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4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4권 17장 의역 (완) (깨우침,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8. 24. 15:59

ㅡ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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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4권 17장 깨우침


         
17장 개괄

 

17장은 그림자의 사막의 딸에 대한 시를 읊고 나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막의 딸의 내용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와 관련한 진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17장 서두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의 모습은 즐겁기만 하다.

이러한 점은 차라투스트라에게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왜냐면 차라투스트라는 마냥 웃으며 즐겁게 놀기 보다는 진지하게 서로 생각을 나누는 것을 더 선호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서 사람들을 언짢아 하지만, 이내 자신의 저녁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러면서 이상적인 미래에 대한 징조로서 나름 괜찮은 하루를 보내고 있다며 자평한다.

 

그러나 2절에서부터 상황은 달라진다.

사람들이 당나귀를 신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생각이 들 수 있는데, 하나는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에 일치하는 상항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우선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차라투스트라의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존재로 거듭나라는 가르침과 위배된다는 점이라서, 대체로 해석은 이렇게 빠진다.

하지만 실제로 당나귀를 놓고 전개되는 기도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에게 보인 모습과 비슷하다.

그런 점에서 2절의 상황은 처음엔 차라투스트라에게 반감을 사는 요소로 보여 질 수 있지만, 점차 차라투스트라에게 납득이 되는 상황이 된다.

이는 이후의 장들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당나귀에 대한 숭배는 단순히 부정적 의미로서의 숭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본문

 

 

-1-

 

그림자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동굴은 웃음 소리와 함께 소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이 서로 동시에 말하며 당나귀마저 들떠버리자, 차라투스트라는 약간 언짢아졌다.

하지만 내심 좋기도 했는데, 그들의 지금 모습이 절망에 빠졌던 그들이 나아지고 있는 회복의 징후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동굴 밖으로 나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신의 동물들에게 말했다.

    “저들은 내 동굴에 오기 전까지 절망의 고통 속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는데

     내 동굴에 와서는 절망이 사라진 듯하구나.

     아직 소리지르는 것은 여전하지만."

 

그리고 동굴에서 당나귀의 “예-“하는 울음소리와 사람들의 이상한 환호 소리에 차라투스트라는 말을 멈추고 귀를 막았다.

차라투스트라가 다시 말했다.

    “저들은 즐거운가 보구나.

     내가 희생하였기에 저들이 즐거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들이 나를 통해 웃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저들의 웃음은 내가 늘 말하던 웃음이 아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저들은 나이가 든 사람이니, 자신만의 방식이 있고, 그래서 그에 따라 회복하고 웃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나는 더 불쾌한 소리도 들었고, 그에 휘둘리지 않았던 자 아닌가?

 

     오늘은 승리의 날*이다.

     사회적 규율을 벗어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있으니 말이다.

*사회 속의 인물들이 차라투스트라에게로 온 것이므로, 부조리한 사회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날이 된다.

 

     오늘 하루가 우울하게 시작한 것에 비해 잘 끝이 나고 있는 듯하다.

     만족스러운 저녁이 오고 있다.

 

     맑은 하늘이 자줏빛 저녁으로 물들고, 세상은 이 자줏빛 저녁 속에 감싸여

     있다.

     오, 내게 온 너희 별난 자들이여,

     내 곁에서 사는 것은 보람있는 일이지 않은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자줏빛 저녁

차라투스트라는 손님들에게 완전히 만족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만족하려고 노력한다.


 

그때 동굴에서 고귀한 자들의 외침과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말했다.

    “그들은 내가 세상에 뿌린 나의 앎에 이끌려 이곳에 왔다.

     나의 앎들을 뿌린 것이 효과를 보이고 있구나.

     저들에게서도 그릇된 이해와 가치가 사라지고 있나 보구나.

 

     이들은 자신에 대해서 긍정하는 법을 배운 모양이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겠지?

 

     내가 저들에게 제공한 가르침과 아포리즘이 효과를 보고 있구나.

