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4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4권 13장 의역 (완) (더 높은 인간 2/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8. 20. 17:17

ㅡ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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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4권 13장 더 높은 인간 - 2


         
13장 11~20절 개괄

 

 

13장 11~20절의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11절의 경우, 이웃보다 자신을 사랑하라고, 미래를 사랑하라고 말하는 절이다.

다른 무엇을 위할 때보다도 미래를 위할 때, 미덕에 가까워진다고도 말한다.

 

12절의 경우, 고통의 필요에 대해서 말한다.

고통이 없다면, 출산할 시점도 말할 필요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출산하고 말하고 나면, 임산부든 시인이든 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미래를 위해서 올바름을 외친 자의 경우, 올바름을 외친 결과가 너무나 허망하기에 고통에 빠진다.

즉 「차라투스트라, 2권 22장」에서 차라투스트라가 고통스러워하던 상태에 놓이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차라투스트라는 조언을 하려고 하는 듯하다.

 

13절의 경우, 자신의 본성과 능력에 벗어나서 행동하지 말라고 하는 절이다.

즉 금욕적이지 않은 존재로 태어났다면, 금욕적이려고 하지 말고, 자신을 인정하고 그에 맞춰서 노력하며 살라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본성을 억압하는 것이 본성에 따라 사는 것보다 위험하다고 여긴 것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입장이 갈릴 수 있을 듯하다.

 

14절의 경우, 자신의 이상에 따라 살다가 실패한 자들에게 이야기한다.

인생에서 실패는 여러 차례 있을 수 있는 것이기에, 실패해도 다시 도전하라고 조언한다.

 

15절의 경우, 이상을 위해서 시도하다가 실패하는 것을 다시금 위로하고 도전하게끔 독려한다.

그러면서 천박한 문화가 아니라 훌륭하고 고상한 문화를 곁에 두면서, 긍정적인 의식을 가지라고 말한다.

 

16절의 경우, 예수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삶을 긍정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삶을 긍정하며 웃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점, 사람을 정말 사랑한다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저주하지 않으며 자신을 사랑하길 바라지도 않는다는 점을 말한다.

그러면서 이런 맹목적인 가르침을 전하는 자를 피하라고 한다.

 

17절의 경우, 인생에 곤란이 찾아오고, 효율적이지 못하게 삶이 나아가도 문제가 아니라는 조언을 한다.

진정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며 나아간다면, 웃음과 만족을 기준으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삶에 절망과 슬픔이 자리하더라도 그것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나아갈 수 있기를 요구한다.

 

18절의 경우, 차라투스트라 자신이 삶을 긍정할 줄 아는 존재라고 자칭하는 절이다.

그는 자신이 이상에 따라 행동하며, 자유롭게 사고하고, 미래를 위해서 노력하는 자라는 점에서 삶을 긍정하는 자라고 말한다.

 

19절의 경우, 자기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자들이 모두 대단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행복을 위한 노력이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해도 부조리 속에서 우스꽝스러워지는 것보다는 낫다고 한다.

그리고 행복을 위한 노력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답을 내놓으라고 한다.

 

20절의 경우,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라고 요구하는 장이다.

절망과 슬픔에서도 자유롭고, 사회적 가치과 규율에서도 자유롭고, 절망하고 슬퍼하는 자들을 미워하며, 그릇된 시야를 멀게 하는 존재를 바라고 찬양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상을 위해 나아가고 행동하는 법을 배우라고 말한다.


 

 

본문

 

 

-11-

 

가치를 평가하고 올바른 가치를 창조하는 고귀한 자들이여,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서 노력하는 법입니다.

 

그러니 이웃을 위하라는 가르침을 아무거나 쉽게 듣지 말고, 아무거나 쉽게 받아들이지 말길 바랍니다.

 

누가 여러분의 이웃이란 말입니까?

여러분이 이웃을 위한 앎을 깨우치고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미래의 이웃을 위하여 하는 행동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웃을 위하며, 이웃과 잘 지내려고, 이웃과의 평화를 목적하며 행동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러한 그릇된 관점을 벗어나야 합니다.

 

이웃을 위하여 무언가 행동한다는 것은 사회적 규율에 순응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미덕입니다.

사회에서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서로 도와야 한다고 말하죠.

그렇게 이들은 자신의 개인적 행복을 누릴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가치를 평가하고 올바른 가치를 창조하는 자들이여,

여러분들의 개인적 행복, 건강한 이기심* 안에는 임산부가 아기를 낳듯이 좋은 미래를 낳으려는 모습이 있습니다.

현재 누구도 보지 못한 이상적인 미래, 이 이상적인 미래를 여러분들의 건강한 이기심이 온전히 보살피며 키우고 있는 것입니다.

*건강한 이기심은 자신을 위해서 주변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것을 말한다.

무지한 사람들로 인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무지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 건강한 이기심이다.

차라투스트라의 경우, 부조리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기에, 사람들에게 부조리가 잘못된 것임을 가르친다.

이는 곧 이상 사회로 나아가게 하는 밑거름이 된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이상적인 미래, 여러분들이 바라는 존재들이 있는 곳,

그것을 바라보고 행동할 때 미덕이 함께 합니다.

