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4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4권 19장 의역 (완) (밤 방랑자의 노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8. 27. 23:36

ㅡ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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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4권 19장 밤 방랑자의 노래


         
19장 개괄

 

 

19장은 「차라투스트라 3권 15장」과 비슷한 구조를 띄려고 하는 장이다.

3권 15장에서 자정을 알리는 소리에 맞춰서 차라투스트라는 노래를 부르는데, 이번에는 12절로 말을 하면서 12절에는 3권 15자에서의 이야기를 다시금 하기 때문이다.

 

1절에선 차라투스트라와 함께 하던 자들이 회복되어지는 상황을 나타낸다.

이것은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이 나귀 축제를 통해서 나름대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말한다.

손님들이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차라투스트라」 자체에서는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다만 「유고 (1884년 가을~1885년 가을)」의 32[13] 부분을 보면, 윤창이라는 제목에서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고귀한 자들의 노래가 담겨 있다.

이 글에서 「차라투스트라 19장 1절」과 비슷한 전개가 나타나는데, 손님들이 서로 돌아가며 노래를 부른다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차라투스트라에게 배운 대로 행하려고 한다고 말하므로, 니체의 구상은 동굴에 모인 자들이 차라투스트라를 받아들였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신 「차라투스트라」에서는 그것이 당나귀 축제로 바뀌어서 전개되었을 뿐이라고 본다.

 

2절에서부터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19장에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언급이 되는데, 니체의 본래 의도를 추정해본다면, 차라투스트라가 죽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차라투스트라」 자체에서는 차라투스트라의 죽음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19장에서는 죽음을 앞두고 있는 차라투스트라의 모습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인다.

2절에서 오라고 말하는 자정은 그런 의미에서 죽음의 시간, 올바름을 추구하다가 죽게 되는 상황을 그리고 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하는 자들에게 올바름을 추구하며 살다 죽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지를 조언해주는 내용으로 구성되리라 추측할 수 있게 한다.

 

3절의 경우, 죽음이 다가오면서,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손님들에게 영원회귀에 대한 비밀을 알려주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노력의 헛됨에 절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노력하며 나아갈 수 있는 그 기쁨을 주려는 것이다.

 

4절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운명과 자신이 맞닥뜨렸던 절망에 대해서 운을 떼지만 말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의 고달픔을 말하면, 자신처럼 살 존재가 없을 것이라고 봐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차라투스트라는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자를 바라고 있다고 하며,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달라고 한다.

 

5절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과거의 사람들의 노력의 가치를 밝혀주고 그래서 그들의 삶이 의미 있었음을 증명해달라고 한다.

 

6절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상을 위해 노력하다 죽는 자가 왜 행복 속에서 죽는지 의문을 던진다.

이는 영원회귀를 통한 운명의 긍정을 말하기 위해 던지는 의문이라 할 수 있다.

 

7절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부조리한 세상에 이용당하는 것을 원치 않아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자신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자신을 숭배할 것인지 아니면 참고하며 성장하기 위한 발판으로만 쓸 것인지를 알려주는데, 당연히 자신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지 말라고 말한다.

 

8절은 7절에서처럼 자신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하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의 슬픔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영원회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9절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상적 미래를 위해 노력하다가 죽은 자들이 어떤 것을 바라는지 설명한다.

이는 누차 언급된 것이기도 하다.

자신들과 같이 노력할, 뜻이 같은 자/동료를 찾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영원회귀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10절에서 영원회귀를 긍정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말한다.

자신의 운명을 반복해서 살고자 한다면, 그렇게 기뻐할 수 있다면 영원회귀를 긍정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은 영원회귀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11절에서 영원회귀를 긍정하는 자들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라는 것,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들은 영원회귀를 통해서 노력의 헛됨이 주는 절망을 벗어난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12절에서는 「차라투스트라, 3권 15장」에서 자정의 종소리에 따라 말했던 이야기를 노래로서 부르라고 말한다.

이는 노력의 헛됨에서 벗어나려면 영원회귀가 필요하다는 것을 담고 있는 노래다.


 

 

본문

 

 

-1-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가 끝나고, 생각에 잠긴 사람들은 한 명씩 서늘한 밤이 된 바깥으로 나갔다.

차라투스트라는 가장 추악한 자의 손을 잡고, 그에게 자신의 밤의 세계와 달, 은빛 폭포를 보여주었다*.

이들은 모두 나이가 든 사람들이었지만, 절망을 위로 받아 고양된 가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이 지상에서 이렇게 행복해하고 있다는 것을 두고 놀라워했다.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자신의 내면과 생각에 대해 고귀한 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더 깊은 밤이 되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생각했다.

    “아, 이 고귀한 자들은 정말 내 마음에 쏙 드는구나.”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가장 추악한 자가 울컥대기 시작하더니 사람들에게 질문을 했다.

    “친구들이여, 너희에게 묻겠다.

     너희는 오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오늘 하루를 통해서 내 인생이 무척이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을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차라투스트라와 하루를 보내면서, 지상에서 사는 것에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절망적이라고 여겼던 현생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나는 죽음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이러한 것이 삶인가? 그렇다면 한 번 더 살고 싶다!’

 

     친구들이여,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너희도 이렇게 죽음에 대고 묻고 싶지 않은가?

       ‘이것이 삶인가? 그렇다면 차라투스트라를 위해 한 번 더 살고 싶다!’”

가장 추악한 자가 이렇게 말했다.

자정이 멀지 않은 시간이었다.

 

가장 추악한 자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변화했음을, 절망감에서 회복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와 회복이 차라투스트라에 의해서 나타난 것임을 알아차리고, 차라투스트라에게 다가가 감사해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그의 손에 키스를 했다.

그 과정에서 몇몇은 울고 몇몇은 웃었다.

 

절망을 말하던 예언자는 낮에 차라투스트라가 말한 것처럼 기쁨에 춤을 추었다.

그가 취해서 그랬었던 것일수도 있겠지만, 그는 분명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절망을 떨쳐버렸기 때문이다.

 

당나귀가 춤을 추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가장 추악한 자가 당나귀에게 포도주를 먹인 것은 의미 있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사실 중요하지 않다.

당나귀가 춤을 추지 않았더라도, 이 날은 놀라운 일이 벌어졌었으니 말이다.

 

춤을 추는 사람들

사람들은 차라투스트라를 통해서 절망을 벗어나고, 이 기쁨에 춤을 춘다.


 

-2-

 

가장 추악한 자가 이렇게 말하고 있을 때, 차라투스트라는 취한 사람처럼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흐려졌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제대로 서서 걷지 못했던 것이다.

그에게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길래 그런 것인지 누가 알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그가 이상적 미래를 떠올리며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고귀한 자들이 차라투스트라를 부축하고 있던 사이, 차라투스트라는 정신을 조금씩 차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도우려는 다가오는 이들에게 괜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그러다 차라투스트라는 무언가를 들은 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입술에 손가락을 대며 말했다.

    “오라!”

 

그러자 사방에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저 먼 곳에서 종소리*가 천천히 들려왔다.

차라투스트라와 고귀한 자들은 이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3권 15장에서 나타나는 자정/죽음을 알리는 종소리다.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다시 말했다.

    “오라! 자정이 다가오고 있구나!”

그의 목소리는 변해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여전히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주변에는 더 정적이 흘렀고, 모든 것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말했다.

    “오라! 자정이여!

 

     고귀한 자들이여,

     이제 같이 나아가 봅시다.

     때가 되었습니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의 최후를 향해 같이 나아가보도록 합시다.”

 

자정

태양으로 자신을 묘사하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자정은 죽음에 이르는 시점을 말한다. 


 

-3-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고귀한 자들이여,

     자정, 제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래된 자정의 종이 제게 말한 것처럼, 저도 여러분에게 말을 하고자 합니다.