     나는 저들에게 헛똑똑이가 되는 것들은 일절 제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올바름을 위해서 나설 수 있는 존재로서 대하고 가르쳤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저들은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이 새로운 희망이 그들에게 퍼져 의욕을 가지게 되었다.

     이로써 그들은 새로운 가치를 찾을 것이며, 그들의 정신은 자유로이 사색하게 될 것이다.

 

     나의 가르침과 아포리즘은 아직 미숙한 아이들과 포용력이 강한 여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가르치고 설득해야 한다.

     나는 이들을 가르치고 치유하는 자가 아니니 말이다.

 

     저 고귀한 자들에게서 부조리에 따른 역겨움이 사라지고 있다.

     이것이 부조리와의 다툼에서의 승리가 아닌가?

     나의 영역에서 저들은 부조리로부터 안전해지고, 그릇된 수치심은 사라지며,

     자신을 억압하던 것들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모습을 찾을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솔직해지며, 그리하여 저들에게 다시 오늘의 좋은 시간들이 찾아올 것이다.

     그들은 다시 오늘의 좋은 시간을 축하하고 되새기며 감사할 것이다.

 

     나는 이것을 이상적 미래에 대한 최고의 징조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분명 내게 감사하게 될 것이다.

     머지 않아 저들은 미래를 위해서 노력하는 존재가 될 것이고, 지금의 기쁨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를 세울 것이다.

 

     이들은 절망 속에서 건강을 되찾은 자들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내심 기뻐하며 마음 속으로 말했다.

그리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차라투스트라의 동물들은 차라투스트라에게 다가와, 그가 조용히 행복감을 느끼는 모습에 경의를 표했다.

 

미끼에 몰려든 물고기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가르침에 따라 몰려든 사람들을 보고 희망을 느낀다.


 

-2-

 

그런데 갑자가 소란과 웃음으로 가득 찼던 동굴이 죽은 듯이 조용해졌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정적에 깜짝 놀랐다.

그는 동굴에서부터 피어나오는 연기와 향기로운 향냄새를 맡았는데, 그것은 솔방울을 태울 때 나는 향 같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가 자신에게 물으며 입구로 몰래 다가가 그들을 살폈다.

동굴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었다.

 

     “이들은 모두 미친 것인가? 다시 신앙심을 가지고서 기도하고 있다니!”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의 터무니없음에 당황해하며 말했다.

 

차라투스트라의 손님들,

그러니까 두 명의 왕과 은퇴한 교황,

사악한 배우와 부를 버린 자,

그림자와 절망의 예언자,

사람들에게 교양을 나누는 자와 자기를 경멸하는 추악한 자.

이들이 모두 아이들처럼, 신앙심이 깊은 노파들처럼 무릎을 꿇고 당나귀를 숭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가장 추악한 자가 자신의 내부에서 무언가 솟구치는 것처럼 울컥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가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당나귀를 찬양하는 기이하면서도 신앙심이 깊은 기도문이었다.

그 기도문은 이러했다.

 

연기 속에서 기도하는 자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손님들은 당나귀를 두고 추앙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아멘!

우리의 신에게 찬미, 영예, 지혜, 감사, 영광, 권능이 있을 지어다.

당나귀*가 "예-"하고 대답했다.

*니체는 당나귀의 모습과 부조리한 사회에서의 위버멘쉬의 모습이 비슷하다고 본 듯하다.

그에 따라 여기서 서술되는 당나귀에 대한 찬양은 위버멘쉬의 특징을 담고 있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자신의 동굴에 모인 고귀한 자들이 당나귀를 숭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므로, 이들이 찬양하고 있는 것이 위버멘쉬인지 모르고 있다.

 

그는 우리가 해야 할 부조리와의 다툼을 대신하고 있는, 우리가 져야 할 부담을 지는 존재다.

그는 우리의 종의 모습으로, 우리의 미숙함을 견디며 거부하지 않는다.

그를 따르는 신자들이 이 신에게 부담을 가할 뿐이다.

