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4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4권 15장 의역 (완) (학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8. 22. 12:15

ㅡ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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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4권 15장 학문


         
15장 개괄

 

 

15장은 늙은 배우가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 난 다음의 상황을 담고 있다.

늙은 배우가 차라투스트라에 대해서 불만을 표현할 때, 다시 추종하는 자로서 살려는 의지를 보이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 양심적인 자(거머리에게 피를 나누던 자)가 이를 지적하게 된다.

양심적인 자가 여기서 나서게 되는 이유는 양심적인 자는 늙은 배우가 한 이야기가 다시금 사회에 돌아가는 것과 같을 정도로 좋지 못한 이야기라고 보기 때문이다.

 

양심적인 자는 자신과 다른 고귀한 자들의 차이점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자신은 보다 안전한 곳을 찾는 반면에, 다른 고귀한 자들은 위험과 자극을 바라는 듯하다고 말한다.

위험과 자극을 바라는 것은 대중적 취향인데, 이를 고귀한 자들이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양심적인 자는 이들과 달리 자신은 두려움에 기초하여 인간과 사회를 바라본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학문의 발달 역시 모름에 따른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차라투스트라가 나타나 학문은 도전과 시도에서, 즉 용기에서 발달했다고 말하려고 하지만, 늙은 배우가 끼어들면서 말을 하지 못한다.


 

 

본문

 

 

그렇게 늙은 배우가 노래를 부르자, 한 사람을 제외하고 함께 있던 모든 사람들이 늙은 배우의 교활하고 우울한 노래에 빠져들었다.

늙은 배우의 노래에 빠져들지 않은 자는 정신적으로 양심적인 자, 올바른 것을 느낄 줄 아는 자였다.

양심적인 자는 재빨리 늙은 배우의 하프를 빼앗으며 외쳤다.

 

     “맑은 공기가 필요하다!

      차라투스트라를 들여라!

 

      너는 이 공간을 음울하게 만들어 버리는 구나. 이 사악한 늙은 배우야.

      너는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그들의 내면에 자리한 불만을 자극하여 사람들을 잘못된 곳으로 이끌고 있다.

      너 같은 자들이 진리에 대해서 말하고 행하면, 나는 무척이나 화가 날 것이다.

 

      이런 사이비를 경계하지 않은, 이 사회를 벗어나 고독으로 찾아온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자유를 찾아왔지만, 너의 노래로 자유가 아닌 다시 감옥으로 나아가고자 하게 되었다.

 

      이 우울한 악마야,

      너의 불평 속에서 사람들이 유혹됨을 느낀다.

      너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것을 말하는 존재로 보이지만, 결국 사람들이 그릇된 길로 나아가게 하는 존재이다.”

이렇게 양심적인 자가 말했다.

사악한 악마의 노래

다른 고귀한 자들은 늙은 배우의 노래에 감명받고 빠져들지만,

양심적인 자만은 그의 노래를 비판한다.


 

늙은 배우는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의 노래가 사람들을 꼬득이는 것에 성공했음에 만족해 하며, 양심적인 자의 비난을 삼켰다.

늙은 배우가 겸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용히 하라.

      좋은 노래는 충분히 울려지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좋은 노래를 들은 후에는 오랫동안 침묵하는 것이 좋다.

      여기 다른 고귀한 자들은 그렇게 하고 있다.

 

      하지만 너는 내 노래에 공감하지 못한 듯하다.

       네 안에는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불만이 없나 보다.”

 

양심적인 자가 말했다.

    “나를 이들과 다른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분명 내게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여기 이 사람들은 모두 욕망에 찬 눈으로 있구나.

 

     자유로운 영혼이라 불리는 자들이여,

     너희는 왜 자유를 버리고 다시 추종자의 삶으로 나아가려고 하는가?

     나에게 너희의 모습은 숨겨진 욕망을 자극받은 자들과 비슷해 보인다.

     너희의 영혼들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가?