 

     저 오래된 자정의 종은

     제게 은밀하게 가려진 것, 끔찍한 사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의 운명,

     저와 같은 자들이 살았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여러분들과 함께하며 소란스러웠던 것이 잠잠해지니

     한창 젊은 시절에는 알지 못했던 제 운명에 대한 생각들이 밀려옵니다.

 

     이제 운명이 말을 하는 것들이 밤의 영혼인 제게 스며듭니다.

     아, 제 운명은 죽음을 앞두고 아쉬워하면서도 미래를 그리며 웃고 있군요.

 

     여러분은 제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아, 인간이여, 제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자정의 종

이 종은 죽음을 알리는 종이다.


 

-4-

 

     자정의 시간, 저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고요 속에 있습니다.

     시간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그렇게 세상은 고요 속에 잠들어 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생각나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운명의 공허함에 대해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걸 말하면, 누가 저와 같은 운명을 살려고 선뜻 나서겠습니까?

     저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럴 바에는 죽고 말겠습니다.

 

     운명의 거미는 이렇게 죽어가는 저를 두고서 과거와 미래를 엮고 있는 듯합니다.

     정말 그런 것이라면 좋겠습니다.

 

     아, 다시 저와 같은 이들이 세상에 내려올 겁니다.

     그러면 저는 고독 속에서 묻겠죠.

       “당신은 이 운명에 따라 살아갈 용기를 지녔습니까?

        누가 이 그릇됨과 부조리를 쫓고 올바름을 이 세상에 세우려고 할 것입니까?

        누가 사람들에게 올바른 것을 가르치며 그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까?”

 

     이상적 미래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인간이여, 고귀한 자여.

     그러니 제 말에 주의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제 이야기는 섬세한 자들인 여러분을 위한 것이니 말입니다.

     죽음을 앞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주의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운명의 거미

이 거미는 하나의 존재로부터 과거와 미래를 엮는다.


 

-5-

 

     운명은 저를 저 먼 미래로 데려갑니다.

     저는 그에 따라서 춤을 추지요

 

     세상이여,

     누가 그릇됨과 올바름 중 무엇이 이 현생을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달은 차고 바람은 잠잠합니다.

     이 고요 속에서 이성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 여러분은 제게 자신들이 이상적인 존재라고, 위버멘쉬라고 말하는 군요.

     하지만 여러분은 이상에 따라 움직일 수는 있지만, 아직 완전히 이상적인 존재는 아닙니다.

 

     자, 회포를 푸는 즐거운 시간은 끝났습니다.

     이제 다시 삶으로 돌아가 이상적 미래를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과거의 존재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삶의 가치를 찾아 다오!

        왜 아직도 우리의 노력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고 있지 않은가?

        아직 우리를 제대로 평가해줄 존재가 나타나지 않은 것인가?”

 

     고귀한 자들이여,

     저 과거의 존재들을 구원해주시기 바랍니다.

 

     아, 아직 여러분에게 절망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직 확신이 서지 않은 것입니까?

     이해합니다.

     세계는 분명 쉽게 나아갈 수 없는 심오한 것이니까요.

 

구원되는 무덤

이상적 미래를 위해 노력한 사람은 죽어서 후대의 사람에 의해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이를 차라투스트라는 진정한 의미의 구원이라고 말한다.


 

-6-

 

     올바름을 말하는 자여,

     사람들이 당신의 이야기에 대해서 볼품없다고 하더라도, 저는 당신의 이야기를 사랑합니다.

     당신의 이야기는 사랑의 연못에서부터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상적 미래를 위해 노력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자여, 올바름을 말하는 자여!

     올바름을 추구하며 겪은 고통이 당신을 괴롭혔고, 이로써 당신은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앎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되었죠.

     그리고 이제 당신은 저처럼 앎을 나누며 이상적 미래를 위해 노력하면서 죽으려고 합니다.

 

     내 이야기를 듣는 고귀한 자들이여,

     여러분들은 알지 못합니까?

     그가 죽으면서도 행복한 이유를 말입니다.

     그는 영원회귀를 알고 삶을 긍정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죽는 자는 노래합니다.

       “세계는 심오하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오하다.”

 

행복한 죽음

영원회귀를 통해서 차라투스트라는 행복한 죽음을 누릴 수 있게 된다.


 

-7-

 

     부조리한 세상이여, 함부로 저를 당신의 옆에 세우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저를 부조리의 근거로 삼지 말길 바랍니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가장 순수한 자들이 사회를 이끌어야 합니다.

     사회 속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않는 은둔자,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강한 자들,

     이상적 미래를 위해 노력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자들,

     이들이 사회적으로 현자라고 평가받는 이들보다 더 현명한 자들입니다.

 

     오 부조리한 세상이여,

     제 이야기가 탐나는 겁니까?

     제가 말하는 행복을 부조리를 위해서 이용하고 싶은 것입니까?

 

     하지만 부조리한 세상은 제게 너무나도 투박합니다.

     그러니 더 영리한 손을 가지길,

     이상적 미래를 바라고, 이를 위한 불행을 견딜 수 있기를.

     그렇게 올바른 가치를 찾고 성장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되, 제게 의존하지는 않기를.

 

     저의 불행은 미래를 바라면서 오고, 저의 행복은 먼 미래를 그리면서 옵니다.

     저는 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옥으로 이끄는 존재도 아닙니다.

 

     세상의 슬픔/절망이 깊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 의존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부조리한 사회의 손

부조리한 사회는 자신들의 부조리를 강화할 수 있다면 염치없는 짓이라도 서슴없이 저지른다.


 

-8-

 

     신이라는 존재는 슬픔과 절망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세상이여,

     우선 이 신이라는 존재의 슬픔과 절망을 파헤치기 바랍니다.

     제게 의존하지 마시구요.

 

     저는 그저 올바름을 노래하는 하나의 존재에 불과합니다.

     귀머거리들 앞에서 가르침을 전하는 존재, 사람들로부터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여겨지기도 하는데,

     이는 여러분들이 저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노력하던 시절도 흘러가서, 이제는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따르던 자들이 염려하고 있군요.

 

     아아,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가 죽음을 앞두고 얼마나 탄식하는지, 또 얼마나웃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또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지!

     자신의 운명에 너무 취해서 그런 것일까요?

 

     그는 자신의 운명의 슬픔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자신의 운명의 기쁨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의 슬픔이 크다고 하더라도,

     이를 극복해내는 기쁨, 영원회귀의 기쁨이 그에게 있는 것입니다.

 

냉대받는 리라 연주자

차라투스트라가 시장에서 냉대받은 모습을 리라 연주자로 표현하고 있다.


 

-9-

 

     과거의 존재여,고귀한 자들이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왜 저를 칭송하는 것입니까?

     저는 당신을 비판하였는데, 그래서 당신에게 흠집을 내었는데,

     왜 저의 잔인함을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까?

 

     당신은 말합니다.

       “완전하게 무르익은 것은 모두 죽기를 바란다.

        축복받을 지어다, 포도원의 가위*여!

        덜 익은 것들이 살기를 바랄 뿐이다.”

*포도원의 가위는 수확을 위한 도구다.

올바름 추구자들은 평생을 거쳐 이상적 미래를 위한 결실을 내놓으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후대의 탐구자들에게서 수확되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양분이 되기를 바란다.

그런 점에서 포도원의 가위/수확의 가위는 탐구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유의미하게 해주는 것이 된다.

그렇기에 과거의 탐구자들은 수확의 가위를 두고 축복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 절망하여 슬퍼하는 일반적인 사람들은 말합니다.

       “사라져라, 고통이여!

        죽어야 이 고통이 사라지는 것인가?”

 

     하지만 이렇게 고통에 따라 외치면서도 모두들 살기를 바랍니다.

