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4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4권 16장 의역 (완) (사막의 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8. 23. 19:15

ㅡ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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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4권 16장 사막의 딸


         
16장 개괄

 

 

16장에서는 사람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차라투스트라를 붙드는 후대의 차라투스트라/그림자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차라투스트라가 없으면 또 다시 암울한 것들이 그들을 지배할 것을 염려하여, 붙드는 것이다.

그러면서 차라투스트라의 고귀함을 칭송하게 되는데, 이때 언급되는 것은 차라투스트라의 정신이 건강하다는 점이다.

 

이후 그림자는 차라투스트라 외에 건강한 정신을 가진 것을 보았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사막의 딸로 언급된다.

사막은 도시를 벗어난 곳을 말하고, 고독의 공간을 말한다.

즉 올바름을 쫓는 사람들이 사막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여기에 두 여자가 있는 것이다.

 

이 두 여자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앞서 「차라투스트라, 2권 10장」에서 나오는 삶(운명)과 지혜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올바름을 추구하며 사는 운명과 올바른 이해 말이다.

이에 따라서 보면, 이들이 머무는 곳은 이상적 미래가 되고, 그림자를 삼키는 고래나 야자나무의 열매가 해석이 부드럽게 해석이 가능해진다.

여기서 차라투스트라적 존재는 야자나무의 열매로서 언급이 되고, 야자나무는 운명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으로서의 1인이 그림자와 차라투스트라인 것이다.

 

이 운명은 확실함을 지니고 있지 않은데, 왜냐면 이상적 미래를 위해서 노력하는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존재들에게 확실히 이상적 미래로 나아가는 느낌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상적 미래를 위해 사는 사람들은 휘청이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이를 춤과 같다고 표현한다.

어떻든 이러한 운명을 사는 사람에게는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데, 이러한 격려를 하며 이야기를 마치게 된다.

 

결국 그림자는 이상적 미래를 떠올려 본 적이 있는데, 차라투스트라에게서 그것을 다시금 느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 면에서 16장 2절은 그때 당시 그림자가 느꼈던 감정에 대해서 표현하는 장이라고 볼 수 있다.

 


 

 

본문

 

 

-1-

 

차라투스트라가 자리를 뜨려고 하자, 후대의 차라투스트라라고 자처하던 그림자가 말했다.

    “떠나지 말라,

     우리와 함께 있어달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다시 고약한 선동에 따른 불만과 절망이 자리하게 될 것이다.

 

     이미 저 늙은 배우가 우리를 극진히 선동하여 우리를 자극하지 않았나?

     교황을 보라.

     그의 눈은 추종할 신이 없음에 따라 슬픔의 바다로 나아가지 않았는가?

     왕들은 우리 앞에서 의연한 척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삶에서 가장 잘 익혀둔 능력이 아닌가?

     내가 장담하건대, 지켜보는 이가 없다면,

     저들 역시 선동에 자극받아 사회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 것이다.

 

     그릇된 것들이 우리의 시야를 가리고, 그렇게 우리는 그릇된 것들 속에서 우울해할 것이다.

     올바름은 가려지고, 그릇된 것이 올바른 것인양 자리하겠지.

     그래서 올바른 것들이 자리하려고 해도 그것들을 부정하고 배척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를 고통받게 하고 역겨움에 사로잡히게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우리와 함께 있어달라, 차라투스트라여!

     이곳에 많은 고통이 숨겨져 있다.

     슬픔과 부정적인 생각, 그릇된 앎, 그에 따른 부조리함들이 이 자리에 숨겨져 있다.

 

     너는 우리를 사내다운 자들,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들로서 여기며 대접해 주었다.

     그렇게 잘 대해주고서 우리를 두고 나가지 말라,

     우리가 올바름을 추구하지 못하고 나약해지게 놔두지 말아달라!

 

후덥지근한 동굴

그림자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이런 탁한 곳에 자신들을 두고 가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너만이 올바른 이해를 주고, 이로써 나는 상쾌한 공기를 마신 듯이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지구 상에서 네 곁에 있을 때보다 올바른 이해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나는 많은 사람들 사이를 다녀보았다.

     나는 그렇게 그 사람의 정신적 수준을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게 되었지.

     하지만 너와 함께 하며 너의 수준이 높다고 판단하였고,

     너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나는 그릇됨을 벗어나 올바름을 깨우치는 기쁨을 맛보았다.

 

     아, 생각해보니 그릇됨을 벗어나 올바름을 깨우치는 기쁨은 전에도 맛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이 기쁨을 기리는 노래를 불렀었다.

 

     당시 나는 내 운명을 이해하면서 그릇된 이해가 주는 부조리와 절망감을 벗어나 있었다.

     나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내 운명과 지혜를, 이를 통해 나아갈 수 있는 이상적인 미래를 사랑했다.

