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1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1권 3장 의역 (완2) (사후세계를 긍정하는 사람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4. 16. 20:29

ㅡ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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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3장 사후세계를 긍정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3장 개괄

 

 

이번 장에서는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니체는 신과 사후세계가 현세의 고통때문에 고안되었다는 점을 언급한다.

즉, 현세에 대한 경멸이 내세를 고안하게 한 이유인 것이다.

이런 점에 따라서 사람들은 현세를 중요시하지 않게 된다.

 

니체는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비판하면서, 내세가 아닌 현세가 삶의 터전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 정동에 대해서 더 사색하고 탐구하여 현세의 만족과 행복을 누리려고 노력하라고 이야기한다.

 


 

본문

 

 

저도 한때는 사후세계 일체, 그러니까 신과 사후세계에 대해서 긍정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세계가 존재하는지 의문을 품을 때에도 나는 신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신에 의해서 이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계는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신의 작품, 신이 꾸는 꿈이거나 신이란 작가가 써낸 소설이라고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 신은 무언가로부터 고통받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죠.

 

그런데 고통을 벗어나는 간편한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요?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 아닐까요*?

그렇게 내 고통을 벗어나서 잊고 다시 살아가는 것 아닐까요?

신도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고통을 잊는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드라마를 보면서, 비극을 보면서 자신의 고통을 잊는 사람들의 모습과 같다.

 

타인의 고통받는 모습이 우리의 시선을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여, 종국엔 망각하게 하듯이,

신에게도 자신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 고통받는 다른 존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선과 악, 쾌락과 고통, 너와 나 - 이것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나타나는 비극이 신에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고통받는 자신을 위해, 신은 이 세계가 영원히 완전할 수 없게끔 만든 것이다.”

나는 이런 이해에 따라 신에 의한 세계를 바라보았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세계를 창조한 신

고통을 잊기 위해 세계를 만든 신은 지극히 인간적인 존재로 느껴진다.


 

저도 사후세계 일체를 긍정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긍정은 정말 사후의 것에 대한 것이었을까요?

지금에 이르러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앞서 말한 신/사람들이 말하는 다른 신들 모두 그저 개인의 세계에 대한 해석/상상에 불과합니다.

신이나 사후 세계는  '한 개인/사람들의 두려움이나 욕구의 결과물'일 뿐이라는 겁니다.

이것들은 그저 개인의 고통과 번민이 만들어낸 것이지, 정말로 사후세계가 있어서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 아니란 이야깁니다.

 

제가 왜 이렇게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는지 궁금할 겁니다.

저는 제가 가진 생각들을 천천히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생각들에 오류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제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들의 오류를 찾아 극복해 나갔고, 그 결과 현재의 생각에 이른 것입니다.

 

오류를 찾는 과정 속에서 저는 신이 허구였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신과 그 일체에 대한 생각이 제 정신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제게는 다시 신과 사후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이자 굴욕적인 일입니다.

그릇되다고 충분히 판단되는 것을 어떻게 다시 옳다고 여기며 살아가란 말입니까?

 

신에 대한 진실을 마주한 차라투스트라

그는 신이라는 것이 인간의 공상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은 왜 생겨났을까요?

저는 고통받는 인간이 행복을 위해서 고안한 것이 사후세계라 생각합니다.

 

현재의 삶에서 고통받고 의욕을 상실한 인간이 정신적 안정을 위해 만든 것이 내세/사후세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후세계는 현재의 삶이 주는 고통에 지친, 그래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졌을 때, 죽음 이후에 이상적인 세계가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만들어집니다.

 

제 이야기를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릇된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과의 관계와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비롯되는 실망과 절망.

즉, 이 세계에서는 이상적인 사회가 나타날 수 없다는 생각 속에서 방황하던 정신이

죽음 이후를 두고 희망을 걸어본 것입니다.

 

세계에 절망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간절함에 따라,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본능적 판단에 따라,

사후세계를 떠올린 것입니다.

