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1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1권 13장 의역 (완) (순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5. 3. 15:01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1권 13장 순결


 

13장 개괄

   

13장은 성욕의 억압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기본적으로 니체는 욕구에 따르는 쾌락주의를 싫어한다.

왜냐면, 쾌락주의로 인하여 성숙해지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니체가 성욕을 억압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니체는 성욕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면, 성욕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통해서 병적인 쾌락주의에 빠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니체는 성욕을 이해해야 한다며, 성욕의 처지를, 사람들의 그릇된 태도를 설명한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순결한 자들이 어째서 순결한 것인지 설명하게 된다.

 


 

본문

 

 

저는 도시보다는 숲을 사랑합니다.

왜냐면, 도시는 성숙해지려고 하기 보다는 욕구의 이끌림 대로 살려는 이들이 많아 불쾌한 모습을 많이 보게 되겠지만,

숲은 그릇된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있을 수 있으니, 더 건강하게 지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여자가 좋다지만, ‘성숙해지는 것에 무관심한 여인/성욕이 그득그득한 여인’의 꿈 속에 존재하는 것보다는

살인자의 손에 붙잡힌 현실이 더 낫지 않습니까?

성숙해지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것보다는,

나를 죽이려고 하는 살인자의 곁이 낫지 않냐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설령 꿈일지라도, 저는 성숙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이 싫습니다.

 

저 남자들의 눈을 보십시오.

저들은 세상에서 여자와 함께 누워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듯이 있지 않습니까?

저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저들은 쾌락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저들이 자신들의 쾌락주의를 스스로 정당화할 이성을 갗주고 있다면, 이는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그들은 자신의 이성을 통해 두른 견고한 갑옷 속 쾌락주의에 빠져 벗어나질 못할테니 말입니다.

 

차라리 저는 이들이 완벽한 동물이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들은 완벽한 동물이 될 수 없습니다.

동물은 순수한 존재들인데, 저들은 순수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동물은 기이한 규율들로 인하여 타락해버린 존재들*은 아니지 않습니까?

*인간이 동물보다 순수하지 못한 이유는 동물들은 순수하게 자연에 따라 살아가는 반면, 인간은 자연을 넘어서서 이상한 상상, 예컨대 신이나 종교적 상상을 하며 살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사는 것이 동물이라면, 있는 것을 왜곡하며 사는 것이 인간인 것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이 동물보다 못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이냐구요?

저는 여러분에게 자신의 성욕을 억압하지 말고, 억압할 대상이 아닌 자연스러운 것으로 바라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살인자에게 붙잡힌 남성

차라투스트라는 쾌락에 빠진 여자의 꿈에서 살 바에는 살인자에게 죽는 현실이 낫다고 말한다.


 

저는 여러분에게 순결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에게 순결은 자신에게 자연스러운 것이겠지만, 대부분의 이들에게는 순결은 자기를 억압하는 것일 뿐이니까요.

 

순결이 억압이라 느끼면서도 사람들은 자기 성욕을 잘 억제하고 있습니다.

순결의 미덕을 지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모습에 성욕은 씁쓸할 뿐입니다.

본성대로라면 자신이 순결처럼 각 개인들에게 받아들여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말입니다.

이에 따라서 성욕은 개인 안에서 불화를 일으킵니다.

이러한 성욕에 의한 불화는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존재에게서도, 사회적으로 성숙하다 불리는 존재에게서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기이한 행동을 하게 되죠.

 

성욕이 사회적 규율에 지배된 정신에 의해 억압당함에 따라

정신을 통해 자신이 억압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구하려 합니다.

그래야 성욕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다 억압이 지나치게 된다면,

성욕은 기괴한 방법으로 자신의 만족을 얻으려고 하게 되는 것이죠.

 

자신의 여인이 아닌 여인상만 바라보는 남자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개인은 자신이 바라봐야 할 자신의 본성은 바라보지 않고, 순결만 바라보고 있다.


 

여러분은 비극을 사랑합니까? 타인의 마음을 부서뜨리는 것을 좋아합니까?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를 하겠죠.

 

하지만 저는 여러분의 말을 믿기 어렵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마치 성욕이 없다는 듯이, 순수히 성욕에 따르거나 성욕에 힘겨워하는 이들을 탐욕스럽게 여겨서, 비극 속 존재처럼 비참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그들을 탐욕스럽게 만들어, 그들의 마음을 망가뜨리려 하지 않습니까?