당나귀가 "예-"하고 대답했다.

 

그는 세상을 긍정할 뿐,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자신의 세상과 삶을 찬양한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영악한 행동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때문이다.

당나귀가 "예-"하고 대답했다.

 

그는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살려고 하며,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자신 만의 생각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그가 잘 듣는 존재라고 믿는다.

당나귀가 "예-"하고 대답했다.

 

그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으면서, 부정하지 않고 긍정하는 것은 얼마나 깊은 지혜인가!

그리고 그는 어리석은 세상을 두고서 탓하지 않는다.

자신의 어리석음에 따라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나귀가 "예-"하고 대답했다.

 

그는 곧은 길이든 굽은 길이든 나아간다.

남들이 무어라 하든 신경쓰지 않는다.

사회적 가치인 선악을 넘어선 곳에 그의 왕국이 있다.

무엇이 죄인지 모르는 것이 그의 순수함을 드러낸다.

당나귀가 "예-"하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자가 거지든 왕이든 함부로 내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아이들이 다가오게 하며, 나쁜 사람들이 그를 꾀려고 해도 그들에게 "예-"라고 말하며 나아간다.

당나귀가 "예-"하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본능을 숨기지 않으며, 올바른 이해를 즐긴다.

그리고 어떤 것을 역겨워하며 기피하지도 않는다.

대화가 필요할 때에는 그를 괴롭히는 자들도 반가운 존재로 여기며 품는다.

이 속에 신의 지혜가 담겨 있다.

당나귀가 "예-"하고 대답했다.

 

추앙받는 당나귀

사람들이 묘사하는 당나귀의 특징은 차라투스트라가 이제껏 가르친 것과 비슷하다.


생각해볼 거리들

 

차라투스트라는 왜 손님들에 대해서 약간의 반감과 조소를 느끼나?

ㅡ정확하지는 않으나, 그림자가 말한 사막의 딸에 대한 이야기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와 그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로, 진지한 이야기다.

ㅡ하지만 사람들은 그림자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이 진지한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는 듯이 소란스러워진다.

ㅡ이에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과 자신이 다른 성향의 사람이라고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손님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며, 회복의 조짐이라고 여겼나?

ㅡ차라투스트라의 손님들은 본래 절망 속에서 고통받고 있던 상태였다.

ㅡ그러던 중에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에서 즐거워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절망을 어느정도 걷어냈다고 볼 수 있다.

ㅡ이런 점에서 회복의 조짐을 판단한 듯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저들의 웃음이 자신에게서 배운 웃음이 아니라고 하는가?

ㅡ사람들은 차라투스트라와 함께 하면서 절망을 잊고 즐거워하며 웃기는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고, 올바름을 향해 나아가는 성숙한 존재로서의 웃음이 아니다.

ㅡ이들의 웃음은 고충을 지닌 자들이 한데 모여서 소회를 풀면서 나타나는 즐거움과 웃음인 것이다.

ㅡ따라서 차라투스트라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저들이 늙은이들이라고 하며 저들의 방식대로 회복하고 웃는 것이 상관없다고 하나?

ㅡ손님들은 나이가 든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만의 회복법과 웃는 조건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ㅡ그렇기에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문제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에게는 오늘이 승리의 날인가?

ㅡ오늘의 경우, 사회적 규율/부조리를 벗어난 자들이 모여서 함께 회포를 풀었다.

ㅡ이러한 기회가 생기는 것 자체가 앞으로도 부조리와 그릇된 이해를 벗어난 모임/집단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

ㅡ그래서 진정한 승리는 아니더라도 이상적 미래의 가능성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승리로 취급했다고 할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이 하루를 고약하고 무겁게 시작했다고 하는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차라투스트라, 4권 2장」에서 절망을 예언하던 예언자를 만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ㅡ이때, 차라투스트라는 예언자가 자신의 현재 상황에서 절망을 야기할까 걱정하다가 안정을 취하게 된다.

ㅡ그 후 고귀한 자의 비명을 듣고서 그를 돕기 위해서 나아간다.