 

     운명과 지혜는 내 앞에 드러나지 않을 때에는,

     작은 비밀들처럼, 잘 포장된 수수께끼들처럼, 자신의 두꺼운 껍질을 부수고 자신을 맛보길 바라는 호두처럼

     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관심을 가져주기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운명과 지혜는 맑은 모습으로, 풀 수 있는 수수께끼처럼 내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운명과 지혜를 위해서 나는 노래를 하나 지어 불렀던 것이다.”

 

방랑하는 자이자 후대의 차라투스트라인 그림자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누가 자신에게 말을 붙이기 전에 늙은 배우의 하프를 집어들고선 다리를 꼬고 앉아서 침착하고 현명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상쾌한 공기를 마신 것처럼 공기를 들이 마셨다.

그리고 그는 힘차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상쾌한 공기

상쾌한 공기는 건강한 정신을 지닌 자만이 제공할 수 있다.


 

-2-

 

부조리로 인하여 사람들의 내면이 황폐해지고 있다.

이처럼 황폐해진 내면을 품고도 가만히 있는 자에게 곤경이 있을 것이다.

 

부조리로 인하여 내면이 황폐해지는 것

아 이것은 실로 참으로 좋은 시작이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에게 걸맞는,

사회에 순응하는 존재들에게 어울리는 시작이다.

 

하지만 운명과 지혜여,

너희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다.

나의 사랑스러운 존재들이여.

 

나는 사회에 속했던 자로서는 처음으로,

운명 앞에 서서 이상적인 곳을 살피는 것을 허락받았다.

 

나는 사회를 벗어나서 야자수가 있는 오아시스, 이상적인 미래에 있다.

사회를 벗어났음에도 고독하지 않은 곳에 있다.

나는 이상 사회의 풍요로움에 삼켜진 것이다.

 

나는 <향기로운 입을 지닌 이상적 미래>를 쫓는 운명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과 지혜를 곁에 두고 있는 것이다.

 

찬양하라!

나를 삼킨 이 고래, 이상적인 미래를.

나를 자신 안으로 삼킴으로써 잘 대해주고 있지 않은가?

너희는 내 지적인 비유를 이해하는가?

 

이상적 미래에 삼켜진 것을 찬양하라!

 

하지만 나는 정말 이상적인 미래가 나를 삼켜줄지 의심한다.

왜냐면 나는 사회 속에서 지내면서 의심하는 버릇이 들었기 때문이다.

신만이 이것에 대해서 내게 답을 줄 것이다.

 

그림자를 삼킨 커다란 고래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들은 이상 사회가 자신들을 거두어 주기를 바란다.


 

어쨌든 나는 지금 이 풍요로운 곳에 앉아 있다.

이상적 미래가 머무는 곳에 말이다.

이곳에서 나는 잘 익은 대추야자 열매 같다.

 

그렇게 이상적 미래가 올바름을 추구하던 나를 거두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모든 이가 이를 바란다.

*올바름 추구자들은 이상적 미래에 이바지하기를 바란다.

그들의 노력이 이상적 미래에 유의미하게 작용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를 이상적 미래가 올바름 추구자를 거두어 들인다고 표현한다.

 

태양 빛이 강한 곳, 올바름이 지배하는 곳에서 자라난 존재로서 나는 이곳에 있다.

나의 꿀, 나의 올바른 이해를 바라는 존재들에게 둘러싸 채로,

마찬가지로 올바른 이해에 대한 어리석고 교활한 생각들에 둘러싸인 채로,

그리고 내게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암시만 하는 운명과 지혜에 둘러싸 채로,

많은 감정을 담아 표현한다면, 스핑크스 같이 수수께끼*만 내는 운명과 지혜에 둘러싸 채로.

*운명과 지혜는 수수께끼만 낼 뿐, 답을 명료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스핑크스로 비유된다.

 

아, 좋은 공기, 이상적인 공기를 마시며,

밝고 가벼운 공기, 올바른 이해를 제공하는 공기를 마시면서 여기에 앉아 있다.

 

이 공기는 달의 공기일 것이다.

지상은 이미 그릇된 것들로 가득 차 버렸으니 말이다.

 

저 올바른 이해가 이 부조리한 지상으로 내려오는 것은

오래전 시인들이 말하던 것처럼 우연인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 들떠서 올바른 이해를 세상에 내려 보내는 것일까?

 

의심이 많다 보니 이런 것도 의심한다.

신이 이에 대해 답해주기를!

 

달에서 내려온 대기

그림자는 이 부조리한 세상에 상쾌하고 밝은 공기가 달에서 온 것일까 생각해본다.


 

나는 이상적인 미래를 그리면서, 이 상쾌한 공기를 마시면서,

과거도 미래도 느끼지 않으며 충만해진 채로 있다.

그러면서 나는 나의 운명을 살핀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은 구부러지기도 하고 밀착하기도 하고, 허리를 흔들기도 한다.