 

또 성욕에 휘둘린 타인을 동정할 때, 그 동정은 당신도 그런 성욕을 가졌기에 가능한 것 아닙니까?
결국 같은 성욕을 지님에 따른 동정심 아닙니까?

 

또 성욕을 억압하려고 하는 자들은 결국 성욕에 압도당하곤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기괴한 성욕을 지니곤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점들로 인해서, 저는 순결하기 어려운 자에게 순결을 권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순결은 되려 그들을 더 깊은 쾌락주의 속으로 빠지게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제가 지금 외설스러운 것을 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럴 수 있더라도, 이는 입에 담을 수 없는 나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올바른 이해를 가지려는 자, 성숙하려는 자는 사색하려는 것이 외설스럽다고 이해하려 접근하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올바른 이해를 가지려는 자들은 외설스러운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이해와 무관한 것들을 포기할 뿐입니다.

 

 

자신을 더럽히는 진창 속에서 수석을 찾는 사내

올바른 이해를 찾으려 하는 사람도 사회적으로 기피하는 주제라고 피하지 않는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정말 순결이 자연스러운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성욕에 대해서 여러분들보다 더 너그럽고 환하게 대해줍니다.

 

그들은 순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순결이요?

순결은 성욕을 억압하는 것 아닙니까?

성욕을 왜 억압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어리석은 짓 같습니다.

 

우리의 경우, 성욕을 억압하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저 성욕을 표출할 순간이 오지 않았던 것이죠.

 

성욕을 표출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지속된 것뿐입니다.

그저 그런 상황이 우리에게 지속될 뿐입니다.

언젠가 성욕을 표출할 순간이 온다면, 우리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저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 머무는 동안까지는 얼마든지 상관없을 뿐이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성에 대한 건강한 인식과 건강한 관계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서,

병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생각해볼 거리들

 

왜 영혼 안에 있는 진흙탕이 정신을 갖추면 슬픈 일인가?

- 영혼 안에 있는 진흙탕이란 영혼이 더러워지는 것을 말하며, 이는 비사색적인 상태, 쾌락주의 상태로 볼 수 있다.

- 이에 따르면, 진흙탕이 정신을 갖춘다는 것은 쾌락주의가 이성화 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 이는 곧, '쾌락주의가 정당화 된다' 또는 '쾌락주의가 합당한 근거를 갖춘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 따라서 이런 경우, 쾌락주의를 벗어나긱 힘들어지기에 슬픈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완전한 짐승이기를 바랬나?

- 사람들이 쾌락주의에 빠져 있는 것은 본성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들이라고 볼 수 있다.

- 본성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짐승이라고 한다면, 짐승과 같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 그러므로 차라리 완전한 짐승 상태라면, 오히려 완전성을 갖춘 것이니 그들을 이해하기에도 문제가 없다.

 

짐승에게 있는 것은 '무죄'인가 '순수함'인가?

- 짐승이 갖는 것에 대해서 책마다 '무죄'와 '순수함'으로 번역이 갈리는데, 독어본을 보면, Unschuld에 대한 번역이 갈린 것이란 점을 알 수 있다.

- 이 단어는 기본적인 의미는 '무죄/결백'으로 볼 수 있기는 한데, '타락하지 않음/순수'의 의미로도 볼 수 있다.

- 그리고 전체의 내용상으로 볼 때, 무죄라는 말이 은유적으로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해 봄직 하다.

 

- 하지만 논리 전개상으로 보면, 조금 문제가 있어 보인다.

- 쾌락주의적 인간에 대해 말하다가 그들이 완전한 짐승이라고 되기를 바란다고 차라투스트라가 말하기 때문이다.

 

- 전체 내용상으로 보면, 쾌락주의적 인간과 짐승은 본성에 따르는 같은 특징을 지닌 존재로 볼 수 있긴 하다.

- 그래서 '짐승에게 본능이 무죄이듯, 쾌락주의적 인간에게도 본능은 무죄다' 라고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듯 하다.

 

- 그러나 문제는 짐승과 쾌락주의적 인간은 다르다는 것이다.