 

ㅡ이 상황이 고약하고 무겁게 시작했는지는 공감하기는 어렵지만, 살펴본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예언자를 마주하면서 식겁하기도 하고, 곤궁에 처한 자가 있다는 생각에 다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ㅡ이를 두고서 고약하고 무겁게 시작했다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

 

저녁이 찾아온 것은 어떤 의미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오전 중에 자신이 겪은 일을 고약하고 무겁다고 평가했다.

ㅡ반면 저녁이 되면서, 차라투스트라는 부조리를 피해 온 손님들과 어울리며 나름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ㅡ그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에게 지금의 저녁은 나름의 만족스러운 시간이고, 따라서 저녁은 충만함이 있는 저녁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ㅡ그런 점에서 하늘이 자줏빛 저녁을 주시한다는 것과 세상이 그 속에 누웠다는 것은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는 것을 보여주며, 만족스러움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의 곁에 사는 것은 이미 보람되는가?

ㅡ차라투스트라의 손님들이 저마다의 목적을 이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절망을 잊고 한데 모여 소회를 나눌 수 있으니, 나름의 만족을 얻었을 것이라고 본 듯하다.

 

저들이 물었다는 미끼는 무얼 말하나?

ㅡ여기서 미끼는 「차라투스트라, 4권 1장」에서 나오는 꿀인데, 이 꿀은 올바른 이해를 말한다.

ㅡ이 꿀이 미끼로서 사람을 꾀어낸다.

    "내 짐승들이여,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내가 역청 운운한 것은 실은 심통을 부려 본 것이었다.

     내게 일어난 일은 익어가는 과일 모두에게도 일어난다.

     내 피를 더욱 짙게 하고 내 영혼을 더욱 고요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바로 내 혈관 속을 흐르는 이다."

        (중략)

     열려라!

     그리고 너의 물고기와 반짝거리는 게들을 내게 던져라!

     오늘 내 최상의 미끼로 최고로 진기한 사람-물고기를 꾀어내고 있으니!!

ㅡ즉 올바른 이해를 세상에 퍼뜨리니 사람들이 자신을 찾았고, 이를 통해 효과를 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저들에게서 중력의 정신이 물러나고 있다고 하나?

ㅡ중력의 정신은 부조리와 그릇된 이해를 통해서 현재 모인 손님들에게 혐오감을 제공하던 것이다.

ㅡ그런데 차라투스트라와 함께 하면서 이 사람들은 혐오감을 잊고서 즐거워하고 있다.

ㅡ이는 이 손님들이 중력의 정신, 부조리와 그릇된 이해의 여파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로 해석해볼 수 있다.

 

사내들의 음식과 즙과 힘이 넘치는 잠언은 무엇을 말하나? 푸성귀로 대접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사내들의 음식은 빵이 아닌 양고기를 먹게 한 것으로, 이는 종교적 관점을 벗어나게 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ㅡ즉 이제까지의 순종적이던 관점을 벗어나게 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걸로 보인다.

 

ㅡ힘이 넘치는 잠언의 경우, 「차라투스트라, 4권 13장」에서 나눈 이야기를 언급하는 걸로 보인다.

 

ㅡ푸성귀의 경우, 실제로 영양가는 없지만 배나 불리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언급이 되는 듯하다.

ㅡ여기서 배가 부르게 한다는 것은 올바른 인식을 제공하여 만족하게 한다는 것인데, 푸성귀는 헛배가 부르게 하는 것이므로, 그릇된 인식을 제공하여 만족하게 한다는 뉘앙스로 해석할 수 있다.

ㅡ왜냐면 그릇된 인식은 만족감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푸성귀를 통해서 자신이 사람들에게 그릇된 이해를 전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전사의 음식과 정복자의 음식을 통해서 사람들은 새로운 욕망을 일으키나?

ㅡ차라투스트라가 대접한 음식은 앞으로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다.