그래서 내 운명은 춤을 추는 여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하나의 다리로 서서 휘청거리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에 따라 사는 사람은 이리저리 휘청거리며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이 아닌가?

 

올바름을 추구하면서도 안정적이고 싶기에,

나는 운명이 잃어버린 한쪽 다리를 찾으려고 했다.

 

아,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의 한쪽 다리는 어디로 갔는가?

어디서 홀로 슬퍼하고 있으려나?

그 외로운 다리는?

이미 사자에게 갉아 먹힌 것이 아닌가?

아, 사라져 없는 것이구나!

 

운명이 괴로울지라도 울지 말라,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여.

강하게 마음을 먹어야 한다.

용기를 내라.

 

아니면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을 맞이하고서 견딜 수 있게 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걸까?

축복하는 아포리즘과 엄숙한 위로가 필요한 것인가?

 

나타나라, 고귀한 자여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의 존재들을 더욱 고취시켜라.

이상적 미래를 향하는 운명의 존재가 그릇된 길로 나가지 않도록 도덕심을 고취시켜라!

 

이상적 미래를 바라는 이의 도덕심은 다른 어떤 사회에 순응하는 자들의 열정이나 갈망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 상태로 이곳에 있지 않은가?

고귀한 자로서 나의 운명을 두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다.

부딪 신이 나를 돕기를!

 

부조리로 인하여 사람들의 내면이 황폐해지고 있다.

이처럼 황폐해진 내면을 품고도 가만히 있는 자에게 곤경이 있을 것이다.

 

휘어진 야자나무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을 야자나무로 표현하는 그림자는

이 나무가 춤을 추듯 휘청거리고 있다고 말한다.

 


생각해볼 거리들

 

왜 그림자는 차라투스트라에게 곁에 머물러 달라고 하나?

ㅡ앞서 차라투스트라가 자리를 비웠을 때, 늙은 배우의 선동으로 인하여 부조리로 돌아가려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ㅡ이는 다시금 절망과 슬픔 속으로 나아가는 것인데, 이 상태로 나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왜 교황은 눈물을 글썽이며 우울의 바다로 다시 배를 띄우나?

ㅡ교향은 어떤 절대적인 것을 추종하는 삶을 살았던 자다.

ㅡ그런데 늙은 배우가 차라투스트라는 우리에게 추종할 것을 주지 않는다며 불만을 표하자, 이에 공명하여 과거를 떠올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ㅡ그러면서 신을 잃음에 대한 우울감에 젖어 든 것 같다.

 

떠도는 구름, 축축한 비애, 가려진 하늘, 도둑맞은 태양, 울부짖는 가을바람은 무얼 말하나? 왜 이것들이 벌이는 사악한 놀이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하나?

ㅡ우선 사악한 놀이는 늙은 배우에 의해서 나타난 것을 말한다.

ㅡ늙은 배우는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면서, 새로운 사회적 규율을 따르길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했다.

ㅡ이 새로운 사회적 규율은 기존의 것과 동일한 것으로, 새로운 부조리와 그릇된 이해를 야기하게 된다.

ㅡ이러한 특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위의 표현들이 나온 거라 볼 수 있다.

 

ㅡ떠도는 구름의 경우, 햇빛을 가리는 것으로, 햇빛이 올바른 이해를 말하기에 그릇된 이해가 하늘에 있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즉 그릇된 이해가 세상에 퍼져 있는 상태인 것이다.

ㅡ새로운 규율이 이렇게 작용하리라 말하는 거라고 볼 수 있다.

 

ㅡ축축한 비애의 경우, 슬픔을 말하는데, 그릇된 이해가 다시금 세상을 지배하면서, 올바른 이해를 통한 삶에 대한 희망이 다시 사라진다.

ㅡ그러면 세상은 다시 슬프고 절망스러운 곳이 된다.

ㅡ이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ㅡ가려진 하늘은 그릇된 이해와 규율로 올바른 이해가 가려진 상태를 말한다.

 

ㅡ도둑맞은 태양의 경우, 태양은 올바른 이해를 제공하는 것을 말하는데, 올바른 이해를 제공하지 않는 것이 태양처럼 군림하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ㅡ이로써 진정한 태양이 자신의 지위를 다른 것에게 빼앗긴 것이 되므로, 도둑맞았다고 표현이 가능하다.

 

ㅡ울부짖는 가을바람의 경우, 가을에 부는 강한 바람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가을철을 맞아 잘 익은 결실들을 망치는 바람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ㅡ즉 잘 익은 결실들을 올바른 이해라고 할 때, 올바른 이해가 잘 거둬지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인 것이다.

ㅡ이는 그릇된 사회적 규율과 가치라고 볼 수 있다.

 

ㅡ이런 것들이 나타나면서 올바른 것이 제대로 자리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 텐데, 이를 사악한 놀이라고 표현한 듯하다.

