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1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1권 2장 의역 (완2) (미덕의 강단에서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4. 13. 01:53

ㅡ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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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2. 미덕의 강단에서


 

2장 개괄

 
 
2장은 사회적 규율에 대한 필요성과 니체의 평가가 담긴 장이다.
 
사회적 규율은 사람들이 가치판단을 해야하는 수고를 덜어주는 편리한 도구다.
그렇지만 사회적 규율은 사람들이 능동적인 의식을 갖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니체는 이러한 사회적 규율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수용되어지는지, 왜 수용되어지는지를 설명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유로 대두되는 것은 바로 평화이다.
사회적으로 내면적으로도 평화로운 것을 추구하기에, 사회적 질서가 고안되었다는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사회적 규율의 기능은 그다지 좋지 못한 것으로 평가한다.
왜냐면 평화로움을 위해서 개인의 본성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삶의 목표도 지니지 못한다면, 평화로운 삶을 목표로 삼는 것은 그나마 나은 목표라고 언급하게 된다.
 
 


 

본문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잠*과 미덕에 대해 강연을 하면서 막대한 부와 함께 명예를 지니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가 도는 것을 듣게 된다.
이 사람이 궁금해진 차라투스트라는 그가 강연하는 곳으로 가, 다른 젊은이들과 함께 그의 잠에 대한 강의를 듣게 된다.

*잠은 사회적 규율을 말한다.
사회적 규율은 사회구성원의 정신이 사색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색하지 않는다는 특징을 두고, 잠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현자가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의식을 잠재우는 '사회적 규율'을 앞에 두고,
     그 위대함에 경의를 표하고, 우리가 사회적 규율을 지키고 있지 못함에 대해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사회적 규율에 의문을 갖고 몰래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규율을 위반한 자신을 숨기고 싶어 합니다.
     만약 자신이 사회적 규율을 어긴 것이 드러난다면,
     사회적 규율을 지키는 자들로부터 지적받고 사회적으로 배척당할 테니까요.
 
     사람들 중에는 또 사회적 규율을 부정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사회적 규율에 잘 따르는 것을 방해하는 자들이죠.
 
     이처럼 사회적 규율을 어기고, 부정하는 사람들은 피해야 합니다.
 

도둑과 야경꾼
니체는 이를 통해 사회적 규율에 따르지 않는 두 유형의 존재를 나타낸다.


 
 
     사회적 규율을 따르며 사는 것을 두고,
     "사회적 기준을 따르다 자신을 버린다"며 하찮은 것으로 취급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규율에 따라 사는 것은 우리가 사회의 일원으로 잘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입니다.
 
     사회의 일원으로 잘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자신의 본성을 극복을 해야 합니다.
     예컨대, 누군가 날 화나게 해서 그 사람에게 화를 내고 싶어도 참아야 한다는 것이죠.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사회적 목표인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 노력한 존재가 되고,
     이를 통해서 우리는 안도감을 갖습니다.
 
     그렇게 사회적 규율에 따르면서 본성을 극복한 우리는

     본성을 극복하며 생긴 스트레스를 해소해야 합니다.
     이렇게 생긴 스트레스를 살피지 않고 쌓이게 둔다면,

     우리는 사회적 규율을 따르는 것에 대해서 회의적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적 규율에 따라 우리의 본성을 극복해야 하는 마땅한 이유들을 찾아야 합니다.
     사회적 규율에 따를 이유가 마땅치 않다면,
     우리의 영혼은 본성을 극복할지 말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상태가 되어,
     사회적 규율을 따르는 것에 대해 또다시 회의적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부조리한 일을 웃어 넘길 수 있는 정신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웃어 넘길 수 없다면, 우리는 밤새 그 일을 떠올리며, 분노하거나 근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극복을 해야 하는 사회인
일상의 평화를 위해서, 사회는 타인의 무례함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길 바란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점이지만,
     우리가 사회적 규율을 잘 지키려면, 우리는 평소에 사회적 규율에 맞는 행실을 해야 합니다.
     만약 사회적 규율을 한 번이라도 어긴 적이 있는 경우, 우리는 사회적 규율을 잘 지키려 노력하지 않을 확률이 크기 때문입니다.
 
