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1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1권 22장-1 의역 (완) (선사하는 덕, 1절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5. 14. 17:29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1권 22장 선사하는 덕 - 1


 
 

22장 1절 개괄

 

22장 1절은 올바른 이해를 얻기 위해서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지 이야기하는 장이다.
 
니체에 따르면, 올바른 이해를 얻으려면, 우리는 이기적이어야 한다.
즉 우리 자신의 안정과 행복을 위해서, 타인을 계몽시키려는 상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니체는 우리가 타인을 계몽시킬 훌륭한 앎/이상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앎을 가지려면, 우리는 기존 사회의 개념과 교리가 아니라, 우리의 신체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본래 신체에서 기존 사회의 개념들이 비롯되었지만, 사람들은 그 개념의 기원인 신체가 아닌 개념들 속에서 허우적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니체는 우리의 판단과 행동에 신체가 어떻게 관여하는지를 설명한다.
 
이에 따라 니체는 신체를 주목하면서 탐구를 진행하라고 말한다.
 
또한 22장은 신체와 정신의 관계라던가, 신체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논한다.
따라서 「차라투스트라, 1권 4장 신체를 멸시하는 자들」에서 신체에 대한 개념을 충분히 잡으면 이해하기 좋을 듯하다.
개념적으로 본다면 정동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보여, 생각보다 쉽게 읽히지 않을 장이라 생각된다.


 

 본문

 
 
이제껏 차라투스트라는 다채로운 암소라는 마을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며 머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차라투스트라는 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길을 나섰다.
이때 차라투스트라의 제자라고 말하는 많은 이들이 그를 배웅하기 위해 따라갔다.
한 갈림길에 도착했을 때,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여러분, 이제는 저 혼자 가고 싶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원래 그가 혼자 걷는 것을 좋아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별의 선물로 지팡이를 주었다.
그 지팡이는 황금으로 되어있었는데, 손잡이 부분에는 뱀이 태양을 휘감은 모양이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지팡이를 받고 기뻐했고, 지팡이에 기댄 채로 제자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황금이 가장 높은 가치를 지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이유인 즉 황금이 올바른 것의 모습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것들은 흔하지 않고, 삶에 유용하다고 보기도 어려우며, 자극적인 것도 아니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소유할 수 있게 합니다.
황금 역시 흔하지 않고, 실질적인 쓸모는 없으며, 자극적이지 않은/부드러운 광채를 내면서,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게 합니다.

황금이 이처럼 올바른 것의 특징을 지녔기에 사람들이 황금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황금과 올바른 것의 유사점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황금은 실생활에서 가치있어 불필요한 다툼을 종식시킬 수 있는데,

올바른 것도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주어 불필요한 다툼을 종식시킬 수 있습니다.

 

예컨대, 태양을 좋아하는 이와 달을 좋아하는 이가 서로 다투고 있을 때, 황금을 나눠주며 다투지 말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태양과 달을 놓고 다투는 걸 중단하지 않습니까?

올바른 앎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명증한 앎을 제공한다면, 그릇된 앎들은 자취를 감춰버리니까요.

 

태양과 달 사이의 금
태양과 달은 천상의 가치관을 말한다면, 황금은 대지의 가치관을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대지의 가치관이 천상의 가치관보다 더 가치가 높다고 말한다.


 
저는 여러분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잘 압니다.
네, 여러분은 저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올바른 이해를 나누어 주기를 바랍니다.
상황이 이러한데 여러분을 <감정적이고 교활한, 이기적인 존재>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상 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희생하는 사람,
사람들에게 이상 사회를 선물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여러분은 이런 사람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이상 사회를 위한 지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얻으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많은 것에 대해서 올바른 이해를 가지려고 합니다.
왜냐면, 여러분은 사람들에게 올바른 이해를 전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사회에서는 탐구를 기피하는 것에 대해서도 살핍니다.
그리하여 올바른 이해를 얻게 되면,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실로 사람들에게 올바른 이해를 가지게 하려는 사람이라면,

