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1권 21장 자유로운 죽음
21장 개괄
21장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고,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드려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장이다.
니체는 세상의 부조리와 맞서 싸우는 과업을 가지고, 이를 위해 살다가 과업을 이루면 죽는 그러한 삶을 살라고 말한다.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 가장 의미가 있고, 이러한 삶의 결과물에 다른 누군가들이 자극 받아 그 명맥을 이어갈 수 있으니 말이다.
추가로 예수에 대해서도 평가하는데, 그는 규율과 교리에 얽메이지 않은 자로서 고귀하다고 말한다.
본문
사람이 제때 죽는 일이 잘 없습니다.
대부분 오래 살려고 하며, 뛰어난 몇몇은 너무 일찍 죽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제때 죽도록 하라”는 가르침은 아직도 낯설게 느껴지죠.
그래도 저는 제때 죽을 수 있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제때 죽으라는 것은 무엇이냐구요?
이것은 삶의 과업을 이뤘다면, 죽음을 준비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삶의 과업을 다 이뤘다면,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삶의 과업을 갖지 못한 잉여로운 자들,
이들은 삶의 과업 없이 지금을 살기 위해서 살았으므로, 어떻게 제때를 알고 죽겠습니까?
이런 자들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삶의 과업을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에게 이렇게 충고합니다.
삶에 과업이 없는 존재들에게도, 죽음은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그들이 염세주의자라면, 고통 뿐인 삶에서 해방될 수 있기에 중요하며,
그들이 종교인이라면, 현세를 떠나 내세로 나아갈 수 있으니 중요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들은 죽음이 삶의 고통을 끊어주어도, 고통스러운 현세를 벗어나 내세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해도, 기뻐하며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들은 죽음을 기꺼워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장례식
죽음은 죽은 자를 현생에서 잃게 하는 것이므로 축제가 되기 어렵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죽음은 가장 아름다운 축제여야 한다고 말한다.
저는 여러분에게 올바름이 지배하는 이상적 미래가 다가오게 하는 죽음,
남겨지는 자들에게는 올바름을 추구할 동력이 되는 죽음,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다잡게 하는 죽음에 대해서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상 사회의 완성을 위해서 노력하는 자는 죽음을 맞이할 때는,
이상 사회를 바라는 자와
이상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서약하는 자들에 둘러싸여
이상 사회를 위해 했었던 노력의 가치를 인정받으며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들처럼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축제를 벌인다고 한다면,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자가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서약한 자들을 축복하는 자리여야만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어떤 축제도 열려선 안 됩니다.
이렇게 과업을 위해 노력하고, 자신이 과업이 완수되면 죽기를 바라는 것이 최선의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차선의 죽음은 올바름을 위해서 투쟁하다 죽는 것입니다.
올바름을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 의미있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회와 다투다 죽지 않았더라면, 이상 사회를 위해 더 많은 노력을 쏟고, 더 많은 업적을 남겼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죽음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위대한 영혼이 낭비되는 죽음이라고 봅니다.
최악의 죽음은 과업과 관련되지 않은 삶을 살다가, 노화나 병 등을 이유로 죽기를 선고를 받아 죽는 죽음, 바로 여러분의 죽음입니다.
이러한 죽음은 죽음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죽음이 여러분의 주인이 되어 버리죠.
저는 자신의 과업을 이루고 죽기를 바라는 것, 이러한 삶의 태도를 지니기를 권합니다.
자신이 원해서 나타나는 죽음을 말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과업을 이뤘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당사자 본인이 알 수 있습니다.
자신 스스로 계획했던 탐구를 진행하여, 자신이 더 탐구할 것이 없다고 여길 때, 자신의 과업이 완수되었다고 느낄 테니까요.
그렇게 후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남겨놓았다면, 그는 자신에게 죽음의 순간이 다가왔다고 느낄 것입니다*.
