는
제게 어떤 장애물도 되지 않으며, 저를 우울하게도, 염세적이게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한계가 제겐 한계가 아니란 이야깁니다.
 
여러분이 한계 속에서 머물며 보이는 모습들,
답이 없다고 설파하는 모습,
삶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면서 향락적으로/충동적으로 행동하는 모습,
진지하게 우울해 하는 모습은 모두 실소를 자아냅니다.
왜냐면, 한계를 벗어날 생각 없이, 여러분 스스로 한계에 머무르면서 이런 모습들을 보이고 있는 것이니까요.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 올바른 것을 추구하려고 하면 될 간단한 일을 시도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여러분이 삶의 한계를 벗어나고 싶다면, 지혜로워지고 싶다면,
우선 여러분을 둘러싼 사회적 규율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회적 규율로부터 벗어났을 때 주어지는 사회적 시선에도 개의치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존 관습을 어리석은 것으로 취급할 수 있어야 하고, 사회가 규율을 벗어난 여러분에게 관습을 덧씌우려 할 때, 단호하고 강하게 거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혜는 이런 모습의 우리를 원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회적 규율과 맞설 수 있는 존재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여러분도 저처럼 세상의 한계로 인한 염세주의와 허무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회적 규율과 맞서야 <자신을 위한/이상적 미래를 위한> 올바른 가치와 규율을 떠올릴 수 있다.
이렇게 되어야 사회에 올바른 가치와 규율을 제시할 기반을 마련하게 되고, 삶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

 

정상 위에서 먹구름을 바라보는 차라투스트라.
지상을 덮은 먹구름은 이상적 세계를 바라 볼 수 없게 하여, 사람들이 절망하게 한다.


 
여러분은 삶이 고단하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삶은 고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연약한 척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가치관들을 짊어지고 잘 살아가는 존재들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의 가치관에 따르는 부담에 대해서 민감히 반응하지 않는 존재들이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아침에는 삶이 살 만하다고 희망적으로 느끼더니, 일과를 마친 저녁에는 삶은 역시 힘들다*고 말합니다.
이러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아침에는 하루의 시작이라 긍정적으로 전망하고, 저녁에는 일과를 보낸 후 지치게 되어서 그런다.

 
우리가 삶을 사랑하고 기대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 자체가 사랑스럽고 기대할 만하기에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삶 자체는 우리에게 고단하니 말입니다.
 
삶이 고단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삶을 사랑하고 기대하는 것*은
삶을 희망적으로 바라보는 것에 우리가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단한 삶에 대해서도 기대를 품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실제 겪는 세상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인간은 늘 좋은 하루, 이상적인 상황이 펼쳐지길 기대한다.
이는 세상에 대해 모순되는 입장을, 경험상 사회는 불만족스러운 영역이라는 입장과 그래도 오늘은 이상적인/좋은 하루가 펼쳐질 것이라며 기대하는 입장을 제시하게 된다.
즉 세상에 부정적이면서도 내심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과 같이 삶의 한계를 느끼면서 삶을 희망적으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은 모순적입니다.
세상은 희망적이지 않다고 여기면서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니 말입니다.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갖고 사랑하는 것이 헛되다 할지라도, 우리가 세상에 그러한 희망을 갖는 것은
우리가 말로는 세상을 두고 절망스러우며 이상적인 사회가 어렵다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심 이상적인 세상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삶에 대한 희망으로 인해 활기찬 사람들
하루의 시작에서 우리는 만족스러운 삶의 모습을 그려보곤 하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이상적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를 힘들 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제가 행복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악마를 보았었는데,
그 악마는 우리가 자유롭게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중력과 같은 것, 즉 사회적 규율이었습니다.
 
저는 사회적 규율은 사회구성원들에게 가볍지 않게, 철저하게, 깊고 엄숙하게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사람들은 본성대로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하고 사회적 규율에 따라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회적 규율을 분노가 아닌 웃음으로 맞서야 합니다.
사회적 규율에 반발하여 분노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규율을 비웃으며,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해도 신경쓰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적 규율에 저항하고 맞서기보다는 무시하라는 이야기다.
이때 사회적 규율은 파괴되지 않고 외면 당함으로써, 영향력을 잃게 된다.
이는 후에 차라투스트라 4권 18장에서 언급되는데, 신을 두고 분노가 아니라 웃음으로 죽이게 되어, 신이 되살아나는 문제에 놓이기도 한다.


저는 이 사회적 규율의 압박 속에서 버티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점차 사회적 규율이 내게 영향을 덜 끼치기 시작했고,
저는 제 본성에 따라 행동할 수 있게, 날 제한하던 중력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사회적 규율로부터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사회적 규율이 제게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이제 저는 온전히 제 자신을 볼 수 있으며, 이제야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행복에 대해/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 사회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비/비눗방울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합니다.
이들은 가볍고 작으며 연약하지만, 중력에 휘둘리지 않고 춤을 추듯 활발히 날아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비나 비눗방울을 보면, 저는 감동하여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저는 이처럼 중력을 벗어나서 춤을 출 줄 아는 신만을 믿을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력을 이기고 날아다니는 나비
나비는 사회적 규율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를 일컫는다.