사회적으로 용인하는 일부에 대해서만 살피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마주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살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쯤에서 고백하겠는데, 올바른 이해를 나누려고 하는 것은 사실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자신을 위한 것 아닙니까?
사람들이 올바른 이해를 가지면, 그릇된 이해에 따른 행동이 줄어들 것이고,

그러면 그로 인해서 우리들도 그릇된 이해의 행동을 경험하지 않아도 될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올바른 이해를 나누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행동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되려 이러한 이기심을 신성하고 거룩한 이기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올바른 이해로 가득한 사회를 만들고, 그것은 결국 모두를 위한 것일 테니 말입니다.
 
물론, 모든 이기심이 이처럼 건설적인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한 게 자신을 위해 모두를 챙기는 건설적인 이기심이었다면,
지금 말할 것은 정말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이기심이니까요.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이기심은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타인의 것을 훔치려고 합니다.
타인의 것을 훔쳐서 이용할 때의 편리함을 알아버린 것이죠.
그래서 직접 구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게 되어, 결국 올바른 이해를 위해 탐구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스스로 탐구하지 않고, 타인의 것을 앎을 취하려고만 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이성을 지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스스로 파악하고 판단하는 기능의 상실, 이성의 퇴행인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우리에게 있어 가장 나쁜 것은 무엇입니까?
퇴행하는 것, 다시 말해 올바른 이해를 위한 탐구를 하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이해를 위한 탐구가 무가치하게 여겨지는 집단에서는

가장 나쁜 일, 이성의 퇴행하는 일, 타인의 앎을 스스럼없이 훔치는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퇴행하는 것이 아니라, 더 성장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성숙한 자들의 이상 사회로 나아가려고 하죠.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퇴행한 자들을 넘어서야 합니다.
퇴행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기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기심은 이상사회로 나아가려는 우리에겐 섬뜩한 것이지 않습니까?
 

보석을 살피는 차라투스트라의 제자
이들은 그들 자신을 위해 사람들에게 올바른 이해(보석)을 나눠주려고 한다.

 


 
우리는 위쪽으로 날아가는 존재/이상 사회로 나아가려고 하는 존재들입니다.
위쪽으로 날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신체적 반응을 살피며 행복으로 나아가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신체적 반응을 살핀다는 것은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 성장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신체적 반응을 살펴 얻어낸 우리를 성장/성숙하게 하는 앎들을 덕이라고 말하는 것이구요.
 
신체적 반응은 우리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에 대한 지표를 제공합니다.
우리가 무얼하면 기쁘고 슬픈지 등을 정신에게 알려주기 때문이죠.
그래서 신체적 반응에 주목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인간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로써 우리는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체적 반응에 주목하고 그에 따라 살게 되면,

우리의 신체적 반응에 주목하지 못하게 하던 일부 사회적 규율과 대립하게 되고,

이로써 우리는 사회적 규율을 극복하게 하여 성숙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성장하고 성숙해지고 행복해지는 데에는 신체가 매우 큰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신체가 우리를 성장시키고, 행복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정신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하는 걸까요?

 

정신은 신체의 반응을 파악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신체의 상태를 의식하게 되죠.
이런 점에 따라 보면, 정신은 우리에게 신체의 의사를 전달하는 전령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정신은 신체 반응을 왜곡하지 않고 곧이 곧대로 우리에게 전달하겠죠.
그런 면에서 신체의 반응이 정신에 의해 메아리친다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렇든 저렇든 정신은 신체의 의사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대변자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신체의 의사를 들은 정신은 신체가 더 만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정신의 목적은 신체의 만족이고, 신체의 목적은 개인의 행복이므로,

결국 정신의 목적도 개인의 행복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정신과 신체는 같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동지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소식을 전하는 전령
정신은 신체의 상태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존재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정신이 인식하는 것 자체가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지만.