*이에 따른 것인지 차라투스트라는 3권에서 영원회귀에 대해 알리면서 죽음의 순간을 염두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과업의 결과물을 후대에게 남김으로써, 생에 대한 의욕과 활력을 후대에게 줄 것입니다.
왜냐면 선대의 결과물은 후대에게 분명 긍정적인 의미로 다가갈 테니까요.
저는 어떻게든 가늘고 길게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처럼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떤 목표도 없이 그저 오래 살려고 하는데, 이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죽은 자의 미소
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를 이루려는 과업을 달성한 존재의 죽음은 최상의 죽음이라고 말한다.
사회화가 잘 이뤄진 이들은 진리를 찾기에/이상 사회를 구축하기에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진리/이상사회 구축을 위해서는 사회적 규율과 맞서야 하는데, 그들에게는 사회적 규율에 맞설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사회적 규율과 맞설 발톱과 이빨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명성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적절한 때에 명예로부터 이별을 고하는 어려운 기술을 익혀야 합니다.
음식의 가장 맛이 좋을 때, 사람들에게 더 맛볼 기회를 주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 음식의 맛을 볼 수 없어서, 오히려 더 오랫동안 기억하며 거론하게 되는 것과 같은 논리입니다.
오랫동안 사랑받는 사람들은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죠.
사회에서 잘 적응하며 사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살아오면서 느낀 처세술을 남기곤 합니다.
이런 자들의 결과물은 처음엔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만, 그 흥미는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왜냐면, 뻔한 처세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회적 규율에 따르라고 하니 맹목적으로 잘 따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사회적 규율의 올바름에 수긍하고 자신의 사유의 기준으로 여기며 살아가곤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젊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규율에 순응한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는 사람이 어릴 때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는 사람보다 오랫동안 그 의지를 가지는 편입니다.
왜냐면 젊을 때에는 혈기 탓에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는 것을 넘어 방종이나 극단적인 경우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나이가 들어 사회적 규율을 벗어난다면, 사회적 규율에 적응도 해보고 벗어난 것이기에, 방종하지 않고 적정선에서 사회적 규율을 벗어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사회의 부조리 때문에 개인의 행복을 위한 삶을 사는데 실패합니다.
그렇게 부조리로 인한 염세와 허무가 이들의 심장을 갉아먹습니다.
부조리에 맞서지 않으면서 염세와 허무에 휩싸였다면, 이들에게 사는 것보다 죽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그들을 위해 좋은 방향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많은 이들은 결코 부조리를 이겨내지 못합니다.
부조리한 사회에 적응하면서, 부조리가 주는 편의에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스스로가 세상/삶을 부조리하게 만드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재밌는 것은 부조리함 자체인 그들이 부조리한 세계로부터 고통받는다고 아우성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회를 개선하려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사회의 부조리를 저지르면서 사회의 부조리가 힘겹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세상이 이들을 품고 있다면, 세상은 비겁한 것입니다.
세상은 이들을 놓아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썩어버린 포도알
썩은 버린 포도는 포도나무에게 있어, 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런 썩은 것들이 삶이란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길 바란다.
이처럼 사람들은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말하면서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부조리 자체인 존재들을 세상에서 솎아줄 죽음의 전도사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불만과 절망적인 상황을 자극하여 그들을 죽음으로 이끌 자들 말입니다.
하지만 실제는 이와 다릅니다.
죽음을 설교하는 사람들, 죽음 이후의 내세를 설교하는 사람들은 삶을 견디라고 말합니다.
아 죽음 이후의 내세를 설교자들이여,
여러분은 사람들에게 삶을 견디라고 하시는 겁니까?
삶이 여러분을 견디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죽음 이후의 내세를 설교하는 자들이 존경하는 자,
예수는 참으로 너무 짧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너무 일찍 희생하여, 많은 이들에게 재앙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부조리한 현생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아 눈물 흘리고 슬퍼하며 증오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을 돕고 싶었던 그는 그 간절함에 사람들에게 현생이 아닌 죽음 이후의 구원을 이야기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사람들 사이에 있지 않았더라면!