     이 존재들은 성장하고, 즐겁고, 욕망하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삶을 부정하면서도 이상적인 미래, 성장, 희망을 바라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슬픔은 우리에게 맞지 않습니다.

 

     삶에 고통받는 일반적인 존재들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나는 상속인을 바란다.

        나는 자식을 원한다.

        나와 같은 자가 나타나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상속인과 자식을 통해서 안도하고 싶은 것이죠.

 

     하지만 절망을 앞에 두고도 기뻐하는 자*는 상속인도 자식도 바라지 않습니다.

     이런 자는 자기 자신과 같은 이를 바랍니다.

     그래서 자신과 같은 이가 돌아오리라고 말하는 영원회귀를 원하고,

     모든 것이 동일하게 반복되기를 바랍니다.

*영원회귀를 통해서 삶을 긍정하는 자를 말한다.

 

     그럼에도 고통받는 존재들은 여전히 이렇게 말합니다.

       “고통과 절망은 불가피하다.

        이것이 삶이다.

        고통을 벗어나려면, 사라져야 한다”

 

포도원의 수확 가위

포도나무는 이미 이상적 미래를 위해 노력한 과거의 존재라면,

수확 가위는 이제 이상적 미래를 위해 노력하려는 미래의 존재라 할 수 있다.


 

-10-

 

     고귀한 자들이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상적 미래를 예언하는 자입니까?

     이상적 미래를 꿈꾸는 자입니까?

     이상적 미래를 향하는 운명에 취해 있는 자입니까?

     이상적 미래를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꿈 해석자입니까?

     이상적 미래를 위해 살다가 죽어가는 자정의 종입니까?

     메마르고 절망적인 세상에 위안을 주는 이슬과 같은 자입니까?

     영원한 반복 속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인 자입니까?

 

     여러분은 듣지 못하였습니까?

     죽음을 앞두면서 제가 충만해졌음을 말입니다.

     죽음은 곧 새로운 시작으로 나아가는 것이니 말입니다.

 

     부조리 속에서의 고통이 있어서, 미래에 이바지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고,

     어떻게 보면 저주받은 운명을 살았기에, 미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으며,

     영원회귀 속에서 죽음은, 또 새로운 존재의 등장을 말하는 것이니,

     여러분은 이것을 배우거나 여기서 떠나가시기 바랍니다.

 

     이런 모습이 바보같다고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현자는 바보이기도 하죠.

 

     여러분은 절망적인 세상을 두고서 긍정하며 영원회귀의 기쁨을 맛본 적이 있습니까?

     그랬던 적이 있다면, 여러분은 세상이 주는 고통도 긍정하고 받아들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고통이 있기에, 여러분이 영원회귀의 기쁨을 맛본 것이니까요.

     그렇게 세상의 모든 것을 긍정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운명을 다시 또 살고 싶다고 느낀 적이 있다면,

     여러분들이 운명을 마음에 들어 한 적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모든 것이 돌아오기를 원한 것이고, 이는 영원회귀를 바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영원히 반복되는 세계를 사랑한 것입니다.

 

     영원회귀 속의 존재들이여,

     이러한 세계를 영원히/언제나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절망적인 세계에 대한 슬픔을 향해서도 말해야 합니다.

       “사라져라, 그리고 때가 되면 다시 돌아오라!”

     이것이 있어야 영원회귀를 통한 기쁨을 누릴 수 있으니 말입니다.

 

메마른 대지 위의 이슬

이슬은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존재들을 말한다.

이들은 절망적인 세상에 희망을 주려고 하기 때문에 이슬로 묘사된다.

 


 

-11-

 

     영원회귀를 통해 세상을 긍정하고 기뻐하는 자들은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되기를 원합니다.

     올바른 앎을 원하고, 그렇게 성장해가는 것을 바라며

     자신의 운명에 취하여 노력하다 죽기를 원하고,

     노력하다 죽은 존재들, 그들로부터 위안을 얻고,

     자신의 앎을 세상에 나누는 이 모든 것을 원합니다.

 

     영원회귀를 통해서 세상을 긍정하고 기뻐하는 자가 무엇인들 원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절망하는 자들보다도 더 열정적이고, 진심이며, 섬뜩하고 은밀하니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쁨을 위해서 영원한 반복 속에 있는 자신을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 영원회귀가 애를 쓰고 있죠.

 

     영원회귀를 통해서 세상을 긍정하고 기뻐하는 자는 운명에게 사랑받길 바라고,

     그래서 운명을 통해서 살아가며 부조리한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는 것도 바랍니다.

     영원회귀를 통해서 세상을 긍정하고 기뻐하는 자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려고 하고,

     누군가가 이를 가져가기를 바라며, 그러다 누군가 가져가면 감사해합니다.

     이러한 모습에 누군가 자신을 미워하면, 그 미움을 기꺼이 받고자 하죠.

 

     영원회귀를 통해서 세상을 긍정하고 기뻐하는 자는

     운명에 따라 나아가다 나타나는 슬픔, 지옥 같은 괴로움, 증오, 비방, 불구가 되는 것, 자신을 거부하는 세계를 피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영원회귀를 통해서 자신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현생에서 나타나는 자신의 고통과 이를 견디며 노력한 것을 미래의 자신이 알아봐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귀한 자들이여,

     영원회귀를 통해서 세상을 긍정하고 기쁨은

     여러분과 같은 자들,

     올바름을 향해 나아가려는 자들,

     올바름을 향해 나아가다가 자신의 생에서 결과를 보지 못한 자들을 반깁니다.

 

     왜냐면, 영원회귀를 통해서 세상을 긍정하고 기뻐하는 자는 자신과 같은 이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기쁨을 누리기 위한 세상에 대한 절망과 슬픔도 원합니다.

 

     아, 행복이여, 고통이여!

     고귀한 자들이여,

     절망적인 세상에서 기뻐하는 자는 영원회귀를 원한다는 것을 깨우치길 바랍니다.

 

영원회귀 속에서 마주한 올바름 추구자들

영원회귀를 긍정하면서 과거의 존재와 미래의 존재는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게 된다.


 

-12-

 

     여러분은 이제 운명에 대한 제 노래를 듣고 배웠습니까?

     무엇을 원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제게 돌림노래를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그 노래의 제목은 <한 번 더>이고, 이 노래의 의미는 <영원히>입니다.

 

          여러분, 제 이야기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올바름을 추구하다 죽어가는 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말입니다.

 

          저는 노력의 헛됨을 느끼며 절망에 빠졌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색에 빠졌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답을 얻었습니다.

          제가 얻은 답을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으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은 통찰을 요구합니다.

 

          노력의 덧없음에 절망하여 나타나는 슬픔에도 분명 심오한 통찰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노력의 덧없음을 극복하는 기쁨은 우리의 슬픔보다도 더 깊은 사유 속에 있습니다.

 

          노력의 덧없음에 절망하여 나타나는 슬픔은 우리의 삶에 대한 의지를 사라지게 하지만

          노력의 덧없음을 극복하는 기쁨은 <영원>을 말합니다.

          운명에 대한 진정한 기쁨은 깊고 깊은 사색의 끝에서 <영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의 의미에 대해서는「차라투스트라, 3권 15장」에서 살펴볼 수 있다.

 

영원회귀 반지

영원회귀는 올바름 추구자들이 절망을 벗어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준다.


생각해볼 거리들

 

왜 차라투스트라는 가장 추악한 자를 이끌었나?

ㅡ그가 신을 부활시킴으로써, 사람들이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용이해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의 밤의 세계는 무엇인가?

ㅡ차라투스트라의 밤은 노년의 차라투스트라의 정신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크고 둥근 달의 경우, 이제는 강렬한 빛을 잃었지만, 은은하게 비추는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며, 직설적으로 말하기 보다 은유를 통해서 노래를 통해서 자신의 가르침을 전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 같다.