 
모든 선악은 신체 반응을 조건에 따라 다르게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무엇을 했을 때 신체 반응이 좋았다면 선이고, 신체반응이 나빴다면 악인 것이죠.
따라서 선악의 개념은 그저 신체 반응을 암시할 뿐, 개념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선은 이타적이고 신뢰를 해치지 않는 것이라는 등의 말은 선악에 대한 몰이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거짓말하는 것이 왜 악한 것인지를 논하려고 할 때,

“거짓말은 사람간 신뢰를 해치므로 악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보 같은 짓인 겁니다.
 
거짓말이 나쁜 것은 신뢰를 해쳤기 때문이 아니라,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기 때문인 것이니까요.
만약 불쾌하게 하지 않는 거짓말이 주어진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악하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여러분의 정신이 우리의 감정이나 생각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면,
그리고 그러한 감정이나 생각의 근원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다면,
자신의 신체에 주의를 기울이길 바랍니다.
정신이 표현하는 것들은 모두 신체의 영향을 받아 정신이 표현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여러분이 감정과 생각의 근원에 대해서 생각하려고,
자신의 신체를 살필 때, 신체는 만족되는 상태에 이르고, 생동감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면 신체는 늘 정신이 자신에게 주목해주기를 바랐으니까요.
 
그렇게 내적 충만함을 느끼면서,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무엇이 올바른 것이고 무엇이 그릇된 것인지, 이상 사회를 위해서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지, 이 세상을 어떻게 긍정하며 살아갈 것인지 말이죠.
 
여러분은 사람들에게 지식을 나누게 되면, 사람들이 경이로워 하면서도 곤란해 하는 것을 볼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여러분의 지식이 신체의 반응에 기초하여 형성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탁월한 이해를 제공하여 경이로워 할 수 있지만,

사회적 규율에 따라 보면 자신들이 알던 것과 다르기에 이들에게 곤란을 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순결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순결을 순결할 수 있는 자에게만 요구하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순결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어, 보다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존재로 만들어 주는 좋은 생각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사람들에게 말하면 누군가는 이 주장을 하는 사람을 매도할 수 있죠.

사회에서 말하는 것과 다르니까요.

 
또 여러분이 사회적 칭찬과 비난에 개의치 않으면서
이상 사회를 구축하려는 의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경우도 신체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입니다.
이상 사회로 나아가려는 것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그런 것이니까요.
 
당신이 부조리가 주는 편안함과 안락함을 경멸하고,
올바른 진리를 따르기 어려운 자들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신체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입니다.
올바른 것을 바라는 신체는, 올바름과 관련된다면 불편 속에서도 만족감을 느끼고
사람들이 기피하는 자들과도 있어도 만족감을 느낄 테니 말입니다.
 
여러분이 성숙하려는 의지만을 가지고 있고,
살아가면서 생기는 부조리에 따른 곤경들을 개선시키는 것을 필연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역시도 신체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즉 부조리에 대한 불편감이 여러분이 위와 같이 행동하게 한 것이죠.
 
어떻습니까?
신체야 말로 여러분의 판단의 척도가 아닙니까?
여러분의 선과 악, 가치관, 행동의 원천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기존의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서,
오히려 우리 자신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주는 신체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신체를 새로운 가치 판단의 척도로 삼고,
여러 규율과 가치관을 형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형성된 새로운 규율과 가치관을 우리가 성숙한 존재가 될 수 있는 힘을 제공합니다.
그렇게 형성된 새로운 규율과 가치관들이야말로 이상 사회의 지배적인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리한 존재들은 이 새로운 규율과 가치관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규율과 가치관은 이상 사회의 이데아에 대한 인식인 것입니다.