 

왜 사람들의 울부짖음과 절박한 도움의 외침이 사악한 놀이를 벌이나?

ㅡ현재 사람들은 차라투스트라로부터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제공받지 못했다.

ㅡ그렇기에 사람들은 불만족스러운 상태에 있고, 이에 따라서 불만을 표출하여 만족에 이르게 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ㅡ이 과정에서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추종할 수 있는 것을 바란다.

ㅡ그런 점에서 다시금 기존의 사회적인 규율이나 종교를 바란다고 할 수 있다.

ㅡ이것을 사악한 놀이라고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숨겨진 많은 비참과 저녁, 구름과 숨막히는 대기는 무얼 말하나?

ㅡ앞서 말한 것과 같이, 모인 사람들은 따를 만한 가치의 상실로 인하여 절망하고 있는 상태이고, 그에 따라서 불만족스러움을 나타내고, 그릇된 것을 바라게 될 수 있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가 있을 때에는 차라투스트라가 자신들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면 되는지를 설명해주기에 그나마 억제될 수 있지만, 차라투스트라가 사라지는 시점에서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던 불만과 욕구가 드러나는 것이다.

ㅡ그렇기에 숨겨진 비참과 저녁이 언급되는 듯하다.

 

ㅡ여기서 저녁은 우울하게 사색하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ㅡ왜냐면 차라투스트라가 없는 상황에서는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존재의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ㅡ또 우울하게 사색하는 시간은 그릇된 것을 받들게 하고, 이 그릇된 것들 속에서 부조리가 다시 나타나는데, 이것이 불편함을 유발하기에 숨막히는 대기가 있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사람들에게 강한 사내를 위한 음식과 잠언을 대접했나? 연약하고 여성적인 정신은 무얼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종교적 의미를 지니는 빵이 아니라 고기, 그리고 「차라투스트라, 4권 13장」을 통해서 고귀한 자들을 위한 말들을 제시했다.

ㅡ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각각은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것을 상징한다.

 

ㅡ반면 차라투스트라가 사라지면서,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추종하고 따르려는 경향이 생겼다.

ㅡ이러한 경향을 여성이 보이는 특징이라고 보면서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주변의 대기를 힘차고 맑게 한다고 하는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이해를 제공하므로, 차라투스트라 곁에 있으면 답답함이나 불편감이 해소될 수 있다.

ㅡ반면 사회 속에 있다면, 그릇된 이해를 바탕으로 부조리한 것들이 나타나므로, 사회 속에 있으면, 답답함과 불편함이 생길 수 있다.

 

ㅡ이러한 특징을 두고서 맑은 대기와 후텁지근한 대기로 구분 지어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즉, 차라투스트라가 올바른 이해를 제공했을 때 느껴지는 기분에 대해서 힘차고 맑은 대기로 표현한 것이다.

 

많은 나라를 보면서 대기를 음미하고 평가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은 무얼 말하나?

ㅡ많은 나라는 다양한 사람들이나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다양한 사람들을 접하고, 그 사람들의 사고가 건강하여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지 아니면 병들어서 불편하게 하는지를 살피는 법을 배웠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사막의 딸은 어떤 존재를 말하는가?

ㅡ여기서 언급되는 사막의 딸은 두명으로 구성이 된다는 점에서, 「차라투스트라, 2권 10장」에서 나타나는 삶과 지혜라는 여인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ㅡ우선 이 딸들의 경우, 사막의 오아시스에 존재하는 자들인데, 여기서 사막이라는 것은 부조리로 인해서 황폐해진 내면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처럼 황폐한 영역에서 오아시스, 풍요로운 곳에 사막의 딸이 있다.

ㅡ황폐해진 내면에게는 부조리가 근절된 곳이 풍요로운 곳으로 여겨질 것이다.

ㅡ그런 점에서 이 오아시스는 이상적 미래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ㅡ이상적인 곳에 두 여자가 있는데, 이 두 여자는 수수께끼로서 자리한다.

ㅡ「차라투스트라, 2권 10장」에서 운명과 지혜는 모두 제대로 답을 알려주지 않는 특징을 보이기에,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 생각하여 표현할 수 있다.

 

ㅡ그리고 이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며 묘사할 때 구름도 사상도 걸리지 않은 파란 하늘을 역시 사랑한다고 말한다.

ㅡ여기서 언급된 하늘은 이상적인 곳을 말한다고 볼 수 있는데,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과 지혜에 따라 살게 되면, 이 이상적인 곳, 오아시스을 사랑하게 된다.

 

ㅡ이러한 점들로 볼 때, 사막의 딸들은 삶(운명)과 지혜라는 여자로 보인다.

 

동방의 대기가 언급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ㅡ그림자는 유럽에 대해서 구름 끼고 축축하고 우울 가득하다며 부정적인 뉘앙스로 말한다.