홀로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는 분명 부조리한 현생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현생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현생을 두고 웃을 수 있었겠죠.
형제들이여,
그는 너무 일찍 죽었습니다.
그가 제 나이만큼 살았더라면, 죽음 이후의 내세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이유인 즉, 그의 삶을 보면, 그는 기존 사회의 규율과 교리를 중시하지 않았고,
삶의 경험 속에서 얻은 앎들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충분히 고귀한 사람, 자유로운 정신을 존재*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기존 가치와 규율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는 존재를 말한다.
위버멘쉬를 가리키는 다른 표현인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그는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젊었고, 그래서 사람들과 세상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사람들과 세상에게 좋은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부조리한 세상의 본질을 해결하는 것보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더 위급하게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내세와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겠죠.
부조리한 세상
부조리한 세상을 바라보는 두 남성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갖는다.
누군가는 사람들을 부조리한 세상에서 구원하길 바라고,
누군가는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려고 한다.
젊은이보다는 연륜이 있는 존재가 좀 더 냉정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냉정하게 세상을 보다 보면, 이상 사회를 그려볼 능력을 갖추게 되고, 이로써 염세와 허무의 우울에서 허덕이지 않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젊은이보다 연륜이 있는 존재가 죽음과 삶에 대해 더 잘 이해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의 이유/과업을 가짐으로써,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
죽음이 임박했을 때에도 만족할 수 있는 것,
사회적 규율에 긍정하고 싶지 않을 때 부정하는 것,
성숙한 존재는 죽음과 삶에 대해서 이렇게 이해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죽음이 부조리한 세상에 일조하던 이의 죽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의 영혼의 결실이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 이상사회에 이바지한 것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죽게 된다면, 여러분 노력의 결과물이 세상을 빛나게/희망적이게 하기를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의 노력의 결과물이 세상을 희망적이게 할 수 없다면, 여러분의 죽음은 실패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저 역시도 이상적인 미래를 위해 일조하는 죽음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제 생각과 죽음에 자극 받아, 세상을 사랑하게 되길 바랍니다.
저는 앞으로 다가올 이상 사회의 일부가 되어, 그 속에서 안식을 얻고 싶습니다.
저는 이상 사회, 부조리한 사회의 개선이라는 목표를 지녔습니다.
그렇게 제가 노력한 것을 세상에 펼쳐 보였습니다.
그러니 나의 친구들이여,
나의 노력을 이어받는 자, 나의 의지를 이어받아 이상사회를 구현하려는 자가 되어주시길!
여러분에게 제가 만든 황금공을 던지니 받아주시길!
나의 친구들이여,
이제 저는 그대들이 황금공을 던지는 모습, 제 의지를 이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세상에 좀 더 머무르려고 합니다.
그러니 과업이 끝났음에도 좀 더 살아보려고 하는 저를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의지가 담긴 황금공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책을 통해서 자신의 의지를 전달한다.
생각해볼 거리들
왜 많은 사람들이 너무 늦게 죽고, 몇몇은 일찍 죽는다고 지적하는가?
- 이러한 지적은 부조리한 사람들이 염세적인 관점을 가지면서도 오래 사는 모습과 삶의 구원이 죽음 이후에 있다고 생각하여 죽음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언급한다고 볼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제때 죽으라고 하는가?
-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죽을 시점은 이상 사회를 위한 자신의 과업을 완료한 시점이다.
- 이 시점 전까지는 죽으려고 하면 안된다.
- 그리고 이 시점에 이르러서 죽어야 한다.
- 하지만 니체가 말하는 잉여로운 인간,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상 사회를 위한 과업을 지니고 있지 못하므로,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죽을 시점을 찾지 못하게 된다.