 


생각해볼 거리들

 
피는 왜 정신으로 해석되는가?
- 차라투스트라가 좋아하는 것은 자신의 피로 글을 쓴 사람을 말한다.
- 이는 타인의 피로 글을 쓰는 사람은 해당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 책을 타인의 피로 쓴다면, 이는 책의 내용물이 타인의 지식을 기반으로 하여 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런 점에서 보면 자신의 피로 책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사색/탐구를 기반으로 하여 쓴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 그렇다고 자신의 생각을 쓴 모든 글을 지칭한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뒤이어 나오는 잠언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잠언을 쓰는 사람은 탐구적 과제를 명쾌하게 설명해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삼는 것 같기 때문이다.
- 따라서 통찰력을 가져야 하며, 순수히 본인의 사색을 통해서 글을 써야 한다는 뉘앙스로 읽을 수 있다.
 
- 또한 본인의 사색에 따라서 글을 쓰므로, 이 글에는 저자의 정신이 담겼다고/드러난다고 말할 수 있다.
 
독자를 아는 독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봐야 하는가?
- 플라톤은 법률에서 예술에 대해 평가를 할 때, 대중적 인기를 놓고 평가해선 안된다고 말한다.
- 그 이유는 대중적 평가가 교육적 가치가 낮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이런 점에서 타인의 생각을 깊게 살피려 하지 않는 독자는 생각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 독자일 수 있고, 이런 독자들은 생각하는 것보다는 시간을 소모하고 재미를 얻으려는 독자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 그런 점에서 이 독자들을 위한 글을 쓴다면, 그것은 재미 위주가 될 것이니, 저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글 보다는 자극적인 소재의 글을 쓰려고 하게 된다.
- 그래서 사유하지 않고 즉흥적인 재미를 위한 것만 한다는 말로 해석된다.
 
사색하지 않는 독자들의 정신이 한 세기를 가면 왜 악취가 나는가?
- 사색하지 않는 독자들이 사회에 즐비하게 되어, 사색하는 문화가 경시되고, 그에 따라서 정신적 수준이 낮아지게 되기 때문이다.
- 이에 따라 시대의 정신 또는 그 시대의 사람들의 정신에서 악취가 난다고 표현한 듯하다.
 
누구나 읽기를 배우면 쓰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부패하는가?
- 앞서 "독자를 아는 독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봐야 하는가?"에서 언급했다 시피, 다수의 독자로 인하여 독서 문화의 질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 독자들의 요구에 맞춰서 저자들의 글은 사색과 멀어지게 될 것이고, 사색과 멀어진 책들이 쏟아지면, 결국 어린 독자들이 접하는 책도 사색과 먼 책들이 되어 사색하는 수준이 낮아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용기는 웃고자 한다는 말은 왜 나오나?
- 차라투스트라는 기존의 사회적 통념을 비판하거나 통념과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된다.
- 이를 잠언을 통해서 숨겨두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 이는 사람들이 수수께끼 처럼 여기는 환상의 존재가 되는 것인데, 이런 잠언을 사용하는 이유는 선별적으로 소통하기 위해서다.
- 그리고 그렇게 소통하는 대화의 재미를 위한 것이다.
- 따라서 용기가 웃고자 한다는 것은 통념을 벗어난 이야기를 잠언을 통해서 하는 건 소통의 재미를 위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사람들을 덮고 있는 먹구름은 무엇인가?
-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현실 세계의 부조리를 타파할 수 없다고 여긴다.
- 이에 따라서 그들은 이상적인 세계를 바라면서도, 그 불가능함에 따라 좌절한다.
- 이를 먹구름이라고 표현했다고 본다.
 
차라투스트라는 어떻게 이 먹구름 위에 있나?
- 차라투스트라는 후에 언급되겠지만, 영원회귀를 통해서 현실세계의 부조리를 타파할 가능성을 찾는다.
-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염세주의와 허무주의를 극복하였기에, 이 먹구름을 위에서 내려다 보는 상황이 된다.
 
 
"삶은 견뎌내기 어렵다"라고 말하는 구절부터 의역본은 순서가 바뀌었는데, 이유가 무엇인가?
- 논리 전개가 부드럽게 이어지려면, 순서의 변경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 뜬금없이 툭툭 던져진 상태인데, 이를 순서 정리를 하면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나비와 비눗방울을 언급하나?
- 나비와 비눗방울은 중력의 영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 중력의 영은 사회적 규율을 말하므로, 나비와 비눗방울은 사회적 규율에서 벗어난 존재, 자유로운 존재라 할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춤을 추는 신만을 믿는다고 말하나?
- 여기서 춤을 추는 신은 디오니소스를 말한다.
- 비극의 탄생에서 디오니소스적 인간이 되어야 함을 언급하는데, 이 디오니소스는 아폴론과 대비된다.
- 아폴론은 이상적인 것을 외부로 구현하는 예술을 관장한다면, 디오니소스는 이상적인 것을 몸으로 구현하는 예술을 관장한다.
- 이에 따라서 니체는 이상적인 것을 몸으로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며, 디오니소스에게 강한 의미를 둔다.
- 결과적으로는 인간에게 있어 이상적인 것은 자신의 본성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적절하므로, 디오니소스적인 모습이 되는 것은 가장 이상적인 상태가 된다.
 
- 차라투스트라는 어떤 신에 의해서 춤을 추게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이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것을 행동할 수 있는 인물임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