 

 

태양을 휘감은 뱀이 새겨진 지팡이

신체의 반응을 살피며 얻어내는 가치관과 규율은

이상사회의 이데아를 모방한 것이라고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생각해볼 거리들

 

태양을 휘감은 뱀이 새겨진 지팡이는 무엇을 말할까?
-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으나, 태양은 이데아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 그리고 인식의 뱀이 이 태양을 휘감았으므로, 이데아를 인식했다는 의미로 해석해볼 수 있다.
- 그런 점에서 보면, 차라투스트라에게 태양을 휘감은 뱀이 새겨진 지팡이를 줬다는 것은, "이데아를 인식한 자"라는 의미를 담아서 줬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금의 광채는 왜 달과 해 사이에서 평화를 가져오나?
- 달과 해는 천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 천상의 것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에 해당되는데, 천상은 종교적이거나 사회적인 것을 말한다.
- 따라서 종교적/사회적 가치관이 서로 충돌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그러던 중에 금이 나타난 것인데, 금은 천상의 것이 아니라, 지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 따라서 이 비유는 천상의 것들도 결국 지상의 것보다는 못하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 이는 천상의 것보다 대지/현생의 것을 중시하는 차라투스트라의 주장과 일치한다.
 
고양이나 늑대는 왜 나오는가?
- 차라투스트라는 제자들이 올바른 이해를 나누는 것에 주목한다는 점을 말한다.
- 그러면서 고양이와 늑대가 언급된다.
- 여기서 말하는 포인트는 제자들이 이기적이지 않다는 것으로 보인다.
- 그에 따라서 고양이와 늑대는 이기적 존재로 생각해볼 수 있다.
- 후술되는 병적 이기심을 갖춘 상태의 존재가 고양이이거나 늑대라고 생각해봄직하다.
- 「유고 (1882년 7월~1883/84 겨울)」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확인할 수 있다.
     그대들이 늑대, 고양이와 무슨 공통점을 갖고 있는가?
     늘 받기만 하고 주지 않으며, 받는 것보다는 훔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이것들과 말이다.
     그대들은 언제나 선사하는 자들이다.
 
왜 차라투스트라의 제자들은 스스로 제물이자 선물이 되려 하는가?
- 차라투스트라의 제자들은 이상사회를 바라는 자들이다.
- 그래서 이상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 사회의 부조리와 맞선다.
- 이러한 부조리와의 맞섬은 이상사회를 위한 희생이자 이상사회를 위한 밑거름이 되려는 것이다.
- 이러한 특징을 이상사회의 제물이라고 표현한 것 같다.
 
- 차라투스트라의 제자들이 이상사회를 위해서 노력하면, 미래의 존재들은 그나마 좀 더 나은 사회를 마주하게 될 거고, 언젠가 이상사회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 즉 제자들의 노력은 미래의 존재에게 이상사회를 선물해주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표현한 것 같다.
 
만물이 그대를 향하게 하고, 그대 속으로 흘러들어오도록 강제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 만물이 사람을 향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니체는 이 부분을 서술하고 있다.
- 그런 점에서 단순히 만물과 상호작용한다는 의미로 보기는 어렵다.
 
- 현재 차라투스트라의 제자들의 특징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으므로, 그와 반대되는 사회적 인물을 떠올려 보면 이야기가 쉽게 풀린다.
- 즉 사회적 인물들을 보면, 대체로 사회적으로 허용하는 것들에 대해서만 다루고 탐구한다.
- 이를 추정할 수 있는 발언을 차라투스트라가 두 번 말했는데, 올바른 이해를 구하는 사람은 "진리가 더러운 물에 있는 경우"에도 뛰어든다고 했다.
- 그렇다는 것은 올바른 이해를 구하지 않는 사회적 인물들은 "진리가 더러운 물에 있는 경우"에는 뛰어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 따라서 만물을 가려가면서 파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이러한 점에 따라서 이 문장을 생각을 해보면, "어떤 사회적 편견없이 세상을 공부하고 배운다"는 말로 볼 수 있다.
 
선사하는 사랑은 왜 모든 가치를 강탈해내는 자가 되어야 하나?
- 차라투스트라의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올바른 이해를 제공하려고 한다.
- 이에 따라서, 만물을 살피면서 가치 판단을 하고 규율을 만든다.
- 그런 면에서 보면, 굳이 강탈한다는 말을 쓸 필요가 없기는 하다.
- 아마도 강탈한다는 것은 강제로 뺏어온다는 의미로 쓴 것 같다.
 