- 언제 죽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다 보니, 꾸역꾸역 살아가게 되는 모양이 되는데, 이를 지적한다.
왜 잉여로운 인간들도 자신의 죽음을 중요하게 받아들이나?
- 종교에 따른다면, 내세로 나아가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 이는 곧 고통 뿐인 현세를 벗어나는 것이므로 중요하게 여겨진다.
모두가 죽음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왜 아직도 축제로 여기지는 않나?
- 사람들이 죽음이 현세를 벗어나 내세로 향하는 것이면 축하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죽음을 슬퍼한다.
- 이러한 점은 내세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그리고 현실에서의 상실만을 주목하기 때문이다.
완성을 가져오는 죽음, 살아있는 자에게 자극되는 죽음, 살아있는 자에게 서약이 될 죽음은 무엇인가?
- 완성을 가져오는 죽음은 이상사회의 완성을 말한다.
- 즉 이상 사회를 위해서 탐구하고 노력한 사람의 죽음이다.
- 이상사회를 추구하던 사람이 죽으면, 살아있는 사람은 그에 대해서 자극을 받게 된다.
- 즉, 이상 사회에 대한 노력을 자신도 해야겠다는 자극을 받는 것이다.
-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사람은 이상사회를 추구하던 사람이 죽으면, 자신도 그와 같은 노력을 하겠다고 하게 된다.
- 즉 이상 사회를 추구하던 사람의 죽음을 계기로 삶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므로, 그의 죽음은 이상사회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서약이 된다.
완성을 가져오는 자, 희망하는 자, 서약하는 자는 누구인가?
- 완성을 가져오는 자는 이상사회를 위해서 노력한 사람이다.
- 이러한 노력이 언젠가 완성으로 나아가는데 디딤돌이 될 것이므로, 완성을 가져온다고 표현한다.
- 희망하는 자는 이상사회를 희망하는 자를 말한다.
- 따라서 이상사회를 가져오려는 자의 죽음에 함께한다.
- 서약하는 자는 이상사회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서약하는 자로서, 완성을 가져오는 자로부터 자극받았거나 같은 의지를 가진 사람에 해당된다.
- 이러한 사람들이 완성을 가져오는 자의 죽음의 가치를 되새기며 죽음을 함께 하게 된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하는가?
- 이렇게 죽는 법이라고 할 때, 어떤 삶을 살다가 죽는 법이란 건데, 이 삶은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한 삶이다.
- 따라서, 이상 사회를 살다가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 이는 곧 부조리한 사회를 개선하기 위해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왜 죽어가는 자가 축복하는 경우에만 축제를 열어야 한다고 하는가?
- 그런 경우만이 축복받을 가치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 즉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 외에 인류가 축제로 삼아야 할 것이 과연 무엇이 있냐는 것이다.
- 물론 이게 가장 중요하겠지만, 공동체/집단을 유지하기 위해선 다양한 축제가 필요하다.
- 축제의 기능인 반복되는 일상에서의 탈피를 말하기 때문이다.
최선인 죽음과 차선인 죽음, 가증스러운 죽음은 무엇인가?
- 최선의 죽음은 이상사회를 위해 사는 방법을 고안하는 업적을 내고 죽는 것이다.
- 차선의 죽음은 이상사회를 위해 투쟁하다가 죽는 것이다.
- 이는 투쟁 속에서 죽기에, 생이 갑자기 마감되는데, 만약 생이 지속된다면, 더 많은 업적을 이뤘을 수 있기에, 차선의 죽음이 된다.
- 가증스러운 죽음은 어찌저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 이런 죽음은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다.
왜 가증스러운 죽음은 히죽거리면서 도둑처럼 몰래 와서는 주인이 되나?
- 히죽거리며 몰래 온다는 것은 어느샌가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을 말한다.
- 주인이 된다는 것은 죽는 것을 명령한다는 것을 말한다.