ㅡ이는 결국 부조리함으로 가득하다는 이야기로, 동방은 긍정적인 의미의 지역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ㅡ이는 불교에 대한 관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ㅡ즉 유럽은 기독교/그리스도적 관점을 지닌 곳이고, 동방은 불교적 관점을 지닌 곳이란 점에서 비교되는 듯하다는 것이다; 「안티크리스트, 서문 23절」

     다시 한번 말하지만 불교는 백 배나 더 냉정하고 진실되고 객관적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고통과 고통을 느끼는 능력을 더 이상은 죄 해석을 수단

     으로 하여 바람직한 것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림자가 동방의 소녀들을 사랑한 이유는 무엇인가?

ㅡ이 소녀들은 앞서 말한 사막의 딸들로, 올바름에 대한 운명과 지혜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ㅡ이것들은 차라투스트라가 힘차고 맑은 공기를 지니게 해주는 역할을 했으니, 차라투스트라와 마찬가지의 동방의 대기를 지니고 있게 되는 것이다.

 

ㅡ또 그림자는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운명을 사는 존재이기에, 올바름에 대한 운명과 지혜를 보면 좋아할 수밖에 없다.

 

왜 소녀들은 춤을 추지 않을 때 얌전히 앉아 있었다고 하나?

ㅡ춤을 춘다는 것은 앞에서 무언가를 보여준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고, 이는 곧 올바른 것을 시연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이를 통해서 그림자는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나 올바른 이해를 얻을 수 있다.

ㅡ즉 소녀들을 통해서 덕을 보는 것이다.

ㅡ하지만 소녀들은 자신들의 덕을 보는 그림자에게 올바른 이해의 단서를 제공하고는 무언갈 요구하거나 바라지 않는다.

ㅡ그저 얌전히 앉아서 자신들의 춤을 이해하기를 바란다.

ㅡ이런 점은 앎을 나누면서 으시대는 존재들과는 다르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ㅡ즉 성숙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깊지만 상념 없이, 작은 비밀처럼, 끈으로 장식한 수수께끼, 후식용 호두는 왜 나오나?

ㅡ소녀들은 자신들을 부풀리거나 과장하지 않고서 그저 그림자가 자신들의 춤을 이해하기를 바라는 모양새다.

ㅡ이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ㅡ이에 따라서 풀리도록 허용된 수수께끼로서 있다고 말이 나온다.

 

사막이 자라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왜 사막을 품고 있는 자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나?

ㅡ여기서 사막은 황폐해짐을 나타낸다고 볼 수도 있다.

ㅡ이 황폐해짐은 부조리에 의해서 내면의 생기나 풍요로움을 잃는 상태라고 보는 것이다.

ㅡ후술되는 표현을 보면, 사막이 황폐함과 관련된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실로 놀랍구나!

     나 지금 여기에 앉아 있다.

     사막 가까이에, 그리고 이미 사막에서 이토록 다시 멀어져서, 아직 티끌만큼

     도 황폐해지지 않은 채 삼켜져 있는 것이다.

 

장엄하고 위엄 있는 시작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아프리카처럼 장엄한가? 왜 사자에 걸맞거나 도덕을 부르짖는 원숭이에게 어울리나?

ㅡ사막이 자라난다는 것, 사회의 부조리로 인하여 마음이 황폐해진다는 것은 사회를 벗어나 올바른 것을 찾아 나아간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ㅡ그런 점에 있어서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는 누군가의 황폐해짐이 아주 좋은 것으로 취급될 수 있다.

 

ㅡ아프리카가 언급되는 것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유럽이 아닌 아프리카라고 볼 때, 아프리카는 상대적으로 덜 문명화된 곳으로 볼 수 있고, 이에 따라서 좀 더 인간이 사회를 벗어나서 행동할 수 있게 되기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ㅡ사자에 걸맞다는 것은 사회적 규율이 강하지 않은 곳에서 사회적 규율에 대해서 맞설 기회가 되기에 그렇다는 걸로 보인다.

ㅡ즉 부조리에 따른 내면의 황폐화는 사자로 거듭나기에 좋은 상태라는 것이다.

 

ㅡ도덕을 부르짖는 원숭이에게 어울린다고 하는 이유를 보면, 원숭이는 인간답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ㅡ게다가 도덕을 부르짖고 있으니, 사회에 순응하고 있는 인간의 상태를 말한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ㅡ이런 존재가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나기에는 내면의 황폐해짐은 의미가 있다.

 

왜 사랑스러운 여자친구들은 이와 무관하다고 표현하나?

ㅡ그림자가 마주한 사막의 딸들은 내면의 황폐함과 무관하다는 이야기다.

ㅡ왜냐면, 이들은 황폐한 내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아시스 속에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ㅡ즉 이들은 문명을 벗어나서 안식처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ㅡ그런 점에서 황폐해진 자들보다 더 나은 상태에 있는 존재들이다.

 

왜 그림자는 한 사람의 유럽인으로서 야자나무 아래에 앉아도 되었는가?