- 이에 따라서 생각을 해보면, 사회적 선입견에 따라서 만물의 가치가 숨겨지거나 가려지는 것으로 보인다.
- 이렇게 숨기고 가린 것을 강제로 꺼내어 낸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차라투스트라가 신성하다고 말하는 이기심은 무엇을 말하나?
- 우리는 이기적이라고 한다면, 타인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 하지만 영리한 사람이라면, 타인을 돕는 것이 자신에게 좋다는 것을 안다.
- 예컨대, 누군가의 무지로 인해서 내 만족이 방해받는다면, 그를 빨리 도와주는 것이 자신에게 이로운 것이다.
- 22장의 내용으로 예를 들어 본다면, 누군가가 무지해서 잘못을 저지른 것이라면, 올바른 것을 알려주면 잘못을 저지르지 않지 않을까?
- 그런 면에서 사람들을 교육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다.
- 이런 측면에서 차라투스트라와 그의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올바른 이해를 가르치려는 것이다.
- 무지에 의한 피해를 덜 받기 위해서 말이다.
 
- 이해를 돕기 위해서 니체의 「유고(1882년 7월~1883/84년 겨울)」의 메모를 보면 이렇다.
"이기심이 언젠가 더 크고 영리하고 섬세하고 독창적으로 될 때 세계는 ‘좀더 비이기적인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왜 갑자기 병적 이기심을 이야기하다가 신체의 병듦을 말하나?
- 22장에서 병적 이기심은 타인이 연구한 것을 받아 먹기만 하는 것을 말한다.
- 이는 다르게 말하면, 타인이 연구한 것을 차용하는 것에 만족을 느낀다는 것이다.
 
- 그런데 과연 타인이 연구한 것을 차용하는 것은 성숙한 존재의 모습일까?
- 이에 대해서는 아마 미숙한 존재의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 그런데 병적 이기심에 놓인 사람은 타인이 연구한 것을 차용하는 것에 대해서 만족하며, 더 노력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 미성숙한 태도에 만족을 느낀다는 것이다.
 
- 만족과 불만족은 신체적 반응이다.
- 그리고 기본적으로 우리는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것에 대해서, 행복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서 만족을 느끼고, 어리숙해지고 불행해지는 것에 대해서 불만족을 느낀다.
- 이게 신체라는 큰 이성이 건강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 하지만 병적 이기심을 가진 존재의 경우, 미숙한 사람이 보일 태도에 대해서 만족을 느끼고 있다.
- 그러니 직접 탐구하려고 하지 않고, 남의 것을 차용하려고 하는 것이지 않나?
- 이에 따라서 보면, 신체라는 큰 이성이 건강하지 못하기에, 미숙한 것에 대해서 만족을 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와 형제들은 남의 것을 차용하려는 것을 퇴화라 부르는가?
- 그들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선사하는 영혼이 없는 곳에서는 왜 퇴화를 알아차리나?
- 스스로 탐구하는 존재가 없는 곳에서는 남의 것을 차용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더 빈번히 드러난다는 이야기로 보인다.
 
우리의 길은 왜 위쪽인가?
- 차라투스트라와 제자들은 성숙해지기를 바라고, 성장하기를 바란다.
- 스스로 사고하지 못하는 것은 성숙과 거리가 멀다.
- 따라서 이들은 퇴화하는 방향이 아닌 성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 이들이 향하는 방향을 위쪽이라고 본 것이다.
 
- 그래서 남의 것을 차용하려는 생각은 그들에게 섬뜩한 것이 된다.
 