     평소 사회적 규율에 맞는 행동을 잘 하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를 더 알아야 합니다.
     즉 사회적 규율에 따르는 그 행동이 사색이나 반성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적 규율에 따라 한 행동을 두고 의문을 품어 사색하거나 반성을 한다면,
     우리는 사회적 규율에 대해서 회의적이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사회적 규율에 따라 행동했다면,
     그 행동을 놓고, 올바른지 그른지 살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종교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탈없이 평화롭게 지내는 것
     이것이 사회적 규율이 바라는 것입니다.
     이웃 중에 악마가 있더라도, 우리는 그와 평화롭게 지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의 평화가 깨질 수 있으니까요.
 
     비리와 부정으로 인해 올바르지 못한 관리에 대해서도 복종해야 합니다.
     복종하지 않으면 분란이 생기고, 이로 인해 평화가 깨질 테니 말입니다.
     평화를 깨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사회적 규율이 원하는 것이고,
     권력은 부패한 관리들에게 있으니, 복종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목자가 사악하든 탐욕적이든 간에, 자신의 양 떼/백성을 가장 푸른 초원으로 이끈다면, 이 목자는 훌륭한 목자입니다.
     마찬가지로 관리가 사악하든 부패했든 간에 우리를 평화와 풍족함으로 이끈다면, 이 관리는 훌륭한 관리입니다.
     그러므로 관리가 비리와 부정부패를 저지르더라도 우리를 평화와 풍요로움으로 이끈다면, 우리는 그 관리에게 복종하는 것이 올바릅니다.
     평화와 풍족함, 이것이 사회적 규율이 원하는 것이란 점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사회 속에서 잘 적응해 살아가려고 한다면, 자신이 꿈꿀 수 없는 명예나 부를 바라는 건 부적절합니다.
     그런 명예나 부를 바라는 것은 우리를 무한한 부러움으로 이끌고 가고, 스트레스만 줄테니까요.
     그러니 우리는 주변인들 사이에서의 소소한 명예와 주변인들 사이에서의 적당한 경제적 수준을 바라야 합니다.
 
     사회적 규율을 잘 따르려고 한다면, 많은 사람보다는 소수의 몇몇과 교제 하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소수의 몇몇과의 교제도 적당한 시간만 교제를 하고 헤어져야 합니다.
     지나치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면 서로 실수를 하게 될 것이고, 결국 불만과 다툼이 생길 테니까요.
 
     정신적으로 가난한 이, 즉 생각이 많지 않고 단순한 사람들을 나는 사랑합니다.
     그들과 갈등 상황일 경우, 우리가 그들을 적당히 인정해주면,

     그들은 ‘이제까지 어떠했는지’와는 상관없이 만족해하며, 문제를 쉽게 종결시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우리에게 다양한 사회적 요구를 하지 않으니, 우리는 큰 부담없이 생활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규율에 따라 잘 사는 이들은 이렇게 생활을 합니다.
 

평화롭고 풍족한 사회
사회적 규율은 인간의 본성을 억압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사회적 규율은 평화와 번영이라는 숭고한 목적을 바라보고 있기도 하다.
 


 
 
     사색을 할 때, 우리는 사회적 규율을 사색의 대상으로 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회적 규율은 사색의 대상이 되는 걸 원치 않습니다.
     우리가 그저 규율에 따르기를 바라죠.
      