ㅡ즉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사유하면서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 노력하며 사는 것을 알려준 것인데, 이러한 지침을 통해서 사람들은 삶에 대한 방향성과 희망을 보게 된다.

ㅡ그리고 지침에 따라서 살아야 겠다는 욕망을 가지게 되는데, 이는 희망을 느꼈기에 그렇다고 생각해봄직하다.

ㅡ즉 사람들은 삶에 대한 희망과 방향성을 얻은 것이다.

 

ㅡ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저들에게 희망이 깃들고 심장이 기지개를 켠다고 말한다.

ㅡ심장이 기지개를 켠다는 것은 열의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들은 왜 새로운 말을 찾아내고, 정신은 분방함을 호흡하나?

ㅡ차라투스트라의 지침을 통해서 방향성을 가진 이들은 올바른 것을 향해 나아가려고 하게 될 것이다.

ㅡ이 과정에서 기존의 가치와 규율이 아니라 새롭고 올바른 가치와 규율을 찾아내게 될 텐데, 이를 새로운 말을 찾아낸다고 표현한 것이다.

 

ㅡ올바름을 향해 나아가게 되면서, 정신은 사회적 규율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고 사유하게 된다.

ㅡ이를 자유분방함을 호흡한다고 말하는 걸로 보인다.

 

왜 그런 음식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며, 늙은 여자나 젊은 여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나? 그런 음식은 무엇을 말하나?

ㅡ여기서 말하는 음식은 전사의 음식, 정복자의 음식인데, 이는 사내를 위한 것이다.

 

ㅡ이것이 아이와 여자를 위한 것이 아닌 이유는 남자의 성향 때문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차라투스트라, 1권 18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내는 싸움을 위해서, 여자는 전사의 휴식을 위해서 양육되어야 한다.

     그 외의 것은 전부 어리석은 짓이다.

        (중략)

     여자는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그 어떤 세계의 덕들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보

     석처럼, 순수하고 섬세한 놀잇감이어야 한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여자의 성향이 포용적이며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점을 바탕으로, 올바름을 인식하고 그릇됨과 다투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ㅡ그러면서 남자들에게 올바름을 추구하며 다투는 일을 맡기고, 여자들에게는 이런 남자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라고 말한다.

ㅡ즉 능력에 따라 지향해야 하는 것을 분리한 것이다.

 

ㅡ이처럼 지향할 것이 다르니, 남자와 여자는 자신들을 관리하는 방법이 다르다고 할 수 있고, 이를 음식으로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구역질이 물러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차라투스트라의 영역에서 왜 저들은 안전해지나? 어리석은 수치심이 사라진다는 것과 자신의 짐을 털어버린다는 건 뭘 말하나?

ㅡ구역질은 부조리와 그릇된 이해에 따라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ㅡ손님들은 차라투스트라의 곁에 있으면서 부조리나 그릇된 이해를 접하지 않으며, 되려 차라투스트라의 곁에서 위로 받고 방향성을 다잡게 되므로, 부조리와 그릇된 이해에 따른 역겨움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ㅡ차라투스트라의 영역은 부조리와 그릇된 이해가 접하지 못하는 영역이다.

ㅡ이에 따라서 손님들은 부조리와 그릇된 이해에 따른 위협을 받지 않게 된다.

 

ㅡ어리석은 수치심의 경우, 부조리와 그릇된 이해에 따른 수치심을 말한다.

ㅡ마찬가지로 차라투스트라가 허용하지 않는 수치심이다.

 

ㅡ자신의 짐을 털어버린다는 것의 경우, 차라투스트라가 손님들이 짊어질 짐과 그러지 않은 짐을 분별해주기에 나타나는 표현이다.

 

좋은 시간이 왜 저들에게 되돌아오고, 저들은 축하하면서 되새김질한다고 하나?

ㅡ여기서 말하는 좋은 시간은 차라투스트라와 함께 보낸 시간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손님들은 차라투스트라와 함께 하면서 부조리와 그릇된 이해를 벗어나는 경험을 하고, 차라투스트라로부터 살아갈 방향을 전수받게 된다.