ㅡ은빛 폭포는 부드럽게 흘러가는 폭포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온화해지며 평온해진 차라투스트라의 내면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왜 이들은 가슴에 위안과 용기를 가지게 되었나?

ㅡ이들은 자신들의 방식, 즉 추종자의 방식에 따라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수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밤의 은밀함은 무엇을 말하나?

ㅡ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밤의 은밀함의 경우, 자정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ㅡ자정은 차라투스트라가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인데, 죽음에 대한 생각이 다가왔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는 후술되는 내용에서 시간의 변화를 나타낼 수 있는 선행 장치로 보인다.

 

추악한 자는 왜 자신의 삶 전체에 대해서 만족하나?

ㅡ사회적 규율을 벗어나서 자기경멸을 하며 지냈던 것이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찾게 했고, 이로써 차라투스트라와 만나 절망에서 벗어나 의욕을 가지게 되었으니, 그로써는 기쁜 일이 벌어진 것이다.

ㅡ따라서 자신의 앞선 삶에 대해서 긍정하는 듯하다.

 

가장 추악한 자는 왜 지상에서의 삶을 보람있게 느끼나?

ㅡ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에 따라서 희망을 얻었기 때문이다.

ㅡ「유고 (1884년 가을~1885년 가을)」의 32[13]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때 가장 추한 인간에게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

       “마비된 발로 걸어가는 것보다는 서툴게 춤추는 것이 훨씬 낫고, 불행보다

        는 행복 앞에서 바보스럽게 되는 것이 훨씬 낫다.

        그러나 이것은 차라투스트라의 최선의 진리다 :

        최악의 것에도 두 가지 좋은 이면이 있다."

ㅡ마비된 발로 걷는 것보다 스스로 걸으라고 했던 말을 차라투스트라가 「차라투스트라, 4권 13장」에서 언급했다.

ㅡ이러한 점으로 볼 때, 가장 추악한 자는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에 따르며 희망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늙은 예언자는 왜 기쁨에 겨워 춤도 추었나?

ㅡ절망을 말하던 예언자가 차라투스트라에 의해서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우선 차라투스트라에 의해 희망을 품는다는 것, 차라투스트라를 따른다는 것은 「유고 (1884년 가을~1885년 가을)」의 32[13] 부분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이때 늙은 예언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 
    “무거운 동물이 또한 행복 속에 있다. 
     처음부터 서툴게 걷는 동물이 있다. 
     거꾸로 서고자 노력하는 코끼리처럼 그것들이 악착같이 노력하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귀 기울여 들어보라! 들어보라! 깊은 자정이 가까이 왔다!”

 

그때 가장 추한 인간에게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 
    “마비된 발로 걸어가는 것보다는 서툴게 춤추는 것이 훨씬 낫고, 
     불행보다는 행복 앞에서 바보스럽게 되는 것이 훨씬 낫다. 
     그러나 이것은 차라투스트라의 최선의 진리다 : 
     최악의 것에도 두 가지 좋은 이면이 있다. 

ㅡ예언자와 가장 추한 인간은 서로 노래를 이어 부르고 있는데, 이때,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인용하며 긍정하고 있다.

ㅡ이러한 점으로 볼 때, 늙은 예언자 역시 가장 추한 인간과 같이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희망을 맛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ㅡ또 차라투스트라가 예언자와 처음 대화할 때, 했던 말이 실현된 것이기도 하다.

     이 하루가 끝이 났으니 기분 좋고 즐거웠으면 하니!

     그리고 그대 자신은 나의 춤추는 곰이 되어 내 노래에 맞춰 춤을 추게 되리라.

 

차라투스트라는 왜 취하게 되나?

ㅡ일련의 경험들을 통해서 자신의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에 과몰입한 것을 취해있다고 표현한 듯하다.

 

근데 차라투스트라의 정신은 왜 뒤로 물러나 달아났나?

ㅡ차라투스트라의 정신은 자신의 운명을 살피려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는 죽음을 두고 과거를 회상하는 것일 수도 있다.

 

두 바다 사이에 있는 산은 뭘 말하나?

ㅡ두 바다는 하나는 사회를 나타내는 바다이고, 다른 하나의 바다는 성숙한 존재를 나타내는 바다로 보인다.

ㅡ바다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차라투스트라 2권, 18장」

     너는 바닷물을 마음껏 퍼마시는구나.

     소금에 절여진 너의 변설이 그것을 누설하고 있다!

     참으로 너는 심연의 개이면서도 영양만큼은 표면에서 섭취하는구나.

     그것도 너무 많이!

 

     「유고 (1882년 7월~1883/84 겨울)」

     251. 사람은 정녕 그 자신은 더러워지지 않으면서 더러운 강물을 받아들이

     는 바다가 되어야 한다.

ㅡ전자는 바다가 부조리한 사회를 의미한다면, 후자는 더러운 것을 받아들이는 성숙한 개인을 의미한다.

 

ㅡ이 사이에서 높은 산등성이가 있는 것인데, 이것이 이제껏 늘 말한 행복의 섬인지, 위버멘쉬인지는 명확하지는 않다.

ㅡ어떻든 이곳에서 차라투스트라는 과거와 미래를 떠도는 영원회귀 속 존재로 보이고, 이를 무거운 구름처럼 과거와 미래 사이를 떠돈다고 표현한 듯하다.

ㅡ그런 점에서 높은 산등성이는 이상적인 사회/미래와 관련되어진다고 보는 게 적절해 보인다.

ㅡ관련한 구절로 「유고 (1882년 7월~1883/84 겨울)」를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모든 아름다움은 그대들 인간들을 넘어선 곳으로 나를 유혹한다.

     모든 아름다움은 모든 신에게서 멀어지도록 나를 유혹한다.

     그래서 나는 닻을 광대한 바다에 던지면서 말했다.

        “여기에 언젠가 위버멘쉬의 섬이 있기를!”

ㅡ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위버멘쉬의 섬이라고 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오라는 말을 하는가?

ㅡ여기서 오라고 하는 것은 죽음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후술되는 것도 죽음과 관련된 것이지만, 유고의 내용을 보더라도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친구들을 성장시키고 난 후 죽었다고 표현되기 때문이다; 「유고 (1884년 가을~1885년 가을)」

     34[145]

     그는 자신의 친구들을 점점 더 높이 이끌며, 또한 자신의 동굴로 그리고 마침내 높은 산으로 이끈다

     : 그곳에서 그는 죽었다.

     — 축복을 주며 : 무덤이 많은 섬의 동굴.

     경유지(經由地) : 매번 말한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에서는 차라투스트라의 죽음을 전개하지 않는다.

ㅡ그것이 글의 흐름에 부정적으로 여겨진다고 보았기 때문으로 보이기도 한다.

ㅡ니체는 자신의 글을 읽는 후대의 자신이 겪을 절망감을 굳이 확언해주고 싶지 않았던 듯하다.

 

왜 세번째로 손을 입에 대고 말했나?

ㅡ차라투스트라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운명을 마주할 의지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보인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아니, 아니, 몇 번을 말해도 아니"라고 말하며 강한 표현을 쓰곤 했기 때문이다.

 

밤 속으로 거닐러 가자는 이야기는 왜 나오는가?

ㅡ밤은 차라투스트라의 죽음과 가까운 순간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따라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같이 이야기를 하자는 걸로 보인다.

 

자정의 종은 어떤 종인가? 무엇을 말했나?

ㅡ자정의 종은 올바름을 추구하던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했다.

ㅡ이 죽음의 반복 속에서 종은 차라투스트라에게 영원회귀의 진실을 알려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정의 종은 왜 탄식하나?