     사색을 하고자 한다면, 사회적 규율을 두고 사색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하루를 돌이켜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를 평온하게 잘 보내기 위해서 노력했는지, 자신을 잘 극복하고 대처했는지,

     자기를  극복하며 생긴 스트레스를 잘 풀고 큰 불편함 없이 상황을 잘 마무리 했었는지 말이죠.
     감사일기를 쓰듯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보면,

     우리는 쓸데없는/부정적인 생각을 중단하고, 다시금 사회적 규율에 복종하며 살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사회적 규율 속에서 만족하며 살게 되는 것이죠.
 
     사회적 규율은 우리에게서 생각을 빼앗는 최고의 도둑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의식이 없는 상태로 서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다 우리는 곧 의식없이 늘어지는, 그럼에도 평화로움 속에 사는 존재가 되는 것이죠."

 

감사일기를 쓰는 사람
사회를 살아가는 한, 현재에 만족하고 현재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분명 필요한 부분이다.


 
 
차라투스트라는 현자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 속으로 웃었다.
왜냐면, 그는 현자의 이야기를 듣고 현자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생각했다.
 
    '사회적 규율을 사색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하루를 돌이켜 보며 사회적 규율에 따라 살라는 이 현자는

     올바른 것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사회적 규율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이 현자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가 말하는 내용은 확실히 사회적 규율에 따라 사는 것의 이로움에 대해 설득력 있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의 강연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이라 느껴질 만하다.
     그런 면에서 이 사람의 강연을 듣는 젊은이들도 헛걸음을 한 건 아니다.
 
     그는 사회적 규율을 잘 따르기 위해서, 사회적 일원으로서 노력하라고 한다.
     사회적 일원으로서 노력하지 않을수록 사회적 규율을 따르기 어려우니 말이다.
     삶의 의미가 '사회에서 잘 적응하여 살아가는 것'에만 있다면,
     나도 그의 말처럼 깨어 있지 않고 사회적 규율을 따르기 위한 노력만을 했을 것이다.
 
     이제 나는 알겠다.
     사람들이 이 현자를 통해서 무엇을 찾으려고 했는지 말이다.
     그들은 적당히 사회적 규율에 따라 살 길 원했고,

     사회적 규율에 따르는 것이 올바르다는 마약 같은 확언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회적 규율에 대해서 말하는 현자들에게 지혜란

     어떻게 잘 자의식을 갖지 않고 사회적 규율에 따라 살아갈 것인가를 뜻한다.
     즉 그들은 사회에 잘 적응하며 사는 삶에 대해서만 알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 같다.
 
     지금도 사회적 규율에 따르는 것이 미덕이라고 설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항상 이렇게 솔직하지는 않다.
 
     이제 이들의 시대는 지나갔다.
     곧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의 시대가 올텐데,
     여기 이 현자와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는 존재들이니 말이다.
 
     이렇게 사회적 규율에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
     곧 그들이 원하는 대로 생각없이 살아가는 존재가 될테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적 규율에 대해 강연하는 현자
현자는 사회적 규율이 주는 이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생각해 볼 거리들