ㅡ우선 야자나무에 대해서 먼저 살피도록 하자.

 

ㅡ후술되겠지만 그림자와 같은 존재, 올바름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는 오아시스의 야자나무의 열매처럼 존재한다.

ㅡ그런 점에서 야자나무의 결실 중 하나다.

ㅡ즉 차라투스트라도 야자나무의 결실이고, 그림자도 야자나무의 결실인 셈이다.

ㅡ이에 따라 야자나무는 올바름 추구자들을 생산해내는 특징을 지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ㅡ그림자나 차라투스트라나 모두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ㅡ그런데 그림자는 이러한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을 바라보는 상황에 놓이고 있다.

ㅡ즉 차라투스트라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운명을 마주한 상황인 것이다.

ㅡ이는 그림자 역시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고민하고 살폈고, 그래서 자신의 운명을 바로보고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왜 그림자는 사막 가까이에, 사막에 이토록 멀어져서 황폐해지지 않은 채 삼켜져 있다고 말하나? 왜 오아시스는 사랑스러운 입을 벌렸고, 그림자는 삼켜지나?

ㅡ그림자는 현재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했다.

ㅡ사막이 황폐해진 마음이라고 한다면, 오아시스는 이 황폐해진 마음에서 유일하게 생기를 주는 장소다.

ㅡ즉 삶의 희망과 의욕을 주는 것으로, 이상적인 미래, 이상 사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ㅡ그래서 황폐해진 내면 중에서도 황폐해지지 않은 채로 있다.

 

ㅡ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에 따라 사는 그림자는 사회를 벗어나 지내다가 자신 안에서 이러한 이상적인 미래,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을 발견한 상태인 것이다.

ㅡ이때 힘차고 맑은 공기를 느낀 것이다.

 

ㅡ그럼 왜 삼켜져 있다고 말할까?

ㅡ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상적 미래를 바라보면서, 이상적 미래에 빠져들어 있는 상태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들은 이상적 미래나 사회 속에 있기를 바라며, 자신이 이상적 미래나 사회에 이바지했기를 바란다.

ㅡ이는 이상적 미래가 자신을 거두어 두기를 바라는 것, 자신을 삼켜주기를 바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ㅡ이것이 올바름 추구자들이 바라는 구원이기 때문이다.

ㅡ그래서 오아시스가 삼킨다는 것은 올바름 추구자가 원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과 같다.

ㅡ그리고 오아시스를 고래로 바꾸어서 삼킨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왜 그림자는 오아시스의 배를 의심하나?

ㅡ오아시스가 이상적 미래를 말한다면, 그림자가 오아시스에 삼켜진다는 것은 이상적 미래에서 거두어진다는 걸 말한다.

ㅡ그런데 사실 이상적 미래에 이렇게 거두어지는 것은 의심해볼 만한 일이다.

ㅡ왜냐면 차라투스트라나 그림자와 같은 존재가 이상적 미래를 위해서 노력을 한다고 하지만, 정말 이상적 미래가 다가올지에 대해서 확신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ㅡ그렇기에 차라투스트라는 이상적 미래의 도래를 바라기보다는 영원회귀를 통해서 미래의 존재로부터 구원받는 것을 염두하기에 이른 것이다.

ㅡ이에 대해서는 「차라투스트라, 4권 10장」에서 좀더 확인해볼 수 있다.

       "오, 내 위의 하늘이여!"

     그는 한숨을 쉬며 말하고는, 일어나 똑바로 앉았다.

       "그대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가?

        그대는 내 별난 영혼에 귀 기울이고 있는가?

        그대는 언제, 지상의 모든 것 위에 떨어져 내린 이 이슬방울을 마시려는가?

        언제 이 별난 영혼을 마시려는가?”

ㅡ여기서 하늘은 이상적 미래를 말한다고 할 수 있고, 이슬방울은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존재/별난 영혼을 말한다.

 

왜 그림자는 오아시스에 대추야자 열매처럼 소녀들의 입에 먹히기를 갈망하는가?

ㅡ소녀들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과 지혜를 말한다.

ㅡ이는 곧 이상적 미래라고 볼 수 있다.

ㅡ왜냐면 지혜와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이 있어야 이상적 미래를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ㅡ앞서 말한 것처럼 이 운명과 지혜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이상적 미래를 구현하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실제로 언제 이상적 미래가 도래할지를 알지 못한다.

ㅡ그런 점에서 자신의 삶이 끝나기 전에 오면 가장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자신이 이상적 미래를 위해서 의미 있는 일을 했기를 확인받기를 원한다.

ㅡ이러한 삶의 의미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상적 미래로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고 받아들여져야 하는데, 이것을 열매가 먹히는 모습으로서 표현하는 것이다.

 

ㅡ즉 소녀들이 그림자를 먹는다는 것은 그림자의 삶이 자신들에게 만족스러웠다는 것을 나타내는 장면인 것이다.