여러분들의 과업, 여러분들의 의지가 여러분의 진정한 이웃을 알려줍니다.

그러니 이 진정한 이웃에 대한 게 아닌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상적인 미래

이상적인 미래는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려주는 기준이 된다.


 

-12-

 

가치를 평가하고 올바른 가치를 창조하는 고귀한 자들이여,

미래를 위해 올바른 이해를 외치는 자는 고통 속에 있고,

이미 미래를 위해 올바른 이해를 외친 자도 좋지 못한 상태에 있습니다.

 

아이를 낳는 여인들에게 물어보면, 즐거워서 출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산통이 오기에 출산을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면에서 고통은 우리가 이상적인 것을 찾고 노력하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치를 평가하고 올바른 가치를 창조하는 고귀한 자들이여,

여러분들에게도 고통을 주는 것이 있습니다.

고통을 주는 것들이 있기에, 여러분은 미래를 위해 올바른 것을 말하고 소리치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올바른 이해가 세상에 나타나도, 그에 따른 실망스럽고 절망스러운 일들이 세상에 생겨 납니다.

올바른 이해를 마주하고도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말입니다.

 

비켜서십시오.

이러한 실망과 절망을 이겨내야 하니 말입니다.

 

고통

산통이 있기에 아이를 낳듯이, 고통이 있기에 올바른 이해를 추구할 수 있다.


 

-13-

 

여러분의 능력을 넘어서는 덕, 여러분이 현재 가질 수 없는 불가능한 덕을 갖추려고 노력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본성을 넘어서려고 하지 마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의 본성과 여러분의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성숙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겠습니까?

 

또 선구자가 되려는 자, 미래를 위해서 노력하려는 자라면, 사회에 순응하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악한 본성/혈통을 지녔다면, 굳이 성인군자가 되려고 하지 않길 바랍니다.

만약 여자와 어울리며 술과 고기를 즐기려 하는 본성/혈통을 지닌 자가 있다고 할 때, 이 사람이 자신의 본성을 억압하며 금욕하는 것은 적절한 것이라고 봅니까?

아닙니다, 이는 자신을 옥죄는 것으로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제 생각에 이런 존재가 두 세명의 아내를 두는 남자라고 한다면, 그것도 본성을 많이 억압한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여자를 만나려고 할 테니 말입니다.

 

이러한 존재가 수도원을 세우고, 성스러움을 향해 나아가려고 한다 하더라도,

저는 이를 보고서 어리석은 짓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억압하는 곳을 세우고, 거기서 자신의 본성을 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의 의도에 따라, 잘 되길 바라지만, 그게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면 저 자들처럼 본성을 억압하고 고독 속에 있으면,

그 사람의 내면에 있는 많은 것들, 부정적인 생각이나 본성에 대한 욕망이 더 커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독은 사람들에게 해롭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금욕하는 은둔자들보다 더 변태 같은 존재들이 있었습니까?

이 금욕하는 은둔자들은 악할 뿐만 아니라 탐욕스럽습니다.

 

탐욕스러운 수도사

본성에 맞지 않게 금욕하고 절제하면, 탐욕스럽고 악해질 수 있다.


 

-14-

 

저는 여러분이 뛰어오르려 하다가 실패한 호랑이처럼,

자기 나름대로 시도를 하다 실패하여 멋쩍어 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도박하는 자들이여, 그게 무슨 대수입니까?

 

여러분은 도전과 조롱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듯합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도전하다 실패하더라도, 여전히 도전하고 조롱할 수 있게 살아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도전하고 실패했다고 해서, 이 테이블에서 쫓겨나는 것이 아니란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을하다가 실패했다고 해서, 여러분들의 삶이 실패작이 되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실패했다면?

다시 일어서서 도전하시길!

 

도박꾼

삶은 도전하는 도박장과 같지만, 다시금 시도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실패에 크게 좌절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15-

 

숭고한 목표를 지니는 존재일수록, 그 목표를 이룰 확률은 더 낮습니다.

고귀한 존재들이여, 여러분은 모두 실패한 것 아닙니까?

 

실패하였다고 좌절하지 않길 바랍니다.

실패가 무슨 큰 일입니까?

여전히 당신은 도전할 수 있습니다.

웃어 넘기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시도하다가 실패한 것은 반쯤 성공한 것인데, 왜 실패에 놀라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노력 안에서 인간의 이상적인 미래가 꿈틀대고 있지 않습니까?

이상을 향하는 힘, 이것이 당신의 노력 속에서 항아리 안에서 충돌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많은 항아리가 깨져 실패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겁니다.

 

웃어 넘기는 법을 배우시길 바랍니다.

고귀한 자들이여,

아직 많은 것들을 시도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것들이 이루어졌습니까?

 

이 세상에 사소하지만 훌륭한 것들, 완벽하고 좋은 상태에 있는 것들이 얼마나 풍부합니까?

고귀한 자들이여,

여러분의 주변을 천박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영향력은 작지만 훌륭한 것들로 둘러싸길 바랍니다.

훌륭하고 성숙한 것, 이 완전한 것들이 여러분에게 희망을 가르쳐, 부조리와 그릇됨에 상처받고 지친 여러분을 치유할 것이니 말입니다.