ㅡ자정의 종은 죽음을 알리는 종을 말하는데,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존재의 삶과 그에 따른 죽음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종이 꿈 속에서 웃어댄다는 것은 삶의 너머에서 웃어댄다는 이야기로 보이고, 이는 이상적 미래에서 웃는다고 볼 수 있다.

ㅡ즉 미래를 위해 노력하다가 죽어서 현생은 웃지 않아도 미래에서 축복받고 위로받을 것이란 이야기 같다.

 

낮에는 소리를 내어선 안 되었던 것들은 무엇인가?

ㅡ낮은 사람들의 활동 시간이고, 이에 따라서 사회적인 시간이라고 볼 수 있다.

ㅡ밤은 사람들이 활동하지 않는 시간이기에, 비사회적인 시간이 된다.

ㅡ이에 따라서 낮은 사회, 밤은 비사회로 분류가 가능하다.

 

ㅡ이렇게 보면, 낮에 소리를 내어선 안 되었던 것들이 이제 들려온다는 건 사회에서 말해선 안 되었던 것들을 말해도 되는 시간이 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ㅡ이제 부조리에 대한 비판과 평가, 고발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ㅡ그리고 그에 따라서 노력이 헛되다는 것, 삶은 절망적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된 게 아닐까 싶다.

 

왜 시간이 어디로 가버렸다고 하나?

ㅡ시간이 무의미해지는 상황, 즉 고요한 정적만 흐르는 시간 속에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개는 왜 짖는가?

ㅡ이 개는 「차라투스트라, 3권 2장」에서 양치기의 위험을 알리던 개와 비슷한 특징을 지니지 않나 싶다.

     그런데 거기에 어떤 사람이 누워 있었다! 거기에!

     그리고 껑충껑충 튀어오르고 털을 곤두세우고 낑낑거리던 개가, 내가 오는

     것을 보고는 다시 짖었다. 울부짖었다.

     개가 그토록 도움을 청하며 울부짖는 것을 일찍이 들은 적이 있었던가?

ㅡ여기서 개는 양치기를 따르던 존재로 묘사되는데, 차라투스트라의 손님들이 이 개에 해당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자정의 심장이 생각한 것은 왜 말하기 어렵나? 그럴 바에 왜 죽나?

ㅡ자정의 심장이 말하는 것은 이상적 미래에 대한 막연함이 아닐까 싶다.

ㅡ이것은 이상적 미래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의 헛됨을 말하는데, 이는 절망적이기에 말하지 않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ㅡ운명을 위해 순수하게 노력할 의지를 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미는 왜 차라투스트라의 둘레에 무언가를 치고 있나?

ㅡ여기서 거미는, 운명을 짜는 거미가 아닐까 싶다.

ㅡ그래서 차라투스트라의 둘레에 과거와 미래의 실을 연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ㅡ이와 관련해선 아래 구절을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유고 (1882년 7월~1883/84 겨울)」

     우리가 소홀히 한 것도 모든 미래를 짜는 실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조차 또한 우리의 미래를 짜는 직공이며 자신의 집을 짜는 거미이다.

 

이슬이 내리고 때가 온다는 것은?

ㅡ이슬은 메마른 대지를 적시는 것으로,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존재를 말한다.

ㅡ이 존재들은 이상적 미래를 제공한다.

 

추위에 떨고 얼어붙으면서도 이렇게 묻는 때는 무슨 때인가?

ㅡ차라투스트라가 얼어붙으면서 말한다는 것은 죽어가는 순간을 두고서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ㅡ죽어가면서 자신과 같은 운명을 살아갈 자를 찾는 것으로 보인다.

 

누가 대지의 주인이냐고 묻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대지는 현생을 말하므로, 현생을 지배해야 하는 게 무어냐고 묻는 상황이다.

ㅡ이때 언급될 수 있는 것은 위버멘쉬이거나 올바름이라고 해야 한다.

ㅡ왜냐면 차라투스트라는 부조리가 지배하는 세상을 비판하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물길은 무엇인가? 왜 크고 작은 물길에게 흐르는 방법을 말하나?

ㅡ크고 작은 물길은 사람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들에게 어떻게 행동하며 나아가야 하는지,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구절로 보인다.

 

거기가 어디인가? 왜 영혼이 춤을 추나?

ㅡ자정으로 보이며, 이제 죽음이 다가온 차라투스트라가 노래하는 모습을 영혼이 춤춘다고 말하는 걸로 보인다.

 

낮의 일은 뭘 말하나? 왜 낮의 일에게 말하나?

ㅡ낮의 일이 아니라 낮의 존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여기서 낮은 사회의 활동시간을 말하므로, 사회적 존재/순간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이에 따라서 단순히 세상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ㅡ낮의 일로 번역되는 Tagewerk는 하루 일과를 말하기도 한다.

 

달은 왜 차갑고 바람은 침묵하나?

ㅡ단순히 상황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달이 차갑고 바람이 침묵한다는 것은 고요함/정적을 나타내는 묘사로 보이는 것이다.

 

왜 그대들에게 높이 날았냐고 하나? 왜 춤을 추고들 있다고 하나? 왜 다리는 결코 날개가 아니라고 하나?

ㅡ높이 난다는 것은 사회적/종교적 규율을 벗어남을 묻는 것으로 보인다.

ㅡ춤을 춘다는 것은 이상에 따라 행동한다, 고무됨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을 말한다.

ㅡ따라서 춤을 춘다는 것은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이지만, 완전히 사회적/종교적 규율을 벗어났다는 것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ㅡ그런 점에서 다리는 결코 날개가 아니라는 말은 이상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만으로는 사회적/종교적 규율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왜 모든 기쁨이 사라지고 찌꺼기만 남나? 술잔이 부서질 상황은 무얼 말하나?

ㅡ기쁨이 사라졌다는 것은 이제 즐길 시간이 사라졌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제 올바름을 추구하면서 나아가야 하는데, 그때는 곤란과 곤궁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ㅡ이 즐길 시간의 사라짐을 위와 같이 표현한 거라 볼 수 있다.

 

왜 무덤들은 죽은 자들을 구원하라고 하나? 왜 밤이 길다고 말하나?

ㅡ무덤은 올바름을 추구하다가 죽은 자들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이들은 후대의 존재들이 자신들의 노력을 알아봐 주길 바라는데, 이것을 구원이라고 여긴다.

 

ㅡ그러려면 태양과 같은 존재가 필요한데, 그런 존재가 안 나타난 것을 밤이 길다고 표현한다.

ㅡ달이 우리를 취하게 했다는 것은 취해서 밤을 길게 늘어 놓은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벌레는 무엇인가?

ㅡ절망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종이 울리고 왜 심장이 윙윙 거리며, 벌레가 파헤친다고 하나?

ㅡ종의 울림은 죽음에 대한 생각을 보이며, 심장은 이에 따라서 떨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ㅡ즉 현재 묘사하는 상태는 절망이나 슬픔에 따라 마음이 괴로운 상태가 아닐까 싶다.

 

리라는 누구인가? 왜 취해 있는 두꺼비를 말하나?

ㅡ감미로운 리라는 차라투스트라나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존재를 말한다.

ㅡ이들은 귀머거리를 두고 노래하는 존재이기 때문인데, 귀머거리는 노래하는 자들의 이야기들을 들으려 하지 않기에, 귀머거리로 표현된다.

ㅡ즉 「차라투스트라, 서문 3장」의 시장 사람들의 모습과 같다.

 

ㅡ두꺼비는 울음소리가 좋지 못한 것을 나타내는데, 올바름에 대해 말하는 것을 두고 사람들이 평가하는 관점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각각에 대해서는 8절에서 설명된다.

 

온갖 고통, 아버지, 조상, 태곳적 선조의 고통이란? 이 고통이 차라투스트라의 심장을 찢었다는 것은 뭘 말하나?

ㅡ태곳적 선조의 고통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을 사는 존재가 갖는 고통을 말하는 걸로 보인다.