     너희 안에는 저 늙은 배우가 차라투스트라에게 갖는 불만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서로 다르구나.

 

     차라투스트라가 동굴로 돌아오기 전에 우리는 함께 충분히 이야기를 했고,

     그래서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사회를 벗어난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추구하는 구나.

 

     나는 세상의 부조리로부터 의지처를 찾기 위해서, 세상에 대한 절망으로부터 안정을 얻기 위해서 차라투스트라를 찾아왔다.

     그가 내게 있어 가장 견고한 탑이자 가장 강한 의지를 지닌 자이기 때문이다.

     가치와 규율에 대한 혼란이 자리하는 현재에 말이다.

 

     하지만 너희의 눈을 보면, 너희는 자극을 받길 바라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자극하고 사고를 전복시켜 너희의 정신을 고조시키길 바라는 것이다.

     너희는 이를 원하는 것 같이 보이는데, 너무 함부로 말했다면 용서해달라,

     고귀한 자들이여.

 

     하지만 내가 보기에 너희는 자극을 추구하는 좋지 못한 삶, 위험한 삶을 원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내게 그런 삶은 거의 이성적 인간의 삶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그래서 나는 그런 삶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너희는 자극적인 삶을 좋아하고,

     그렇기에 너희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너희를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삶이 아니라,

     위험한 길/자극적인 길로 유혹하는 사람이다.

     너희에게 이런 욕망이 있더라도, 나는 너희의 욕망처럼 늘 자극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두려움>,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자 근본 되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두려움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고, 죄와 덕이라는 개념도 <두려움>에 기초한다고 보인다.

    <두려움>에서 나의 덕목인 학문도 자라났다고 본다.

 

     야생적인 것들/자연에 대한 <두려움>,

     이것은 인간이 오랫동안 가져왔던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 내면에 있는 야생성, 즉 본성도 포함이 된다.

     이를 차라투스트라는 내면에 짐승이라고 하는데, 인간은 이러한 내면의 짐승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이런 <두려움>이 발달하고 극복하려고 하면서 점차 정교해지고,

     이로써 학문이라는 것이 생겼다.”

 

 양심적인 자가 이렇게 말할 때, 차라투스트라가 동굴로 들어왔다.

 

두려워하는 인간

양심적인 자는 두려움이 인간의 문명을 발달시켰다고 본다.

더는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 사색하고 탐구했다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양심적인 자의 학문에 대한 이야기 듣고는 웃으며 그에게 장미를 던지졌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가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것이죠?

     저와 인간에 대한 본질을 바라보는 입장이 다른 것 같군요.

     제가 당신이 말한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반박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에게 <두려움>이라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에 부수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전인류를 통틀어 인간에게 본질적인 것은 <용기>입니다.

     인간은 모험, 불확실함을 알아가는 즐거움, 도전하는 즐거움을 가지니 말입니다.

*용기를 갖지 못하게 되면서 생기는 것이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동물들의 특별한 능력들을 가지려 도전하였고, 그렇게 얻지 않았습니까?

     그리하여 인간은 다른 동물들의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되지 않았습니까?

 

     제 생각에는 이러한 시도와 도전이 세련 되어지고 관념화 되면서, 오늘날의ㅡ”

 

    “차라투스트라여!”

차라투스트라가 말을 하는 도중에 모두가 한 목소리로 크게 외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늙은 배우는 웃으면서도 재치 있게 말했다.

    “좋다, 불만을 품던 나의 충동이 사라졌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이 충동은 너희를 꼬득일 것이라고 말이다.

     특히 너희가 이 충동에 공감할 때 그렇다.

 

     내가 이를 두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내 안에서 스믈스믈 올라온 것이지 내가 일부러 만든 것은 아니니 말이다.

 

     좋다!

     다시 마음을 풀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자.

     차라투스트라가 나쁜 시선으로 나를 본다고 하더라도!