ㅡ이로써 이들은 지금 차라투스트라와 누렸던 상황을 다시금 만들 수 있게 될 것이다.

ㅡ그러면 저들은 반복적으로 지금의 좋은 순간을 누리게 된다.

 

왜 저들은 머지않아 축제를 생각하고, 지난 날의 기쁨을 기릴 기념비를 세우나?

ㅡ차라투스트라와 보낸 하루로 인하여, 그들은 절망을 벗어나 희망을 느끼게 되었다.

ㅡ이로써 저들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건강한 자로 거듭나게 될 수 있다.

ㅡ그러면 이들은 미래를 위해서 올바른 이해를 선사하려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데, 이는 「차라투스트라, 1권 21장」에서 말하는 축제를 여는 존재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그대들에게 완성을 가져오는 죽음, 살아있는 자에게 자극이 되고 서약

     이 될 죽음을 보여주겠다."

 

     완성을 가져오는 자는, 희망하는 자와 서약하는 자에 둘러싸여 승리에 찬 죽

     음을 맞는다.

 

     이렇게 죽는 법을 사람들은 배워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죽어가는 자가 살아있는 자들의 서약을 축성하는 자리가 아니

     라면, 어떤 축제도 열려서는 안 된다!

ㅡ이러한 이유로 저들은 건강을 되찾는 자라고 표현된다.

 

ㅡ또 이 과정에서 차라투스트라와의 경험이 후에 다시금 떠올리고 싶은 기념비적인 일로 기억되어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

ㅡ그래서 지난 날의 기쁨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운다고 표현한다.

 

사람들이 경건해져서 기도를 하는 것은 왜 놀랄 일인가?

ㅡ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에 따르면, 무언가를 따르지 말고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하며 살아야 하는데, 기도하는 것은 스스로 사유하지도 판단하지도 않는다는 이야기이기에, 차라투스트라에게는 뒤통수를 맞는 일처럼 여겨져 놀랄 수 있다.

 

왜 나귀를 경배하나?

ㅡ나귀를 경배하는 이유는 여러가지로 언급되는데, 간단히 말하면, 나귀의 특징이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고귀한 자의 특징과 비슷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ㅡ우선 나귀는 손님들의 짐을 짊어지는데, 이는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이 해야 할 부조리와의 다툼을 대신해주고 있다.

ㅡ그런 점에서 짐을 짊어진다고 표현하는 듯하다.

 

ㅡ또 차라투스트라는 미래 인류를 위해서 행동하는데, 이는 미래 인류에 대한 종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ㅡ그리고 이런 미래 인류를 위해서 인내하고, 이를 위해서 적극 행동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를 “진심으로 인내하고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표현할 수 있다.

ㅡ또 차라투스트라에게 사람들은 부조리에 따른 그릇된 행동을 할 수 있는데,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이 그럴 수 있다고 여기며, 이해하고 사랑하려고 한다.

ㅡ이런 점은 사람들이 매질을 해도 참고 견디는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가 말을 하지 않는 것과 관련해서는 삶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는 곧 차라투스트라가 세상을 그만큼 긍정하고 있다는 이야기이자 사랑하고 있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이를 “세상에 대해 늘 그렇다고 말하며 기린다”고 표현하고 있다.

 

ㅡ또 말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처세술의 일종으로서도 볼 수 있는데, 「차라투스트라, 3권 6장」에서 나타났다시피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침묵할 수 있다.

     내 침묵이 침묵을 통해서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는 법을 배웠다는 것.

     이것이 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악의이자 기술이다.

 

ㅡ나귀가 눈에 띄지 않게 세상을 누빈다고 하는데, 이는 차라투스트라가 「차라투스트라, 2권 21장」에서 언급한 처세술과 관련된다.

     나 또한 변장을 한 채 그대들 사이에 앉아 있고자 한다.

     나 스스로 그대들과 나를 구분할 수 없도록.