 

그렇게 고안된 사후세계는 온갖 논리가 덧붙여졌고,

이에 감응된 사람들은 사후세계로 나아가려고 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저 사후세계는 간절함에 따라 고안된 세계이니, 허구일 뿐,

천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이 사후세계는 본능적 직관이 아니라면, 가늠할 수도 없는 세계인 것입니다.

 

존재에 대해 증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후세계라는 가장 기묘한 것들의 존재가 확실한 것인양 증명되고 있지 않습니까?

 

 

현세에 절망한 사람

그는 현세가 아닌 곳에서 희망을 찾기에 이르고, 그것이 사후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여러분,

우리가 진정으로 믿고 따라야 하는 것은

신과 사후세계가 아니라 우리 몸에 나타나는 신체적 반응*입니다.

*기뻐서 흥분하거나, 화가 나서 흥분하는 등의 반응을 말한다.

이러한 반응은 개인의 가치관을 담고 있는데, 이 흥분의 이유들을 살피면서 우리는 좀 더 나 자신에 대해서 이해하고, 나에게 맞는 것을 찾을 수 있다.

신체적 반응을 다르게 말하면 '정동'이다.

 

신체적 반응,

이것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우리 자신에 대한 가장 솔직하고도 정직한 반응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드러내 줍니다.

예를 들어, 계획적인 사람을 만나면 편안하고 좋을 줄 알았는데, 되려 불편하고 싫었다면 왜 그런 것인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생각보다 계획적인 걸 좋아하지 않거나, 계회적이기에는 아직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란 것을 나타내니까요.

 

신체적 반응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올바르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 자신을 올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나와 개인들, 인간에 대해서 더 많은 이해*를 가지게 되고,

그렇게 우리는 이제껏 실추된 본성/신체적 반응의 명예**를 회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같은 것을 두고도 다양한 신체적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자신에 대해서 탐구하는 사람은 어떤 것이 자신과 비슷한지, 어떤 것이 왜 자신과 안 맞는지를 살피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다.

**개인의 신체적 반응은 사회적 요구와 다른 경우들이 있다.

그렇기에 사회에서는 신체적 반응을 따르지 말고 억압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서 신체적 반응은 부정적이고 억압해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시킨다.

이는 우리 자신을 알려주는 신체적 반응에 대한 몰이해이자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제 몸에서 나타나는 신체적 반응들.

이 반응들을 살핌으로써, 저는 제 자신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제 자신에게 긍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터득한 것들을 여러분에게 공유하려 합니다.

이제 더는 사후세계에 빠져, 자신을 살피지 않는 잘못에서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체적 반응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그에 따라 나아가는 이 길을 새로운 제시합니다.

여러분이 본성에 따르는 이 길을 인정하고, 원하면 좋겠습니다.

 

신체 드러나는 정동을 파악하려는 정신

우리는 자신의 신체적 반응, 즉 정동을 인지하고 정동에 따라 판단하는 존재일 뿐이다.

배고픔/화남 등, 이런 것이 우리 신체에 나타나는 정동이다.


 

저는 여러분이 사후세계를 지향하는 길로 나아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사후세계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현생을 경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현생을 부정하고, 내세라는 사후세계를 긍정하며, 구원이라는 개념을 만든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더 나은 삶을 살지 않으며, 자신의 본성을 괴롭히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들이 말하는 내세에 이르는 길은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좀 더 쉽게/편법을 통해서라도 내세에 이를 수 있는 방법, 면죄부나 자기 희생을 고안해낸 겁니다.

 

그렇게 자기 희생을 함으로써, 저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이 현세를 벗어날 조건을 갖추었다는 망상에 사로 잡혀 희열을 느낍니다.

그런데 벗어남에 따른 희열은 어떻게 느낀 것일까요?

현재 자기 자신에서 느낀 것 아닌가요?

 

저는 사후세계를 지향하는 이들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저를 교화시키려고 접근해 와도, 제가 그들을 교화시키려고 하니 되려 배척하고 화를 내도, 그들에게 화가 나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저들이 다시금 건강해지기를, 현세를 긍정하는 존재가 되기를, 그래서 자신이 바라는 행복을 이룩하는 존재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혹여나 그들이 현세를 긍정하다가도 다시금 내세를 떠올린다 해도,

그래서 다시금 사후세계를 지향하는 이들을 찾아도, 저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사후세계에 대한 동경이 남아있더라도 말입니다.