왜 위쪽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신체에 대한 비유이자, 상승에 대한 비유인가?
- 위쪽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성장과 성숙, 행복을 말한다.
-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느낀 것을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신체가 갖는 느낌을 집중해야지, 다른 선입견이나 편견에 집중해선 안된다.
- 이러한 특징에 따르면, 우리를 성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것은 신체라 할 수 있다.
- 그리고 그렇게 올바른 이해를 갖추게 되면, 우리는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므로, 니체는 신체에 집중하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 그리고 위쪽을 향한다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성장과 성숙이다.
- 성장과 성숙을 상승이라고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왜 상승에 대한 비유들이 바로 덕의 이름인가?
- 비유라는 것은 우회적 표현 또는 간접적 표현, 관련된 표현으로 보면 좋다.
- 즉 이 부분의 경우, "상승과 관련된 표현이 바로 덕이란 이름을 갖는다"는 표현으로 보면 된다.
- 따라서 우리를 성장/성숙하게 하는 것들이 덕이라 불린다고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체는 왜 성장하는 자인가?
- 신체는 행복을 향해 나아가려고 만족과 불만족의 반응을 제공한다.
-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지만, 쇠락하는 길로 나아갈 수도 있긴 하다.
- 하지만 기본적으로 불행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 신체이기 때문에, 성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본다.
- 그래서 신체는 성장하는 자로서 표현된다.
 
신체는 왜 투장하는 자인가?
- 신체는 행복을 향해 나아가려고 하며, 만족과 불만족의 반응을 보인다.
- 그런데 사회적 규율의 강제는 종종 신체의 불만족 반응을 유도한다.
- 이에 따라서 신체를 중시하는 사람은 사회적 규율과 맞서게 된다.
- 이러한 특징에 주목하여 나온 것이 투쟁하는 자라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 즉, 사회적 규율과 투쟁한다는 것이다.
 
왜 역사를 가로지른다고 하나?
- 사회적 규율은 인류의 역사를 거쳐서 발달한 것이다.
- 따라서 간단히 말하면 인류의 역사라고 할 수도 있다.
- 신체는 개인의 행복을 위주로 반응한다.
- 그런데 누군가가 사회적 규율보다 자신의 신체의 판단을 중시한다면, 이 사람은 사회적 규율을 무시할 것이다.
- 사회적 규율을 역사로 본다면,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 되고, 이를 역사를 가로지른다고 표현했다고 보인다.
 
정신은 왜 전령이자 동지이자 메아리인가?
- 정신은 신체에 일어난 반응을 알아차리는 존재다.
- 물론 그렇게 알아차리면 우리는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게 된다.
- 니체는 신체적 반응을 정신이 알아차려서 나에게 알려준다는 식으로 표현한 것 같다.
- 그래서 신체가 사회적 규율과 맞서려고 하는지, 신체가 현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고 봤던 것 같고, 그래서 신체의 전령으로서 정신을 말하는 듯 하다.
 
- 정신은 신체의 반응을 그대로 복제하여 의식하게 한다.
- 그런 점에서 신체 반응을 복제하는 메아리라고 할 수 있다.
 
- 신체는 개인의 행복을 위주로 반응을 보이는데, 정신이 신체의 반응에 집중한다면, 정신은 신체가 바라는 행복을 위해서 방법을 고안하고 행동을 유도한다.
- 그런 점에서 신체와 같은 목적을 지닌 것이 되고, 이를 동지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선악에 대한 이름은 왜 모두 비유인가?
- 이는 선악이라는 것이 모두 신체적 반응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기본적으로 선악은 사회적 협약 속에서 맺어진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선악은 본디 신체적 만족과 불만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를 명확히 알고자 한다면, 원시 밀림 속의 한 존재가 기만당했을 때 그것을 나쁘다/악하다 느낀다면, 그것은 사회적 협약에서 얻은 인식인지, 그저 단순히 자신의 불쾌함에서 판단한 것인지를 살펴보면 된다)
- 그래서 선악은 신체 반응에 대한 우회적 표현/간접적 표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 하지만 선악은 자신들이 신체적 반응에서 비롯되었다고 표현하지 않고, 게다가 사람들은 선악에 대해서 사회적 협약이라거나 인간관계 속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 이에 따라서, 사람들이 선악에 대한 이해를 가지려고 하거나, 어떤 행동의 선악을 논하게 된다면, 본질을 전혀 살피지 못하는 우매한 논증이 나타날 수 있게 된다고 보는 듯 하다.
 