 

ㅡ대추야자 열매는 그림자를 말하고, 그림자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를 말하므로, 모든 올바름 추구자는 이상적 미래에 자신이 이바지했다는 것을 확인받기를 바란다.

ㅡ그런 점에서 모든 대추야자 열매가 소녀들에게 먹히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그림자는 남방의 열매와 비슷하게 누워있나? 왜 작은 벌레들이 주위를 춤추며 날고 있나? 왜 더 어리석고 심술궂은 소망과 착상에 둘러싸이나? 왜 소녀 고양이들, 스핑크스들에게 둘러 싸인다고 하나?

ㅡ그림자는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면서 여러 올바른 이해를 갖춘 자다.

ㅡ그런 점에서 그를 잘 익은 과일로 해석할 수 있다.

 

ㅡ잘 익은 과일은 그 당도로 인하여 벌레들이 꼬이게 된다.

ㅡ이는 꿀을 원하는 자들이 차라투스트라의 곁에 모이는 것, 거머리들이 양심적인 자에게 모이는 것과 같은 양상이다.

ㅡ즉 올바른 것이 있기에 모여든다는 것이다.

 

ㅡ또 올바른 이해를 갖추고 있으니, 이와 관련하여 이상한 생각들이 자신을 비판하고 있을 것이다.

ㅡ이 상황을 심술궂은 소망과 착상에 둘러싸였다고 표현하는 듯하다.

 

ㅡ소녀 고양이들의 경우, 운명과 지혜를 말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들은 수수께끼를 내는 스핑크스츠럼 올바름 추구자에게 답이 아니라 문제를 낸다.

ㅡ그런 점에서 운명과 지혜가 올바름 추구자인 그림자에게 문제를 내고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종합해 보면, 올바름 추구자의 곁에 올바름 추구자의 앎을 원하는 자, 올바름 추구자를 비방하려는 자, 올바름 추구자가 공부하게끔 질문을 던지는 것들이 있다는 이야기로 보인다.

 

상쾌한 대기, 낙원의 대기, 밝고 가벼운 대기, 황금 줄무늬를 지닌 대기는 무얼 말하나?

ㅡ대기는 그림자가 특정 상대와 대화했을 때 느껴지는 기분을 말한다.

ㅡ여기서는 부조리나 그릇됨이 작용하지 않는 상황이나 그런 존재를 마주할 때의 기분을 말하는 것이다.

ㅡ따라서, 올바르고 건전한 것을 마주했을 때의 기분을 상쾌하다/낙원 같다/밝고 가볍다/황금 줄무늬를 지닌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ㅡ상쾌함은 대화를 했을 때 개운한 느낌이나 답답하지 않은 기분을 느끼기 때문이고, 낙원 같음은 대화를 했을 때 희망적이거나 고양되어짐을 느끼기 때문으로 보인다.

ㅡ밝고 가벼움 역시도 대화나 상황 속에서 우울해지거나 절망스러워지지 않음을 느끼기 때문이고, 황금 줄무늬의 경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는 대화 상황을 마주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표현으로 보인다.

 

왜 가장 상쾌한 대기, 낙원의 대기는 달에서 왔다고 하나?

ㅡ그림자가 보기에, 현재 지상에는 올바름과 관련된 이해를 제공하는 건강한 사람이 없다고 보기 때문으로 보인다.

ㅡ그러므로 지상과 가장 가깝지만 지상의 오염을 피한 달에서 온 게 아닐까 하는 듯하다.

 

우연히 그랬는지 신나고 들뜬 기분이어서 그랬는지 물어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ㅡ그림자는 현재 올바른 이해와 관련된 대기를 맛보고 있다.

ㅡ그릇된 이해와 부조리가 가득한 이 지상에 올바른 이해를 맛보고 있으므로, 이것이 어째서 오게 된 것인지 의문을 품을 만하다.

 

ㅡ그리고 지상에 내려온 올바른 이해가 나타나는 것은 우연한 계기 속에서 그랬을 수도 있고, 올바른 이해를 전하는 자가 기분이 좋아서 지상에 내렸을 수도 있다.

ㅡ이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는 없기에, 그림자는 신이 바로잡아 달라고 말한다.

 

왜 그림자는 상쾌한 공기를 마시면서 콧구멍이 술잔처러 부풀어 오른다고 하나?

ㅡ한껏 들이마시는 모양새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미래도 추억도 없이 여기 앉아 있다는 것은 무얼 말하나?

ㅡ상쾌한 대기, 즉 올바른 이해를 접하면서 미래와 과거에 대한 생각도 없이 여기 있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곧 올바른 이해를 통해 현재에서 충만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과 같다.

ㅡ따라서 현재의 이상적인 상태에 몰입하고 있음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야자나무를 바라본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ㅡ야자나무는 야자열매를 내놓는 나무다.