 

     그를 보라, 그는 내게 언짢아 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는 밤이 되기 전에 나를 사랑하고 칭찬할 것이다.

     왜냐면 그는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적을 사랑한다.

     내가 아는 한 차라투스트라만큼 자신의 적을 사랑하는 자는 없다.

     그는 되려 자신의 친구에게 적의를 품는다고 했다.”

 

늙은 배우가 이렇게 말했다.

고귀한 자들은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 사이를 돌면서 사람들과 악수를 했다.

마치 사람들에게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그래서 그들에게 보상하고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람들과 악수를 하고 동굴 입구 쪽으로 자리하게 되었을 때,

차라투스트라는 바깥으로 나가 맑은 공기와 자신의 동물들과 함께 있고 싶어졌다.

 

모험가들

그들은 두려움에 의해서 모험을 떠난 것이 아니라,

도전하고자 하는 욕구에 의해서, 그들의 용기에 의해서 모험을 떠났다.

 


 

생각해볼 거리들

 

왜 양심적인 자는 신선한 공기를 들여달라고 했을까?

ㅡ여기서 언급되는 공기는 분위기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늙은 마술사(배우)에 의해서 현재 공간의 분위기가 추종할 것을 내놓지 않는 차라투스트라를 비판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ㅡ하지만 양심적인 자가 보기에는 추종할 것을 내놓는 것은 추종하는 것의 형태만 다른, 기존 사회의 답습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부정적으로 보는 듯하다.

ㅡ결국 옛 주인이 없어지니 새로운 주인을 찾는 노예 상태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ㅡ늙은 배우는 이러한 심리를 자극했고, 그래서 양심적인 자는 이러한 주장이 공감 받는 상황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미지의 욕망과 황폐함으로 유혹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미지의 욕망의 경우,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깨닫지 못한 욕망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ㅡ황폐함의 경우, 늙은 배우가 사람들이 노예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방향으로 이끄는데, 이것은 결국 노예 상태의 지속이므로, 개인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지 못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ㅡ따라서 개인은 여전히 자기 의식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는 황폐한 상태에 있게 된다고 볼 수 있고, 이를 나타낸 표현으로 보인다.

 

ㅡ이처럼 늙은 배우는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자리한 심리를 기반으로 하여, 사람들을 예전의 황폐했던 상태로 유혹하고 이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저들의 자유가 이렇게 끝장이 난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감옥으로 가라고 가르치고 유인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늙은 배우의 이야기가 새로운 신적인 것을 두고 따르고 싶다는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했다.

ㅡ이를 통해서 사람들은 추종할 다른 대상을 찾고자 하는 열망에 휩싸이는데, 이렇게 되면, 다시금 노예 상태가 되니, 그들의 자유가 끝이 났다고 말하는 것이다.

ㅡ또 다시금 노예 상태가 된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규율이나 틀 안에서 갇혀 지낸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감옥을 언급한다.

 

순결을 찬양하면서 은밀히 육욕으로 끌어들인다는 건 무슨 말인가?

ㅡ늙은 배우는 사람들이 추종할 대상을 바란다는 점을 자극한다.

ㅡ이는 사람들에게 무의식적으로 만족을 주는 요소이긴 하지만, 문제는 이에 따라 행동하면 다시금 문제 상황에 놓이게 된다.

ㅡ즉 당장은 불만을 토로하며 올바른 것을 바라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올바른 것을 바라며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릇된 것을 향해 나아가며 불만을 토로하는 상황인 것이다.

ㅡ그래서 말하는 것과 진행의 방향이 다른 상태인데, 이를 순결을 외치면서 육욕으로 끌어들인다고 말하는 걸로 보인다.

 

늙은 마술사는 왜 조용히 하라고 하며, 좋은 노래는 좋은 반응을 원하고, 길게 침묵해야 한다고 하나?

ㅡ늙은 마술사(배우)는 사람들을 선동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경향이 있는 존재다.