 
잠은 무엇을 말하나?
- 잠이라는 것은 깨어있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 그런 면에서 사회적 규율에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는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도둑과 야경꾼의 존재는 어떤 의미로 해석되어지나?
- 잠을 자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 존재는 모두 사회적 규율을 따르고 있지 않는 상태를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도둑의 경우, 사회적 규율에 맞지 않는 행동을 몰래 하는 존재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 야경꾼의 경우 사회적 규율을 지키는 존재라 할 수 있지만, 니체의 서술에 따르면, 잠을 자지 않으면서 잠을 지키는 존재이기에, 본인은 사회적 규율을 지키지 않으면서 사회적 규율을 지키지 않는 타인을 지적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잠에 대한 현자는 왜 자려면 깨어 있으라고 하는가?
- 사실 이는 현자의 표현은 아닌데, 현자는 "깨어 있으려면, 잠이 필요하다"는 말만 했기 때문입니다.
- 자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는 표현은 차라투스트라가 한 말인 것입니다.
- 두 표현은 미묘하게 다른데, 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 우선 깨어 있으려면 잠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부터 보면, 깨어 있다는 것은 사회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 왜냐면, 현자가 그 후 설명하는 내용이 사회에서 사람들과 교류하며 자기극복하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죠.
- 이런 점에서, "깨어 있다"는 건 '현생을 살다'이거나 '사회적 일원으로서 노력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또 잠이라는 것, 사회적 규율이라는 것 자체가 사회적 관계/평화를 위해서 나타나는 것이므로, 사회 생활을 위해서 사회적 규율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 하지만 2장의 서두에서는 "밤에 깨어 있는 자를 멀리하라"는 말을 현자가 하는데, 이것과 관련은 없나 싶을 것입니다.
- 하지만 두 표현은 차이가 있는데, "깨어 있기 위해서, 잠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부분의 경우, 낮에 깨어있는 것을 말합니다. 
- 2장의 서두에서의 말, "밤에 깨어 있는 자를 멀리하라"는 밤에 깨어 있는 것을 말하므로, 서로 조건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이런 점에서 '낮에 깨어 있다'는 건 '사회적 일원으로서 노력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고, '밤에 깨어 있다'는 것은 '사회적 규율에 대해서 의심하다'는 뉘앙스로 볼 수 있습니다.
 
- 다시 현자와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보면, "깨어 있으려면 잠이 필요하다"는 말이나 "자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잠과 깸이 서로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 것으로 보입니다.
- 그런 점에서 "깨어 있다"는 말은 "낮에 깨어 있다"의 의미, 즉 "사회적 일원으로서 노력하다"로 보는 것이 적절해 보입니다.
- 이에 따라서, 치환을 해보면, 현자의 말은 "사회적 일원으로서 살아가기 위해(깨어 있으려면), 사회적 규율(잠)이 필요하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 차라투스트라의 말은 "사회적 규율을 잘 지키려면(자려면), 사회적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어야 한다(깨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해봄직 합니다.
- 이러한 차라투스트라의 말은 현자가 하는 표현과 상통합니다; "우리가 사회적 규율을 잘 지키려면, 우리는 평소 사회적 규율에 맞는 행실을 해야 합니다".
- 이에 대한 직역본을 보면 이렇습니다; "잠을 잘 자려면, 덕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
 
덕들이 서로 다툰다고 하는데 이는 무슨 의미인가?
- 덕들이 다툰다는 것은 서로 다른 종류의 덕이 있음을 말합니다.
- 여기서 1장의 내용을 상기할 필요가 있는데, 낙타의 무거운 짐들과 황금용의 비늘입니다.
- 이 두 존재가 가진 것들은 서로 다른 종류의 것이었고, 이에 따라서 낙타는 황금용으로부터 자신이 나아가고자 하는 길로 나아가지 못하는 현상이 생기게 됩니다.
- 그래서 낙타는 사자의 모습을 통해 황금용을 넘어서서 자유를 얻으려고 합니다.
- 이런 점으로 볼 때, 두 가치관이 충돌하는 상황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부분이 인간 내면에 공존하고 있다는 점을 니체가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 이 가치관들의 충돌은 사회적 규율에 대한 회의감으로 이어져, 사람들이 사회적 규율에 대항하려는 모습, 즉 사자의 모습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 이에 따라서, 사회적 규율을 옹호하는 자는 이 대립을 피하게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덕들이 다투지 않게끔 덕들을 두고 사색하지 말라고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현자의 모습은 사회적 규율을 되려 비꼬는 모습이 아닌가?
- 현자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규율의 현실을 보여주는 인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이런 점에 따라서, 사회적 규율에 대해서 반어법을 통해 지적하는 존재로 볼 수 있습니다.
- 하지만 엄밀하게 본다면, 이 현자는 가장 현실적인 처세술을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사회적 규율은 자기 본성을 억누르고, 권력에 굴복하며,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게 한다는 단점을 열거하지만, 그로써 화평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 그런 면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 현자를 솔직하다고 표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