 

넘어지고도 웃는 사람

차라투스트라는 실패에 대해서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지 말고

다시 도전할 기회가 있으니 웃어 넘기라고 한다.


 

-16-

 

이 세상에서 지금까지 가장 큰 죄가 무엇이었습니까?

    “지금 웃고 있는 자에게 화가 있으리라!*”

이 말처럼 세상을 살며 웃는 것 아니었습니까?

*이는 진지하게 삶과 자신을 살피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저 먹고 마시며 즐기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하는 말이다.

성경에서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누가복음 6장 25절.

 

이 말을 한 사람*은 이 세상을 살면서 웃을 이유를 찾지 못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그는 웃을 이유를 찾기 위해서 제대로 노력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이와 같은 자도 웃을 이유를 찾아낼 수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를 말한다.

 

그는 서로를 사랑하라고 말했지만, 그는 사랑이 충만하지 않은 존재였습니다.

만약 사랑이 충만한 존재였다면, 지금 웃고 있는 자들인 우리를 사랑했겠지요.

그가 보인 모습을 보십시오.

그는 우리를 미워하고 조롱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서 우리에게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사랑할 수 없다면, 저주를 퍼붓는 것.

저는 이것이 좋은 취향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했죠.

그는 천박한 혈통 속에서 태어나 우리에게 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간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이 사랑받지 않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화를 내지 않았을 테니까요.

 

모든 위대한 사랑을 베푸는 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길 바라지 않습니다.

그것은 교조화* 되는 것이니까요.

위대한 사랑을 나누는 자는 사람들이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이상을 위해서 노력하기를 바라니까요.

*교조화되면, 고정된 관점을 가지게 되는 문제가 생긴다.

이에 따라서 올바른 인식이 어려워지기에, 차라투스트라는 교조주의를 비판한다.

 

그러므로 사랑을 베풀면서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하는 맹목적인 자는 피하시길 바랍니다.

이런 사람은 미숙한 존재, 탐욕에 병든 존재로, 군중의 일부입니다.

 

그들은 세상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그러면서 현생에서 하는 노력을 무의미하게 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맹목적인 자, 자신을 사랑하라고 하는 자를 피하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자유로운 사유를 할 줄 모르며, 불편하게 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이상에 따라 행동할 줄 모릅니다.

이런 존재가 어떻게 이 현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희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사랑에 집착하는 남자

차라투스트라는 위대한 사랑을 하는 자는 자신을 사랑하게 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면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면, 피하라고 한다.


 

-17-

 

진정 좋은 것들은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구불구불하게 나아갑니다.

효율적으로 반듯하게 나아가는 것이 분명 좋지만, 효율을 추구하다 보면 잃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죠.

이러한 것을 과연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진정 좋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웃게 하는 것일 겁니다.

 

발걸음을 보면 그 발걸음의 주인이 어떤 길을 나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자신의 목표에 근접해 있는 자는 단지 걷는 것이 아니라 춤까지 춥니다.

춤을 추고 있는 제 발걸음을 보십시오!

 

저는 석상처럼 경직된 정신을 가지고 여기에 서있지 않습니다.

저는 되려 자유롭게 나아가는 정신을 바라고 좋아합니다.

 

삶을 살며, 절망하고 슬픔에 빠질 수 있겠지만,

삶을 긍정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자는

이런 절망과 슬픔을 빙판 위로 미끄러져 나아가듯이 춤을 추며 나아갑니다.

 

나의 형제들이여,

자유로운 정신을 가져서 자신의 심장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이제까지 배운 것에 따라 살아가지 말고, 당신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기를!

그래서 당신의 심장이 당신을 지배하기를!

 

둥글게 몸을 세운 고양이

목표를 성취해 가는 과정이 직선적이면 효율적이어서 좋기는 하지만, 

그 과정에서 놓치는 것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이를 차라투스트라는 몸을 둥글게 하는 고양이로 비유한다.


 

-18-

 

자신의 삶과 운명을 긍정할 줄 아는 자의 왕관, 이 장미 왕관

저는 스스로 이 왕관을 썼습니다.

이제 제 운명을 긍정하게 될 줄 알게 되었다고 여겨서 스스로 쓴 것입니다.

 

오늘날 저는 이 왕관을 쓸 만큼 삶을 긍정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상에 따라 행동할 줄 아는 자로서,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서 자유롭게 사고할 줄 아는 자로서,

그렇게 자유로운 자들에게 손짓하는, 미래를 바라는 가벼운 자로서,

웃어 넘길 줄 아는 자로서,

조급하지 않고 묵묵히 나아가는 자로서,

지배하려 들지 않는 자로서,

도약하고 성장하는 것을 사랑하는 자로서,

 

저는 저 스스로 삶을 긍정할 줄 아는 자의 왕관을 썼습니다.

 

장미 면류관

자신의 삶과 운명을 긍정할 줄 아는 자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이다.


 

-19-

 

나의 형제들이여,

자유로운 정신을 가져서 자신의 심장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이제까지 배운 것에 따라 살아가지 말고, 당신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기를!

그래서 당신의 심장이 당신을 지배하기를!

 

자신의 심장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마냥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애초에 자신의 행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서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우스꽝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죠.