ㅡ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노래나 이야기, 연기에 대해서 흠뻑 젖어 들어야 한다.

ㅡ오래 유지될수록 자신의 존재감이 커지기 때문이다.

ㅡ즉 늙은 배우는 자신의 기분이 즐겁기 위해서, 조용히 하라고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늙은 마술사(배우)가 말하는 마술사 정신은 무엇을 말하나?

ㅡ늙은 배우의 노래에 깊게 감명하려면, 늙은 배우가 말한 노래에 공감해야 한다.

ㅡ하지만 양심적인 자의 경우, 늙은 배우의 노래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ㅡ이를 통해서 볼 때, 늙은 배우가 말하는 것에 공감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그런데 늙은 배우는 이처럼 양심적인 자가 공감을 하지 못하는 것이 마술사 정신이 없어서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ㅡ마술사의 정신은 사악한 정신이며, 이는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불만이자, 다른 신적인 것을 추종하고자 하는 욕구라고 할 수 있는데, 양심적인 자에게는 이것이 없다.

ㅡ그런 면에서 마술사의 정신은 추종하려는 욕구,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탐하는 눈길로 보며 앉아 있는가?

ㅡ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이 추종할 수 있는 것을 제시 받기를 바라는 열망에 휩싸인 듯하다.

 

고약한 춤을 추는 벌거벗은 소녀들을 지켜본 자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ㅡ다른 사람들은 늙은 배우의 노래를 통해서 자신들의 숨겨진 욕망을 자극받게 된다.

ㅡ이를 나체의 소녀가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욕망에 사로잡힌 모습과 비슷하다고 본 듯하다.

 

양심적인 자는 왜 차라투스트라에게서 더 많은 안전을 찾나? 왜 차라투스트라는 가장 견고한 탑이자 의지인가?

ㅡ차라투스트라의 경우, 「차라투스트라, 4권 11장」에서 언급하다시피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이들에게 안전을 선물로 제공하려고 한다.

      여기 내 고향, 내 집에 머무는 한, 그 누구도 절망해서는 안 된다.

      내 영토에서는 내가 모든 이를 각자의 거친 짐승들로부터 지켜주니

      안전, 이것이 내가 그대들에게 내주는 첫 번째 것이다!

ㅡ여기서 안전이란 거친 짐승들로부터 지켜주는 것인데, 이 거친 짐승이란 부조리로 인한 방황이나 사회적 비판, 고독 속에서 살아가면서 생겨나는 절망을 포함하는 걸로 보인다.

ㅡ즉 사회를 벗어난 자가 안전하게 자신의 길을 나아갈 수 있게끔 하는 가이드를 제시하려는 것이다.

ㅡ그래서 차라투스트라에게 안전을 찾고 가장 견고한 탑이자 의지처라고 보는 듯하다.

 

ㅡ양심적인 자는 올바름을 추구하면서 얻은 지식을 사람들에게 제공하면서 근근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던 자다.

ㅡ즉 차라투스트라가 「차라투스트라, 2권 22장」에서 사람들 곁에 머물지 고독할지 고민하던 때에서, 사람들 곁에 머물기로 선택한 경우의 모습인 것이다.

ㅡ그래서 사람들에게 참신하고 새로운 지식을 전하면서 이상을 위한 노력은 하지 않으며 살고 있는 존재라 할 수 있다.

ㅡ이 존재는 자신이 거머리 같은 존재들과 있는 것이 마냥 좋지는 않지만, 그렇지 않으면 공부하고 사색하는 자신의 운명이 무가치해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함께 하고 있었고, 차라투스트라를 만나면서,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을 도울 것이라고 생각하여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에 있는 것이다.

 

ㅡ그런 면에서 이 존재에게 차라투스트라는 삶의 희망을 제공할 수 있는 의지처가 된다.

ㅡ다른 이들보다도 더 의지처가 되는 이유는 다른 이들과 달리 이 존재는 올바름을 향하는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ㅡ그래서 주변의 거머리 같은 존재들에게 앎을 나눠주고 있었지 않나?