- 따라서 죽음이 병이나 노환 등으로 인하여 갑자기 찾아와서 죽게되는 상황을 말한다.
- 이는 곧 일반적인 자연사를 말한다고 할 수 있는데, 자연사는 이상 사회를 위해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걸 말한다.
원해서 다가오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 과업을 다 이루고 나서 생을 마감하는 것을 말한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과업을 다하는 순간은 언제인가?
-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한 자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과업을 최대한으로 이룬 시점이다.
- 즉 노력의 결과물을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시점인데, 이는 사람들을 계몽시키는데 더 노력할 게 없을 때를 말한다.
- 이는 사람들이 더는 자신의 의견을 듣지 않고 배척하는 때일 수도 있다.
- 어쨌든 사람들이 더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시점이다.
왜 그는 생명의 성전에 말라빠진 화환을 걸지 않는다고 하나?
- 과업을 위해 살아온 이는 자신의 과업을 위해서 사는 것이 삶의 의미다.
- 그런데 그런 의미가 더이상 없게 되는 시점이 오면, 죽음을 염두하게 된다.
- 하지만 삶의 의미를 잃는 시점에, 어떻게든 삶의 의미를 더 찾는 경우도 있다.
- 이런 경우 살아야할 충만한 이유가 아닌, 어떻게든 구태어 만든 삶의 의미가 될 텐데, 쥐어짜서 만든 삶의 의미를 나타낸다.
- 이것을 말라빠진 화환이라고 한 것 같다.
- 따라서 생명의 성전에 어떤 화환도 없으니, 더 살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와 같다고 보인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실을 잣는 자들처럼 되고 싶지 않나?
- 실을 잣는 자들은 삶의 이유를 만드는 자가 아닐까 싶다.
- 「유고(1882년 7월~1883/84년 겨울)」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오기는 한다.
"28. 학문적인 인간은 밧줄 꼬는 사람과 같은 운명을 가지고 있다.
그는 실을 점점 더 길게 잡아 뽑지만, 그럴수록 자신은 뒤로 가게 된다."
- 이러한 구절로 보면, 삶의 이유를 물고 늘어진다기 보다는, 학문을 탐구하면서 자신을 전혀 탐구하지 못하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는 뉘앙스로 보인다.
- 따라서 차라투스트라 21장과 내용이 관련되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진리와 승리를 알기에 너무 늙어버린 자는 누구인가?
- 차라투스트라는 앞서 성숙한 인식을 하는 자의 최종적 상태를 아이 같다고 한다.
- 그런 면에서 늙어버린 자는 아이와 반대되는 자다.
- 그러면 아이가 어떤 존재인지를 봐야 하는데, 아이는 사회에 한계를 느끼고, 자신만의 규율을 만들고 설파하는 존재다.
- 이와 반대되는 존재를 떠올린다면, 사회에 잘 순응하는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자가 이가 없는 입을 지녀서 진리에 대한 권리를 갖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는 무슨 말인가?
- 사회는 개인들에게 인식의 한계를 정해준다.
- 따라서 차라투스트라 1권 1장의 낙타가 사막으로 나아갈 때, 황금용이 그 길을 가로 막는 것이다.
- 그리고 진리를 파악하기 위해서, 낙타는 사자의 모습을 필요로 하는데, 그때 사자가 필요한 이유는 용에 맞서서 쟁취하기 위함이다.
- 그래서 사자의 발톱과 이빨이 필요했다.
- 하지만 사회에 순응하는 자는 사회에 맞서지 않는 자이니 발톱이나 이빨이 없는 상태다.
- 그렇기에 진리도 얻지 못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명성을 얻으려면 왜 제때 떠나야 하는가?
- 명성을 가장 오래 유지하려면 좀 유명세를 얻을 때 떠나야 한다는 것믈 말한다.