정신이 비유로 말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 정신이 말하는 것은 대체로 신체가 느낀 것들이다.
- 그러므로 정신이 표현하려는 것의 기원을 살핀다면, 신체가 그 기원이라는 점을 파악하게 된다.
- 불쾌하다고 느낌, 과하다고 느낌 등등의 모든 것 말이다.
- 이러한 것을 두고 니체는 "신체적 반응을 개념을 통해서 표현한다/신체적 반응을 말이나 언어를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한다"는 식으로 본 것 같다.
 
- 결론적으로, 정신이 비유로 말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다 신체에서 비롯된다는 특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덕의 근원은 무엇인가?
- 덕은 옳고 그름, 선과 악, 가치관을 말한다.
- 그런데 이러한 것의 기원은 바로 신체적 반응, 만족과 불만족/쾌와 불쾌다.
- 따라서, 신체가 덕의 근원이라고 표현이 된다.
 
정신이 신체에 관심을 돌릴 때, 왜 신체는 고양되고 소생하는가?
- 신체는 자신의 반응에 정신이 합응하기를 바라였기 때문이다.
- 이는 의인화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신체의 반응에 따라서 행동한다면, 개인은 만족에 이를 확률이 크다.
- 물론 그 이후에 생기는 문제들도 있겠지만, 아무튼 신체는 자신의 반응에 맞는 활동을 하기를 바라는 상태이기 때문에, 정신이 자신의 반응에 주목하는 것에 큰 만족을 느끼게 된다고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신체는 어떻게 자신의 환희로 정신을 매료시키는가?
- 정신이 신체를 주목하게 되면, 자신에 대한 이해가 늘어나고, 신체의 요구에 맞춘 행동을 하면서 더 생동감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 왜냐면 신체는 늘 개인의 행복과 만족을 위해서 반응하기 때문이다.
- 그런 면에서 정신이 매료된다고 표현하는 듯 하다.
 
심장이 큰 물길처럼 드넓게 흘러넘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 이는 감정적 격동을 말하기는 하는데, 선행되는 것은 신체를 주목하면서 정신이 인간의 본성이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뭔가를 알아차리거나 깨닫는 것이다.
- 즉, 인간 본성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서 사람들에게 공유하고 싶은 상태에 이른다는 것을 말한다.
 
왜 근처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기도 하고, 위험이 되기도 하나?
- 근처 사람들은 인간 본성에 대하여 깨달으면서 이해가 증가하니 좋은 일이다.
- 하지만 사회적으로 용인해주지 않는 정보를 공유받는 것이라면, 사회적으로 매도될 수 있기 때문에, 위험이 된다.
 
사회적 칭찬과 비난에 초연한 상태에서, 사랑하는 자의 의지로 모든 것에 명령을 내리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왜 나오나?
- 사회적 칭찬과 비난에 초연하다는 것은 사회적 규율을 벗어났다는 이야기가 된다.
- 이런 상태의 사람은 이상 사회에 대한 사랑/위버멘쉬에 대한 사랑을 가진 사람이다.
- 이런 사람이 자기 행동을 하게 된다면, 이는 곧 사회적 규율이 아닌 자기 행복을 위해서 명령을 내린 것이 된다.
- 자기 행복은 또 신체적 만족에서 비롯될 것이니,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신체적 반응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된다.
- 그래서 니체는 이러한 행동에는 신체가 관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편안함과 부드러운 잠자리를 경멸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 잠자리가 좋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근심 걱정 대립이 없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 즉 사회적인 생활을 잘 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런데 니체는 이를 경멸하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
- 즉 사회적으로 잘 생활하는 것을 경멸한다는 이야기다.
- 이는 곧 개인의 행복을 우선시한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는데, 신체의 반응을 살피고 따르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여린 자들로부터 멀리 떨어져도 충분치 않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 앞서 편안함과 부드러운 잠자리를 경멸한다는 점으로 볼 때, 여린 자는 사회적인 인물의 일종으로 보인다.
- 왜냐면 개인의 행복/신체 반응을 살피는 사람이 멀리 떨어지려고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그런 측면에서 여리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올바른 이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 하는 사람, 민감해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 이런 사람들로부터 멀어져도 충분하지 않다는 것은,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과 멀어져도 여전히 불만족이란 것이다.
- 그럼 무엇에 대한 불만족이 이 사람에게 있을까?