- 이 두 존재가 어떤 점이 다르냐면, 짐승은 쾌락주의적 인간처럼 쾌락을 탐닉하는 데 빠져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 따라서 Unschuld의 의미는 '본능이 그렇게 죄악시할 것이 아니다' 라는 의미/무죄라는 의미를 전달한다기 보다는 쾌락주의적 인간의 불완전성, 짐승만도 못함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 즉 본능에 대한 인간의 병리적 현상을 말하고, 이를 통해서 본능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필요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기에, 순수함의 번역이 더 낫다고 보인다.

 

성욕이라는 암캐는 왜 저들이 억제하는 것을 보며 질투하는가?

- 본문에서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성욕은 자신보다 순결이 더 챙겨지는 것을 보면서 질투하는 것으로 보인다.

 

높은 경지와 냉철한 정신의 내부까지 왜 암캐와 암캐의 불만족이 쫓아다닌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 일반인만 성욕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란 이야기로 보인다.

- 즉 성숙한 존재/이성적인 존재도 성욕에 시달린다는 것.

 

성욕이라는 암캐는 왜 살코기를 거부당할 때, 왜 예쁘게 한 조각의 정신을 구걸하나?

- 정신이라는 단어는 앞서 "진흙탕이 정신을 갖춘다면 슬프다/불행하다"라고 할 때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 진흙탕에 대한 해석을 할 때, 정신은 합당한 이유를 갖추는 것이라고 하였다.

- 이에 따라서 해석을 연장해 보면, "성욕은 억압당할 때, 정신에게 찾아가 억압당하지 않을 합당한 이유나 만족에 이를 방법을 구걸한다"는 말로 볼 수 있다.

 

- 이는 앞선 흐름상으로 볼 때, 절박한 성욕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 성욕은 순결에 비해 제대로 대우받지도 못하고, 만족을 얻지 못하는 상태다.

-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거부당할 때, 정당한 이유나 해법을 얻어서 만족을 얻으려 한다고 할 수 있다.

 

- 이를 통해서 성욕의 병적 양상이 나타날 수 있는데, 이는 이후 흐름과도 이어진다고 생각된다.

- 예를 들면, "자신의 악마를 몰아내려다가 암퇘지의 무리 속으로 빠져든다"는 것과 이어지는 부분이라고 본다.

 

비극과 마음을 부숴뜨리는 것을 사랑하냐는 건 무슨 말인가?

- 이 문장은 후행되는 문장에서 암캐에 대한 이야기와 성욕에 시달리는 자에 대해 평가하는 것으로 보아, 성욕과 관련된 비극과 그에 따른 정신적 괴롭힘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 이에 대해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성욕에 시달리는 자를 괴롭히는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답할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와 반대되는 행동을 보인다는 점을 니체는 꼬집는다.

- 이는 곧 성욕에 대한 부적절한 인식이 사람들에게 있음을 말한다.

 

성욕과 동정은 무슨 관계인가?
-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성욕을 굳이 보여줄 필요가 없고, 성욕이 있다는 것을 굳이 사회에 만연하게 드러낼 필요가 없기도 하다.

-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성욕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 그런데 다른 누군가가 성욕 때문에 힘들어 한다면, 그들을 동정할 수 있다.

 

- 이런 경우들을 보면, 성욕이 없지만 성욕에 시달리는 이들을 동정하는 인물이 된다.

- 이러한 행동이 무의미한 겉치레에 불과하다고 차라투스트라는 보는 듯 하다.

 

탐구자는 왜 진리가 더러울 때가 아니라 얕을 때 뛰어들기를 꺼리나?

- 탐구자는 진리를 찾는 자들이다.- 이러한 자들은 외설스러운 주제라 하더라도 올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다면, 꺼리지 않는다.

- 반면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이해가 깊은 통찰을 갖지 않는다면, 꺼리게 된다.

- 이러한 특징을 말하는 것인데, 세간의 얕은 통찰은 꺼리지만, 세간이 외설이라 여겨도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있다면 꺼리지 않는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본성적으로 순결한 자들은 평생 순결할까?
- 니체의 말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 왜냐면 순결이라는 손님이 이들에게서 잠시 머무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 만약 순결이라는 손님이 떠나고 싶은 순간이 온다면, 더는 머물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떠나게 된다.

- 이를 "머물고 싶다면 얼마든지 있도록 하라!"라는 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머물기 싫다면 떠나도 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