- 이유인 즉, 사람들에게 어떤 사상이 어느정도 유명해진 상태에서 사상가가 사라지거나 죽게 된다면, 사람들은 그 사상에 대해서 계속해서 생각하고 추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 그러면서 자꾸 회자되고 이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시도하게 된다.
- 이러한 점을 말하는 것으로, 차라투스트라가 잠언으로 글을 쓰는 이유도 이와 같다.
가을의 마지막 날까지 기자리는 운명을 가진 사과는 무엇을 말하나?
- 가을의 마지막이란 인생을 볼 때 말년을 말한다.
- 그렇게 말년이 되어서 사과라는 결과물을 만든 것이다.
- 이 사람이 말년까지 삶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회적 규율에 잘 적응하여 살았기 때문이라고 할수 있다.
- 그런 면에서 이 사과는 사회적 적응의 결과물이다.
- 따라서 이 사과는 사회적 처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러한 사회 적응을 위한 처세술은 너무 뻔한 것들이 많기에, 오랫동안 명성을 쌓기가 어렵다.
- 이에 따라서 계속 사람들의 관심을 끌 모양새가 아닌, 누렇고 쭈글쭈글한 상태가 된다고 표현한 듯 하다.
왜 어떤 자는 마음이 먼저 늙고, 어떤 자는 정신이 먼저 늙는가? 왜 젊은 나이에도 백발이 되는가?
- 이는 앞서 말한 아이와 대조되는 경우다.
- 즉, 아이는 사회적 규율을 따르지 않는 존재이므로, 늙은 존재는 사회적 규율에 잘 따르는 존재를 말한다.
- 따라서 마음이 먼저 늙는다는 것은 사리분별을 잘 못하지만, 사회적 규율을 잘 따른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 왜냐면, 마음은 정신과 비교했을 때 감정적/직관적 영역이기 때문이다.
- 다음으로 정신이 늙는다는 것은 사회적 규율의 논리를 공감한다는 것, 즉 사고 자체가 사회적 규율을 잘 따른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젊은 나이에 백발이 된다는 것도, 젊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규율에 너무나 잘 따른다는 것을 말한다.
늦게 젊음을 누리는 자가 그 젊음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늦게 젊음을 누린다는 것은, 늦게서야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야겠다고 마음 먹는 것을 말한다.
- 그렇게 되는 경우,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겠다는 그 의지를 더 오래 유지한다는 것이다.
- 이렇게 되는 이유는 어릴 적에는 어린 혈기에 의해서 방종하면서, 의지를 유지하지 못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뒤에 나오는 예수도 젊었기에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겠다는 의지를 올바르게 유지하지 못한 경우라 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실패하는 삶은 무엇인가?
- 이들이 실패하는 삶은 개인의 행복에 이르는 삶이자 이상사회에서 살아가는 삶이다.
- 이들은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이상적인 삶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서, 포기한다.
심장을 갉아먹는 독충은 무엇인가?
- 실패한 이들이 이상사회의 실현을 실패한 이들이라면, 그들의 마음에는 염세와 허무가 자리하게 된다.
- 삶의 가치를 잃게 되는 것이므로, 차라투스트라도 이들이 죽는 것에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많은 이들은 왜 익은 맛을 내지 못하나?
- 이들은 여름에 썩은 존재들을 말한다.
- 여름에 썩었다는 것은 무언가 부패했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사회 속에서 부조리를 저지르는 삶에 순응하고, 자신도 부조리를 저지른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 즉 이들은 부조리에 순응하고 부조리를 저지르기에 잘 익은 존재가 될 수 없는 썩은 존재인 것이다.
왜 이들이 삶이란 나무의 가지에 매달려 있으면 비겁인가?
- 문제는 이처럼 부조리를 저지르는 사람들도 부조리 때문에 삶이 염세적이라고 여긴다는 점이다.
- 세상이 염세적이고, 해답이 없는 것이기에, 그들은 부조리에 편승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그들의 입장에 따르면 삶은 살 가치가 없는 것이기에, 죽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맞다.