- 아마도 그것은 올바른 이해에 대해서 논할 수 있는 상대가 없음에 따른 불만족으로 보인다.
- 왜냐면 올바른 이해를 이야기했지만, 여려서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 그래서 단순히 사회적으로 잘 사는 것이나 사회적 성향의 사람들을 피해서 사는 것만으로는 만족을 못하는 것을 말한다.
- 이는 결국 이상사회를 바라는 사람이란 건데, 마찬가지로 신체의 만족에 따라 사는 사람이기에 나타나는 반응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의 의지만 의욕한다는 것은 뭘까?
- 이제까지의 내용으로 보면,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대상은 이상사회를 원하는 사람, 성숙함을 바라는 사람, 사회 부조리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 이런 사람은 올바른 인식/사회 부조리의 개선을 의지한다.
 
일체의 곤경을 의지에 전환시키는 것을 필연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 성숙함을 바라는 사람, 이상 사회를 바라는 사람은 곤경을 마주하게 된다.
-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곤경을 피하지 않고, 개선하려 노력하게 되는데, 이러한 것을 자신이 선택한 운명에 대한 필연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으로 보인다.
- 결국 이상 사회를 추구하며 나타나는 곤경을 개선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란 이야기다.
- 이는 마찬가지로 신체의 반응을 사회적 규율보다 중시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왜 그대들의 덕이 새로운 선과 악이며, 깊이 있는 물결의 소리이자 새로운 원천의 소리인가?
- 이상의 내용을 보게 되면, 신체적 반응에 따라서 행동하고 판단한다.
- 이런 점에서 신체적 반응은 하나의 가치척도, 하나의 선악이 된다.
 
- 또한 신체적 반응은 개인의 본성의 소리를 담고 있는데, 이 본성을 깊이 있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 또한 신체적 반응은 새로운 가치판단의 원천이므로, 새로운 원천의 소리라고 말하는 걸로 보인다.
 
새로운 덕은 무엇이고 왜 힘이 되는가?
- 새로운 덕이란 신체적 반응에 따라 나타난 가치관이나 규율을 말한다.
- 이것들을 이상 사회를 구현하는 힘으로 보는 듯 하다.
 
왜 새로운 덕은 지배적 사상이고, 영리한 영혼들이 그것을 둘러싸고 있나?
- 새로운 덕은 이상사회를 지배하는 사상이 될 것이라고 봐서 이런 표현을 쓴 것으로 보인다.

- 새로운 덕은 사회적 규율에 의해서 억압당하면서 지내는 것과는 다르다.
- 그런 점에서 억압당하면서 지내는 자들보다 현명한 선택을 한다고 볼 수 있다.
- 이에 따라서, 영리한 자들이 이 덕들을 구한다고 보는 듯 하다.
 
새로운 덕은 왜 인식의 뱀이 휘감은 황금빛 태양이라 하는가?
- 이 새로운 덕은 이상사회에 대한 이데아를 모방한 것이라고 본 것 같다.
- 왜냐면 태양은 이데아를 나타내고, 뱀은 인식을 나타내므로, 이데아에 대한 인식의 결과물로서 새로운 덕이 나타났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니체는 이 새로운 덕을 이상사회에 대한 이데아의 모방이라 표현하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