 

하지만 자신을 갉아먹는 불행 속에서 우스꽝스러운 노력을 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우스꽝스럽지만 노력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게서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최악의 존재라 하더라도 정신을 지니고 있고, 그래서 스스로 사유할 수 있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고귀한 자들이여,

스스로 사유하는 법을 배우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대중이 빠지는 불행과 슬픔을 벗어나기를!

오늘날 이 부조리한 사회 속의 광대들이 얼마나 슬퍼 보이는지!

 

그럼에도 현 시대는 천박한 자들의 시대이군요.

 

물구나무 서기를 하는 코끼리

행복을 추구하며 노력하는 과정이 그렇게 멋있어 보이지 않더라도, 부조리함 속에서 노력하며 사는 것보다는 낫다고 한다.


 

-20-

 

동굴에서 빠져나온 거센 바람처럼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사회적 규율과 가치 속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무거운 짐을 지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는,

이 선하고 자유로운 정신을 찬양하십시오!

 

이 시대의 모든 천박한 자들에게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올바름을 말하는 자,

회의적인 자와 생각이 많기만 한 존재, 부조리에 순응하여 의욕을 잃은 존재를 적대시하는 자

이 거칠고 자유로운 정신을 찬양하십시오!

 

절망과 슬픔 위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이상을 바라는 자,

염세적이고 절망하는 자들을 미워하는 자,

이러한 자유로운 정신을 찬양하십시오!

 

이 자유로운 영혼은 그릇된 시야를 가진 자들의 눈을 멀게 하는, 웃음이 가득한 존재입니다.

 

고귀한 자들이여,

여러분들의 문제점은 여러분들 모두가 자신을 극복하며 이상에 따라 행동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실패한 것이 무슨 대수입니까?

아직 얼마든지 기회가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극복하고 삶을 긍정하는 법을 배우시길 바랍니다.

 

부드러운 돌풍

자유정신은 그릇된 시야를 가진 자들이 더는 그릇된 시야를 갖지 않게끔 그들의 그릇된 눈을 멀게 한다.


생각해볼 거리들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의 아이를 잉태할 뿐이란 건 무슨 말인가?

ㅡ이는 사람의 이기성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인다.

ㅡ후술되는 내용에 따르면, 이웃을 위해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ㅡ이에 따라서 해석해 본다면,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 자신의 아이에 대한 것만을 품는다는 이야기로 해석해볼 수 있다.

ㅡ또는 자기 자신의 아이만을 가질 수 있으므로, 타인을 위한 것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로 전개할 수 있다.

 

누가 그대들에게 이웃이란 말이냐고 묻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대들이 이웃을 위해서 행동한다지만, 그것이 이웃을 위해 창조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ㅡ현재 고귀한 자들이 이웃을 위해 행동하고 있다.

ㅡ그런데 그것이 이웃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ㅡ이는 이웃의 의미가 이중적이라고 볼 수 있게 하는 것인데, 차라투스트라는 이웃을 두고서 미래의 존재를 가리키기도 하고 현재의 주변인을 가리키기도 한다.

 

ㅡ고귀한 자들의 경우, 미래의 이상 사회의 존재들을 위해서 행동하고, 현재의 부조리한 주변인들을 위해서는 행동하지 않는 자들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위해서”라는 표현을 잊으라고 하나? 왜 고귀한 자들에게 “위해서, 때문에, 왜냐하면”을 가지고 무언가를 하지 말라고 하나?

ㅡ무언가를 바라고 목적하면서 하는 행동은 순수하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미래를 위해서 행동하므로, 여기서 말하는 바라지 말아야 할 목적은 주변인이나 사욕을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웃을 위해서는 왜 왜소한자들의 덕이며, 저들에게는 서로 도와야 한다는 말이 통하나? 왜 저들은 사욕을 누릴 권리도 힘도 없나?

ㅡ이웃을 위한다는 것은 현재의 사회에서 추천하는 덕이다.

ㅡ현재의 사회는 부조리한 것을 추천하고 있으므로, 부조리한 덕에 해당된다.

ㅡ이웃을 위하는 것이 문제되는 이유는 개인의 행복을 무시하게 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ㅡ저들에게 왜 서로 도와야 한다고 하냐면, 그래야 사회의 평화가 유지되기 떄문이다.

ㅡ그렇게 하여 평화 속에서 안락함을 누리고 싶어하는 것이다.

 

ㅡ저들의 경우, 사욕/개인적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ㅡ그렇기에 애초에 그걸 바라지도 않으므로, 자신의 행복을 위한 어떤 권리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왜 창조하는 자들의 사욕에는 산모의 조심과 예감이 있나? 아직 눈으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결실을 창조하는 자들은 왜 사랑으로 감싸고 보살핀다고 하나?

ㅡ창조하는 자들은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는 자들이고, 이를 위해서 가치를 분석하고 내놓는 자들이다.

ㅡ이들은 이상적 미래를 출산하려는 산모로 비유될 수 있다.

 

ㅡ이들이 추구하는 이상적 미래는 아직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ㅡ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결실을 보려고 노력한다.

ㅡ이러한 애정 어린 노력을 말하고 있다.