     바로 이것이 내 마지막 인간적-영리함이다.

 

ㅡ또 나귀라는 신은 이상적이지 못한 세상에 분노하기보다는 자신과 닮았음에 포용하고 사랑하려고 한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 1권 17장」에서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모습과 같다.

     그대는 말해야 한다.

        "어찌 너희가 나를 정의롭게 대하겠는가!

         나는 너희의 불의를 내 몫으로 선택하는 바다."

 

     저들은 홀로 있는 자에게 불의와 오물을 던져댄다.

     하지만 내 형제여, 그렇다고 저들을 덜 비추어서는 안 된다.

     그대가 하나의 별이기를 원한다면!

 

ㅡ또한 나귀는 곧은 길이든 굽은 길이든 잘 나아가는데, 이는 영원 속에서 나아가는 차라투스트라의 모습과 같다.

 

ㅡ또한 나귀의 왕국은 선악의 저편에 있다고 하는데, 차라투스트라 역시 선악의 관념에서 벗어나 나아가는 존재다; 「차라투스트라, 4권 6장」

     오, 차라투스트라여,

     그대는 그토록 신앙이 없으면서도 그대의 생각보다 한층 더 경건하다!

     그대 안에 어떤 신이 있어 그대를 그대의 무신앙으로 이끌었구나.

 

     그대로 하여금 어떤 신도 더는 믿지 못하게 한 것,

     그것은 그대의 경건성 자체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대의 너무도 큰 정직함은 그대를 또한 선악의 저편으로 데려갈 것

     이다!

ㅡ이렇게 선악의 너머로 나아감으로써, 죄를 구분 짓는 것에 대해서 무의미하게 느끼는데, 이는 차라투스트라가 바라는 순수함이다.

ㅡ그렇다고 차라투스트라가 죄를 없애는 것은 아니고, 매 순간 맥락 속에서 죄를 찾기를 바란다.

 

ㅡ나귀가 암나귀를 좋아하는 것은 순결을 강조하지 않는 모습을 말하며, 무화과 열매를 좋아하는 것은 올바른 이해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 2권 1장」

     무화과 열매들이 나무에서 떨어진다.

     잘 익어 달콤하다.

     열매들이 떨어지면서 그 붉은 껍질이 터진다.

     나는 잘 익은 무화과 열매들에 불어닥치는 북풍이다.

 

     내 벗들이여, 무화과 열매가 떨어지듯 내 가르침도 그대들에게 떨어진다.

     이제 그 즙과 달콤한 살을 들도록 하라!

     사방이 온통 가을이고 하늘은 청명하며 때는 오후다.

ㅡ여기서 언급되듯이, 무화과는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과 같고, 이는 올바른 이해를 말하므로, 나귀가 무화과를 좋아하는 것은 올바른 이해를 좋아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ㅡ식성이 까다롭지 않다는 것, 엉겅퀴조차도 좋다고 하는 것은 친구와 적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는데, 엉겅퀴는 가시를 지닌 것으로 찌르는 존재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ㅡ찌른다는 것은 공격한다는 것, 적을 의미하게끔 나아갈 수 있다.

ㅡ이에 따라 식성은 인간관계에 대해서 기피하는 것이 잘 없다는 뉘앙스, 친구가 아닌 적이더라도 성숙함에 이를 수 있다면, 좋다고 여기는 차라투스트라의 모습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 1권 14장」

        "최소한 내 적이라도 되어다오!"

     우애를 청할 용기가 없는 참된 외경은 이렇게 말한다.

 

     벗을 원한다면, 그 벗을 위해 전쟁마저 벌이겠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그리고 전쟁을 벌이기 위해서는 적이 될 줄도 알아야 한다.

ㅡ이 구절을 통해서 보면, 친구가 가장 좋지만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적이라도 되어달라고 하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장을 볼 수 있다.

 

ㅡ이러한 점들로 볼 때, 나귀가 신으로서 추앙 받는 것은 차라투스트라가 언급한 특징을 지녀서 그런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