ㅡ하지만 다른 배우나 왕들, 가장 추한 자, 부를 버린 자, 교황의 경우, 앎을 얻어 나눠주기 보다는 사회에 대한 환멸감을 느끼고 있는 상태의 존재에 해당된다;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운명을 사는 그림자의 경우는 올바름을 추구하다가 자신의 운명에 대한 환멸감을 느끼는 존재로, 그나마 양심적인 자와 비슷하다.

ㅡ양심적인 자는 단순히 환멸감을 느끼는 존재가 아니기에,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에 공감하기 쉬우며, 그에 따라서 늙은 배우의 비방에 대해서 좀 더 저항감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흔들리고 대지 전체가 진동하는 오늘날은 무얼 말하나?

ㅡ모든 것이 흔들린다고 할 때, 이는 가치와 규율로 보인다.

ㅡ즉 ‘가치와 규율이 혼란스러운 오늘날’이라는 것이다.

 

왜 그대들의 눈을 보면 그대들은 더 많은 불완전을 찾고 있다고 말하나? 더 많은 전율, 위험, 지진을 갈망한다고 보이나?

ㅡ이는 다른 사람들이 늙은 배우의 선동에 휘둘리고 있는 모습 때문에 그러하다.

ㅡ늙은 배우의 선동에 쉽게 휘둘린다는 것은 자극에 취약하다는 것이란 이야기가 된다.

ㅡ또한 저들은 사회나 자신에 대한 환멸감을 느껴서 사회를 벗어났다는 것 역시 자극에 취약하다는 것을 말한다.

ㅡ환멸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그렇게 자극받지 않았다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을 수 있지 않나?

ㅡ이러한 점으로 볼 때, 어떤 자극에 따라 이리저리 휘청이는 인물들로 보이는 것이다.

 

ㅡ반면 양심적인 자는 자극에 따라 휘청거리는 느낌이라기 보다는 올바름을 추구하며 자신의 삶을 영위하던 중에 차라투스트라를 만났다.

ㅡ그런 면에서 양심적인 자는 자극에 따라 행동한 것이 아닌 존재라고 할 수 있다.

 

ㅡ이런 차이점에 따라서 양심적인 자는 저들이 자극을 찾고 있음을, 그래서 안정되는 것보다 자극받는 불안정 상태를 바라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ㅡ자신을 고양시키거나 격앙케 하는 것을 바라고 있다는 이야기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 1권 12장」에서 비판하는 사회 속의 배우와 파리들의 모습과 같다.

      배우에게도 정신이라는 것은 있다.

      하지만 정신의 양심은 별로 없다.

      배우는 항상 그가 가장 강한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믿는다.

      다시 말해 그 자신을 믿게 만드는 것을 믿는다!

 

      그는 내일이면 새로운 믿음을, 모레는 더 새로운 믿음을 갖는다.

      대중과 마찬가지로 재빠른 감각을, 변덕스러운 날씨를 갖고 있으니.

 

      뒤집어 엎기. 이것이 배우에게는 증명이다.

      열광시키기. 이것이 배우에게는 설득이다.

      그리고 피야말로 그에게는 모든 근거들 중 최상의 근거다.

 

      배우는 섬세한 귀에만 스며드는 진리를 거짓이라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실로 배우는 세상에 커다란 소음을 불러일으키는 신들만을 믿는다!

 

왜 저들은 양심적인 자에게 두려움을 안기는, 고양하고 위험한 삶을 갈망한다고 하나? 거친 짐승의 삶, 숲과 동굴, 가파른 산과 미로 같은 협곡을 갈망한다고 하나?

ㅡ양심적인 자가 보기에 올바름을 따르지 않는 삶은 위험하다.

ㅡ왜냐면, 제대로 된 인식을 갖지 않고, 그릇됨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ㅡ그릇됨 속에서 사는 것은 거의 무지한 채로 사는 것이고 이는 차라투스트라가 말한 원숭이, 짐승 같은 삶으로 볼 수 있다.