 

내세/사후세계를 꾸며내고, 신을 갈망하는 자들 중에는 현세를 경멸하고 사후세계를 지향하는 자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들에게 진실을 말하는 정직한 자들을 싫어합니다.

 

사후세계를 주장하는 이와 차라투스트라의 대담

사후세계의 정당성을 두고 둘의 입장은 갈린다.


 

과거, 즉 고대 그리스에서도 고통 속에 사람들이 빠져 있었고, 그들 역시 우리가 신과 사후세계를 긍정하는 것처럼 정신적 만족을 위해 지향하던 것이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현자의 생각과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그들을 고통에서 구원하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현자의 가르침에 대한 의심은 죄였었습니다.

지금과는 다른 현자에 대한 교조주의가 팽배했던 것이죠.

 

저는 이와 같은 교조주의자들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교리를 믿고 따르길 바라며, 교리를 의심하지 못하게 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교조주의에서는 그나마 지금보다는 사정이 낫긴 했습니다.

저들이 믿었던 것은 내세나 희생이 아닌 자신의 신체적 반응이었으니까요.

그들의 신체적 반응이 모두 행복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지표였던 겁니다.

 

하지만 저들은 신체, 즉 감각과 본성이 인간에게 착각과 오류를 일으킨다고 보며 부정적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신체를 벗어나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롭다고 여겼으며,

그래서 그들은 신들이 자신에게 부여한 생의 의무를 어서 다하고 신체를 벗어나길 바랐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사후세계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그렇게 사후세계에 대한 설교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천재를 추종하는 과거 사람들

이성을 중시하던 시대엔 천재의 이성을 떠받들었다.

또한 신체는 이성의 올바른 인식을 방해한다고 여겨, 신체를 벗어나는 것이 이상적인 인식에 이른다고 여겼다.


 

형제들이여,

우리 자신의 신체적 반응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행복한 삶을 살려한다면,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게 더 낫습니다.

 

신체적 반응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가장 정직하게 말해줍니다.

신체적 반응은 우리 자신의 가장 순수한 목소리인 것입니다.

 

이처럼 신체적 반응은 우리에 대해서 솔직하게/가감없이 말해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본성을 이해할 기틀을 마련해줍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후세계를 긍정하는 사람

차라투스트라는 사후세계를 긍정하지 말고, 자신의 신체적 반응에 주목하라고 말하고 있다.


생각해볼 거리

 

차라투스트라는 왜 세계를 고통받고 번민하는 신의 작품이라 여겼을까?

- 신이 세계를 만들었다는 것은 일반적인 창세의 핵심이다.

- 그런데 왜 굳이 세계를 만들었나 하는 점에서 문제가 생긴다.

- 신이란 존재는 완전한 존재인데, 어떤 필요를 느껴 세계를 만들어야 했냐는 것이다.

- 신이 세계를 만들 필요를 왜 느꼈는지 알 수 없지만, 세계가 어떤 필요에 의해서 생겨야 했다면, 그것은 신이 세계에 의존하는 불완전한 존재란 이야기가 된다.

- 이런 점에 따라서 신에 어떤 불완전함을 지녔는지 살펴야 하는데, 차라투스트라는 신이 가진 불완전함이 고통받음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 어떻든 간에, 완전한 존재여야 하는 신이 불완전하게 되면, 신은 모순적인 존재가 되는데, 이는 곧 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지게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세계를 불완전한 모방물이라고 보았나?

- 창세에 대한 고대 그리스의 입장을 보면, 어떤 완전한 것을 기반으로 모방물이 생기는데, 그것이 현재의 세계라고 보는 입장이 있다.

- 이런 점에 따라 현 세계는 모방물로 취급된다.