 

왜 창조하는 자들의 사랑이 있는 곳, 창조하는 자들의 아이 곁에 창조하는 자들의 덕 전부가 있다고 하나? 왜 이들의 과업과 의지가 이웃이 되나?

ㅡ창조하는 자들의 사랑이 있는 곳은 이상적인 미래다.

ㅡ이상적인 미래는 창조하는 자들이 낳으려고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ㅡ그러므로 이상적인 미래가 창조하는 자들의 덕을 전부 제공한다고 말하고 있는 구절이다.

ㅡ이상적인 미래를 기준으로 놓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ㅡ앞서 말한 대로 정말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면, 그 사랑해야 할 이웃은 창조자들에게 있어 이상적인 미래가 된다.

ㅡ그렇기에 이들의 과업과 의지가 이웃이 된다는 표현이 나온다.

 

왜 아이를 낳아야 할 자는 병들어 있고, 아이를 낳은 자는 정결하지 않다고 하나? 즐거워서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란 이야기는 무얼 말하나? 산통이 암탉과 시인들을 꼬꼬댁거리게 한다는 건 뭘 말하나?

ㅡ이 구절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산통이 암탉과 시인들을 꼬꼬댁 거리게 한다는 것을 살펴야 한다.

ㅡ그래서 본다면, 암탉과 시인들이 뭔가 말하는 것은 산통/고통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ㅡ즉 고통이 있어서 무언가 말한다는 것인데, 이는 고통이 어떤 창조의 원인이라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아이를 낳는 것도 즐거워서 낳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점으로 볼 때, 아이를 낳는 것은 산통 이후에 아이를 낳는다는 점에 착안하여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고통은 무언가를 낳거나 생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ㅡ그런 점에서 보면, 아이를 낳아야 할 자는 고통받는 상태에 있어야 한다.

ㅡ여기서 아이를 올바른 이해, 올바른 가치의 창조라고 본다면, 올바른 가치를 만들어 내는 사람은 고통받는 상태여야 한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그래서 병들어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

ㅡ왜 아이를 낳은 자는 정결하지 않을까?

ㅡ우선 여기서 아이를 낳은 자는 실제 아이를 낳았다기 보다는 올바른 이해를 세상에 퍼뜨린 자로 보아야 할 듯하다.

ㅡ세상에 올바른 이해를 퍼뜨린 자의 경우, 올바른 이해를 퍼뜨렸음에도 불구하고 실망하게 되는 상황에 놓인다.

ㅡ왜냐면 사람들이 올바른 이해를 공감하기는 하지만, 그에 따라서 살 노력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ㅡ그래서 이 올바른 이해를 낳은 사람은 실망하고 절망하는 상태에 놓이게 되는데, 이것을 정결하지 않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ㅡ후술되다시피, 창조하는 자에게 정결하지 않은 것이 많이 있다는 것은 결국 올바른 이해를 가지는 운명이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새로 태어난 아이와 함께 왜 많은 오물이 세상에 온다고 하나? 아이를 낳은 자가 자신의 영혼을 씻어내야 한다는 건 뭘 말하나?

ㅡ새로 태어난 아이는 발설된 올바른 이해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올바른 이해가 퍼지자, 그에 따라서 오물이 온다는 이야기로 보인다.

ㅡ여기서 말하는 오물은 기피하고 싶은 것, 좋지 못한 것을 말하는데, 올바른 이해를 전하고 나서 기피하고 싶고 좋지 못한 것은 올바른 이해가 왜곡되거나 반영되지 않는 것일테다.

ㅡ그런 면에서 올바른 이해를 낳은 자는 그러한 결과에 침울해지고 절망할 수 있는데, 이 침울함과 절망을 씻어내야 한다는 이야기로 보인다.

ㅡ그리고 이는 영원회귀를 통해서 가능하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조상의 덕이 걸었던 길을 따르라고 하나?

ㅡ여기서 언급되는 조상은 혈통/본성을 말한다.

ㅡ즉 유전된다고 여겨지는 성향적 특징을 말하는 것이다.

ㅡ다시 말해, 자신의 본성에 따르라는 이야기인데, 이는 결국 자기 본성을 굳이 억압하지 말란 이야기다.

 

ㅡ자기 본성을 억압하는 것은 바보짓으로 취급되는데,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이 순결을 바라게 되면, 더 악하거나 기이해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ㅡ그러므로 차라리 본성에 맞춰서 세상을 살려고 하고, 그러면서도 본성에 따라 정도를 걸으려고 하면 성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ㅡ그래서 자신의 본성을 굳이 억압하지 말고, 본성에 따라 나아가라고 하는 것이다.

 

맏이가 되기를 원하는 자는 왜 막내가 되지 않도록 하라고 하나?

ㅡ맏이는 선구자, 앞서 나아가는 자를 말한다면, 막내는 따라가는 자를 말한다.

ㅡ막내가 따라가는 자라면, 무엇을 따라갈까?

ㅡ여기서 따라가는 것은 사회적 규율이라고 볼 수 있다.

ㅡ그러므로 시대의 선구자로서 이상 사회로 나아가는 존재가 되려고 한다면, 사회적 규율이나 상식에 따르지 않는 존재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조상의 악덕이 있는 곳에서 성자인 척하려고 하지 말라고 하나?