 

ㅡ숲과 동굴, 가파른 산, 미로 같은 협곡의 경우, 탐험하거나 자극을 쫓는 영역으로 보이며, 그에 따라서 자극을 추구하는 저들의 삶과 비슷하다고 말하는 걸로 보인다.

ㅡ양심적인 자는 도전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이라고 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왜 그대들은 위험에서 건져내는 인도자가 아니라, 모든 길에서 빗나가게 유혹하는 자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하나? 왜 이것은 불가능한 갈망이라고 하나?

ㅡ현재까지의 내용으로 볼 때, 저들은 자극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ㅡ그렇기 때문에 안전한 뻔한 길을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찾거나 참신한 것을 보길 바란다.

 

ㅡ하지만 매번 자극을 쫓으며 살 수는 없기에, 양심적인 자는 이러한 갈망이 과연 언제까지고 가능하냐고 질문하는 듯하다.

 

공포에 대한 이야기는 왜 나오나? 왜 학문은 공포에서 자라난다고 하나?

ㅡ양심적인 자의 경우, 도전하지 않는 존재로 묘사가 된다.

ㅡ최대한 안전한 길로 나아가려는 존재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ㅡ그렇기에 이 존재는 안전을 얻기 위해서 행동하고 사색한다.

 

ㅡ여기서는 공포로 번역되었지만, 사실 공포 대신 두려움으로 치환할 수 있고, 이에 따라 보면 양심적인 자는 두려움에서 인간 문명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ㅡ즉 양심적인 자 자체가 두렵지 않기 위하여 무언가를 행동한 사람이고, 이 감정에 기초하여 세상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ㅡ학문이 공포에서 자라난다는 것은, 두려움에서 학문이 시작된다는 것인데, 이는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 사색을 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와 같다.

ㅡ즉 더 두렵지 않기 위해서 두려운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과정 속에서 사색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ㅡ이는 알려는 욕구가 주는 한 가지 혜택 중에 하나라서, 완전히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ㅡ알게 되면 대처하는 법을 알게 되기에, 두려움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ㅡ그래서 양심적인 자의 학문에 대한 해석은 완전히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거친 야수에 대한 공포, 내면의 짐승에 대한 두려움은 왜 언급이 되나?

ㅡ여기서 거친 야수에 대한 공포라고 번역이 되었지만, 좀 더 의역한다면 야생적인 것들 것 대한 공포라고 말할 수 있다.

ㅡ또 이는 다르게 말하면 자연에 대한 공포로 치환해볼 수 있다.

ㅡ즉 자연에 대한 공포/두려움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사색과 탐구가 있었던 것이란 이야기다.

ㅡ마찬가지로 내면의 짐승에 대한 두려움을 이해하기 위해서 덕과 죄에 대한 사색과 탐구가 있었고, 이것이 학문이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양심적인 자는 이처럼 두려움에 따른 사색과 탐구가 이어지면서 학문이 생겼다고 말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공포를 예외적인 것이라고 보는가?

ㅡ인간이 보이는 모든 도전적 행위가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 유발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ㅡ즉 일부 사람들이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 주변을 살피며 알아가기도 하지만, 도전하려는 욕구가 있었기 때문에 두려움에 맞서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ㅡ이 도전하려는 욕구가 용기인 것이다.

ㅡ정리한다면, 두려운 것이 있더라도 인간에게 용기가 있어야 탐구와 사색이 시작된다.

ㅡ따라서 학문의 기반은 두려움이 아니라 용기에 있다고 해야 더 적절한 것이 된다.