(창세와 관련하여 "완전한 존재가 완전한 것을 보고 만들었는데 왜 불완전한 것이 나타나는가" 라는 문제도 대두될 수 있다.)

 

- 세계의 불완전성은 "세계에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것이 없다"는 관점에 비롯된다고 보여지지 않는다.

- 왜냐면 세계의 불완전함은 "세계는 이상적이지 못하다"는 입장에서 비롯된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세계는 왜 이렇게 혼란스러운가", "앞으로 이 세계는 안정될 수 있나"와 같은 물음에서 불완전함이 도출되는 듯 하다.

 

- 세계의 기원과 세계의 특징으로 볼 때, 세계는 완전한 것에 모방물임에도 불구하고, 혼란한 상태의 것이 된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대지는 무엇인가?
- 대지 개념은 천상 개념과 대비하여 볼 수 있다.

- 천상 개념은 종교적/사회적 색채를 띄는데, 이상적인 것이거나 사후세계를 나타내는 단어라 생각해볼 수 있다.

- 대지 개념은 그와 상반되는 개념인데, 천상이 멀리 바라봐야 하는 대상이라면, 대지는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것이 된다.

- 이에 따라서 대지는 우리의 현재나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의 의미를 갖는다.

 

- 종교적/사회적 색채에 따라서 해석하게 되면, 대지는 개인을 말한다.

- 왜냐면 이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으로 대비되기 때문이다.

- 따라서 대지를 따르라고 하는 건 종교적/사회적 규율을 따르지 말고, 자신을 따르라는 말로 해석해볼 수도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신체는 무엇인가?

- 우리는 정신과 신체로 구성이 된다.

- 그리고 우리는 정신이 본체이며, 신체는 정신을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 문제는 신체에서 모든 감정적/감각적 반응이 나타나고, 정신이 이 감정적/감각적 반응을 분석 파악하게 된다.

- 이 부분이 중요한데, 감정적/감각적 반응이 나타나는 과정은 정신이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즉 신체는 정신의 관여를 받지 않는데, 어떻게 감정적/감각적 반응을 만들어서 정신에게 제공하느냐는 것이다.

- 정신은 신체가 만든 결과물을 보고 있으니 말이다.

- 신체가 만든 결과물들, 감정적/감각적 반응들을 가리켜 정동이라고 칭한다.

 

- 니체는 이러한 특징을 주목했던 것으로 보이고, 곧이어 나오는 4장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

- 정리해 본다면, 신체라는 것은 정신에게 우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기피하는 것 등의 다양한 것들을 제공하는 원천이다.

 

신체가 신체에게 절망했다고 하는데, 이 말은 어떻게 볼 수 있나?

- 앞선 이야기에서 신체가 감정적/감각적 반응을 제공한다고 하였다.

- 즉 신체는 어떤 자극을 받아서 반응하는 물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 그러면 그 물체의 감각적/감정적 반응은 몇 가지 과정을 거쳐서 다시금 다른 물체에 영향을 주게 된다.

- 신체는 이처럼 외부와 상호작용하여 나타난 반응이자, 외부로 반응을 표출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 외부로 반응을 표출하는 기능에 맞춰서 생각해보면, 신체가 신체에게 절망한다는 것은, 어떤 한 존재가 보이는 행동으로 인해서 다른 존재가 절망하게 된다는 뉘앙스로 해석할 수 있다.

 

신체가 신체에게 절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앞서 말한 대로라면, 신체가 신체에게 절망한다는 것은 어떤 존재의 행동에 의해서 다른 존재가 절망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 이는 말 그대로 우리가 다른 존재에게 절망하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그러면 우리가 타인에게 절망하는 순간은 무엇일까?

- 상대에게 이상적 행동을 기대했는데도 실망스러운 행동만 반복하는 경우가 그러한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왜 우리는 상대의 행위에 실망하는지, 왜 실망하는 행동을 하는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 결론적으로, 사회적/종교적 규율에만 따르지 개인의 취향은 고려하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되면서 실망하게 된다.

- 즉 투박하고 강압적인 규율에 따르기만 하니 그런 것이다.