ㅡ이는 부조리에 따른 고통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 역시 이 고통으로 인해 절망을 맛보는데,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왜 포도나무는 성숙해졌는데, 죽으려 하나?

ㅡ포도나무는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자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ㅡ이러한 자들은 열매/올바른 이해를 맺고 죽는 것을 과업으로 삼는데, 이 경우에도 잘 익은 열매를 내놓았기에 죽으려고 하는 것이다.

ㅡ즉, 자신의 과업을 마쳐서 죽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어떤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다고 하나?

ㅡ영원의 냄새인데, 이것은 영원회귀를 통한 차라투스트라의 재림을 말한다.

 

죽음의 행복 냄새는 무엇인가?

ㅡ과업을 마치고 죽음을 기다리는 자의 행복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때 행복한 이유는 후대의 존재가 자신을 구원하고 가치 있게 해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세계가 깊다는 것은 뭘 말하나? 왜 낮이 생각하는 것보다 깊다고 하나?

ㅡ세계는 보다 깊은 통찰을 요구할 만큼 심오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ㅡ낮은 일반 사람들, 사람들이 활동하는 시간대고, 밤은 사색하는 시간대이다.

ㅡ사회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ㅡ이때 일반 상식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왜 자신을 건드리지 말라고 하나? 누가 차라투스트라를 건드리나?

ㅡ뒤에 낮이라고 언급되는데, 이 낮은 사회로 보인다.

ㅡ즉 사회에서 자신을 건드리지 말라는 것인데, 이유로 삼아볼 수 있는 것은 사회가 자신을 통해서 부조리를 강화하는 논거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왜 낮보다 자정이 더 밝나?

ㅡ낮에 활동하는 자보다 밤에 사색하는 자들이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하기 때문이다.

 

왜 자정의 영혼들이 지상을 지배를 해야 한다고 하나?

ㅡ자정의 존재들은 사색을 통해서 올바름을 살피려 하기 때문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부조리가 아닌 올바름이 세상을 지배하기를 바라고 있다.

 

왜 낮은 차라투스트라를 잡으려고 하나?

ㅡ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앞서 말한 것처럼, 낮/사회가 부조리를 강화하는 이론으로서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영리한 손을 가지라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세상은 너무 올바름에 대해서 둔감하고, 그래서 영리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더 깊은 행복에 손을 뻗으라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ㅡ이는 당장의 행복이 아니라 보다 먼 미래, 건설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란 이야기다.

 

더 깊은 불행에 손을 뻗으라는 것은?

ㅡ사람들은 불행이나 오류를 마주하지 않으므로, 그러한 것들을 잡고 마주하라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왜 자신에게는 손을 뻗지 말라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따라하려고 하지 말고, 스스로 올바름을 향해 성장할 수 있게끔 노력하라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추종을 하지 말라는 것 같다.

 

왜 차라투스트라의 불행과 행복은 깊나?

ㅡ차라투스트라는 먼 이상적 미래를 바라므로, 그가 바라는 행복은 심오하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상적 미래를 위해 노력하면서 불행하므로, 이 역시도 심오하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신도 신의 지옥도 아니라고 하나?

ㅡ자신이 완전한 존재도 아니고 완전 불완전한 존재도 아니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의 비애는 왜 깊은가? 왜 신의 비애에 손을 뻗으라고 하나?

ㅡ신은 세상에 대한 절망을 말하는 존재를 말한다; 「차라투스트라, 1권 3장」

     일찍이 "차라투스트라도 모든 배후세계론자들과 마찬가지로 인간 저편에

     대한 망상을 품었었다.

     그때에는 세상이 고통받고 번민하는 신의 작품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때 세상은 내게 꿈이자 어떤 신이 꾸며낸 허구로 보였다.

     불만족한 신의 눈앞에 피어오르는 오색 연기로 보였던 것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런 존재가 갖는 절망을 통찰하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취해 있는 감미로운 리라인가?

ㅡ자신은 그저 우상할 만한 존재가 아니란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그저 이상적인 미래를 그리며 노래하는 자일 뿐이란 이야기다.

 

청춘과 정오에 대해서 왜 가버렸다고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늙어서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ㅡ젊은 시절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나는 것으로도 보인다.

 

개가 짖고 바람이 울부짖는다는 것은?

ㅡ노쇠한 차라투스트라의 상황을 보고서 주변 사람들이 안타까워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인다.

 

자정은 왜 탄식하나? 왜 웃어대나?

ㅡ자정은 죽음을 말하는데, 이때 죽음은 좋은 것이자 아쉬운 것으로 차라투스트라에게 다가오기 때문으로 보인다.

ㅡ왜냐면 미래를 위해선 죽어야 하지만, 삶을 돌이켜보면 마땅히 이룬 것이 없는 아쉬움이 남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여류시인은 무얼 말하나?

ㅡ여류시인은 여자인 존재를 나타내므로, 운명이나 지혜를 나타내야 할 것으로 보인다.

 

ㅡ하지만 흐름 상으로는 여류시인은 취기에 취해버린 상태의 존재다.

ㅡ이에 따르면, 죽음을 앞두고 사유에 잠긴 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ㅡ여기서 적절한 해석은 죽음을 앞두고 고양된 자, 차라투스트라 본인을 말한다고 보는 편이 가장 나아 보인다.

 

꿈 속에서 자신의 비애를 왜 되새기나?

ㅡ깊은 자정은 죽음을 앞둔 존재라고 할 때, 꿈 속에서 슬픔을 느끼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ㅡ즉 죽음에 이르러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이야기로 보인다.

 

자신의 기쁨은 왜 더 많이 되새기고 있다고 하나?

ㅡ죽음에 이르면서 자신의 삶이 부정적이긴 하지만, 죽음 너머에는 영원회귀 속에서 기쁨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쁨이 심장의 고통보다 더 깊다는 것은?

ㅡ심장의 고통은 괴로움을 말하고 이는 비애/슬픔/절망으로 해석할 수 있다.

ㅡ이는 결국 자신의 삶에 대한 슬픔보다는 기쁨이 더 크다는 이야기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올바름을 추구하면서 노력하다가 헛됨을 느끼면서 망연자실하게 되는데, 영원회귀를 통해서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를 찾고 기쁨을 느끼게 된다.

ㅡ따라서 자신의 삶에 대한 슬픔/절망을 이기고 더 깊은 기쁨을 누리는 것인데, 이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포도나무를 베었는가?

ㅡ포도나무는 성숙한 자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ㅡ차라투스트라는 과거 자신보다 앞서 있던 인물을 비평하면서, 미래를 향한 더 나은 생각을 도출하게 된다.

     「차라투스트라, 2권 20장」

     지나간 일을 구원하고 일체의 '그랬었지'를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로

     변형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내가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 3권 12장」

     시인이자 수수께끼를 푸는 자이자 우연의 구원자로서 나는 저들에게 미래를

     창조할 것을, 그리고 이미 존재했던 것 전부를 창조를 통해 구원할 것을 가르

     쳤다.

ㅡ이를 가리켜서 베엇다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왜 무르익은 모든 것은 죽기를 바라나? 왜 무르익지 않은 것들은 계속 살기를 바라나?

ㅡ무르익은 것은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자를 말하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과업을 끝내고 난 후, 자신이 더는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죽음을 바라게 된다.

ㅡ왜냐면 과업을 달성한 이후 자신의 앎을 나누어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에 놓이게 될 수 있는데, 이때 사람들 사이에서 절망만 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ㅡ무르익지 않은 것의 경우, 계속 살기를 바라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과 더불어 절망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ㅡ즉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이들은 열심히 살다가 과업을 끝내면 세상에 대한 욕심이 많이 사라지는 반면, 일반적인 사람들은 과업도 없고, 당장의 즐거움을 바라기에 계속 살기를 바란다고 할 수 있다.