- 하지만 그들은 죽음으로 나아갈 용기가 없기에 꾸준히 살고 있는 것이다.
- 따라서 비겁자가 된다.
왜 빠른 죽음의 설교자가 왔으면 좋겠다고 말하나?
- 사회 부조리를 저지르는 자들은 대체로 염세적이면서도 사회의 개선이 어렵다고 보는 이들이다.
- 따라서 세상을 떠나는 게 이들에게 있어 가장 좋은 것이다.
- 하지만 전혀 최선을 위한 태도를 보이지 않으므로, 이를 자극할 존재가 나타나길 바란다는 이야기다.
왜 예수는 일찍 죽음으로써 사람들에게 재앙을 주었나?
- 차라투스트라의 말에 따르면, 예수는 고통 뿐인 세상에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게 우선이라고 보았기에, 내세를 사람들에게 설교한다.
- 하지만 이는 사람들이 현생에서 노력할 기회를 박탈하는 상황으로 간다.
- 그래서 사람들에게/세상에게 재앙이 된다.
- 왜냐면 내세가 중요해진 사람들은 현생에 대해서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예수를 고귀한 존재로 보나? 왜 광야로 갔으면 지금과 다른 결과를 냈을 거라고 보나?
- 예수란 존재 자체가 기존의 규율이나 가치에 따라서 사고하는 게 아닌, 삶의 경험을 토대로 사고하던 존재, 자유정신을 가진 존재였기 때문이다.
- 이에 대해서는 「안티크리스트 」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표현을 자유롭게 해보자면 예수를 ‘자유정신’이라고 부를 수도 있으리라
—그에게는 고정된 것은 죄다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까
:말은 죽이는 것이고, 고정된 것은 모두 죽이는 것이다.
그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개념인 ‘삶’의 경험은 그에게서는 온갖 종류의 말, 공식, 법칙, 신앙, 교의와 대립한다.
그는 단지 가장 내적인 것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다:
‘삶’ 또는 ‘진리’ 또는 ‘빛’은 가장 내적인 것에 대해 그가 사용하는 대명사이다."
예수는 왜 성숙하지 못했나?
- 예수는 사람들의 고통에 초점을 둔 나머지, 실제 세상이 가진 문제의 해법을 찾지 못했다.
- 고통에 집중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감정적 판단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를 어리숙한 것이라 본 것이다.
-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예수가 어리숙하였기에, 감정적 판단에 따라 문제를 해결했다고 봤던 것 같다.
왜 예수는 인간과 대지를 미숙하게 사랑하고 미워했나?
- 예수는 세상의 부조리를 감정적 판단에 따라 해결하려고 했고, 이로써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원하려고 했다.
- 즉, 괴로워하니 괴로워하는 걸 없애준 건데, 이는 성숙한 접근이라 보기는 어렵다.
- 그 고통의 원인부터 살피면서, 고통을 없애주는 게 맞는지 아닌지를 살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 이를 두고서 미숙하게 사람들과 세상을 이롭게 하려고 하다보니 내세를 고안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 이를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심성과 정신의 날개가 묶여서 그렇다고 표현한다.
왜 젊은이보다는 성숙한 사내에게서 '아이'가 더 많이 깃들어 있고 덜 우울한가?
- 여기서 아이는 차라투스트라 1권 1장의 아이로, 올바른 판단과 자기만의 규율을 갖춘 존재다.
- 이러한 존재는 감정적 판단을 하는 젊은이보다 더 세상을 통찰력 있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고 할 수 있다.
- 그러하다 보니, 젊은이가 느꼈던 절망적인 세상의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던 문제를 성숙한 사내는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 물론 당장 해결할 수 없으니, 우울해할 순 있지만,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여기지는 않으므로, 덜 우울하게 된다.