- 우리가 좀 더 세심하게 살폈더라면, 우리는 투박하고 강압적인 규율에 따라 타인을 대했을까; 이것이 니체의 화두라고 할 수 있다.

- 그러므로 좀 더 세심하게 타인을 살피고, 서로 조화를 이루기 위한 노력과 공부가 필요한데, 사람들은 이러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 그런 점에서 사람들은 대체로 직관적인 반응을 하며 지내고, 그에 따라서 사람들은 절망감에 빠진다고 볼 수 있다.

 

존재의 배란 무엇인가?

-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확한 이야기를 할 수 없으나, 두 가지 제안은 할 수 있을 듯 하다.

 

- 먼저 존재의 배는 존재들을 담는 복부로 취급할 수 있는데, 이는 곧 모든 존재를 잉태한 것이라 생각해봄직 하다.

- 곧 시초라고도 생각해볼 수 있는데, 이에 따라서 보면, 존재의 배가 절망한 인간에게 무언가 말을 한 상황으로 이어진다.

- 즉, 절망한 개인은 시초를 살피면서 신을 떠올리고 사후세계로 나아가게끔 한다는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 이후 내용을 보면, 존재의 배가 인간이 인간인 상태에만 말을 건넨다는 표현이 나타난다.

- 이는 "시초 문제는 인간이 살아있을 때에만 생각하는 것이지, 실제론 없다"는 이야기로 나아가고, 결국 "시초에 대한 것, 신이나 사후 세계에 대한 생각은 인간이 살아있을 때에나 생각하는 허구다"라는 이야기가 된다.

 

- 존재의 배에 대한 다른 해석을 해본다면, 인간의 판단 기능은 머리와 가슴과 배(하체)에서 이뤄진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

- 이 입장에서 머리는 이성을, 가슴은 감정을, 배는 욕구를 상징한다.

- 이런 점에서 보면, 존재의 배가 개인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욕구에 따른 판단을 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이는 글의 상황상 납득이 되는 부분이긴 한데, 왜냐면 절망한 개인은 어떻게서든 현세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  행복이나 평화/안정에 이르고자 하는 욕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존재의 배에 대한 다른 니체의 활용이 있다면, 해석이 더 온전할 수 있을 듯 하다.

- (이 글에선 후자의 경우를 놓고 해석했다)

 

나와 나의 모순과 혼란이란 표현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 이 부분은 이성적인 나와 직관적인 나의 모순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 앞서 신체와 정신을 구분하여 접근한다고 이야기를 하였는데, 신체가 제공하는 감정적/감각적 반응을 정신이 보았을 때 정신이 예측한 것과 다른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 이는 곧 우리가 "이런 상황이 펼쳐진다면 열받을 거야"라고 했는데, 막상 그 상황이 닥치니 "어, 괜찮네? 의외로 나쁘지 않네?"라고 말하는 상황과 같다고 보인다.

- 이는 결국 정신이 나라는 존재를 잘못 파악해서 생기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 백승영 해석본을 기준으로 볼 때, 평가하는 나와 사물의 척도이자 가치인 나가 대립되는데, 평가하는 나가 정신을 말한다면, 사물의 척도이자 가치인 나는 신체를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왜냐면, 신체를 통해서 감정적/감각적 반응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 이는 신체가 어떤 자극에 대한 척도라는 점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저들이 살피는 어두웠던 시절은 무엇인가?

- 서술되는 내용으로 보면, 이성을 중시하던 시대에 대한 내용이다.

- 이 시대의 경우, 천재적 존재의 이성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교조주의의 형태를 보이게 되는데, 고대에서 중세까지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 이들의 경우, 이성적 사고를 통한 접근을 중시하고, 신체/감각에 대해서는 불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 그래서 신체를 벗어나는 것을 자신들에게 이로운 것으로 취급하곤 했다.

- 이런 점에서, 사후세계, 즉 육신을 벗어난 영적 세계를 긍정하곤 했는데, 차라투스트라에서 언급되는 부분은 이런 부분에 대한 내용으로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