 

ㅡ또한 두렵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도전하려는 욕구가 있으면 탐구와 사색이 이뤄질 수 있으므로, 인간이 모든 두려움에 맞서기 위해서 사색하고 탐구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ㅡ우리가 흔히 갖는 호기심들은 두려움에서 유발되는 게 아니라, 새로움과 낯섬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거칠고 용기 있는 짐승들의 온갖 미덕을 시샘하여 그것들을 빼앗았다는 것은 무얼 말하나? 왜 그렇게 하여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 되나?

ㅡ짐승들의 온갖 미덕은 짐승들의 특출난 능력으로, 이를 시샘하였다는 것이다.

ㅡ그리하여 인간은 동물들이 가지던 능력, 빠르게 이동하는 능력이나 견디는 능력, 힘쓰는 능력을 얻는 법을 고안하고 이를 이용해서 문명을 이루게 된다.

ㅡ이러한 관찰과 그에 따른 응용을 통해서 인간은 현재의 인간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고, 이것이 학문으로 형성되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ㅡ이 역시 도전하려는 욕구, 용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이야기를 하던 도중 왜 모든 사람은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끊는가?

ㅡ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ㅡ즉 차라투스트라가 혼자 말을 지속하며 자신의 앎을 늘어놓는 것에 대한 반감이 작용한 게 아닌가 싶다.

ㅡ늙은 마술사/배우의 이야기를 살피더라도, 다시 즐겁게 대화하자고 이야기를 하고 있으므로, 차라투스트라의 학문에 대한 관점은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로 생각해볼 수 있다.

 

왜 사람들에게서 무거운 구름이 피어올랐다고 하는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진지하게 대화를 하는 와중에, 사람들이 끊으면서 대화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원치 않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보이고, 이는 곧 차라투스트라와 사람들 사이에 위화감이 조성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서로가 모여 있지만 바라는 바가 다른 것이다.

 

늙은 배우는 왜 사악한 정신에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를 비방하다가 다시 차라투스트라가 등장하자 즐겁게 지내자고 하는가?

ㅡ늙은 배우는 차라투스트라가 없을 때 사람들을 선동하며, 사람들의 중심에 섰다.

ㅡ그러다가 차라투스트라가 다시 등장하고, 차라투스트라가 나름의 화술을 통해서 사람들의 중심에 서고 있는 상황이다.

ㅡ이대로 두면 늙은 배우 입장에서는 사람들의 중심에 섰던 자신이 차라투스트라에게 다시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ㅡ그렇기에 늙은 배우는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끊고 즐겁게 이야기를 하자고 말을 꺼냈다고 할 수 있다.

ㅡ그래야 자신이 차라투스트라에게 수그리는 모양새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늙은 배우는 왜 자신이 그것을 만들었고, 세상을 창조하기라도 했냐고 말하는가?

ㅡ늙은 배우는 자신의 사악한 정신,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불만을 자신과 분리하는 모습을 보인다.

ㅡ이로써 그는 자신이 차라투스트라를 비방한 것은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말하며, 차라투스트라와의 관계는 회복시키려는 것이다.

 

ㅡ이를 위해서 늙은 배우는 자신이 차라투스트라를 비방하려고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은연 중에/무의식적으로 그런 것이라고 표명해야 하고, 이 때문에 자신이 만든 것도, 세상을 창조한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세상의 창조의 경우, 늙은 배우의 사악한 정신이 나타나게 하는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늙은 배우는 자신의 사악한 정신이 나타난 것은 내가 원해서 만든 것도 아니고, 그 정신이 나타날 조건 역시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사람들과 악의와 사랑으로 악수하며, 그들에게 보상하고 사죄해야 하는 사람인양 행동했을까?

ㅡ현재 상황은 늙은 배우에 의해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지 않아서 늙은 배우에게 사악한 정신이 깃든 것인양 흘러가고 있다.

ㅡ이런 점에 따라서 보면, 차라투스트라가 애초에 사람들에게 추종할 것을 잘 제시했다면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ㅡ그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늙은 배우에게 탓하지 않고, 상황을 이렇게 이끈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생각한 듯하다.

ㅡ그리고 이러한 답답함에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