 

가지치기 가위는 무엇인가?

ㅡ가지치기 가위는 수확하는 자를 나타내는데, 이는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이들이 남긴 결실을 맛보고 수확하는 자들을 말한다.

ㅡ차라투스트라가 남긴 결실을 맛보려면, 차라투스트라를 이해할 정도의 성숙한 존재여야 하므로, 대체로 후대의 차라투스트라, 위버멘쉬여야 한다.

ㅡ관련된 구절로 「차라투스트라, 3권 14장」이 있다.

     황금빛 경이로,

     자유로운 조각배로,

     그리고 그 주인으로 향할 때까지.

     그런데 주인은 다이아몬드로 된 수확 가위를 들고 때를 기다리고 있는 포도

     재배자다.

 

비애는 왜 사라지고 가버리라고 하나?

ㅡ여기서 언급하는 비애/슬픔은 나름대로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하는 사람이 갖는 슬픔으로 보인다.

ㅡ왜냐면 차라투스트라가 "세계는 깊다"라고 말하면서 비애/슬픔을 언급하기 때문이다.

ㅡ이는 '세계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니, 세계에서 어떤 노력을 해도 무의미하다'는 절망을 느껴서 얻는 슬픔이다.

ㅡ따라서, 여기서 언급되는 비애/슬픔은 세계를 나름대로 통찰하던 자가 갖는 슬픔, "세계는 절망적이다"고 느끼면서 가지는 슬픔이라고 볼 수 있다.

 

ㅡ이러한 슬픔을 가진 자는 자신에게서 이런 슬픔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ㅡ왜냐면 삶에 대한 열의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ㅡ그래서 비애(슬픔을 가진 자)가 비애에게 말한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ㅡ하지만 이러한 통찰에 따른 슬픔은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엔 아주 깊은 수준의 통찰은 아니다.

ㅡ왜냐면 아주 깊은 통찰을 하는 자, 그래서 세계가 절망적이라고 느끼면서도 영원한 반복 속에서 삶을 긍정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왜 고통받는 것 모두는 살기를 바란다고 하나?

ㅡ나름대로 세계를 통찰하는 자가 갖는 슬픔/절망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과 다르다.

ㅡ왜냐면 절망뿐인 세상은 살아야 할 이유를 제공해주지 못하는데, 인간은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ㅡ그렇기에 인간의 삶에 대한 의지와 대척 되는 절망이라는 점을 언급하기 위해서, 고통받는 존재들 모두 살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왜 고통받는 것들은 상속자와 아이를 원하나? 왜 나를 원하지 않나? 왜 기쁨은 상속자를 원하지 않나? 왜 자기 자신과 영원 회귀를 바라고, 모든 것이 자신과 동일하기를 바라나?

ㅡ고통받는 것들은 일반적인 삶을 사는 존재들이라고 볼 수 있다.

ㅡ이런 경우, 절제하고 인내하기 보다는 즉각적인 만족을 바랄 수 있다.

ㅡ그래서 자신에게 직접 만족을 줄 수 있는 관계를 바라게 될 수 있는데, 이는 자신을 받드는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ㅡ우선 기쁨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텐데, 앞서 언급된 비애/슬픔보다 더 나아간 것이다.

ㅡ비애/슬픔은 세계를 통찰하면서 세계는 노력해도 의미가 없다며 절망하는 것인데, 이런 절망을 극복해내고 나타난 것이 기쁨이다.

ㅡ노력해도 의미가 없다는 것은 대체로 자기 혼자 노력했을 때의 무의미함에서 비롯된다.

ㅡ만약 자신의 노력을 똑같은 의지를 가지고 계승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러한 노력은 무의미한 일이 아니게 된다.

 

ㅡ하지만 자신과 같은 의지를 가진 존재를 후계자로 인위적으로 길러낼 수가 없다.

ㅡ이런 문제가 있기에, 절망에 더 휩싸이는 것인데, 이를 해결해주는 것이 영원회귀인 것이다.

ㅡ영원히 반복되는 세상 속에서 언젠가 나와 같은 존재가 나타날 것이라는 생각이 삶을 절망에서 기쁨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ㅡ그렇게 되면, 내가 지금 하는 노력은 언젠가 빛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ㅡ따라서 여기서 언급되는 기쁨은 영원회귀에 따른 기쁨이라고 볼 수 있다.

ㅡ이에 따라서 더 살펴보자.

 

ㅡ차라투스트라는 「차라투스트라, 서문 9장」에서부터 자신을 받드는 관계가 아니라, 자신과 뜻이 같은 사람을 찾는다.

ㅡ그래야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던 이상적 미래가 구현되기 때문이다.

ㅡ그렇기에 상속자를 바라지 않는다.

 

ㅡ그런데 자신과 같은 이가 나타나려면, 영원회귀가 작동해야 한다.

ㅡ그렇기에 영원한 회귀를 원하게 된다.

 

ㅡ그리고 그렇게 영원한 회귀를 거쳐서 자신이 바라는 진정한 이상적 미래가 오길 바라는데, 이때 이 미래의 구성원들은 모두 자기 자신과 같은 뜻을 지닌 존재들이어야 한다.

ㅡ그렇기에 모든 것이 자신과 동일하기를 원한다고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ㅡ마지막 부분에 대해서, 애초에 독일어를 모든 것이 반복되기를 바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ㅡ이에 따라 보면, 영원회귀를 바라는 상태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비애는 왜 심장이 피 흘리며, 다리가 방랑하고, 고통이 날아 오르길 바라나?

ㅡ여기서 비애는 삶에 대한 절망이다.

ㅡ이 절망의 입장에 따르면, 삶은 노력할 의미가 없다.

ㅡ왜냐면 노력을 해도 변화가 없어서 절망에 빠지기 때문이다.

ㅡ이러한 절망은 개인을 고통받고 방황하게 하며, 고통이 이 개인을 지배하게끔 한다.

ㅡ즉 현재의 표현은 슬픔/절망이 개인을 종용하고 있는 상태를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왜 비애는 사라지라고 말하나?

ㅡ비애/슬픔은 절망을 나타내고, 절망은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잃게 만들기에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

ㅡ이러한 절망의 명령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언자, 꿈꾸는 자, 취해 있는 자, 꿈 풀이하는 자, 자정의 종, 한 방울의 이슬, 영원의 안개와 향기는 무엇인가?

ㅡ예언자는 이상적 미래를 예언 하는자를 말한다.

ㅡ꿈꾸는 자는 이상적 미래를 꿈꾸는 자를 말한다.

ㅡ취해 있는 자는 이상적 미래를 향하는 운명 취해 있는 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꿈 풀이를 하는 자는 이상적 미래를 설파하는 자를 말한다.

ㅡ자정의 종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다 죽음에 이르는 자를 말한다.

ㅡ한 방울의 이슬은 메마른 대지를 적신다는 의미에서 확장되어 절망적인 현생에 희망을 주는 자를 말한다.

ㅡ영원의 안개와 향기는 영원회귀 속에 존재하는 긍정적인 운명을 사는 자를 말한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세계가 충만해졌다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에게 자정은 자신의 삶의 마무리가 다가오는 시점이다.

ㅡ왜냐면 죽음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ㅡ이때 자신의 삶이 여러 손님과 경험으로 인하여 충만해졌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통은 왜 기쁨이고, 저주는 왜 축복인가?

ㅡ올바름을 따라 사는 고통이 있어서 기쁨에 이를 수 있고, 올바름을 추구하는 저주받은 운명을 살기에 미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ㅡ고통과 저주는 현재 삶을 기준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고, 기쁨과 축복은 그 삶이 미래에 이바지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의 기쁨에 대해 그렇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ㅡ하나의 기쁨은 절망적인 세상에 대한 기쁨으로 보이고, 이는 영원회귀를 통한 영원의 기쁨으로 보인다.