ㅡ앞서 그림자나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존재가 야자열매로 표현되었으므로, 차라투스트라와 그림자를 낳는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ㅡ그런데 그림자와 차라투스트라는 공통적으로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을 따르고 있다는 특징을 보인다.

ㅡ그런 점에서 야자나무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을 말하고, 그림자는 자신의 운명을 살펴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야자나무는 몸을 구부리고 비틀며 엉덩이를 흔드나? 왜 한 다리로 서있다고 말하나? 왜 다리는 영원히 사라져 버렸나?

ㅡ야자나무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이다.

ㅡ이에 따라 보면,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은 바른 자세로 있지 못하고 휘청거리고 있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이는 곧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의 삶이 평탄치 못함을 말한다.

 

ㅡ이 평탄치 못함은 앞서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는데, 올바름을 추구하며 노력하면서 사는데, 그 노력에 비해서 결과물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ㅡ이에 따라서 여러 절망을 맞닥뜨리고 살게 된다.

 

ㅡ이것은 운명에 대한 불평으로, 왜 노력함에 따른 결과물을 주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다.

ㅡ이에 대해서는 그림자나 차라투스트라가 알려고 노력해도 알 수가 없다.

ㅡ그래서 그림자는 운명이 잃은 다리를 결국 찾지 못하고,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고 말하는 것이다.

 

ㅡ다리의 사라짐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논리를 바탕으로 나타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ㅡ사자같은 괴물로부터 다리를 씹어 먹히거나 버림받았다는 것은 그저 다리의 잃음에 대한 문학적 표현이라고 보는 편이 나을 듯하다.

 

여린 심장은 누구를 말하나? 대추야자 열매의 심장, 젖가슴, 감초의 심장을 지닌 작은 주머니는 뭘 말하나?

ㅡ이 심장은 모두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 속의 개인을 말한다.

ㅡ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은 휘청거리면서 그 운명에 따르는 사람을 곤란에 빠뜨린다.

ㅡ그렇기에 순탄치 않은 삶을 살게 된다고 할 수 있고, 이는 당사자에게 있어 절망적인 이야기가 된다.

ㅡ그렇기에 울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ㅡ감초의 심장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으나, 감초가 단맛을 내면서 조화를 이루게 한다는 점에서 보면, 감초는 꿀의 상징과 올바름을 세상에 드러내는 상징을 담는다고 할 수 있다.

ㅡ즉 감초의 심장은 올바른 이해를 세상에 잘 퍼뜨리는 존재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림자는 왜 여린 심장을 격려하려고 하는데, 유럽인의 위엄이 나타나라고 하는가? 왜바람을 불어넣어야 한다고 하는가? 왜 다시 도덕적으로 울부짖으라고 하나?

ㅡ유럽인은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지만, 유럽인의 위엄에서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ㅡ다음의 구절 때문이다.

     왜냐하면 덕의 울부짖음은

     그대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소녀들이여,

     유럽인의 모든 열정과 유럽인의 모든 뜨거운 굶주림 그 이상의 것이기 때문

     이다!

ㅡ이를 보면, 덕의 울부짖음은 유럽인들의 열정과 갈망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한다.

ㅡ즉 보통의 유럽인들이 갖는 것이 아니란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그렇기에 현재 언급되는 유럽인의 위엄은 고귀한 유럽인의 위엄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ㅡ바람을 불어넣어야 하는 이유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부정적인 전망으로 인하여 의욕이나 열의가 사라졌을 수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ㅡ왜 다시 도덕적인 사자로서 울부짖으라고 하나?

ㅡ이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비관으로 인하여, 방종/무절제/향락적인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인 듯하다.

ㅡ올바름 추구자의 운명은 노력해도 자신의 목표에 닿을 수 없는 운명이다.

ㅡ그러므로 노력이 헛되게 되는 운명인데, 이런 운명을 살바에는 즐기면서 살겠다고 나아갈 수 있다.

ㅡ이를 막기 위해서는 도덕심을 고취시켜서 방탕하게 살지 않게끔 해야 한다는 전략으로 보인다.

 

그림자는 이미 거기 서있다는 것은 뭘 말하나?

ㅡ그림자는 이미 올바름 추구자의 운명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

ㅡ그러다가 점차 지치면서 휑해진 상태로 차라투스트라를 만나게 된 것이다.

 

유럽인으로서 달리 할 수가 없다는 것은 무얼 말하나?

ㅡ정확하지 않지만, 여기서 말하는 유럽인의 경우, 고귀한 성품을 지닌 유럽인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ㅡ왜냐면, 일반적인 유럽인들 같은 경우, 기독교적 사고관에 따라서 행동할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ㅡ하지만 이미 올바름 추구를 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유럽인은 일반적 유럽인이 아니라, 고귀한 유럽인이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싶다.

 

ㅡ즉 어쩔 수 없이 운명을 쫓아 노력하며 살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