ㅡ조상의 악덕은 본성의 악함이다.

ㅡ즉, 본성이 악하면서 성자인 척하려고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ㅡ이러한 니체의 입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ㅡ왜냐면 악덕한 자에게 악덕하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ㅡ그러면 범죄를 종용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ㅡ하지만 이와 관련해서 차라투스트라는 악덕한 자가 악덕하지 않게 행동해서 나타나는 기이한 모습들이 더 문제된다고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

 

조상이 여자와 포도주, 멧돼지 고기를 즐겼는데, 자신이 순결하기를 바란다면 왜 바보짓이라고 하나?

ㅡ본성 자체가 향락을 즐기는 존재인데, 그것을 억압하고 순결하려고 하면 삶이 고되진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 자가 두 세 여자의 남편이라면, 그것은 왜 바보짓인가?

ㅡ현재 내용에 따르면, 그런 자는 향락을 즐기는 자이므로, 두 세명의 아내로는 만족하지 못할 것이란 이야기로 보인다.

 

그런 자가 수도원을 세우고, 성자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면, 왜 이 자는 자기 자신을 위한 감옥과 피난처를 세운 게 되나?

ㅡ그런 자는 현재 수도원을 통해서 자기 본성을 억압하려고 하는 상태에 있는 자다.

ㅡ그러면 자기 본성을 감옥에 가두는 꼴이 되기에, 수도원은 감옥이 된다.

ㅡ또 자기 본성을 피하기 위해서/따르지 않기 위해서 수도원을 세운 것이므로 결국 수도원은 자기 본성을 피하는 곳이 된다.

ㅡ이러나 저러나 자기 본성을 거부하는 곳으로서 수도원을 세운 거라고 할 수 있다.

ㅡ그렇기에 차라투스트라는 부정적으로 전망한다.

ㅡ본성을 억압하는 것이 잘 될 리가 없다는 것이다.

 

고독 속에는 고독한 자가 가져온 것이 자라난다는 것, 내면의 짐승 역시 그런다는 것은 뭘 말하나? 이런 모습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고독을 단념한 것이다.

ㅡ고독한 상태에 놓이면, 개인은 자신의 부정적 생각이나 본성에 대한 충동이 더 커지게 된다.

ㅡ상황이 이러한데, 자신의 부정적 생각이나 본성을 이겨낼 수 없다면, 그것에 압도당하여 괴로움을 느끼게 될 것이고, 이에 따라서 사람들은 고독을 피하려고 하게 된다.

 

왜 광야의 성자보다 더 불결한 자들이 지상에 없었다고 하나? 악마만 어슬렁거린 것이 아니라, 돼지도 그렇다고 하나?

ㅡ광야의 성자는 앞서 본성을 억압한 자를 지칭한다.

ㅡ이들은 자신의 본성을 억압하면서 점점 기괴한 내면을 가지게 되는데, 이때의 내면이 악하고 탐욕스럽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그대들은 주사위 놀이를 하는데, 어떻게 놀이하고 조롱해야 하는지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고 하나? 조롱과 유희를 위해 마련된 탁자에 늘 앉아 있다는 건 뭘 말하나?

ㅡ주사위 놀이는 여기서 도전하는 것을 말한다.

ㅡ그런데 문제는 주사위 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도전을 하고 나서 좌절하고 슬그머니 도망친다는 것이다.

ㅡ이들이 도망치는 이유는 자신의 실패로 인하여 조롱받을 것이라는 예측, 더 무언갈 하기엔 자신은 역부족이라고 보는 예측 때문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주사위 놀이는 주사위 놀이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한 반복할 수 있는 것이므로, 너무 실망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한다.

 

ㅡ삶이 끝나지도 않았고, 자신의 삶에서 도전하고 실패하였다고 해도, 그것이 무의미한 게 아니란 점을 말하는 것이다.

ㅡ그 노력은 후대로 이어져서 긍정적 결과를 낳을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현재 사는 사람들이 과거의 사람을 구원하는 방법이기에, 실패에 너무 큰 좌절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더 높은 종에 속할수록 성공하는 경우도 드물다는 건 뭘 말하나?

ㅡ여기서 말하는 더 높은 종은 더 높은 의식/목표를 지니는 존재를 말한다.

ㅡ쉽게 이르기 어려운 숭고한 목표를 지니는 경우, 그것이 성공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이야기다.

 

마땅히 웃어야 하는 방식으로 자신에 대해 웃어주는 법을 배우라고 하는데, 뭘 말하나?

ㅡ여기서 말하는 마땅히 웃어야 하는 방식은 웃어 넘기는 모습을 말한다.

ㅡ자신의 실패나 절망적인 상황에 대해서 웃어 넘겨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ㅡ실패에 대해서 너무 크게 여기지 않으려면, 실패의 의미와 가치를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ㅡ이를 위해서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후대의 자신이 구원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ㅡ이를 생각해내기가 쉽지 않으므로, 이상을 위해 노력하던 사람들은 불안해하는 것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런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게끔 안목을 키우라고 말하는 것이다.