ㅡ영원회귀를 통한 기쁨은 절망적인 세상을 두고서 나타나는 기쁨이기에, 즉 절망적인 세상을 긍정한 적이 있냐는 질문을 하는 것과 같다.

 

ㅡ만약 절망적인 세상을 두고서 긍정한 적이 있다면, 이는 절망적인 세상이 주는 모든 슬픔과 고통을 긍정한다는 이야기와 같다.

ㅡ절망적인 세상이 주는 슬픔과 고통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삶에 대한 올바른 사랑이라고 보기 어렵다.

ㅡ왜냐면 절망적인 세상이 주는 슬픔과 고통이 있기에 하나의 기쁨, 영원회귀의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ㅡ만약 절망적인 세상이 슬픔과 고통을 주지 않는다면, 영원회귀의 기쁨은 있을 필요가 없다.

 

'한 번 또 한 번', '네가 마음에 든다, 행복이여, 찰나여, 순간이여!'는 무얼 말하나?

ㅡ이는 자신의 운명을 다시금 살고 싶어하는 모습을 말한다.

ㅡ즉 운명의 영원한 반복을 긍정하는 것이다.

ㅡ일반적으로 삶이 반복된다고 한다면 지겨워하고 덧없게 느끼는데 반해, 차라투스트라는 그러지 않은 것이다.

 

왜 비애/슬픔에 대고 "사라졌다가 때가 되면 오라"고 하나?

ㅡ슬픔은 앞서 말한 것처럼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데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쁨 일체는 왜 영원하길 바라고, 꿀을 원하고, 자정을 원하며, 무덤과 무덤의 위안과 저녁놀을 원하나?

ㅡ여기서 언급되는 기쁨은 영원회귀의 기쁨이다.

ㅡ그렇기에 영원을 원하는 것이 맞다.

 

ㅡ꿀은 이상적 미래를 위한 올바른 이해를 말한다.

ㅡ올바름 추구자의 운명에서는 올바른 이해를 원해야만 한다.

 

ㅡ효모의 경우, 익고 발효되는 것으로 성장의 과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ㅡ자정의 경우, 죽음을 말하는데, 과업을 달성하고 죽어야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은 정신적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ㅡ올바름 추구자는 자신의 운명에 따라 살 때, 고독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과업을 달성한 이후에도 고독을 견디기에는 너무 힘든 것이다.

ㅡ그래서 죽음을 바라게 된다.

ㅡ또 죽으면 후대의 존재가 나타나 과업을 이어갈 것이기에, 미래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판단한다.

ㅡ이때 취해있어야 좋은 것인데, 취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의미에 대해서 유의미했다고 여기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취하지 않은 자정이면 너무나 자신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체감하기에 그리 좋지 못하다고 본 듯하다.

 

ㅡ무덤과 무덤의 위안은 무덤은 이상적 미래를 위해서 노력한 자들의 무덤으로 보인다.

ㅡ이것들이 있어야 영원회귀 속에서의 반복이 유의미하다.

ㅡ왜냐면 이상적 미래를 위해 노력한 자의 업적을 바탕으로 더 나아가기 때문이다.

ㅡ후대의 사람들은 이처럼 노력했던 과거 학자들의 결실을 다시 수정 보완하여서 더 발전시켜야 한다.

ㅡ이것이 노력했던 과거 학자들의 삶을 가치있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 이를 후대에 의한 구원이라고 부른다.

 

ㅡ또 무덤의 위안의 경우, 후대의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이 고독감을 느끼고 있을 때, 선대에서 자신과 같은 노력하던 자를 찾으면 위안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자신만 이런 삶을 살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다.

 

ㅡ저녁놀의 경우, 해가 지는 상태인데,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태양으로 비유하며 빛을 나누는 이 하강의 시점을 앎을 선사하는 시기라고 말한다.

ㅡ이는 성숙해지고 올바른 이해를 갖추면서 후대를 위해서 씨를 뿌리는 것과 같아서, 영원회귀 속의 올바름 추구자라면 바라는 것 중 하나다.

 

기쁨은 왜 비애보다 더 목말라 있나? 왜 더 진심이고, 굶주려 있으며, 섬뜩하고 은밀하나?

ㅡ영원회귀의 기쁨은 자신의 노력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더 열정적으로 노력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ㅡ반면 절망적인 세상에 대한 슬픔은 노력을 덧없게 느끼기 때문에, 열정적으로 노력하지 않는다.

ㅡ그런 점에서 기쁨이 슬픔보다 더 이상적 미래에 대해서 갈증을 느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ㅡ그렇기에 더 진심이다.

 

ㅡ그렇다보니 자신의 삶의 노력의 가치를 위해서 개인의 죽음을 초월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섬뜩하고 은밀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왜냐면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의 생 안에서의 목표 달성을 바라기 때문이다.

 

기쁨은 왜 자기 자신을 원하고, 자기 자신을 물고 있으며, 그 속에서 둥근 고리의 의지가 애를 쓴다고 하나?

ㅡ영원회귀의 기쁨은 자신과 같은 이가 나타나서 현재의 자신이 한 노력을 유의미하게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ㅡ그렇기에 자기 자신을 원할 수 밖에 없고, 그렇게 자기 자신과 맞물려서 나아가게 된다.

ㅡ이것이 가능하려면, 영원회귀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ㅡ세상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할 수 없다면, 개인이 자신의 삶 내에서 목표를 이루지 못한 노력은 모두 다 물거품이 된다.

 

기쁨이 원하는 사랑과 미움은?

ㅡ기쁨은 자신의 운명이 자신을 사랑하기를 바란다.

ㅡ즉 자신의 현생에서의 노력이 이상적 미래/올바름이라는 운명에서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ㅡ그런데 자신의 운명에 따라, 이상적 미래/올바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부조리한 사회로부터 미움을 받게 된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미움도 원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기쁨은 선물하고, 던져버리고, 자신을 받아들이길 애걸하고, 받아들이는 자에게 감사하나?

ㅡ영원회귀를 통한 기쁨은 이상적 미래를 위해 나아가는 노력을 의미있게 해준다.

ㅡ즉 이상적 미래를 위해서 자신의 올바른 것을 알려고 하고, 앎을 나누는 그 과정을 유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ㅡ그래서 실제로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의 앎을 나눠 가지고 받아들여주기를 바라게 되는데, 이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쁨은 왜 비애, 지옥, 미움, 비방, 불구, 세계를 갈구할 정도로 풍요로운가?

ㅡ영원회귀를 통한 기쁨은 올바름을 위한 노력이 유의미하게 여겨지면서 나타나는 기쁨이다.

ㅡ올바름을 위한 노력은 자신의 현생을 향해 이뤄진다.

ㅡ이때 현생에서는 올바름을 위한 노력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여기게 되는데, 이것들로 인해 슬픔과 괴롭힘, 배척, 고독, 미움, 비방,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ㅡ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는 미래의 존재가 자신을 구원해줄 것이라고 여기며 이러한 상황에 과감하게 뛰어든다.

ㅡ미래가 구원해줄 것이라고 믿기에, 현생의 곤란함 속으로 나아가더라도 해를 입지 않는 것이다.

 

왜 모든 영원한 기쁨은 실패자를 동경하나?

ㅡ여기서 언급되는 실패자는 이상적 미래를 위해 노력하다가 자신의 생에서 달성하지 못한 자들을 말한다.

ㅡ이들은 영원회귀 속에서 자신의 노력의 가치를 인정받고, 끝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게 되리라 여겨진다.

 

왜 노래의 제목은 다시 한번이고, 의미는 모든 영원 속으로 인가?

ㅡ영원회귀에 따른 운명을 긍정하라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