성숙한 사내는 어떻게 죽음과 삶을 이해하길래 더 잘 이해하나?
- 죽음에서 자유롭고, 죽음에 임할 때도 자유로운 게 성숙한 사내의 모습이다.
- 이는 죽음과 삶에 대해서 잘 이해할 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라고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것이다.
- 이것이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는 점을 알려면, 죽음이 사람에게 제한을 주는 경우를 알아야 한다.
- 우선 죽음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죽음이란 것이 자기 삶의 의미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을 때 가능하다.
- 그렇지 않다면, 죽음이 삶의 의미를 하락시켜서 무언갈 할 때마다 덧없음을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죽음이 와도 내 삶의 의미라던가 나의 과업에 전혀 지장이 없다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 그러려면 자신의 죽음 이후로도 자신의 의지를 잇는 존재가 있다는 게 보장이 되어야 한다.
- 이에 대한 논리가 있어야 하는데, 이 논리는 영원회귀를 통해서 확보가 된다.
- 그리고 영원회귀를 통해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보존할 수 있게 되면, 죽음이 스스로를 제한하지 않게 된다.
- 그래서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도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 그리고 이러한 이해를 가질 수 있다면, 살면서 자신의 과업에 대해서 열심히 노력하며 살 동력이 생기게 된다.
- 즉, 죽음이 주는 제한을 벗어나게 되면, 죽음을 받아들일 때에도, 삶을 살아갈 때에도 좀 더 유의미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대들의 죽음이 인간과 대지에 대한 모독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 모독한다는 것은 욕되게 하는 것을 말하므로, 사람과 세상에 대해서 욕보이지 않기를 바란단 이야기다.
-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인식을 안좋게 만들지 말란 이야기인데, 이는 부조리를 행하는 존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영혼의 꿀은 무엇인가?
- 영혼의 꿀은 영혼이 내놓는 결실이 아닐까 싶은데,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다.
왜 죽음을 맞이할 때, 그대들의 정신과 덕은 대지를 에워싸는 저녁놀이 되어야 하나?
- 대지는 세상/현생을 말하는데, 현재 대지는 부조리로 가득차 있다.
- 저녁놀을 보기 좋은 풍경으로 본다면, 대지를 에워싸는 저녁놀은 '부조리한 세상을 보기 좋게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 여기서 나오는 그대들은 이상사회 구현을 위한 노력을 하는 사람, 차라투스트라가 이들에게 이상 사회 구현을 위해서 노력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 어쨌든 이러한 사람들이 노력을 하다 죽게 되는 시점이 왔을 때, 부조리한 세상을 보기 좋게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 이는 실제 부조리한 세상을 개선하거나, 부조리한 세상이 개선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하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그리고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너희들의 죽음이 실패했다고 말한다.
- 복잡하게 되어 있으니 정리를 해본다면, "너희들이 부조리를 위해 맞서 싸우고, 결과물을 내놓아서, 너희가 죽을 때, 부조리한 세상에 희망을 주어야 한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너희의 부조리와 맞서 싸운 삶은 실패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나를 낳아준 대지의 일부가 되어 쉬려고 하는가?
- 차라투스트라는 세상의 부조리한 사회를 개선하려고 하는 자다.
- 즉 이상사회의 일부가 되려고 노력한 자인 것이다.
- 그런 면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상사회가 오면, 그 일부가 되어 안식을 얻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이 땅위에서 좀 더 머물고자 하는가?
- 차라투스트라는 이상사회의 구축을 위해서 노력하고, 자신의 사색의 결과물을 사람들에게 설파한다.
- 그렇게 설파하고 나서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고, 자신의 사상에 감응한 존재가 어떻게 되는지 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 따라서 이미 과업은 끝났지만, 세상을 더 살면서 사람들을 살펴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 이는 자신이 말한 과업이 끝난 존재는 죽어야 한다는 말과 불일치하므로, 용서해달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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