 

항아리는 무엇을 말하나? 왜 항아리 안에서 거품을 내고 있는가? 왜 항아리가 부서져도 놀랄 일이 아닌가?

ㅡ여기서 언급되는 항아리는 이상을 위해서 노력하는 자일 수도 있고, 이상을 위해서 노력했던 순간을 말할 수도 있다.

ㅡ어떻든 이상을 위해서 노력하다 보면, 별별 일이 생기는데,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고, 노력한 자신이 절망하는 상황에 이를 수도 있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그것들이 다 유의미하고, 또 자주 그러므로 놀랄 만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이 대지에 자그마하고 좋고 충만한 것들로 풍요롭다고 하는가?

ㅡ대지는 현재의 세상을 말하는데, 이미 현재의 세상에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인하여, 좋은 앎이나 진리가 자리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세상이 이런 노력의 반복이라고 본다.

ㅡ시도하고 무너지고의 반복인 것이다.

 

ㅡ그러면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숭고한 노력들을 곁에 두고서 희망을 의식하며 나아가라고 말한다.

 

지상에서 웃어야 할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은 무얼 말하나? 왜 제대로 찾지 않았다고 하나?

ㅡ현생을 긍정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ㅡ즉 현생을 부정하며 내세를 긍정했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의 경우, 현생을 긍정하는 법을 가르치기에, 현생을 긍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제대로 노력하지 않은 사람이 된다.

 

모든 위대한 사랑은 왜 사랑을 바라지 않나? 사랑 이상의 어떤 것을 원하나?

ㅡ여기서 언급되는 위대한 사랑은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에게 행한 것으로, 타인에게 앎을 선사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ㅡ이러한 사랑이 나타나는 이유는 이상적 미래를 위해서다.

ㅡ그래서 정확히는 이상적 미래에 대한 차라투스트라의 사랑에 사람들이 혜택을 보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고, 이것을 위대한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면서,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이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ㅡ즉 자신을 사랑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베푼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이상을 위해 노력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ㅡ따라서 내용상 언급되는 ‘그’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저런 무조건적인 자는 무얼 말하나? 왜 가난하고 병든 부류라 일컬어지나? 왜 삶을 나쁘게 보며, 대지에 대한 사악한 시선을 가진다고 하나?

ㅡ자신만을 사랑하라고 말하는 자인데, 이는 기독교의 예수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ㅡ가난하고 병든 부류로 불리는 이유는 정신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상태, 빈곤한 상태이다보니 자신만을 사랑하게 만드려고 하는 것이라고 봐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ㅡ예수의 경우, 현생이 부조리로 고통만을 준다고 보기에, 삶을 나쁘게 본다고 표현될 수 있다.

ㅡ또 현생에서의 노력보다는 내세를 위한 노력을 중시하므로, 대지라는 현생에 노력하지 않게 하는, 현생에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조건적인 자를 피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들은 무거운 발과 후텁지근한 심장을 지녔다고 언급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ㅡ무조건적인 자는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하는 특징에 따른 표현으로 보인다.

 

ㅡ무거운 발의 경우, 가벼운 발의 대비 개념으로 보인다.

ㅡ즉 사회적/종교적 규율에 순응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ㅡ후텁지근한 심장의 경우, 정확하지 않으나, 그릇된 이해나 가치관으로 인하여 답답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ㅡ즉 규율에 순응하며 답답한 가치에 따라 생활하는 존재를 지칭하는 듯하다.

 

모든 좋은 것들은 왜 목표에 구불구불 다가가나? 고양이처럼 등을 둥글게 하고 행복 앞에서 갸릉거린다는 것은?

ㅡ목표에 직선적으로 다가가는 것은 효율적으로 다가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개인은 효율성 외에는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ㅡ이를 지적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목표로 향하는 이러한 구불거림을 고양이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입상이 되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은?

ㅡ정신이 경직된 채로 사고하거나 생활한 적이 없다는 것으로 보인다.

 

빨리 달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무얼 말하나?

ㅡ질주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인데, 무언가 얽매거나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즉 규율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뉘앙스로 보인다.

 

대지 위의 늪과 비탄은 무얼 말하나?

ㅡ늪은 절망을 말하는 걸로 보이고 비탄은 슬픔을 말하는 걸로 보인다.

ㅡ즉 절망과 슬픔이 있어도, 이에 크게 흔들리지 않으며, 나아간다는 이야기 같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심장을 높이 들어 올리라고 하나? 왜 머리를 땅으로 보내려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의 경우, 「차라투스트라, 서문 4장」에서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자신의 신체적 반응, 좋고 나쁨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중시하라는 이야기를 한다.

     나는 사랑하노라.

     자유로운 정신과 자유로운 심장을 지닌 자를.

     그의 머리는 심장의 내장일 뿐이고, 그의 심장은 그를 하강으로 내몰아대니

ㅡ이에 따라서, 심장을 높이 들고, 머리를 땅으로 보낸다는 것은 심장을 더 높은 가치로 두고서 행동한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즉 생각으로 행동하지 말고,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자신의 감정과 무의식에 충실하라는 이야기다.

 

웃는 자의 면류관은 무엇을 말하나?

ㅡ자신의 삶과 운명을 두고 웃는 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웃음이 신성하려면, 자신의 삶과 운명을 긍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도약과 탈선을 사랑하는 자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서 올바름을 향해 성장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행복 속에서도 몸이 무거운 짐승 이야기는 왜 하나?

ㅡ여기서 행복은 개인의 행복으로, 자신만의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ㅡ그런데 이 개인의 행복을 향해 나아감에 있어서 능력이 부족할 수 있고, 더딜 수도 있다.

ㅡ이런 모습은 타인이 보기에 “그냥 규율에나 따라 살지”라는 생각을 가지게 할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런 생각이 드는 어수룩한 개인이더라도, 불행 속에서 순응하며 사는 것보다 더 낫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왜 가장 고약한 것이라도 두 가지 좋은 이면을 지니고 있나고 하나?

ㅡ여기서 말하는 두 가지 좋은 이면을 자기 다리로 서는 것을 말하려고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ㅡ즉 두 다리를 지녔다는 것을 두 가지 좋은 이면이라고 말한 듯하다는 것이다.

 

ㅡ또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여기서 다리는 스스로 사유하는 것을 말하는데, 스스로 사유하는 과정은 자신의 심장/신체를 두고 정신을 통해 분석하는 것을 말한다.

ㅡ그런데 모든 인간은 신체와 정신을 지니고 있으므로, 아무리 고약한 인간이더라도, 신체와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표현해봄직하다.

 

천민의 어릿광대는 왜 차라투스트라에게 슬퍼보이는가?

ㅡ어릿광대들이 이상에 따라 살지 못하고 있는 불쌍한 존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바람같이 행동하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바다가 바람의 발자국 아래에 있다는 건 뭘 말하나?

ㅡ바람의 경우, 자유로운 정신을 말한다.

ㅡ따라서 바람같이 행동하라는 것은 사회적 규율이나 상식에서 벗어나서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이야기다.

 

ㅡ바다의 경우, 소금물의 바다로 사회를 말하는데, 바람은 이 바다 위에 있으므로, 사회적인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말한다.

 

나귀들에게 날개를 주고, 암사자들의 젖을 짜는 건 뭘 말하나?

ㅡ자유로운 정신을 지닌 자는 무거운 짐, 사회적 규율이나 가치를 따르는 자들이 가볍게 살라고 가르친다.

ㅡ그런 점에서 날개를 준다고 할 수 있다.

 

ㅡ암사자의 젖의 경우, 암사자는 지혜를 나타내는데, 이 지혜를 통해서 이상적인 미래를 낳게 된다;「차라투스트라, 2권 1장」

     아, 그대들을 양치기의 피리로 유혹해 되돌리는 법을 내가 안다면!

     아, 지혜라는 내 암사자가 상냥하게 으르렁거리는 법을 배웠다면!

     그런데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함께 배우지 않았던가!

 

     내 거친 지혜는 고독한 산 위에서 잉태되었다.

     그리고 험준한 바위에서 자신의 새끼를, 가장 어린 새끼를 낳았다.

 

     이제 내 거친 지혜는 황량한 사막을 바보처럼 달리면서 부드러운 풀밭을 찾

     고 또 찾는다.

     내 늙고 거친 지혜는!

 

     내 벗들이여, 그대들 심장의 부드러운 풀밭 위에, 그대들의 사랑위에 내 늙고

     거친 지혜는 가장 사랑하는 새끼를 눕히고 싶은 것이다!

ㅡ암사자가 지혜라면, 지혜의 젖을 짠다는 이야기고, 암사자의 새끼인 이상 사회를 기르고 키우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ㅡ결국 암사자의 젖을 짠다는 것은 이상을 위해서 노력하는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엉겅퀴처럼 가시 돋친 머리와 꼬치꼬치 신경 쓰는 머리를 적대시한다는 것은 뭘 말하나? 시든 잎과 잡초는 뭘 말하나?

ㅡ가시 돋친 머리는 회의적인 존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꼬치꼬치 신경 쓰는 머리는 생각만 많은 존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시든 잎과 잡초는 생기를 잃은 상태를 말하는 걸로 보이는데, 이는 사회에 의해 절망하고 있는 존재를 말한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ㅡ자유로운 정신을 지닌 존재는 이러한 인물들에 대해서 좋게 평가를 하지 않으므로 지적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천민이라는 바짝 마른 개와 실패한 음울한 패거리는 누구인가?

ㅡ천민이라는 마른 개는 일반적인 대중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또 실패한 음울한 패거리의 경우, 염세적인 존재, 회의적인 존재를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ㅡ왜냐면 세상에 노력하다가 좌절한 존재들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데, 그런 경우 염세주의자나 회의주의자가 되기 때문이다.

 

왜 자유로운 정신은 매사를 어둡게 보는, 곪게 만드는 자들의 눈에 먼지를 불어넣는 폭풍인가?

ㅡ매사를 어둡게 보고 곪게 만드는 자들은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그릇되게 이해하는 존재들을 말한다.

ㅡ이런 존재들에게 자유로운 정신을 올바른 이해를 전하고, 그릇된 것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므로, 그릇된 것을 보던 눈을 멀게/감게 한다고 할 수 있다.

ㅡ그에 따라서 먼지를 넣는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